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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학설을 검토하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재조명하는 글
    대한 제국에 대한 인식과 재평가??대학교 박사수료 ???Ⅰ. 서언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우기 전부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부르며 자연스럽게 의자왕하면 삼천궁녀를 떠올린다. 하지만 한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가사가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조신 시대의 문인들이 백제의 멸망을 노래할 때 단지 ‘많다’는 의미로 삼천 명이라 언급한 것인데, 이것이 노래 가사로 사용되면서 고착화된 것이다. 그래서 ‘의자왕’은 여성에게 인기가 많거나, 동시에 많은 여성을 만나는 남성을 빗대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의자왕은 신라가 당에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하게 할 정도로 신라를 강하게 압박하였다. 하지만 망국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에 현재까지도 여자에 빠져 나라를 망친 임금으로 오인된다.의자왕만큼, 아니 의자왕보다 더 비난받는 임금으로 고종이 있다. 1970년대 이른바 광무개혁 논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한 제국과 고종은 별다른 개혁을 이루지 못한 채 일제의 침탈에 무방비로 당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나아가 무능한 대한 제국 대신에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대한 제국은 망국의 역사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엄연한 역사적 실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한말’ 혹은 ‘한말’이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불리며 본격적인 연구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한 제국을 다룬 박사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연구 성과도 충분하지 않으며 광무개혁과 대한 제국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광무개혁 및 대한 제국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우리나라의 근대사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성격을 규정짓는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를 위해 논쟁의 초점은 무엇이며, 고종의 정치 이념과 대한 제국의 개혁과 좌절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대한 제국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대한 제국의 성격과 아울러 한국 근대사팽히 맞서고 있다. 절박한 국권의 위기상황이었던 대한 제국기에 황제권 강화로 전권을 틀어쥐고도 정작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책임을 지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 제국은 황제전제체제 때문에 망했던 것인가.근래의 정치외교사 연구들은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대한 제국 선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고종 황제가 국권수호라는 대의명분을 장악하였고, 실제로도 을사조약 이후 의병항쟁을 유도하는 밀지를 내리거나, 국제열강을 향한 밀사 파견 외교 등을 통해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황제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근대화 개혁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논자들이 긍정적 평가를 유보하지만, 국가재정을 좀먹고 낭비한데 불과했으며 의미 있는 경제성장은 일제강점기에 가서야 가능했다는 일부 경제사학자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개명군주로서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을 인정한다고 해서 고종을 선양하거나 무조건 복권시키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극심한 외압하에서 민권운동세력의 미숙으로 봉건 권력의 중추였던 전제군주가 다시 근대화의 주체로 등장해야만 했던 한국 근대사의 특수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대한 제국 말기의 역사가 고종 한 사람의 각성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영웅사관이요, 망국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묻거나 매관매직, 부패?사치 등 도덕성의 문제로 고종을 평가하는 것은 중세적 포폄 위주 역사학을 극복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한다.고종의 황제권은 구래의 양반관료, 재야유생층, 독립협회로 대표되는 민권운동세력, 민중세력 등 여타의 사회세력과의 길항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고종과 대한 제국의 실패만을 강조하는 것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된다.또한 고종에 대한 논의는 그의 성장배경과 가족사, 심성적 특성을 두루 망라한 개인 연구와 500년 전래의 왕정을 계승한 황제로서의 제도적 권력에 대한 분 고종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었다.고종은 이미 갑오개혁기에도 군주권이 제한된 경험이 있었다. 대한 제국기에 들어와 시세의 변화를 받아들여 민의를 수렴하는 경로를 제도적으로 용인하긴 했으나, 군주권의 약화와 축소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정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권력집착에 상당히 예민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특히 박영효, 유길준, 조희연, 우범선 등의 개화파 정치인들은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화군을 추대하여 권력을 찬탈하려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왕궁은 망명자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원인모를 폭발사건으로 늘 뒤숭숭하였다.때문에 고종은 초기 입헌군주제로까지 평가될 수 있는 민선의관제도를 허락할 정도로 개방적 정치의식을 보였지만, 왕권을 둘러싼 위기의식 속에서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모와 쿠데타의 원인을 국가의 근본이 충실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다. 국왕의 입장에서 국가의 근본은 유교적 교의를 드높임으로써 튼튼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하는 통치 질서를 정립해 나갈 때 국왕권이 공고해지는 것은 물론, 국권도 강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고종을 둘러싼 집권층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황제권 구축을 목표로 한 강경한 방침은 고종이 가까스로 수용했던 민선의관제도를 폐지하고, 민권확대를 도모하던 독립협회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종은 민권의 향상을 통해 황제권 강화를 도모하려던 태도에서, 민권의 억압 위에 황제권 강화와 국권을 구축하고자 하는 의식을 부각시켜 나갔다.고종이 만세불변의 전제군주권이 명시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여 반포한 것은 독립협회해산에 이어 강경한 방법을 통한 군주권 강화방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종은 법률 규정을 통해 황제권의 신성불가침과 육?해군의 통솔,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등의 전제군주권을 보장하였다. 이는 국왕의 권한을 굳이로 인해 황제의 의사가 일사분란하고도 신속하게 전달되기 어려운 기구였다. 의정부를 약화시키고 국왕 직속의 특설 기구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는 양상은 1880년대 초반 개화 정책을 의정부가 아닌 통리기무아문 계통의 기구를 통해 추진한 것, 갑신정변 이후에도 통리아문을 계승하여 궐내에 설치한 내무부 산하에 전운국, 기무국, 광무국, 종목국(種牧局), 전보국, 육영공원, 연무공원 등을 소속시켜 개화를 추진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모습이었다.식산흥업정책의 추진세력은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궁내관들이었다. 이용익은 오랫동안 궁내부 내장원경을 역임하면서 모든 사업을 주관하였고, 그를 지지한 세력은 대부분 전문적인 기술의 소유자이거나 근대 교육을 이수한 인물로 개혁의 실무를 뒷받침하였다. 1880년대 개화정책의 추진세력이 일부 선각자적인 개화파 인사로 국한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광무 연간의 개혁 추진 세력은 그 저변이 확대된 것이다. 더구나 정부 대신들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을 만큼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이용익의 독보적인 위치와 의정부와 대등하게 혹은 우위에 서서 지방관에게도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궁내부의 위상으로 개혁은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었다.이처럼 광무개혁은 개화파가 그 대외 의존성으로 인해 국내지지 기반을 상실한 이후, 봉건 권력의 중추인 군주가 근대화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는 한국 근대로의 이행과정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었다.토지를 실측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는 사업은 광무개혁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한 제국은 토지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 7월 양전(量田)을 담당할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우선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1901년 10월에는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여 토지소유권을 공인해주는 관계(官契)를 발급하였다.대한 제국의 양전사업이 이전의 양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조사대상을 농지에 국한하지 않고 전체 토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토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국가의 관리권 확립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국가경기구로 설치된 이후 1907년 일제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전기간의 지출을 종합하면 이처럼 용도가 밝혀지지 않은 내입금의 비율이 전체 지출의 37.8%에 달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896년에는 내입금이 고작 1천 냥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7년에는 약 3만 냥이 되어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약 30%나 되었다. 이후 1900년까지 해마다 평균 3만 5천 냥이 내입금으로 지출되었고, 내입금이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0%수준에서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하지만 1901년부터는 전체 지출규모의 급증과 함께 내입금도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1901년에는 내입금이 72만 냥이나 되었고, 1902년에 67만 냥, 1903년에 약 17만 냥으로 점차 감소하다가 1904년에는 무려 1천만 냥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내입금 액수의 증감에 따라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901년 80%, 1902년 43%, 1903년 16%로 감소하였지만 1904년에는 다시 47%로 상승하였다.내입금은 주로 내하(內下: 임금의 하사)에 사용되었던 것을 보인다. 황성신문에는 황제의 내하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다. 예컨대 1900년 인공양잠회사(人工養蠶會社)의 자본금 2천원 중에서 1천원, 1901년 천일은행에 자본금으로 4만원, 혜민원(惠民院: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구호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 진휼비로 2만원을 내하하였고, 1902년에는 승동에서 유동으로 이사한 정선여학교에 교비로 당오전 1만 냥을 내하하였으며, 1903년에는 흉년이 들어 쌀이 부족하자 내탕미 수만 석을 풀었다는 기록 등이 발견된다. 이밖에도 1900년에 명동 한성병원이 내탕금을 받은 데 대한 감사 광고를 낸 적도 있다. 단적인 사례이지만, 이를 통해 내입금이 각종 회사의 자본금이나 운영자금, 학교와 병원 등에 대한 보조금, 진휼이나 행사비 등 정부 재정에서 지출하기 어려운 부문에 쓰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901~1904년 내장원 지출출전:會計冊(奎19113)한국을 사이에 두고다.
    인문/어학| 2018.02.28| 23페이지| 5,000원| 조회(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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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리엄 듀이커 저, <호치민 평전> 서평
    【서평】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옮김《호치민 평전》푸른숲, 2003, 972면박사과정 000호치민은 그의 이름을 딴 도시와 도로가 있을 정도로 베트남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용어로 포장되어 불리지 않는다. 대다수의 베트남인은 그를 ‘Bac Ho’라 부른다. 'Bac'은 집안의 일을 의논하는 큰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집안의 갈등을 중재하고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존재를 지칭한다. 호치민은 국내에서도 공산권의 지도자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전기물에 다수 등장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호치민에 대한 이러한 친근한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는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평전 부분에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방대한 문헌 자료와 구술 자료를 집대성하여 책을 저술한 저자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 생각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20여 년 동안 저자가 미국은 물론이고, 베트남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자료를 수집한 결과이다. 그가 호치민을 한 가족처럼 여기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말은 호치민에 대한 오랜 연구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이 책은 ‘호치민을 중심으로 서술한 베트남의 근현대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호치민의 생애는 물론이고, 당시 베트남의 역사를 면밀히 다루었다. 자연스럽게 호치민의 생애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자는 역자 후기에서 ‘안경을 쓴 미국인 노학자의 모습과 마주친다’라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이 책에 베트남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미국인의 관점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고 밝혔다.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역자의 기우에 불과하다. 저자는 자료의 교차 검토에 의거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 책을 서술하여 호치민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호치민이 다양한 필명으로 신문, 팸플릿, 책 등의 형태로 출간한 원고를 발굴하여 제시함으로써, 호치민이 가진 생각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노력한 점이 인상적이다. 나아가 저자는 호치민을 둘러싼 인물부터 당대의 평범한 일반인이 남긴 글까지 발굴하여 이를 적절히 제시하였다.또한 저자는 자료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만 남긴 채, 이에 대한 해석의 상당 부분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한 사건을 둘러싼 학계의 새로운 견해도 소개함으로써, 독자가 호치민의 생애와 베트남의 근현대사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는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였다.저자는 호치민의 삶을 15개의 범위로 구분하여 책의 장을 구성하였으며, 각 장에는 호치민의 활동과 베트남의 당대 상황을 표현하는 짧은 제목을 붙였다. ‘견습 혁명가’(3장), ‘광야로’(7장) 등과 같이 호치민 그 자체 혹은 호치민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제목과, ‘격동의 8월’(10장), ‘디엔 비엔 푸’(13장)와 같이 베트남의 역사적 사건을 표현한 제목이 적절히 섞여 있다. 저자는 호치민의 출생 이후 40대까지를 다룬 1장부터 8장까지는 호치민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어 제목을 붙였으며, 50대부터 1969년 사망할 때까지는 베트남의 당대의 상황에 걸맞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호치민이 레닌, 스탈린, 마오 쩌둥과 같은 개인 지배를 내세우기보다 집단 지도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호치민은 1945년 9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수립된 직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주석을 역임했지만, 정책 수립의 자문 역할과 외교를 담당했을 뿐 정책 결정과 실행은 주로 동료들에게 맡겼다. 따라서 호치민 생애의 후반부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호치민 개인보다는 베트남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각 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장 ‘빼앗긴 들에서’는 베트남의 전근대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호치민의 아버지 응우옌 신 삭의 생애에 따른 호치민의 성장과정을 소개하였다. 호치민은 국학에서 퇴학당한 이후, 1911년 베트남을 떠나 선원으로 근무하면서 약 2년간 세계 곳곳을 여행하였다. 2장 ‘성난 말’에서는 호치민이 1911년부터 1923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면서 공산주의를 접하고 잡지 창간 및 프랑스 공산당 대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베트남의 상황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3장은 ‘견습 혁명가’란 제목으로 호치민이 판쩌우찐의 그늘에서 벗어나 레닌의 사상을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간 내용을 서술하였다. 호치민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학교에 다니며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하였으며, 코민테른 5차 대회에서 식민지 상황을 호소하였다. 4장 ‘용의 아들’에서는 호치민이 1924년 말에 중국 광저우로 와서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하고 ‘베트남 혁명을 위한 특별정치연구소’의 교사로 활동한 일을 소개하였다. 이 때 호치민은 “혁명의 길”과 같은 베트남 혁명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5장은 ‘마법의 검’이라는 제목으로 1930년 2월에 호치민이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한 사건을 주로 다루었다. 6장은 호치민이 통킹 만에 인접한 응에 안과 하틴에서 1930년~1931년에 걸쳐 일어난 봉기를 소재로 1931년 초에 작성한 ‘붉은 응에 틴’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응에 안-하틴’ 봉기와 관련된 호치민의 행적이 나타나있다. 7장은 ‘광야로’란 제목 하에서 호치민이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게 체포를 당한 이후 겪은 고초와 당 지도권을 박탈당한 일을 서술하였다. 8장은 호치민이 ‘팍보의 동굴’에 머물면서 베트남 독립 동맹을 결성한 사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9장은 ‘불어오른 강물’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일제의 패망이 다가옴에 따라 베트남 독립의 시기를 기다리면서 호치민과 그의 동료가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서술하였다. 주지하듯이 일제는 1945년 8월에 패망하였으며, 호치민은 1945년 9월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 등 열강과의 대립이 지속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저자는 10장부터 15장까지 이 주제를 다루었다.현재까지 호치민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가 제기되고 있다. ‘베트남 독립에 헌신한 성자’에서부터 ‘원칙이 없는 기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가 베트남뿐만 아니라 피억압 민족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호치민에게 공산주의는 베트남의 독립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라 강조한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응우옌 왕조의 황제까지 포용하려 한 인물이었다. 호치민은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 베트남의 국가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가인 ‘마르세예즈’도 불러야 한다고 고집했으며,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황제 폐하’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의 평화적 독립을 위해 그가 보여준 모습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가 보기에 호치민은 당의 지도권뿐만 아니라 여자 친구까지 동료에게 빼앗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인물이다.
    독후감/창작| 2015.10.28| 3페이지| 1,000원| 조회(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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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대학원1. 혁명기 문헌소책자(pamphlet))를 통해 미국 혁명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저술이 나타났다. 혁명세대는 소책자가 전달 매체로서 지니는 특별한 장점을 알고 있었다.소책자의 가장 큰 이점은 규모의 유연성이었을 것이다. 소책자는 겨우 몇 쪽밖에 되지 않아 짧은 풍자문과 날카롭고 재빠른 반박문을 출판하는데 이용할 수 있었던 반면에, 훨씬 더 길고 더욱 진지하며 영속성 있는 글도 실을 수 있었다. 특히 열 쪽에서 쉰 쪽에 이르는 범위 안에서 4절판이나 8절판 규모로 인쇄한 5,000 내지 25,000 단어짜리의 중간 길이의 소책자가 혁명기 저술가들의 필요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 가지 주장을 충분히 개진할만큼 지면에 여유가 있었고, 18세기 문학형태에 자주 등장하는 정교한 복합구문을 쓸 만한 융통성이 있었으며, 설교문을 간행할 수 있을 정도로 품격이 있었고, 정부문서와 신문기사 발췌자료와 서한문집을 옮겨 실을 수 있을 만큼 편리했다.소책자는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대다수는 당시의 중요한 사건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었다. 인지법(1765), 타운전드법(1767), 보스턴 학살사건(1770), 보스턴 다과회사건(1773), 강압제법(1774), 제1차 대륙회의(1774)와 같은 사건 직후에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를 논하는 소책자가 쏟아져 나왔다.소책자는 또한 일종의 개인간의 연쇄적 논쟁에서 생겨나는 산물이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의 아메리카 주교구 설치문제, 2페니법 등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소책자가 연달아 발행되었던 것이다.세 번째 부류의 소책자는 주제와 언어에서 나타나는 제의적(祭儀的) 성격이 특징이었다. 혁명기에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가지 기념 연설문이 소책자의 형태로 주기적으로, 대개 매년 출판되어 혁명기 문헌이 상당히 불어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뉴잉글런드에서 선거가 있는 날에 읽은 설교문, 그리고 공식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거나 금식을 행하는 날에 읽은 설교문, 또한 해마다 돌아오는 선거일 그런 노력이 특히 집중되었던 단계가 셋이 있었으니, 첫 단계에서는 1776년을 포함하여 그 때까지 이르는 시기에 영국과 미국 사이의 분쟁에 관한 논의가 중심이 되었고, 두 번째에서는 주로 1776년에서 1780년까지의 시기에 방가에서 처음으로 정부를 조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에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방가 헌법을 재검토하고 중앙 정부를 재조직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모든 단계에서 정체 이론의 골격에서뿐 아니라 그에게 인접한 사회사상 영역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도 독립 이전의 첫째 시기만큼 풍부한 창조력이 없었고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성과도 없었다. 그 뒤에 나타난 것은 모두 첫 번째 시기의 성과를 전제로 삼아 그 위에 쌓아 올린 것이었다.독립 이전에 간행된 소책자에는 이 창조적 노력이 가장 충실하게 표현된 것 같다. 다른 표현 수단이 있었으나, 그 시기에 대해 논의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은 모두 소책자 형태로 나타났고, 원판이 다른 형태로 나왔더라도 재판은 소책자로 발간되었다. 소책자로 간행된 논설문, 설교문, 연설문, 서한문 이런 모든 것 속에 변혁을 가져온 대논쟁의 기본 요소들이 들어 있다.2. 원천과 전통1763년에서 1776년에 이르는 위기의 시대에 지성사는 정치적 알력이 고조됨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세계 속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 이전에는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그 위치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과정이다.세계와 그 속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관념들은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지만 여전히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763년부터 십 여 년 동안 하나의 포괄적 견해로 통합되었고 독특한 도덕적 ? 지적 호소력을 얻게 되었다. 이 견해가 미국의 대다수 지도자들에게 압도적인 설득력을 가질 만큼 발전하고 그에 입각해서 당대에 사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 이것이 누적된 불만과 더불어 미국 혁명의 기원을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이 특이한 세계관이 사실상 하나의 배전반처럼 어떤 일련리의 저술가와 그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전통은 궁극적으로 뉴잉글런드 청교도 신앙의 정치 ? 사회이론으로부터, 특히 성약) 신학에 연관된 관념으로부터 유래했다. 어떤 의미에서 뉴잉글런드의 청교도 신앙은 혁명 세대의 저술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나 매우 좁고 지방색이 강한 전통이었으니, 그것은 이 신앙이 주로 그 지방에 기원을 두고 있었던 데다가, 혁명기에 이르러 교리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얼마나 강하게 띠었던 간에 그 교리를 따르고자 한 사람들이 원래의 청교도들처럼 여전히 세상을 신학적 견지에서 이해한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모든 관념들이 중요한 사조로 흐르기는 했어도, 그것들이 스스로 하나의 일관성있는 지적 모형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고, 또 그것들이 혁명 정신의 형성에 기여한 모든 요소였던 것도 아니다.상이한 사조들은 이미 언급한 저술가들의 사상과 겹치면서도 본질적 성격이 다르고 결정하는 힘이 색다른 사상을 가진 저술가들의 영향으로 한데 통합되었다. 이 특이한 이데올로기적 조류는 그 궁극적 기원이 영국의 내전 및 공화정 시대의 급진적인 사회 ? 정치 사상에 있었으나 그 확고한 형태는 17세기 말 18세기 초 활약한 일군의 반권위적인 이론가들, 즉 “국민”을 내세우던 정치인과 논객들의 저술 속에서 갖추어졌다.이 계보의 조상이 된 17세기인들 중에서 밀턴은 중요한 인물이다. 헤링턴, 헨리 네빌, 앨저넌 시드니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세기 초의 저술가들 중에서는 존 트렌차드, 토머스 고든, 벤저민 호우들리, 로버트 멀즈워스 자작, 세인트 본 볼링브루크 자작, 리차드 배런, 토머스 홀리스가 중요하다.미국인들에게 영국의 급진파와 반궁정 지도자들이 쓴 글은 유난히 합당하고 적절한 것으로 보였고, 즉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에 대해 식민지인들이 단결해서 저항하는 이유를 밝히려는 사람들은 어디서든지 그런 글에 의지했다. 17세기 급진주의에서 시작된 다음에 18세기 초 영국의 반권위주의 저술가와 정치인들이 발전시키고 응용하면서 넘겨준 전 권력을 균형있게 분해하여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지배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국의 “혼합”정체는 18세기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이를 움직이는 역학은 그렇지 않았다. 세 사회계층이 통치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정체의 균형이 사회 계층과 통치 권력을 적절하게 합치시킨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의견이 일치한 것은, 세 사회계층이 대의제를 통해서든 다른 방법으로든 모두 입법 부서에 진출하고 참여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 행정 기능이 사회의 제일 신분인 국왕의 고유한 책임이라는 점이었다. 행정부에서 행사하는 권한은 군주와 군주의 관리가 향유하는 고유한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대권의 견제에 대해서 대부분의 저술가들은 평민을 배심원으로 임명하기 보다는, 독립된 사법부서가 압력을 가한다는 관념에서 설명을 구했다.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논의 대상을 영국이라는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 여러 사회로 이루어진 제국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식민지인들은 영국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경이로운 권력의 균형을 찬양하는 데, 그리고 꼭같은 원리의 요체가 각 식민지에서 또한 제국 전체에 걸쳐 실제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만족했다.영국 정체에서 사회계층과 통치권력이 이와 같이 균형있는 대응을 이룬 결과, 사회세력과 정치권력은 제한된 특정 영역 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자유라는 관념 자체가 권력 균형의 유지와 얽혀 있었다. 자유란 단순히 권부의 의지나 요구에 따라 설정된 한계가 아니라 비자의적 법률에 따라 설정된 한계 안에서 “자연권”을 행사하는 역량이었던 것이다.자연권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했다. 흔히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타고나는 것이므로 양도할 수 없고 파기할 수 없는 권리이자, 동시에 영국 법률에 들어있는 구체적인 규정이라고 이해했다.식민지인들은 자유란 영국의 법률과 관습에 최소한으로 규정되어 있는 필수적인 자연권을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하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동시에, 영국의 정체에 들어있는 권력의 균형을 제정했을 뿐 아니라, 이 조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미 의심을 사고 있던 세관에 더 큰 권한을 부여했다.자유를 위협하는 음모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기에, 식민지인들은 정체에서 결정적인 부분인 사법부의 독립이 갑자기 맹렬한 공격한 받고 있으며, 1760년대 중엽까지는 여러 곳에서 훼손되었다고 생각했다. 18세기에 사법부의 지위는 정치적 조종에 따라 좌우되었고, 대체로 이 방법을 이용하여 본국 정부가 그 의도를 관철시키고 또 판사의 재직권을 봉급처럼 임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1760년대 초에 이것이 커다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1759년에 펜실베니아 의회가 앞으로 펜실베니아 판사는 명예혁명 후에 영국 판사들이 누렸던 바와 같이 종신 재직권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국왕은 이 법을 기각했다. 1761년 12월에 국왕은 추밀원의 자문을 받아 모든 식민지에 칙령을 보내어, 식민지에서는 어디서나 영원히 판사에게 종신 재직권을 보장하지 않으며, “국왕의 결심”에 따라서만 재임하게 하는 사령장을 발부한다고 선언했다."국왕의 의사"에 따라 판사의 재임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공포가 조성되었다. 이 두려움은 이미 1768년부터 널리 떠돌아 다니던 소문 때문에 더욱 심해졌는데, 그 소문은 내각의 정책 가운데는 "내각을 위해 국왕이 임명한" 식민지 판사들의 봉급을 "주민들의 통제로부터 독립"시킨다는 계획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국왕이 그의 "자의에 따라" 복무하는 사법부에 대해 봉급을 지불한다는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수록, 식민지인들에게는 "내각의 저의가 정체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이라는 점이 더욱더 분명해졌다. 메서츄세츠 의회는 결국 [어떤 판사든 국왕으로부터 봉급을 받는다면, 그는 그럼으로써 불편부당한 재판의 중요성에 대해 적절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신이 정체의 적으로서 메서츄세츠에 전제 정부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려는 마음을 였다.
    인문/어학| 2009.12.04| 12페이지| 2,000원| 조회(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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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의 부활 -비교역사학으로 보는 미국과 로마-
    제국의 부활 -비교역사학으로 보는 미국과 로마-석사과정 2009-Ⅰ. 로마 & 미국, 2000년 차이 쌍생아01. 2000년을 사이에 둔 두 전략가기원전 279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조약을 맺은 이후에 피로스가 다시 로마를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고, 이런 평화 조약은 전세계에 로마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근거를 들어 피로스와의 화친을 반대하였다.1823년 가을, 미국의 전략가 존 퀸시 애덤스만이 영국의 조지 캐닝 외무장관이 미국에 제안한 영미 공동 선언을 반대하였다. 영국 함대만이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의 팽창을 막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영국의 지원이 꼭 필요하긴 하지만 공동 선언이 없다 하더라도 지원을 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프랑스와 스페인이 다시 미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조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특정한 강대국과 느슨하게라도 동맹관계를 맺을 경우 구세계의 끝없는 싸움에 말려들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애덤스는 미국이 독자적인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조언하였는데, 그 결과 '먼로선언'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앞으로 유럽 내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아메리카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침해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또한 아메리카 양 대륙에 유럽 강대국들이 그 이상의 식민지를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823년 당시 먼로선언은 그 영향력이 아니라 그 요구에 의미가 있었다. 먼로선언에는 캐닝이 원한 것처럼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한 앵글로섹슨족의 단결이 아니라 영국까지 포함한 유럽에 대한 미국의 대항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이제 신대륙 전체를 이끌고 구세계에 대항하여 신대륙을 대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와 존 퀸시 애덤스 사이엔 2100년이라는 세월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흡사한 정치적 견해를 보였다. 그들은 국가의 안보를 염려했으며 각각 '이탈리아를 오직 로마 인에게', '아메리카를 오직 미이주민로마인과 미국인 모두 자신들의 섬을 정복했지만 그 일은 아주 다른 전제 하에서 다른 의도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로마의 힘은 위급함에서 탄생했지만 미국의 힘은 과잉과 과다에서 생겨났다. 로마에게는 안보가 우선이었으며, 이탈리아 지배는 아주 서서히 그들의 목적이 되어갔다. 권력에 대한 요구는 권력을 획득하면서 비로소 성장했다.미국인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안보 문제는 적어도 남북전쟁 이후에는 그다지 의미 없는 문제가 되었으며 오히려 반은 의식적으로 또 반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확장을 변명하는 데 이용되었다. 독립하기 전부터 이미 청교도들의 마음속에 있던 확신을 통해 팽창에 대한 욕구는 강해졌다. 미국인에게 사명감이란 이미 처음부터 주어져 있던 것이지 로마인처럼 마지막에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었다. 미국인은 모범으로서든 정치적 선교사로서든 인류 전체가 공화주의를 달성하도록 하는 일을 신이 부여한 의무로 생각하게 되었다.로마인과 미국인 모두는 그들의 신세계를 정복하고 매입하며 영향력을 침투시켜 갔지만, 그것은 다른 조건 하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인들이 관계한 사람들은 대부분 문화적으로 동등한 종족, 라티움 사람들 같은 가까운 동족이나 라티움 사람들 같은 동족이나 삼니움인과 같은 먼 친척이었다.반면에 미국인들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얼마 안 되는 스페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인디언이 전부였다. 미국인은 인디언을 문화적으로 열등한 종족으로 여겨 밀어내고 뿌리를 뽑았다. 로마인과는 달리 미국인들은 새로 획득한 지역에서 그들과 필적할 만한 누군가와 대결할 필요가 없었으며, 미 대륙을 자기 자신으로, 자신의 사람과 이상과 제도로 채워나갈 수 있었다.마지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로마인과 미국인을 구분 짓는 것은 그들이 팽창해 가는 데 있어 국가가 수행한 역할에 있다. 로마는 ‘위’에서부터 성장했고, 미국은 ‘아래’로부터 성장했다. 로마는 전사와 정치가를 필요로 했고, 미국은 개척자와 엔지니어, 사업가와 상인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03. 섬나라 특유의런 의무를 지지 않았다. 마실리아와 사군토, 발칸 서쪽 해안의 여러 그리스 도시들은 로마와 아마키치아로 연결되어 있었다.◎ 미국, 고립주의와 세계주의가 맞서다윌슨은 평화가 “문명화된 세계의 결합된 힘에 의해 보장되지”않는다면 “어떤 세대도” 평화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앟앗으며, 주요 국가들과 독일 소련이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마저 스스로 탈퇴했다. 미국은 우드로 윌슨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윌슨 대통령은 지난 100년간 지속된 고립주의 전통으로부터 전향하려고 했다. 그가 1917년 3월에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시골 주민이 아니다.” 지난 30개월, 즉 세계대전은 “우리를 세계시민으로 만들었다. 되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은 미국이 세계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미국인들은 그들의 섬에 안주하고 싶어 했다. 의회는 대통령이 서구 진영 밖에서 계획했던 모든 것, 즉 국제연맹,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체결, 독일을 피해 보호받으려는 프랑스와의 동맹, 국제사법재판소 참여, 아르메니아에 대한 위임통치 등을 수포로 만들었다.섬으로 정치적인 귀환을 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1918년 이래로 공화당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의회는 민주당원 윌슨과 맞서려 했고, 이러한 개인적인 적의에 더하여 외교 정책에 몰두하느라 국내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대통령의 전략적 미숙함도 이유가 되었다. 미국은 구세계를 구원하지 못했고, 구세계는 여전히 부패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제는 미국이 유럽에서 시선을 돌려 미국 자신을 생각하는 일이 이성적인 일로 보였다.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고립주의를 장려했다. 그럼에도 예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은 최대 채권자가 되었다. 미국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 유럽 경제의 회복을 도와야 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연루되고 다.로마는 처음에는 열의도 없고 별다른 성과도 없이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스키피오에 비교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대표자,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우스가 등장하자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플라미니우스는 전쟁을 치르고 그리스 인을 로마 편으로 끌어들이는 두 가지 일을 다 해낼 수 있었다. 그의 전임자들은 산이 많은 에피루스의 협곡을 통과해 테살리아로 돌격해 가지 못했지만, 그는 해냈다. 그리고 테살리아에서 그는 다음 해(기원전 197년)에 필리포스를 격파했다. 로마 인들의 융통성있는 대형이 마케도니아의 경직된 밀집전투대형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전쟁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전투가 이어지게 된다. 또한 플라미니우스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기원전 198년에 그리스인들을 마케도니아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강령을 실현시켰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마케도니아는 영원히 강대국의 대열에서 제외되었으며, 로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로마는 그리스 전체에 세력을 지니게 되었고, 이제 이 세력을 가지고 어떤 일을 시작할 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원로원은 안티오코스 왕으로 인한 새로운 전쟁의 가능성을 대비하고자,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묶어’놓았던 세 곳의 요새에는 약속했던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플라미니우스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주어야만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코린트와 포카이아, 로크리아, 에우뵈이아, 프티오티의 아카이아, 마그네시아, 테살리아, 페르하이비아에 군대를 주둔하지 않고 조공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유와 자치를 부야한다고 선포했다. 그것은 마케도니아의 감시초소인 세 곳의 요새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마케도니아가 지배했던 모든 도시와 종족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의미였다. 로마인들은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미국,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지원하다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자신이 세력을 점점 확대해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모스크바와 공동의 해결또한 약소국들의 반항적 태도에 대한 대응도 본질적으로 달랐다. 로마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무기를 들고 힘으로 제압했던 반면에 미국은 크게 화를 내면서도 압력과 좋은 말로 동맹을 통솔할 수 있었다.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의 동방 전쟁과 미국의 냉전이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해도 동일한 역사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로마와 미국은 그들 시대 최초의 세계적 강국이었고, 그 이후에는 유일한 세계 강국이 되었다.07. 미국 & 로마, 평행으로 이어진 길을 걸어오다◎ 미국과 로마의 커다란 차이미국로마목적으로서의 부팽창이 경제적으로 추진되었다.결과로서의 부팽창이 정치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육지와 해상강국과잉 생산품의 수출을 위해 항로의 보호, 전함의 개발에 주력함.육상강국로마의 함대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비군사적 국가루스벨트 대통령 이전까지는 군대의 기강이 해이했으며, 전쟁을 많이 치르지 않았음.철저한 군사적 국가로마인 누구에게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수많은 전쟁을 경험함.이데올로기 주창0자신들의 체제를 인류를 위한 모범으로 여김. 세계를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형성하려 함.이데올로기 주창X로마인들은 다른 도시에 자신들의 체제를 강요하지 않았다. 다른 도시 스스로 로마를 모방◎ 미국과 로마의 강한 유사성미국유사성로마두 번의 세계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강대국들이 쇠약해졌다.절호의 기회지리적 이점(아메리카, 이탈리아 반도의 특성)로마가 기원전 200년에 동방에 발을 디뎠을 때,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은 국내적 혼란으로 인해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국토를 확대하는 일은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거나 미국 국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수용할 경우에만 가능했다.예외) 멕시코 강제 병합, 하와이스스로 만족(準州, 屬州)카르타고에 대항하기 위해 서쪽에만 속주를 설치했을 뿐 동쪽에서는 승리한 세 번의 전쟁 후에 군단을 도로 불러들였다.2차 대전 이후 및 소련이 대륙 간 미사일을 개발하여 보유안보의 필요성에서 세계로 다.
    인문/어학| 2009.12.04| 34페이지| 2,500원| 조회(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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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사 논고석사과정1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혼란한 상황은 한 사람만이 안정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1969년 3선을 허용하는 6차개헌 이후 국민들이 다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수백 년이 흘러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기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화정을 통한 다수의 지배가 군주정보다 낫다는 사실을 논증한 대목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의 옹호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체를 구성하는 인민의 자질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즉 자유를 획득한 인민이 그 자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례나, 인민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음을 인정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논하기에 앞서 자유를 지키고, 공화정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자질을 키워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마키아벨리는 비록 위정자를 위해 다양한 정치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대상을 인민 ? 다른 나라에서 부하직원 ? 타인 등으로 바꾸어 보았을 때 가치판단의 효과적인 기준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2권과 3권의 내용 중에서 3권의 1장에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법과 좋은 사람의 덕을 통해 공화국이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던 시초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법의 집행과 모범적인 인물의 출현이 10년마다 한 번씩이라도 나타났더라면, 로마는 부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가 이러한 쇄신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잠재적 참주들을 제어할 필요성과 그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마키아벨리의 사상은 폴리비우스의 혼합정체(원시 군주정, 왕정, 참주정,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중우정)에 기반을 두었지만, 정체의 순환을 폴리비우스처럼 길게 보지 않고 공화정 ? 참주정 ? 군주정 사이를 반복적으로 이행하는 짧은 순환과정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잘 조직된 공화국은 지속적인 쇄신을 통해 존속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인간 얻은 국가는 열렬한 적(敵)은 있지만 열렬한 동맹은 없다. 군주의 재부로부터 양분을 빨아먹음으로써 혜택을 누렸던 모든 이들은 이득을 얻을 가능성을 빼앗겼을 때 도저히 만족해서 살 수 없고 모두 자신들의 관직을 되찾기 위해 참주정으로 되돌아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된다. 자유로운 공동체로부터 얻는 공통의 이익은 어느 누구도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를 획득한 국가는 열렬한 동맹은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군주는 인민이 자유를 되찾으려는 소망을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인민이 자유를 원하는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즉 통치에 참여하기를 열망하는 소수의 인민은 제거하거나 그들의 지위에 따라 그들 대부분이 만족할 수 있도록 합당한 영예를 부여하는게 좋다. 단지 안전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한 나머지 사람들은 군주가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단시일내에 안심하게 될 것이니, 법률에 따라 행동하라.17장 : 부패한 인민은 자유를 얻더라도 자유를 유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로마의 왕들이 초래한 부패를 고려할 때, 그들의 부패가 구성원에게까지 확산되었더라면 구성원들이 부패한 로마를 개혁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몸체가 건강할 때 머리를 잃었기 때문에 자유롭고 질서정연한 삶에 적응할 수 있었다. 로마의 인민은 후대에 매우 부패해졌기에 카이사르의 혈통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유지할 수 없었다. 밀라노와 나폴리도 필리포 비스콘티 이후 인민들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자유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18장 : 부패한 도시에 자유로운 정부가 이미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립할 수 있는가부패의 정도에 따라 대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 일반적인 규칙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로마가 부패했을 때, 행정관의 선임ㆍ법률 제정이 변칙적으로 운영된 사례에서 부패한 도시에는 본래의 통치 기반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패한 도시에 정부를 유지하거나 그곳에 새로운 로마에서 10인회의 창설 그리고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어떻게 그러한 사건이 공화정을 구원하거나 공화정을 참주정으로 몰아넣는지를 고찰하고자 함로마는 새로운 법률의 검토와 결정을 담당할 위원들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법률을 기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호민관과 집정관의 직위를 폐지하고, 인민을 소집하여 동의를 구하는 절차마저 없애버렸다. 10인회는 로마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었으며, 아피우스는 모든 권한을 장악하였다. 인민들은 10인회의 임기를 1년 연장하여 10인을 재선출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집정관직이 부활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고, 둘째는 소송에서 인민 자신이 재판관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호민관이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인회의 독재에 로마의 평민들은 군인들과 합세하여 성산으로 올라가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호민관과 집정관이 임명된 후에 로마는 다시 이전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리는 로마에서 참주정을 수립하려는 악폐가 다른 대부분의 도시와 동일한 원인, 곧 자유에 대한 인민의 지나친 욕망과 귀족들의 지나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41장 : 중간단계를 적절히 거치지 않고 겸손에서 오만으로, 자비에서 잔인함으로 돌변하는 것은 경솔하고 무익한 짓이다한동안 선량하게 행동하다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악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자는 천천히 과도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식으로 상황에 따라 처신하면 당신의 변화된 성격으로 인해 당신에 대한 예전의 지지가 사라지기 전에 새로운 지지를 얻을 수 있으며, 그 결과 당신은 당신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42장 : 인간이란 얼마나 쉽게 매수될 수 있는가10인회 사건에서 인간은 아무리 훌륭하게 자라났다 하더라도 매우 쉽게 매수되어 전적으로 다른 성격으로 변화됨을 볼 수 있다.43장 :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야말로 훌륭하고 충직한 군인들이다로마군이 집정관의 리스에서 태어났으나 투르크인들에게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결점을 비난하고 다른 시대를 찬양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그들이 찬양할만한 것들이 있었지만 현재에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불행, 악평 및 불명예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줄 만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는 종교, 법률 및 군사 업무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이「논고」는 고대 로마시대를 지나치게 찬양하고 우리 시대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하지만 그 시대를 빛냈던 번영과 대비되는 오늘날의 타락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명백한 것이기에 나는 로마시대와 현재에 관해 배운 것을 말함에 있어 분명하고 대담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1권에서 국내문제에 관한 로마인들의 정책 결정을 서술했는데, 2권에서는 로마 인민들이 제국의 팽창과 관련하여 수행한 일을 서술한다.1장 로마인들이 제국을 팽창시킨 것은 실력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운이 좋았기 때문인가나는 로마의 승리를 운에 돌리기보다는, 로마 군대의 실력과 신중함이 행운과 결합된 것이라 생각한다. 로마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한 적이 없다. 로마가 강성하기에 이웃의 어떤 군주나 민족도 단독으로 공격하기를 두려워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공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쟁과 평화유지는 로마의 선택에 달렸었다. 로마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교류가 없는 나라들은 로마를 자신들과 동떨어진 존재로 보고, 전쟁의 불똥이 떨어지기 전까지 방관했다. 로마인들은 지지세력을 확보하여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2장 로마인은 어떤 민족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으며, 또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완강히 저항했는가로마인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는 민족들을 정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고대에는 모든 영토에서 많은 민족들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도시들은 자유로운 상태에서만 영토나 부의 증대를 이룩하기 때문에 인민들은 자유로운 정부에 대한 애착심을 갖고 있었다. 도시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개별적인 선(善) 고용하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쉽게 기만당하게 된다.23장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을 처벌할 필요가 있을 때 어중간한 조치를 피했다무릇 통치라는 것은 백성들이 당신을 해칠 수 없거나 백성들이 당신을 해치는 것을 원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로부터 당신을 해칠 모든 수단을 제거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하거나, 백성들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할 이유가 생기지 않도록 그들에게 은전을 베풂으로써 달성된다.로마는 호의를 베푼 도시들에는 면세나 특권을 인정하고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모든 방법을 통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다른 도시들에 대해 그들은 도시를 파괴해버린 후 그곳을 식민지로 삼고 그곳의 거주민들을 로마로 이주시킴으로써, 나중에 폭력적인 방식이든 아니면 신중한 음모를 통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그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로마인들은 결코 우유부단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24장 성채는 유용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경우가 더 많다자유로운 로마에서는 백성을 겁주기 위해 성채를 짓지 않았다. 군주는 그를 증오하는 백성들을 성채를 통해 다스릴 수 없으며, 좋은 군주는 백성들의 선의에 의지한다. 좋은 군대를 갖고 있는 인민과 왕국에는 성채가 불필요하며, 좋은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군대는 성채가 없어도 당신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좋은 군대 없이 성채만으로는 당신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군대는 매우 강력한 저항을 받지 않는 한, 아직 함락되지 않은 도시나 성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적국 깊숙이 진공해 나가는 법이다.군주는 그가 사는 도시를 강력하게 만들고 물자가 충분히 공급되도록 하며 시민들이 우호적이 되도록 만들어, 협정을 맺을 때까지 또는 외부의 원군이 올 때까지 적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밖의 모든 다른 계획들은 평화시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전쟁시에는 쓸모가 없을 뿐이다.25장 도시의 내분을 틈타 도시를 얻고자 기대하면서, 분열된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사회과학| 2009.10.28| 31페이지| 3,000원| 조회(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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