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학교교육의 확대와 양적 팽창에 관한 기술기능이론과 재생산이론의 관점을 비교 설명하시오.』Ⅰ. 서론교육은 과언 언제부터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꽤 오래전부터 교육은 있었을 것이다.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육은 두 사람 이상이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즉, 두 사람 이상이 무언가를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 곧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육은 곧 사람들간에 이루어지는 행위인데, 이를 다시 표현하면 교육은 사회 속에서 어루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사람들의 집합체의 표현이 바로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문화, 제도 쪽에서 독창성을 지닌 공통의 이해에 기반을 둔 개인의 집합이다. 사회는 종종 민족, 국가, 문화 등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지만 분류 기준은 연구대상에 따라 다르다. 이처럼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므로 두 사람 이상이 있어야 함을 전제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 안에 교육이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의 대화가 있다. 결과적으로 교육과 사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교육사회학이라는 학문도 따지고 보면 교육과 사회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교육학과 사회학이 만난 학문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종각(2004)과 김병성(2004)은 교육사회학을 서로 조금 다른 측면에서 분류하고 종합하여 중심개념과 파생개념을 나누어 제시하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교육사회학 탐구에서 소홀 히 할 수 없는 내용들이긴 하지만 분류하는 사람이 어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어떠한 사회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탐구내용과 영역은 조금씩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교육사회학의 주요 이론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대표적으로 기술기능이론과 갈등이론(재생산이론)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기술기능이론과 갈등이론(재생산이론)의 기원, 학자, 관점에 대해서 각각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기술기능이론① 기능이론의 기원기능이론, 더 넓게 기능주의는 그 이론적 기원을 comte와 spence로 학교교육의 사회화 기능을 강조하는 동시에 산업사회에서의 인력배치 기능을 부각함으로써 사회적 선발의 기능도 강조했다.② 기능이론의 개념기능이론의 주요 개념으로는 구조와 기능, 통합, 합의, 안정 등이다.첫째, 구조와 기능은 사회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체제 구성상 모든 요소는 사회의 전체 기능 발휘에 공헌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각 부분은 기능을 갖고 있으며, 부분의 기능이 전체의 조속과 성격을 결정한다. 둘째, 통합은 사회 여러 요소는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분과 부분은 서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의 변화는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사회 자체의 기능을 돕는다. 따라서 사회구조의 여러 부분적 요소들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사회체제가 유지된다. 셋째, 합의는 사회구성원들은 사회의 결속을 위한 가치, 규범의 유형, 내용에 대해 일반적인 합의, 동의를 갖고 있다고 본다. 중요한 문제에 대한 지각, 감정, 가치, 신념 등은 합의의 주요한 주제이다. 어떤 사회이든 이러한 것에 대한 구성원의 합의 없이는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에 대한 합의는 일차적으로 가정과 학교의 사회화 기능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넷째, 안정은 사회를 결속하는 힘과 평형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도 완전히 전체적으로 안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기능이론에서는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안정을 강조하며 사회의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한다. 기능이론은 사회를 보는 시각을 사회의 균형과 질서 유지 및 통합적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이는 구성원의 합의된 가치와 관점에 의해 유지된다고 본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교육은 그 사회에 맞는 사회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비교적 보수적인 견해이다. 또한, 기능주의적 관점에서의 학교교육은 전체 사회질서를 위해 학교가 수행하는 어떤 필요불가결한 기능을 가정함으로써 설명된다. 가정배경, 학교교육, 사회적 성취의 관계에 대한 기능주의적 주장은 다음과 같과정을 강조한다. 비록 기능주의자들이 변화가 어떨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라고는 이해하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기능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Durkheim(도덕사회화론, 질서, 사회화, 분업등에 관심), Persons(학교사회화이론, 사회규범의 사회와 관심), Dreeben(사회규범의 사회화 관심) 등을 들 수 있다. 기능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 관점으로는 McCelland의 근대화이론-발전교육이론(사회의 발전을 위한 논리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하여, 사회를 전근대와 근대, 저발전과 발전 등으로 파악한다), Clark와 Kerr의 기술기능이론(학교가 산업사회의 요구에 상응하여 인력을 배출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직업세계의 기술 수준과 학교교육 수준은 일치를 주장), Schultz의 인간자본론(인간자본에의 투자 여부에 따라 다신의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달라진다고 봄)등이 있다.2) 갈등이론① 갈등이론의 기원갈등이론은 1970년대에 부각된 이론으로서 사회의 갈등현상은 필연적이며 역사의 발전 요소라고 주장하고, 사회의 안정은 사회구성원의 매치와 기능이 권력집단에 의해 효율적인 양식으로 규정, 배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갈등이론은 기능주의 이론의 비판점 위에서 출발한다. 기능이론의 기본가정과 여러 주장을 부정, 비판하면서 교육사회의 반 주류를 형성했으며, Marx와 Weber의 이론과 사상에 지적인 뿌리를 두고 있는 이론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기능이론에 대한 비판과 도전은 신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이론적 발전은 Dahrendorf, Miller, Coser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② 갈등이론의 개념갈등이론의 주요 개념은 강들, 강압, 변화이다. 이는 갈등이론의 이론적 가정과 관련되어 있다. 갈등이론의 이론적 가정은 첫째, 갈등이 일반적으로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능이론에서 강조하는 부분과 부분과의 관계가 사회구조적으로 통합된다고 하는데 대해서, 갈등이론에서는 사회제도와 여나타난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배세력은 또한 강압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피지배집단을 다스리게 된다. 갈등이론에서 바라보는 사회는 이해관계를 둘러싼 개인, 집단 간의 갈등의 장소로 본다. 학교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은 학교교육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미리 정해진 사회적 역할과 질서에 따라 상층지배 집단에게 유리하도록 배분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한다고 본다. 또한, 갈등이론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화는 자본가 계층에게 이로운 태도와 가치관을 가르치고, 기존의 계충구조를 정당화, 지속한다고 본다.③ 대표적인 학자 논의갈등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Marx(계급갈등), Dahrendorf(변증법적 갈등), Simmel(구조갈등), Coser(기능적갈등), Weber(가치중립, 객관화, 과학화, 합리화의 논리 기분 개념), Bowles&Gintis(경제적 재생산), Bourdieu(문화적재생산), Carnoy(문화적제국주의), Collins(지위집단),Giroux(저항), Gramsci(헤게모니) 등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자들을 통하여 나오게 된 갈등이론들은 어떠한 이론들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경제적 재생산이론갈등이론과 관련한 논의를 제시하면 첫째, 경제적 재생산이론으로 대응이론, 직접재생산이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논의에 의하면 학교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생산관계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구실을 한다고 본다. 자본주의사회의 학교교육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중립적인 기관이 아니라 기존의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집단인 자본가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으며,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를 총체적으로 ‘경제적 재생산이론’이라고 부른다. 경제적 재생산이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학교교육의 역할이 불평등한 구조를 정당화, 합법화, 강화하는 재생산적 도구라는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재생산이론은 학교교육의 역할을 경제구조에 국한함으로써 다른 사회적 변인, 예컨대 인 학자로는 Broyrdieu를 들 수 있다. 그는 대표적인 저술인 ‘교육, 사회 및 문화적 재생산’에서 학교를 문화적 지배를 재생산하는 장치로 설명하고 있다. 문화적 재생산이론은 학교교육에서 문화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학교교육에 대한 학문적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문화영역과 계급 구조와의 관계를 규명하였다. 그러나 문화적 재생산이론은 역사적 분석과 경험적 자료가 부족하여 체계적이지 못하고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으며, 사회구조의 변화는 문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정치, 경제적 측면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도외시하고 있다. 또한 학교 내부 현상을 문화구조의 논리에 따라 그 성격을 규정함으로써 실제적인 복잡한 역동적 관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종속이론이는 지배와 종속, 중심과 주변관계의 세계체제론적 관점이다. 대표적인 학자인 Carnoy는 ‘문화적 제국주의로서의 교육(1974)’에서 국제적인 관계를 통해서 교육을 비판하고 국가 간의 갈등현상이 교육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식민지 정책을 분석함으로써 지배자들이 피식민지 국민들의 의식을 어떻게 왜곡시켜 복종을 유도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정치적으로 독립을 획득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적인 식민 상태에 있는 새로운 식민 형태를 맞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육이 지배층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을 교육수익률의 교육단계별 변화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교육 수익율이 높을 때는 학교교육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고 경쟁이 치열하므로 하류층은 다니기가 어려워서 중,상류층이 주로 다니고, 교육이 보편화되어 수익률이 낮아져서 경제적 가치가 없게 될 때 하류층도 다니게 된다. 다라서 교육은 가진자에게만 봉사하고, 못 가진 자에게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위집단(경쟁)이론이는 지위집단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으며, 유사한 표현으로 지위경쟁이론, 신베버학파 이론, 고전적 갈등이론 등으로 표현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Cpllins, H
1. 역사 이야기 개론역사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구약의 역사 이야기에 당연히 마음이 끌리게 될 것이다. 작품성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 역시 복잡하면서도 흥미를 끄는 문학적 특색으로 가득찬 이 이야기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본서는 이러한 구약의 역사 이야기에 대한 하나의 초청장이기도 하며, 본서를 통하여 각 권의 내용과 교훈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서는 결단코 구약 역사서 대신 읽는 내용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레 역사 이야기의 문학적 역사적 장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서를 읽다가 시편이나 잠언을 보면 문장의 형태가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영서성경에서 시편과 잠언은 시의 형태로 되어 있어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고 본문의 여백을 많이 둔 평행 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역사서는 산문 형식으로 되어 있어 본문의 여백이 없이 긴 절로 되어 있다. 또한 역사의 전반적인 구조는 과거 사건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르게 함과 교훈을 주기 위한 역사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역사 이야기를 연구 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은 역사서를 시가 아닌 산문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으로 나누어 접근해 볼 수 있다. 시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 산문과는 다르다.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의 길이에 제한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가 그러하듯이 행의 길이는 무한정 길어서도 안되며 각 행의 길이가 서로 달라서도 안 된다. 이것이 시와 산문을 구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또한 시에 있어서의 특징은 대구법이다. 이것은 유사한 단어나 사상 및 의미를 나타내는 단위가 서로 대칭이 되어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히브리 시의 특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히브리 시의 특징은 산문보다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시는 답관체, 우운법, 모음 압운, 성유법, 대칭 평행법을 비롯하여 많은 문학적 수 밖에 없다는 검에서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필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료에 대한 취사선택이나 보고 된 내용들에 대한 선별 작업은 불가피하다. 이것은 역사가와 그가 기록하고자 하는 사건이나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역사적 간격이 전혀 없었던 때나, 또는 역사적 자료를 충분로놓보유하고 있던 시기에도 해당된다. 이렇게 구약 역사 이야기는 놀랍고 다양성을 논할 수가 있다. 산문으로서, 역사로서, 그리고 문학으로서역사로서, 그리고 문해서도 그렇가 있다.가 말하고 있는 것은 , 역사로서, 그리를 읽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단편적으로 세분화하여 분해하듯 함으로써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그리를 사지를 절단한 시체 토막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을 볼수가 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형태소, 단어, 구, 절, 수가과 같이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요소들을 중심으로 하는 본문에 대한 철저한 분석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는 사가장 큰 이유 큰옠리를 향학으로서님의 계시를 발견하며, 그의 은혜로운 구속 계획에 대해 깨닫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법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결국 성경만이 완전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서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서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2. 여호수아여호수아는 익명의 책이다. 탈무드와 일부 랍비들은 이 책의 저자가 여호수아라고 주장하나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일부가 후대 사람의 손에 의해 쓰였다고 본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이 책의 일부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24:26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슴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라는 말씀은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운 언약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어떠니 곳에서도 저자의 언급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여호수아서는 대부부의 성경이 최근의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역사가 가장 정점에 있던 시기의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위대한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두 책은 상호간에 논리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 신명기는 여호수아서에 대한 예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여호수아서는 신명기가 완성하지 못한 내용들을 찾아 보충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여호수아서에 대해 가지는 한 가지 의문점은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되는 피의 살육과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진멸을 요구하셨는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오나전히 진멸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모세는 이를 그대로 여호수아에게 전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도 이러한 명령을 직접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근본적인 공의에 관한 의문적인젠기된다. 관한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사랑적인많으는 여나님께서 그와 같이 잔인한 일을 명령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열의 신앙적 성결에 대한 요구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서의 신학에는 땅, 안식, 언약, 신앙의 순결등 4가지의 핵심적인 주제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대로 따응ㄹ 취하게 될 것이며, 또 그것에서 안식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또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계속 거주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시내산에서 모세와 맺은 언약에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음을 확인 하셨다.3. 사사기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여러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이스라엘의 배교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공통적 주제 하에 연결되어 있는 책이다. 이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혼란에 가까운 이스라엘의 정치적, 영적 삶과 하나님의 끊임없는 개입과 섭리하심을 통한 구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서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며 마지막에는 온 지파가 그들이 분배 받은 땅에 정착하게 되는 평화로운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성취는 이스라엘의 순종과 직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복은 불완전한 것이으로 첨가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 비평적 학자들의 주류는 이러한 구분을 매우 중요시 했는데, 그들은 핵심부분의 이야기들이 각각 민간에 구전으로 떠돌아다니던, 지역 영웅에 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후 이 자료들은 초기 “신명기 기자적 ” 편집자의 손에 들어오게 되는데 여기에 “신명기 기자적”관점의 서론과 서문이 부가되었으며 주전 6세기경에 와서는 부록이 첨가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사사기는 하나님께 대한 배반의 결과가 어떤 것이며, 또한 의로운 왕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하는 왕도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여호수아서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순종한 결과 평안히 끝을 맺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사사기는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불순종은 사사시대를 통해 점차 심각한 타락상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사사기는 히브리어 정경에서 전 선지서로 분류되며 현재 학자들은 “신명기 기자적”역사로 분류한다. 이 책은 연대기적으로 여호수아서의 뒤에 위치하여 그 주제를 전개시키고 있으며,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이상적인 삶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사기는 자연히 왕권이 확립되고 번창하기 시작하는 사무엘서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 개신교, 정경에서 사사기 바로 다음에 오는 룻기의 내용은 사사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사무엘이 일어나 사울을 왕으로 세우기까지 약 300-35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다룬다. 이 책은 기간에 대해 특히 이스라엘이 압제받았던 시기나 또는 평온했던 시기와 관련하여 많은 언급을 한다. 이 기간을 모두 합하면 전체 기간은 약 410년이 된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까지의 기간이 480년이라는 언급과 모순이 된다. 이러한 모순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견해는 사사기의 이야기들이 동시에 여러 지녁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언약이 성취로 땅의 상속이었다. 사사기에서도 땅은 여전히 초점의 대상이나 다소 선을 이루게 된다”룻기는 우리에게 사사시대가 전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것만은 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이 책의 제목은 주인공 룻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녀는 경건한 모압여인으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충절을 다하였다.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유다 사람으로 모압에 이주하여 살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 룻기는 이방사람이 이스라엘 족속을 만나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 좋은 예를 보여준다. 그녀는 진실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축복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들로부터 복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다윗의 조장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4명의 이방 여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저자가 여성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두명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인데다, 이들 두 여성의 삶은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매우 사실감 있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룻기의 저자는 이야기 구성에 매우 탁월한 문장가임에 틀림없다. 이 이야기는 문학작품으로서도 하나의 거작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탈무드에는 이 책의 저자가 사무엘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 학자들은 그 보다 후대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룻기의 저작 연대에 관한 논쟁은 이 책의 저술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 간에는 이 책이 왕조시대, 아마도 솔로몬이나 다윗 시대에 쓰였을 것이라는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룻기가 흥미를 주는 책임에는 분명하나 이 책이 기록된 가장 중요한 목적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의 목적과 관련해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의 목적은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즉 사건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본문의 여러 언급들과도 조화를 이룬다. 또한 다윗의 계보가 본문에 실리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즉 룻과 보아스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족장시대 이후 그의 뜻 가운데 진행되고 있준다.
성경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교의 결과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선교 주제에 있어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선교의 중심이요 출발점으로 시작하고 있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선교의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성경은 권위적이고 오류가 없음을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기독교 선교는 긴급선이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인식되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긴급성과 비정상적인 것들에 대해 역사적이고 영구적인 관점에서 먼저 언급하고 합당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여기서 긴급성이란 세상에 퍼져 있는 죄의 사실인데, 이 것은 강력한 힘으로 인간에게 전염되어서 인간의 존재까지 위협하고 있다. 만일 죄가 없었다면 기독교 선교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가공할만한 죄의 존재가 없었다면 구원론에 대한 이해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죄는 인간에게 구원의 필요와 함께 기독교 선교도 필요하게 만들었다. 죄의 교리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나타나 있기에, 여기서 전적으로 죄론에 관해 주경학적이나 역사적인 해설은 불필요 하다고 본다.제1장 선교신학과 예수 그리스도먼저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과 함께 우리의 믿음과 예배의 대상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에게 완전한 모범으로서 행위와 섬김과 삶의 방향에서 온전함을 주시기 때문에 그의 삶에 대한연구는 매우 깊은 의미와 영감을 준다.여기서 예수님이 세상과 세계선교에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비유대인을 향하여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예수님의 사역이 세계의 열방과 어떠한 관련을 가졌는가? 그리스도가 민족주의자나 특수주의자나 지역주의자인가? 아니면 세계의 비전을 가진 자인가? 그는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진 국제주의자인가? 그의 생애와 죽음이 오직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의 사역은 세계의 열방을 향한 것인가?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동안에 모든 민족을 포함한 세계적인 선교에 대해서 관것을 모든 복음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임을 아셨다. 그는 높은 곳에서 세상으로 오셔서 부지런히 일하시고 수고하셨다. 그는 특벼한 손하게곧 X 그는 영원한 목적을 완성하는 사명을 가지신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그는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품성을 가지고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셨다. 우리가 우주적인 하나님의 존재가 선교의 기초가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제2장 선교학과 하나님의 성품하나님 중심적인 선교는 오늘의 인간론중심, 우주론 중심이나 교회중심적인 선교론의 흐름에 신선함을 준다. 하나님중심적인 선교는, 비록 역사 속에 주신 것이지만, 그것의 기원과 역동성과 목적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시간속에서 시작되고 유지되고 더 계속되어 진다. 하나님 중심적인 선교는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의 신비를 구원과 연관해서 우리에게 설명하는 성경구절에서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엡1:3-14) 또한 주님이 세우신 세례형식도 하나님 중심적이다. 모든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인간이나 교회나 기구가 구원을 만들지못한다. 모든 것은 삼위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 열매를 맺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면, 성경에 나타난 선교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저자는 창조와 구원 그리고 완성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기본적인 계시를 강조하고 있다. 성령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이다. 성령 그분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신격이나 영원성에서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분 역시 “빛과 사랑”이시다. 그러나 성경의 성령론과 다르게, 성령께서 세계선교와는 관련이 없는 듯이 가르치고 있다. 해리 보어가 쓴 “오순절과 선교”라는 책은 여기서 매우 필요한 책이다. 그것은 다른 신학자들이 이 책에 대해 이견을 주장하지만, 그래도 이 주제에 대해 매우 합당한 책이다. 이러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 목적을 주신다.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다. 물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인 계획을 배우고 또한 인격과 역사와 목적을 더 배울 수가 있다.제3장 선교신학과 구약성경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구약성경과 자신의 사역, 메시지, 그리고 선교에 대해 연관을 지어 말씀하셨다. 그는 구약 성경과 모순 되거나 주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의 성경 내용을 분명하게 확장해서,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시고 구약을 더 잘 드러나게 하였다.예수님은 항상 구약성경의 예언 성취를 주장하셨다. 그분 안에서 구약의 모든 경륜이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영광스러운 결론이 되었다. 그분은 구약을 폐지하고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을 성취함으로써 그것을 완성시키셨다.성경은 그 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통일된 책이다. 그 주요한 개념들은 항상 변함이 없다.그것의 기본적인 신학, 목적과 메시지는 하나의 놀라운 점진적인 계획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와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성경의 주 내용은 세 가지 이다. 저자는 창세기의 기록이 역사적인 것으로 받으며, 창세기의 1-11의 계시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모세는 나중에 그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창12장과 나머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를 위해서였다. 신약에서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사도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주요 세가지 내용은 곧 인류를 위한 것과 이스라엘을 위한 것과 교회를 위한 것등 세 가지이다.구약의 세계적인 전파는 구약성경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이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그 자체가 세계선교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거기서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으로, 모든 열국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어떤 영역도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된 곳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엄숙하게 빛나는 보좌는 모든 것 위에 높이 들려져 있으며,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전 지웭역도 미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세계를 갑작스런 재앙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다스리시며, 그의 통치가 전 세계에 까지 로,되어 진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계시록에 기록하하나님은 우여기서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죄, 지옥, 사탄쟼 세덤을 이기신 것으로 제시한다. 또한 요한은 두 번째 중요한 환상에서 그는 어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우편계시계신 어린양이, 심판쟼 복음 로,을 통해에 대을 준비하심을 보고 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대님으로, 복음 전파를 통해 그리스도에 까 하나님의 사랑쟼 행위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 것으신하나님은 우하나님의 택하신 수단으로 여러 교회를 모아 힘을 주어서 그 사역을 수행한다.제5장 선교의 사역선교사역은 어떤 시대나 환경과 문화의 변화에도 변할 수 없는 그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불변의 사역”인 것이다. 또한 선교사역에는 어떤 적용을 필요로 하는 상대적인 특징도 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염두해 둘 때, 우리는 선교사역에 대한 혼동 없이 수행하게 된다.먼저, 선교사역은 영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궁극적으로 선교사역은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완성되고 성령으로 구원이 실제화되고 적용되게 하신다. 오직 성령만이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구원의 역사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체험케하신다. 그는 현재에 구원을 집행하는 보혜사일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복음이 전 세계에 선교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분명한 사실로 나타나며, 그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대행자들은 선교사역을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신자들이다곧 세계복음화의 관심을 나타내주고, 또한 그것은 핵심적인 목적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족속으로부터 백성들을 모아서,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 그리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제6장 교회와 선교세계복음화는 신약성경의 명령이다. 이 사역을 완수하는 보혜사는 성령님이지만, 이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의 선택된 기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이것은 성경의 주된 내용이다. 신약을 표면적으로 읽는다할지라도 교회가 하나님의 현재 질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읽는 이에게 확신시켜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했고, 또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셨음을 읽게 된다. 우리는 현재 예수님이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 계시며 마침내 “자기 앞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을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셧던 영원한 목적들에 따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 부르심은 교회가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함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목적을 가진 창조물 즉, 그의 눈 또한 교회는 오순절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성령님의 통합체로써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특한 창조물이기 때문에 역사적이거나 자연적인 과정의 결과가 아니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독특한 소유물이기 때문에 독특한목적과 임무를 위해 계획되어 졌다.교회의 선교와 목적은 역사의 일반적인 활동에서 소모되진 않는다. 교회의 임무를 역사의 운동들과 사건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교회를 이러한 것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만큼 위험하다. 교회는 역사 안에 있지만 역사의 것은 아니다. 즉 교회가 역사 안에 있지만 역사로부터 분리되고 위에 있으며 역사 너머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역사 안에서 그 임무를 실행하지만 역사 밖에서와 너머에서 교회의 기원과 지속, 마지막 권있다.
과목사복음서를 읽고..날짜2010.11.12담당교수김추성교수님이름박성현학번20091034이 시대 수많은 목회자가 고민하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설교일 것이다. 저자가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한주에 몇 개씩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말씀을 연구 할 수 있는 시간조차 부족한 것이현실이다. 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정확하고 바르게 전하기 위한 목회자를 대상으로 사복음서 가운데 중요한 주해와 더불어 대지를 잡아주고 있다. 신약시대의 배경,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 사복음서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다루었다. 신약사에 나타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 중요한 절기들, 세례요한에서부터 시작하여 중요 구절마다 주해를 한 것이다. 또한 사복음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들을 잘 구성해놓았다. 특히 가나의 혼인잔치에 나타난 진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우리가 그냥 읽어 넘겼던 부분들을 세세하게 짚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여러 가지 언급하면서 그 시대의 배경과 상황을 눈앞에 펼치듯이 알수 있게 되었다.특히, 사복음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설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구약의 배경을 놓치지 않고 잘 연결시켜 놓았다. 마태복음의 기록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이사야 9:1-2을 인용하여 자신의 사역을 설명한 때는 요한이 잡힌 후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구약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임을 증거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설립은 역사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개입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것이다.또한 예수님은 회당에서 서서 성경을 읽으셨다는 부분이 나온다.(눅4:16)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기 위해 서신 것을 알 수가 있다. 성경을 다 읽은 후에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라고 예수님이 앉으신 것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서서 성경을 읽으셨고 앉아서 그 내용을 설명하셨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 드려지자 예수님은 61:1,2 의 내용을 펴서 읽으셨으며, 아울러 이사야 42:7도 같이 읽으셨다. 읽고 난 후에 이 말들은 아람어로 통역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약의 예언이 그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계신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본문이 말씀을 해석하시기 시작하자, 듣던 회중들은 그가 다른 이유를 들어 그에게 분을 발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그들의 반응에 대해 상황을 역정시켜, 그들의 믿음이 너무도 없는 까닭에 기적을 베풀지 않노라고 응답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를 비난하려 하지만 실제로 그 비난의 책임이 오히려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과 죄악들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비난하기를 원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다. 어떤 선지자도 고향에서 환영을 받은 자가 없었다. 나사렛 사람들도 또한 마땅히 그를 믿었어야 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으로 하여 그 진리를 다시금 확증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예수님의 분석이 옳았다는 증거가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서 나타났다. 이렇듯 본서는 본문의 주요 구절을 문맥에 맞게 잘 나누어 있으며, 역사정 배경과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들로 통해 독자들에게 더욱더 쉽고 편하게 다가 갈 수 있는 듯하다. 특히나 본서를 통해 설교를 준비할때에도 그 어떤 책보다 쉽고,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임을 책을 읽어가며 주해에 대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느꼈지만, 그 가운데, 나도 이 책의 저자처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깨닮음을 가지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고, 더욱더 말씀을 사모하며 가까이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고..신약성경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심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언어에 그 표시가 담겨져 있을 정도이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십자가’라는 용어에 대한 구체적인 사용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발견 할 수가 있다. 1장은 그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말할 때와 그들이 지적하는 중요한 점들의 일부를 개관하고 설명하였다. 먼저, 이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전제 되어야 할 것은 우리는 죄인 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지 않는 다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막 9:43, 45, 47; 눅 12:5 에 지옥에 대해서 말씀 하신 바 있다. 이러한 심판은 현재적 실재이며, 동시에 미래에 확실히 있을 일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책임 있는 사람들이며, 때가 되면, 하나님 앞에서 직고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그것은 우리가 책임 져야만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죄가 있음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놀라운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 때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자를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 해결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죄용서는 우리의 어떠한 회개의 공로나 또는 하나님의 본성의 어떤 필연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취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구속 행위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비기독교적인 구원관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루신 일을 명백히 하기 성경 번역본에는 ‘속죄’라는 단어를 다르게 번역한 곳도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어찌되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즉 모든 악에 임하는 진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임하지 않는다고 하는 진리를 지켜야만 한다.또한 성경 곳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어떤 면에서 그는 우리를 대신하셨으며 우리의 대리자였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많은 사람을 위한 속전’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우리를 대신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그렇기에 십자가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십자가를 단지 악을 이기는 힘을 주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은 더욱 좋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힘이 정의라고 말하는 것이 될것이기 때문이다.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의견의 일치가 존재한적은 없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죽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설교했을 때와 동일하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오래전 예수의 죽음이 지금 여기에서 나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을것이고, 또한 그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도 신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러한 질문과 답변은 사실상 지금 우리에게도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공간상으로 신약시대의 개종자들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론적인 논의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구속의 근본적인 개념은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불은 전쟁 포로나 노예의 해방, 또는 재정적인 압박이 있을 때에 팔린 땅이나 다른 소유물을 그것의 합법적인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을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헛된 것에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삶을 주셨다. 우올바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증진키시고 있을 때조차도, 우리 자신을 속일 수가 있다. 야고보의 관심은 오직 외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사람에게 있다. 바울은 사실과 믿음의 관계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고전에서의 부활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약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중심적인 신조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실제적인 토대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자는 헛된 것을 추구해온 것이다. 그는 아무런 가치도, 결과들도 없는 믿음을 지녀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을 기만하는 일에 몰두해 온 것이다.현대에 있어 많은 인본주의자들에게 ‘무지’라는 것은 주요한 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감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들은 보다 많은 교육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분투한다. 교육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여러 세대에 걸쳐 있는 위대한 사람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데, 그들의 사상은 그들이 남긴 책들 속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주며 그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도록 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육 자체가 우리의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을 제공해 준다고 하는 단순한 믿음이다. 다른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 세 대는 교육받은 마귀가 교육을 받지 못한 마귀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우리의 지성적 능력이 우리의 도덕적 감각보다 더 성장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진지하게 논의 도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옳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행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이익으로 보이는 것을 위하여 선택한 목적들에 이르는 복잡한 방법들을 고안해 내는 데에 훨씬 더 능숙하다. 우리의 과학과 과학기술로부터 달아날 것이라는 것을 신약 성경은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죄를 무지와 연결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 에 대해서 말 할 수 있었다. 주석가들은 대로 이것이 이방인 독자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유대인 독자들을 가리키는지에 관해서 적용되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 그들은 양편 모두 여러 종류의 사욕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그을 가 그것은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더 나은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물론 이것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지 못한 채 진리에 직면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그들의 잘못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했을지도 모를 계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들의 불순종은 그들의 비난받아 마땅한 무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무지는 때로 범과의 정도를 낮추게 할 수 있으나, 때로는 그 자체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며, 따라서 무지가 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 동전의 또 다른 면은 신약 성경에서 구원이 종종 어떤 면에서는 지식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마치 기독교가 특권을 지닌 입문자들에게만 가능한 어떤 형태의 지식을 주되게 강조하는 영지주의나 또는 지성주의의 한 형태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며 보다 더 중요한 진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 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죄악된 인간이 여기에서 무지한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처럼, 동일한 서신의 다른 곳에서 바울은 지식 있는 네가 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영생은 단순히 계속되는 생명이 아니다. 끝이 없는 생명은 끝없는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의 지식에 결코 이를 수 없는” 자들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고 있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이기 때뭉이다. 우리는 진리가 그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돼 있으며,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복음은 진리의 말씀 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대해서 쓸 수 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속한”자들이다.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한 메시지에 대해 생각할 때 신약 성경이 진리를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들은 어떤 좋은 이론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라고 알았던 것을 증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리스도의 지식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즉 그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심을 아는”데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생각과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다. 구원자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베드로 후서에서 다소 강조되는데, 이러한 서신에서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구원과 동일시될지도 모른다. 요한 일서에서 우리는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는 말씀을 보게 된다. 지식은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과 그가 성취하신 사역과 연결괴어 있다. 물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비록 즉시 “내 양도 나를 알고”라고 덧붙이시지만 말이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지식과 구원의 행위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신약 성경의 특징이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야 할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건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때로 백성들이 이러한 지식에 이르렀으면 하는 희망을 표현했으며, 그보다 자주 하나님을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