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築을 중심으로 살펴본 그리스-로마 문화 비교》Ⅰ. 그리스-로마 문명 개관1. 그리스 문명 개관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미케네 문명을 무너뜨리고 그 영역을 이탈리아 남쪽까지 넓힌 도리아인과 이들에게 쫓겨 에게海의 여러 섬과 소아시아 기슭으로 옮겨 자리 잡은 이오니아인에 의해 형성되었다.이들의 땅은 많은 산줄기와 좁은 골짜기 그리고 크고 작은 많은 섬들과 복잡한 바다기슭을 갖고 있어 독립된 도시국가(polis)를 자연스럽게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닷길을 이용한 원활한 교통과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강한 부족정신으로 자치조직을 지키면서도 같은 생각과 정치제도를 발전시켜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한편, 지중해성 해양성 기후 지역으로 비교적 날씨는 포근했지만 여름철 건조기에는 더위가 심해 그리스인들은 집 안보다 집 밖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즐겼다. 따라서 아고라(Agora)와 같은 광장을 중심으로 한 공공건축물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도시에는 아고라가 있고, 의회와 재판소, 스토아, 시장들이 그 둘레에 생겨났으며, 신전이 있는 성역 둘레에는 보물창고, 극장, 경기장들이 배치되어 있어 그리스인 대부분의 생활이 바깥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그리스 문명을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대략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때부터 그리스 문명이 꽃피우기까지인 아르카익(고전적) 시대,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아테네가 그리스 동맹의 주체가 되면서 그리스 문명을 꽃피운 헬레닉(고전) 시대,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아시아로 그리스 문명을 전한 헬레니스틱)(헬레니즘)시대로 나뉜다.아르카익 시대(B.C 11-5세기)미케네 문명이 해체도기 시작한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 그리스는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정치 경제의 기반이 무너졌다. 또한 문자가 사라지면서 크레타의 화려함과 미케네의 웅장함이 괴멸된 암흑시대(Dark age)였다. 그러나 도리아인은 유럽 대륙에 철기 시대를 열었다. 이를나 그리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문화의 원천, 즉 참된 의미의 고전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이다.2)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아폴로상 - 바티칸》그리스인들이 신봉한 올림포스(Olympos)의 신들은 그리스문화의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리스인들도 다른 원시민족이나 다름없이 우주와 자연의 모든 것에 신비로운 영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다신교적(多神敎的)인 민족이었다. 그러한 그리스인에게 번갯불의 신이요, 정의의 신이기도한 제우스(Zeus, 로마명은 Jupiter)를 최고신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을 공통의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한 것은 호메로스였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Hera)는 혼인을 관장한다 하고, 제우스의 형제인 포세이돈(Poseidon)은 해신(海神)으로서 항해를, 하데스(Hades)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저승을 다스린다. 태양신 아폴로(Apollo)는 그의 비상한 활솜씨로 암흑을 상징하는 대사(大蛇)를 쏘아죽임으로써 인간에게 더 없는 혜택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리스인은 델피(Delphi)에 신전을 지어 그를 받들고, 국가대사(國家大事)나 개인의 일에 관하여도 아폴로의 예언과 신탁을 받기 위하여 그 곳을 찾았다.올림포스의 신들은 불사(不死)라는 점과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그들의 생활과 행동은 호메로스시대의 영웅이나 귀족의 생활과 동일하였다. 그들은 받드는 데 있어 오리엔트에서와 같은 특권적인 승려계급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고, 절대시해야 할 교회나 경전도 없었다. 시민 중에서 신관(神官)이 나왔고,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신화가 생겨나고, 그 신화는 그리스만이 아니라 유럽의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이용되고,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에서 4년마다 汎그리스적인 체전이 거행되듯이 사람들은 신을 모시기 위하여 각종 경기와 제전을 마련했으며, 그러한 행사는 시민의 생활을 다양하고 즐겁게 수놓았다.그러나 그리스에는 인간적이고 현세적이며, 밝고 명랑한 올림포스의 신만이후세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분야를 크게 논리학?형이상학?자연사?윤리학으로 구분하고, 수사학과 정치학을 윤리학에 포함시켰으며, 시학(예술?철학)을 따로 독립시켰다. 자연사는 오늘의 자연과학에 해당하는 분야로서 물리?천문?심리?동물?식물?광물 등이 거기에 포함되었으며, 동물학과 식물학에 관한 저술은 특히 주목된다.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저술은 그 제자들의 강의노트에서 정리되거나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문체나 체계에 있어 플라톤의 대화편에 뒤지지만 학문의 거대한 보물창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아리스토텔레스는 특히 자연사분야에 있어 실험적이고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는 바, 이러한 그의 방법은 정치학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모든 자료를 면밀하게 수집하여 158개의 폴리스의 국제에 관한 연구를 했으나, 그 중에서 「아테네의 國制」만이 현존한다. 그의 유명한 「政治學」 역시 이상국가를 논하기보다는 1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에 따른 政體를 구분하여 그것의 선 ?악의 형태를 논하고 있다. 즉, 군주정치와 참주정치, 귀정정치와 과두정치, 민주정치와 민중지배를 객관적으로 예리하게 분석 검토하고 있다. 아마 이에 비견할 정치학관계 논술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그리스의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탐구정신은 오리엔트, 특히 이집트의 의술을 의학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코스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of Cos, ca. B.C460~377)는 오리엔트 의술에 따라다니는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질병의 정확하고 객관적인 임상적 관찰에 입각한 의학발달의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유명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통하여 의술의 윤리성을 강조하였다.4) 歷 史그리스의 합리적 정신은 오리엔트의 年代記를 넘어서 참된 의미의 역사서술을 탄생시켰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 ca. B.C 484~420)의 「歷史」는 페르시아전쟁을 주제로 한 것이지만, 그는 이 전쟁을 근본적으로편적인 세계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보편적인 세계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품안에서 자라났으며,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새로운 시대와 사회건설의 중요한 창조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2) 法 律로마법은 로마의 가장 위대한 문화적 유산의 하나다. 로마인은 일찍이 기원전 5세기에 12표법을 비롯하여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 등 일반적인 소송만이 아니라 國制에 관련된 것까지 법으로서 규제하고 확정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법들은 시민법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점차로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함에 따라 시민법만으로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세계국가를 질서있게 통치하려면 시민법을 넘어 여러 민족에게 통용되는 보다 넓은 법이 필요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른바 만민법(萬民法, jus gentium : law of peoples)이 발전하게 되었다.이러한 로마법의 발전을 통하여 로마의 법관이나 법률가들은 형평의 원리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실적인 법을 초월한, 현실의 법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인 법의 기본원리를 상정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그럼으로써 현실의 모든 법의 토대가 되는 정의와 형평의 원리에 입각한 자연법(jus naturale : natural law)사상이 이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자연법 사상은 로마인의 가장 큰 공적이었으며, 그 사상적 기원은 스토아학파에 있으나, 실제로 이를 구체화한 것은 키케로였고, 이를 계승하여 자연법, 만민법, 시민법의 개념을 정립한 것은 포악하기로 유명했던 카라칼라제 시대의 법학자 울피아누스,(Ulpianus ca. 170~228)였다. 이러한 방대한 로마법은 후에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제(Justinianus, 527~565)에 의하여 집대성되어 「로마法大全(또는 法學大全」(Corpus juris civilis)이 편찬되었고, 후세의 법체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3) 思 想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던 로마인은 심오한 독창적인 철학이나 사상체계를 남기지는름다운 주춧돌이 끼워져 있고, 주두에는 2개의 소용돌이 무늬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도리아 양식과 같은 엔타블레이춰 부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프리즈 부분은 도리아 양식과는 달리 트리글리프와 메토프 대신에 두루마리 그림 모양의 돋을 새김이 있다. 기원전 560년경 에페소스(Ephesos)의 아르테미스(Arthemis) 신전은 이 시기의 대표적 이오니아 양식 작품이다.《이오니아 양식 2》헬레닉 이전 시대의 그리스 본토에 있는 유일한 이오니아 양식으로 기원전 6세기경에 건립한 델포이의 아폴로 성소에 있는 시프노스인의 보물창고를 들 수 있다. 인 안티스형의 이오니아식 작은 신전인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기둥이 코레(여인상)로 만들어진 점이다. 파피루스나 로투스 식물을 기둥으로 추상화시킨 이집트의 것처럼, 대개 기둥은 기존의 자연 대상을 건축 개념에 맞게 추상화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신전의 기둥은 이처럼 일반적인 건축 추상화 과정과는 반대로 이미 추상화 과정을 거친 기둥에서 신전의 역할 곧, 신전을 지키는 사람의 모습으로 역추상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상(자연 1)이 추상화된 사물(형상화 1)에서 또 다른 대상(자연 2)으로 다시 한 번 더 추상화한 형태(형상화 2)가 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에렉테이온신전에서 다시 한번 더 나타난다.《코린트 양식 1》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코린트 양식은 톨로스(둥근꼴 건축)가 등장한 기원전 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부재의 구성은 이오니아 양식과 비슷하지만 주두에 아칸서스(Acanthus)의 잎과 덩굴이 얽힌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이오니아 양식과 다르고, 또 이오니아 양식에 비해 더《코린트 양식 2》우아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양식은 그리스에서는 잘 쓰이지 않다가 뒤에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는 로마에 전해지면서 이오니아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아칸서스 잎을 결합한 새로운 양식인 콤포지트 양식으로 발전한다.지금까지
★ 자유주의 ★◈ 단원의 개관 ◈19세기의 유럽사는 유럽 근대사회의 확립과 발전의 역사이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프랑스혁명이 제기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에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완성됨으로서 제기된 노동문제와 사회문제,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사회주의가 엉키고 중첩되면서 전개된다.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혁명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보수적인 빈체제가 성립하여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억압되었다. 그러나 1820년대에 중남미의 식민지들과 그리스가 저마다 독립하였다. 1830년 파리에서는 7월혁명이 일어나서 부르봉 復古王朝가 쓰러지고 다시 1848년에는 2월혁명으로 프랑스는 민주적인 공화국이 되고 빈체제는 붕괴하였다.2월혁명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승리였으나 새로 대두한 노동자 계급과 사회주의세력이 참가하여 시기상조의 과격한 요구를 제시함으로써 부르주아지가 겁을 먹고 한 걸음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에는 제2제정이 수립되고 기타 지역에서의 자유주의적인 민족운동이 좌절되었다.◈ 학습목표 ◈1. 빈회의의 성격을 두가지 이상 열거할 수 있다.2. 19C 유럽 각국의 자유주의 운동의 성격과 전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3. 7월 혁명의 성과에 대해 평가해본다.4. 프랑스의 7월혁명과 2월혁명을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5. 영국의 선거법 개정 과정을 말할 수 있다.6. 영국 차티스트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말할 수 있다.◈ 한국사와의 관계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제기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념들이 서로 부딪히며 유럽 근대사회가 진행되는 19세기 전반 무렵, 한국사는 조선후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분에 걸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경제면에서는 농업 생산력이 급증하여 사회 변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상공업에 있어서도 이미 상업자본의 성장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사회면에서는 부의 축적에 따른 신분의 상승이 일반화되어 양반사회의 신분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천민·노비의 해방이 진전되어 갔다. 또한 사상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사회변동에 유럽국가의 대표들이 참가2 참가국들은 연일 오스트리아가 주최한 주연, 무도회, 음악회에 참석하였다. 공식적 회합 있기는 했으나, 화려한 사교모임, 배후에 음모와 비밀회의를 통해 국경조정과 배상문제가 결정되었다.3 회의의 주역들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Ⅰ, 1777~1825)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로이센왕 등 각국 군주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를 비롯하여,영국의 카슬리(Castlereagh, 1769~1822), 프랑스의 탈레이랑(Talleyrand, 1754~1838) 등 각국의 쟁쟁한 대표들이 참석제 각기 다른 목적과 이해 관계를 가지고 최대한 자기 나라의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함4 빈회의의 성격*정통성의 원리 : 프랑스 혁명 이전의 역사, 전통, 정통을 되찾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억압 목적*복고주의 : 전통적인 구체제로 복귀하면서 모두 혁명이전의 상태 즉 영토, 왕조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어가겠다는 주의*세력균형주의 : 한 국가의 세력이 지나치게 팽창하는 것을 막기위해, 영국·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가 유럽대륙의 패권을 분할 점거하여 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하려 함*배상주의 : 서로 영토 교환, 보상 하나의 영토를 포기하면 그 대가로 다른 영토 준다.빈회의 결정사항1 러시아 : 폴란드 대부분 차지, 폴란드 왕국 세우고, 러시아 황제가 왕위 겸함2 프로이센 : 작센의 북부와 라인지방 획득3 독일 :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중심으로 39개국(35개왕국과 4개의 자유도시)으로 독일연방 구성4 네덜란드 : 오스트리아領 벨기에를 얻어 네덜란드왕국이 됨,4 스웨덴 : 덴마트로부터 노르웨이 획득스위스 : 영세중립국5 오스트리아 : 네덜란드 포기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회복·베네치아 획득이탈리아 정치적 분열6 영국 : 지중해 요지 몰타(Malta)섬과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케이프 식민지 · 세일론 획득3) 결과 및 의의1 유럽의 외교중심이 파리에서 빈으로 이전2 1815~1848년 사이 메테르니히가 전 유럽의화와 행복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정치 체제를 남북미 대륙의 어떤 부분으로 확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중남미의 우리 형제들이 만일 방임된 채로 있을 경우, 그러한 정치 체제를 자발적으로 채용할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이들 정부를 방임해 두는 것이 지금도 미국의 진정한 정책이요, 다른 강국들도 같은 길을 추구하도록 바라는 바이다.【내용】*반동적이고, 전제적인 유럽의 정치조직을 서반구에 수출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이념*유럽과 미대륙의 상호불간섭 신성동맹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간섭이 좌절됨*유럽열강의 아메리카 대륙의 간섭배제. 비식민, 비동맹, 비간섭, 미국의 고립주의가 보강된 것, 즉 상호무간섭주의이러한 고립주의 외교방침은 당시 정세에서 메테르니히 체제를 저지하는 힘을 발휘했으며 그 후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 원칙이 된다(메테르니히 체제 붕괴의 결정적계기)*시몬 볼리바르(1783~1830) : 콜롬비아 공화국, 북부 페루의 볼리비아 공화국(1825)의 독립 성취( 解放者 칭호얻음)*아르헨티나(1816), 칠레(1818), 페루(1821), 산 도밍고(1821), 멕시코(1820), 브라질(1820)독립Ⅲ. 자유주의의 발전(1830~1848)1. 7월혁명(1830. 7)1) 배경*나폴레옹 몰락 후 돌아온 부르봉 왕실의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한 1814년의 헌법을 선포 - 신앙의 자유, 법적평등, 관직개방을 비롯하여 혁명중의 재산처리를 인정하는 등 혁명의 성과 중 많은 것을 인정, but 1719년 헌법에 비교한다면 상당히 보수적인 것*행정권은 국왕에게만 속하며, 국왕은 장관을 임명할 권리와 입법기관에 대한 해산권을 가짐*입법기관은 양원제로서 상원의원은 왕이 임명하고, 하원의원은 선거로 선출되지만, 선거권은 재산으로 크게 제한되어 유권자는 10만을 넘지 못하였다. 법령은 의회의 찬동을 받아야 하지만 발의권은 왕에게만 있었다.*왕의 동생 아르투아(Artois) 백작을 중심으로 극우왕당파를 형성하여 앙시앵 레짐의 부활, 즉 혁명파│티에르 : 시민귀족 대표하는 좌파┗Baro : 온건야당, 좌익왕당파3 구왕당파와 공화주의자 두파 모두 7월왕정의 정적4 많은 법류 제정 - 시민층의 발전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노동자에게는 불만고조5 대외문제 큰 실정-1835년 알제리아, 이집트, 투르크문제에 있어 프랑스가 거대자본국이었던 영국에게 종속적으로 굴복 상공업자들에게 불만 야기6 1839년 총선거의 패배7 1846~47년 농사의 흉작 전반적인 경제위기(48~49,경제공황) 대량실업과 도산 속출8 징병검사 실시(1840) : 파리1/10, 농촌6/10 군대 들어감 징병검사에 불만9 1847년 3월 티에르 중심으로 선거법 개정 요구3) 2월혁명의 전개과정*기조내각의 사임과 선거권확대를 요구하는 정치적 연회 가 전국적으로 개최*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대대적인 연회 계획 학생과 노동자 중심 시위운동 소상점주와 수공업자 등 소시민층까지 합세하여 거리에 바리케이드 구축*기조의 저택이 습격받고, 수비하던 군대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혁명적 분위기 더욱 고조 2월 24일 시청 점령, 왕의 거처가 습격받자 루이 필립은 24일 퇴위 제2공화정 수립제2공화정 : 부르주아지 출신의 온건파 다수, 사회주의자(노동자계급 대표)도 참가1 임시정부는 노동자의 식생활 보장, 전 시민의 노동권 보장2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인정3 국립작업장 설립 : 실업자 구제4 보통·평등 선거 실시*유권자 25만명 200만명으로 증가(여성은 제외)*부르주아공화파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파5 총선거 실시 결과 온건한 공화파 대승 (900석 中 800석 차지)6월 폭동*파리의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의사당 침입(1848. 5.15) 의회의 해산과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 요구( 이 폭동은 노동자와 급진세력에 대한 시민계급의 두려움 더욱 강화시킴)*정부는 국립작업장 폐쇄, 동시에 여기 속한 노동자에게는 군대를 지원하거나 지방의 일자리 찾도록 명령*노동자들은 반항하여 6월 23~26일에 걸쳐 격심한 폭동 일으킴 카베냑 장군의 군대에 의하여 지배와 종래의 전제정치를 확인하는 外觀上의 立憲主義 에 불과하였다.3. 영국의 자유주의 개혁1) 배경1 프랑스 7월 혁명의 걔기로 일어남2 빈체제에 호응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유주의적 개혁 단행3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중산계층을 형성됨(17C부터)사회적·정치적 지위, 개혁요구(노동자계급 포함)영국 사회의 하부 구조적 변화 가져옴2) 정치적 변화(1)배경*1815년 실업악화로 인해 기계파괴운동 전개 노동계급탄압(집회금지, 인신보호법정지, 신문탄압)*토리당 내의 자유주의파가 주도하는 개혁 실시(1820, Robert Peal, George Canning)♠ 개혁의 내용1 관세인하 항해조례 자유화 시킴2 다수의 구법령 폐지 영국의 기술자들에게 이주 허락, 외국으로 기계수출 허용자유롭게 교환하는 무역체제, 자유무역 확립3 심사령폐지(1828) 非국교인 신교도에게 관직을 개방4 가톨릭교도에 대한 해방령(1829) 제정 가톨릭교도에게도 시민적 자유와 권리 부여5 100가지 극형 폐지6 야경군국제 폐지 직업적 경찰제도 확립♠ 토리당의 문제점-지주의 곡물법, 하원의 개혁단행 불가-1830년 이후 의회개혁문제에 초점 프랑스 7월혁명 영향으로 자유주의 개혁요구, 사회·경제적 변화로 의회구성과 선거법의 모순 돌출(2) 선거법 개정(제1차 선거법 개정)A. 배경1 영국의회는 여전히 지주층인 젠트리와 약간의 자유직업인 및 대상인과 금융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유권자의 수는 성년남자의 6분의 1에 미달2 중산계급의 힘이 강화되면서 새로이 신흥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이 형성되고, 신흥공업도시의 출현과 더불어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이동현상이 현저해짐3 부패선거구(rotten boroughs) : 인구이동이나 지형의 변화로 거의 유권자가 없어진 선거구-50명 미만의 유권자가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단윅(Danwick)의 선거구는 그 대부분이 바다에 매몰되어 선박 위에서 투표를 하는 형편이었다. 그 반면 맨체스터나 리버풀과 같은 신흥공업도시는 독립된 선거구를다.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신부의 행위는 살인죄에 해당할까? ★이 영화는 1327년 바스커빌의 윌리엄과 그의 제자 아소드가 황제가 내린 임무를 띠고 북부 이탈리아의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수도원 원장은 윌리엄에게 장서관으로 일하던 수도사 아델모의 의문의 죽음을 밝혀달라고 한다. 이어 그리스어 번역가 베난티오, 보조사서 벨렝가리오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윌리엄과 세베리노는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검사하다가, 익사체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혀가 까맣게 변색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세베리노는 윌리엄에게 이상한 서책을 발견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마지막으로 장서관 사서 말라키아 역시 손가락과 혀가 검게 변한 채 죽는다. 윌리엄은 아소드의 흘러가는 말 속에서 힌트를 얻어 아프리카의 끝 이라는 밀실을 찾아내고, 그곳에서 늙은 수도사 호르헤를 만나 사건의 진상이 밝혀낸다.호르헤 신부는 40여 년 동안 이 수도원의 주인 행세를 하며 이단으로 금지된 서책에 수도사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온 장본인이었다. 그는 기독교, 그리스 고전과 이슬람 문헌 등의 방대한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장서관을 사서, 필경사, 번역사 등에게만 접근을 허용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만은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델모, 베난티오 등은 모두 「희극론」이 장서관에 있음을 알고 몰래 읽어보다가 호르헤 신부가 발라놓은 독이 퍼져 죽게 된 것이다.이렇듯 호르헤 신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접근하는 수도사들을 독살해서라도 신앙과 교회의 영역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배척해야만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인간의 합리주의에 치를 떨며, 감히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이런 거짓된 지식에 대해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진리 의지에 충만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진리라고 착각하고, 잘못된 진리에 노출되는 수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마지막에는 문제의 『희극론』과 함께 자신을 불살라 버린다.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오는 호르헤 신부의 행위는 살인죄에 해당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르헤 신부의 행위는 명백한 살인죄에 해당한다.살인죄라 함은 형법 제250조에 해당하는 범죄로 고의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죄의 보호법익은 사람의 생명으로 침해범이다. 살인죄에서의 사람이라 함은 자연인에 한하고 범인 이외의 자를 의미한다. 자신의 생명을 박탈하는 경우에는 자살로써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으나, 자살에 관여한 행위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객체는 사람으로 생명이 있는 인간을 말한다. 본죄의 행위는 사람을 살해하는 것으로 살해는 고의로 사람의 생명을 절단시키는 것으로, 호르헤 신부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생명을 절단시켰으므로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이다.우선 살인죄에 앞서 범죄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범죄라 함은 사회규범에 대한 하나의 위반 행위로써 법이 금지한 행위를 위반한 것을 의미한다. 범죄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하고 유책한 행위이므로 구성요건인 해당성, 위법성 및 책임성의 세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성립한다.첫째, 범죄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이어야 한다. 구성요건이라 함은 형법 기타 형벌법규에 금지되어 있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규정해 놓은 것을 말한다.둘째, 위법성이 있어야 한다. 위법성이 없는 행위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더라도 범죄가 되지 아니한다. 위법성은 형법을 비롯한 모든 법규와 사회상규에 적극적으로 위배되고, 소극적으로는 형벌법규에 위법성조각사유가 규정되어 있지 아니한 경우에 위법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셋째, 책임성이란 비난 가능성 또는 형벌 적응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며, 주관적인 행위자의 평가 문제이다. 유책성에 있어서 행위자의 고의나 과실 등 주관적인 내부의사에 따라 그 책임이 달라지고, 심신미약자 · 심신상실자 · 형사미성년자 등과 같이 의사능력이나 연령에 따라 책임이 경감되거나 부정된다.이와 같이 범죄는 세가지 요건을 충족할 때에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호르헤 신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고의로 금서에 독을 발라 아델모, 베난티오 등 5명의 수도사를 죽인 행위는 명백히 살인죄에 해당한다.또한 범인이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타인의 사망의 결과를 발생시킬만한 가능 또는 위험이 있음을 인식 또는 예견하면 족하고 그 인식 또는 예견은 반드시 확정적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불확정적인 것이라도 미필적 범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大判 1954. 1. 6. 4288 형상120』에 비추어 볼 때 살인의 수단으로 금서에 독을 바른 행위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과를 발생시킬만한 가능성을 인식, 예견 및 그 결과발생의 용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범죄의 1차적 구성요건인 해당성을 충족한다.위법성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금서에 독을 발라 살인한 행위는 법률에 의거한 행위가 아니며, 형법 제20조에서 제24조까지 나오는 위법조각사유, 즉 정당행위 · 정당방위 · 긴급피난 · 자구행위 · 피해자의 승낙에 의한 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 따라서 살인을 할 목적으로 금서에 독을 바른 행위는 당연히 위법한 행위였으며, 그 결과 살인에 대한 죄를 저질렀으므로 범죄의 2차적 구성요건인 위법성을 충족시킨다.
★ 볼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최근 성대한 막을 내린 2004 아테네 올림픽으로 인해 그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동안 그리스 로마 신화는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만화로 읽는 신화로도 나왔고, 티비 프로그램으로도 많이 편성되어 나왔기에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등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책, 만화, 영화 등 어떠한 형태로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만화책 등을 통해 신화에 대해 처음 접했고, 영화에서도 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 생활에서 신화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대의 신화는 분명 오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적?지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예술이나 역사는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화의 가치는 인간 생활에 있어 중요한 문제들 -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 에 필요한 지식의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그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류와 함께 생겨나 발전을 거듭해 온 창조의 자취이며, 그러는 동안 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철학 ? 종교 ? 미술 등 각 분야에 고루 스며들어 하나의 엄연한 문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까닭에 신화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끼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신화를 많이 알고 싶어 하며, 예술가들은 신화를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오늘날의 역사와 함께 나아갈 것이다.볼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포함하여 동양 ? 북유럽 신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신화 65편을 골라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식으로 엮어 놓았다.『그리스와 그리스인,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그리스 사람들은 지구는 둥글고 평평한 것이라고 믿었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그 한가운데 있고 그 중심점을 이루는 것이 신들의 거처인 올림포스 산, 또는 아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결혼을 하여 많은 아들을 낳았다. 우라노스가 자식들을 지옥에 가둬두자 화가 난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시켜 우라노스를 죽이게 하였다. 결국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 의해 죽고, 크로노스는 신들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노스 역시 우라노스처럼 형제들을 지옥에 가두자, 화가 난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자식에 의해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 마다 먹어버렸다. 다행히 제우스는 잡아먹힐 운명을 간신히 피하고, 메티스를 아내로 맞았다. 메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을 먹여 그가 삼켜버린 남편의 형제들을 다 토해내게 만들었다. 제우스는 다시 살아난 형제들과 힘을 합하여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최고의 권력을 갖게 되었으며, 형제인 포세이돈 ? 하데스와 함께 크로노스의 영토를 분할했다.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는 지하(죽음)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지상과 올림포스는 그들의 공동 영토로 삼았다.3대에 걸친 부친살해에서 보듯이 그리스 신화에서는 위계질서를 찾을 수가 없다. 위에서 누군가가 지배하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는 많은 권력과 힘을 나누어 갖고, 분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개인주의가 발달한 것을 반영한다. 그러나 로마신화에서는 형제살해가 나타나는데, 부자살해는 있을 수가 없다. 이는 철저한 가부장적 성격을 보여준다.신들의 집은 테살리아에 있는 올림포스 산의 꼭대기에 있었다. 다들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우스가 소집을 하면 모두 올림포스궁전으로 모여들었다. 이 궁전의 대연회장에서는 여러 신들이 신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네크타르로 매일 향연을 베풀고 있었다. 이 네크타르는 아름다운 여신 헤베가 따라 주었고, 음악의 신 아폴론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신들을 기쁘게 해주었고 아홉 명의 무사(뮤즈)들은 그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태양이 대지에서 가라앉으면 신들은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올림포스의 여러 신들 가운데에서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헤라가 그의 추한 모습을 싫어하여 하늘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올림포스의 건축기사이자 대장장이로서, 많은 공적으로 인해 제우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부인으로 선물했다.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와 디오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일설에는 크로노스가 아라노스를 죽이면서 성기를 잘라 바다에 버려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신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모두들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녀가 사랑한 새는 백조와 비둘기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장미였다.사랑의 신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활을 들고 다니다가 신들이나 인간의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쏘았다.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제우스의 딸로, 모친 없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갑옷을 입은 채 태어났다. 왕들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으나, 시민생활의 보호자로서 농업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사랑한 새는 부엉이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올리브였다.헤르메스는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제우스의 전령(傳令)으로,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손에는 두 마리의 뱀이 엉킨 케리케이온 이라는 지팡이를 갖고 있었다. 상업, 격투나 그 밖의 경기, 도둑질 등 숙련과 기민성이 필요한 모든 것을 관장하였으며, 악기를 발명했다고 한다.아폴론은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로, 신들 중에서도 가장 용모가 수려했고 음악의 명수였다. 또한 태양의 신이었고 활의 명수이기도 했으며, 인간에서 처음으로 의술(醫術)을 가르치기도 했다.싸움의 신인 아레스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로, 용감한 신이다.아르테미스는 아폴론과 쌍둥이로 태어난 달의 여신이며 다산(多産)의 수호신이었다. 숲과 사냥을 사랑했고 일생을 처녀로 보냈으며, 사슴을 총애하였다.포세이돈은 제우스의 형제로 물의 신들의 지배자였다. 삼지창으로 바위를 부수기도 하고 폭풍을 마음대로 일으키거나 가라앉혔다. 또한 그는 말(馬)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경마(競馬)의 수호신이기도 했다.하데스는 지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카오스(혼돈)라고 부르는 상태로서 형태가 없는 덩어리, 다만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육지와 바다와 공기가 모두 섞여 있었다. 뭍은 아직 단단하지 않았고 바다도 흐르거나 움직이지 않았으며 공기도 투명하지 못했다.마침내 신(神)인 대자연이 이 사이에 들어 혼란을 종식시키고 육지와 바다를 나누고, 다시 하늘을 나누었다. 공기가 맑아지자 별도 보이기 시작했고, 물고기는 바다를, 새는 하늘을, 네 발 달린 짐승은 육지를 각기 보금자리로 삼았다.그러나 신은 이 땅에 고등동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창조의 신은 인간을 만들 때 자기와 같은 재료를 썼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프로메테우스는 대지에서 흙을 약간 가져다가 물로 반죽하여 신들의 모습과 비슷한 인간을 만들어냈다.〈프로메테우스〉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직립(直立)의 자세와 불을 가져다주는 등 인간을 위해 많은 애를 썼고, 또한 인간에게 문명과 기술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마침내 제우스의 뜻을 어기게 되어 그의 노여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산의 바위에 사슬로 묶어 놓았고, 독수리가 그 곳에 와서 그의 간을 쪼개 하는 벌을 내렸다. 만일 프로메테우스가 자진해서 제우스에게 복종하려고만 했다면, 이러한 가혹한 고통은 언제라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오늘날까지 부당한 수난에 대한 고결한 인내와, 폭력에 반항하는 의지력의 상징이 되고 있다.『천지창조와 인간의 탄생』, 『홍수에서 살아남은 데우칼리온』은 오늘날 기독교에서 나오는 창조론과 인간의 탄생, 그리고 노아의 방주와 유사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당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트로이의 헬레네』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단연 트로이 전쟁이다. BC 13C 일어난 이야기를 400~500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BC 8C 호머가 기록물로 남겨놓았다만, 싸움의 여인인 에리스는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화가 난 에리스는 피로연 자리에 황금사과를 하나 던졌는데,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자 헤라와 아프로디테와 아테나는 그 사과가 각기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고, 제우스는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심판을 내리는 것이 내키지 않아 이 여신들을 이데 산으로 보냈다. 3명의 여신은 양치기 소년 파리스를 찾아갔다. 헤라는 권력과 재물을 약속하고, 아테나는 전쟁에서 승리와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편을 들어 황금사과를 주고, 아프로디테의 보호로 그리스 스파르타 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설득하여 트로이로 데리고 가버렸다. 이 사건으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는 헬레네를 구하기 위한 명분으로 단결했다. 그리스 군의 전쟁준비는 전에 없는 대대적인 규모였고, 메넬라오스의 형인 아가멤논이 총지휘관으로 마침내 트로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스 군은 무력으로는 트로이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디세우스의 제안에 따라 꾀를 쓰기로 하였다. 함대의 일부를 철수시켜 근처의 섬에 숨긴 다음, 커다란 목마(木馬)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 목마를 아테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제물로 바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사실 그 안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잔뜩 숨어 있었다. 남아 있던 그리스 군이 배를 타고 철수하자 트로이군은 목마를 신성한 제물이라 생각하고 정중한 의식을 거쳐 성 안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그날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이윽고 밤이 되자, 목마 안에 숨어 있던 무장병사들은 나와 굳게 닫혔던 성문을 열었다. 트로이인들은 마음을 푹 놓고 있던 터라 순식간에 참살되었고, 트로이는 완전히 함락되었다. 자그마치 10년간이나 끌었던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군의 승 된다.
★ 고대 일본의 영웅 “쇼토쿠 태자”★일본은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인종적, 언어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상호간 접촉의 경험이 또한 많았다. 그러나 오랜 역사적 접촉은 우호적인 문화교류의 면도 있었으나 임진왜란, 일제의 국권침탈 등 싸움으로 인한 대립, 증오의 면도 있었다. 대립과 갈등은 피해자에게는 특히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를 남겨 놓았다. 예를 들자면 위안부 문제나 독도문제,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불신의 벽이 가장 가까운 두 나라 사이에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일본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데 있어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다. 너무 포괄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 일본의 성문화, 메이지 유신, 일본의 신화, 쇼토쿠 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매력을 가진 주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고르지를 못했었다. 결국은 인물에서 쇼토쿠 태자를 선정했다. 쇼토쿠 태자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듯이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이러한 쇼토쿠 태자는 일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떠한 인물이기에 일본이 위기상황이 올 때마다 그를 찾는지 궁금했다. 그랬기에 다른 매력이 많은 주제를 제쳐두고 쇼토쿠 태자를 주제로 삼은 이유이다. 그럼 지금부터 일본에서 쇼토쿠 태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자.지금 일본의 1만 엔짜리 지폐에는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얼굴이 새겨져 있지만, 그 전에는 일본 역사상 인물 중에 첫째 손가락에 꼽히는 쇼토쿠(聖德) 태자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1만 엔 지폐가 제일 비싼 것을 떠올리면 그의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다는 것 또한 그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 숭앙되고 있는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574년 용명천황(요메이천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쇼토쿠 태자의 어릴적 이름은 유마야도 황자였다. 모친이 마구간 문에 부딪혀 산기를 느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기묘하게도 예수를 연상시키는 출생부터가 범상치 않은 그는 고대 일본의 영웅 아니 신으로까지 추앙을 받았다. 숙모인 스이코 천황이 즉위하자 약관 20세에 섭정이 되어, 622년 사망할 때까지 약 30년간 일본의 정치를 좌우하며 고대국가 건설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모친이 마구간 문에 쉬이 짐작이 간다.우선 성덕 태자의 업적에 들어가기 앞서 6세기 야마토 정권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6세기 초 야마토 정권은 큐슈 북부에서 일어난 이와이의 난을 평정하고, 오키미 가의 직할령을 설치하고, 농민을 지배하는 등 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갔다. 이와 함께 야마토 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중앙의 호족들도 많은 토지와 농민을 세력 하에 넣게 되면서 주도권을 둘러싸고 호족들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 때에 정국을 주고하고 있던 오토모 씨는 임나 4현(지금의 전라남도 일원)을 백제에 할양하면서 뇌물을 받은 것이 탄로나 실각하게 된다.6세기 중엽에는 모노노베 씨와 백제계 호족인 소가 씨가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대립을 거듭하게 된다. 숭불파인 소가 씨는 도래인들과 결탁하여 조정의 재정권을 장악한다. 드디어 587년, 최대의 강적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멸망시켜 정권을 독차지한 소가노 우마코는 이제 꺼릴 게 없었다. 다시 불교를 반대하는 스슈운 천황을 암살하고, 비다쓰 천황의 아내이며 자신의 생질녀인 스이코 천황을 즉위시키게 된다. 당시 대신이었던 소가노 우마코는 역시 소가 씨의 외손인 동시에 사위이며, 천황을 조카를 섭정으로 삼아 정치를 담당케 하였는데, 이가 바로 쇼토쿠 태자이다.〈쇼토쿠 태자와두 왕자의 초상화〉스이코 천황은 일본 고대국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이코 천황이 즉위한 후 첫 번째 맞이하는 새해 아침의 광경이였다. 많은 관리들이 줄을 이어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관리들의 머리에는 저마다 다른 여러 가지 색깔의 관이 씌어져 있었다. 이 관은 쇼토쿠 태자가 처음 제정한 12색의 관으로, 관리들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관리의 위계는 문벌과는 관계없이 각자의 능력과 실적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12계급의 관위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호족이나 귀족의 자제라면 별다른 능력이 없더라도 주요 관직에 등용되었으나 이 12계급의 관위 제도에 의하면 신분이 낮은 가문의 자제들도 그 능력에 따라 높은 직위에 승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쇼토쿠 태자는 이 같은 관위 제도를 제정하였을까?당시 조정 내부의 호족 세력에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대호족으로서 세력을 떨치던 오토모 씨와 모노노베 씨의 세력이 쇠퇴하고 소가 씨가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지방호족들이 지배하고 있던 토지가 점차 조정의 직할지인 둔창(屯倉)으로 흡수되고 있었다.이 같은 변화에 대처하는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취한 것이다. 즉 관료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어온 호족 한사람 한사람의 조정 내에서의 서열을 확실히 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고 조정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제정하였다. 다음해에는 ‘헌법 17조’를 제정하였다. 이 헌법의 근본 취지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모든 것의 상위에 군림시켜 호족이나 조정 관리들이 모두 천황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조정에서 호족들이 권력을 다투는 일은 천황의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행위이므로 권력 투쟁을 지양하고 힘을 합쳐 천황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또한 우마코와 함께 「천황기」「국기」등의 역사서를 편찬했다. 이러한 정책들을 시행한 목적은 호족을 관료로서 조직화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를 정비하자는 것이다. 후에 일본이 위기상황을 맞아 천황을 내세워 단결을 부르짖을 때마다 쇼토쿠 태자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책으로 때문이라 할 수 있다.쇼토쿠 태자는 헌법을 제정하여 천황의 권위를 굳건히 하는 한편 대륙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5세기의 왜 5왕 시대 이후 야마토 정권과 중국과의 관계는 끊어졌으나 589년 수(隋)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중국대륙을 호령하게 되자, 외교방침을 바꾸어 국교를 열게 된다.쇼토쿠 태자는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견수사(遣隋使)로서 중국에 건너가 수 황제인 양제에게 국서를 바쳤는데, 그 국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었다고 한다.「아침해가 떠오르는 동쪽 나라 천황이 해가 지는 서쪽 나라 황제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신지요?」「무슨 말을 하는 거냐, 동쪽 오랑캐 주제에 큰소리를 치다니!」국서를 읽어 내려가는 신하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수양제는 벌컥 화를 내었다고 한다. 이는 쇼토쿠 태자가 대등 외교를 시도한 것이었고, 중화를 자처하고 천하를 군립 하던 수 양제가 노했으나, 고구려 원정에 크게 고심하던 터였으므로 일본과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배세청 등 하급관리 12명을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일본이라는 국명은 처음 쇼토쿠 태자가 중국에 보낸 국서에 ‘해가 나온 곳’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견수사는 수의 역사서 「수서(隋書)」의 기록에 의하면 전부 5차례에 이른다고 하며, 견당사로 이어져 일본 고대의 정치와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까지의 여로는 견당사의 경우를 보면 조난율 5할의 위험한 뱃길이었다. 중국에 도착해서는 수십년씩 장기간 체재하면서 선진 학술?사상?문화를 섭렵하고, 귀국해서는 신지식층으로서 국정 전반에 큰 역할을 했다.한편 고구려는 수나라의 공격을 받아 국력이 피폐해졌고 백제는 신라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 두 나라도 왜와 선린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학자와 승려?예술가?기술자 등을 왜에 보내어 선진문화를 보급시키기에 이르렀다.일본헌법 17조에 불교 숭앙의 조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는 일본의 고대국가 건설을 살피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