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유파의 올바른 이해와 전승실태에 관하여.1.서론모든 민족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술 문화를 가지고 있고, 또한 지금도 전승하고 있다.우리의 자랑스러운 판소리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대강 알고 있으면서도 내용을 이해하며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판소리는 가깝고도 먼 존재로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판소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 이상이다. 예술이라면 잘 빚어진 형태미와 고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연상하게 되지만 판소리는 그저 투박하게 생겼으면서도 그 안에 모든 것을 함축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판소리에는 보통 사람들의 진솔한 삶이 담겨 있고, 역사가 숨쉬고 있으며, 당대 예술과의 교섭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판소리는 전통 사회와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지를 제공해주는 문화 첨병이라고 할 수 있다.2. '제'의 개념판소리 용어 중에서 '판소리'라는 말 말고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이 바로 '서편제'일 것이다. 공전의 대히트를 한 영화 때문에 '서편제'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용어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온갖 오해가 난무하고 있어서 차분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서편제라는 용어는 넓게 보면 '제'라는 개념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개념이다. 그래서 '제'라는 개념을 우선 알아보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한다.판소리 '제'의 쓰임새를 보면 그 범위가 상당히 넓지만, 일반적으로는 유파(流派)의 개념으로 쓰인다. '제'의 범위판소리 '제'는 흔히 유파의 개념으로 쓰인다. 그러나 '제'라는 말이 유파에만 한정되어 쓰이지는 않으며, 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라는 말은 '법제(法制)' 또는 '제작(製作)'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흔히 '소리제'라고 하며, 이를 줄여 '제'라고 한다. 이러한 제의 용례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1) 더늠: 판소리 명창들이 작곡하여 자신의 장기로 부르는 대목.(2) 바디: 명창이 스승으로부터 전승하여 한 마당 전부를 음악적으로 절묘하게 치는 듯이 하고, 서편제는 계면을 주장하여 연미부화하게 하고 구절 끝마침이 좀 질질 끌어서 꽁지가 붙어다닌다. 동은 담담연 채소적이라 하면 서는 진진연 육미적이다. 동은 천봉월출격이라 하면, 서는 만수화란격이다. 그 색채와 제작을 개략 이상으로 표시하면 근사할 듯하다. 중고제는 비동비서의 그 중간인데 비교적 동에 근한 것이다. 그러면 동서의 유래가 여하히 분류된 것이냐 하면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하여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지 이쪽을 동편이라 하고 저쪽을 서편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지역의 표준을 떠나서 소리의 법제만을 표준하여 분파되었다. 중고제, 호걸제는 염계달 김성옥의 법제를 많이 계승하여 경기, 충청간에서 대부분 유행한다.인용한 글에 의하면 판소리의 유파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호걸제의 네 가지가 있으며,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으며,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이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이 기록은 판소리 전성기에 있었을 다양한 유파와 다채로운 기법을 쓴 것이 아니라 판소리가 이미 소멸의 시기에 들어서 쇠잔한 양상을 반영하는 증언이기는 하지만 그 동안 판소리 유파와 기법에 대하여 해명한 작업은 대체로 정노식이 기술한 이 대목의 확대 부연이라 생각되어, 그간의 판소리학의 성과를 정리하기로 한다.(1) 동편제동편제는 지역적으로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에서 발원하였으며 송흥록이 중시조라 하였다. 동편제에는 송흥록제와 김세종제, 정춘풍제 등이 있다. 송흥록제는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남원구례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해간 유파이다. 송흥록은 ‘모든 가조를 집대성’하여 판소리를 완성했으므로 ‘가왕’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김세종제는 동편제의 다른 가닥으로 분류되는데, 주로 고창의 신재효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승 집단에서 가왕의 판소리 사설과 음악의 내용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수정한 것이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기왕의 「춘향가」보다 양반적 취향이 많이 가미되어 우아하고 섬세해진 변화된 모습이 특징이다.동편제 판소리의 특성은 량에 의존하는 소리라면 서편제는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기교적인 음을 얻어 소리를 완성하는, 즉 ‘가공과 기교와 수식으로 소리를 만드는 유파’라고 할 수 있다. 서편제는 소리가 늘어지고 템포가 느리기 때문에 잔가락이 많이 끼어들게 마련이고, 또한 소리에 여유가 있어 발림도 풍부한 것이 특징이며, 극예술로서의 요건을 다분히 갖추고 있다. 고졸하고 소박한 동편제의 경지를 개혁한 서편제는 기술적인 면에서 향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편제는 ‘정통적인 창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발전된 유파’라고 규정할 수 있다.(3) 중고제, 호걸제경기/충청 지역을 무대로 전승되어 오는 중고제는 순조 때의 명창 김성옥, 김정근, 황호통, 김창룡으로 이어지는 소리제와, 같은 시기의 명창 임계달, 고수관, 한송학, 김석창으로 전해지는 소리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전승이 끊어졌다중고제는 박헌봉이 『창악대강』에서 ‘동편 서편도 아닌 중간제’라고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고제라는 통일된 창법으로 판소리 한 마당을 자초지종 부를 수 없다는 점과 중고제가 동편제나 서편제의 어느 쪽과도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중고제는 유파라기보다는, 가풍 또는 특정 대가가 개발한 특수 창법인 더늠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호걸제의 개념 또한 명료하지 않으며, 중고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기충청 지역의 소리 스타일로 생각된다.3. 유파를 나누는 기준판소리의 유파를 나누는 우선적인 기준은 전승 지역이다. 특출한 명창이 사는 지역이 자연스레 판소리 전승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명성과 교육적 능력을 가진 명창이 학생들과 함께 기식하면서 오랜 시간 학습하였다. 같은 스승에게 배우다 보니 배우는 이들의 소리 스타일도 거의 같게 되었다. 씩씩하고 웅장한 맛이 나게 소리를 끌어가거나, 애원 처절하며 기교를 많이 부리는 일을 위주로 소리하는 것은 소리를 독화재로 보호받게 되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는 1968년에, 「수궁가」는 1970년에 지정되었으며, 「적벽가」와 「흥보가」는 1971년에 각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74년 이들 개별적으로 지정되던 것이 판소리로 묶이게 되었다. 판소리 명창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제도적으로 판소리를 보존·전승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었다.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전수되고 있는 판소리의 현황을 살펴보자면, 「수궁가」는 유성준이 보유했던 동편제가 정광수와 박초월 두 계통으로 명맥이 전승되고 있다. 정광수제 「수궁가」는 김영자가 보유자 후보로, 정영미가 보조자로 지정되어 있다. 박초월제 「수궁가」는 남해성과 조통달 두 사람의 보유자 후보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춘향가」는 현재 「김세종제 춘향가」와 「정정렬제 춘향가」, 「김연수제 춘향가」가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새로운 계통으로 「김소희제 춘향가」가 포함되어 있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성우향이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김여란이 보유하였다가 박봉례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전수되고 있다. 「김연수제 춘향가」는 보유자 오정숙과 보유자 후보 은희진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김소희제 춘향가」는 신영희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심청가」는 현재 보성소리 서편제 창제자 박유전이 갈고 닦은 소리를 정재근에게 전수를 했고, 이를 이어받은 정재근은 자기 소리를 가미하여 정응민에게 전수해 보성소리를 완성했다. 보성소리는 서편제 가운데서도 특히 19세기 말에 보성을 거점으로 형성된 판소리 유파인 셈이다. 본래 서편제 소리는 미성에 애끊는 듯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여기에 탁성을 가미하여 웅혼한 소리로 재 창제를 한 것이다. 다른 말로 ‘강산제’라 칭하기도 한다.인 「정응민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소리제는 보유자 성창순과 보조자 이순자에 의하여 한가닥이 전승되고, 보유자 조상현이 다른 가닥을 보존하여 전승시키고 있다. 「흥보가」는 김정문이 전승시켜온 동편제가 유일한 전승의 유파이다.박봉술제 적벽가」, 「김연수제 적벽가」, 「박동진제 적벽가」 등이 공고한 전승력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다.·김세종제 「춘향가」 - 정응민- 성우향 - 김수연, 김영자성창순 - 이추월, 김명자조상현·정정렬제 「춘향가」 - 김여란 - 최승희, 박초선·박동실제 「심청가」 - 김소희 - 신영희, 김동애, 안숙선, 이명희한애순, 장월중선·정응민제 「심청가」 - 박춘성, 안채봉, 성우향성창순 - 안숙선, 박양덕, 김수연, 김영자·김정문제 「흥보가」 - 박녹주 - 한농선 - 김영옥박송희 - 정순임·김정문제 「흥보가」 - 박초월 - 남해성, 최난수, 김경숙, 전정민·유성준제 「수궁가」 - 정광수 - 박초월 - 김영자, 안숙선·정응민제 「수궁가」 - 정권진, 조상현 - 정회석·박봉술제 「적벽가」 - 송순섭, 김일구·정응민제 「적벽가」 - 정권진·박동진제 「적벽가」 - 강정자·김연수제 다섯바탕 - 오정숙 - 이일주, 조소녀, 민소완5. 판소리 「춘향가」의 유파별 특징「춘향가」는 동편제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서편제가 성창되고 있다. 서편제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정렬의 바디와 그 제자인 박동진, 김연수, 김소희 등이 짠 바디, 정광수에게 이어진 김창환 바디, 한애순, 한승호에게 이어진 김채만 바디 등을 들 수 있고, 동편제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응민 바디, 박녹주, 강도근의 「송판 춘향가」 등을 들 수 있다.정광수에게 이어진 김창환 바디의 「서편 춘향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쑥대머리’ 대목 춘향이 옥중에서 이 도령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바디이다. 그러나 임방울의 것과는 다른 것이어서, 임방울의 경우에도 정정렬 계통의 영향을 받고 거기에 김창환 계통의 「춘향가」를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임방울 「춘향가」의 전판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정광수 등의 소리를 바탕으로 유추할 따름이다. 정광수는 이 소리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는데, 다른 바디보다 극적인 부분이 많아 발림으로 표현되는 부분도 상당수 있다. 사설의 맺고 끊음이 분명해 고제 「춘향가」의 대명사로 분류된다.정정렬로부렵다.
꼭두각시놀음의사회적 고찰<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꼭두각시놀음의 유래2. 꼭두각시놀음의 연행방식3. 꼭두각시놀음의 구성과 내용4. 꼭두각시놀음의 등장인물5. 꼭두각시놀음의 산받이 역할6. 꼭두각시놀음의 재담7. 꼭두각시놀음의 주제 및 시대상8. 꼭두각시놀음의 전승Ⅲ. 결론Ⅰ. 서론전통극 중 유일한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은 서구의 연극과 달리 막과 막 사이에 줄거리상 연관성이 없이 독자적인 내용을 가지는 것이 특색임에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공연 형식면으로 보아, 무대 밖의 악사나 관중이 무대 안의 인물들과 수시로 대화하는 방식을 취하여 거리감을 없앤다는 점은 전통극으로서의 중요한 특징이다. 꼭두각시놀음은 서민들 사이에서 연희되어 왔던 관계로 비속하고 해학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어 있어, 우리나라 전통 인형극의 특징인 골계미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인형극의 대사도 가면극의 대사와 마찬가지로 사투리, 비속어, 외설어, 신소리, 말조롱, 은어 등을 많이 쓴다는 점도 참고로 해야 한다. 이러한 대사의 표현 방법은 민중성, 해학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이기에 주요한 특성이 된다.Ⅱ. 본론1. 꼭두각시놀음의 유래1) 기원꼭두각시놀음은 우리나라 전래의 민속인형극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이자, 현재까지 전래된 민속인형극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일명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주인공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이 꼭두각시놀음은 과거 봉건 시대부터 개화기까지 떠돌아다니던 직업적 유랑연예인들인 남사당패에 의하여 연희 되었으며, 남사당패의 여섯 가지 놀이인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가운데 마지막 놀이에 포함되는 것이다.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꼭두각시놀음).실제로 꼭두각시놀음을 연행했던 남사당패들은 이 놀이를 ‘덜미’라고 불렀다. 덜미라는 명칭은 광대들이 인형의 목덜미를 잡고 조종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이러한 꼭두각시놀음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의 홍이 그 음이 같으므로 해서 이것 역시 그 인형을 인격화하여 관명의 동지를 붙여 ‘홍동지’라 부르는 것이다.꼭두각시의 ‘각시’는 젊은 부녀자인 새 색시 곧 신부를 가리켜 각시라고 하며, ‘꼭두’는 문헌상으로 보아 훈민정음 분포 전 후대에 있어서는 괴뢰를 ‘곡도’라고 했다가 차츰차츰 후대로 내려오면서 된소리로 변해온 것이라고 보겠으니, “곡독→곡도→곡둑→곡두→꼭둑→꼭두”가 되었다고 본다.2. 꼭두각시놀음의 연행방식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패 놀이판의 한 구석에 포장을 치고 연행된다. 연희자들이 ‘포장’ 또는 ‘덜미포장’이라고 부르는 꼭두각시놀음의 무대는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무대면이 되는 쪽만 구경꾼들이 인형의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직사각형의 공간을 남기고 포장을 둘러친 공중무대이다. 꼭두각시놀음은 대개 저녁 시간 이후에 연행되는데, 이 때 조명으로는 무대 양편에 관솔불을 밝혀 온 것이 전통이다.꼭두각시놀음은 인형을 조종하는 대잡이와 그를 도와주는 대잡이보, 연극의 내용에 따라 반주를 하는 악사(잽이), 잽이의 지휘자 구실을 하면서 동시에 극중 인물의 대화를 통해 연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산받이 등에 의해 연행된다.대잡이와 대잡이보는 무대로 이용되는 포장 안에 들어가 인형을 조종한다. 이들은 머리끝이 관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무대면의 포장 아래에 앉아 인형을 조종하며, 인형의 대사(재담)도 맡아 한다. 재담은 주로 대잡이와 잽이의 우두머리 격인 산받이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거나 합창해야 할 때는 대잡이보와 잽이들도 재담에 참여한다.잽이들은 포장 밖에 앉아 북ㆍ꽹과리ㆍ징ㆍ장구ㆍ날나리 등 풍물을 이용하여 인형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반주를 한다. 이들은 인형의 움직임과 객석의 반응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무대면에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앉는다. 상쇠격인 산받이는 악사들의 반주를 지휘하며 인형 주조종자인 대잡이와 재담을 주고받으며 극을 이끄는, 곧 오늘날의 연극에서 연출자와 같은 구실을 담당한다. 잽이들의 반주 음악은 염불, 타령, 굿거리 등으로서 박첨지는 허세를 부리고, 비속한 말씨를 쓰며, 힘의 논리를 따지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본처를 두고 첩을 거느리며, 감사의 억지 요구에 순응하는 인물로서, 주위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또한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스스로 양반임을 내세운다. 그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부패한 양반관리(평안감사와 그 아들)와 이에 저항하는 신흥 민중세력(홍동지·꼭두각시 등)의 사이에 끼어 처신에 어려움을 느낀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중간 계층의 인물로 볼 수 있다.2) 홍동지젊고 기운이 세며, 의협심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벌거벗은 상태로 등장해서, 위선적인 관료와 타락한 중을 공박하는 민중적이고 사회비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3) 꼭두각시박첨지의 본부인으로서, 첩인 돌머리집과의 갈등을 통해 남성 위주의 가족 구조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인물이다. 한편 나이에 맞지 않게 강한 성적(性的) 욕구를 나타내서, 원래 생산신으로서의 존재가 시대상의 변화에 의해 변모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4) 평안감사정치에는 뜻이 없고 사냥과 치부에 관심을 가진 타락한 관리의 전형이다. 따라서 허세와 위선 탐욕을 지닌 양반층을 대표한다.5) 이시미이시미에 대해서는 봉건관료와 토호, 권력층, 양반, 외치세력 등으로 그 평가가 다양하다. 이시미는 극중 인물을 잡아먹는 이무기로 이본에 따라 잡아먹는 대상이 다르다. 김재철본은 굶주림 때문에 사람과 짐승을 잡아먹으려 하며, 심우성본은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한편 박헌봉본과 최상수본은 그 대상이 박첨지의 식구로 한정되어 있다.이시미는 민중을 괴롭히는 타락한 양반관료로 볼 수도 있다. 곧 거세되어야 할 강력한 사회악을 상징한다. 따라서 민중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홍동지가 이에 맞서 퇴치시킨다.6) 동방삭인간세상을 부정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눈을 감고 다니는 도인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세속적인 삶에 동화되어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깨달아 간다. 황해도 장연본에 나오는 현묵대사도 동일한 유형의 인물이다.4. 꼭두각시놀음의 구성과 후하게 나누어주자 꼭두각시는 금강산으로 중이 되러 가겠다고 퇴장함.제6막 지배계급의 횡포와 그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매사냥'으로서, 평안감사가 새로 부임해오자 마자 매사냥을 하겠다며 포수와 사냥하는 매를 대령하도록 한다.제7막 지배계급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조롱을 보여준다.'평안감사 상여'로서, 평안감사가 모친상을 당해 상여가 나가는데 상제는 오히려 좋아하며, 상여가 나가는 도중 상두꾼 한 사람이 발병이 나자 발가벗은 홍동지가 불려와서 상여를 멘다.제8막 절을 짓는 것은 주인공의 종교에의 귀의로 해석할 수 있으며, 마지막에 다시 절을 허는 것은 토속사상과 외래종교인 불교와의 상극이라는 해석으로, 또는 종교마저 뛰어넘는 주인공의 초월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건사(建寺)'로서, 박첨지가 나와 장례 후 명당에 절을 짓겠다고 알리면 중 2명이 나와 조립식 법당을 짓고는 다시 헐어버린다.2) 심우성 채록본1. 박첨지 마당박첨지 유람거리박첨지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다가 꼭두패의 놀이판에 끼어들어 구경한 이야기를 하며 유람가 등을 부른다.피조리거리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박첨지의 딸과 며느리가 뒷절 상좌중과 놀아나다가 갑자기 나타난 홍동지에게 쫓겨나간다. 박첨지가 나와서 홍동지를 꾸짖고 퇴장한다.꼭두각시거리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모순과 서민층의 생활상이 나타난다.박첨지와 꼭두각시가 서로를 찾으며 노래를 각각 부르다가 반갑게 만난다. 그 후 박첨지가 작은마누라(돌머리집)를 얻었다고 하자. 두 여자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꼭두각시는 박첨지에게 살림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나, 분배가 공평하지 못하자 중이 되러 간다며 퇴장한다. 그러자 박첨지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말하면서 운다.이시미거리 이시미를 통한 반민중적 대상들에 대한 징계를 보여준다.이시미가 양식 축내러 왔다가 청노새를 비롯하여 박첨지 손자·피조리·작은 박첨지·꼭두각시·홍백가·영노·표생원·동방삭이·묵대사를 차례대로 잡아 먹는다. 이시미에게 물린 박첨지는 홍동지 덕분에 살아나지만, 자기 명에 의해 살아났다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꼭두각시놀음의 인형은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산받이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고, 그 기능이 확대된 것이다.(2) 놀이공간의 확장자로서의 산받이산받이는 공중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중간 위치에 자리하여 서로를 연결시켜 주며, 전체적인 무대의 개념까지 확장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확장은 물리적, 심리적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선 물리적인 공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평면적인 인형무대에서 산받이가 위치한 악사석까지 모두 무대의 개념으로 확장되었다고 해석했다. 평면적인 인형이 등장하는 제한된 인형무대에서 벗어나, 악사석까지 무대로 인정한다면 물리적인 인형의 무대는 평면이 아닌 입체적 무대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무대는 심리적으로 확대된다. 심리적인 확대라고 하면, 폐쇄적 무대에서 ‘개방적인 무대’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은 대표적인 민속극인 탈춤에서 잘 나타난다. 탈춤의 특징 중 하나가 연희자의 공간인 무대와 관객의 공간인 객석이 서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연희자와 관객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의식과 연결된다. 관중은 자유롭게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탈춤은 연희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공동으로 만들어가는 연극이다. 연희자의 방백이나 악사, 관중의 추임새 정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에 직설적인 비판과 노골적인 간섭이 항시 가능한 자유분방한 ‘참여의 연극’인 것이다.이러한 특징은 바로 꼭두각시놀음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꼭두각시놀음과 탈춤이 다른 점은 전문적인 개입자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탈춤에서는 관중의 참여도 따라서 유동적인 공연이 이루어지지만, 꼭두각시놀음은 의도적으로 산받이를 배치하여 극적 유동성, 즉흥성, 개방성을 만들어 나간다. 산받이는 꼭두각시놀음이 단지 인형들만의 연극이 아니라 바로 관객들 자신의 이야기임을 지속적.
1930년대 단편소설의 새로운 행보1. 1930년대 문학을 보는 눈30년대 우리 소설계의 자존심의 표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채만식, 이태준, 박태원, 김유정, 안회남의 문학은 그 대표성에도 불구하고 실상에 즉해서 해석/평가하는 작업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유정은 해방 이전 요절하고 채만식은 6.25 직전에 세상을 뜨고 이태준, 박태원, 안회남은 월북하여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에 묶인 데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새로운 연구자들이 기존 문학사가들의 일면적 또는 그릇된 평가를 근본적으로 승인하는 테두리 안에 안주하는 것이야말로 병통이다. 가령 채만식은 풍자소설가, 이태준은 순수주의자, 박태원은 세태소설가, 김유정은 전원소설가 등. 우선 이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이 작가들을 면밀히 읽어보면 우리는 이 규정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2. 1930년대 단편의 새로운 영토 : 김유정, 안회남, 박태원김유정의 [동백꽃]은 그저 단순한 농촌 로맨스가 아니자만 그렇다고 ‘나’와 점순이의 관계를 소작인의 아들과 마름의 딸이라는 계급적 문맥에서만 바라볼 일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 20년대와 다른 김유정 문학의 새로운 자질이 뚜렷한 것이다. 또한, [산골 나그네] 역시 그런 작품이다. [만부방]에서도 [산골 나그네]처럼 농민의 생활세계에 깊이 뿌리박은 민담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봄봄]에서의 작가의 시각은 대상을 공격하는 풍자를 넘어서 대상을 포용하는 해학으로 따뜻하기조차 하다. 이처럼 20년대의 일면적 민중문학을 넘어선 김유정 문학의 새로움이 민담에 기초하여 성취됐다는 점이야말로 유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카프 농민문학도 아니고 전원문학도 아닌 김유정 문학의 독자적 특질이 그 후 현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문학사적 맥락도 유의할 대목인제, 한편 그것은 안회남에세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겸허]와 [소]가 그 대표적 예의 하나일 것이다.박태원은 김유정과 달리 서울 토박이로 시종일관 도시를 탐구해갔던 우리 소설사에서 드문 작가의 하나이다. 김유정의 농촌소설이 앞시기 또는 동시대의 농민소설과 다르듯이 박태원의 도시도 서사의 가닥을 정통적으로 잡아 나가는 염상섭이나 심훈의 장편에 나타난 서울과 사뭇 다르다. [천변풍경]의 제1장만 읽어도 우리는 박태원 문학의 새로움을 실감하게 된다. 카프를 넘어서 자연주의를 넘어서 그럼에도 경박한 모더니즘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박태원의 문학적 행보는 비록 시대의 제약 속에서 최고의 리얼리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930년대 우리 문학의 주선위에 확고히 서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제는 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소설가가 새로이 직면한 창작의 어려움이다. 여기서는 박태원 모더니즘의 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성탄제]에서의 박태원은 도시 빈민의 세계를 다룬다. 다루긴 다루되 빈민2세 이야기를 중심에 둠으로써 [운수좋은 날]로 대표되는 20년대 빈민문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작품에서는 영이의 시각과 순이의 시각을 교차함으로써 자연주의를 구원하고 있다. 또한, [골목안]에서의 박태원은 [성탄제]의 형식실험도 벗어던지고 아주 능란한 이야기꾼으로서 그려낸다.3. 1930년대와 해방 직후의 연속성 : 채만식과 이태준채만식의 [명일]은 [레디메이드 인생]의 주제를 반추하고 있다. 그의 출세작이지만 관념소설의 티를 벗은 후자보다 이 계열의 작품 가운데는 생활감이 더욱 풍부한 전자가 태표작이다. 이 작품 역시 30년대 지식인의 엄습한 위기의식을 다루고 있다. [치숙]은 물고 물리는 풍자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풍자문학을 넘어서 우리 소설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있다. 또한, [논 이야기]는 해방의 의미를 한 농민의 시점을 빌려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작품이다. 5.10선거에서 취재한 [도야지] 역시 주목할 작품으로써 가장 뛰어난 정치소설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또 하나의 층위가 깔려 있다. 작가는 해방의 감격 속에서도 오히려 허무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함을 보여준다.이태준은 단편문학의 명수다. [달밤]은 작가의 따뜻한 인간주의가 빛나는 작품이다. 작가는 본명 대신, 노랑수건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이 인물의 비단 같은 마음씨에서 도시적 생활 속에서 상실한 그 무엇을 곰곰이 반추하는 것이다. 또한, [복덕방]은 노인계열을 대표하는 단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영감은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 이제는 퇴물로 물러앉은 구시대의 상징이다. [폐강랭]은 [토끼 이야기]처럼 현이라는 지식인이 등장하는 사소설풍의 수작이다. 자본주의의 광포한 힘 앞에 노출된 지식인의 고뇌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농군]은 최서해의 [홍염]을 이어,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파하고 그들의 투쟁을 서사시적 화폭 속에 담아낸 농민문학으로써, 작가는 검열과의 일정한 타협이라는 궁핍한 구도 안에 오히려 일제에 대한 항의를 은밀히 묻어두는 일종의 성동격서를 구사한 듯하다. 또 다른 작품 [해방전후]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폐강류]류의 사소설과 [복덕방]류의 노인 계열의 뜻깊은 합류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훈민정음의 해설1. 머리말한글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국의 고유문자는 1443년에 이조 제4대왕인 세종대왕에 의하여 창제된 이래 한국어를 기록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이 면면히 사용해 오고 있다. 사실 세계의 문화사에 있어서 어느 하나의 문자가 언제 누구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창제되었는가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예는 극히 적다. 더구나 문자 창제의 원리나 통용방법 등을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이 또한 세계의 문자사, 나아가서는 문화사에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믿는다.그러면 과연 ‘한글’ 창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제자의 방법 혹은 원리와 그 학습적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제자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등에 대하여 훈민정음 원본의 내용과 기타의 서적을 참고로 하여 개략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는 것이 이 해설의 의도이다.2. 훈민정음의 명칭과 판본훈민정음이라는 명칭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국 고유문자의 최초 명칭이요, 또 하나는 신제문자에 대한 제자의 근거와 운용법 등을 해설한 책의 이름을 가리킨다.첫째, ‘훈’은 가르친다는 뜻, ‘민’은 백성, ‘정’은 바르다, ‘음'은 소리라는 뜻이니 합하여 보면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바른 소리, 즉 문자라는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이라는 명칭은 당시에도 간단히 ‘정음’이라고 약칭하였고 또 ‘언문’은 사나운 글자라는 뜻인데, 당시의 사대모화의 관념에서 한자를 머리에 두고 스스로 낮추어 부른 명칭이다. 이밖에 시대에 따라 반절, 국문으로 칭한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한글’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 명칭은 1910년 초에 주시경 등 국문애호가들에 의하여 명명되었고, 1927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한글’의 ‘한’은 한국고대사의 삼국, 또는 조선말기의 대한제국의 ‘한’을 연상하여 붙인 것이므로 한국 고유의 글자라는 뜻을 가진다. 또 ‘한’이라는 말에는 한국.- 한글 : 한국 문자로서의 명칭- 훈민정음 : 책으로서의 명칭훈민정음은 아래의 표에 보인 바와 같이 한문본과 국역본의 수종이 있다.(1) 해례본… 한문본 : 故 전형필씨 소장본(2) 예의본… a. 한문본 - a.해례본의 권두에 실린 것b.세종실록 (권 113)본b. 국역본 - 월인석보의 권두에 실린 것故 박승빈씨 소장본일본 궁내성본일본 금택장삼랑 소장본 등.3. 훈민정음의 체제와 내용의 오점체재는 크게 3부문으로 나뉜다.- 제1부 : 예의(例義)- 제2부 : 해(五解) :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례(一例) : 용자례- 제3부 : 정인지의 서문4. 한글의 창제동기와 목적세종대와의 한글 창제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훈민정음 예의 첫머리의 세종어제서문과 정인지의 서문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먼저 세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 한국어의 어음은 중국어와 다르므로 문자로는 잘 통하지 아니한다.(2) 그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3) 그러므로 새로 28자를 만들어 국민 누구나 쉽게 배워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사용하도 록 한다.이제 위의 내용을 정인지 서문을 부연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첫째는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한글 창제에 참여한 학자들의 확고한 언어문자관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 당시의 지식인ㆍ학자들은 거의 중국 측 한학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시대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중 양국어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하고 확고한 언어문자관을 확립하여 한국어에 적합한 새 문자를 창제한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이 정신을 확대 해석한다면 국가주의적 동기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둘째는 일반 언중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문자 생활을 가능하게 하려는 동기였다. 한자는 단기간에는 배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말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일반 언중들은 배울 기화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을 전달하고자 하여도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입장을 세종대왕은 용들을 종합하여 볼 때 결국 한글 창제의 직접적 동기는 종래 어려운 한자ㆍ한문이 일부 상층 계급의 독점물이었음에 비추어 일반대중까지도 배우기 쉬운 고유의 문자를 만듦으로써 국민을 널리 교화하려는 정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그런데 위와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게 된 동기에는 이면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이 중 세종대왕의 언어학상 성과를 종합하면 다음 세 가지 업적을 들 수 있다.(1) 새 문자의 창제 : 한글, 훈민정음의 반포(2) 한국 한자음의 정리와 통일 : 「동국정운」의 편찬(3) 중국 한자음에 대한 연구와중국 표준 자음의 제시 : 「홍무정운역훈」과 「사성통고」의 친술위의 세 가지 사업은 동시적, 상호 대조적으로 진행되었고, 이 사업에 참가한 학자들도 거의 같은 인물들에 의하여 종합적으로 성취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은 (2), (3)의 사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려 준다.동국정운의 편찬은 당시의 혼란된 한자음을 교정 개신하여 국민의 한문교육에도 기여함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숭유중도, 우문흥화에 이르고자 한 것이 동기요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길은 오직 한글과 같은 새 문자의 제정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에서는 자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반절법을 채용하여 왔다. 그러나, 한자 자체가 원래 표의문자이므로 객관적으로 정확히 표음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자와는 달리 한글은 표음문자 중에서도 특히 영어의 알파벳처럼 음소문자에 속한다. 따라서 아무리 복잡한 한자음도 자음, 모음으로 분석하여 명확히 분간표기가 가능하다.이제 지금까지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한글의 창제는 이원적 동기와 목적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자 한다.첫째, 훈민정음 예의의 서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자를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문자생활의 기회를 마련하여 주어 국민을 교화하기 위해서였다.둘째, 표음문자인 한글로써 바른 한국 한자음을 정립함은 물론, 중국음까지도 명확히 표음하여 자음의 분절방법과 반절음, 조음위치에 의한 음명, 자모의 선택, 청탁의 구별의 측면에서 비교할 수 있다.중국의 한자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글자마다의 형, 음, 의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춘 표의문자이다. 이 세 요소 중, 음, 즉 소리를 담당하는 부분은 다시 초성에 해당하는 성모와 종성에 해당하는 운모로 둘로 나누고 운율적 요소로서 여기에 성조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한글을 제작함에 있어서는 운모를 다시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어 결국 삼분법을 창안하였다. 한글은 음소문자이므로 제한된 문자를 조합하여 수많은 음절을 이루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훈민정음 예의의 서법규정 중 ‘모든 글자는 반드시 합하여야 음을 이룬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세 글자를 합하여 비로소 하나의 흠절을 이루는 특성을 지적한 것이다.한편 중국음운학에서는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을 오음이라 하고, 다시 설/치소리가 반설/반치로 나뉜 것을 칠음이라고 칭한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음의 분류 방법은 물론 그 명칭도 바로 중국음운학을 응용했다고 볼 수 있다.한문을 표음함에 있어서 성모와 운모로 나뉘는 데 성모 중 대표음으로 채택한 것을 자모라 한다. 하지만 반절법에서 성모는 총 451자에 달하는데, 이는 매우 번잡하므로 이중 한 자를 선택하여 일정한 성모를 대표하도록 고안되었다. 이것이 중국 중고음의 분류에 사용된 36자모이다. 한글 창제 시에 이 36자모가 대표하는 음가를 추정하고, 이 음들로부터 당시의 고유어와 한자어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변별적인 성모를 추출하였다. 그 결과 선별된 자모가 동국정운의 한자음 주음표기에 이용을 된 23자모이다. 훈민정음 예의의 초성 17자는 23자모에서 전탁음에 속한 6자(ㄲㄸㅃㅉㅆ)를 뺀 수이다. 중국의 36자모를 23자모로 통합하였다는 하지만 한 가지 창의적인 부분이 있다. 이는 원래의 중국의 자모의 한자를 우리의 발음에 맞게 고쳤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자모 전청아음은 ‘見’이었으나 동국정운에 와서는 ‘君’자로 표기된다. 훈민정음 예의를 보면 확같은 점으로 미루어 이 저술이 한글 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이 밖에도 중국음운학과 관련된 사항은 더 있다. 그러나 위의 사항만으로도 한글 제자에 있어서 음운학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5.2. 성리학의 도입과 그 응용성리학의 연구가 난숙하게 된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 배경을 고려할 수 있다.첫째는 대외적 영향 때문이다. 이조는 숭유척불을 국시로 내걸고, 명나라를 사대교린의 목표로 삼았는데, 명 초기의 사상 동향이 송대사상을 집대성 한 주자학의 계승으로 나타났다. 명나라의 복고주의는 송대에로의 환원을 이상으로 하였기에 송대 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붙인 사서오경을 명태조 이래 교과서로 사용하며 흥학에 전력을 기울였다. 명나라 제 3대 성조는 경서에 대한 송학적 신해석을 집대성하기 위하여 다수의 학자를 동원하여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하였다. 이처럼 사상계는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다.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선진국의 학술ㆍ철학사상은 그보다 후진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늘날에도 늘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물며 세종대에 중국의 학술 사상을 섭취한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둘째는 성리대전의 유입 때문이다. 성리대전은 송대 성리학의 성전이라 일컬어진다. 이 책이 명나라에서 간행된 해는 1415년인데 4년 뒤인 1419년에 우리나라에 전래하였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이 성리대전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연구토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에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도 인간하여 각 도의 향교에 배부하기까지 하였다.이 밖에 송대 철학사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유교, 도교, 불교사상이 혼용되어 이루어진 것이어서 한국적 사상과도 조화가 가능한 이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어쨌든 이와 같은 세종시대의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한글이 창제되었으니 성리학의 이론이 깊이 반영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그 중에서도 훈민정음 해례의 저술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주돈원의 태극도설을 중심으로 한 철
훈민정음의 중국음운학적 배경1. 서언세종 시대에 전개된 어문정책은 아래와 같은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1) 한글의 창제와 훈정의 반포, 간행.(2) 당시의 조선한자음을 정리ㆍ통일하여 이상적인 표준한자음을 제시하고자 시도한 「동 국정운」의 편찬.(3) 중국표준한자음을 제시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홍무정운역훈」과「사성통고」의 간행.위의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유문자인 한글은 백성들에게 표기 수단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2), (3)을 해결할 필요성에서 창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글은 다음의 세 가지 욕구를 다 충족시켜 주어야 할 문자였다.1. 순수한 국어의 표기2. 개정된 조선한자음의 완전한 표기3. 외국어음의 정확한 표기(1)~(3)은 어느 하나만을 고찰해서는 유기적 관계를 파악할 수가 없다. 가령 훈민정음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동국정운」과「홍무정운역훈」이나 「사성통고」를 그 배경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동국정운의 경우에도 훈민정음이나 「홍무정운역훈」, 「사성통고」와의 상호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동국정운」의 찬정이 훈민정음을 닿게 했는지, 한글ㆍ훈정의 제정, 간행이 「동국정운」을 찬정케 하는 계기가 되었는지 그 사이의 사정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양자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결국 위에 든 세 가지 사업은 무엇보다도 중국음운학의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세종대에 중국음운학이 중시되었을까. 이 점은 당시의 학문사상의 조류와 세종의 언어관을 도외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2. 세종대의 학문사상과 언어관조선은 유학, 그중에서도 송대의 성리학을 새로운 지배 질서로 세워진 국가였다. 성리학적 이념에 의하면 제왕 된 자의 참된 치국 방법은 성인의 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인의 도를 표현하는 수단은 결국 언어인데, 참되고 바른 언어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성인의 도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언어를 확립하기 위한 성운학(즉 언어음운학)과 문자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간과할 수 없는 매우 긴요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문제는 한자라는 동일한 문자 체계를 쓰면서도 중국과 우리의 말이 다르다는 데 있었다. 같은 한자를 읽더라도 중국과 다르게 읽었고,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읽는 방식도 표준이 없이 혼돈된 상태였다. 또한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식 즉 차자 표기 방식도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책과 언어를 통해 성인의 도를 표현하고 이해함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자의 음을 정확히 표기할 수 있고, 우리말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문자 체계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3. 중국음운학의 발달과 운서의 편찬3.1. 한자음 표기 방법의 모색중국언어학사상 특히 한 대에 한자의 자음에 관심이 높아졌는데, 그것은 고전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기 위한 훈고학이 성행해지기 시작한 까닭이다. 한자는 동음자가 많은데다 한 자가 본음을 벗어나 다른 음으로 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음만을 취하여 가차한 자례가 허다하였으므로 앞 시대 사람들이 남긴 전적을 올바르게 깨치려면 반드시 자음을 바르게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원래 표음문자가 아닌 한자의 음을 나타내는 데는 많은 고심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이 모색되었다.(1) 독약법“독”은 “읽다”는 뜻이고 “약”은 “같다”는 뜻으로서, “독약”이란 어떤 글자의 독음이 다른 어떤 글자의 독음과 같거나 비슷한 경우에 쓰는 용어이다.(2) 직음법직음법이란 음이 같은 동음자로써 독음을 표시하는 방법인데, 즉 성, 운, 조가 완전히 동일한 글자를 선택하여 음을 단다. 직음법은 비교적 간편한 방법으로서 널리 쓰였지만, 간혹 어떤 글자의 음을 달 때 적당한 글자로 음을 달아 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동음자가 적은 한자들은 몇 개의 글자로 서로의 음을 달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3) 반절법가장 대표적인 한자음 표기법이다.반절은 두 글자로써 한 글자의 독음을 표시하는 전통적인 표음 방법인데, 앞 글자에서는 음을 취하고 뒷 글자에서는 운을 취한다. 이 방법은 동한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반” 혹은 “번”이라 했고, 당나라 때에는 “반”자의 사용을 금기시하여 “절”이라 개칭하였으며, 후대에 이르러 “반절”이라 통칭하였는데, 반절법은 그 독음을 밝히는데 확실히 진보된 방법이다. 그러나 고금음의 변화 및 방언의 차이로 인해 간혹 자음을 결합할 수 없었으므로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3.2. 운서의 편찬모든 한자를 성운의 이동에 따라 분류하여 그것을 일정한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은 일종의 발음사전과 같은 것이 운서이다. 운서 편찬의 목적은 모르는 자음을 찾아보기 위한 심음과 시문의 압운의 표준을 표시하려는 데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 변동에 따라 문화중심지가 이동하기도 하고 방언이 다양한 데서 언어통일을 기하여 왕조의 권력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표준음을 책정하려는 언어정책의 목적에서 운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3.3. 등운도의 출현운서는 자류를 운의 유형에 따라 분류 배열하여 놓았으므로 운의 종류와 자음은 파악할 수 있어도 음운 상호간의 관계라든가 체계와 같은 것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송대에는 등운학이 발달하여 비체계적이고 고립적인 자음을 체계화하기 위하여 등운도가 이루어진 것인데 운서와는 상보적 가치를 가진다. 등운도는 마치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선을 그어 거기에 자음의 성모와 운모 및 성조와의 상호관계를 귀납하여 편배한 일종의 어음도표이다.등운도의 구조는 책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1) 횡렬에는 성모를 오음(五音)과 청탁(淸濁)의 순위에 따라 배열하였다.(2) 종렬에는 사성(四聲)과 등운(等韻)을 분배하였다.그러므로 운서 중의 어떤 자음을 파악하려면 그 교차점을 찾으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짜여 있다.이러한 등운도가 고안되기에 이른 것은 육조 이래의 실담학의 연구가 당송대에 걸쳐 상승한 결과 어두자음이나 운의 상호관계가 차츰 정리되어진 사실에 기인하였다. 먼저 어두자음에 36자모의 차이가 인식되고 마침내 이것을 아(牙)ㆍ설(舌)ㆍ순(脣)ㆍ치(齒)ㆍ후(喉)ㆍ반설(半舌)ㆍ반치음(半齒音) 등 칠음으로의 분류가 행하여지자 운서의 운의 체계적 고찰이 수행됨으로써 드디어 전 체계를 도표에 모으는 운도가 탄생될 수 있었다.4. 중국음운학 이론의 섭취4.1. 오음ㆍ칠음의 명칭과 순서한자음의 성모를 조음위치에 따라 분류한 운학의 용어에 오음, 칠음이 있다. 오음이란 아ㆍ설ㆍ순ㆍ치ㆍ후음을 말하고, 여기에 반설ㆍ반치음을 구분한 것이 칠음이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음의 분류 방법은 물론 그 명칭도 바로 중국음운학을 응용했다고 볼 수 있다.4.2. 청탁의 명칭청탁(淸濁)이란 한자음 성모의 변별적 자질을 나타낸 용어이다. 중국음운학에서는 시대마다 그 부르는 명칭만이 달랐을 뿐 일찍부터 청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훈민정음에 사용된 용어는 중국의 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의 용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이 저술이 한글 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4.3. 전탁음의 설정한글 창제 시에 이 36자모가 대표하는 음가를 추정하고, 이 음들로부터 당시의 고유어와 한자어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변별적인 성모를 추출하였다. 그 결과 선별된 자모가 동국정운의 한자음 주음표기(注音表記)에 이용을 된 23자모이다. 훈민정음 예의의 초성 17자는 23자모에서 전탁음에 속한 6자(ㄲㄸㅃㅉㅆ)를 뺀 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