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4
검색어 입력폼
  • [인생설계]하프타임
    [하프타임]서평밥 버포드저자는 자신의 인생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통찰력으로 책을 기록했다. 이 책을 읽고 좋은 인생의 선배를 만난 듯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그 마음의 기준을 잃지 않고 또 스스로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위해 인생을 살 줄 아는 사람임을 알았다. 자신의 비문에 마지막으로 쓸 그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이 바로 의미찾기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스스로를 그렇게 조절하면서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인생의 선수이면서 스스로를 조절하는 감독이기도한 독특한 은사를 가졌다.그는 평생에 그 의미찾기라는 과제를 들고 그 목표를 스스로가 설정할 줄 알았고 또 새로운 의미찾기가 필요한 순간에는 과감하게 한 단계를 뛰어 올라갔다.그는 우리들에게 그 의미찾기를 위해서 하프타임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40대에 그가 겪은 하프타임은 모든 보통사람들이 다 겪을 수 있는 위기였다. 그 위기 가운데서 내밀한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보통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소리들이다. 가정과 사회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질문들이다.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온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스스로에게 갖도록 여유와 시간을 내어준 것이 신앙에서 비롯된 용기라고 생각한다.많은 이들이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 성취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는 그래서 하프타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다.내면에서 들려오는 강한 욕구 그리스도 안에서 더 완전해지려는 거룩한 욕심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하프타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분석하고 장단기 가능한 목표들을 세우는 저자의 과정을 보면서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적, 가정적, 신앙적, 사회적, 교회적인 현실에 부족한 점과 실천가능한 목표들을 점검하게 되었다.결국에 장거리 마라톤을 뛰는 것같은 인생에서 스스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동기유발 즉 사명에 불타는 마음이 없으면 현실에 떠밀리는 불행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원동력이 되는 목표를 위해서 다른 가지들을 쳐내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즉 내 인생에 목숨과도 바꿀만한 사명을 확인하는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보냄을 받은 청지기로서...이 책에서 목회에서도 성공추구의 목회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의미추구의 목회가 되도록 스스로를 조절하는 일이 중요하다 하겠다.
    독후감/창작| 2006.05.26| 2페이지| 1,000원| 조회(627)
    미리보기
  • [인생설계]하나님과 함께 뛰는 나의 후반전
    [하나님과 함께 뛰는 나의 후반전]서평박호근 목사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처음 시작할 때 ‘나의 예상 수명’을 통하여서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예상수명을 알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처음에 걸어 둠으로서 동기 유발을 강하게 시킨 다음에 자연스럽게 저자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호기심 앞에서 책을 놓기 힘들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에 자연스럽게 ‘남은 나의 생애를 가치 있게 살아야’함을 이야기함으로서 하프타임의 장으로 인도한다. 탁월한 독자마음사로잡기 기술이라 하겠다.먼저 프롤로그에서 각자의 삶의 목표를 묻는다. 목표없이 ‘표류’하는지 분명한 목표를 보고 ‘항해’하는지 묻는다. 개인적으로 시골지역에서 목회하면서 처음에 담임을 하면서 가졌던 열정과 의욕이 많이 식어지고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던 터라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은혜라 하겠다.저자의 “삐익~”신호와 함께 하프타임의 현장으로 들어간다. ‘나의 목회와 삶의 현주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60년 남은 내 인생의 피날레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차분하고 신중한 작전에 들어간다.그동안에 에이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으며 가다듬었던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세상의 물결에 휘말려가는 나의 정신세계를 보게 되었다. 소유와 현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조금 벗어난 항로를 다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그동안 해이해진 삶의 문제가 삶의 행위의 동기가 ‘존재’ 보다는 ‘소유’와 ‘현실의 필요’였고 끌려가도록 내버려둔 것에 있다 하겠다. 앞으로는 행위의 동기를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심부름꾼으로서의 ‘존재’에 맞추고 위로부터 부르시는 부르심에 뜨겁게 솟아나오는 동기를 가지고 움직여야 하겠다.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되도록 긴 시간동안 하프타임을 가질 작정이다. 6개월 정도를 더 하프타임을 하면서 남은 목회와 사역을 내면의 영성의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 보려한다.
    독후감/창작| 2006.05.26| 2페이지| 1,000원| 조회(531)
    미리보기
  • [선교신학]새로운 천년을 향한 선교신학
    새로운 천 년을 향한 선교신학이 책은 오늘날의 선교신학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분석된 상황들을 통하여 선교신학의 미래를 전망하는 방법으로 연구를 하였다.잠시 살펴보자면 현대선교신학은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현실적 상황을 들어서 설명한다. 복음주의 진영의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 즉, 처음부터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 왔고 앞으로도 세상에는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개인전도 위주의 선교정책을 일관적으로 고수해 나갈 것이다 라는 것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입장과는 별도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개인의 영혼구원에 관해 가볍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회의 사회, 세계에 관한 책임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 세계에 대한 관심은 1989년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세계질서의 변화와 더불어 더욱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70년대 중반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화해의 시도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지 않다. 로잔언약(1974)이후 225년이 지난 이후 복음주의 진영의 입장이 여전히 사회, 세계에 대한 책임에 대해 냉담하다는 사실은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 구조를 필요로 하다는 교훈을 준다. 이러한 벽들은 선교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상대방의 선교신학을 인정하면서 서로 다른 형태의 선교신학을 선교의 다양성과 풍요함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선교신학을 단순히 복음전파라는 입장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세계에 대한 책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책임있는 신학의 틀을 형성하기 위한 큰영향성 때문이라 한다.신학의 전통적인 사중구조(성서, 조직, 역사, 실천)의 틀을 벗어나서 보다 현실감각있는 신학의 가능성을 탐구하자는 것이다.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신학도 교회와 사회. 세계와의 관계를 묻는 실천신학인 선교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장에서는 사회, 세계를 향한 교회의 선교활동이 선교신학의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알아본 다음, 선교신학이 다른 이론신학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전망한다. 이 부분에서 선교신학을 실천신학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목회자의 실제적인 활동을 돕는 실천신학보다는 교회에 주어진 사회, 세상을 향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실천신학을 주로 의미한다. 또한 실천신학에서 선교신학이 다른 분야의 신학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할 것인가를 관심한다.1. 선교신학의 역사: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이 시기에는 인류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여러 개념들을 바꾸어 놓았다. 과학의 발달로 인한 충격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은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유럽의 인구가 19세기 동안 두 배가 늘었고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으며 빈부의 차는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잉태한다.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는 식민지 개척으로 이어져 동서양의 차를 크게 벌어지게 만든다. 19세기 개신교선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19세기 선교의 내적 배후에는 독일의 경건주의운동과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각성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의 회심과 성화, 그리고 개교회의 개척과 성장으로 요약되는 주 운동은 18세기 선교운동을 능가하게 하였다. 19세기에 와서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유럽 각지로 확산하게 된다. 또한 이 운동은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선교단체가 생겨났다. 이러한 선교회중심의 서구교회의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은 교회로 하여금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기독교의 확장을 경험하게 하였고 19세기를 위대한 세기가 되게 하였다. 이 과정에 관한 네가지 점에 관한 지적이 있다.첫째, 초기 선교사들은 사회개혁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교나 병원의 설립을 통해 사회봉사를 하였지만 이는 주로 복음전도를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통한 사회개혁을 선교의 중요부분으로 인정받게 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선교신학을 전반적으로 평가해 본다면 아직 비기독교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차원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였다. 즉, 선교현장의 경험이 역동적으로 선교신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선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을 현장에 응용. 실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넷째,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나뉘게 되는 배경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19세기에 나타난 여러 복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새로운 선교운동으로 변화되어 갔다. 복음주의 선교운동은 20세기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 앞에서 두 흐름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19세기의 전반적 흐름을 계속 이어간 복음주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상황 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새롭게 인식한 에큐메니칼 노선이다.20세기는 과거 어느 세기보다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한 시기였고 동시에 교회가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선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많은 대회와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19세기가 복음의 전파를 위해 몸을 바친 선교사들의 시기였다면 20세기는 교회의 하나됨과 사회.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활동한 에큐메니칼운동가와 선교의 이론화를 위해 노력한 선교신학자들의 시기였다. 선교신학이야말로 교회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충격 중 하나라는 몰트만의 말처럼 선교신학이 교회의 활동과 신학의 형성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20세기의 가장 큰 특징을 교회사적 혹은 선교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교회의 사회. 세계에 대한 책임이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세계교회가 소위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양분된 것이라 하겠다.바로 개인의 회심과 교회확장만을 목표로 한 지난날의 교회중심적인 선교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체가 되시고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보냄을 , 전통적인 선교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이 나타났다( 제3세계 나라의 교회들의 모라토리움 등).둘째, 19세기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의 배후에는 서구교회와 제3세계 교회와의 불편한 관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즉, 제3세계 교회가 서구교회와의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교회의 일치와 더불어 제3세계에 있는 교회로 하여금 토착화, 문화화, 상황화 등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 자체를 전혀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즉, 선교를 교회의 확장이라는 차원보다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차원으로부터 접근하게 된 것이다. 이때 세상을 향한 교회의 모든 활동은 선교의 영역에 포함되며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사가 된다.넷째, 모든 것이 선교가 되고 모든 사람이 선교사라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고 아무도 선교사가 아니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복음주의 진영에서 나타났다.다섯째,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교회가 그 자체를 향한 관심에 매몰되고 따라서 교회의 선교가 윤리적인 지표를 잃어버릴 때,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를 교회다워지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를 계속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하여 주었다.선교의 영역은 복음전파뿐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여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하는 힘과 싸우는 교회의 모든 활동과 관련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복음 전파. 회심. 교회확장과 더불어 이해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구체적인 삶과 더불어 그 개념이 새롭게 정의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한 접근은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대립되는 신학이라는 차원에서보다는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관심하지 않는 새롭게 요구되는 선교적 명령에 응답하는 선교신학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19세기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이 교회의 영역이 전 세계로 확장된 것이었다면 20세기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인가를 묻는 질문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대안 공동체로서 인식되었다. 선교는 세상을 향하여 대안공동체로서의 교회를 확대해 나가는 모든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었다. 20세기에는 19세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회일치를 향한 움직임이 나타났던 시기였다.2.선교신학의 미래: 실천신학으로서의 선교신학19세기에는 선교학이 선교사에 의한 선교사를 위한 학문으로 전락하였다.선교학이 독자적인 영역을 포기하고 전체 신학의 영역 안으로 편입해 들어감으로써 신학교육의 전체가 선교적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접근은 다른 분야의 신학자들이 신학의 선교적 차원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함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능력이 없는 현실의 벽 때문에 여러 어려움과 부딪치고 있다. 오늘날 선교신학의 위치는 특별히 한국의 신학교육 현장에서의 위치는 유럽교회가 완전히 자신들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형성된 구조 안에서 이해 되고 있다. 즉, 신학교육으로서의 선교신학에 대한 관심은 선교신학을 신학교육의 이질적인 분야로 보든지 전통신학의 부속물로서 보든지 신학교육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추가할 수 있는 분야 정도로 이해하는 실정이다.신학이 교회의 활동에 꼭 필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교회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의 요구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유로첫째, 신학교육이 이론 중심의 신학에 대해 보다 많은 비중을 둔 반면, 실천은 이론을 응용하는 하나의 장으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지적될 수 있다. 특히 이론 신학이 그 자체의 학문적인 관심으로 인하여 통합적이기보다는 점점 단편적인 방향으로 흘러감으로써 실천신학을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둘째, 교회가 세상으로부터의 요구에 충분히 응답하지 못한 이유로 신학이 교회 혹은 교회와 관련된 영역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하여 왔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신학이 교회의 유지하는 기능을 고착시키고 나아가서는 사회적 억압구조를 합법화하는 역할을 가져오기도 하였다.셋있다.
    독후감/창작| 2006.05.26| 6페이지| 1,000원| 조회(389)
    미리보기
  • [기독교 윤리] 참된 교회의 윤리 서평
    참된 교회의 윤리이 책에서는 교회가 더 이상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계속하여 강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사회가 교회의 개방을 원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도 깊이 상고할 문제인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를 교회가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윤리는 어떤 신앙인의 개인적인 윤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질서에 대하여 발빠르게 대처하고 반응하고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교회는 또한 기다림의 공동체이며 거룩한 교회와의 교제 안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는 외부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계속하여 주장한다. 세계를 향하여 눈을 돌리고 세계를 위한 책임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이책은 또한 교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너무나 헐값으로 만들어 버렸는가를 지적한다. 감상적인, 그리고 자신안에 갇힌 만족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믿음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일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힘들이지 않고 서로 이야기 하기 어려운 주제들은 회피하고 슬쩍 넘어가려는 태도는 참다운 일치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 일치를 말함에 있어서 교회의 일치가 선교의 필수조건일 뿐 아니라 선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정의는 참으로 좋은 지적인 것 같다. 그래야만 세상을 향하여 모범적인 예언자적 사명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또한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행동을 취할 때도 기득권의 눈치를 보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하나님의 양심으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고 가치없고 모순된 하나됨을 지켜나가는 것도 또한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자적 교회의 참모습은 억압과 착취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위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해방의 선포여야 한다는 것이다.본훼퍼는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이 권력을 앞세우고 거짓을 말할 때에도 끝까지 양심의 소리를 발하며 국가 권력과 싸웠다. 물론 독일적 그리스도인들과의 분열의 아픔을 딛고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값싼 일치를 거부한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독일 민족주의적 교회와의 값싼 일치보다는 보다 더 넓은 세계교회와의 고통스럽지만 값비싼 일치를 추구하였던 것이다.그런 차원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이제 침묵하는 약자들을 위한 변호와 대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하나씩 감당하여가고 있다.예배에 관하여 우리가 동방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예배가 단순하게 정해놓은 시간에 정해진 공간 안에서만 수행되어지는 종교의식만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는 삶의 예배라는 점에서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교회를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그래서 윤리적인 과제들로부터 회피하려는 방편으로 삼아왔던 것이다.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개방되어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세상에 대하여도 개방되어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그래서 교회의 윤리가 바로 세상을 향해 비추는 사회윤리가 되어야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제는 세상의 윤리에 대하여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모범적인 공동체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교회 울타리 안에만 관심을 갖고 세상과 세상일로부터는 손을 씻어버리고 교회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 일로부터는 아무 도전도 받고 싶지 않고 또 그로 인해 교회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교회스스로 안으로 휘어져 교회의 삶과 예배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세상과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열려 있지도 않으면서도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러한 교회는 완전히 문제투성이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잊어버리고 사회의 권력 구조 속으로 동화되어 버리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세례와 성만찬도 또한 사회에 개방하여 그들도 또한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만 교회스스로만 예식을 행하는 데 멈추어 버린다면 아직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화해의 복음을 보여주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이 기독교인들의 효과적인 사회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서만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들의 이웃에서 배고프고 고통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사회는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교회의 소리를 더 이상 가치있게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인도의 경우 선교사들이 실수한 것이 그들의 카스트를 버리라고 하면서도 자신들의 유색인종차별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었던 데 있었던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도 물론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지만 모범을 보여야할 선교사가 더 큰 차별을 행하였을 때 이들은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실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삶으로서의 실체는 그만큼 흐려지는 것이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배, 아니 몇 십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에 가는 선교사들은 거기에서 그 잘못되었던 선교를 그들 앞에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새롭게 삶으로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나라의 잔치상에 함께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서 잘못된 선교로 인한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얼마나 더 많은 겸허함이 요구되는가, 하지만 과거 기독교의 이름으로 식민지를 하였던 인도를 비롯한 여러 선교현장에서 이러한 회개가 너무도 부족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유럽의 교회들의 실수였지만 우리도 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의 몸을 이룬 공동체로서 대신 가서 회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도교회와 인도사회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값있는 일치를 위한뼈아픈 자기 반성과 화해의 몸짓은 계속되어야만한다. 비단 인도의 일만은 아니다. 아직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는 뿌리깊은 식민지근성을 가지고 있다. 그 사회들에 대해서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들의 비하된 마음들과 독립적이지 못한 근성들을 다시 스스로 자립하게 하는 일과 스스로 자긍심을 갖게하는데 힘을 실어주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근본을 다시 처음부터 심어주어야 하는, 아니 세계교회 그들을 향해서 계속 회개하면 그들 스스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나갈 수 있게될 것이다.한국교회는 성만찬에서 어쩌면 실패한 교회라는 날카로운 지적이 약간은 충격스러웠다. 성만찬이 예배와 삶 속에서 그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만찬을 하나의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신앙을 위한 예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예배와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방편으로 성찬을 이용하려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천주교회는 사회를 향한 책임있는 봉사와 역할수행으로 한국사회에 인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는 작은교회들과 고기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식사를 통하여 공동체의 경험을 살려내었다. 물론 이 성만찬을 사회에까지 개방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만의 잔치가 아닌 사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실 수 있도록 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바로 교회가 생명을 경험할수록 그생명을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지금은 사회의 아픈 부분을 더욱 더 많이 돌보려고 노력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음을본다. 고무적인 일이라할 수 있다. 좀더 고민하여 한국교회는 교회의 식탁을 세상에게도 개방하여 사회윤리와 하나님으 선교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이책은 교회가 이제는 더 이상 교회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사회를 향한 책임있는 윤리적인 모범으로서 설 수 있기 위하여 뼈를 깎는 아픔으로 먼저 교회자체내의 윤리를 회복해야하며 성만찬의 공동체 정신의 회복과 성례를 세상을 향하여 개방하여 하나님의 손을 세상을 향하여 펴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릴 수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교회가 윤리를 강조할수록 더 깊은 윤리의 모순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윤리는 진정한 영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그것을 강조한다고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세상이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접근도 또한 바르지 못한 것 같다. 기독교의 윤리 기준 및 동기는 먼저 스스로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뼈를 깎는 십자가에서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요구가 있을 때에라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한번 조명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를 향하여 책임있고 모범적인 신앙인이 된다는 것도 먼저 개인의 신앙에서 출발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공동체회복을 통해서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할 지라도 그 자신이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그의 윤리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독교정체성이 없는 윤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사회에 책임성 있는 모범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를 향하여 책임을 지려하면 할수록 더 깊은 영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9.02| 4페이지| 1,000원| 조회(334)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2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39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