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개그맨을 추억할 사람 대체 누구?1994년 SBS공채4기 개그맨 정성화.2010년 제10회 한국뮤지컬대상, 뮤지컬 ‘영웅’으로 남우주연상 배우 정성화언뜻 동일인지를 의심케하는 타이틀은 내가 본 스팸어랏의 아더왕 역할을 맡은 그의 이력이었다. 뮤지컬계의 호황은 대형 기획사의 투자를 자연스레 필요로 했고 소속 연예인의 끼워팔기식의 배역할당은 사실 시장에서는 통과의례인 듯 했다. 가수들의 연기겹업, 아나테이너의 급증과 맥락을 같이하는 멀티형 인재라고 하기에는 배우 정성화는 급이 다르다는 전제를 우선하고 싶다.사실 배우 정성화를 각인시켰던 작품은 국내 뮤지컬 아이러브유였다. 뮤지컬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남경주와의 투샷에도 존재감이 전혀 밀리지 않았고 개그성으로 다져진 그의 애드립과 순발력은 이 배우의 창창한 미래를 예견한 듯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유쾌하게 소화할 수 있는 전업배우의 한계를 넘어 영웅이라는 작품에 문을 두드리게 된다. 대한민국 최대 스케일의 창작 뮤지컬이라는 입소문과 더불어 안중근이라는 시대적 영웅의 전기는 남자 배우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을 것이다. 500여명의 실력자 가운데 그가 발탁된 것에 대한 추측성 가십기사들이 많았지만 공연 후의 관람 평은 그것을 종식시키기 충분했다. 선 굵은 연기에 그의 개그적 기질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끊임없는 인물 분석이 가져온 그의 배우적 열정이 아닐까한다. 더불어 중국 하얼빈과 여순감옥 등 안 의사의 자취를 더듬었던 그의 부수적 노력들은 어떻게 개그로 무대를 섰던 것일까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하지만 스팸어랏의 아더왕 가운을 입은 그는 불편해보였다. 코믹성과 진중함 사이에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그의 소화력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스팸어랏이 추구하는 자지러지는 웃음폭탄의 향연은 선 굵은 연기로의 모험을 시작한 배우 정성화를 다시 전으로 회귀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더더욱 중후함 가운데 해학적인 요소를 가미한 박영규의 아더왕에 점수를 주고 싶다.
영어교육, 급할수록 돌아가자.새정권이 몰입(沒入)교육 이라는 생소한 교과방식을 만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영어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보겠다는 정부의 당찬 사고가 몰입이란 단어에 녹아있다. 비단 현 정부만이 아니라 영어교육에 대한 정책제시는 정권이 반드시 풀어야 할 실타래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풀기엔 매듭이 너무 두텁다.그럼 그들이 풀지못한 그 두터운 매듭은 무엇인가? 기형적인 우리네 교과과정이 그것이다. 문법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과한 경쟁체제에서 학생들을 서열화 시킬 수 있는 최적화된 방법이었다. 영어교육에 대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서열화가 주가 되는 방식이 변화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그것이 과도한 경쟁을 부르고 교육에 있어서 온갖 편법과 술수들이 난무하는 것을 교육 관계자들이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대학입시라는 마지막 관문(官門)에 들어가기 위해 응당 치러야 할 희생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앞서 말한 편법과 술수는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돈 에 울고 웃는 사교육 시장이 낳은 문제들이 전부 해당한다. 영어의 중요성을 두 번 말하면 입아픈데 돈으로 실력이 갈리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 주소니 항상 논란거리가 된다.영어로 가르치는 과목을 국어,수학 등으로 늘린다는 이 교육방식은 분명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돈 때문에 울었던 학생이 학교교육만으로 배움에 동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취지는 충분히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수십년을 이어왔던 교육과정을 뒤엎기에는 대처가 미흡하기 짝이없다.주어+동사는 1형식이다 라고 분필가루 마셔가며 가르치는 수많은 교사들 중 100%영어를 쓸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우리말로 들어도 아리송한 영어의 체계를 내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는 또 얼마나 될까?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울며 겨자먹기로 나머지 공부를 또 해야하는 경우가 분명 생길 것이다. 과도한 경쟁고리를 끊기 위해 야심차게 준비했던 대안이 또 다른 사교육을 낳는 악순환은 없어야 한다.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해외로 막대한 돈이 빠지고 행복해야 할 가정에는 기러지 아버지들의 한숨소리만 들린다. 영어교육에 대한 국가적인 대책이 지원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가 끝없이 양산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영어몰입교육 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없다. 입시제도가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한 영어몰입교육 은 허울뿐인 정책이 될 것이다. 현재의 수능은 답을 추리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고 내신은 문법 틀린 것 수정하기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을 주고 영어로 대화하기 이런 식의 평가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교육시스템이다.
문예비평실습 -----> < 기호학 >1.기호란? 의사전달을 수행하기 위한 일정한 뜻이 담긴 것으로써,예) DNA 문자모형 - 생명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기호교통 표지판에서 둥근 것- 명령을 나타내는 기호“ 붉은 색- 금지를 알려주는 기호여기서 기호란 그 스스로는 존재하지 못하며 반드시 기호의 체제에 소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체계란 구조를 내포한 개념으로 기호들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그 집합 내에서의 일정한 원리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된 전체를 뜻한다.2.기호학이란? 기호의 기능과 본성, 의미 작용과 표현, 의사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사람들이 사용하는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과 기호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기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공유하는 행위와 그 정신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기호학에서는, 기호의 조직원리를 코드(code)라고 부르고, 코드에 의해 생산된 산물을 일반적인 말로 텍스트(text)라고 부른다. 이러한 텍스트를 이루는 온갖 이미지, 은유, 환유, 신화, 이데올로기 등의 상징체들은 신문,TV,영화, 만화, 광고, 잡지 등과 문학과 예술작품 같은 다양한 텍스트들 속에서 속에 풍부하고 들어 있어서 우리가 날마다 대한다. 배경 및 개관기호학에 대한 기원은 언어에 대한 서구 사상의 관심과 더불어 말과 사물간의 관계에 대한 서구의 고전 철학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을 언어와 그것이 자칭하는 사물간의 연결 관계가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인 관례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탐구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호를 말과 정신적인 것의 관계로 파악하고 말은 영혼의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이며 문자는 말로 뱉어낸 말의 기호라고 주장한다. 특히,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사이에서 벌어진 자연적 기호와 규약적 기호 사이의 차이에 관한 논쟁은 주목할 만하다. 중세에 와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규약적 기호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기호학의 범위를 한정 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호론( 기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의 기호학적 분석은 소쉬르(Saussure), 피어스(Peirce)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쉬르의 기호론은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바르트(Barthes)의 『기호학 요강』이 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문학 비평가, 문화 인류학자들에게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이때 비로소 기호학이 독립된 학문의 한 분야로 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언어기호학, 시각기호학, 건축기호학, 음악기호학, 연극기호학, 문학기호학, 텍스트 기호학등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이론의 요점1)기호의 체계문학작품은 일종의 기호체계이며 전달의 한 진술 단위이다. 곧, 기호학에 있어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란 발신자에게서 수신자에게로 전달되는 기호의 체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체계의 개념은 기호학에 필수적이다. 소쉬르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기호론은 문학작품의 언어적 의미는 보이지 않는 언어의 관계성이며 그것은 공시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기생각을 표현할 때 쓰이는 기호의 종류, 성격,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한다. 먼저 소쉬르가 제시했고, 바르트가 정교화한 기호의 모형이 있다.기호는 세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기표(記表-signifier),기의(記意-signified),기호자체로 구성된다. 이중 세 번째 요소, 즉 기호자체는 기표와 기의가 연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요소이다. 기호의 삼부모형은 기호를 나르는 운반체가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그것이 언어이든, 몸짓이든, 도상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틀을 유지한다.기호= 기표 + 기의예)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의이고, 꽃집에서 산 장미꽃은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 곧 기표가 된다. 곧 기의가 기표와 결합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다.기호 = 기표 + 기의( 나는너를좋아한다는 ) (장미꽃) (나는너를 좋아한다는뜻)의미의 장미꽃장미꽃을 받현상을 의미작용이라고 한다. 기표로써의 기의를 표현하는 하는 쪽뿐만 아니라 기표를 대할 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쪽에서도 의미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준 쪽과 받은쪽의 의미 작용이 동일하게 일어날 경우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신자가 목표한 의미작용이 만일 수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도 의미 작용은 역시 일어난다. 이것은 기호란 단일 의미만을 갖지 않고 다의성을 띨 수 있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징으로 표시되는 기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며, 따라서 다의적인 기호를 매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실패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기호학이 의미 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특히 의미 작용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일 인간의 삶 전체를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야말로 기호 작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2)기호작용의 특징기호작용이란 어떤 것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기호로 성림되는 공정이다.- (1)기표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관련된 기의들을 격발시킬 때 기표와 기의들이 결함하여 기호로 되는 과정이다. 이런 기호작용은 전현적으로 연상작용에서 볼수 있다. 이때 하나의 기표가 여러 개의 기의들과 연결된다.- (2)첫번째의 것과 반대방향으로 일어난다. 즉 하나의 기의가 사람의 마음속에 떠올랐을때, 그 사람이 떠오른 기의에 알맞은 기효들을 의식적으로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 사람이 적절한 기표들을 발견하게 되면, 이것들이 기의와 결합됨으로써 기호가 성립된다. 신화와 에데올로기가 일어나는 기본이 된다.신화와 이데올로기의 생산 역시 사고작용이 기호와 일으키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다.3) 텍스트에 관하여..(기호학에서는 기호의 조직원리를 코드(code)라고 부르고, 코드에 의해 생산된 산물을 일반적인 말로 텍스트라 부른다.-- 1페이지에서 설명)우리의 인식에 텍스트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저작 의도는 중요성을 잃는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로부터 구전되어 온 민담, 전설, 야화등에는 저자가 없다. 한마디로 텍스트의 저자는 텍스트의 독립과 더불어 어디론가 사라진다.둘째, 텍스트는 독자와 만나는 담론적 장이 된다. 텍스트의 해석에는 우열이 있을수 없고, 어떤 해석도 똑같이 의미있는 해석이 된다. 독자가 의미의 물을 떠내는 일은 텍스트를 다시 쓰는 일과 맞먹는다(바르트, 1975)독자가 사용한 물그릇(의미 운반체-기표)과 텍스트에서 떠낸 물(기의)과 그것을마신 다음 독자가 하는 의미작용은 독자 자신의 것이고, 원저자의 텍스트 제작의도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며, 텍스트를 재축조하고, 저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순간 텍스트 속으로 가라앉는다. 결국 독자와 텍스트이 상호 유희는 숨바꼭질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기호작용의 총젝적 장이 된다.전개양상-이론가1) 야콥슨의 시적 기능로만 야콥슨은 본질적으로 언어학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언어의 시적 기능을 해명하는데 있었다. 야콥슨이 제기한 시적 기능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첫 번째는 언어 메시지 그 자체에 대한 강도 높은 관심, 두 번째는 지시적 기능을 모호하게 하려는 두드러진 경향, 세 번째로는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어휘론 등 모든 언어학적 층위에서 평형을 지향하려는 강한 충동이다. 이러한 시적 기능의 특성은 기호와 대상간의 근본적인 이분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이분성은 은유와 환유를 양극성을 지닌 특징적인 양식으로 보는 것)2)바르트소쉬르의 개념을 확대하여 한 문화속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창출하는 방법에 이를 적용함으로써, 문화적 가치 차원을 추가했다. 첫 번째 의미 작용 단계는 외연의 단계로 기호의 상식적인 의미가 객관적으로 표현되고 쉽게 인식되어 진다. 그리고 의미작용 두 번째는 내연의 단계로서 기호가 사용자의 정서나 감정과 문화의 가치와 만났을 때 일어나는 상호 작용에 의해 의미가 창출된다. 이 단를 두 번째 단계의 기표라 하고 신화는 기의라 했다. 기표와 기의는 더 나아가 함축의 질서, 신화의 질서로 발전된다.기표-->형(표현)--> 함축의미외시의미 내용 --> 신화함축의 예) 한알의 모래 -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블레이크는 고 했다. 그런가 하면, 토목 건축업자들은 한 알의 모래에서 담벼락 같은 것을 볼 것이다. (함축의미란 결국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신화의 예)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하나의 이야기’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한알의 모래를 보고 문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과학적 해석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3) 그레마스기호의 언리학적 모형을 수용한다. 순수한 형식이 아닌 형성된 실체가 관심거리인데, 이 실체를 예름슬레우처럼 표현형식과 내용형식으로 이해한다. 언어가 의의를 어떻게 형성하고, 혼돈스럽고 무형적인 의의가 어떻게 의미로 분절되는가를 이해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의의를 내용의 실체와 연관 짓는다.그레마스는 언어를 통한 의의의 연관적 구조화의 사상을 즉 구조적 그물을 통해 형성된 전체의 사상을 따른다. 그리하여 이 의의 영역은 어떤 언어의 어휘의 모든 영역까지도 구조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개념을 낱말로의 지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낱말 측면내의 단위들은 물론 보다 큰 단위인 텍스트까지도 기호로서 간주한다. 더 나아가 텍스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텍스트들이 기호학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이 텍스트 의의 영역에 최초로 구조적 도구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기호학적 사각형이다.기호학적 사각형은 텍스트 의의의 기본 축을 서술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는 모든 텍스트의 의의가 이원적 대립으로 구조화될 수 있다는 가정에 토대를 둔다. 어떻게 대립되는가..기타: ,아래>/ 의미-대립의 형상은 의의영역이 두 개의 상이한 종류의 대립을 통해서, 즉 한번은 상반적 의미 단위의 기본 대립을 통해서, 또 한번은 상반적 대립의 두 요소의 모순적 대립을 통해서 분절되어져 있음을 통해서 사각형 형식을 얻는다. 그의 의미.
<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1) 줄거리 및 인물연구-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예술과 철학의 양면을 조화시킨 걸작으로 꼽힌다. 소설 속 일련의 사건들은 ‘삶과 죽음’, ‘선과 악’ 등의 형이상학적, 신적인 문제들과 연결된다.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 들은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카라마조프 집안 사람들이다. 아버지인 표도르와 그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가 이 집안의 구성원들이다.‘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모든 사건은 어느 가상의 공간인 스꼬또쁘리고옙스끄에서 일어난다. (스꼬또쁘리고옙스끄-러시아로 가축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의미) 여기서는 개혁이전의 러시아 시골생활에 대한 묘사와 다양한 계층 사람들과 민족들, 서로 다른세대들 (귀족, 상인, 소시민, 관리들, 수도승들, 농부들, 폴란드인 등)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러시아 전역에 발생하는 혼란을 보여주는 거울로써 그곳은 가족의 붕괴와 친부 살해의 모티브를 통해 보여준다.(탐욕스러운 아버지 표도르와 큰아들 드미트리, 둘째 아들 이반, 막내 알료샤를 중심으로) 각 형제들 간의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되고, 이반의 정신적 사주를 받는 스메르자코프도 갈등의 이면에 떠오른다. ‘땅에 떨어져 죽어가는 씨앗의 썩은 껍데기’인 스메르자코꼬프는 순수한 ‘알료샤’와 극을 이루며, 절제되고 폐쇄적 성격의 이반은 아무런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선한 행동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드미트리와 대조를 이룬다. 반면 알료샤와 드미트리, 스메르쟈꼬프와 이반 사이에는 유사함이 존재한다.갈등의 시작은 표도르 까라마조프로부터 시작된다. 살아 생전 포도르 빠블로비치는 자식들을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도덕적 의무도 느끼지 않은 채 어린나이의 아들들을 쫒아내 버렸다. 그는 자식들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린 채 죽은 아내들을 우롱하였고, 수치스런 행위를 일삼으면서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경멸을 충분히 갖게 만들었고 (알료샤는 제외) 스스로의 추악함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지었다.(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누구인가..미궁으로 빠지게 만들어가는 작가의 기교가 들어있다.) 타고난 음탕함을 가진 그는 꼬냑을 들이키며 자신의 여성론을 들려준다. ‘여자는 여자일 뿐, 더 이상의 가치는 없다’ 조롱하며 일말의 양심의 가책 조차 느끼지 않는 가증의 인물이다.그의 성질을 꼭 빼닮은 첫째아들 드미트리, 그는 다변적인 성격의 소유자로써 자신의 약혼녀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와의 관계에서는 고상하고 사욕 없는 행동을 보여주는 반면, 삼천 루블에 얽힌 이야기를 하면 스스로를 속물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나의 관점에서 볼때, 조시마장로 앞에서의 절, 그루센까의 폴라드인 약혼자에 대한 양보의 태도등은 단순해 보이기 까지 한다. 아버지 살해의 범인으로 지목받고 마지막에 그는 불행과 오판의 위협아래 감정과 양심이 정화 된다. 그가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방종했으며, 죄를 짓기를 원했고, 저지를 수도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으로 벌을 받아들인다.둘째 아들 이반은 형 드미트리와는 상당히 다른 기질과 높은 교육 수준을 지닌다. 어린 나이에 이미 학문에 대한 비범하고 뛰어난 능력을 보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재판에 관한 논문을 잡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외적으로 ‘혼란’에 잘 휩쓸리지 않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지닌 이반은 차가운 이성의 인간이자 무신론자, 회의주의자이다.“이반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 이반은 돈이나 평안을 구하고 있지 않아. 그는 아마 고뇌를 구하고 있을거야. 이반은 폭풍우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야. 그의 머리는 한가지 일에 사로잡혀 있어. 아직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은 위대해. 그는 수백 만금의 돈보다도 사상의 해결을 바라는 자들 중 하나야.”이반은 자신의 논문 ‘교회의 일반적 재판에 관한 문제’에 대해 수도승들과 논쟁을 벌이고, ‘수도’라는 선술집에서 동생 알료샤와 개벽이전의 문제, 신에 관한 문제를 놓고서 토론을 벌인다. 신의 존재는 인정하되 신이 창조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반은 삶과 조화에 대한 환멸에 염증을 느낀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란 미명으로 신을 부정하며 부당하게 고통받는 자들, 특히 어린애들의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마침내 이반은 알료샤에게 ‘대심문관의 전설’을 들려준다. 사상의 본질은 그리스도가 황야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자유의 이름으로 거부한 악마의 세가지 유혹에 담겨있다.막내아들 알료샤는 자신의 아버지와 두 형들과의 관계에서 각각 일정한 형태의 유사함과 대립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조시마의 정신적 아들로서 알료샤는 표도르 까라마조프와 대립하고, 이반이 아버지로부터 무신론적, 냉소적 태도를 물려받은 반면그는 어머니에게서 순진무구한 백치적 특성을 전해 받았다. ‘어린박애 주의자’로써 그는 신을 믿으며, 사랑으로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그는 전적으로 신에 귀의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으며 (조시마장로가 그를 속세로 돌려보낸 사건) 아직껏 알료샤 앞에는 겪어야 할 많은 시련과 유혹이 놓여있다. 속세에 나와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받은 우울한 인상, 신의 문제에 대한 이반과의 대화와 알료사의 작은 ‘반역’일련의 계속된 유혹들 등. 그러나 얄료샤의 마음속에 일어난 내적 갈등은 마침내 “모두를 위한‘ 기독교적 사랑에 의해 극복되고 그는 조시마 장로의 뒤를 이어 아이들의 스승이 된다.아들들의 이야기를 넘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양한 인물화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부차적 인물들의 에피소드(상인 삼소노프,뻬르호찐, 그루센까의 폴란드인 약혼자와 그의 동행인, 마부 안드레이등), 화자의 서술과 다른 인물들의 회고, 이야기등에서만 기억 되어지는(표도르의 두 아내, 리자베따 스메르쟈쉬나, 조시마의 형 마르껠등), 주인공의 분신(스메르쟈꼬프), 내적 모순의 물질화인 주인공의 분열(악마), 유사함과 대립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전개되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인물체계는 온갖 복잡함과 긴장성 속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성격들의 집합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사상가들이다. 그들은 고차원적 존재의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논쟁하며 고뇌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일상적 삶에 둘러싸인 현실적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기도 하는데, 현실반영과 사상의 정리이 서로 갈등하며 다인물성, 인물형성의 방법들 이라는 그만의 소설시학이 내포되어 있다.
-기독교와 문학-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를 읽고..1) 줄거리 및 감상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작품은 ‘나’라는 화자가 조르바라는 인물의 인생철학을 서술한다. ‘조르바’가 서글픔이 묻어나는 ‘그’의 인생에서 큰 행운이자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조르바는 인간이 돈이나 명예, 욕망만을 찾는 삶이 전부인양 살아갈 때 자신은 그런 욕망에서 벗어나 홀로 충실히 행복하다. 그는 세상만물과 인간들 안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조르바 자신이며, 만물과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과 교감하는 인간이다. 또한 조르바의 삶과 정신은 일원적인 바탕위에 근거를 두고 펼쳐졌기에 그의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그것을 전제로 바라볼 때 그의 자유를 향한 열정과 삶의 향유는 진리를 깨달은 자의 그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르바가 믿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뿐,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조르바 뿐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단순하지만 강한 논리이다. 그가 밥을 먹을 땐 밥이 되고, 갈탄을 캘 땐 갈탄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저 마음이 가는 곳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을 온전히 맡길 뿐이다. 조르바는 ‘자유를 얻는 도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버찌를 먹고 싶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면, 버찌를 물릴 만큼 먹어 그 생각을 없애는 것. 그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 조르바의 대답은 명쾌하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습니까?”나는 간혹 지금 이것을 너무나 간절히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정말로 만사를 제쳐놓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을 때가 있긴 했지만 그때도 진정 자유롭다는 생각은 한번도 든 적이 없다. 항상 마음으로부터 불안하였고 이런 욕망의 실현으로 세상과 이탈되지 않기를 바래왔다. 마치 조르바를 부러워하고 존경하고 닮고싶어하면서도 ‘항상 뒤로 손익을 계산하는 어느 정도는 상스러운 식료품 가게 주인’같은 머리를 가진 이 책에 나오는 ‘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말이다.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낀 자유가 말하는 바는 어쩌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상은 또 하나의 굴레이자 끝나지않는, 끊임없이 가야할 삶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고, 또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 소유 속에 내가 갇혀버린 것처럼. 그래서 이 순간 모든 것을 버린 무소유의 상태가 되었을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법정스님이 그리워진다.내가 조르바라는 인물을 실제로 보았으면 어떠했을까? 나는 아마도 그를 보고 망나니나 사기꾼, 전형적인 인간이하의 사람이라고 손찌검을 하며 외면해버렸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카잔치키스의 분신인 ‘나’처럼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진면목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전형적인 엘리트로서 살아왔던 ‘나’는 그러한 자신의 삶을 아쉬워하지만 그런 충실한 삶의 과정이 조르바같은 비범한 인물을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르바의 인생을 닮고싶어하지만 결국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조르바의 인생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실천할 수 는 없었던 것이다. 많은 지식을 머리에 가두고 있었지만 ‘나’는 배고파 본 적도, 누구를 다치게 한 적도, 훔쳐 본 적도, 간음한 적도 없으니. 아직 우린 순진하고 살갗은 뜨거운 태양에 타본 적도 없기에 파격적인 일탈은 꿈꿔온 것처럼 결코 쉽지 않다.나는 아직 그 줄을 잘라버릴 능력이 없고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속세를 벗어날 용기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정체되었고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월에 흘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마 난 끊임없이 자유가 그립다고 말할 것이고 벗어나고 싶다고 외칠 것이다.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조르바라는 주인공, 그 한 인간의 해탈에 가까운 죽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죽음이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이며 강렬하고, 또한 경건한 그 무엇임을 느낄 수 있다. “두목,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맨날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응시하지만 무섭지는 않아요. 그러나 좋아한다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좋아하다니 어림도 없지.” 조르바에게 있어서의 죽음, 그것은 그에게 있어 무서움의 대상이라기보다 너무나 자유로운 그 조차 겪어보지 못한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끝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윤회설을 믿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마지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삶과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무리 강한 자도 그를 향해 찾아오는 죽음 앞에선 발버둥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마땅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우리에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숙제인 것이다. 조르바, 그는 죽음 앞에서, 그리고 그 창문으로 보이는 광경과 생각 속에서 무엇을 느끼며 간 것일까. 왜 그는 웃고 울어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