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답사기(석장사)잃어버린 옛 정취답사라하면 으레 경주라하여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역사를 모르고 답사의 진정한 의미를 모를때는 그저 여행과 나들이의 일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중학교 시절부터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등 이들이 주가 되어 답사의 일정표를 꽉 채우고 역사도시 경주라는 명칭으로 많은 국내와 국외의 관광객을 불러 들이고 있다. 이들은 당시 부귀 영화를 누리던 신라의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쩍했을 것이다. 허나 시간이 흘러 많이 낡았음에도 지금까지 시끌벅쩍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그러나 불국사와 석굴암 등에 이르는 답사길을 나는 언제 부터인가 흥미와 즐거움 보다는 조용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웃음과 눈물의 희노애락이 이루어낸 역사를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대학과제보다는 답사를 제대로된 답사로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進답사라 칭하기로 하였다.나의 첫 답사기라 나아갈 進을 표기하고 답사의 시작을 알리고 발판을 삼아 큰 의욕을 가지고 이글을 쓰기 시작하였다.경주는 변하고 있다.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유산과 유적들만 챙기기 급급한 이익 창출만을 위한 역사도시 경주는 그 본질을 잊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에 나는 역사도시 경주가 진정 대표적인 유산말고 조용한 시골 곳곳에 숨어 자신이 있던 자리만 묵묵히 지키는 역사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 먹고 일단 내가 살고있는 석장동의 유래를 쫒기로 했다.찾는이 없는 낮은 골짜기석장사라는 팻말 하나 없는것에 실망을 안고 동국대 정문에서 좌측으로 걸으며 휴대폰을 열고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조용히 산을 향해 걷기 시작하며 석장사라는 절터가 내뿜는 신비로움과 향을 생각하며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오후 13시쯤 산 입구에서 얼마나 많이 올라가야 있을까 라는 설레임과 두려움에 한숨쉬어 가기로 하고 옷과 신을 단단히 조여메고 안내판을 찾아봤지만 어느하나 알려주는 글이 없어 무작정 산속으로 터벅터벅 걷는 황소를 타고 가듯 걷기 시작하였다.갈림길을 마주쳐도 무조건 산속으로 가면 있겠지 하며 안으로 더욱 안으로 걷는데 이런...산 위로 오르는 비탈길과 그 옆으로 있는 아주 작고 사람 한명만이 걸을수 있는 길이 있었다 여기서 문뜩 전화 통화하던 지인이 했던말이 떠올랐다 “산을 오르다 보면 옆의 작은길이 있는데 그 길이 석장사로 가는길이다.“(우측의 작은 길이 석장사로 가는길)라는 말이 떠올라 옆의 작은길로 걷는데 사람이 많이 찾지않는듯 쌓여있는 낙옆과 쓰러진 나무들이 신성한 곳이니 접근을 금한다라고 말하는듯 하여 신비로움을 더하는듯 하였다.(쓰러진 나무가 석장사의 입구를 둘러 싸고 있는모습)석장사의 약수길을 타고 쭉 내려가던 난 아주 귀엽고 볼품 없는 약수를 보았다. 하얀 호수를 산에 툭 꽂아 이곳은 물이 나옵니다 라고 아주 성의 없이 알리려는 듯 난 그걸 보고 한 번 웃었다.그 하얀 호수 아래 강아지 밥그릇 같은 스테인레스 그릇은 졸졸 흐르는 물을 다 받고도 흘러 넘쳐 당시 이 물을 애용 하던 사람들과 동물들은 산을 오르던 많은 이들에게 갈증을 해소하고 이 물 들은 아래 계곡으로 흐르며 석장사를 둘러 싸고 있는 풀과 나무들에게 생명을 주는듯 하였다.(약수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 웃음을 짓게 만듬)석장동의 석장사쓰러진 나무를 넘어 비탈길을 올라 처음 들어온 우거진 넝쿨들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나름 운치를 더하여 주는듯 석장사라는 절은 사라지고 터 만남아 날 반겨주었다어느누구의 손길도 거부한든 자연 그대로 남아 나의 이름이 곳 석장이라고 말하는듯하였다.여기저기 흩어진 기와조각과 축대처럼 보이는 석단의 흔적이 여기가 절터였음을 알려줄 뿐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곳이 신라 최대 조각가 양지스님이 기거하면서 숱한 작품을 남긴 곳이다.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6) 때에 양지스님은 절에 제(祭)가 있을 때면 지팡이(錫杖) 끝에 시주할 포대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다니며 시주를 받아왔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 절 이름도 '석장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석장동의 이름이 된것이다. 양지스님은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와 법림사라는 절의 현판도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각은 물론 그림, 글씨에도 능통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유물로 전하는 것은 조각품 몇 점이 전부였다.사천왕사에서 출토된 사천왕전은 스님께서 남기신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만하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전(塼)은 부처님 나라를 지키는 사천왕이 갑옷을 입고 악귀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발 밑에 짓눌린 아귀의 모습은 고통을 호소하기 보다 익살스러운 느낌마져 든다. 이 작품은 아무리 사악한 악귀라도 부처님의 교화를 통해서 부처님의 수행자가 되는.. , 악귀를 영원한 악의 상징으로 보기보다 악귀도 인격을 가진 개체로 해석한 스님의 예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감은사의 동서탑 사리기도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보여진다삼국유사에는 양지스님과 석장사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석장사지를 발굴하기 전까지는 스님의 예술 세계는 물론 절터에 대한 확실한 단서조차 잡지 못하다가 1986년과 1992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의 2차례에 걸친 조사에 의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석장사는 7-8세기에 걸친 암자규모의 산지가람 이었으며,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면서 건물이 축조되었다.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민주당 창당, 신익희 사망목 차1. 제1공화국과 이승만2. 장기집권체제의 구축과 몰락1) 자유당 창당의 의미2) 발췌개헌안과 부산정치파동3) 사사오입개헌4) 민주당 창단과 1956년 정·부통령 선거3.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참고문헌1. 제1공화국과 이승만대한민국의 탄생은 국민주권의 바탕을 둔 한국 최초의 민주공화정체제를 출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 한국인의 염원과 달리 단독정부ㆍ분단국가로 출범함으로써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분단 후 계속된 남북의 반목과 대립은 급기야 전쟁이라는 민족적 참화를 불러왔으며, 남한의 반공주의와 북한의 반미주의는 양 사회를 지배하는 절대선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 사회는 반공의 거미줄 속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분단과 전쟁은 한국 사회를 왜곡시켰다. 전쟁으로 진보개혁세력은 사실상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승만은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자유당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했지만 민심의 그 결과 이반을 재촉했고 야당의 도전과 투쟁을 격화시켰다. 60년 3·15부정선거는 4·19를 불러일으켜, 이승만은 12년의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분단과 전쟁은 대한민국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했다.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통에 넘겨준 군작전권도 되찾지 못해 절름발이 주권국가가 되었다. 또한 이승만정권의 핵심적인 정치기반은 경찰과 관료, 군대였는데 이들은 모두 친일파가 장악한 상태였다.하지만 이승만 정권 12년은 대한민국사의 기본 토대가 놓인 시기였다. 헌법과 법률, 행정체계와 사법제도, 그리고 의회정치제도가 마련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식민지시대의 반봉건적인 경제구조가 허물어지고 시장경제 제도와 질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지극히 반민주적이었다. 정당은 있었으나 정당정치는 부재했고, 선거는 있었지만 부정선거가 횡행했다.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에 상관없이 제1공화국 시기를 통해 한국 사회의 원형이 마련되었다.2. 장기집권체제의 구축과 몰락1) 자유당 창당의 의미해방정국 정치지도자 가운데 이승만은 조직력이 가장 취약했다. 김구는 한독당과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임정의 주석이었고, 여운형은 건준과 인공, 인민당을 통해 가장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아무런 조직적 기반을 없었다. 처음 인공이 그를 주석으로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조직기반이 될 수없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한국민주당마저도 이승만보다는 김구의 임정에 기울어 있었을 정도로 이승만의 실질적인 정치기반은 취약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뛰어난 정치 감각과 특유의 돌파력, 시류의 흐름을 읽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이 모든 약점을 극복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당선 후 이승만의 정치적 권위는 강화되었다. 정적으로 여겨지던 여운형이 1947년에, 김구가 1949년에 죽음으로써 정치적 입지는 확고해져 간다.하지만 한국민주당의 맥을 이은 민주국민당이라는 보수야당세력이 존재하고 있어 의회는 사실상 지지정당이 없는 이승만에는 통제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게 확인 되었다. 더구나 다음 대선을 위해 간선제에서 직선제를 주장하는 이승만에게 있어서 기반이 되어줄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이승만은 원래 정당이나 정파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 정당무용론을 펼쳤지만 위의 상황을 미루어 보아 정부수립 2년여가 지난 후 자신을 언제라도 지지하고 따를 정당, 즉 강력한 여당의 필요성을 현실정치를 통해 느꼈다.그렇게 해서 1951년 12월 23일 이승만을 당수로 창단되었다. 자유당은 비록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욕에서 나온 것이지만, 한국에서 정당정치가 자리를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당의 창단과 더불어 사사오입 개헌 뒤 범(汎)보수보야당인 민주당이 창단됨으로써 양당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양당체제가 성립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이승만의 독주가 계속되었다.2)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과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의 재집권을 목적으로, 1951년 11월 정부는 국회의 양원제 및 대통령·부통령의 국민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으나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 이어서 야당이 1952년 4월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자, 정부는 먼저 부결된 직선제·양원 제안을 약간 고쳐서 그 해 5월에 다시 개헌안을 제출함으로써 국회와 정부가 정면 대결하는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부터 7월 사이에 일어난 개헌을 둘러싼 정치적 사건을 의미하지만 그 발단은 1951년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5·30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1년 11월 28일 국민 직선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51년 12월 1일자로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그러나 국회는 이 개헌안을 52년 1월 18일 부결시키고, 4월 17일 오히려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해 이승만과 정면으로 대결했다.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52년 1월부터 백골단ㆍ닷벌떼ㆍ민중자결단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단체의 이름으로 협박장이 날아들고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더니, 5월 19일에 백골단 등이 직접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으며, 5월 23일에는 관제데모대가 국회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급기야 5월 26일 헌병대는 국회 통근버스를 견인차를 동원해 통째로 끌고 가 국회의원 10명을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시켜 버렸다. 이에 대해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항의, 사퇴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도 구속 국회의원 석방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의지는 꺽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6월 30일 대통령 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의 통과를 요구하면서, 국회가 거부하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하고 나섰다. 발췌개헌안은 장택상 국무총리가 집적 나서서 내놓은 안이었다. 결국 구속의원들이 석방되고 일부 야당의원들이 경찰에 의해 강제로 국회에 끌려오는 등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7월 4일 밤 야간국회를 열어 발췌개헌안을 기립투표로 통과시켰다. 결과는 출석인원 166명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였다.부산정치파동은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위한 폭력적 정치탄압이었다. 이 사건은 그 후 이승만 장기 독재의 시발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찰과 폭력단, 우익청년단 등을 동원한 국가권력의 폭력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3)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1948년 대한민국 성립 시에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있던 헌법을 1952년에는 대통령 직선제안 헌법으로 개정한 이른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통해 이승만(李承晩)이 중임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제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改憲)을 준비했다.1954년 9월 6일 초대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와, 중대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제의 채택을 골자로 한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11월 27일 국회의 표결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가운데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였다. 이것은 개헌 정족수인 136명에서 한 표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이날 사회를 맡았던 최순주(자유당 소속)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차로 부결되었다고 선언했다.그러나 이틀 후 다시 뒤집어졌다. 서울대 교수까지 동원한 자유당의 궤변은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4사5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해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이 맞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4사5입 개헌안이 통과되는 진풍경을 연출하게 되었다.4) 민주당 창단과 1956년 정ㆍ부통령 선거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사사오입개헌으로 3선 개헌안을 억지 통과시키자 민주국민당은 자유당에서 탈당한 소장파 의원 14명 및 무소속 의원들과 함께 호헌동지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결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범야보수연합체인 민주당을 창단한다. 이는 결국 반이승만 세력의 결집체였다.민주당은 1955년 9월 19일 그 막을 올렸다. 대표최고위원에는 신익희, 최고위원에는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이 선출되었다.통합야당 민주당은 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웠다. 하지만 신익희가 선거 직전에 급사함으로써 정권교체의 열망도 허사로 돌아갔다. 다만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온갖 불법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미 민심은 완전히 돌아선 상태였지만 세상을 바꾸자면 다시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협상, 4.3사건, 대한민국수립, 여순사건Ⅰ.들어가며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고 35년간의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와 일제의 패망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그동안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해온 독립운동이 맺은 결실이었다.) 그러나 미국, 소련의 냉전체로 인하여 8.15광복은 통일 민족 국가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38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여 남한에서는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고, 북한에서도 사실상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면서 민족의 분단은 점차 고착되어갔다.)3년간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에서는 좌, 우익세력간의 대립으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협정 항목 중의 신탁 통치 문제로 우익과 좌익의 갈등은 점차 극심해져갔다. 미, 소의 날카로운 이해관계 속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는 실패로 돌아가고 남한에서는 단독으로 5.10총선거가 이루어졌다. 이 발표에서는 5.10 총선거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까지 좌, 우익의 대립과 단독 정부 지지 세력에 반대하여 통일정부를 지향했던 사람들 간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나타났던 남북협상, 대한민국 정부수립, 제주도 4.3항쟁, 여수.순천 10.19사건들을 살펴보려 한다.Ⅱ.제주도 4.3 사건남한에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후로 대규모 유혈 사태들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정 수립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이 사건은 ‘4.3항쟁’ 또는 ‘민중봉기’라고 불리 운다.)4.3사건의 배경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들이 착종되어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좌익세력의 활동, 미군정 초기부터 지속된 제주의 인민위원회 및 대중들과 우익단체간의 갈등. 군정경찰, 서북 청년단)에 대한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미군정과 제주도민들의 충돌은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도에서여 탄압을 가중시켰다. 이런 미군정의 억압정책 속에서 제주도민의 분노와 갈등은 증폭되어갔다. 이는 4.3사건이라는 무장봉기로써 폭발하게 되었다.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주위에 집결해 있던 약 3천여 명의 봉기대원들은 도내 20여 개의 경찰지서 가운데 10여 곳을 공격하며 4.3사건은 시작되었다. 무장대는 1.미군 즉시 철수 2.망국적인 단독선거 절대 반대 3.투옥 중인 애국자 즉시 석방 4.유엔한국임시위원단 철수 5.이승만 매국도당 타도 6.경찰대와 테러집단 즉시 철수 7.한국통일독립만세의 슬로건을 내걸고 항쟁했다.이를 수습하기위해 미군정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4월 10일에 5연대의 7개 대대를 9연대에 배속시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기자 9연대장 김익렬 소령과 유격대 대표 김달삼 사이에 ‘4.28 협상’이 이루어졌다. 김달삼은 다음의 4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1.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2. 경찰의 완전 무장해제, 경찰토벌대의 즉시 철수.3. 반동 테러 단체의 즉시 해산, 서북청년단의 즉시 철수.4. 피검자의 즉시 석방, 부당한 검거, 투옥, 학살의 즉시 중지.회담결과 양자 간에 타협이 이루어져 4월 30일 유격대는 무장해제를 하려했으나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시로 경찰에 의한 기습공격이 단행됨으로서 회담의 성과는 무너졌다.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 국면을 맞았으나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1948년 9월9일 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은 10월 8일 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1일에는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여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했던 여수 주둔 제 14연대가 반기를 들고일어나면서 여순사건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제주 민간 유격대들은 49년 중반까지 끈질긴 저항을 했으나 진압군의 우세, 병력 및 보주정부가 수립되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Ⅲ.김구, 김규식, 남북협상백범은 1948년 2월 10일“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김구, 김규식은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시기에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이승만의 정읍발언,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 등으로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문제는 남한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군정장관 윌리엄 딘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남북회담에 대해 조소와 비난을 보냈다. 그러나 4월 14일 정지용, 염상섭 등 문화인 108명은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민족 분열을 고착시킬 5.10선거를 비판하고 남북협상의 태도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4월 19일 김구 일행은 청년단체, 학생, 기독교단체, 베트남 인사 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행을 강행했다. 북한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 제의를 북한 정권 수립의 정당화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남북 회담의 규모를 확대할 것을 제의하고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그리고 ‘남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제안했다.)평양에서 실시된 대표자합동회의는 4월 19일 개막되어 8일간 계속되었다. 첫날은 남북한 정당사회 단체 545명이 참석하여 개최되었으나 점차 군중대회식으로 변질되어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4월 27일부터 30일 사이에 실시된 지도자협의회 요인회담은 남측 대표로 김구, 김규식, 조소항,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엄항섭이 북측 대표로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박헌영, 주영하, 허헌, 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남북요인 15명이 참여한 이 회담은 해방 후 좌우익과 중도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모임이었다. 여기서는 김규식이 북행에 앞서 김일성에게 제시한 5개항의 원칙을 놓고 토의를 진행했다.이어서 4단정을 반대하는데 있으며 미, 소 양군 철수 요구하는데 의견을 일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지 중장은 남북정당 사회단체대표 합동회의 요청서에 대한 불찬성 성명을 발표하고 5.10선거는 남한만의 참여로 치러지게 되었다.결국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던 남북협상파의 노력과 이상은 미, 소의 대립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었다. 북측은 남한의 단정수립에 맞서 김구와 김규식 없어 6월2일 제2차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열어 남한의 총선을 규탄하고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여 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고 분단은 고착되어갔다.Ⅳ.대한민국 정부수립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는 몇 단계 절차가 진행되었다. 먼저 5.10총선거가 실시되어 선거의 결과로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최되었다. 당선자의 압도적 다수는 한민당계와 이승만의 독립 촉성계 인사들이 차지했다. 7월 17일 국회는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을 공포하였다. 당초 내각책임제 헌법안이었으나 이승만의 요구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으로 바뀌었다. 7월 20일에는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치러졌다. 개표결과 대통령에는 180표를 얻은 이승만이 부통령에는 133표를 얻은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는 국회 주최로 정, 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승만이 대통령제 채택에서부터 당선에 이르기까지 한민당의 협조를 받았기에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초대내각의 국무총리는 이범석이 맡았으며 한민당은 단 1명의 장관만을 배출했다. 이후 이승만과 한민당은 점차 사이가 멀어져서 야당으로 돌아섰다.한편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 한 등을 놓고 국호 논란이 있었으며 헌법 초안 용어 중 ‘인민’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고 결국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해졌으며‘국민’을 사용하게 되었다.)1948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식장 정면에 태극기와 유엔기가 게양되었고 오전 19사건대한민국의 수립 후 이승만은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948년 10월 15일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에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갑작스런 출동명령에 14연대 내 좌익계 사병들은 혼란에 빠졌다.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의 군인들은 월북, 제주도 가는 길의 선상반란, 여수에서의 봉기의 세 가지 방안을 두고 고민하였고 여수에서의 봉기를 선택했다. 지상사는‘경찰을 타도하며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한다’고 선동했다. 이에 14대 연대의 대부분이 찬성했고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을 즉석 사살되었다. 제주사태의 진압군은 여수에서의 반란군으로 돌변하였다.반란군 지휘자는 14연대 소대장 김지회가 맡았다.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불과 4시간 만에 여수 시내를 장악하고 각 경찰서와 파출소, 시청, 군청, 역사, 우체국 등 주요기관을 장악했다. 그리고 우익계 인사와 경찰관을 살상하고 가족들까지 처형시켰다. 반란군은 여수시내 장악 이후‘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순천까지 진출했으며 여기에 이 지역의 공산당원과 일부 시민이 합세했다. 이로서 여순을 비롯 전라남도 동남부 일부 지역이 반란군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10월 20일에는 약 3만여 명의 여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는데 반란군은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총궐기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21일 정부는 광주에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작전 지도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송호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여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3일 간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토벌군은 미 군사고문관의 지원을 받아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집중공격에 나서 22일 순천, 27일 여수를 탈환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그러나 중위 김지회 등 반란군 1천 여명은 24일 밤 이미 탈출하였으며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강지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여순사수했다.
조선전기 신분제와 양반목차Ⅰ. 머리말 Ⅱ. 고려후기 신분제의 동요 1. 천인 신분의 동요 2. 양인 신분의 동요 3. 양반 귀족 및 중류층의 동요 4. 향리의 신분 동요 Ⅲ. 조선의 신분구조 1. 신분의 구조 (1) 신분제의 개편 (2) 4분설 (3) 양분설 2. 양반의 신분구조 (1) 양반의 개념 (2) 양반의 성립과정 (3) 양반의 특권 (4) 양반의 신분적 지위3. 중인의 신분구조 (1) 중인의 개념 (2) 중인의 성립과정 4. 양인의 신분구조 (1) 양인의 개념 (2) 양인의 성립과정 (3) 양인의 신분적 특성 5. 천인의 신분구조 (1) 천인의 구성 (2 노비의 방식 (3) 노비의 유형 (4) 노비의 사회적 지위 Ⅳ. 맺음말 ※ 참고문헌Ⅰ. 머리말고려후기사회는 전통적인 신분제가 크게 변질 동요하는 시기였다.무신집권과 원간섭이라는 대내외적인 변혁기와 더불어 농민·천민등 피지배층 스스로가 끈질긴 항쟁을 거듭하여 신분의 변화를 일으킨 원인을 알아보고 고려가 사라지고 조선의 탄생으로 생긴 조선의 사회구조와 신분을 이해 하려는 것이다.Ⅱ.고려후기 신분제의 동요천인신분의 동요무신집권기 전교육을 받을 권리 X과거에 응시 할 자격 X무신란고려 1170년(의종 24) 8월에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와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이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 시에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료 등을 살해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무신란이다. 표면적으로는 김부식(金富軾)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이 대장군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이나, 젊은 문신 한뢰(韓賴)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무신란의 배경에는 무관을 경시하고 문관을 우대하는 고려의 우문정책이 있었다.무신집권기 후무신집권기는 민란이 반발한 시대였다. 100년의 무신집권 기간동안 80여 개 이상의 크고 작은 농민 천민의 난이 전국을 휩쓸었다.천민 봉기집권자와 친밀한 관계 맺기 몽고간섭기신분 상승몽고 간섭 시기 사료신분상승 사료천인이 양인으로 신분이동이 쉬웠던 이유공민왕 때 홍건적 침구로 인해 호적이 모두 불타버림충숙왕 12년 10월 - 「개성부의 5부 및 외방 주현에서 백성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을 양인으로 만들어 호구를 위조한 자는 법에 의해 단죄斷罪하라」 공민왕 20년 12월 - 「본국의 호구법은 근자에 파천播遷으로 인해 모두 그 옛것을 잃어버렸으니 임자년壬子年을 시작으로 하여 구제舊制에 의거해 양·천·생구를 분간, 호적을 만들고 식년을 따라 민부에 보내어 참고에 대비케 하라」양인 신분의 동요신분 상승군공납속보관제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운 양인 농민 가운데에 노비가됨 권세가가 억압하여 자기의 노비로 만듬신분 하락중간계층향리 - 지방 행정의 실무(향촌사회를실질적으로이끌어가는지배층) 서리(잡류, 도필지임으로도 불림) – 중앙 관청의 하급 관료 남반 – 왕의 시종, 호위, 왕명 전달(관직 승진에 제한을 두었으나 실제로는 왕의 측근으로서 고위직 진출 가능) 군반 – 하급 군관 역리 – 역 관리고려 후기의 향리고려 초부터 과거, 군공, 추천 등을 통해 꾸준히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으며 특히 무신난 이후 무신정권에 의해 대거 발탁되었고 이후 원 간섭기를 거쳐 고려 말 신진 사대부층을 형성 유향품관의 등장 고려 말 홍건적, 왜구 등의 침입을 겪으면서 전쟁에 공을 세우거나 이후의 재건에 공이 있는 이들에게 허직(명예직)인 첨설직을 부여 그 결과 향촌에 머무르면서도 품계를 갖는 유향품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여타의 향리층과 자신들을 구분 그 결과 고려 말부터 향리층 내부에서 계층분화가 이루어져 조선에 접어들면서 재지사족층(-양반층)과 향리(중인층)의 계층분화로 연결양반 귀족의 동요고려 전기고려 후기문반 무반문반 무반무신 란문반 무반지방 향리들의 과거 小지방향리들의 과거 多=무신정권 때부터 형성되어 원 간섭기에 확립 친원파로서 대토지 소유공민왕의 개혁 정치기 때 대거 중앙으로 진출 지방의 향리 출신으로서 중소 지주층이며 성리학으로 무장친원세력인 권문세족 숙청권문세족공민왕의 개혁정치신진사대부Ⅲ. 조선의 신분구조1. 신분의 구조 (1) 신분제의 개편신분제 정비1차적 지배층의 배타적인 특권유지를 위한 법제적 조치2차적 피지배층의 신분적 구성의 불안정Ⅲ. 조선의 신분구조1. 신분의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2. 양반의 신분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2. 양반의 신분 구조(3) 양반의 특권(4) 양반의 신분적 지위조선초기 양반은 여러 가지 특권이 있었지만 당시의 양반은 이미 세족으로서 세관,세록을 받아 지배층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짐.Ⅲ. 조선의 신분구조3. 중인의 신분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4. 양인의 신분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4. 양인의 신분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5. 천인의 신분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5. 천인의 신분 구조Ⅲ. 조선의 신분구조5. 천민신분의 구조 (3) 노비의 유형Ⅲ. 조선의 신분구조5. 천인의 신분 구조Ⅳ. 맺음말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크게 양신분과 천신분으로 나누어지고 양신분 중에 양반․중인․양인․천인이 다시 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의 사회신분은 양반․중인․양인․천인으로 4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인층은 15세기에 성립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가서야 독립된 신분층으로 굳어져 갔다. 양반은 고려 초기부터 양인과 분화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 상급 지배신분층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중인층은 조선 초기부터 지배신분의 양분화과정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독립된 신분층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참고 문헌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5 - 조선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7. 이성무, 『조선초기 양반연구』, 일조각, 1980. 이성무, 「조선전기의 신분제도」, 『동아문화 제13호』, 동아문화연구소, 1972.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한국일보사, 1975. 정사희, 「고려말기의 첨설직」, 『진단학보』44, 진단학회, 1977 이기백, 「고려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세력」, 『호남문화연구』6, 호남문화연구소, 1974. 한영우, 「조선시대 중인의 신분계급적 성격」, 『한국문화』9, 1988. 정현재 ,「조선초기 '외거노비'의 개념 검토」 『경상사학』 경상대학교 사학회, 1985. 이희근, 『주제로 보는 한국사 3』, 고즈윈, 2005. 이영화, 『조선시대 조선사람들』, 가람기획, 2003. 한국사교재연구회, 『한국사의 이해』, 삼경사, 1999. 박기현, 『고려사람고려사회』, 늘푸른소나무, 2006 박용운,『고려시대사의 길잡이』, 일지사, 2007 박용운,『고려시대사』, 일지사, 2008{nameOfApplication=Show}
조선전기 신분제와 양반목차 Ⅰ . 머리말 Ⅱ . 고려후기 신분제의 동요 1 . 신분제의 배 2 . 천인 · 양인 · 귀족 · 향리의 신분이동 Ⅲ . 4 분설과 양천제 1 . 4 분설 2 . 양천제 Ⅳ. 양반 1. 양반의 개념 2. 양반의 성립과정 3. 양반의 특권 Ⅴ. 중인 · 양인 · 천인 1. 중인 2. 양인 3. 천인 Ⅵ. 맺음말 ※ 참고문헌 ※Ⅰ . 머리말 사회신분구조를 살펴보는 일은 그 시대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 사람들은 국가를 만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계층을 이루고 살아왔고 그 계층은 오랜 세월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 , 발전을 거듭하면서 시대를 이끌어 간다 . 조선이라는 왕조 역시 고려말기의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여 엄격한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로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조선전기의 신분구조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중요 항목들인 고려후기의 신분제의 동요 , 4 분설과 양천제 ,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에 대하여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Ⅱ 고려후기 신분제의 동요 농민항쟁 경제적 수탈에 항거 王候將相 신분해방의 의도 잠재천인신분의 동요 교육받을 권리가 없었다 과거 응시 자격이 없었다 무신집권평량과 평량은 평장사 집노비 였으나 권력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서 천인을 면하고 양인이 되었으며 감원동정을 얻을수 있었다 . 신분상승 사료 몽고 간섭시기 신분 상승양인의 신분 동요 신분상승 군공 납속보관제 충목왕 2 년 2 월에 정동겅도사征東省都事 악우岳友 …… 등이 왕에게 상서하여 말하기를 …… 그 보관補官을 위해 수미輸米하는 자가 백신白身으로 종 9 품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미 5 석 , 정 9 품은 10 석 , 정 8 품은 15 석 , 정 8 품은 20 석 , 종 7 품은 25 석 , 정 7 품은 3 0 석으로 하여 그칠 것이며 , 혹 전직이 있는 사람이 미 10 석을 납입하는 자는 1 등을 올리되 , 4 품 내지 3 품이상은 이 예에 구애받지 말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양인의 신분 하락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생계를 꾸리기가 어려운 양인 농민 가운데에 노비가됨 권세가가 억압하여 자기의 노비로 만듬귀족의 신분동요 문무관 관직의 상호교통과 통혼 , 그리고 무반귀족을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신분질서를 창출 중앙관인들이 낙향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잇따른 정치적 사건과 빈번한 정권교체 , 많은 전란에 따라 파직 및 유배를가 지방에 정착향리의 신분동요 향리의 중앙관인으로의 진출을 법제적으로 보장한 관직을 통한 신분상승 향리층이 중앙으로 진출하거나 잔존 향리층의 역이 고역화와 이를 제도적으로 편제시키는 방향에서 상대적인 자기 신분상승 무신난 이후 무신정권에 의해 대거 발탁되었고 이후 원 간섭기를 거쳐 고려 말 신진 사대부층을 형성Ⅲ. 4 분설과 양천제 사분설 조선의 사회신분이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으로 구분된다고 보는 학설 양반은 최고 신분층으로 고려 말부터 형성되어 있다가 사회계층으로 자리잡음 중인은 양반과 양인의 중간계층으로 15 세 기 말 내지는 16 세기에 이르러 신분적 구성이 이루어짐 양인은 일반 농민층의 평민으로 정부는 부분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 천인은 노비로 지칭되는 자들로 양반의 소유물로서 복종 해야하는 신분 4 분설은 양반 계층이 최고 신분층으로서의 특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으로 봄 직역과 김ㅍ이 연관되어 있으며 사회통념과 혼합되어 있다 . 개념양분설 조선 사회의 신분 구성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 될 수 있다고 보 는 학설 16 세기 이후 변모를 겪으며 양인 층 내부에서의 분화가 이루어졌다 . 비 노비자는 일률적으로 양인으로 간주한다 . 양인은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는 기본적인 오집단이자 과도적 집단이다 . 노비만을 천인으로 간주하는 양천 이분법적 신분 체계이다 집권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일방적 시혜가 아닌 평민층이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여 요구한 것에 비롯되어 신분제 개편작업이 이루어졌다 . 개념차이점 사분설에서는 양반층이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으로서 사회계층이 구분되었다고 본 다 . 양분설에서는 위로부터의 일반적 개편이 아닌 평민층의 요구로 인해 개편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본 다 . 사분설에서 는 양반 계층이 고려 말부터 형성되어졌고 조선 건국 후 자연스럽게 사회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보고 , 양분설에서는 원래 양반과 평민은 동일 집단적 요소 였는데 16 세기 이후 양인내의 분화가 이루어 지게 되어 양반 , 중인 , 양인 , 천인 , 으 로 분화 되었다고 본다 .공통점 사분설과 양분설 모두 중인계층이 16 세기 이후에 대두 하였다고 점에서 같은 의 견 . 고려 말 사회 신분 문란문제로 인해 국가 재정에 큰 손실이 있었기에 안정된 생활 기반을 위하여 역사의 발전과정 위에서 이러한 신분제 개편작업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본다 .Ⅴ. 중인 · 양인 · 천인 기술관 , 향리 , 서리 , 토관 , 군관 , 농민 , 공장 , 상인 노비 ,( 공노비 , 사노비 ) 역리 서울과 지방의 아전직 향소 , 부곡민 창기 , 의녀 , 악공 양반에서 격하된 서얼 신량역천 身良役賤 백정 , 광대 , 사당 , 무격 중등 정도의 품격이나 재산을 양천제 입증에서 천인에 대칭 신분에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 가진자 되는 신분 노비에서 파생된 천인 잡학 취재를 거쳐서 뽑힌 기술관 양신분을 양반 , 중인 , 양인 구분 직업이 사회적으로 천시되면서 직업 소속관원 양반과 대칭되는 신분 종사자까지 천시 기술관 총칭과 서얼 부모의 한쪽만이라도 노비 지방의 향리 , 토관군인 범죄자를 처벌의 차원에서 천인 편입 중간 계층의 신분층 ( 넓은의미 ) 중인 구성 개념 양인 천인정 3 품 당하관 군역 의무 ( 남자 ) 주종관계에 의한 소유주 매매 , →기술관 공민으로 기본권 보장 상속 , 증여 ( 공권력으로 신체 , 생명보장 ) 정 5 품 토관 ( 향리 ) 부자유민으로 사환권 자체 부정 벼슬 할 수 있는 권리 정 7 품 서리 ( 과거응시 기회 , 공교육 문호개방 ) 남 , 녀 구분 없이 모두 사역 직업적 세습 양인 보다 한 등급 무거운 처벌 청요직 불능 향안에 등록되지 못함 착취적인 성격이 강화 대민업무 한품 서용제 중인 양인 천 인 대우 및 지위{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