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다*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3
검색어 입력폼
  • [고전작가]윤선도론
    【고전 작가론】尹善道論연군지정과 이념의 시 세계국어국문학과 송다운, 조연정Ⅰ. 들어가며고산 윤선도는 조선 한시, 시가문학의 한 축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의 시조 75수와 한시 259수에는 그의 세련된 기교와 각고면려한 시인적 자세까지 가미되어 조선조의 마지막이자 제일의 시조시인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윤선도의 생애, 특히 그의 오랜 유배생활과 관련하여 윤선도의 시에서 나타나는 연군지정과 이념에 대해 다시 고찰해보기로 하겠다.Ⅱ. 윤선도의 생애작가를 연구함에 있어서 작가의 생애와 작품과의 연관성은 빠질 수 없다. 특히 윤선도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윤선도의 20여년이나 되는 유배생활과 그의 작품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윤선도는 1587년(선조 20)에 태어났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5수와 ?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을 붙이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 ·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 ?고금영 古今詠? ? ?증반금 贈伴琴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 (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Ⅲ. 自然과 孤山이이첨의 통박의 죄 값으로, 그의 오랜 귀양살이가 시작되었다. 20여년에 가까운 귀양살이로 그의 마음은 궁벽한 곳으로 몰아졌다. 벼슬길에서 입은 비방은 그를 궁지로 몰고 갔으며 그랬기에 그는, “浮世의 狹이 釣船의 속까지 드는가, 그러니 다시 어디로 가리오.”)라고 탄식하며 이런 현실적 극한 상황에서 벗어나 자연에 머물고자 했다.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윤선도는 입신이나 공명과는 조금 떨어져있던 사람이었다. 대신 자연에서 자신을 찾았다. 사실 고산에게서의 자연은 이 나라 시 문학사를 통시적으로 조감해 봐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만큼 그의 자연 이해의 폭이며, 관이며, 의미부여는 남다른 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자연귀의가 처사적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는 자연에서 참된 자아세계의 구축, 껍데기 삶을 팽개치고 자아를 성찰하고 실현하는 삶의 광장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향유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연을 대안이 아닌 참 삶, 자신의 본연의 삶을 되찾는 실현의 마당으로 받아들인 것이다.)즉,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말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의 문학작품은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을 하고 자연을 자아실현의 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에 자연은 그의 작품에 투영되어, 그의 말간 시세계를 구축한다.일찍이 정병욱은 윤선도가 “정치인, 학자, 시인이라는 세 인물이 한 몸뚱이 속에 우거(寓居)했던 인물”로서 “그의 생애는 출사(出仕)와 유배(流配)와 은둔(隱遁)이 얽힌 갈등의 실체”인데 “우리의 역사상에서 손꼽히는 지성인으로서 그 인물이 ‘정치인+학자+문학가’가 아닌 사람이 드물고 또한 그들의 생활이 ‘출사+유배+은둔’이라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였다. 요컨대 윤선도의 삶은 ‘출사+유배+은둔’이라는 조선조 사대부적 삶의 전형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윤선도를 조선조 사대부의 전형의 모습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윤선도는 상백헌상공서(上白軒相公書)에서 조정에서의 마음과 산림에서의 마음이 다르지 않아야 함을 말하며, 나아가서 이익을 탐해서도 안 되지만, 물러나서도 세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즉, 산림에 있어서도 조정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아 윤선도는 자의든지 타의든지 조정에서 물러나 자연에 머무를 때도 나라의 안위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았으며 이것이 그와 자연, 그리고 조정을 연결시켜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의 작품을 통해, 윤선도가 자연에 머물러 있을 때나, 조정에 머물러 있을 때 끊임없이 추구하던 것이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그러니 이 집은 진실로 나로 하여금 표연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올라가는 의취를 갖게 할 수 있기도 하나, 끝내는 또한 나로 하여금 부자와 군신의 윤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然則 此堂 固能使我 飄飄然有遺世獨立 羽化登仙之意。而終亦使我 不外於父子君臣之倫理。))금쇄동은 고산이 54세 되던 해에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나서 얻었다고 전해진다. 고산은 평생을 통해 오랜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53세 되던 2월 경상도 영덕유배지에서 돌아온 고산은 고향에 돌아온 후 이곳 금쇄동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문학작품을 쓰게 된다. 이곳 산 정상부에 있는 금쇄동 일대에는 고산이 주로 기거한 것으로 추측되는 교의제 터를 비롯하여 고산이 고기를 키우고 연꽃을 심었다는 연못터와 정자를 짓기 위해 석축을 쌓아 올린 터 등 당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아직도 명확한 시기와 성격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성터가 금쇄동을 싸고 남아있어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고 한다.이렇게 세속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금쇄동과 같은 곳에서도 부자와 군신의 윤리는 벗어날 수 없다고 고산은 말하고 있다. 이 연군지정이 윤선도의 일관된 정신적 지향인 것이다.연군지정은 이런 한시를 제외하고도 그의 시 대부분의 형성 동기가 되고 있다. 그의 연군지정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고 논의되고 있는 견회요를 보겠다.슬프나 즐거오나 올타?나 외다?나내몸의 ?올일만 닫고 닫글뿐이언뎡 그받긔 녀냐믄일이야 분별? 줄이시랴내 일 망녕된 줄을 내라 ?야 모? 손가이 ?? 어리기도 님위 타시로쇠아? 아?리 닐러도 님이 혜여 보쇼셔楸城 鎭胡樓 밧긔 우러 녜?뎌 시내야 므슴 호리라 晝夜의 흐르?다님 向? 내 뜯을 조차 그칠 뉘? 모로?다뫼? 길고길고 믈은 멀고멀고어버이 그린 뜯은 만코만코 하고하고어듸셔 외기러기? 울고울고 가?니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븟터 아란마?님군 向? 뜯도 하?히 삼겨시니眞實로 님군을 니?면 긔 不孝블효인가 녀기롸?遣懷謠??견회요?는 고산이 이이첨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간 1618년에 지은 것이다. 遣懷란 마음을 달랜다는 뜻이다. 고향에 두고 온 어버이를 그리는 마음과 궁에 두고 온 임금을 그리는 마음은 같다. 임금과 어버이를 일치시키면서 자신의 그리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孝라는 변할 수 없는 유교의 이념을 가지고 노래한다. 이는 일종의 天倫을 뜻한다. 부모와 자식이 천륜으로 맺어졌기에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데, 신하인 고산이 자신과 임금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말한다. 그렇기에 이 시는 지극한 연군지정을 나타내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6.05.08| 6페이지| 1,500원| 조회(426)
    미리보기
  • [희곡감상]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Ⅰ.서론최인훈은 나에게 먼저 소설가로 익숙한 작가였다. 그러나 희곡론 수업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희곡들도 나에게 즐거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내려 선택한 작품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이다. 이 작품은 작품의 분량도 적었지만 짧은 지문에서 오는 간결한 느낌덕분에 빠른 속도로 희곡을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작품은 평안도에서 전해내려 오는 아기장수 설화를 바탕으로 쓰여 진 작품인데 내가 그 설화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도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최인훈 희곡에 나타나있는 신화적, 제의적 요소를 찾아 그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또한 이 희곡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효과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자 한다.Ⅱ.본론1.내용에서 나타난 신화적, 제의적 요소신화는 어느 곳에서나 자주 이용되는 소재이다. 비단 문학뿐만이 아니라 음악이나 다른 공연에도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문학은 신화를 좀 더 가깝게 끌어 당겨주고 있다. 최인훈의 작품에는 모두 설화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인훈이 그저 설화를 작품의 소재사용에만 사용하는 데에 그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작품 속에서 설화를 역사로 인식하고 등장인물을 통해 보다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럼으로써 신화적 요소들을 작가 자신의 이상세계 속에서 형상화시킨다. 그리하여 새로운 이상세계가 만들어지고 신화적 요소들이 그 속에 투영되어 살아가는 것이다.이 작품에서의 제의적인 요소는 다른 작품들처럼 어느 하나의 구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면서도 하나의 제의구조 -아기장수의 탄생과 성장, 소멸, 그리고 재생 과정-를 형성한다. 뚜렷한 제의구조의 묘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그것을 돋보여주게 하기도 한다.이 작품에는 주인공들의 삶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첫째 마당부터 해산을 앞둔 어린 아내는 겨우내 나물죽만 먹으며 지내고 있고 씨앗조로 밥 한 그릇을 지어먹는 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면서 유일한 재산이 된 그 씨앗조를 도둑맞지는 않을까 싶어 긴장하고 또 긴장한다. 그리고 목이 잘려 관가 앞에 걸어놓은 소금장사 이야기에서 가난과 궁핍함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풍년만 들면 결코 도적이 되지 않았을 소금장사다. 그렇기에 주인공 부부는 돌아오는 봄에는 제발 풍년이 들기를 -도적이 끓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가 태어날 것을 기대하며 또 농사가 잘 되어 주인공 부부가 농사지으며 행복하게 살날을 기다린다.하지만 봄이 되어 아기가 태어났어도 나아질 것 없는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제대로 먹지 못한 엄마에게서 젖을 기대하지 못하니 아기도 배고픔에서 벗어날 길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의 세습은 “젖 안 먹고 크는 애기, 우리 애기 착한 애기” 라는 노래를 부르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이런 착한 애기란 사실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저 ‘기대’ 에 불과할 뿐이다. 아내가 부르는 이 노래 속에는 다른 애기도 존재한다. 배가 고파 보채면서 자란 애기가 흉년들면 도적이 되어 관가 기둥에 머리가 잘려 매달려 까막까치가 쪼아댄다는 실로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는 앞서 나오는 착한 애기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것은 바로 꿈과 현실의 대조이다. 그리고 아기를 업고 아내가 부르는 이 노래가 주인공 부부와 아기가 처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이 자신에게는 찾아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그 아기는 우리 아기가 아니라 다른 아기라고 이야기 한다.어린시절 보던 동화의 내용에서는 봄이 찾아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무언가가 좀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더군다나 주인공 부부에게는 곧 태어날 아기까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가난은 여전하다. 이러한 것은 문제의 해결 가능에 대한 기대를 자름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용마가 울었다는 소리가 들린다. 아기장수가 탄생한 것이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 백성들은 용마를 잡으라는 관가의 명령에 따라 농사에 손을 놓고, 그에 따라 그들의 고통은 점차 심화된다. 아기장수가 발견되면 저도 죽이고 부모도 죽이고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도 아내는 자신의 아기를 돌아보며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그리고 민요의 뒷부분에 나오던 도적이 된 아기를 가진 할머니가 등장한다. 죽어서 관가에 목이 걸린 아들을 찾으러 온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원님보다 더 높은 데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백성의 자리가 원님보다 더 높다는 것을 말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가난한 백성으로 태어나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선택한 도적이라는 길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이 상황이 부당함을 말한다. 특히 다른 사람이 아닌 어머니를 등장시켜 죽음의 비극성과 슬픔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이렇게 점점 비극은 심화되고 그 누구라도 그 비극의 구렁텅이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하다. 평범한 -여기서는 가난함을 의미하는- 농민으로 태어나 누가, 언제 그 비극 속에 빠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다. 즉, 그 누구라도 그러한 불운을 맞을 수 있다는 이 배경은 아기장수의 탄생에 필연성을 더해준다.이렇게 둘째마당까지의 내용에서 현재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 아기장수 탄생의 필연성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아기장수가 나타난다.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가 걷고 말을 한다. 바로 아기장수의 탄생이다. 아기장수는 여기에서 “못 참겠다” , “배고파” , “내 말” 이라는 세 마디만 이야기한다. 이 말은 아기장수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못 참겠다”는 일차적으로는 현재 갖혀있는 상황을, 넓게는 용마를 잡기위해 난리치는 관가의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가난하게 태어난 죄로 힘들어하는 주인공 부부를 포함한 농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도 나타낸다고도 생각한다. “배고파” 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작게는 엄마 젖을 먹지 못해 배고픈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이는 곧 굶주려 도적질까지 생각하고 있는 마을사람 모두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말”. 이는 곧 아기장수가 하고픈 말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 하다. 밖에 나가 뜻을 펼치고 싶어 하는 아기장수의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인 것이다.아기장수의 소멸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소멸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엄마” 라는 외침이 이 죽음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말해준다. 아버지는 자식을 죽이고 어머니는 그것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식도 죽고 어머니도 죽고 아버지도 죽는 가족적 비극은 그저 이 주인공 부부에게만 국한된 비극이 아니다. 이 비극은 민중들 전체에 퍼져있다.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은 관군의 힘 앞에서 무력한 민중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민중 모두의 비극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원래의 설화와는 약간 다른 부분이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데 어머니의 배반으로 아기장수가 완전한 죽음을 맞는 설화와 달리 희곡에서는 어머니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기장수를 죽이는 것을 반대하지만 결국 죽은 아기장수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으려 한다. 그러면서 비극으은 심화된다. 혈연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이 동일시되면서 비극성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마을사람들은 안도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의 제의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의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동형의 구조)를 나타낸다. 죄없는 아기장수의(그리스도)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죽음으로 인한 위험요소의 소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의가 지니는 사회 유지 기능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기장수 가족이 떠나는 것을 보며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독후감/창작| 2005.09.29| 4페이지| 1,000원| 조회(595)
    미리보기
  • [고전] 온달전에 관한 연구
    Ⅰ.작품 소개온달전에 대하여는 삼국사기 권 45 열전 제 5에 기록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온달조(溫達條)에 따르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얼굴이 우습게 생겨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평강왕은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하여 놀리느라고 ‘네가 울기를 잘하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 겠다’ 고 항상 말하였다.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자 공주는 ‘임금은 식언(食言)할 수 없다’고 궁중을 나와 온달을 찾아 부부가 되었다.공주는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패물을 팔아 집과 밭을 마련하고 말을 사서 준마로 키웠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이 되면 왕이 신하 및 병사들과 더불어 사냥을 하였는데 온달의 말 타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잡는 짐승도 많아서 왕이 불러 그 이름을 묻고 놀랐다. 그 때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큰 공을 세우니 왕이 기뻐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의 벼슬을 내렸다. 590년(영양왕 1)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땅을 회복하겠다고 출정을 자원하여 신라군과 아차산성(阿且山城: 서울 광나루 북쪽 峨嵯山)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Ⅱ. 작품 연구⑴짙은 설화성삼국사기 열전은 역사적 사료로서나 문학적 기록이라는 면에서나 큰 연구가치가 있다. 이 온달전은 특히 역사적인 면보다 문학적 기록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①열전에 실려 있는 다른 인물들(김유신, 을지문덕, 최치원 등)과 달리 뚜렷한 출신배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원문을 살펴보면 온달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온달 고구려평강왕시인야)〕-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즉 온달의 출신 배경이나 그가 사는 지역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또한 일반적인 전기와 달리 온달의 성장과정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전반부의 내용은 오히려 평강공주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② 온달전과 동일한 유형의 구전설화가 있다는 것도 온달전의 문학적 성격이 강함을 드러낸다. 이른바 愚夫賢女 주제의 대표적인 것으로 온달전을 들고 있는 것이다. 현명한 아내가어리석은 남편을 개발시켜 성공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의 대표적인 작품이 온달전으로서 그와 같은 이야기는 가부장제하에 억눌려 살아가던 여인들에게 대상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보고 있다.)⑵ 등장인물에 관하여온달: 온달전에 관련하여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신분에 관한 문제이다. 특히 그의 출신배경에 관한 언급이 없음을 문제 삼는데 당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고구려에 있어서 그와 공주의 결합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그가 영락한 어느 명가의 후예인지도 모르겠다는 견해를 보이며 그들의 결혼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또 그가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추남으로 묘사되고 바보라고 불리어졌으며 눈이 먼 노모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가난한 가정환경 등에서 보아 온달의 신분이 애당초 명문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는 단지 중급 귀족정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평강공주: 작품의 서두에서 어린 공주는 항상 우는 철부지 모습으로 포착된다. 때문에 국왕인 아버지로부터 ‘바보 온달’ 에게 시집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놀림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묘사와 달리 작품이 진행되면서 개성이 뚜렷한 인물로 묘사된다.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개진하는 모습, 온달을 영웅으로 만드는 모습에서 공주가 주체적인 인간임을 확인시켜준다.)⑶ 시대적 상황온달전에 있어서 마지막 부분인 온달의 출정에 관한 부분을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출정에 앞서 맹세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고 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연관되는 부분이다.⑷아차성에 관한 논쟁현재 거의 정설이 된 것은 아차성을 서울 성동구 광장동의 아차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아단성의 旦자가 且로도 표기되었다고 하여 조선 태조의 뒤의 휘가 단(旦)이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차(且)로 고쳐 아차성이라고 하고 따라서 그 소재한 산의 이름도 아차성으로 되었다)고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다른 견해로는 이 아단성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아단성이 있는 충청도 단양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의 남진정책 -온달의 출정 목표- 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가 정복하고자 했던 죽령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고개로 오늘날에도 죽령으로 부르고 있다. 또 그 곳에는 온달산성이 있으며 그 주변에 온달에 관한 전설이 많다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⑸ 온달전의 의미① 忠誠心-삼국사기의 편자인 김부식은 충?신?의(忠?信?義)의 윤리관을 강조하는 것을 열전의 기본적인 편찬의도로 삼았다. 온달전이 들어있는 5권은 특히 충의 실제적인 표징으로서 순국 및 신의를 강조하려는 충신열전이다.)온달을 단순한 충신들만을 묶은 열전 제 7에 넣지 않고 을파소?김후직?녹진?밀우?뉴우?명임답부?석우로?박제상?귀산 등과 함께 묶어서 열전 중의 한 권을 엮은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것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며 말하자면 이 한 권은 충신열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② 온달의 죽음과 관련하여-마지막 부분에서 온달은 화살을 맞고 죽었는데 그의 구(柩)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공주는 관을 어루만지며 온달의 영혼을 달래어 가야 할 길로 인도한다. 이와 같은 공주의 능력은 그녀가 샤먼의 원형상에서 내유한 인물이라는 속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다. 또 이렇게 일반적인 전기와 달리 주인공이 아니라 공주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 그의 구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한강 유역 회복에 대한 강한 집착심, 나아가서는 고구려인 전체의 의사를 반영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Ⅲ. 마치면서온달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저 전기라고 보는 면, 설화의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보는 면, 혹자는 평강공주와의 애정소설이라고 바라보기도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온달전을 전기+설화라고 바라보고 있다. 즉 온달은 설화적 부분이 많이 가미된 전기라고 보고 설화의 몫과 김부식의 몫으로 나누어 바라본다. 이 두 부분을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명확히 나눌 수는 없으나 대체로 전반부는 설화이며 후반부는 역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김부식이 온달전에서 고대의 주체적 인간상의 한 전형을 훌륭하게 창조함으로써 온달전의 인물은 삼국사기의 어떤 인물보다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는 온달전의 문학적인 중요함 역시 역사적인 중요함에 뒤지지 않게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인문/어학| 2005.09.29| 4페이지| 1,000원| 조회(720)
    미리보기
  • [현대소설]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Ⅰ. 서론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소설은 세계의 변화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거쳐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앞으로 생겨날 세계의 변화를 예견하는 일이란 제대로 된 논의전개가 있지 않고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의 추세에 근거를 두고 미래를 예측하는 자체가 일차원적인 사고이며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그 근처조차 모호한- 이상주의가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잘못을 시정하고 바르게 고치는 사고의 원리는 생극론(生克論)에서 찾을 수 있다. 생극론은 기본적으로 변증법을 대체하며 ‘발전-쇠퇴-생성’의 기본원리를 갖는다. 생극론은 다양한 구성들이 서로 상생 상극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양한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세계사는 중심이 이동해 온 역사이다. 중심의 이동을 생극론의 관점에서는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생극론이 세계 소설사에 어떤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한다.Ⅱ.본론① 유럽의 소설론소설은 독자층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작가와의 관계양상도 달라지면서 소설사는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면서 생극의 관계도 단순화되고 평면화되었다가 또 다시 생극의 관계가 파괴되어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 해체되는 소설이 나타나기도 했다.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을 정리하자면 해야 할 말은 끝도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소설사에서도 역시 다른 모든 역사에서 보이는 역전의 원리가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소설과 동아시아의 소설, 또 제 3세계의 소설 등이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며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현재 세계 소설사의 가장 큰 틀을 차지하고 있는 유럽의 소설론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겠다. 먼저 특히 높이 평가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헤겔, 루카치의 소설론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헤겔과 루카치는 서사시와의 비교를 통하여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그 둘의 관계를 헤겔은 좀더 가깝게 보았고 루카치는 좀더 멀게 보았다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루카치는 고국과 그 인접의 유럽 국가들의 문학이 바로 세계문학이라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을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의 문학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톨스토이의 간한 서사시를 향하는 성향을 이야기하며 러시아 소설이 선진국에서는 이미 버린 이상주의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준다.이 러시아 문학을 중요시한 사람으로는 바흐찐이 있다. 그러나 바흐찐은 여러 가지 잡다한 논의만을 폈을 뿐 정립된 체계를 갖춘 저서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높이 평가되는 까닭은 그러한 잡다한 것들의 공존이 바로 그가 이야기하는 소설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새로운 시야는 소설론의 재구성에 대해 나름대로의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바흐찐은 소설의 문제를 공시적으로 파악하며 변증법의 방법을 버렸다. 논리나 체계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만들어내는 개방된 태도 역시 한 미덕인 것이다. 또 ‘시공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소설이 변천한 과정을 설명하려고 했다. 다만 바흐찐은 경험의 범위가 좁아 유럽 밖의 문학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은 그저 그 안에서 머물고 말아 이론의 보편성을 띄지 못하고 있다.그리고 이야기해야 할 사람으로 골드만이 있다. 골드만은 사회사에 관해 고찰하며 소설이 이루어진 시대와 소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작업을 통해 문학사회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당대의 역사의식과 생활상이 소설에 반영되었다고 보고 그 시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다만 재검토를 통하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겠다. 그는 소설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루카치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상의 어느 일면을 지적하는데 그치는 편파적인 견해를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②유럽 소설론의 문제점과 해결유럽의 소설론은 물론 수준 높은 이론이다. 그러나 유럽소설을 통괄하여 고찰한 이론도 아니며 전반적인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대안도 체계적으로 구상되어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럽의 소설론은 말 그대로 ‘유럽 소설론’ 에 머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한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대륙의 소설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유럽 소설에 관한 이론만 전개하며 소설의 장래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유럽 밖의 사람들이 이를 공부하면서 모든 소설이 마치 유럽의 소설처럼 유럽소설론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은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만약 그것이 빠른 시일 내에 해결이 되지 못한다면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시작하기 어렵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고야 만다.
    독후감/창작| 2005.09.29| 3페이지| 1,000원| 조회(423)
    미리보기
  • [소설감상] 무정 평가B괜찮아요
    - 무정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은 무정은 춘원 이 광수의 대표적 작품으로 우리나라 소설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다. 중학교 때 읽은 책을 다시 잡으며 그때와는 다른 여러 가지 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때에는 그저 ‘글자’ 만 읽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봉건적 가치의식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근대적인 자아를 확립하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 하다. 이 광수는 새로운 인물상을 제시하면서 근대 서구문명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려는 사람들을 그려냈지만 사실 제대로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당시의 사고방식으로 비추어 본다면 굉장히 개방적이고 개성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주인공들이지만 거의 9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이 광수는 이 소설을 목적소설과 예술소설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작품으로 썼다고 생각되는데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목적보다는 예술 쪽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목적 소설 쪽으로 이 소설을 보자면 근대적 자아 확립보다는 자유연애와 여성들의 주체성확립과 여성에 대한 평등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사회를 비추어 보자면 유학이나 신문명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형편의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하지만 자유연애와 여성들에 대한 생각의 변화 등은 사람의 사고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의식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자유연애의 문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 두 여자를 두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형식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삼각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은 무정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당시 매일신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 소설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이던 중추원에서는 연재를 중지하라고 항의하기까지 했다. 글쎄, 풍속을 해친다고 생각했을까?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까 남대문에서 차를 탈 때까지는 자기는 오직 선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듯하더니, 지금 또 영채를 보매, 선형은 둘째가 되고 영채가 자기의 사랑의 대상인 듯도 하다. 그러다가 또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이야말로 내 아내, 내 사랑하는 아내'라는 생각도 난다.그런데 이러한 연애문제를 다루고 있다가 이 광수는 느닷없이, 정말 뜬금없이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당시 무정이 신문 연재소설이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 조금 이해해볼 수 있다. 이 소설이 단행본이었다면 이 광수는 수많은 퇴고를 통해 이러한 부문을 없애거나 그대로 둔다 하더라도 매끄럽게 수정하여 교육에 대한 얘기를 느닷없이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 연재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퇴고를 거치지 못하여 이러한 소설의 한계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주인공들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형식이 그러하다. 평양에 갔다가 영채의 시체를 찾지도 않고 돌아온 것에 죄책감을 느껴 다시 평양으로 가려던 형식에게 선형 집안의 청혼 소식이 전해진다. 그때 형식이 보여준 태도는 인간의 솔직한 마음인지 아니면 형식의 무정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주인공들의 일관되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와 함께 이야기는 약간 일관되지 못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이런 부문은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투영했다고 생각된다. 뚜렷한 방향의 제시도 없으며 혼란이 가득했던 1910년대의 마음이 이 광수의 소설 속에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맥락에서 [무정]은 두 가지 문제를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사랑의 모습'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교육을 통한 민족의 구원'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다 어설프지만 과거의 사랑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독후감/창작| 2005.09.27| 2페이지| 1,000원| 조회(441)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6
6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3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1:58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