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경 문서설이란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 또는 벨하우젠 설은 모세 오경이 독립적이고 유사하면서 완전히 갖추어진 형태의 서술로 되어있고, 그것들이 일련의 편집자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조합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며, 구약의 오경은 연대순으로 보면 J(여호와 혹은 야웨)문서, E(엘로힘)문서, D(신명기)문서, P(제사)문서로 구성되어 있다는 설이다. 이 가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왔다. J문서는 오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BC10~9세기에 속한다고 주장한다.2. 오경 문서설의 역사소위 문서 가설이라고 부르는, 오경의 발전에 관한 표준적인 설명은, 19세기 말에 그 명확한 형태가 형성된 이래 거의 1세기 동안 논의를 지배하였다. 15세기의 르네상스와 16세기의 종교개혁, 그리고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는 모두 오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에 흥미를 갖게 할 만한 지적인 환경으로 변화하는데 기여하였다. 문서설은 100여년 전에 이미 탁월한 반대자들에 의해 사망선고를 받았던 이론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서설은 소위 “역사비평학자들”(historical critics)이라고 불리는 구약의 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지난 100여년 동안 신봉되어 왔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그 신봉자들 사이에서 그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강력하게 제기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성경신학계를 활보하고 있다.1) 모세 단독설의 의문제기홉스와 스피노자 등은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 시대착오적인 내용들, 본문 내의 모순점들을 근거로 들어 현재의 오경이 저작일 수 없으며, 아마 에스라 시대(주전 5세기)에 가서야 현재 오경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2) 두 자료설과 신명기 문서 쟝 아스트뤽(Jean Astruc)은 현대적인 문서설에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프랑스의 치과 의사였던 쟝 아스트뤼크의 원래 의도는 모세 저작권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대에 점점 모세 저작권에 대해 반기를 드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는 것에 불만을 품고, 모세가 오경의 실제 저자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R E P O R T책명: [ 칼빈주의 강연 ]저자: [ 아브라함 카이퍼 ]출판사: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2000년), 총242p ]Ⅰ. 아브라함 카이퍼(저자 소개)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마슬라의스(Maasluis)에서 태어났다.카이퍼가 성장할 당시인 19세기 중엽엔, 16, 17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이 세웠던 6개의 대학 중 세 개가 없어졌고, 그 나머지 세 학교마저도 개혁신학이 아닌 자유신학을 따랐다. 카이퍼의 부친 역시 목사였다. 그 역시 그저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던 국가교회 목사였고, 분명한 칼빈주의자가 아닌 다소 완화된 개혁주의 형태의 정통주의자였다.카이퍼는 1855년 레이덴(Leiden)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이성을 높였던 근대주의(합리주의) 물결이 당시의 학풍을 주름잡았고, 카이퍼 역시 다르지 않았다.이미 개혁신학은 하향세였고, 자유신학이 상승세였다.레이덴 학교 역시 라우벤호프, 퀴에넌, 스콜턴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들의 수중 안에 있었다.카이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다.신학교의 권유로 칼빈과 라스코의 교회관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지만, 카이퍼는 절대로 그 개혁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그에게는 교회에 대한 통찰력이 생겼다.)비록 카이퍼는 그 논문으로 논문대회에서 금메달을 받는 영예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모더니즘적인 신학자로서 화려한 데뷔였다.1862년 그는 레이덴 대학에서 스콜턴 박사의 지도를 받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카이퍼는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이에 서 있었다.이런 카이퍼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가...1863년 여름, 그는 시골에 있는 베이스트 교회의 담임 목사로 취임을 하게 되었다(당시 25세).카이퍼는 반(半)정통주의, 반(半)자유주의였고, 베이스토 교회의 교인들은 보수적인 정통주의 경향이었다.그 교인들은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다만 칙을 국왕에게서 동의받았다.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퍼는 헤라우트지와 소책자 발행 등으로 논쟁을 벌여나갔다.암스텔담을 대학 설립 도시로 채택을 하고서, 1879년 11월 7일 지도위원들은 카이퍼 박사와 루트헤르스 박사를 대학의 신학부 교수로 미리 임명하였다.그리고 두 교수는 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 힘썼다.드디어 1880년 10월 20일 '자유대학(Free University)'을 개교하였다.카이퍼 박사는 "삶의 각 영역에 있어서의 주권"이라는 제목으로 개회 연설을 했다. (카이퍼를 자유대학의 설립자라고 칭하는 것은, 그의 넓은 이상, 그의 박력있는 지도력, 그의 훌륭한 설득력, 그의 강력한 영향력, 그의 탁월한 조직력, 그의 엄청난 추진력 때문이다.)1880년 12월, 자유대학은 5명의 교수와 5명의 학생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카이퍼 박사는 자유대학의 초대 초장으로 섬기면서, 주로 조직신학과 '신성한 신학의 백과'를 강의하였다.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설교학, 화란문학, 미학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1881년 10월 20일 그는 루트헤르스 박사에게 총장직을 넘겨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을 끼치는 현대 성서비평"이라는 연설로 아브라함 커넌(한때 카이퍼의 교수였던)을 태두로한 자유신학의 성경파괴운동에 대항하였다.카이퍼 박사는 1880년대에 학교와 신문을 통해서 방대한 종교, 신학 저술을 펴냈다.자유대학에서 계속된 강의와 "철과 진흙", "두 왕국", "칼빈주의와 예술" 등의 연설은 국가와 교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아주 적절했다.헤라우트지(종교 주간지로 변경하고, 정치적인 부분은 슈탄다트지에서만 다루고 있었다.)의 운영 편집장이었던 그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약 3년 동안의 논설 연재를 이었고 이것을 1889년에 3권의 책으로 인쇄하였는데, 성령의 사역을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해명한 최초의 화란 신학자가 되었다(프린스톤 대학의 워필드 교수와 견줄만한).또 그 신문을 통해 계속된 명상록을 출판했고, 화란의 교회상황에 들에게 칼빈주의가 전포괄적 삶의 체계를 소유하고 있음을 내세우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칼빈주의의 개념은 시대적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이 말은 로마 가톨릭이나 유대인들이 개신교도들(심지어 무신론자에게도)을 통틀어서 비난할 때 사용했던 분파적 이름이었다. 또한 예정 교리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에 대하여 교의적 편협성을 꼬집는 표현이기도 했다. 카이퍼는 이것을 고백적 용법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도덕적 생활의 참된 진지성을 위태롭게 하는 자라는 뜻에서 '칼빈주의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장 칼빈이 비판했을 용법은 교단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였는데, 이를테면 '칼빈주의 침례교(스펄전)', '칼빈주의 감리교(휘트필드)'와 같다.이렇듯 칼빈주의가 분파주의적, 고백적, 교단적 용법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개념 체계는 학문적 이름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는 종교개혁이 루터파나 재세례파나 소키누스파가 아닌 방향으로 움직인 경로를 일컫는다. 철학적으로는 칼빈의 지도에 영향을 받아 인생의 몇몇 분야를 지배하게 된 체계이고, 정치적으로는 화란, 영국, 미국에서 입헌적 정치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했던 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카이퍼는 '전세계적으로 인생과 사유에 독립적 형태를 발전시킨 독립적인 전체 경향'으로서, 즉 학문적 의미에서 칼빈주의를 규정하고 있다.우리는 아직도 칼빈주의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사상을 가지고 '삶의 체계' 운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칼빈주의의 범위는 종교개혁 정신을 꿰뚫는다. 프랑스의 '위그노', 화란의 '가난한 자(beggars)', 영국의 '청교도', '장로교도', 북미의 '필그림 파더즈' 등은 칼빈주의의 산물이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교회들 역시 순수한 칼빈주의에서 이탈하기는 했을지언정 그 영향 아래서 태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교회, 독립교회주의자, 감리교, 침례교 등의 시작은 모두 칼빈주의적이었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해야 했기에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든 모든 것에 맞서서 거룩한 분노로 전쟁을 벌였다. 물론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필요하지만, 그 중보자는 오직 하나님이어야 하고, 사람이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 확증될 수 있다.여기에서 사람을 위한 종교와 하나님을 위한 종교를 다시 한번 비교할 수 있겠다. 사람을 돕는 일이 종교의 주된 목적으로 남는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신앙심이 열등한 사람이 더 거룩한 사람의 중보 활동을 구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되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사람의 중보자 노릇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의 요구가 모든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이 두번째 요점은 개별적 선택의 고백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모든 성직자 중보의 결과가 한결같이 종교를 외형적이게 만들고 사제적 형식으로 종교를 숨막히게 하였지만, 오직 모든 사제적 간섭이 사라지고 영원부터의 하나님의 선택이 내면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로 매이게 하는 곳에서 종교가 이상적으로 실현된다. ('예정'이라는 관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을 나란히 놓을 수 있겠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전히 감독으로서 자신과 교회의 중보 위치를 유지하였다.)종교의 목적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은 종교적 필요를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그리고 종교의 실현이 성직의 중보자에게 달려 있다면, 그들 자신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사건에 종교를 국한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런 종교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데, 종교적 기관(organ), 영역, 개인의 집단에서 그런 특징이 발견된다.이러한 종교에서는 종교적 기관으로서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할 인간의 감정, 의지, 지성 가운데 지성을 억제당한다. 종교가 인간 지성의 범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종교가 적은 성도의 교제와 성례를 통하여 이 작은 불꽃들을 하나로 모아 더욱 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순전한 경배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예배,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신성함을 보존하고 이를 외부세계에 지속적으로 새겨두기 위한 교회 권징이 있어야 한다.마지막으로 교회는 집사 제도를 통해서 박애(philanthropy)의 봉사를 해야한다. 집사 제도는 구제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마음을 관대하게 하시는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그분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로서 단순히 그리스도께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소유가 그분의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져야 한다. 집사는 우리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분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아니라 집사와 구제하는 자에게 감사하는 것은 위로자이신 그리스도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다.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주의에서 교회라는 개념은 앞서 살펴본 종교라는 근본 개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의 종교, 하나의 교회를 갖는다. 교회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그 현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이며, 그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칼빈주의의 신앙고백(특히, 성도의 견인과 예정 교리)은 필연적으로 너무 쉬운 양심과 위험천만한 도덕적 방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은가?'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맺는 종교의 열매로서 칼빈주의를 생각할 때 줄곧 지적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교리가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생활을 낳고 있다는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하고 간단하게 답한다.반율법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불경건한 탐욕으로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남용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적 진지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영혼으로부터 전능자의 위엄에 놀라고 영원한 사랑의 강력한 능력에 복종하여 하나님께)
1. 신체적 특성고등학생은 완전히 성장해서 어색한 점이 없어진다. 그는 매력적인 어른의 외모를 갖추게 된다. 여전히 식욕이 왕성하다. 그리고 육체적인 습관이 형성되고 있다.완전히 성장해서 어색한 점이 없어진다사춘기 중반기에 접어든 학생도 그 초기에는 여전히 어색한 점이 많지만 근육이 자라서 뼈의 성장과 잘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그 단계는 곧 지나가 버린다. 섬세한 근육도 역시 발달되고 내부 조직도 어른과 같이 완전해진다. 이것은 또한 몸의 부분 부분 불규칙하게 자란 곳을 발달시켜서 전체의 조화를 이루게 한다.이 시기에 특별히 여학생의 경우에는 초기 사춘기 때보다 느리고 꾸준하게 자란다. 남학생은 초등부나 초기 사춘기 때에 훨씬 더 많이 자란 여학생보다는 더 빨리 성장한다.매력적인 어른의 외모를 갖추게 된다특별히 여학생에게 있어서 18세는 육체적인 매력을 지닌 나이다. 비록 얼굴은 아직 통통하고 둥글지만 18세 소녀는 어린애 같은 얼굴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소녀는 맑고 빛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여학생은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면에서 자기가 새롭게 갖추게 된 어른스러움을 강조하려고 애쓴다.만일 어떤 고등학생이 아직도 여드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는 자기 친구들이 대부분 말끔한 피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학생은 친구가 없어 질까봐 염려한다. 교사는 그러한 학생이 있는가를 잘 살펴서 그에게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책임을 맡겨 주어야 한다.여전히 식욕이 왕성하다고등학생은 자극성 있는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려 하기도 한다. 그는 자기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기 몸을 잘 돌볼 것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은 자기 몸이 성령의 전이며 그 성전에 무엇을 담을까를 지혜롭게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교사가 젊은이들에게, 예배 후나 주간 중 모임, 혹은 오갖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좋은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2. 정신적 특성그의 사리 분별력은 새로운 수준에 달하고 있다. 그는 토론과 논쟁을 좋아한다. 창조적이고 이상적이다. 전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이성적 판단으로 자기의 상상을 조절할 수 있다. 제안을 따른다.그의 사리 분별력은 새로운 수준에 달하고 있다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국사와 세계사, 정치, 수학, 물리학, 화학, 언어학 등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쌓게 된다. 사춘기 중반기에 접어든 학생의 지적 능력은 어쩌면 자기 부모의 지적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에 달할 수도 있다. 그는 자기 부모가 자가기 배우고 있는 전자나 원자 그리고 기하학 같은 것 중에서 어떤 것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고등학생이 새로이 얻게 된 사리분별력은 그로 하여금 교리를 공부할 수 있게 만든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으며 무엇 때문에 믿는가를 알고 싶어 한다. 자기가 믿는 이유를 알기 원하며 그가 어렸을 때 들었던 간단한 대답이 이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교사는 학생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학생은 곧 그러한 두려움을 알아채고는 그의 솔직한 의문이 의심과 불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이 젊은이의 “왜” “무엇 때문에”에 대한 답변을 지금 해 주지 못한다면 그는 나중에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고등부 교사는 고등학생들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학생에게 성경 말씀을 따질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는 토론의 장으로 이끌어야 한다.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암기력도 증가한다. 학생들은 이전보다 좀더 많은 경험을 했으며 따라서 옛것과 새로운 것을 더 잘 연결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실과 관념에 대한 기억력이 증가된 것이다. 전 주일에 배운 공과 공부는 여러 주일 동안 계속될 수 있다. 고등학생들은 주제를 기억하고 있으며 학과마다의 연관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고등학생들은 말보다는 그 개념을 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논쟁은 단지 감정을 상하게 할 뿐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와 기독교가 제시하는 진리에 대해 강팍해지도록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창조적이고 이상적이다고등학생의 사리 분별력은 외적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려고 한다. 소설과 노래 가사와 시를 쓰려고 한다. 자기가 사모하는 소녀에 대한 시로 가득찬 노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상 그는 하룻밤에 대여섯 편의 시를 쓸 수도 있다.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너무도 창조적이기 때문에 그는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아주 자유롭다. 특히 전통이 자기 자신의 창조적인 생각에 방해가 될 때 그는 전통을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그는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이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왔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교사는 이러한 학생들의 생각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결국 그들 중 한 사람은 프로그램을 전보다 색다르고 더 낫게 진행할 수 있는 어떤 좋은 제안을 할지도 모른다.더 나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등학생은 이전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어렸을 때 가졌던 제한된 지식이나 첫인상을 기반으로 해서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때 그는 역시 섣불리 판단해버리고는 좀더 만족스러운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겉으로 나타난 것만 가지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고등학생은 혼자서 프로그램을 짜고 싶어 하지만 교사는 그가 프로그램을 짤 때 친절하게 도와줄 필요가 있다.그의 상상은 이성과 판단력으로 조절된다고등학생의 상상은 중학생처럼 끝없이 방황하지는 않는다. 그는 아주 가능성이 농후하거나 보통 그럴 듯한 것을 상상한다.고등부 학생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지만 그가 모든 가망성을 알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가 만일 문제의 한 부분만을 안다면 어떻게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겠는가?제안을 따른다고등학생은 어른들의 방해를 싫어하며 자기 나이 또래의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는다. 교사는 자기 또한 특별한 이성친구를 갖고 싶어한다. 그는 데이트를 원하며 남학생은 어떻게 데이트를 신청하는가에 아주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면, 여학생은 데이트 신청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지나치게 염려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일은 보통이다.어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등학생이 이성에 대해 건전한 태도를 갖도록 도와줄 수 있다. 부모들은 이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찬송시간을 갖는다든가 다과회를 한다든가, 간단한 식사를 함께 하게 해서 그들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고등부 지도교사는 기꺼이 그들과 함께 소풍을 가거나 캠핑 여행을 해야한다. 다음과 같은 제목을 가지고 토론회도 열어야 한다.“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데이트를 해도 되는가?”“그리스도인은 데이트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자신의 특성이나 외모에 관심이 있다고등학생의 이성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외모를 돌보게 한다.이 나이에 있어서 옷차림은 굉장히 중요해서 자기가 다른 사람만큼 값진 옷을 입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 옷을 잘 입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는 수도 있다. 그로 하여금 자신을 깨끗하고 말끔하게 가꾸도록 격려해 주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실 뿐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다고등학생이 갖는 가장 강한 욕망 중 하나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는 어른들로부터 인정받기보다는 자기 동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더 원한다. 그는 자기 그룹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모의 충고를 무시할 수도 있으며, 인기를 얻기 위해 담배나 술, 사랑 따위를 시도할 수도 있다.인정을 받고자 하는 그러한 욕망은 자기 자신의 생각 속에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는데, 만일 학생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찾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도록 격려해 준다면, 그는 자기의 도덕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따르면 다른 사람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도록 유혹할 때 그 유혹을 물리치도록 그리스도께서 렬하지만 그것을 더 잘 조절할 수 있다. 그는 우울할 수도 있다. 안정감을 갖고 싶어한다. 스릴을 원한다.고등학생의 감정은 아직도 강렬하다그들의 감정들-기쁨, 증오, 질투, 수치감, 사랑, 슬픔-은 모두 강렬하다. 극단적인 감정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감정들은 이 시기에도 계속 발달한다.교사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같은 속도로 발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등학생은 신체적으로 다 자랐지만 감정적으로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그가 겉으로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원숙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감정이 항상 변하고 있는 고등학생은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시다. 그리스도는 형제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그들은 모든 친구들이 다 그들을 버릴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곁에 계실 친구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자기 감정을 더 잘 조절할 수 있다17, 18세가 되면 그는 군중 앞에서 자기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 고등학생은 중학생 때처럼 자기감정을 그 자리에서 쏟아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감정은 그래도 남아 있으며 실제로 나쁜 감정은 더 오래 계속된다. 어떤 때는 그는 마음속으로는 정말 괴로우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침착해 보이기도 한다.고등학생에게는 그가 신임을 하고 자기 마음속에 감추어진 문제들을 나눌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러한 감정이 자꾸 쌓여서 위험해지는 것을 막을 것이다. 교사는 학생이 그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러한 문제들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다. 일단 어떤 학생이 자기의 상담자가 자기 이야기를 학교 밖에서라도 누설한 것을 안다면 그는 더 이상 조언을 부탁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어른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록 그가 아무 해결도 발견할 수 없게 될지라도 그는 그러한 생각들을 마음속에 묻어둘 것이다.우울할 수도 있다고등학생은 자기감정을 마음속에 묻어둠으로써 우울해질 수도 있다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제 1장 하나님에 대한 연구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그지없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소유요 그가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이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지식에 관한 다섯 가지 근본 진리, 다섯 가지 근본 원리가 우리의 코스 전체를 결정할 것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1.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셨고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2. 하나님은 그의 세계에 대하여 주와 왕이시다.3. 하나님은 신자들을 죄책과 죄의 세력에서 구해내고 그들을 당신의 아들들로 받아 드리고, 따라서 그들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주권적인 사랑에서 능동적인 구주이시다.4.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신격 안에 세 격위 즉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다. 구원사역면에서는 세 격위가 다 함께 역사하시어 하나이다. 성부께서는 구속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그것을 확실케 하시고, 성령께서는 그것을 적용하신다.5.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신뢰의 복종, 믿음과, 경배, 기도와 찬양, 복종과 섬김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보아야 하며 영위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참 종교다.시 119:1,2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시편 기자는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에 관한 지식 자체를 목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진리의 소유자 바로 위대한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 원했다.제 2장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기독교에 관해 많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증거는 다음만족을 얻는다.(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단3:17-18)제 3장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1)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창조되었는가? -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이다.(2)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3)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 17:3)(4) 삶에서 기쁨과 만족을 주는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지식(렘 9:23-24)(5)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것(호 6:6)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출 33:17, 렘 1:5, 요 10:14-15, 27-28)첫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와 직접 친숙해지는 것과 같이 인격적인 만남이다.둘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을 수반한다. 곧 이지, 의지와 감정을 동반한다.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지적이고 의지적인 교제뿐 아니라 정서적인 교제이기도 하다는 것과 그것이 없으면 사람들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의 문제이다. 그것은 주도권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는 관계이다.제 4장 오직 참되신 하나님십계명 중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은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뿐 아니라, 형상을 가지고 참되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을 의미하며, 오직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궁극적으로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을 의미한다.이 계명이 강조되간과 물질을 쓰고, 돌보고 사랑하고 희생하는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제 6장 그가 증거하실 것이요성령의 사역 -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신다.(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증거하신다.(요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 성령이 아니고서는 복음과 신약성경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2.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음과 거듭남도 없을 것이다.성령만이 자신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증거가 진실함을 보증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성령께서 그렇게 행해주실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제 7장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과 인물들이 현재의 우리의 삶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불변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변하지 않는다.(사 48:12),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출34:6-7),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사 40:6-8), 하나님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민 23:19)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삼상 15:29) 하나님의 아들은 변하지 않는다.(히 13:8)제 8장 하나님의 엄위하심(greatness)하나님을 신뢰하고 경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스스로 붙이신 이름은 엘 샤다이(El Shaddai),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이 이름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전능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째로 우리 안의 하나님에 대한 제한을 제거해야 하며, 둘째로, 우리가 크다고 여기는 권세들이나 힘과 하나님을 비교해보라고 말씀하고 있다.(시 139편, 사 40장)제 9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인간의 지혜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요소들에 의해 좌절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이 한데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는지혜로우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전 12:13)제 11장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이다(시 119:51) 왜냐하면 첫째로, 그 계명들은 하나님이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서 원하시는 바를 진술하신 것으로, 안정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계명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목적 중 하나로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해 변치 않는 진리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참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약속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히 10:23)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에 따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이다.제 12장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지상의 낙원을 얻은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개개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은혜와 자비)의 발휘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행복을 그들의 행복과 동일시하사, 그들의 구세주가 되도록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이제 그들이 언약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기뻐하도록 하는 것이다.제 13장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며, 무죄한 자들은 옳다고 입증하시지만, 행악자들은 심판하심으로 의를 행하실 것이다.(창 18:25) 하나님이 죄를 벌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그 분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행악자들에게 소망이란 없으며 하나님께 응보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수 없다. 각 개인의 운명은 하나님이 그를 그의 죄에서 구하시기로 결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과,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죄인을 용서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신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성경적인 은혜관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 의지로 행하신 행동이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강요할 수 없다.(롬 9:16)제 14장 심판자 하나님성경에서 하나님이 심판자로 활동하신다는 사실보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과 그 두려움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니라)(나 1:2-3a)제 16장 인자와 엄위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11:22) 이는 곧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모든 표현의 배후에는 만일 그 인자하심이 멸시를 당했을 때는 엄위하신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가 담겨있다는 것이다.(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b-21)제 17장 질투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의 질투의 본질은 악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이며,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한 측면이다. 이러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질투는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며(왕상 19:10,14) , 하나님께 대해 열심이 없는 교회들에 대해 경고한다.(계 3:15-16, 19)제 18장 복음의 핵심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인간의 죄이며,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 진노에서 평화를 가져오는 화목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가장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신약에 기록된 화목에 관련된 중요한 네 개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롬 3:21-26, 히 2:17, 요일 2:1-2, 요일 4:8-10제 19장 하나님의 아들들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구약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백성, 아브라함의 씨의 아버지라는 것을 보여준다.(출 4:22-23) 신약 역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죄를 지신 분이심을 믿으며, 그럼으로
- 차 례 -제 1장 서론 -------------------------------------- 2제 2장 교리 -------------------------------------- 3제 3장 하나님과 인간 ---------------------------- 4제 4장 성경 ------------------------------------- 6제 5장 그리스도 --------------------------------- 7제 6장 구원 --------------------------------------- 8제 7장 교회 --------------------------------------9느낀 점 -------------------------------------------- 9제 1장서 론이 책의 목적은 현재의 종교적인 쟁점을 판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쟁점을 가능한 한 분명하고 선명하게 제시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 스스로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기독교와 현대 문화는 어떤 관계인가? 기독교는 이러한 과학적 시대에서 지탱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현대 자유주의가 해결하려는 문제이다. 과학적인 반론이 기독교적 특수성에 대항에 일어나는 것,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기독교 교리나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에 대한 반대들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종교의 일반적 원리들의 어떤 것을 구해내려고 하고 있고, 기독교의 특수성을 단지 임시적 상징들로 생각하며, 오히려 일반적인 원리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변호의 방법이 정말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날지는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변증자는 그의 외부 방어를 포기하고 어떤 내부의 성벽으로 후퇴한 후 그의 대적이 끝까지 추격하여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심리학의 영역 가운데 현대 유물주의는 기독교 도시의 아래층을 차지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의 최고 영역에까지 밀어붙여 오고 있다. 이 유물주의는 자유주의 설교가가 평화를 위하여 내어버린 있어서 가장 현저할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과 예술에서 볼 수 잇는 전례 없는 쇠퇴는 광범위하게 미쳐있는 현상의 한 단편일 뿐이다. 그것은 단지 현 세계에 있어서 진행되는 개성의 범주가 좁아져가는 모습의 하나이다.결과는 인류의 삶의 전대미문의 빈곤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그의 근본 원리를 먼저 상실한 후에는 확실히 존속이 위태롭기 때문이다.세계의 상황은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에서 종종 나타나는 편견이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공정한 선택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따라서 이제 거의 주류가 된 현대 자유주의를 기독교와 대조하여 논술하려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진술함으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제 2장교 리교회에서의 현대 자유주의는 판단을 불문하고 이제는 단순히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정신의 근본적 원리를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 해결책은 더욱 열심 잇는 진리의 탐구와 그 진리가 일단 발견될 때 그에 대해 더욱 충성스럽게 헌신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이 대 주제의 근원은 어떤 세계에서보다도 신학교들과 대학교들에서 분명하게 보여져왔다. 신학교나 대학교에서 학생들은 종종 전통적인 용어의 사용을 포기하고 있으며, 새로운(신) 종교의 옹호자들은 일반교회에서 그들이 하는 것처럼 구 종교와의 외적 일치를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전통용어가 모두 없어져 버릴 때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에 대한 현대적인 반항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러한 반대에 부딪친다. 즉 “가르침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교리나 기독교의 교리 해설은 현대에 있어서 하등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신조라는 것은 기독교인 개개의 체험의 변화 가능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신조가 그런 체험을 표현한 것이라고만 하면 모두 똑같이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가르침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이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둘은 그 바차이는 전적으로 구별된 두 종교의 차이임을 보았다. 그것은 은총의 종교와 공로의 종교의 차이였다. 바울은 분명히 옳았다.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그를 구분시키는 차이점은 단지 신학적인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그리스도 종교의 분명한 중심이자 핵심이었던 것이다.기독교의 교리적 기초를 지지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특별히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거기에는 우리가 의미하지 않는 어떤 사실들이 있는 까닭이다.첫째로 우리는 교리가 건전하면 생활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그와 반대로 교리는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다르게 변화시킨다. 초기부터 기독교는 확실히 삶의 방식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정직하고 순결하며 이타적인 생활을 영위하여 그들의 이웃을 놀라게 했으며 다른 모든 생활형태는 기독교인의 사회로부터 단연 배제되었다. 기독교는 확실히 그 창시로부터 하나의 삶이었다.둘째로 기독교의 교리적 기초를 주장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교리의 모든 조항이 균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개인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천의 교류는 오직 복음이 모든 삶의 바로 기초가 된 사람들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기독교의 주요한 현대적 적수는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의 가르침을 기독교의 가르침과 대비하여 검토해 보면 모든 점에 있어서 이 두 운동은 정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제 3장하나님과 인간우리는 앞서 기독교가 1세기에 발생한 어떤 사건 서술에 기초하고 있음을 관찰했다. 기독교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서술 안에 존재하며 그러므로 이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둘째 인간에 대해서 일정한 예비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인간에 대한 교리는 복음의 위대한 두 전제이다. 복음 자체에서와 같이 이들 전제에서도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정면으로 대립한다.첫 번째로, 자유주의는 하나님 개념에 있어 기독교에 반대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도 강한 형태의 반론에아버지”라 말하기를 즐긴다. 현대인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이런 요소에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이를 때로는 우리 종교의 정수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 되심을 가르쳤다고 여길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나? 첫째,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을 용납함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대가 일어나고 그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대답할 기회는 있었다. 둘째, 하나의 비유는 그 상세한 부분까지 추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탕자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의 기쁨은 한 죄인이 예수님 손에 의해 구원받을 때의 하나님의 기쁨과 같다는 이유로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계라고 추측할 수는 없다.신약성경의 교리는 오직 신앙의 가족이 된 사람만 관련된다. 이 교리 안에서 편협한 것은 전혀 없다. 이는 신앙의 가족이 되도록 인도해 주는 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아버지 되심에 관한 현대 자유주의의 교훈이 주는 모든 내용을 인간에게 준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이보다 무한하게 더 풍부한 것들을 제공하기에 진정 기독교인 것이다.기독교는 첫째 신관에 있어 자유주의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개념에 있어서도 다르다. 기독교가 애통하는 심령을 가진 종교라는 말은 그것이 애통하는 심령으로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기독교 신자의 태도의 특징이 계속해서 가슴을 치거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쉬지 않고 소리침에 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런 가정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기독교는 최후에, 단번에 죄와 마주치게 된 다음에는 그 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심해 속으로 던져짐을 의미한다.현대 교회의 근원적인 잘못은 이들이 절대로 불가능한 과업 곧 의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제 4장성 경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 복음의 양대 전제인 살아계신 하나님과 죄의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음을 지금껏 관찰했다. 자유주의 하나님 관념과 게 될 보다 완전한 계시를 미리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분명히 현대 자유주의가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예수의 말씀은 먼저 비판적 과정을 통하여 그 많은 기록된 말로부터 발췌되어야만 한다.예수님의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해도 예수님의 ‘생애의 목적’의 핵심이 여전히 교회에서 표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현대 자유주의가 예수님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주장은 거짓일 뿐이다. 현대 자유주의는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 가운데 절대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대단히 많은 부분 특히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라는 예수님의 인식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기독교인은 바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다. 그저 한 권의 책을 의존하는 일이 사장된 것이라거나 아니면 인위적인 일이라 할 수는 없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였으나 전 세계를 불붙게 했다. 인간의 말에 의지함은 노예와 같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은 생명이 된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하게끔 버려져 있고 은혜로운 하나님 말씀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암흑과 비탄뿐이었으리라. 성경은 그리스도인에 게 있어 육중하고 고통스런 율법이 아닌, 곧 그리스도인 자유의 대헌장인 것이다.기독교는 성경이라는 본 바탕 위에 서있는 동시에 그의 자유와 삶을 모두 성경에 근거한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죄인의 변동성 있는 감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제 5장그리스도자유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차이를 크게 세가지로 직시했다. 이 두 종교는 기독교 복음의 전제인 신관과 인간관에 있어 다르며 게다가 복음이 담겨진 성경에 대한 평가도 서로 반대된다. 그러므로 이 쌍방이 복음 자체에 대해서 뿌리부터 다르다는 것은 전혀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복음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복음의 기초인바 인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인격이란 바로 예수님이시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서도 자유주의와 기독교는 첨예하게 맞선다.예수님은 바울에게 있어 단지 신앙의 모범 정도가 아니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