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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말 전제개혁
    1. 산천으로 경계를 삼았다.요즘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보다 크며, 군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자신들의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 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할을 내야 한다.- 고려사 식화조 -여기서 말하는 간악한 도당들은 권문세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산천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의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거대한 농장은 모든 탈법적 방법을 동원한 결과물이었다. 농민에게 고리대를 놓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는 것은 점잖은 방법이었다. 무력을 사용해 토지를 약탈하거나 강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거대한 농장의 문제점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권귀와 환관들이 모두 사전을 받아 많은 것은 2~3천 결에 이르렀는데, 각기 좋은 땅을 차지하고도 모두 부역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이런 대규모 농장의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소수에 의한 토지 집중은 대다수 농민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대다수 농민들은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호 즉 소작인이 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그러나 전호의 삶은 비참했다.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로지 밭에 있을 뿐이다. 몇 무밖에 안되는 밭을 일 년 내내 부지런히 갈아봤자 부모와 처자를 먹여살릴 만큼도 안 되는데 소작료를 걷는 자들은 이미 와있다. 밭주인이 한 사람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적은 곳은 서너 명이요, 많은 곳은 일고여덟명이다. 어찌해보려 해도 할 수 없으니 누가 기꺼이 소작료를 갖다바칠 것인가. 밭의 소출료는 소작료도 다 바칠 형편이 못 되는데 어디에서 이자를 낼 것이며, 무엇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먹여 살릴 것인가. 백성들의 곤궁함이 이런 지경이다.- 고려사 이색 열전 -이색의 증언처럼 일년 내내 농사를 지으면 소작료로 다 빼앗기는 상황이었다. 전호들은 소작료 뿐만 아니라 국가에 세금도 내야 했다. 전조(田租 바칠 때는 인마의 접대비를 치러야 하고, 강제로 물건을 사야했으며, 노자로 쓰는 돈과 조운에 드는 비용까지 부담하고도 공납과 부역까지 바쳐야 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농민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개미처럼 일해도 먹고살수가 없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권문세족에게 투탁해 스스로 노비가 되었다. 노비가 되면 최소한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면제되기 때문이다.요사이 국가 기강이 무너져 백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권세 있는 자들이 모두 빼앗고 노비로 삼았다. 주현의 역리나 관노, 백성들이 농장에 들어가 백성들이 병들고 나라가 여위게 되었으며, 그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수해와 가뭄이 끊이지 않고 질병도 그치지 않았다.- 고려사 신돈조 -농업국가 고려에서 자영농의 몰락은 국가 조세체계뿐만 아니라 병농일치의 국방체계의 붕괴이기도 했다. 이것은 국가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했다. 고려 말의 국왕들이 개혁에 나선 것은 이런 이유에서 였다.2. 백성들은 그를 성인이라 추앙했다.첫 번째 개혁군주는 충선왕이었다. 충렬왕 21년 원에서 귀국한 충선왕이 대리청정을 하면서 개혁을 수행하자 권문세족의 전횡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세자가 왕을 뵈러갈 때 백성들이 길을 막으며 말을 둘러싸고는 원한을 호소했으므로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나 세자가 모두 받아주었으니 이는 대개 권세가들이 남의 민전을 탈취해도 유사가 능히 청단치 못한 까닭이다.- 고려사 충렬왕 21년 11월 -그러나 이 개혁은 4개월 만에 좌절되었다. 권문세족의 집요한 저항 대문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1298년 즉위한 충선왕은 즉위교서에서 탈법을 일삼는 권문세족을 세가 또는 호활의 무리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개혁의지를 드러냈다. 이어서 충선왕은 개혁 추진을 위해 한림원과 승지방을 통합한 사림원을 설치했다. 이어서 신진세력인 박전지, 최참, 오한경, 이진 등을 등용해 개혁정치를 펼치려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과 원 출신 왕비 계국공주와의 갈등으로 강제퇴위 당함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두 번째 개혁군주는 충목왕이었다. 왕위에 올랐을 때 충목왕의 나이는 8살이었기 때문에 모친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였다. 덕녕공주는 개혁파인 왕후를 등용하였는데, 왕후는 충목왕 2년 원 황제 순제로부터, 폐정개혁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귀국한 왕후는 김영돈과 함께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개혁안을 마련하였다. 핵심은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 정치도감은 기황후의 친동생 기주와 역시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을 양민의 토지를 탈점한 죄목으로 옥에 가두는 등의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삼만의 옥사를 빌미로 권문세족들은 개혁의 부작용을 성토하고 나섰다. 또한 정치도감을 원나라의 정동행성이문소에 고발하였고, 결국 정치도감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충목왕의 개혁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세 번째 개혁군주는 공민왕이었다. 1351년 즉위한 공민왕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권문세가들의 부당한 민전 탈점을 규제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의 저항은 강력한 반면 개혁세력은 미약하여 초기의 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홍건적의 침입, 김용의 난 등의 내우외환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추진을 하지 못했다.공민왕이 다시 개혁의 깃발을 든것은 재위 14년인 1365년이었다. 이때의 개혁은 승려 신돈을 개혁주체로 삼아 수행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세신 대족은 친당이 뿌리와 같이 이어져 있어 서로 싸고돌아 엄폐를 한다. 초야에서 나온 이들은 감정과 행동을 꾸미고 명성을 구하려 낚시질 한다. 그에 따라 지위가 높아지고 귀해지면 이번에는 세신 대족들과 혼인을 하여 자기의 처음 마음을 다 버린다. 유생은 약하고 강하지 못하다. 또한 서로 좌주-문생이라 부르면서 무리를 이루고 그들 사이의 사사로운 정에 따라 움직인다. 이 세 부류는 모두 나의 뜻에 맞지 않고 부족하다. 세속을 떠나 자신만의 뜻을 지닌 사람을 만나 그를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고질적폐단을 없애야 겠다.- 고려사 신돈전 -세신 대족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신진 관료나 유생들 기존의 기득권층에 편입되기를 바라는 무리였다.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고질적인 폐단 즉 권문세족의 대토지 소유와 자영농의 몰락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공민왕이 신돈에게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벼슬하여 세상 일 구하기를 청하니, 신돈이 겉으로는 탐탁지 않아하면서 왕의 뜻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왕이 다시금 요청하니 신돈이 아뢰기를, “일찍이 제가 들어본 바에 따르면 국왕과 대신이 참소와 이간질하는 말을 많이 믿는다 하오니, 이와 같은 일이 절대로 없어야만, 세상에 복과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왕이 손수 맹세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사부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사부를 구원할 것입니다. 생사를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서로 의혹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과 하늘이 이를 증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열전 신돈 -이렇게 정계에 등장한 신돈은 강력한 개혁정치에 나섰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권문세족들이었다.신돈이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잡은 지 30일 만에 훈친과 명망 있는 자를 파면해 내쫓았고, 재상과 대간의 임명이 모두 그 입에서 결정되었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14년 -신돈은 상벌의 권한을 제 손에 쥐고 은혜와 원수를 가려서 꼭 보복했으며, 세가대족들을 거의 몰살, 살육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여겼다.- 고려사 열전 신돈 -권문세족들에 대한 대거 숙청을 단행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 설치를 통해 토지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1366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된 신돈은 다음과 같은 유고문을 내걸었다.“근래에 기강이 모두 무너져 탐관오리가 부끄럼 없이 떳떳한 게 관습이 되었다. 종묘, 학교, 창고, 사사, 녹전군 등의 공수전과 나라 사람들의 세업인 전민을 거의 다 기득권 세력이 강탈했다. 그들은 반환할 것을 판결한 토지에 대해서도 계속 소유하거나 양민을 노비로 부리고 있다. 그리고 각 주와 현의 관리, 백성들로서 부과된 자기의 공역을 하지 않고 도피한 자들을 은닉시켜 농장을 더욱 확대하면서 해를 끼치고 나라를 궁핍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하늘에 감응하여 수재 ,한재, 역실이 끊이지 않는다.”신돈은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이내로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돌려주라고 포고한 후, 이 기한을 넘기면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공포했다.이러한 영이 떨어지자 많은 세도가들이 강점했던 전민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므로 나라 안이 모두 기뻐했다. 신돈은 하루건너 도감으로 갔으며 이인임, 이춘부를 위시한 사람들이 신소를 받고 판결을 내렸다.- 고려사 열전 신돈 -권문세족에게 시달리던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이라고 불렀다.신돈이 겉으로는 공의를 빙자했으나 실상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하여 양민이 되겠다고 호소하는 천민 노예들을 모두 양민으로 만드니, 주인을 버린 노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말하기를, “세상에 성인이 났다.”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15년 -그러나 신돈의 강력한 개혁정책에 불안을 느낀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공민왕 19년 신돈은 실각하고 이듬해 7월 처형되고 말았다.이로써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군주들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는 고려의 정치,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권문세족의 힘은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흥 사대부 특히 정도전과 조준이 있었다.3. 토지문서를 도성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토지를 빌려 일 년 내내 부지런히 고생해도 식량은 오히려 부족하였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서 손수 농사를 짓지 않고 용전인(소작인)을 부려서도 소출의 태반을 먹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
    인문/어학| 2011.03.26| 7페이지| 1,0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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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의 정치가 윤휴
    (1)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다는 말인가양란은 조선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변화의 핵심은 주자학 유일사상의 폐기와 신분제의 완화였다. 백성들이 피난가는 임금의 가마를 가로막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이몽학의 난을 경험했던 조선의 지배층은 이런 변화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요구를 수용하고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윤휴였다.?윤휴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보자. 우선 첫번째는 효종실록의 기록이다.?윤휴는 소싯적부터 글을 읽어 이름이 있었는데, 논변이 있을때면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옳게 여겼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대부분이 정자와 주자의 견해와 배치되었으나 재주가 조금 있어 늘 경륜의 소유자로 자임하였다.다음은 윤선도의 평가다.?윤휴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깨달아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딱는데 고인에 집착하지 않고 독서,강의에서 주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언론과 식견이 실로 사람들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효종실록과 윤선도의 평처럼 윤휴는 학문을 하는데 있어 주자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주작학과는 다른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윤휴는 중용해설에서 이렇게 말했다.?기가 처음 생기는 것을 태극이라 하고 음양이 나뉘는 것을 양의라 하며 기가 합해서 형태를 이룬 것을 사상이라 한다. 태극이 생기면 음양과 양의를 주관하고 나뉘면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이 된다. 사상은 합해지면 음양과 체용을 겸하니 태극은 기이다.?태극은 기라는 윤휴의 주장은 태극이 이라고 설명했던 주희의 주장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윤휴는 논어와?중용에 대한 해석에 있어 주자와 다른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윤휴의 견해를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의 사대부들은 강력하게 비판하였다.?송시열은 윤휴가?중용에 대한 해석을 주자와 다르게 하자 윤휴를?남곤과 심정에 비유하며 비판했다.주자를 모멸하는 것은 사문난적이니 그 해가 흉수나 맹수보다 심하다. 윤휴는 기묘사화 때 사림들을 도륙한 남곤, 심정 학문이 아닌 절대성이 인정되는 종교적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사서자체보다 이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논어, 중용보다 이에 대한 주희의 해석인 논어집주나 중용집주를 더 중요한 경전이었다. 이러한 주희의 학문은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영역으로 생각한 것이다.?송시열이 윤휴를 강력하게 비판하자 윤휴는 이렇게 반박했다.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주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이 맞다고 할 것이다.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겠느냐는 윤휴의 주장은 주자학만이 진리를 담은 유일한 학문이라는 조선의 사상체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또한 다원사상체제로 가야한다는 방향제시 이기도 했다.반면 송시열은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마음대로 억설한다" 고 비판했다. 이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를 강화 해야한다는 인식이었다.?윤휴와 송시열의 학문논쟁은 조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이기도 했다. 윤휴는 다원화된 사상체제를 주장했고? 송시열은 주자학 유일사상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 vs 말로만 북벌을 한 송시열강화도가 함락되던 1637년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에서 어릴적 친구 송시열을 만났다. 송시열을 만난 그는 울분을 참으려 송시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을 것이오"?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고 청에 복수하겠다는 윤휴와 송시열의 다짐. 북벌론의 시작이었다.?1. 말로만 북벌을 한 송시열?국사 교과서에는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은 실제 군사를 이끌고 중국륙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북벌은 그저 명분이었다.?효종은 북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군주였다. 아버지 인조의 치욕을 눈으로 본 탓도 있겠지만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은 효종의 북벌에 대해 안민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반대했다. 그러나 정작 민생안정책인 대동법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이 서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송시열은 효종 8년 효종의 치세를 전면부정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효종은 송시열의 상소에 분노했다. 자신의 북벌을 사사건건 반대했던 것은 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효종은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모두가 이런 생각(북벌)을 하지 않고 매번 내게 수신만 권하고 있으니 치욕을 씻지 않고 수신만 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라며 격노했지만 그 분노를 참았다. 그는 오히려 서인과의 대연정을 통해 북벌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재위 9년 그는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송준길을 대사헌에 임명했다. 반면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했던 원두표, 이완 등을 소외시켰다. 효종이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당에게 정권을 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북벌을 적극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북벌 추진에 소극적으로 나오자 효종은 송시열과의 담판을 결심한다. 이른바 기해독대 였다.?기해독대에서 효종은 자신의 북벌계획을 설명했다.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성 오랑캐가 예기치 못할 때 곧장 관으로 쳐들어 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 호걸 중에 어찌 호응 하는 자가 없겠는가.- 악대설화 -효종은 또 "대사를 위해 내전(왕비의 침전)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라고 말할 정도로 북벌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효종은 "신하가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데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며 효종을 비판했다.?효종의 북벌주장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은 자신의 몸을 닦는다는 수신이었다. 여진족이 수신을 잘했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키고 조선을 항복시킨 것은 아니었다. 북벌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국강병을 위한 현실적 정책이지 수신이 아니었다. 사실상 송시열의 대답은 북벌은 명분뿐이라는 서인의 속내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송시열을 버릴 수 없었다. 이날 효종은 송시열에게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직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더 큰 권력을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있었다.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송시열과 산당이 북벌에 소극적일 경우 정권을 회수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송시열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이 독대로부터 2달후 효종이 급서하면서 송시열과 산당은 위기에서 벗어났다.?이처럼 송시열은 북벌에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숭명대의 라는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반면 윤휴는 달랐다. 그는 진정한 북벌론자였다.?2.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현종 15년 청나라는 삼번의 난으로 내전상태에 빠진다. 이는 효종이 그토록 기다리던 북벌의 기회였다.? 그해 7월 1일 윤휴는 "선왕이 10년 동안 북으로 전진하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며 북벌을 주장했다.우리나라 정병과 뛰어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는 데다 화포와 비환(조총)을 곁들이면 진격하기에 충분합니다. 군졸 1만 대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북경)으로 넓은 규모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 한쪽 길을 터 정인(대만)과 약속하고 힘을 합해 그 중심부를 흔들어야 합니다.- 현종실록 -북벌에 대한 구체적 계획까지 담은 이 상소는 예송논쟁과 한달후 현종이 급서함으로써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나 윤휴는 포기하지 않았다. 숙종이 즉위하고 2차 예송논쟁으로 윤휴가 속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윤휴는 다시 한번 북벌을 제안했다. 숙종 즉위년 12월 1일이불가합니다." 라고 할 정도로 같은 남인 내에서도 비판적이었다. 서인은 물론이고 남인 역시 북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그러나 북벌에 대한 윤휴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숙종 1년 경연에서 윤휴는 강력하게 북벌을 주장했다.의심을 내서 군사를 동원한다면 바로 기회를 타기 좋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양서의 식량도 쉽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습니다.- 숙종실록 -윤휴는 숙종에게 지금 밖으로 세 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북벌이고, 둘째는 정(대만)과 통하는 것이며, 셋재는 청과 화호를 끊는 것이라고 했다. 북벌을 위한 군사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 대책도 있었다. 경비 마련을 위해 환곡제도를 정비하고 호포법 실시를 건의했으며, 체찰부의 복설과 병거와 화포제작을 주장했다. 병거가 간수하기 불편하다는 반대론이 나오자 "수레 하나를 10인이 담당해 서로 교대로 간수하게 하고 지방에서는 민간에 내주어 짐을 싣는 수레로 사용하면 보관에 어려움이 없다" 고 반박했다. 검토관 이하진도 "적의 돌진을 막고 기병을 제어하는 데 이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고 호응했다.?윤휴는 숙종6년 실각할 때 까지 북벌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북벌에 호응하는 사대부는 반대당인 서인은 물론이고 같은당인 남인에서조차 없었다. 이하진 같은 극소수 사대부만이 지지했을 뿐이다. 반대의 이유는 안민이었다. 숙종실록 사관의 평에는 당시 북벌에 반대하는 논리가 담겨있다.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천하의 대의를 무릇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다만 지금이 어떤 때인가. 백성의 곤궁은 극에 달했고 재력도 고갈되었다. 어린 임금이 새로 섰고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도 천하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숙종실록 -사관의 평처럼 당시 조선은 현종11~12년의 경신대기근에서 간신히 벗어난 상태였다. 당시 북벌을 반대했던 사대부들의 주장처럼 조선은 북벌 보다는 민생안정된다.
    인문/어학| 2011.03.26| 7페이지| 1,000원| 조회(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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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갈에 대한 보고서
    말갈은 삼림지대에 살며 수렵생활을 하는 삼림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말갈 7부중 흑수부를 제외한 나머지 6부는 고구려의 영역내에서 고구려인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중요한 협력자 말갈은 흑수말갈을 가리킨다. 고구려는 흑수말갈과 고구려 우위의 동맹을 맺어 흑수말갈을 통제하였다♠ 보충● 수서 말갈전의 ‘속말부가 고구려를 매번 침입하여 피해를 주었다.’ 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속말부 즉 송화강 유역은 부여의 옛 땅이었다. 그리고 부여는 고구려 천년의 적이었다. 고구려는 해부루 이전의 부여 즉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모국으로 여기고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는 적으로 대했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는 동부여에서 백번 죽을 위기를 넘겼고 동부여의 대소왕과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태조대왕때 부여는 한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부여의 후손인 백제는 고구려의 강력한 적국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중국은 속말부에 사는 모든 주민을 말갈이라고 기록했지만 실제 속말부에는 다수의 부여의 후예들과 소수의 말갈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속말부가 고구려를 침임하여 피해를 주었다.’ 는 기록은 고구려와 부여의 악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학| 2007.10.10| 4페이지| 1,000원| 조회(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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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심보감을 활용한 인성교육
    목차Ⅰ. 서론 ……………………………………………………………………………………1Ⅱ. 인성교육의 이론적 배경1. 인성의 의미 ……………………………………………………………………………42. 인성교육의 의미 ………………………………………………………………………6Ⅲ. 명심보감에 대한 분석1. 『명심보감』의 역사와 교육적 가치 ………………………………………………82. 『명심보감』의 내용과 인성교육적 의의 …………………………………………9Ⅳ. 명심보감 활용 예화집1. 명심보감 예화자료의 중2 교과단원별 활용 ……………………………………132. 명심보감 예화를 활용한 중2 도덕과 학습지도안………………………………16Ⅵ. 결론 및 제언 ………………………………………………………………………45참고 문헌 ………………………………………………………………………………47Ⅰ. 서론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현대 사회에서는 심각한 도덕문제들이 빈번히 발생되고 있으며, 이럴 때마다 교육, 특히 학교교육의 변화를 거론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으로 원래 두 가지의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즉, 지적으로 세련되고 능력 있는 인간이 되도록 돕는 일과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으로 기르는 일이다. 그러나 교육이 목적하는 바는 결국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있는 것이다. 곧 교육은 인성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사회는 교육이 목적하고 있는 바와 상충하는 현상들이 속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급격한 정보화로 인한 상업적인 대중메체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유해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청소년들의 비행과 탈선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학생들의 일반적인 심성이 황폐화되는 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위와 같은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인성을 함양하기에 좋은 방법의 하나가 다양한 삶의 경험이 내포된 우화, 신화, 영웅들의 전기, 훌륭한 문학 작품, 영화, 드라마, 실존하는 사람들의 감동적인 삶의 이라에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오고 있는 책이다. 명심보감의 한자 뜻은 밝을 명(明), 마음 심(心), 보배 보(寶), 거울 감(鑑)으로 문자 그대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기 위한 귀중한 거울이 되는 책이다. 명심보감은 여러 선인들의 말씀 중 생활의 지침, 처세의 금언, 행동의 좌우명, 인생의 지혜가 될 수 있는 말씀들을 수록한 것이다.『명심보감』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읽혀졌지만 정작 편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명심보감』의 판본 가운데 대구의 인흥재사본(仁興齎舍本)에서 비로소 고려시대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의 논저로 기록하고 있다. 그 뒤에 성균관 대학교 이우성 교수에 의해 『신간교정대자명심보감』이 발견됨으로써 엮은이가 중국 명나라 때의 범립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범립본은 1393년(조선 태조2년) 처음으로 『명심보감』(상하 2권)을 엮었다. 노당(추적의 호)운 고려시대 1246년(고종 32년)부터 1317년(충숙왕 4년)까지의 인물이므로 노당은 당연히 범립본의 『명심보감』을 보지 못했다. 범립본의 『명심보감』에 앞선 연대의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추적과 『명심보감』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명심보감』은 유(儒), 불(佛), 도(道) 삼교(三敎) 융합서 인데 범립본은 『명심보감』서(序)와 이후 여러 부분에서 민중도교의 성전인 태상감응편을 인용하고 있다. 『명심보감』의 작자는 「민간도교」에 비상한 관심을 표시하였다. 한편 범립본의 『명심보감』가운데 6조의 내용이 불경에서 인용되었지만 불교가 유교 및 도교와 모순 없이 삼교 융합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도교와 불교를 제외하면 유교와 관계되는 계명들로 된 것이 『명심보감』이다. 범립본이 『명심보감』서문에서 「불명심(不明心)이면 무이견성(無以見性)이라 했듯 명심견성(明心見性)하자는 데에 그 본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우리나라에서 명심보감이 널리 읽힌 시기의 상한을 율곡 선생의 시대로 볼 때 그 이후의 명심보감은 주로 조선 시대의 초학교재로써 쓰여왔다. 김종무의 연구에 의하면 에는 새길 수가 없으며, 썩은 흙으 로 쌓은 담장을 흙손질을 할 수도 없느리라.”예 화 자 료◈ 남쪽으로 가려고 북쪽을 향한 사람 ◈북쪽의 어떤 사람이 남쪽의 초나라로 가려고 했다. 태항산 기슭에서 말을 타고 북쪽을 향해 출발한 그는 가는 도중에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남쪽 초나라로 가는 길입니다.”누군가가 그에게 말했다. “초나라로 가려면 남쪽으로 가야지 왜 반대로 북쪽으로 가고 있소?”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내게는 아주 잘 달리는 좋은 말이 있으니까요.”“당신의 말이 아무리 잘 달려도 북쪽으로 가면 결국 초나라에 닿을 수가 없지요.”“상관없어요. 여비도 충분합니다.”“여비가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북쪽으로 가면 어쨌든 초나라에 도착하지 못할테니까요.”“상관 없다니까요. 내게는 말을 잘 모는 마부가 있습니다. 그의 재간은 아주 대단하답니다.”이런 사람은 조건이 좋고 말을 모는 기술이 뛰어날수록 초나라로부터 멀어지기만 할뿐이다.◈ 『중국철학우화』 서광사, 1993대단원1. 가치와 도덕문제중단원1. 삶의 목표와 가치소단원(2) 가치의 기능『명심보감』자료● 은혜를 베풀었거든 보답을 구하지 말 것이요, 남에게 주었거든 더 이상 쫓아 후회하지 말 것이다.예 화 자 료◈ 남몰래 제자 등록금 낸 선생님 ◈『선생님의 숨은 뜻, 깊이 새기렵니다.』8월말 명예퇴직을 앞두고 있는 한 노 교사가 20년이 넘도록 학기마다 어려운 학생들을 한 명씩 골라 익명으로 등록금을 대신 내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사울 I고 O모 교사(61?한국지리)올해로 교직생활 34년째인 O교사는 그동안 박봉을 쪼개 가정현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어왔으나 동료 교사들은 물론 은혜를 입은 수십 명의 제자들도 등록금을 내 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이 같은 사연이 알려진 것은 최근 학교 축제를 준비하던 교사들이 매년 축제 때마다 얼마간의 후원금을 내 온 익명의 후원자가 바로 O교사였음을 알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O교사는 이 사실을 전해듣고 찾맛잇는 걸 먹는답니다. 귀족 같은 생활이지요.”이 말을 하는 부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피었다.“아유, 참 멋있는 생활이로군요. 참 아드님은 어떠세요?”부인은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찌푸리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참, 우리 아들은 운이 너무 나빠. 글쎄 그 며느리가 말이에요, 한낮이 되도록 잠을 자고 이불 속에서 아침밥을 너즐러 놓지를 않나, 집안 일을 돌보지도 않고 미장원엘 달려가 머리를 수세미처럼 만들어 가지고 백화점에 나가 낭비를 하고……. 집에 돌아와선 저녁 준비를 하는가 했더니 바깥에서 비싼 돈 내고 사먹지 않나, 그야말로 칠칠맞고 허영덩어리지 뭐유.”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 부인을 쳐다보았다.▣ 『사랑과 지혜를 위한 예화 선집』대단원1. 가치와 도덕문제중단원3. 가치선택과 도덕판단소단원(3) 도덕판단의 검사『명심보감』자료● 자하께서 말씀하시길 죽고 삶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요, 부귀는 하늘에 있는 것이니라.예 화 자 료◈ 죽음의 의사 ◈말기의료(터미날 케어)라는 말이 있다. 죽음이 예고된 병으로 죽기까지 6개월 동안의 의료행위를 뜻한다. 살 가망이 없는데도 발달된 현대의료로 말기의료를 연장시키는 것이 인도적이냐, 연명이 연고로 이어지는 이상 말기의료로 마치게 하는게 인도적이냐는 오랜 쟁점이 돼왔다.한데 말기의료를 현대의학으로써 1년 간 생명을 연장시켜온 식물인간 칼렌에 대해 인공호흡기를 떼 내도 된다는 대법원 판결 이후로 전자가 우세하여 지금 미국 80% 이상의 주에서 인간존엄을 보장하는 조건부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성종 때 문헌 「용재총화」에 여진족의 안락사 얘기가 나온다. 어버이가 늙고 병들어 살 가망이 없으면 자식이 성찬을 베푼 자리에서 “곰이 되겠습니까, 호랑이가 되겠습니까?” 고 묻고 가죽자루에 넣어 나뭇가지에 걸고 활을 쏘는데 화살 한개로 죽이는 아들이 효자로 칭찬 받는다 했다.우리나라에 살아비(살부)바위니 노사암, 노사굴 등 병들고 늙은 노인을 죽이고 버리던 지명이 남아있음을 미루어 우리에게도 안락사 관습이 했다.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이라 여긴 그의 아버지가 하루 종일 아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신기를 자랑하느라 독서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왕안석이 경성에 있을 때 이 중영의 명성을 들었다. 어느 해 그는 외가에 갔다가 열 두세 살 된 중영을 보았다. 왕안석은 아주 감동하여 그에게 시를 짓도록 했다. 중영은 한참 동안 머리를 긁적이더니 시 한 수 힘들여 썼는데 전보다 훨씬 못한 것이었다.7,8년이 지난 뒤 왕안석이 다시 외가에 갔을 때 내친 김에 중영에 대해 물었더니 외삼촌이 말했다. “그 아이? 이젠 평범하다네.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를 게 없다네.”▣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대단원Ⅱ. 가정,이웃,학교 생활과 도덕문제중단원3. 학교생활과 도덕문제소단원(2) 옛날의 학교생활모습『명심보감』자료● 여형 공께서 말씀하셨다. 안으로는 어진 부형(어버이와 형)이 없으며, 밖으로는 엄한 사우(스승과 벗)이 없으면서 능히 성공을 거둔 자는 드무니라.예 화 자 료◈ 스승과 제자의 사랑 ◈무선전신을 발명한 이탈리아의 마르코니는 열 두 살 때 유명한 과학자 리기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리기 교수는 헤르츠라는 과학자가 발견한 전파를 마르코니에게 보여주었다. 마르코니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전파라고 하는 것이 공주을 마음대로 달려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전신도 전파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르코니의 이런 생각에 리기교수는 “마르코니야,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생각이다. 무선전신은 네가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아까운 것이 없는 문제이다.” 고 말했다.마르코니의 무선전신연구는 1년, 2년, 3년 세월이 흘러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마르코니를 비웃기 시작했으나 단 한 사람 리기 교수만은 마르코니를 위로하며 새 힘을 주었다.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마르코니는 그제서야 조그마한 무선 전신기를 만들었다. 실험이 행해진 어두운 들판, 수신기에서는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고 마르코니는 절망에 빠지지만 사랑하는 제자의 성공을 비는 마음으로 몇 시지 ◈
    교육학| 2007.10.10| 49페이지| 4,000원| 조회(1,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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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 목 차 ◈Ⅰ. 이상화의 생애와 연보 ------------------ 2Ⅱ. 이상화의 시 세계 ------------------ 3Ⅲ. ‘나의 침실로’ 오세영의 해석 ------------------ 41. 배경2. 해석상의 문제3. 연으로 분석4. 결말Ⅳ. ‘나의 침실로’ 다른 새로운 해석 ------------------ 111. 김흥규의 해석2. 김은철의 해석3. 김춘수의 해석Ⅰ. 이상화의 생애와 연보)1901년음력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시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의 4형제중 차남으로 출생1907년부친 작고 후 백부 이일우의 가내에 설치한 사숙에서 공부함1915년경성중앙학교(현 중동) 입학1917년《거화(炬火)》라는 습작집을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 등과 대구에서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고 전해짐1918년중앙학교 3년 수료 후 귀향. 금강산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를 방랑1919년3.1운동 당시 백기만 등과 함께 계성학교 학생 동원과 독립선언의 선전문을 작성하여 시위행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요인물이 검거되자, 이상화는 서울로 피신. 10월 백부의 권유로 서온순과 결혼함1921년5월 경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고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백조》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함1922년《백조》창간호에 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이밖에도 등을 발표.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서 2년간 수학1923년관동 대진재 직후 한국인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1924년관동 대진재의 충격으로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서울에 거처를 정하고 《백조》동인들과 교제함.1925년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경향파 문학에 가담1926년를 《개벽》70호에 발표1927년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피검됨. 장진흥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사건에도 관련되어 고문과 폭행을 당함1934년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맡아서 경영하였으나 1년 만에 경영난에 봉착하여 포기함1937년당시 북경에시종한 것은 시대적 영향 때문이다.「이중의 사망」, 「나의 침실로」, 「단조」에서 좌절(현실)과 내면화(밤, 침실, 죽음)의 추구는 이 시들의 공통점이자 1920년대 시의 공통점이다. 이상화의 초기시에서는 꿈으로 암시되는 내면적 전환이 관능과 퇴폐 그리고 허무로 나타난다. 이는 동시대의 시인들이 어느정도 같은 경향을 지닌 것을 볼 때 이상화도 별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2. 제 2기(1925~1941)- 후기시: 이상화의 초기시의 세계는 상화의 일본 체험(대략1922~1924년 무렵) 이후에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당대 현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시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① 과 현실시에로의 변모「비음」, 「가장 비통한 기욕」,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초기시를 일관하는 자기 노출과 그 강조가 더욱 격앙된 어조로 바뀐다.1925년을 전후하여 씌어진 이러한 시들은 초기시보다 직접적이고, 이미지보다는 서술형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다. 그만큼 현실대결의 직투사로 나타나고 있었다. 초기시에 나타난 꿈의 세계가 현실로 그 대상이 바뀌면서 이상화의 시는 현대시의 면모를 띠게 된다.이상화는 조국상실의 암담한 현실을 절망적 탄식이나 방황에 머무르지 않고 후기시에서는 기다림과 신뢰로 극복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침실로」의 기다림의 지향은 개인적인 여체 ‘마돈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이르러 국토로 확대하여 감상할 수 있다. 이때 이미 기다림의 지향인 개인의 자각은 민족적인 자아에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초기시후기시「말세의 희탄」(1922), 「나의 침실로」(1923),「방문거절」(1924)「가장 비통한 기욕」(1925),「구루마꾼」 (1925),「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서러운 해조」(1941)Ⅲ. ‘나의 침실로’ 오세영의 해석1. 배경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낭만주의 경향의 작품이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이어서 서구에 나타난 문예사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체를 개하였으며, 김억의 《스핑크스의 고뇌》, 남궁벽의 《오산통신(五山通信)》, 오상순의 《시대고(時代苦)와 희생》 《허무혼(虛無魂)의 선언》, 황석우의 《태양의 침몰》 등이 발표되었다. 24년 2월 《폐허이후(廢墟以後)》라는 이름으로 염상섭이 복간, 임시호를 발행하였으나 곧 폐간되었다. 《창조(創造)》 《백조(白潮)》와 더불어 한국 문학 사상 큰 자취를 남긴 잡지이다. 4?6판. 150면 내외. 통권 2호.▣▶ 장미촌(薔薇村)1921년 5월에 창간된 시동인지. 발행인은 변영서(邊永瑞), 편집인은 황석우(黃錫禹)이다.동인은 변영로(卞榮魯)?황석우?정태신(鄭泰信)?신태악(辛泰嶽)?노자영(盧子泳)?박영희(朴英熙)?박종화(朴鍾和)?박인덕(朴仁德)?이항(李虹)?오상순(吳相淳)이다. 표지에는 라는 부제와 함께 그들의 선언문을 게재하였다. 선언문에서 《장미촌》은 평화와 안식의 이상향을 뜻하는 것이며, 그 전제로서 먼저 고뇌와 고독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인의 주요작품은 황석우의 , 박종화의 , 노자영의 , 변영로의 등으로, 낭만적인 경향의 시들이다. 4?6판.▣▶ 백조(白潮)1922년 1월 박종화(朴鍾和)?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이 창간 한 문예동인지. 동인은 홍사용?박종화?현진건(玄鎭健)?이상화(李相和)?나도향?노자영(盧子泳)?박영희?안석주(安碩柱)?이광수(李光洙)?김기진(金基鎭) 등이다. 주요 작품은 시에 박종화의 《흑방비곡(黑房悲曲)》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 등 22편, 소설에 나도향의 《여이발사》,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 등 11편, 기타 기/8행문?평론?시극 등을 발표하였다. 흔히 라고 지칭되는 이들의 문학적 경향은 서구의 낭만주의와 달리 병적?퇴폐적?감상적이며 당시 유행사조인 자연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2. 해석상의 문제① ‘마돈나’라는 호명* 원래 마돈나는 이태리어로 성모 마리아를 높여 부르는 말. 그러나 이 시에서는 연인을 정신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차용된 명칭.- 마돈나로에 얽매인 듯 한 느낌을 줌.→ 마돈나를 부르는 화자의 마음과 불러도 오지 않는 마돈나를 시의 형태면에서 적절히승화시킨 성공적 사례.- 이미지 전개의 논리적인, 치밀한 대응 구조: (가),(나),(다),(라)의 각 연은 그에 해당하는 다른 단락의 같은 연과 동일한 이미지의 조응을 이룬다.연 / 단락(가)(나)(다)(라)지향하는 공간 : ①연가자침실아름답고 오랜 나라부활의 동굴삶의 조건 : ②연밝음이 오면 숨는 별꺼져가는 촛불미쳐버린 자(3연)꿈꾸는 자시간의 한계성 : ③연닭의 울음도깨비쇠북(1연)흐려지는 별→ 4, 6, 7, 9연을 삭제해버려야 훨씬 정돈된다고 논평했던 김춘수의 의견은 타당치 못함.- 연역적 방법으로 시상 처리 : 사고 < 행동, 이성 < 정열, 자유분방한 감정의 증거.1) (가)단락: 마돈나를 만날 수 있는 밤의 시작? 이 단락에서 화자는 님과 자신이 밝음을 두려워하는 두 별의 존재들이며, 새벽이 오기 전에 가출이 이루어야 한다고 밝힘.- ‘밝음이 오면 숨는 별’, ‘목거지’, ‘눈으로 유전하는 진주’: 빛과 어둠, 잔치의 제의(祭儀)의 모티브를 형상화시키는 소재.※ 빛과 어둠(밤)의 상징 : 빛에는 긍정적인 빛과 부정적인 빛이 있다. 긍정적인 빛은 무명(無明)의 대립되는 광명, 초월, 절대 자유의 공간에 존재하는빛을 말하며, 부정적인 빛은 죄악까지도 긍정하는 경직된 빛,모순의 빛을 뜻한다.→ 밝음이 오면 숨는 별 : 부정적인 빛, 긍정적인 빛은 오직 ‘부활의 동굴’을 체험한 자만이 볼 수 있음. 따라서 화자는 빛의 획득을 위해 부활의동굴에 들어가고자 함. 즉 화자가 떠날 수밖에 없노라 독백했던 것은 파멸만이 존재하는 일상적, 세속적 태도를 벗어나야만 생의 초월을 이룰 수 있기 때문.→ A) 긍정적인 빛 = 오랜 나라 = 맨몸 --- 생의 초월B) 부정적인 및 = 목거지 = 진주 ------ 비본래적인 삶C) 죽음과 재생이라는 제의 의식 체험∴ B → C → A : 부정적인 빛의 세계를 벗어나 긍정적인 빛의 세계로 가려는 화자는이 과정을 거쳐상력을, 다른 한편으로 존재초월의 신화적 의미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서 동굴은 죽음과 부활의 장소를 뜻하는데 적절한 상징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그런데 이런 동굴의 상징은 목거지의 상징과 더불어 제시되고 있는데, 목거지가 세속적 삶의 양식을 표상한다면 동굴은 성령의 경험을 통해 보다 완전한 삶으로의 재생을 뜻한다. 결국 이 둘의 이미저리가 잔치와 제의의 대응관계를 형성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는 세속적 세계와 영원한 세계의 갈등과 그것의 초월로서 죽음과 재생의 신화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자가 죽음을 원했던 것은 ‘부정적인 빛’의 상상력으로 제시된 일상적 삶의 태도였으며, 부활을 갈망했던 것은 ‘긍정적인 빛’의 상상력으로 제시된 초월적 삶의 태도였다. 그리하여 이 시의 빛의 상상력과 동굴 상징은 종국적으로 일원화된다.프랑스 유미주의 소설가인 아당의 소설 에서 그는 불완전한 현실보다는 완전한 환상의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악셀이 바로 그와 같은 인생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현실 생활에서 모자라는 것이 없었던 행복한 사내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연인에게 동반하여 자살하기를 요구한다. 악셀은 보다 완전한 세계를 위해 연인과 함께 이 세상을 즐겁게 떠나는 것이다.이 글의 서두에서 이상화의 가 한국데카당스문학의 한 전형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미학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상화의 에서 시인이 지향했던 저 긍정적인 빛의 세계가 꼭 악셀이 성취하고자 했던 환상의 세계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만큼 이 양자는 같지 않았을까?Ⅳ. ‘나의 침실로’에 대한 다른 새로운 해석1. 김흥규의 해석(1) 삶의 소망과 고뇌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주요한의 ‘불놀이’와 흡사한 분위기 및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불놀이’에 비하면 보다 치밀하게 짜여진 시적 구조와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주제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영원한 삶, 즉 죽음에의 일관된 초점을 유지한다. ‘나의 침다.)
    인문/어학| 2007.10.10| 15페이지| 3,000원| 조회(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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