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Bronze개인인증
팔로워2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661
검색어 입력폼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들어가기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많은 독서가 사이에서 일생에 한 번은 꼭 읽기를 꿈꾸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싶으나 읽기 쉽지 않은 책으로도 유명하다. 이 소설은 노벨연구소에서 선정한 최고의 책이며, 전 세계문학 사이트에서 뽑은 ’최고의 책 리스트‘ 에서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 1위로 뽑혔다. 국내 서울대학교에서 선정하는 고전 중에 매년 그 이름을 올린다.푸루스트는 1909년부터 1922년까지 14년간 오로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매진했다. 병약한 몸에 지독한 천식 때문에 코르크로 문틈을 막고 이중 덧문으로 외부를 차단한 채 글쓰기에 몰입했다. 51세 나이로 페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원고를 가다듬었으며 총 7편 중 5편부터는 사후 5년 만에 유고작으로 출간될 수밖에 없었다. 프루스트가 일생을 바친 필생의 역작이었지만 출판 당시 여러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고, 결국 자비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있는 책이다. 그 후로는 콩쿠르상도 받고 훈장도 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위대한 소설,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소설기법으로 쓴 심리주의 문학의 최고의 걸작, 이외에도 이 책을 수식하는 찬사들은 너무 많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찬사를 보탰고 이들 외에도 프루스트를 호명한 작가들은 수두룩하다. 또한, 제임스 조이스, T. S. 엘리엇, 질 들뢰즈, 카프카 등 수많은 작가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쩌면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소설가를 위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 전공자 또는 극소수의 독서가를 제외하곤 이 책을 완독한 사람은 많지 않다. 시작은 했으나 중도 포기한 사람, 아니면 겨우 한두 권 정도만 읽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한 문장 한 문다. 이러한 난독의 고통을 잘 극복하면, 극소수의 독서가들만이 누리는 즐거움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그냥 책 한 권 읽기가 어려운 시절에, 더군다나 험난한 산을 오르는 고통보다 심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을 읽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로 여겨진다. 최근 원로 불문학자 정명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아흔둘 나이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 후 나름의 비판적, 분석적 시각의 생각들을 보태어 프루스트의 《프루스트를 읽다》(현대문학)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5년간 마라톤 독서 끝에 젊은 사람들도 읽기 힘든 이 책을 읽어낸 결과에 진심으로 큰 박수로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책 속에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맛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 ‘마들렌 효과’ 또는 ‘프루스트 효과’라는 용어가 이 소설의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냄새의 기억 자극 효과를 뜻하는 이 효과는 실제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기도 했다. 마들렌 과자에 홍차를 곁들이며 우리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가보면 어떨까? 잃어버린 시간, 내면의 미로 속으로 걸어 들면 어떤 풍경들이,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질까? 프루스트가 오랜 고통으로 이 책을 쓴 이유와 우리가 힘든 고통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요 내용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은 주인공 자신의 질료적 실체 및 그것의 항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술회한 이야기다. 또한 우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날마다 조금씩 부단히 죽어간다고 한 세네카나 기타 스토아 철학자들의 인식에 공감하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탈출구를 모색하려던 명상의 기록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샤를르 소렐이나 사드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켈트적 윤회사상, 즉 개체의 끊임없는 변신에 대한 몽상의 흔적도 작품에 나타난다.그의 소설이 종래의 소설들과 다른 것은 바로 그러한 점이다. 즉 그의 소서일 것이다. 그의 소설이 오늘날까지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관심을 끈 것도 그 주체의 특성 때문일 것이며 그의 독특한 문체는 그러한 감성 및 인식체계의 표현일 뿐이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은 이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꿈을 꾸며 그 속에서 시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꿈의 세계에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들어간 주인공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당연히 현실로 인지하고 느끼며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체험을 감수한다. 잠자리에 누워 책을 읽던 중에 꿈속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그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책에서 이야기되던 성당이나 사중주곡의 한 부분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주인공이라는 인식 주체가 인지대상이었던 사물들의 일부가 되어 주객의 구별뿐만 아니라 사물들간의 구분마저 사라져 질료적 평등 혹은 자유의 바다가 이루어진다.또한 생시의 공간적 한계도 사라진다. 물론 공간적 한계가 사라지니 시간적 한계가 함께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꿈속에 잠겨 있는 동안에는 여러 해 전에 별세한 아들이나 수 세기 전 인물들과의 재회가 지극히 당연해 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동굴 속에 살던 시절까지 여러 문명기를 뛰어넘어 회귀하기도 한다. 하지만 꿈속에서 느끼는 현실감 역시 어찌나 강력한지 꿈의 세계로부터 귀환하여 생시로 진입하기 직전의 순간, 즉 비몽사몽의 순간, 마르셀은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알 수 없이 멈칫한다. 그저 한 마리 짐승의 심층부에서 경련하고 있을 법한 존재 감정만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뿐이다.꿈속에 펼쳐지는 경개, 그리고 주인공이 그 속에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감당하는 정서적 시련, 그것도 분명 엄연한 존재적 실상이다. 그 속에서 주인공이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혹은 지극한 쾌락을 맛보려는 순간, 그 두려움으로부터의 탈출을 돕거나 쾌락의 향유를 방해하는 것은 꿈의 중단 즉 생시라는 또 다른 현실로의 이동 혹은 윤회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생시 혹은의 세계로부터 생시로 이동할 때처럼 물리적 자극에 의해 촉발된다.어느 스산한 겨우랄 오후, 주인공이 서글픈 심경으로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께서 차를 한 잔 들겠느냐고 물으신다. 차를 마시는 것이 그의 습성이 아닌지라 그는 일단 사양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는 통통하고 육감적인 모양으로 빚어진 마들렌 과자 부스러기를 차에 넣어 저은 다음 차 한술을 떠서 입으로 가져간다. 음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다음 날에 대한 전망에 짓눌린 채 무심히 차를 입에 넣는데 그것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그는 극치의 유열에 사로잡힌다.그리고 다음 순간 인생의 부침에 무관심하고 온갖 재난에 무감각하며 생의 덧없음조차도 개의치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시에 자신이 보잘것없고 가변적이며 유한한 존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난다. 뿐만 아니라 일체의 현상계로부터 고립되었다는 감회에 사로잡힌다. 즉 초월감을 맛보게 되는데 그 상태는 관능의 절정상태와도 같으며 그것의 지속시간 역시 번개가 명멸하는 동안의 찰나에 불과하다.주인공은 찻술을 다시 입으로 가져간다. 그러나 그 동작을 반복할수록 유열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 유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무엇과 관련된 것인지를 알아내려는 의지가 고개를 쳐들지만 그러한 오성의 노력은 번번이 무위로 끝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차의 맛이 어린 시절 꽁브레에서 레오니 대고모님이 보리수 차에 적셔 주던 마들렌 과자와 연관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 먼 옛날 꽁브레에서 보낸 유년시절이 꼬리를 물고 뇌리에 되살아난다. 하지만 차와 입천장 간의 접촉이 유발하는 기억 소생 현상이 다시 말해 그 무의지적 추억이 왜 그토록 강력한 유열과 초월감을 수반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꿈속에서 언뜻 조우한 덕분에 다시 회생할 수 있게 된 일들과 마들렌 과자 맛이 소생시킨 옛일들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이 작품 역시 다른 많은 소설과 다름없는 회상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 회상에서는 내밀하고 한결같은 하나의 의지가 포착된다. 의 허두에서 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여기저기에 마들렌 과자 일화와 같은 범주에 들만한 일화들이 마치 이정표처럼 등장하는 것은 그 비밀을 밝히려는 혹은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의지의 징표이며 그 의지가 프루스트의 문학세계를 지탱하는 중추적 주제이다.작품의 마지막 편인 에서 드디어 주인공은 나름대로의 깨달음에 이르고, 그 비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데 그 설명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소설을 써야겠다는 그의 결단이다. 결국 에서 시작하여 까지 이어지는 그 긴 이야기의 골자는 주인공이 어떠한 방황 끝에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는지 또 진정한 예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등으로 집약된다.한마디로 프루스트의 소설은 자신의 실체인 듯한 것을 규명하려던 구도자의 명상록이라는 특징과 그 과정에서 형성된 예술론이라는 또 다른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프루스트가 젊은 시절에 쓴 수필집 《즐거움과 나날들》, 미발표 소설 《쟝 상떼이유》그리고 미술 및 문학에 관한 많은 논설문들은 모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속에 융화되어 있고, 따라서 그 소설이 그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프루스트가 정확히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1913년 가 출간된 이후 1922년 11월 18일 임종하던 날 새벽까지 작품의 손질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는 오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하나를 분비하기 위하여 잠시 이 세상에 들렸던 것 같다.한편 그의 소설을 두고 재미있다고 말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부박한 호기심이나 감성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세네카 등의 글처럼 방황과 모색의 도정에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다정한 길잡이나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평가흔히 과거에 맡았던 특정한 냄새에 자극을 받아 그와 관련된 일들을 기억해내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 것에서 유래한다.
    독후감/창작| 2023.01.13| 5페이지| 2,000원| 조회(139)
    미리보기
  • 톨스토이의 부활 감상문
    톨스토이의 부활 감상문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생애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밝은 숲속의 빈 땅’이란 뜻을 가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과 궁정 전의(典醫)의 딸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타야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생후 1년 6개월일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산고로 죽고, 9살 때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고아가 된다. 5남매 모두가 큰고모인 알렉산드라 백작 부인에게 부양되지만 13살 때는 큰고모마저 죽는 바람에 작은고모의 보호를 받는다.1844년에 형제들과 카잔으로 떠나 카잔대학 철학부 동양어학과에 입학한 톨스토이는 공부를 게을리하고 향락에 빠지는 바람에 2학기 진급시험에서 낙방하고 이듬해 법학대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 무렵 루소의 저서에 빠져든 그는 심적 갈등으로 교회와 기도 생활을 그만둔다. 19살 때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기록 생활이 이어진다. 학교도 끝을 내지 못한 자퇴서를 제출하고 맏형 니콜라이와 야스야 나폴레타나로 돌아와 새로운 농사 관리와 농민 생활의 개선에 힘쓰지만 실패하고 환멸을 느낀다. 이듬해 모스크바로 나가 무위도식하며 술과 여자와 도박으로 시간을 보낸다. 다음 해에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학사 검정고시를 치러 민법과 형법 과목을 통과하지만 여전히 향락에 빠져 지낸다.1851년에는 맏형 니콜라이를 따라 카프카즈로 떠나 카프카즈 포병여단 사관후보생 시험에 합격 4급 포병 하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유년시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시대인》주간이며 대시인인 네크라소프에게서《유년시대》에 대한 호평을 받고 《동시대인》 9월호에 발표하게 된다.1852년에는 장편《소년 시절》과 단편《크리스마스 날 밤》 등을 쓰다가 도나우군 소위보가 되어 크림전쟁에 참여한다. 3년 후 러시아와 터키가 화평을 체결하자 제대하고 곧바로 야스나 나폴레타나로 돌아와 농노의 굴레를 벗겨주려고 농민해방을 시도한다. 제대 이듬해 유럽 여행에 나선 톨스토이개설하여 농민의 아이들에게 야학 교육을 했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나 베를린대학에서는 몇 차례 청강도 하고 영국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교육 강연을 듣기도 한다. 드레스덴에서는 《미메시스》의 저자인 아우어바흐와 만난 후 야스나야 폴랴나에 돌아와 교육 잡지《야스나야 폴랴나》를 발행한다. 34살이 되는 1862년에는 18세 연하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하고 학교 사업을 중단한다.1863년에는 중편《카자흐 사람들》을 발표하고, 장편《전쟁과 평화》를 쓰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가는데 현장성을 살리려고 모스크바로 가서 보로지노의 옛 싸움터를 답사하고 첫 단행본을 낸다. 그 무렵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으며《국민교육론》을 발표하고, 《초등교과서》재판을 낸다. 2년 후에는 《러시아 통보》지에《잔쟁과 평화》제1-2부에 해당되는 장편《1805》를 발표하고 그 후로 계속《전쟁과 평화》를 집필한다. 47세 때인 1875년에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안나 카레니나》를《러이사 통보》지에 게재하기 시작하고 투르게네프의 서문이 실린《두 경기병》을 프랑스《르땅》지에 발표한다.1881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부음을 받는다. 러시아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들이다. 그들의 다른 점은 도스토옙스키는 타인을 설정하여 자신의 사상과 주제를 형상화했지만 사실주의자인 톨스토이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인 인물을 내세웠던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서의 안드레이와 피에르,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레핀, 《부활》에서의 네플류도프 등은 바로 톨스토이 자신인 셈이다.71세가 되는 1899년에는《니파》지에《부활》을 발표한다. 그 무렵 아카데미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고 체홉, 고리키와 자주 어울렸으며 희곡《산송장》을 쓴다. 이듬해에는 정부의 어용 기관인 종무원이 톨스토이를 그리스 정교회에 파문하자 을 쓴다. 그리고 니콜라이 대공을 만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올릴 을 전달한다.1906년에는 《인생독본》을 출간하고이 박람회가 성대히 거행된다. 야스나야 폴랴나에는 농부 옷을 입은 늙은 사상가를 보기 위해 국적과 계층을 초월한 방문객이 줄을 이었다. 그는 이미 선지자를 방불케 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톨스토이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집피에 매달렸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10년에만 해도 82세의 노구로 2월에 단편 를 집필하고, 3월에는 희곡 을 완성하고, 단편 를 탈고하고, 7월 22일에는 최후로 정식 유언장을 작성하고 8-9월에는 《세상에 죄인은 없다》를 개작했다. 그리고 10월 28일 새벽에는 아내 소피아에게 최후의 쪽지를 적어놓고 의사 마코베츠키이를 데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의 정든 집을 뒤로한 채 전 인류와의 사랑의 길을 떠난다. 10월 29일엔ㄴ 3일 전부터 써온 최후의 저술인 논문 《유효한 수단》을 탈고하고, 10월 31일에는 여행 도중 병이 위독해져 아스타포보 시골 간이역에서 내려 역장 오졸린의 집에 머물게 된다. 아스타포보에 모여든 의사들은 모두 폐렴이라고 진단했다.그는 11월 7일 오전 6시 5분 눈을 감았다. 큰 별이 떨어졌다. 그는 개인의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선(善)이 인생의 목적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외쳤다.2. ‘부활’의 줄거리1889년 톨스토이는 71세의 고령에 《부활》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부활》은 사유재산을 부정한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 부정파 교도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집필한 그의 마지막 대작이다.이 작품은 3월 3일자 《니와》지 11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했는데 닥터 지바고의 아버지인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 지바고가 삽화를 맡았다. 톨스토이는 그의 그림에 대단히 만족해서 ‘삽화가 내 문장보다 훨씬 훌륭하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는 훗날 톨스토이의 데드마스크를 뜨기도 한다.톨스토이의 《부활》은 자신의 친구이자 저명한 법률가인 코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것인데 이의 모순을 재인식하게 되는데 작자는 이러한 주인공의 회개를 통해 당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각성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작자는 주인공의 도덕적 결단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동시에 참된 삶의 가치를 찾아 나가는 과정도 보여준다.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네플류도프 공작은 어느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하는데 거기서 살인 혐의 받고 있는 카추샤를 만난다. 젊은 시절에 네플류도프는 고모네 집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그대 카추샤는 고모의 양녀 명목으로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하녀 노릇을 하며 살고 있었다. 고모네 집을 떠나기 전날 밤에 네플류도프는 충동적으로 그녀를 겁탈했고 그가 떠난 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모는 화가 나서 그녀를 내쫓아버린다. 졸지에 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카추샤는 매춘부로 살아가다 끝내 범죄자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네플류도프는 카추샤의 타락이 자신의 비열한 행동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 속에서 자신의 방탕하고 비도덕적인 삶을 반성한다. 또한 땀 흘리는 농민은 가난하게 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주와 귀족들은 농민을 착취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는다.카추샤의 석방을 탄원하면서 감옥을 드나드는 동안 네플류도프는 무고한 사람들이 법률적인 도움을 받지 못해 죄인으로 갇혀 있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영지에 내려가서 농민의 궁핍한 생활을 비로소 깨닫고, 페테르부르크에서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며 귀족사회의 부패와 천박함을 절실하게 느꼈다.결국 네플류도프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카추샤를 따라 떠난다. 그리고 춥고 황량한 시베리아 벽지의 어느 여관방에서 그는《신약성서》의 복음서를 읽다가 자신의 영혼을 부활시킬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이 소설은 예술적으로 원숙할 뿐만 아니라 완벽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당시의 사회조직과 법률의 허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우수작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와 함께 톨스토이의 3대 작품으로 손꼽힌다.톨스토이는 영위하며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완성을 신조로 하여 사랑의 정신으로 전 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3. 작품에 대한 평가와 분석1887년에 톨스토이는 친구인 법률가 코니에게 옛날 페테르부르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녀 로자리야는 어느 부유한 부인의 양녀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하녀 신세가 되어 살고 있었는데 부인의 친척 청년이 놀러 왔다가 그녀를 유혹해 임신하고 만다. 부인은 화를 내며 그녀를 쫓아냈고, 로자리야는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매춘부로 전락한다. 어느 날 그녀는 취한 사람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다가 4개월 형을 받는데 옛날의 그 청년이 재판원의 배심원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청년은 충격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로자리야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사람은 한시바삐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지만, 갑자기 로자리야가 감옥 안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만다.톨스토이는 이 이야기에 감동하여 1889년에 소설 창작에 착수하여 10년 만인 1899년에 완성했는데 어쩌면 그가 이 이야기에서 특별히 감동을 한 이유는 자신의 젊은 시절 때문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자신도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고, 특히 그의 고백에 따르면 자기 영지의 농민의 딸과 관계를 맺은 일이 있으며 또 숙모 집의 순진한 하녀와 관계를 맺었고 결국 그녀가 타락하여 일생을 망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에 헌신한 톨스토이는 시베리아로 떠난 《부활》의 주인공 네플류도프와 너무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제정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법률, 교육, 종교 등 모든 면을 분석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기본적 제도들에 숨어 있는 모순과 죄악을 들추면서 이 모든 것들이 범죄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고발한다.카추샤의 경우에도 그렇다. 카추샤가 무거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그녀를 타락과 범죄로 몰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23.01.12| 5페이지| 2,000원| 조회(258)
    미리보기
  •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정초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1.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난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경건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양친 모두 루터파 경건주의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의 나이 8살 되던 해에 어떤 현명하고 마음씨 좋은 목사의 눈에 띄어 그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라틴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때의 영향 탓이다.1704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신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신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때때로 설교까지 했지만 주로 수학과 물리학에 흥미를 느꼈다. 이 시기에 그는 합리론 철학을 체계화한 볼프 철학 및 마르틴 크누첸 교수의 도움으로 뉴턴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동안 그는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생활동이나 즐거운 오락거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은 당구를 치는 정도였다. 1746년 부친이 죽자 우선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야 했으므로 가정교사 생활을 9년 동안 해야 했다.1749년 발표한 그의 첫 저서 《생명력의 참된 평가에 관한 사상》 이후 그는 일련의 자연과학 저서들을 내놓았다. 1755년 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해 이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친구의 도움으로 사강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로 41년 동안 대학에 재직했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 교육학, 지리학과 그 밖의 여러 학문 분야를 연구했다.시간강사로 활동하던 중 1766년 왕립 궁정도서관의 부관장직을 얻게 되어 1772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1769년에는 에어랑엔 대학에 신설된 이론 철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지만 고향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 가기를 원했다.마침내 1770년 칸트는 15년간의 시간강사 체계를 잡은 비판철학은 곧 독일 말을 쓰는 모든 중요한 대학에서 강의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새로운 철학의 성지로 여기고 몰려들었다.칸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많은 선배 철학자들처럼 독신으로 사는 것이 철학자의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한 그는 ‘걸어 다니는 시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규칙적인 습관과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자는 것을 철칙으로 알았고,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했다. 160cm도 안 되는 작은 키에 기형적인 가슴을 가진 칸트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기 때문에 평생 그런 엄격한 생활을 유지한 것 같다.1793년《이성의 한계 내에서 종교》를 출간하면서 칸트는 프로이센 당국과 종교의 믿음을 표현할 권리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 이 책에서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태도로 종교에 접근한 것이 정통 종교에 문제가 되어 종교적 주제에 대한 강의나 저술 활동을 한동안 금지당하기도 했다. 나이가 점점 들어 쇠약해지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1804년 2월 12일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좋다”였다.2. ‘도덕 형이상학’의 주요 내용칸트의 《도덕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 1797)는 《순수이성비판》을 보충하기 위해 쓴 책으로 《순수이성비판》에서 제기한 사고의 혁명을 완화된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4가지 물음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 일반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 《도덕 형이상학》인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순수이성비판》에서 밝힌 감성과 오성의 능력을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의 가능성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하였다.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도 그러했지만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그의 윤리 사상은 매우 플라톤적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경험적 세계는 초월적인 이데아 계의 불개인주의 윤리 사상을 집어넣었다. 그것이 바로 윤리적 인격의 존엄이라는 사상이다. 칸트에 의하면 본체게에 속하는 윤리적 인격은 평등한 존엄을 갖고 있으며 단순히 다른 목적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인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목적의 왕국이다. 이 목적의 왕국에서 타당한 것은 자율의 윤리이며 타율적 윤리는 인격의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다.(1) 법과 도덕칸트의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이자 관념론적인 윤리 사상은 법사상에서 매우 현실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법질서란 동물적 이기심의 소유자인 현상인의 세계에 지금의 질서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며, 도덕적 의사는 그러한 욕망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으므로 법질서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외의 동기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칸트는 “윤리적 입법의 외적인 것이 될 수 없지만 법률적 입법은 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며 도덕성은 의무의 관념이 행동의 동기가 되어야만 하며 합법성은 동기에 상관없이 행위와 법칙이 일치하면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이기심과 공포심, 허영심 때문에 의무를 준수했다면 합법성의 요청은 충족되지만 도덕성은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도덕률은 이성적 인격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율적인 것에 비해 법은 현상인으로서의 인간에 관련되는 것이므로 주권자라는 타율적 입법자의 입법이 필요하며 그의 위반에 대해서는 공포심 등의 동기를 동원하는 강제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도덕은 내면의 의지가 법을 입법하고 양심의 법정에서 그것을 재판해 위반할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제재가 내려지는 데 비해 법은 주권자라는 외부의 입법자가 법을 입법하며 재판소라는 외부의 법정에서 위반에 대한 외적인 강제가 가해지게 되는 것이다.원래 법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 역시 도덕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인격이다. 이러한 자유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득적 권리이다. 따라서 ‘그대의 의사의 자유로운 행사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만인의 자 자각되고 있다. 또한 그 계약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생득적 자유의 일부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야만적이자 무법적인 자유를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자기의 입법적 의사에 기초한 법칙에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일종의 수준 높은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칸트는 루소의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다.주권자가 자연법을 침해했을 경우에 그에 저항하는 일이 허용될 수 있는가. 칸트는 단호하게 그것을 부정했다. 주권자는 정당성과 합법성에 관한 인정권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그에 도전하는 것은 법적 상태 그 자체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되며 그 때문에 반역죄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껏 가능한 일이란 이의 신청과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했다. 이것이 칸트의 진의일까, 아니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압력에 직면한 ‘노예의 발언’일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3) 형벌의 본질칸트의 형벌이론은 절대주의의 응보 형벌론의 대표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칸트에 의하면 형벌은 죄와 벌의 균형 곧 동등한 피해 보복의 원칙에 의한 것이어야만 했다. 이는 정의의 절대적 요청으로 현실적 고려를 통해 왜곡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칸트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저지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벌한다는 목적 형벌론의 공리주의적 형벌론을 강력히 부정했다.“정의가 멸망한다면 인류가 생존한들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무엇인가의 대가를 통해 살 수 있는 것이 정의라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이처럼 국가가 전 국민의 합의에 따라 해산될 때라도 살인범을 처형한 뒤에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었다.이탈리아의 형법학자 베카리아는 “누구든 자신의 생명을 처분할 수 없으며 국가의 계약으로 사형에 합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형은 부적절한 형벌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칸트는 사회 계약을 맺는 주체는 ‘본체인’인 자아일 뿐 범법자인 ‘현상인’이 아니며 사형은 일반적으로 형벌 법규를 법률로 정한 데 불과하므로 부적절한 법은 아니라고 했다.(4) 국제법칸트성적 결합이며 바람과 매춘 등은 극히 동물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부부의 성적 결합을 결혼의 본질로 보아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은 부차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점 역시 주목할만하다.③ 저작권 : 칸트는 저작권이라는 무형의 재산권을 물권으로 간주하고 서적의 소유권과 구별해 별도로 보호할 것을 주장했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④ 입법권 : 입법권은 국민의 결합된 의사에만 속하는 것이다. 국민은 스스로 동의한 법률 이외에는 복종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다. 실제로 독립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피고용자와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 점도 주목의 대상이 된다.⑤ 정체론 : 절대군주제는 폭정에 빠질 위험성이 이으므로 위험한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자유의 원리는 공화제에서 실현되지만 실제의 제도로서는 대의제 형태로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 ‘도덕 형이상학 정초’의 평가 및 의의칸트의 이론 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대륙적 합리주의, 뉴턴의 물리학 그리고 영국의 경험론 등의 여러 사상이 합류된 것으로 그 때문에 다면적이고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며 내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한편 칸트의 정치사상 및 법사상은 이웃 나라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던 혁명의 충격과 자국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에 의한 계몽 전제 지배의 체험이 복합된 성격을 띠고 있다.이러한 칸트에 대해 경험주의자 아돌프 멘첼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칸트는 과거의 형이상학에 싸움을 걸어 인식의 유일한 원천을 경험에서 구함으로써 경험론과 실증주의를 한데 묶은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 정신의 논리적 요소를 강조하고, 실천 이성의 요청이나 규제 원리로서의 이념 등을 추출함으로써 매우 단호한 관념론적이자 형이상학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분열은 그의 정치론에서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더욱이 민주제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t 있다. 또한 칸트는 루소의 뒤를 이어 공화제만을 정당한 정치 체제로 간주하고,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하지 않는 법률이란 무효이며 국민의 평된다.
    인문/어학| 2023.01.08| 8페이지| 2,000원| 조회(241)
    미리보기
  •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1. 들어가기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을 들라면 단연 《성서》와 《삼국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는 제목 그대로 하면 진나라의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를 지칭하는 것이나 일반적으로는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를 줄여서 《삼국지》라고 한다.나관중의 《삼국지》는 세계적인 걸출한 문학작품인 동시에 인생의 철학서요, 최고의 병법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삼국지》를 세 번 이상 통독한 사람에게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금언이 있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통독한 사람은 인간의 기미를 터득하고 권모술수에 능해지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많이 했다가는 상대에게 마음을 훤히 들키기에 십상이라는 뜻이다.평생에 단 한 권의 소설책만 읽어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단연 《삼국지》를 택할 것이다. 난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격렬한 개성들의 충돌과 화합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다. 이와 같이 삼국지는 등장인물의 다채로움, 넓은 활동무대, 전투담, 무용담, 깊은 우정, 사랑, 충절, 모략. 배반 등 모든 것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거대한 로망이다.그래서 《삼국지》는 쓰인 지 6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 살아 움직이는 양 생생하다. 다만 《삼국지》 전편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이다. 속고 속이며, 죽고 죽이는 장대한 드라마를 연출해 놓고 그들은 모두 백골이 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나관중의 《삼국지》 줄거리는 이렇다. 시대는 옛 중국의 후한 말 부패한 정치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 도적들을 타도하기 위해 유비를 필두로 관우와 장비는 의형제를 맺고 군사를 모아 조정을 돕는다. 그리하여 황건적을 토벌하지만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올라 동탁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자 이를 보다 못한 왕윤이 동탁의 신임을 받는 여포와 결탁하여 동탁을 죽이고 그의 심복 곽사와 이각 등도 내쫓는다.그러나 이후 곽사와 이각 무리가 다시 장안을 함락하여 여포는 도망가고 나라에서도 예부터 대중적인 읽을거리로 널리 애독되었는데 특히 유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에의 충의라든가, 제갈공명의 지략, 유비, 관우, 장비의 결의 등은 유교적인 이념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관우의 절의는 민간 신앙으로까지 발전하여 관제교가 생겨나고 우리나라 곳곳에 관제묘가 세워졌다.나관중의《삼국지연의》는 후한 말기 정치가 혼란해진 틈을 타서 신흥종교 교조 장각(張角)이 181년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몰락한 한 왕실의 일족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민병을 모아 싸움터로 나간다.황건적의 반란은 겨우 평정되었지만, 지방관의 할거로 한 왕실은 또다시 위태로워지고 연합군을 조직한 군웅은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을 치고 해산한 뒤 서로 패권을 다툼에 혈안이 된다. 그중에서도 조조가 차츰 세력을 얻어 군웅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할 조짐을 보이며 강남의 손권과 대치한다.한편 유비는 각지를 떠돌다가 형주의 영주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 사이에 남양에서 숨어 사는 제갈공명을 삼고의 예로써 맞아들여 군사(君師)로 삼는다. 그러나 유표가 죽자 그의 아들 유종은 조조에게 투항하고, 유비마저 조조의 군사와 싸웠으나 크게 패한다.그때 형주의 함락 소식을 전해 들은 손권 진영에서는 화전 양파로 나뉘지만 노숙과 제갈공명의 교묘한 유세로 싸우기로 결의하고 유비와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공명, 주유 등의 뛰어난 계략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의 선대를 화공으로 무찔러 대승한다.유비는 그사이에 형주를 점령하는데 손권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익주를 공격하여 근거지로 삼는다. 그런데 손권이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공격해 죽이고 이 지방을 빼앗는다. 이 무렵 조조가 병사하고 그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를 페위시키고 위제의 자리에 오른다. 유비도 한의 뒤를 이어 성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촉이라 하며 손권도 황제를 칭하여 3국 분립이 이루어진다.이후 유비는 공명의 반대를 뿌리치고 관우의 원수를 갚》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지난날에 은혜를 입은 조조를 엄격한 군율을 어겨 가면서까지 도망치게 한 화용도(華容道)의 이야기는 그의 의(義)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출중한 인품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은 그의 한결같은 정신에 감동하여 관공, 관성제라고 했으며 신이라고 하여 이를 찬양하였다.장비는 단순하고 난폭한 사나이지만 어진 사람을 존경해서 유비에 대한 사랑 또한 관우 못지않다. 관우와 항상 대비되었으며 《삼국지평화》에서는 오히려 관우 이상의 비중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교양이 없고 천박하지만 사랑해야 할 난폭자로 묘사된다. 《수호전》에서 말하면 이규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술을 마시고 부하를 마구 두들겨 팼는데 그 때문에 밤에 목베임을 당했다고 하는 그의 비참한 죽음에서 그의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지식인의 손이 가해진 탓인지 좀 정채를 잃고 있다. 3인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군신의 충의보다 의형제의 애정을 중요시하는 것은 송대 이후에 발전한 시민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제갈공명은 초인적인 지혜를 갖춘 사람으로 유비의 지우(知遇)에 보답하여 끝까지 충성을 다한다. 유비의 군사로서 이름은 양이다. 오나라의 주유, 육손과 위나라의 사마의 등 지모가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서도 빼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적벽의 싸움에서는 안개가 낄 것을 미리 알고 하룻밤 사이에 10만 개의 화살을 얻어 주유의 허를 찌르고, 태연자약하게 혼자 입성하여 거문고를 타며 복병을 경계하는 사마의에게 군사를 물러서게 하는 등 그의 지략을 기록한 일화는 많다. 하지만 남동풍이 불기를 칠성단에서 빌기도 하고 오장원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 연장과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에 빌기도 하며 ‘지(智)는 많지만 요(妖)에 가깝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와 장비가 죽은 뒤 《삼국지연의》를 지탱해 온 공적은 간과할 수 없다. 적벽대전 전후부터는 사실상 소설의 주인공은 공명의 독무대인 듯한 느낌이 있으며 가을바람 부는 지금껏 패배라고는 모르고 달려온 세월, 조조의 눈앞에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 4만은 그저 가소로운 상대일 뿐이었다.조조는 육상은 물론 수상에도 진영을 구축했다. 함대를 띄워 물 위에도 울타리를 만들고 경계를 엄중히 하면서 닥쳐올 전투에 대비했다. 그러나 조조의 군에겐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대부분 북방 출신인 조조 군은 육지에서는 성난 야생마 같지만 물 위에서 이루어지는 전투에선 약한 면을 보였던 것이다.이를 놓칠 제갈공명이 아니었다. 공명은 작은 함선을 이용하여 잦은 공격을 가해 왔다. 용맹한 조조의 군도 물 위에 뜬 함선 위에서의 전투는 능숙하지 않은 터라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다. 잦은 침입으로 입은 피해가 쌓여가자 우려할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 었다.조조 역시 지혜라고 하면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는 부하들이 배 위에서도 육지에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 배와 배를 굵은 철쇄로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판을 까는 것이었다. 밤새 작업이 마무리되고 나자 마치 물 위에 새로 커다란 육지가 생겨난 듯했다. 연이은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조조 군 쪽에서 다시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승리는 다시 조조에게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조조의 이 꾀는 자승자박으로 비참한 몰락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제갈량은 조조 군의 동태를 살피면서 다시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80만 대군을 한꺼번에 무찌를 방법이 없을까? 4만의 군사로 80만 대군을 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제갈량은 마침내 무릎을 쳤다. 조조가 철쇄를 이용해서 배와 배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놓은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화공법을 이용하면 단번에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른 건초를 가득 실은 배가 준비되었다. 건초가 보이지 않도록 휘장이 쳐지고 건초 위에는 기름이 부어져 있었다. 누구라도 불을 댕기면 기세 좋게 타오를 만반의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남동쪽으로 바원결의를 맺고 삼국통일에 앞장섰으며 짚신을 짜서 늙은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세 번이나 그가 사는 초가집을 찾았다는 삼고초려 이야기의 주인공, 그가 바로 유비이다.유비의 자는 현덕으로 전한 시대 경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책에 기술되고 있는 것처럼 생활이 빈궁하여 짚신을 꼬아 홀어머니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왕손의 후예라는 후광이 늘 있어 대의명분이 분명했고 인품과 지략이 뛰어나 관우, 장비, 제갈량, 마초 등의 걸출한 인재들이 그를 도왔다.그는 당시 창궐하던 황건적을 토벌한다는 명목하에 거병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공손찬이 원소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조조의 수하로 들어갔다가 다시 원소의 수하로 옮겨갔다. 원소 역시 조조에게 패하게 되고 유비는 형주지사 유표가 있는 곳으로 피신하였다.그러나 유표도 조조의 추격을 막아내진 못했다. 유표마저 조조의 칼날 아래 무릎을 꿇자 유비는 형주를 차지한다. 이때 하늘의 듯도 알아낸다는 제갈량의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한 후 그를 얻어 군사로 삼고 훗날을 도모하게 된다.유비와 제갈량이 택한 길은 오나라 손권과의 연합작전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의 밀지를 갖고 손권을 찾게 되고 손권은 제갈량의 말에 설득되어 연합작전 참전을 허락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맞아떨어져 적벽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을 파하였고 이로 인해 조조의 천하 제패 계획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유비는 여세를 몰아 익주를 공략하여 유장을 대파한 후 한중왕(219)에 올랐다.220년 조조의 뒤를 이은 위나라의 조비가 한나라의 헌제를 강제로 폐하고 국호를 위라 하였다. 그러자 유비도 한 왕실을 계승한다는 명분 하에 성도를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한이라 하였으니 이를 촉한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 지위에 올랐다.이로써 중국은 촉, 위, 오의 삼국시대를 맞게 되었다. 삼국 중 위가 중원 전역을 차지해 가장 세가 막강하였고 오는 비옥한 옥토
    독후감/창작| 2023.01.06| 10페이지| 2,000원| 조회(231)
    미리보기
  •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업적
    아인슈타인의 생애와 업적1. 아인슈타인의 생애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울름시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은 당시 독일에서 조그만 전기화학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뮌헨으로 이사를 했다.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은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것 같다.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말도 늦게 깨우치는 편이어서 10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의사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가 유독 잘했던 과목은 수학 한 과목뿐이었으므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이었다.독일에서 사업을 벌이던 아버지가 도산하게 되자 식구들은 모두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국적을 얻어 스위스 국민이 되었다. 이곳에서 취리히 연합공과대학을 마친 아인슈타인은 모교에서 조교의 자리라도 얻고 싶어 했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은 천재 청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모두 거절하고 말았다.아인슈타인은 할 수 없이 베른에 위치하고 있던 스위스의 특허청에 하급 관리로 취직을 했다. 특허심사를 맡아보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1902~1908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중요한 몇 개의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아인슈타인의 최고의 업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이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되었으며 이 논문으로 인해 아인슈타인은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게 되었다.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발표된 특수상대성 이론과 1915년에 완성한 일반상대성 이론이 있다. 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기초적인 물리 지식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저 그 원리만을 제시해보면 아인슈타인은 어떤 물체의 입자에 내포된 에너지는 그 질량과 광속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보아온 공식 E=mc²이 그것이다. 이 원리는 원자폭탄을 제조하게 된 기초원리가 된 것으로 이 공식의 발표 이후 무명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물리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1913년 아인슈타인은 베를린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18일에 운명을 다했다.2. 시간이라는 차원흔히 우리가 사는 세계는 3차원의 공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차원이란 원래 수학에서 쓰던 용어인데 수학적으로 한 점에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의 숫자를 가리킨다. 점이라면 직선 자체가 없으므로 0차원, 선이라면 직선이 하나이므로 1차원, 면의 경우는 x축과 y축 2개의 선이 있으므로 2차원, 입체의 경우에는 x축과 y축 z축의 3개이므로 3차원이 된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공간에서는 한 점에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을 네 개 그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수학에서 보는 우리의 공간은 3차원 이내로 국한된다. 그렇다면 4차원 공간은 어떤가? 수학과는 달리 물리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세계는 4차원이다.4차원은 원래 독일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헤르만 민코프스키가 만들어낸 용어지만 그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3차원 공간에다 아인슈타인이 붙인 또 하나의 차원은 뭘까?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3차원까지의 차원들은 점, 선, 면, 입체 등 공간을 나타내는 것들이지만 네 번째 차원은 시간이다. 그런데 시간이라면 공간과 더불어 모든 존재의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축이 아닌가?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 시간과 공간은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이라고 보았다. 근대 철학자인 칸트는 인간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형식이라고 보았다. 세계의 모든 존재와 인간의 모든 경험은 시간의 축과 공간의 축이 이루는 좌표상에 표시할 수 있다. 함수 x축과 y축이 서로 수직이듯이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축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었다.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 별개인 두 개의 축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물리학적으로는 사실상 같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구에서 북극성까지의 거리는 800광년이니까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는 북극성은 사실 800년자세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열차 안에서 보면 빛은 수직으로 올라갔다 내려왔을 뿐이지만 열차 바깥에서 보면 사정은 다르다. 열차가 고속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전구의 빛은 수직이 아니라 비스듬히 포물선으로 그리며 올라갔다가 거울에 반사되어 다시 비스듬히 바닥으로 내려 온 것이 된다. 이 경우 빛이 이동한 거리는 열차의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수직 거리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하나의 사건이므로 거기에 걸린 시간은 당연히 같아야 한다. 그런데 같은 시간 동안 빛이 이동한 거리가 열차 안과 바깥에서 서로 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사실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그런 사고의 실험을 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분명한 모순이라고 여기면서도 딱히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그 까다로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그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는 빛의 속도를 불변의 것으로 못 박아 버린다. 그러면 해결은 지극히 간단해지면서 동시에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다. 열차 안과 밖에서 빛이 이동한 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빛의 속도는 언제나 같다. 그렇다면 소요된 시간은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즉 열차 안에서 측정한 시간과 바깥에서 측정한 시간은 서로 달라야만 한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똑같은 시간이라도 그 사건이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게 된다.빛에는 속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래 과학자들은 빛의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커다란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속 50km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사람이 시속 10km의 속도로 달린다면 그가 달리는 속도는 실제로는 시속 60km가 된다. 그런데 빛의 속도는 정지된 상태에서 측정하든 운동하는 물체에서 측정하든 언제나 시속 30만 km로 일정하다. 예컨대 열차가 시속 1만 km의 초고속으로 달린다 해도 열차 앞의 라이트에서 나오는 빛의 속도가 시속 31만 km로 늘어나지 않는다.빛의 속도는 불변인데 하나의 사건이 지구가 로켓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이러한 상대론적 사고는 사실 갈릴레이 때부터 해오던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바로 그러한 상대론적 사고를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다른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목격했으면서도 그저 모순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실 즉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사실을 그는 출발점으로 여겼을 뿐이다. 바꿔 말해 다른 과학자들이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사실을 연구 목표로 삼았다면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오히려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지금은 상업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공식이 된 E=mc²이 바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 낳은 최대의 성과이다.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그 질량이 무한대로 늘어난다는 사실은 앞에 예로 든 열차 실험의 발상을 연장해서 몇 가지 간간한 일차방정식과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보태면 쉽게 도출된다. E=mc²이 이차방정식의 근을 구하는 공식보다 간단한 외양을 취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듯 간단한 과정을 통해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식에서 E는 에너지이고, m은 물체의 질량이며, C는 빛의 속도, 즉 사수다. 따라서 이 공식의 의미는 에너지는 곧 질량이며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내용이 된다. 바로 여기서 핵무기의 원리가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질량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엄청난 에너지로 전화할 수 있으므로 가장 손쉽게 붕괴함으로써 에너지화할 수 있는 원소만 찾아내면 되는 것이었다.특수 상대성 이론은 등속 운동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것을 발표하고 나서 11년 뒤 아인슈타인은 가속 운동의 경우까지 포함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 ‘질량은 곧 에너지’라는 단순한 미학적 원리였듯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간단하고 깔끔한 원리가 등장한다. 그것은 ‘중력은 곧 가속도’라는 원리로서 흔히 ‘등가의 원리’라고 부른다. 자유 낙하로 떨어지는 엘리베이터 속에는 중력을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가속도로 상승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중력장 때문에 공간이 변형되는 현상은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아주 강한 중력장이 있는 곳이라면 그 사실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1919년 개기일식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천문대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한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 위치상으로는 태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야 할 별의 빛이 태양의 중력장을 거치면서 휘어 망원경에 포착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발견으로 인해 비로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중력장이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사실은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전까지 우주는 그냥 넓게 퍼져 있는 주정형의 공간으로만 여겼지만, 이제는 다르다. 만약 아주 강력한 에너지로 한 줄기의 빛을 우주 공간으로 쏘아 보낼 수 있다면 그 빛은 지구에서 영원히 멀어져가는 게 아니라 휘어진 중력장을 따라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우주는 무한정 퍼져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닫혀 있는 우주, 하나의 계(系)와 같은 구조가 된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가리켜 ‘한계는 있으나 끝없는 우주’라고 표현했다.4. 아인슈타인의 평화 서한아인슈타인이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신조를 최초로 공표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였다. 조국인 독일 정부가 전쟁을 정당화하고 여론은 전쟁 쪽으로 이끌기 위해 국내의 학자와 문화인들에게 서명을 받아내 전쟁 선전을 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 계기였다. 그 뒤로 아인슈타인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지식인들과 협조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다.그 가운데에서도 프랑스의 문호 로맹 롤랑과의 교류는 매우 흥미롭다. 처음에 롤랑과는 조직적인 반전 운동을 통해 징병 거부와 군비 확장 반대 등에 의견이 일치해 서로 협력했다. 그러나 나치가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은 무방비 상태와 평화적 성격만으로는 도저히 파시스트 국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파시즘의 공세에 대항할 수 있는 유럽 연합국 측의 군비 증강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로써다.
    인문/어학| 2023.01.04| 7페이지| 2,000원| 조회(256)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59
159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84
  • A좋아요
    39
  • B괜찮아요
    21
  • C아쉬워요
    7
  • D별로예요
    8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5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05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