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제목: 中唐의 두 거목, 鬼才와 香山居士의 만남방송일시: 2004년 6월 15일PD, ANN, ENG: ***GUEST: 李賀, 白居易이하와 백거이가 살았던 당나라 중엽의 왕조는 그야말로 쇠퇴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태평성대를 구가했었지만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왕조의 기강이 무너지자 환관들과 지방 번진들이 활개를 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가 무너졌고 결국 사회는 더욱 더 혼란해져만 간다.하지만 이 시기 문단에는 새로운 문학 풍조가 일어나면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당시 문단의 대표자인 백거이는 두보의 사실주의적 문학관을 계승하여 현실이 반영된 시가를 창작하면서 신악부 운동을 벌인다. 또한 이하는 고대 남방의 시가인 초사의 기이하고도 특이한 무풍과 이백의 시풍을 계승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게 된다.중당 시기. 그 혼란했던 시기를 시와 함께 살아냈던 두 시인, 백거이와 이하. 이 둘은 사실주의와 유미주의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시인들이라 평가 받아왔지만 실상은 많은 공통 분모를 가진 시인들이었다. 두 시인과 함께하는 이번 시간을 통하여 그들의 시 세계를 조명해보면서 이제까진 알려지지 않았던 백거이의 서정성, 이하의 현실성 등에 초점을 맞춰보도록 하겠다.signal in-up-downtitle 중당의 두 거목, 귀재와 향산거사의 만남signal up-downopening한**(이하 한) - 안녕하세요~중국 고전 문학의 이해, 그 1부 마지막 편인 중당의 두 거목, 귀재와 향산거사의 만남 시간입니다. 한 주동안 잘 지내셨죠? 저번 주에는 이백과 두보 시인을 모시고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데요. 오늘은 평균 연령을 확 낮춰서 젊은 시인 두 분을 모셨습니다! 귀재는 누구일까요? 네~맞습니다. 바로 이하 시인입니다~그리고 향산거사는 바로 백거이 시인입니다. 젊은 두 분을 모시고 오늘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의 진솔하고 다채로운 이야기, 기대하시면서 채널 고정하세요~ment백거이 (이하 백) - (이하 이) - 안녕하세요. 이하입니다. 콜록! 아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좀 안좋아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날 수 있게 되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유님께서 저희 집에 방문해주셨을 때 느꼈던 감동만큼이나 두근거리고 설레이는군요.한 - 이렇게 대단한 분들을 실제로 뵙고 보니 저도 참 설레입니다. 특히 이하 시인 같은 경우는 저와 나이 차도 얼마 안 나 새로운데요~이 - 하하.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지요. 실제 저의 몸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17세에 이미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항상 병약하여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굴뚝 같지만 몸이 맘처럼 되지 않더군요...한 - 그럴수록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셔야지요. 이하 시인은 그 어린 나이부터 엄청난 재능을 보이면서 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걸작들을 많이 써내지 않으셨습니까. 시인 같은 분은 중국문학사를 위해서도 오래오래 사셔야지요~이 -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한 - 백거이 시인은 원진 시인과 같이 오시겠다더니 원진 시인은 어디 계십니까?백 - 하하. 저기 방청석에 있습니다. 우리 둘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죠.한 - 훗..저도 잘 압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하나가 바로 이러한 백거이 시인의 마음을 표현 한 시죠. 아득히 멀고먼 강릉. 저 멀리 있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 그대는 멀리서 알지 못하리. 요즈음 내가 지은 글 중엔 절반이 그대 그리는 시인 걸. 정말 이 시에는 두 분의 곰삭은 우정이 푸욱 배여들어가 있는 거 같아 읽기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집니다.백 - 하하. 시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시는거 같아 너무 뿌듯합니다. 저는 저의 시에 대한 애착이 커서 다른 이들이 진행자 분처럼 이렇게 저의 시를 암송하고 보존해주는 것을 너무도 좋아하거든요.한 - 네. 안 그래도 들었습니다. 시에 대한 애착이 그 어느 시인보다도 강하시다고... 특히나 시마 라고 불리신다고 들었는데, 정말 시를 좋아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백 - 한 열정이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이러한 열정하면 또 이하 시인을 빼놓을 수 없죠~ 이하 시인은 시 하나를 쓰실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다고 하시던데..이 - 하핫. 맨날 하시는 말씀이 저 아이는 심장을 토해내야 시 쓰는 걸 그만두겠구나 라고 하십니다. 평상시 저는 항상 비단주머니를 가지고 다니면서 시상이 그 때그때 떠오를때 마다 적어 놓는 편입니다. 그런 후 집에 와선 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시어 하나하나에 총력을 다하는 편입니다. 조금 더 아름답게,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보면 며칠이 가긴 일쑤지요. 힘들긴 해도 그렇게 완성된 시 작품은 정말 저의 수명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합니다.백 - 저는 이하 시인의 그런 점이 이해가 안갑니다. 도대체 시어 하나하나에 왠 시간을 그리 많이 쏟는지요? 시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그 형식,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더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으로, 내용을 좀 더 보완 해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이 - 글쎄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의 미란 모름지기 함축과 그로 인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를 갖는데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저의 시에 들어가는 갖가지 색채들과 독특한 이미지들을 통해서 제가 말하려는 내용이 좀 더 잘 표현된다고 생각하는데요.백 - 아니요. 이하 시인의 시는 그 내용이 너무도 어려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렇게 이해하기 난해한데 전달이 되겠습니까? 너무 기묘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나타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이 - 초사는 읽어보셨습니까? 그 기묘한 무풍에서 비롯된 낭만적인 문학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중국문학의 본류는 물론 사실주의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몇몇 사람들은 중국문학에서 나, 이하가 나온 것은 참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라는 말도 하더군요. 제가 다른 사람들이 이제껏 건들이지 않은 귀신이나 이런 분야를 손댔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저만의 기발한 상상과 적절것도 시라 할 수 없지요. 속기라고나 할까요?백 - 나의 시를 두고 하는 말인거 같군요. 전 시를 쓸 때 항상 길가의 노파에게 물어보고 씁니다. 이 말은 이해하시겠습니까? 하구요. 혹시 노파가 모른다고 하면 즉시 수정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알기 쉽도록 씁니다. 시는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형식은 내용에 맞춰질 뿐이지요. 형식에 신경을 쓸 시간이 있다면 내용에 시간을 더 쏟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하 시인의 시는 너무 현실 생활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전 문학은 현실 생활의 반영이므로 거기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윗 사람은 시가로써 정치를 고찰하여야 하고 아랫 사람은 시가로써 백성의 염원을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듯한 이하 시인의 시는 저로썬 높게 평하기가 참 힘들군요.이 - 그건 저의 시를 너무도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같군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저의 시는 유미주의를 지향하는 시 아니냐구요. 하지만 저의 시는 현실주의와 유미주의 두 정신을 고루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시 중 옥 캐는 늙은이 시를 읽어보신 적이 있나요?한 - 이하 시인의 옥 캐는 늙은이 당연히 알지요. 몸에 맨줄 흔든흔들 , 초막집 어린 자식 모습이 이 가슴에 파고 드네 등 노동 인민의 비참한 생활을 이하 시인만의 적절한 시어로 잘 표현해 낸 시이지요.이 -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저의 시에는 이러한 시들이 많습니다. 저 또한 현실이 힘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이 반영된 시들을 많이 쓰게 되었지요. 그 시어들이 사실주의적 시인들보다 조금 더 감각적이다 뿐이지 시 자체가 유미주의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백 - 하지만 이하 시인의 시는 계급적 제약성과 협소한 생활로 말미암아 너무도 처량한 색조가 짙은 거 같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긴 하지만 망하긴 했지만 어쨌든 왕가의 후손인 만큼 백성들의 입장에서 대변하는 것은 저처럼 직접 그들과 몸을 부딪치며 살아본 시인들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합 다시 세워보려 그리 애썼지만, 아예 진사과 시험조차 못본 나의 마음을 백거이 시인은 압니까? 좌천당하긴 했어도 당신은 조정에서 뜻을 펼친 기간은 있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나의 몸 상태를 알면서 협소한 생활이 어쩌네, 저쩌네 말을 하는 것이 정말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안 그래도 병약한 이 몸. 현실의 억울함에 더해져 예측컨대 저는 요절을 할 것입니다. 정말 죽음이 곧 올 것이라는 이 강박관념이 저를 얼마나 죄여 오는지 아마 다른 분들을 모르실겁니다.한 - 자~두 분 다 조금은 진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분의 말씀 다 그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대를 보려고 노력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백거이 시인도 이하 시인의 시가 유미주의적인 경향만을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지요?백 - 네. 솔직히 이하 시인의 그런 현실시들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귀재네, 신괴시인이네 라는 말만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거 같습니다.이 - 백거이 시인도 현실주의 시인으로 풍유시 만이 널리 알려져있다고 하는 데 실상은 서정시도 많이 지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백 - 예,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시를 지었을 당시에는 풍유시보다는 제가 지은 서정시나 애정시가 더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요즘 사람들은 저 백거이가 아예 서정시와 같은 분야의 시는 지은 것이 없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거 같더군요. 실제로 풍유시는 제가 지은 총 시의 몇 편 밖에 안되는데 말이지요.한 -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두 시인 다 편협하게 알려진 거 같습니다. 백거이 시인하면 무조건 현실주의 시인으로 신악부 운동만을 떠올리고, 이하 시인 하면 귀재, 신괴시를 쓰는 시인만으로 떠올리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실제론 두 시인 다 여러 분야의 시를 쓴 공통분모가 있는데 말이지요. 다만 두 분이 주로 추구하는 부분이 달랐던 것 뿐인데 말입니다.이 - 맞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그 시대에 산 이상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그저 아름다운 시어만을 추구한 유미주의적 시만을 쓴 것은 절
아Q 정전. 워낙에 유명한 책이라 이전에도 읽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렇듯 같은 책이라도 읽는 시기에 따라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기 마련이다. 하물며 중문학도로서 중국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지금, 아Q정전이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아Q. 그는 내가 환멸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인물이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치 않고, 그 자신의 위치에서 더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에게선 자기 발전의 의지란 찾아보기 힘들다. 소위 정신승리법 에 의해 스스로에게 한없이 도취되는 그의 모습은 그 시기 중국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제대로 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중화사상에 젖어 매번 패하면서도 스스로는 승리자라 생각하는 중국의 의식은, 어쩌면 그들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소 였음에 틀림없다. 주변국가들을 모두 오랑캐라고 여겼던 그들에게 있어서 타국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그들의 자세가 여러 번의 패배를 통하여 큰 착오임을 인지하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소설 속의 아Q와 같이 말이다. 밟히면서도 끝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치 않고 스스로에게 승리로 기억되게끔 하는 아Q의 모습 그대로, 독단에 사로잡힌 중국은 발전 없는 세월을 흘려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일대 큰 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 속에서 일어난 혁명은 어쩌면 시작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다분히 띠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폭넓게 참여해야 할 혁명에서 소외당하는 아Q의 모습에 우린 혁명의 모순됨을 느끼게 되고, 실패의 결과를 예상하게 된다. 이렇듯 아Q는 그 당시 중국을 대변하는 인물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인민들의 모습, 바로 그 자체이다.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강한, 그래서 조영감 등의 지주계층 혹은 힘있는 동네 패거리들에게는 제대로 투쟁도 못하면서 그 분함을 힘없는 여승에게 푸는 그의 모습은 비열하다 못해 눈물겹다. 그 당시 중국 인민들의 모습 또한 바로 이러했다. 자신들의 핍박에 대해 지배층에 투쟁할 줄은 모르면서, 되려 약자에게 분풀이를 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한 나라는 그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의 의식이 어떠한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한다. 거대한 나라 중국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인민들의 그 자리에 안주하려는 정체성과 패배를 인정치 않으려는 정신승리법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한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았고, 중국으로 하여금 역사의 진화과정과는 역행하는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결국 그들의 근대화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작가 노신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안타까워했고, 그러한 위기감은 바로 이 아Q정전 을 완성시켰다. 아Q정전의 분량은 매우 짧다. 하지만 그 짧은 길이의 아Q정전이 아직까지도 그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은, 길이는 짧지만 작가 노신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신이 지적하려는 단점이란 단점은 모두 다 갖춘 듯한 아Q에서부터 마지막 사형대에서 아Q의 죽음을 마치 유흥의 하나로 치부해버리는 거리의 인민들까지. 이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 당시 중국의 현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 사실적 묘사에 한 편으론 암울하고, 한 편으론 끔찍하기까지 하다.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바로 노신이 말하려 했던 중국 현실의 문제점과 인민들의 의식성 타락에 대한 문제점 지적이었다. 그 때도 물론 노신이 대단한 역량의 작가이며, 이 작품 또한 그 은유적인 맛이 상당함을 대단히 여기며 읽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읽는 이번엔 이러한 생각 외에도 많은 다른 생각들이 들었는데, 그 중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바로 붓의 힘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하다는 것이었다. 문은 무보다 강하다 는 말이 있다. 어떠한 것보다도 바로 이 아Q정전은 적절한 그 예임에 분명하다. 또한 노신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이러한 붓의 위력을 가장 잘 깨닫고 있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일본에서 의과 대학을 다니다가 인민들의 국민성 타락에 분개하고, 중국 인민들에겐 건강보단 정신개조가 우선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그는 의과 대학을 중퇴하고, 붓을 들게 된다. 그의 손에 붓이 들리게 된 것은, 중국에 있어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타락했으니 개선해야한다 라는 등의 직접적인 계몽운동 혹은 압력보다도 이 짧은 소설은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자연스럽게 폐해를 깨닫고 고쳐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이 소설은 정말 경이롭기까지 하다.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노신의 묘사는 마치 그 당시 중국의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이 소설의 날을 더더욱 시퍼렇게 만들어준다. 또한 그의 비유와 은유는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고 정교하여, 숨겨진 듯 하면서 드러나는, 직접적이지도 간접적이지도 않은 명문을 탄생시킨다. 이렇기에 아Q정전은 중국 이외에도 여러 다른 나라에서 폭넓게 읽히는 세계 걸작 중 하나가 된 것이겠다. 그러한 면에서 노신, 그는 진정한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볼 때마다 더욱 그 맛이 풍부해지는 아Q정전, 과연 다음에 읽을 때는 또 어떤 새로운 감상을 받게 될 것인지, 마치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상큼해지는 노신의 문장은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키며 끝 아닌 끝을 이야기한다.
Ⅰ. 서론요즘 카오스 라는 말은 생활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카오스 세탁기를 비롯해서 카오스 선풍기, 카오스 스탠드 등 카오스 이론을 이용한 가정제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과 더불어 20세기 과학의 3대 변혁 중의 하나라 불리우는 카오스란 과연 무엇일까? 또한 최근 사회 여러 분야에서 연구되면서 각광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분야 중 특히나 카오스 현상과는 상관이 없을 법한, 하지만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는 디자인계와 카오스 이론의 관련성을 규명해보려 한다. 실생활에서의 카오스 이론의 쓰임을 통하여 좀 더 이론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카오스 이론과 현대 디자인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관련성을 찾아보도록 하겠다.Ⅱ. 카오스 이론의 이해ⅰ. 카오스의 정의카오스의 영문은 chaos로, 그 어원은 원래 그리스어 khaos에서 유래된 것이다. 카오스는 대개 질서를 나타내는 코스모스의 반의어로 혼돈이나 무질서로 번역된다. 카오스의 명명은 1975년 메릴랜드 대학의 재암스 요크가 그의 논문 주기3은 카오스를 의미한다 에서 처음으로 카오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카오스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고 정확한 수학적 정의를 내리긴 어렵지만 여러 과학자들의 의견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카오스란 어떤 계가 확고한 규칙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복잡하고 불규칙하면서 동시에 불안정한 행동을 보여서 먼 미래의 상태를 전혀 예측할 구 없는 현상이다 한마디로 카오스란 어떤 계가 확실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에 불구하고, 복잡하고 불규칙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나타내는 계의 움직임을 다루는 이론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결국. 카오스 이론에서 의미하는 카오스란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고, 겉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놀라운 규칙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카오스의 연구 목적은 한마디로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상 속에 숨어있는 정연한 질서를 끄집어 내어 새로운 사고 방식이나 이해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과학이 어떤 하나의 법칙에서 하나의 결과를 이끌어내는데 비하여 카오스는 몇가지 효과가 서로 작용하여 질서나 무질서의 상태가 된다는 점을 다룬다.ⅱ. 카오스의 발견19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푸앵카레는 뉴턴의 운동 법칙 속에 놀랄만큼 복잡한 운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카오스라 불리는 현상의 최초의 발견이다. 이어서 그는 최근 8억 5천만년까지의 행성 운동을 모의 실험한 결과, 행성도 연속적인 불규칙성이 나타나므로 카오스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컴퓨터가 보급되어 카오스 이론의 재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1963년에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유체의 열대류 현상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연구하던 중. 어느 날 거의 같은 조건을 주었는데도 전혀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일이 발생했다. 로렌츠는 0.50617로 입력해야 하는데 평상시처럼 반올림하여 0.506으로 입력하였는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온 것이다. 단지 출발에서의 불과 1000분의 1의 오차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ⅲ. 카오스 이론에 있어 중요한 개념들-초기 조건의 민감성초기 조건에서의 민감한 의존성이란 입력의 미세한 차이가 출력에서 급격하게 큰 차이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예로 나비효과라 불려지는 현상이 있다. 기상에서 나비 한 마리가 북경에서 날갯짓하여 대기상태에 조그만 변화를 주면 다음날 뉴욕에서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오스 계가 가지는 초기 조건에의 민감성은 다른 계로부터 받은 극히 미세한 영향이라도 무시되어서는 안되며, 결과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끌개끌개란 끌어당긴다는 의미에서 나온 명사이다. 끌개는 질서와 혼돈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중요한 개념이다. 한마디로 끌개란, 위상공간의 한 영역에서 어떤 계에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효과를 나타내서 그 계를 그 곳으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나타나는 효과를 말한다. 끌개에는점 끌개, 주기 끌개,준주기 끌개 ,에농 끌개 .기묘한 끌개 등이 있다.{이의 모델을 컴퓨터로 계산하였더니 모든 외부적조건이 같은데도 계산할 때마다 전혀 다른 결과가나왔다. 처음에는 컴퓨터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으나,나중에 모델이 혼돈하기 때문이며 이 혼돈의 이면에는로렌츠 끌개라고 불리는 기이한 끌개가 숨어있다는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올빼미 혹은 나비 날개를 닮은그림으로 카오스 연구자들의 상징이 되었고, 무질서하게배열된 자료에 숨어 잇는 정밀한 구조를 드러내주었다.-프랙탈 구조프랙탈이란 말은 부서지다 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파생한 부서진 상태를 뜻하는 형용사에서 유래되었는데, 1975년 만델브로트가 수학 및 자연계의 비정규적인 패턴에 대한 체계적 고찰을 담은 자신의 에세이에 표제를 주기 위해서 만들었다. 프랙탈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규칙하고 무정형한 모양들을 말한다. 예로 고사리 잎의 모양, 눈의 결정. 해안선의 모양등을 들 수 있으며, 프랙탈은 자연계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다.{프랙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만델브로트 집합은 만델브로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으로 그림을 점점 확대해 나가도 고도의 복잡한 구조를 그대로 가진 자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이러한 프랙탈은 겉으로 보기엔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인다. 하지만 이 복잡함 속에 간단한 규칙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즉 복잡한 구조 속의 작은 부분은 그 내부의 전체구조와 똑같은 복잡한 구조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계의 불규칙한 형태의 불규칙한 정도는 축척에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것이다.-불안정한 비평형 계와 비선형, 비가역불안정한 카오스 계는 비평형 상태가 되면 비선형 효과와 비가역 현상에 의해서 새로운 조직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비평형, 불안정성, 비선형, 비가역 현상을 카오스의 생성인자이며, 카오스에서 중요한 개념이다.-시간의 방향시간의 방향성이란 과거와 미래가 명확히 구벼로딘다는 것이며, 미래를 향하여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은 비선형, 비가역, 비평형, 불안정성이 포함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이 있음으로 해서 자연 법칙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바뀌어 가능성 과 확률 을 표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미래는 예측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일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무산구조와 자기조직화카오스의 기본 상태인 무산구조는 흩어지는 구조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에너지와 물질이 끊임없이 무질서하게 흐르면서 유지되는 불안정한 비평형 계에서 자발적으로 생기는 새로운 구조이다. 이 때 이런계에서는 무질서와 혼돈으로부터 스스로 질서를 만드는 조직이 생기는데, 이것을 자생적 조직화라고 한다.Ⅲ. 카오스 이론과 디자인하버드 대학 교수인 로버트 헤이즈는 15년 전, 기업들은 가격으로 경쟁하였다. 오늘날의 경쟁은 품질이다. 그러나 미래에의 경쟁은 디자인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21세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 바 있다. 디자인이란, 고객의 요구조건의 관점에서 제품이 어떻게 보이며, 또한 어떻게 기능을 수행하느냐에 영향을 주는 특성들의 총합체라고 할 수 있으며, 내구시설재,의복 서비스 및 포장된 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데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디자인에 있어서 미와 기능, 의미와 가치체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의 개념구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사회 전반에 관한 제반 문제와 인간상에 대한 표방형식의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과학이론과 디자인은 이런 의미에서 그 연관성을 연구하고 상호교류를 시도해야만 한다. 과학 이론은 기슬적 측면 외에도 인간의 인식을 변화시키며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의 발달은 디자인의 영역과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20세기 디자인의 변화는 인간의 욕망을 제외하고는 과학의 새로운 발견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디자인계와 산업계의 일대의 흐름은 동시대적 맥락으로 볼 때, 과학의 신사조인 카오스 이론과 밀접한 상관성이 예측된다. 이러한 취지에서 카오스 이론과 디자인간의 관련성을 알아보도록 하겠다.{ⅰ. 카오스의 진자와 초기 조건의 민감성이 귀걸이는 다중진자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어전체적인 움직임은 현란하고 복잡하고 불규칙한카오스 현상을 일으킨다. 이 귀걸이에서의 카오스현상은 칼더의 모빌처럼 아름다움을 증폭시키고귀에 고정적으로 부착된 귀걸이보다 여성스럽고환상적인 느낌을 준다.ⅱ. 프랙탈 구조와 프랙탈 차원{러시아의 민속 인형으로서 커다란 인형 에 작은 인형이 차례대호 들어가는 구조 를 갖고 있다. 이것은 프랙탈 도형의 특 징인 자기 유사구조이다. 이 인형은 형태 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그의 크기가 점 점 축소되어 간다.{ⅲ. 비평형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전체적인 형태는하나의 시점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적인 각도의 변화를보여주며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요동하는 듯, 살아 있는 듯 불규칙하고 역동성 있는독특한 형태들과 좌우 비대칭의 스타일은 유기체성과
目次Ⅰ.序論Ⅱ.屈原과 楚辭Ⅲ.楚나라와 楚辭Ⅳ.楚나라의 巫風과 楚辭Ⅴ.結論Ⅰ.序論楚辭. 나에게 이 작품은 중국 고전문학에 흥미를 갖게 해준 중요한 작품이다. 처음 중국 고전문학의 이해 라는 과목을 신청했을 때 솔직히 약간 고리타분하고 재미도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기대 없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楚辭를 배우면서 난 이 강의를 택하길 매우 잘했다는 생각을 했고, 넓게는 중문과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나는 중문과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고 영미문학에 관심이 있을지언정 중국문학엔 전혀 문외한이었다. 왠지 낭만적이지 않을 것 같았고, 제자산문이 곧 중국문학인양 생각하여 딱딱하고 지루할 거라는 선입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詩經을 배우면서 그러한 선입관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楚辭를 배우면서 중국문학의 매력에 젖어들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21년 동안의 생각을 단숨에 바꿔버릴 정도로 엄청난 글재주를 가진 사람이 바로 屈原이었다. 상당히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다는 그였지만 그의 작품 속에선 그런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요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그러한 요소들은 나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궁금했다. 이러한 명작을 쓸 수 있었던 그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된 배경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많은 추천도서들 중 屈原 평전인 장강을 떠도는 영혼 을 자연스럽게 집어들게 되었다.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너무나 편협했던 나의 생각의 문제점들이 발견되었고, 楚辭라는 대작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었으며, 屈原이라는 한 인물의 생애를 조명해 볼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수업 시간에 배웠던 楚辭의 내용보다는 屈原의 일생과 내가 궁금해했던 楚辭의 발생에 어떠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Ⅱ.屈原과 楚辭楚나라 사람인 屈原은 그 나라에서 상당히 입지 있는 가문의 사람이었다. 왕족과 같은 성씨를 지닌 그는 離騷 앞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 상당한 자고 있다. 이러한 신분 덕분에 어릴 적 그는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지식을 발판 삼아 楚辭와 같은 대작을 서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명문자제 라는 신분이 가져온 악영향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가문, 핏줄을 자랑스러워하면 할수록 그에 따른 책임감, 의무의식도 컸을 것이다. 離騷에서 자신이 태어난 날이 첫해 첫달 첫일 임을 자랑하고 자신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리며 매우 뿌듯해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그가 가져야 할 ,견뎌내야 할 시대의 리더로서의 사명은 결국 그를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까지 몰고 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자랑을 하는 것을 두고 많은 후대 유교 학자들은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屈原 자신의 출생이나 신분에 대한 자랑으로 보기보다는 屈原 자신이 어떤 리더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한 나라의 인재로서 나라를 앞장서서 끌고가야만 한다는 어떤 의무감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듯 하다.그는 가문과 능력을 모두 갖추었었기 때문에 젊을 때부터 벼슬을 역임하기 시작하여 회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초고속 승진에 주변 신료들은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결국 상관대부인 근상은 그를 모함하여 회왕의 신의를 잃게 만든다. 이 때부터 그의 비극적인 삶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회왕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자신의 뜻을 널리 펼칠 수 있었지만, 신의를 잃은 후부터는 그는 자신의 뜻을 펼치긴 커녕 나라가 망하는 꼴을 멀리서 보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스스로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屈原에게 있어서 이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며,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하지만 대쪽같은 성격의 그를 이미 간신배들에 의해 장악 당한 초의 왕실에서 수용할리는 만무했다. 그는 좌절했다. 楚나라가 망해가고 있는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좌절했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함에 좌절했다. 좌절한 그는 다른 나라로 떠나서 이상을 펴볼까 하는 생각이 아예 없는 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楚國을 떠나지 못하고 만다. 혼란의 시기인 戰國時代에 자신의 나라, 남의 나라 할거 없이 책략가들은 자신의 이상을 이뤄줄 군주를 찾아 떠돌던 시기였다. 책략가라면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고 그를 위해서는 나라의 경계는 상관이 없는 거였다. 그런데 유독 屈原은 달랐다. 그도 다른 책략가들, 예로 소진이나 장의 같은 이들과 같이 이상이 있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시켜보고자 하는 욕구가 매우 컸었다. 하지만 그가 그들과 절대적으로 달랐던 점은 바로 그는 자신의 모국인 楚나라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토록 楚나라 왕실과 간신배들이 그를 모함하고 힘들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楚나라는 자신의 모국이며, 전국 칠웅 중 꼭 천하 통일을 이뤄내길 바라던 나라였다. 왕씨의 성을 지닌 그의 책임감이기도 하였겠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충군의식과 애족정신이 투철한 인간이었다. 이를 애국주의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의 생각은 屈原을 애국주의 시인이라 칭하는 것에 한해선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애국의 개념과는 좀 다른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 그 시절의 특수한 사회상황에 비춰서 봤을 때 그건 그 시대에서의 애국 행위였다 할 수 있다. 항상 군주를 걱정하고 챙기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보호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애국하는 진정한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솔직히 처음 屈原을 배울 때, 난 너무도 답답해했다. 어떻게든지 楚나라에 있어야만 한다는 그의 신념이 아둔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한 인재가 나라의 구분이 없었던 중국의 넓은 곳에서 사상을 펼쳤어야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평전을 읽으며 그동안의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은, 특히 역사적인 일은 현재의 나의 보편적인 법칙을 가지고 보면 안된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깨달았다. 현재의 나에게 屈原은 왜 그렇게 楚국에만 묶여 있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을 주지만 과가 본 屈原은 내가 생각했듯이 아둔해보인다기 보다는 성스러운 한 명의 애국자와 같았다. 또한 그의 작품이 그렇게 환상적이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띌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그런 애국 정신 때문이었다. 離騷에서 巫人은 屈原에게 마음 맞는 미인을 찾아 떠나라 하고 屈原도 그리 하겠다 하지만 결국 떠나는 날 조국을 바라보며 屈原은 마음을 접는다. 그 때 떠났더라면 그의 자살이 빚어지지도 않았을테고 그는 유명한 책략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절개를 택함으로써 지금도 端午만 되면 詩人節이라 하여 모든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 그의 그러한 꼿꼿함과 순백함이 세월을 지나서도 사랑을 받는 큰 요인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하지만 그러한 애국관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마지막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건 너무 허무하지 않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그의 고결함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 어쩌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던 나라와 국민들이 어떻게 되든 간데 포기하고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가진 사람이 중도에 그를 거스르고 빠져 죽는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만나는 나의 중국인 친구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의 시이건 그의 애국 정신이건 너무도 가슴에 와닿지만 그의 자살은 마음에 안든다는 것이다. 과정보단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굴욕적이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臥薪嘗膽하며 복수나 재기의 칼날을 가는 중국인의 처세술과는 다른, 오히려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마는 그의 모습은 일본인의 처세술에 더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그 중국인 친구도 그런 점에서 문화적인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 물론 희망도 가망성도 없는 그 상황에서 느낀 그의 실망감과 좌절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살아있었다면 이런 유명한 시인이 안됐을까? 아니면 그 때 죽었기 때문에 그가 후대에도 이렇게 길이 칭송받게 된 것일까? 그 시대 사람이 아닌 이상 정확한조금 더 조사해보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 중의 하나이다.Ⅲ.楚나라와 楚辭楚나라는 한 때 진나라와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던 남방의 대국이었다. 전국칠웅 중 천하통일을 할 나라는 秦나라 아니면 楚나라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그들은 남방에서 북방의 중원민족과는 색다른 문화를 가지고 발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은 자연환경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척박한 북방 중원 지방에 비하여 남방의 楚나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물자도 풍부했다. 당연히 북방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억척 같이 강인하게 현실만을 직시하며 살아가야 했지만, 남방 사람들은 그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 갈 수 있었다. 屈原도 그러하였다. 그의 문학에서 북방 문학과는 다른 서정성이나 환상성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 요인 자체가 屈原의 감수성을 한층 더 높여 준 것이리라. 한 마디로 남방 문학의 특성상 楚辭는 필연적으로 발생되어야만 했던 감성 문학, 낭만 문학이었으며 이는 시경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며 후에 漢代 賦로 이뤄지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시에서 나타나는 애국 정신은 물론 屈原 자신의 투철한 민족 사랑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정신이 비롯된 기원은 바로 楚나라의 민족적 기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에 먹히지 않기 위하여 무척이나 애를 써야만 했던 楚나라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더더욱 뭉치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楚나라가 세 집만 남아도 秦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楚나라이다 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楚나라 백성들의 단결력은 큰 힘을 만들어낸다. 戰國時代 그 혼란한 와중에도 楚나라 백성들이 이렇듯 뭉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지켜야만 한다는 역사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일종의 의무의식 때문이었다. 일찍이 따로 떨어져 나온 楚나라의 경우 그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해줄 수 있었던 것은이었다.
目次Ⅰ.緖論Ⅱ.전래ⅰ.전래와 초기 전개 - 漢Ⅲ.성장과 토착화ⅰ.초기 접촉과 반응 - 東晉ⅱ.발전과 저항 - 南朝,北朝ⅲ.탄압과 승리 - 北周와 隋Ⅳ.성숙과 융합ⅰ.절정 - 唐Ⅴ.쇠퇴ⅰ.위대한 전통의 유풍 - 宋ⅱ.이민족의 지배 - 了,金,元ⅲ.퇴보와 몰락 - 明,淸ⅳ.개혁과 변화 - 現代Ⅵ.結論ⅰ.불교 수용에서 나타난 중국의 문화 수용 방식ⅱ. 불교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Ⅶ.후기Ⅷ.참고문헌Ⅰ.서론중국의 불교에 대한 연구가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전 역사를 통틀어 중국의 문화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 불교가 쇠퇴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교를 간과하는 것은 너무도 큰 실수이다. 중국 문화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신유학이나 도교 또한 다양한 불교적 사유에 의해, 혹은 여러 요소들을 불교에서 가져옴으로써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문학, 역학 등의 연구에서 중국인들은 인도에서 들여온 많은 불교적 지식을 바탕으로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K.S케네쓰 첸 (1991), 『중국불교上』(서울:민족사) 13p.이렇듯 중국문화에 있어 불교는 하나의 받침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되었는데 그렇게 보면 중국 문화의 바탕은 인도에서 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의 불교학은 인도불교를 바탕으로 발생한 하나의 종교철학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인도의 불교가 그대로 전래된 것이 아니라 그 바탕 위에 중국 고유의 사상들이 쌓이면서 형성되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불교 수용방식을 통하여 중국인들의 문화 수용방식을 알아볼 수 있다. 중국 불교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듯 외래문화의 성공적 동화 사례로 천거해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문화 연구에 있어 불교의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전래부터 쇠퇴까지를 시기별로 알아보고, 불교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과 불교 수용에서 나타난 중국인들의 외래 문 등을 믿었다. 그리고 초기 불경 번역을 도왔던 중국인들은 대부분 도교도 출신으로 번역할 경전의 선택과 사용된 용어에서 그 도교적 느낌은 그대로 전해졌다. 한대의 중국인에게 있어 불교는 도교의 또 다른 한 부분일 뿐이었고, 이 덕분에 그들은 불교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있어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한말 무렵에 가면 불교의 독립의식은 거세지고, 불교는 더 이상 도교와의 연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도교의 교리와 신비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고, 불교 스스로 중국 땅에 충분히 설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렇듯 불교가 독립화에 총력을 기울인데 반하여, 도교에서는 그 때까지도 노자가 서방으로 가서 불타가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며 그 관계를 유지해나가고자 한다. 노자가 불타가 되었다는 주장은 몽고의 황제에 의하여 종식될 때까지 천 년이상 계속된 일연의 도교와 불교의 논쟁을 야기시켰다.Ⅲ.성장과 토착화ⅰ초기 접촉과 반응 - 동진220년 한의 멸망으로 중국은 계속된 고난과 분열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 곳에서 많은 승려들이 동진의 건립에 공헌하며, 남방에서의 삶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 지역의 지적인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지역의 학식 있는 승려들과 결합하여 상류층의 불교 또는 사대부 불교라는 것을 발전시킨다. 3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는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준비기라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접할 수 있는 경전도 한정되어 있었으며, 거론할 만한 중국인 승려도 없었다. 하지만 동진 말에 이르러 일부 고승들의 노력으로 중요한 경전들이 중국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진대의 승려들은 귀족이나 문인들 뿐 아니라 지배층 및 왕족들과도 우호한 관계에 있었다. 승려들 가운에 일부가 귀족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다. 이러한 권력을 바탕으로 조정 안에서는 불교를 진흥하기 시작한다. 이런 좋은 조건 속에서 불교는 번성하기 시작한다. 남방의 불교는 이렇듯 자신의 독립적인 지위다. 제왕이 불교에 대한 헌신적인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뚜렷한 방법은 절을 짓는 것이었는데, 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법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그는 황제보살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무제의 후원은 불가피하게 토착적인 문인들의 불교에 대한 상당한 저항을 초래하였다. 후에 왕조사를 편찬한 유교인 사가는 무제에 대하여 불법에 빠져 형법을 지키는 데 느슨하였다 라고 악평하였다.불교가 정치적 지배자들의 후원 아래 발전하고 있는 동안 승려들은 특정한 경전에 몰두함으로써 불교 발전에 공헌하였다. 남조의 여러 제왕들로부터 후원이 계속되는 동안 불교는 중국인들 사이에 더욱 더 많은 신도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늘어난 승려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찰들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었다. 동시대에 북방에서의 불교는 훨씬 더 대중적이었다. 외래 종교인 불교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토착 종교인 유교와 도교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저항이 남방과 북방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는데 북방에서는 박해의 형태로 나타났고, 남방에서는 불교를 공격하는 글로서 나타났다. 그 예로 남방의 고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불교가 오랑캐에 땅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오랑캐의 풍습이 원래 약해서가 아닌가? 도교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중국인의 풍습이 원래 선해서가 아닌가? .............불교는 중국인을 위한 길이 아니고 도교는 오랑캐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 K.Chen, "Anti-Buddhist Propaganda," 「Ha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1952), 172p.고환의 목적은 인도의 자연과 풍습이 악하여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그 곳에서 기원한 불교 역시 중국인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환은 한마디로 민족적 편견에 기초해서 불교를 공격했다. 그 외에도 범진, 순제등이 대표적으로 불교를 비판하고 나섰다. 하지만 불교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남방에서의 이러한 공격은 글로만 한정되었으며 불교의 발전을 제한하거나 쇠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그 당시부터 불타와 노자의 선후문제를 놓고 불교도와 도교도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도교도들은 노자가 사라진 이후 인도로 가서 오랑캐들을 교화하였으며 그가 불타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은 불타가 그 지위나 시대에서 노자보다 뒤지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 논쟁은 북주 무제의 치하에서 점점 더 격렬해졌다. 무제는 이 외래 종교의 광범위한 대중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외래종교인 불교는 중국적인 관습이나 제도에 유해한 것으로서 반드시 거부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법난으로 도교 또한 무제에게 인식이 안 좋아지게 된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불교에 더 호의적인 선제가 제위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581년 북주는 양견이 세운 수나라로 이어진다. 남방과 북방을 모두 지배하게 된 문제는 국가를 통일하고 굳건히 하기 위한 이념으로 불교를 택하였다. 스스로를 불교 전통 안에 있는 전륜성왕으로 생각하였던 그는 황제가 여래 화신이라는 북위의 틀을 따르는 대신 불법의 덕으로 그가 홍기할 수 있다고 공표하였다. 그는 불교에 대한 지원을 보여주기 위해 총 111개의 탑을 601년~604년 사이 지었고, 유교를 교육하기 위해 지방에 세웠던 학교를 폐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들인 양광의 손에 죽고 만다. 양광은 제위에 올라 양제가 되는데, 이 양제는 불교의 추종자이며 관대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불교를 통일의 힘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수의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군사적 패배와 무거운 노역 등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진 가운데 양제의 암살로서 수는 막을 내린다. 수가 불교를 국교로 내세운 시도도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된다. 당에 들어서는 다시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를 통하여 불교는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고, 당에 들어서도 그 엄청난 불교에 대한 백성들의 종교적 정열은 거부할 수 없게 된다.Ⅳ.성숙과 융합ⅰ.절정 - 당수가 완성한 통일의 기초 위에 성립된 의 판매였다. 이는 승려 공동체의 도덕적, 정신적 수준의 저하를 초래했다. 이런 와중에 강력한 지적 운동인 신유학이 일어나게 된다. 당대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형이상학적인 이유로 불교가 전성기를 떨치게 되는데, 이를 유교 학문에 접목시켜 신유학을 발생시킨 것이다. 결국 유교는 지적으로 탁월한 위치로 격상되었으며, 불교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불교는 불가피하게 지적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송대의 과거제도 또한 불교의 지적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불교가 몰락한 간접적 원인은 바로 인도에서의 불교 몰락이었다. 생기 넘치는 종교적, 지적 힘이었던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짐과 더불어 중국으로 오는 인도인 전법승과 인도로 가는 중국인 구법승의 흐름도 사실상 멈춰 버렸다. 이처럼 종교적, 지적 자극이 제거되어 버리자 중국의 불교는 더 이상 두드러지고 우월한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ⅱ.이민족의 지배 - 요, 금, 원요 왕조의 중요성은 그 지배하에서 불교가 현재의 몽고와 만주로 불리는 아시아 내륙까지 전파되었다는데 있다. 불교에 대한 왕실의 태도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제왕들은 지배이념인 유교를 공식적으로 존중하였지만, 이민족에 대한 유교의 본래적 적대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교를 더 선호했다. 이처럼 요 왕조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한 결과 왕족과 귀족 및 평민들이 건립한 사원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출가한 승려들의 수도 많았다.금에 들어서도 초기 금의 몇몇 제왕은 불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금의 왕들은 불교에 대하여 약간의 모순된 태도를 보이곤 하였다. 제왕의 입장에서 유교를 엄격히 따라야 했지만, 이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가 더 마음을 기대기엔 적당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원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이민족이 세운 국가인 요,금,원에게는 불교가 마음에 가장 잘 맞는 종교였기에 세 왕조 모두 불교를 지지하였다.ⅲ.퇴보와 몰락 - 명,청명에서도 불교에 대해선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예로 명 태조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