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금시조 를 읽고이문열의 는 석담이라는 스승과 제자 고죽의 애증과 대립이 주 내용으로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구도를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기법이 돋보이는 소설이라고 하겠다. 그럼 그 내용을 토대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아버지의 죽음과 뒤이은 어머니의 가출로 유년시절부터 숙부에 집에서 얹혀 살았던 고죽은 열살의 나이에 숙부의 손에 이끌려 서예의 대가인 석담 선생에게 맡겨지고 석담은 어린 고죽을 단지 먹여주고 입혀 주는 수준에서 거둬들이겠다는 말을 숙부에게 건네며 받아들인다. 당대 서예의 대가인 석담 선생집에 기숙하였지만 고죽은 석담에게 그냥 밥이나 굶지 않게 먹여주는 대상일 뿐이었지 더이상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석담이 고죽에게 신경쓰고 요구한거라고는 거듭 을 읽게 하고 세월이 바뀌었다며 소학교를 다니게 한 것으로 그를 석담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그런 석담의 무관심을 꿋꿋히 속으로 감내하며 고죽은 몰래 붓을 쥐어들고 곁눈질로 석담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좀 지나서는 대담하게도 석담이 외출한 틈을 타 스승의 침소에 들어 석담을 그대로 흉내내기도 하였다. 그런 행동을 알게된 석담은 고죽에게 성을 내기는 하지만 이미 석담은 고죽을 꿰뚫고 있었으며 그런 고죽을 바라보는 마음 한구석에는 안쓰러움이 내포되어있다. 여태껏 고죽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이미 석담은 그의 재능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죽의 재능은 출중하나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기엔 그는 자신과는 너무 달랐다. 그걸 알았기에 선뜻 고죽을 제자로 받아들이기에 꺼려했던 것이리라. 이제 그만 제자로 거둬들이라는 운곡선생의 말에 석담은 결국 고죽을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토록 원하던 석담의 제자로 입문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스승은 석담에게 냉담한 듯 보였고 나름대로 석담의 예술관에 반발하며 두번씩이나 스승의 곁을 떠난다. 고죽이 석담에게 반발하는 것은 그를 알아주지 않는 서운함도 있었으나 석담도 인지하고 있었고 고죽도 알고 있었듯이 둘은 벌써 예술관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하겠다.예를 들어 스승 석담은 글씨의 힘을 중시하여 氣와 品을 중시하였고 서화 자체도 心畵로 여겼던 반면, 고죽은 예술로서의 예술을 주장하며 석담의 心畵와는 반대되는 物畵, 즉 내심보다는 대상에 치중하는 예술관을 보이고 있다.또한 스승과 제자의 藝道논쟁에서도 드러나듯 고죽은 스승인 석담이 중요시하는 道 보다 藝를 중요시한다. 이런 논쟁이 발화가되어 고죽은 스승과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실감하게되는데, 그 뒤로 스승과 다시 논쟁을 하게된 고죽은 이번에는 완전히 스승에게서 등을 돌려 떠나게 된다. 이제 고죽은 스승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그동안 스승 밑에서 억눌렸던 것을 다 풀어내듯이 마치 스승에게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다. 자신이 스승을 떠나온게 아니라 자신을 버린건 스승이라고 굳게 믿으려했던 애초의 마음은 점차로 옅어지고 결국 스승이 자기를 내친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승을 떠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된다.결국 운곡선생 말했듯이, 스승 석담은 아직도 고죽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여기서 스승 석담의 제자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호되고 엄하다 싶게 대했기에 스승 석담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지만 그건 분명 스승으로서 제자를 호되게 훈련시키고 제대로된 예술가를 만들기위한 고도의 의도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적부터 고죽을 꿰뚫었던 석담은 고죽에게 을 되풀이해 읽으라며, 그의 사람됨을 바랬고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道에 이르러야 진정한 藝도 나온다는 석담선생의 깊은 뜻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학문은 道에 이르는 길이며 道가 없으면 藝더 法도 없다고 했던 스승 석담이었다. 그에게 어렸을적부터 도를 깨우치게 하려고 일부러 더 모른척했고 가혹하다싶게 했던 것도 모두 스승의 제자사랑에서 나온 깊은 사랑이 담긴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나중에서야 그런 스승의 사랑을 알게된 고죽은 스승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전에 마음의 정화를 필요로 했기에 산사를 찾는데 그곳에서 그는 가루라(迦樓羅) 즉,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금시조 를 발견하게 된다. 순간 고죽은 스승 석담이 제자 고죽이 才藝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써준 글귀인 金翅碧海 가 떠오르며 가슴속이 뭉클해지며 스승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하지만 스승의 이런 심오한 뜻을 이해하고 스승을 찾았지만 이미 스승은 이세상과 인연을 다한 뒤였고, 그런 못난 제자를 스승은 끝내 버리지 않고 죽으면서까지 고죽에게 관상명정 을 쓰라는 유언을 남긴다. 실로 자신의 뜻대로 되어주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떠나간 제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엿보인다. 아마도 스승 석담은 죽으면서까지 고죽이 자신을 찾아올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는 다른 예술관을 지닌 제자임에도 끝까지 그를 사랑으로 감싸안으려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스승임과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해와 같은 사랑을 보이는 부모의 모습까지 엿보인다고 하겠다. 고죽은 세상과 담을 쌓은채 칩거하며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을 챙겼던 스승에게 죄스런 마음을 지닌채 스승은 세상에 없지만 스승과의 화해를 시도하려 갖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와 스승은 다를 수 밖에 없다는걸 실감할 수 밖에 없었고 스승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게 고죽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노년에 다다라서 고죽은 자신이 무책임하게 붓을 놀리며 써주었던 것들을 거둬들이게 되는데 그 많은 작품들을 다 불사르는 순간, 고죽은 그 불길 속에서 스승 석담이 그토록 보려 했지만 볼 수 없었던 금시조 를 보게 된다. 스승도 보지 못했던 금시조를 제자인 고죽이 본 것이다. 결국 살아서 가장 바라던 것을 이룬 고죽도 얼마 안있어 눈을 감는데 아마도 그는 죽는 순간에 한치의 아쉬움도 없었을 것이며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금시조 를 보면 그의 삶은 성취된 것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성매매 방지법과 해결방안에 대해서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사회적으로 떠들썩하니 연일 신문과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성매매문제이다 보니 이런 문제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해도 연일 신문과 뉴스를 장식하는 통에 자연스레 접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사회적 분위기가 무척이나 뜨거운 만큼 큰 이슈인건 틀림 없었다.얼마전 한 남성단체가“성매매특별법은 남성의 신체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는 기사를 접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왜 성매매특별법이 우리나라 남성들의 신체의 자유와 행복추구권까지 침해를 하게된 것일까. 연이어 떠오르는건 우리나라 남성들은 왜 그렇게 성매매에 집착하는 것일까. 엄연한 불법이며 법률위반 행위인 성매매를 금지한다고 해서 왜 그들의 신체 자유가 억압받고 행복추구권이 침해받는 것일까. 이런식으로 신체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있는걸 따지자고 들면 그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법률과 제도는 분명 인간의 신체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게 숱하게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것이다.그러면서 그들은 여지껏 줄기차게 주장해 왔듯이 성의 가치는 국가 공권력이 개입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며 떳떳하게 반기를 들며 큰소리 치고 있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시행되고 있는 수많은 법들도 따지려고 든다면 행복추구권을 위협하는 요소가 한 두 가지가 아닐터인데, 그동안 그렇게 여러 사건과 법률이 제정되어 왔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이처럼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다가 유독 “성매매 방지법 에 대해서는 뭐가 그리도 떳떳한지, 마치 무슨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히 있는 법이라도 되는양 오도하며 법 자체를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여기에 더 나아가 현직 경제부총리가 성매매 방지법 을 이상한 법이라고까지 칭하며 이런법 때문에 경제가 위축된다고까지 언급한걸 보면 남성들의 이런 사고가 결코 우연이 아닌 대다수 남성들의 성매매에 대한 인식일거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더불어 미혼남성들의 성적욕구 하지 못하고 배출했을 거라는 추측까지 가능해진다. 그 국회의원 자신의 18세부터 30세까지 12년 동안 성매매가 없었다면 큰일날만큼 자신에게는 중요했던 문제라고 치자. 그럼 그 나이에 젊은이들이 성매매 아니면 성적 욕구를 어찌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건 그들을 모욕하는 발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국회의원의 아무런 사전 조사나 연구없이 본인의 평소 소신대로 무책임하게 내던진 미혼남성의 성적 배출구로서 성매매가 필요하다 고 한 이 발언은 아마도 정정해야할 듯 싶다. 경찰청 통계 조사결과 성을 사는 남성의 62%가 30, 40대 기혼자라고 한다. 그 국회의원이 주장한 18세부터 30세까지의 미혼 남성의 성적욕구 해소는 아니었던 셈이다. 더 기가막혔던 부분은 그 국회의원은 여성단체의 항의가 있자 자신의 발언을 수습하는 듯 하더니 얼마 뒤 혼전순결 운운하면서 얘기까지 꺼내는 등 오히려 더 당당한 자세를 취하며 국회의원으로서 차마 못보일 꼴을 보이고 말았다. 국회의원의 그런 무책임한 발언에 화도 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그 국회의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게시판에 그 국회의원을 옹호하는 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어쩌다 너무 무책임했다는 반론의 글이 올려지기라도 하면 즉시 댓글이 달아지면서 인격적인 부분까지 거론하며 사람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건데 그 국회의원은 대다수 남성들의 속마음은 한결같은데 차마 사회적인 눈을 의식해 내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용감한(?) 발언을 대신 해줌으로써 점수딴걸로 착각하며 흐믓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아무리 말 바꾸기를 쉽게 하는게 정치인이라지만 좀 더 성숙한 대처와 방안을 강구하지 않은채 쉽게 바꿀 수 있는 부분도 아닌 법률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나 연구없이 즉흥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사람이 국회의원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고 있다는게 화도 나고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근데 지도층을 포함한 남성들의 이러한 의식이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 정보를 알려주며 서로 밀착된 공생관계를 유지해왔기에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당당하게 영업을 해온 것이다.얼마전 뉴스를 보니 그 지역의 소위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성매매 업주들에게 정기적으로 성상납을 받아왔다는걸 보면서 왜 그렇게 그들의 생명력이 길 수 밖에 없는 건지 알것도 같았다. 이번 “성매매 방지법 특별 단속기간에도 경찰관이 성매수를 하다 걸린 사건이 있는가 하면 아예 경찰이 술집을 차려놓고 성매매를 강요한 사례도 있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모든 경찰관이나 지도층을 똑같이 몰아갈 수는 없겠지만 앞서서 불법적 행위를 적발하고 가려낼 사람들의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맥이 빠지는게 사실이다.그럼 그전에 윤락행위등방지법 이었을 때는 다들 조용하다가 성매매 방지법 이 시행되자 왜이렇게 세상이 발칵 뒤집어진 것처럼 떠들썩 한건지, 대체 그전에 윤락행위등방지법 과 뭐가 그리 틀리기에 이 난리들일까 하는데로 생각이 미쳤다.1960년대에 제정된 윤락행위방지법 이 윤락행위등방지법 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오늘날의 성매매 방지법 과 성매매피해자보호법 으로 제정, 시행되고 있다.이렇듯 성매매방지법 이 탄생하기까지 그 결정적 계기가 된건 군산 대명동 윤락가 화재 사고 직후 여성단체들이 성매매 여성의 인권보호와 윤락업주의 처벌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성매매 방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에 이르게 됐고, 뒤이어 개복동 화재 참사가 발생하자 여성단체들은 성매매 방지법 제정의 필요성을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게되었고 마침내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성매매 방지법 이 윤락행위등방지법 보다 분명 더 강화된 부분도 있을 테지만 성매매 여성들의 아픔 뒤에 탄생하게된 법이라서 그런지 그들을 성매매 피해자로 보고 그전에 없었던 그들에 대한 보호가 눈에 뛰는 부분이라면 부분이라고 하겠다.예전 윤락행위등방지법 의 경우 성매수자의 경우에는 1년 이하 징역, 300만원이하 벌금이었고 처벌위주의 법이기보다는 경찰의 훈방조치 등 관대한 적용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바뀐 성매매 방지법 성들에 대한 처벌은 강화하되 포주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성매매를 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은 피해자로 보호를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일 것이다.또한 중요한 부분은 성매매 알선자에 대해 윤락행위등방지법 에서는 법정형 하한 5년에서 성매매 방지법 에서는 법정형 상한 10년으로 강화되고 경제적 제재 조항이 신설되어 수익 을 몰수 및 추징하는 등 성매매를 하는 여성보다도 알선자, 즉 업주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성매매가 결코 성을 사고 파는 사람만을 처벌한다고 해서 뿌리뽑힐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사실 성매매 방지법 이 성공할 수 있을려면 알선자, 즉 포주와의 전쟁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느냐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성매매 여성들을 포주들에게서 구해내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준다 하더라도 포주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포주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그런 업소를 계속적으로 만들어낼 것이고 제2 제3의 성매매 여성들은 다시 발생할 것이고 모든게 반복될 것이다. 지금도 포주들은 생존권 침해라며 성매매 여성들을 앞세워 성매매를 직업을 인정해달라며 그녀들을 반강제적으로 시위현장으로 내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라는게 생계형 성매매이기에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계형으로 하면 설령 그것이 불법이라 할지라도 모두 인정해야하는 것일까. 그것이 한 인간을 사고 파는 비인간적인 일인데도 말이다.거리를 나가보면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 곳곳에 포장마차들이 즐비해 있는걸 볼 수 있다. 어쩌다 단속이라도 나오면 순식간에 단속반을 피해 달아나거나 미처 피하지 못할 경우 가차없이 철거당하고 인정사정 없이 집기들을 다 거두어 가기도 한다. 성매매의 경우도 기업형이니 생계형이니 말이 있듯이 이런 포장마차 영업에서도 생계형이니 기업형이니 하는 말이 있다. 크게 하면 기업형이고 정말 규모가 작게 생계유지를 하는 수준이라면 생계형인 것일까. 그럼 집창촌에 업소 여러곳을 거느린 포주가 성매매 여성파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이다. 또 그것을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는 남성들이다. 이렇게 한쪽의 성이 돈으로 한쪽의 성을 사는 행위는 불법적인것과 동시에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생계형이니 하면서 직업으로 인정하라고 하는건 아전인수에 불과하다. 어찌보면 떳떳할 수 있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서민들이 쉽게 할 수 있고 누구나가 이용할 수 있는 포장마차도 불법이라며 단속을 하는 마당에 성매매를 생계형이니 하면서 마치 성매매 여성들을 두둔하려는 듯 하면서 직업으로 인정하라고 주장하는건 납득이 되지를 않는다. 왜 그동안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순에는 함구하고 있었으면서 이런 문제에는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 나서가면서 법을 어기도록 부추기는 것일까?언론들도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한술 더 떠서 거들고 있다. 관광업계가 울상이고 모텔이 문을 닫게 생겼으며 더불어 은행권까지 위협을 한다는 것이다. 뭘 어쩌라는 것인지. 성매매 방지법 의 발효로 인해 나타나는 긍정적인 내용의 기사는 아주 극소수로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이런류의 기사를 대하고 있노라면 마치 성매매 방지법 으로 인해 경제전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경제부총리의 발언도 그렇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며 대기업 회장으로 있는 사람의 발언은 더 가관이다. 성매매 방지법 으로 인해 하수도가 막혔다는 표현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성매매가 어떤 위치였길래 이 지경인지 도무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사회지도층의 이런 의도적인 발언과 보수언론의 공정하지 못한 편파적인 기사들을 통해 성매매 방지법 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마치 성매매 여성들을 생각이나 하는 듯이 생계형으로 힘들게 일하는 그녀들이 생계유지를 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자살하고 생존권을 주장하며 시위하는걸 유난히 강조하는 논조이다.언론이 앞다퉈 다뤄야할 부분은 포주들에 의해 강압적으로 성매매를 하고 감금당하고 착취당하는 인권유린의 현장.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고-신경숙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된 것도 풍금이 있던 자리고 그 작가에게 나름대로 매력을 느꼈던 작품도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90년대는 여성작가들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신경숙 또한 90년대 대표적 여성작가군중 한 명이고 그녀를 유명하게 만드는게 크게 기여한 작품도 풍금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소설속 나 는 미혼의 여성이며 한사람을 사랑한지만 그는 다름아닌 유부남이며 그야말로 불륜인 셈이다.나 가 유부남 애인을 상대로 담담하게 자신의 내면을 고백해 나가는 편지체 형식이다.유부남인 상대에게서 함께 해외로 도피할 것을 제안 받은 나 는 아직 그것을 수락하지 않은채 떠날 날짜를 며칠 앞두고 자신이 살던 고향을 찾는다.고향을 찾으면서 유년시절을 회상하기에 이른다. 그 중심부에는 지금의 나 를 닮아있는 유년시절 자신의 가정을 위태롭게 했던 한 여자가 있다. 유년시절을 어둡게 만들 수 있었을 법한 그 여자에 대한 나 의 기억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그녀는 이전에 보아왔던 촌부의 아내들과는 달리 아름답고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척척 해결해 나가는 그야말로 이상적 여성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내심 그 여자처럼 되고싶다는 희망을 품기도 한다.자신의 어렸을적 기억과 지금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맞물려지면서 피해자였던 유년시절 자신과 현재 가해자로서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내면의 갈등이 시작된다.결국 함께 떠나기로 한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은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금 그에 대한 그리움과 복잡한 심경으로 그의 집에 전화를 걸어본다. 나 없이도 떠날거라는 그는 떠나지 않고 거기에 있었고 나는 그와의 어떤 대화 없이 전화 수화기를 놓아버리며 그토록 아늑하고 포근한 고향으로 안주해버린다.여기까지가 대강의 줄거리다.90년대 많은 여성작가들이 다루었던 불륜이라는 주제를 작가 신경숙은 작가 특유의 문체의 아름다움과 처연한 감수성으로 다루고 있다. 그동안 불륜을 다룰때 자주 묘사되던 성적 일탈과 배신하고 버림받는 그런 모습을 이 작품에선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나 다음으로 중요한 불륜의 대상인 그 남자는 이 책에 잠깐 등장하거나 그 남자에 대한 나 의 조심스런 나열이 전부다.유년시절 그녀의 동경의 대상이던 그 여자가 떠나갈때 그 여자의 연인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어떤 적극적 역할수행은 물론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떠나간 뒤에 밀려오는 슬픔을 술로 푸는 소극적 모습을 보열줄 뿐이다.거기에 비해 나 의 연인인 그남자는 어떠한가. 그도 나의 아버지와 별다르지 않다. 내가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았을때 나의 연인인 그 남자는 그 어떤 적극적인 행동 수행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단지 나의 기억속에서나 등장할뿐 더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신경숙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대부분은 그 역할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단지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극히 주변부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던거 같다. 이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닌것이 나 와 함께 그 대상으로서 주인공격이 그 남자의 존재는 커야함에도 극히 미미해 보이고 오히려 나의 유년시절 기억속의 그 여자 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아닌 그에 대한 나의 일방적 내면의 고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도덕적이지 못한 관계에 대한 나 의 내면의 갈등이 펼쳐지면서는 지금의 나를 닮은 유년시절의 그 여자가 대비되고, 사랑의 고통으로 인해 아프고 시린 맘조차 따뜻하게 감싸안아줄 수 있는 원초적 모성의 이미지로서의 고향이 그곳에 있을 뿐이지 그 남자의 존재는 극히 미미해 보인다.만약 그녀가 편지를 쓰는 공간적 배경이 고향이 아닌 그녀가 떠나왔던 도시였다면 그처럼 담담하게 모든걸 순순히 정리할 수 있었을까. 작품속 화자인 나 는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면서 상처받았고 상처주었던 모든걸 그곳에 두고온건 아닐까.이 작품에서 나 를 대신할 수 있는건 아버지의 그여자 이며, 그 여자의 이야기와 나의 현재를 대비시켜가며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다. 그 여자가 느꼈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이며 그 여자가 선택한 길이 결국 내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인 것이다.나 의 기억속에 등장하는 그녀는 틈만나면 칫솔질을 한다.큰 오빠가 방문을 꽉 잠그고 나오지 않을 때도, 큰오빠의 사주를 받은 둘째오빠가 아줌마, 술집에서 왔지? 라고 말했을 때도........중략......셋째오빠가 한밤중에 엄마 내놓으라고 발뻗고 숨넘어갈 듯이 울어제길 때...............이렇듯 그 여자는 한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하지 못하고 아이들에 의해 외면당하며 낯선타인으로 머물러 있는 괴로움을 주로 양치질을 함으로써 해소하려 한다. 어린 나 의 눈에 비친 그녀는 울면서 양치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을 잊으려하고 괴로운 심경을 달래는 것이었다.그녀와 대비해 나 는 어떤가.당신 손엔 늘 결혼 반지가 끼어 있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쓰라림이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갔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이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지조차 모르시는 듯했어요. 그 반지는 그저 당신의 일부분처럼 거기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마음에 휘몰아칠 때마다 당신의 손을 찾아 쥐었습니다. 그러면 서러운 마음이 가라앉곤 했어요.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현실에 벽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손에 언제나 끼어져 있는 반지가 그것이다. 그걸 볼때마다 그와 내가 놓인 현실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지만 그걸 견디기 위해 그의 손을 찾아 쥔다. 그러면 아버지의 그 여자가 양치질을 하며 가라앉히곤 했던 현실의 괴로움을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가라앉히곤 하는 것이다.그 여자 가 도망치듯 집을 나갈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의 두터운 벽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의 두께와 결코 다르지 않다.어느날 부재중이었던 어머니의 삼십분도 안되는 등장이 있고 적대적이어야 할 어머니와 그 여자 사이에는 그 어떤 충돌도 없다.어머니의 부재중에도 그 여자는 아이들의 닫은 마음속에서 은연중에 느꼈을 자신의 한계를, 어머니의 삼십분의 출현만으로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현실과 맞부딪치면서 결국 그녀는 양치질로도 해결할 수 없을만큼 큰 현실의 벽에 뒷걸음질치며 도망치듯 떠나게 된다.그녀가 그렇게 떠나면서 했던 말인 나........ 나처럼은 되지 마 에서 알 수 있듯 나는 그녀와 무언의 약속을 했다고 믿으려하고 있고 지금이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때라고 자신에게 애써 주입하며 그와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그러나 그 여자와의 약속은 지켰을지 몰라도 내면의 나는 아직 그를 정리하지 못했고 절박한 심정으로 그에게 수화기를 들게된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건 그의 아내가 은선아, 아빠에게 전화 받으시라고 해. 였고 나는 가만히 수화기를 놓고 만다.
은희경의 타인에게 말걸기를 읽고- 타인에게 다가서기 혹은 거리두기에 대해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 친했던 그러나 지금은 소원해진 친구가 책 안 속지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런 저런 얘기와 함께 재밌으니까 읽어보라며 건네주었던 책이 은희경의 새의 선물 이었다. 그걸 계기로 해서 은희경의 작품이 세상에 나올때마다 일부러 사서 읽곤 했었다.은희경 소설의 장점이라고 말할수도 있을 듯 싶은 쉽게 쉽게 넘어가는 스토리라인이 부담없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으며 그 시절 그러니까 작가 은희경이 90년대 작가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지만 90년대 중반 이후에 여성작가군들이 맹위를 떨치는 시점에서 신경숙과 함께 선봉장에 서 있었던 은희경인지라 주변 동성친구들 사이에서는 은희경 소설 한 두편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듯 싶었고 신간이 나오면 서로 돌려가며 읽곤 했던 기억이 새삼 난다.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은희경의 단편인 타인에게 말걸기 이다. 매력있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이 작품의 제목에 이끌려서 읽었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되짚어 보고자 한다.우선 이 작품은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부터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제목부터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면 틀린 말일까. 사실 이 작품이 나왔을때 제목으로 인해 더 읽고싶은 욕구를 느꼈던게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 왠지 타인에게 쉽게 다가설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가지고서 읽었으니 말이다.타인에게 말걸기 란 제목처럼 타인에게 말을 걸기란 어찌보면 쉬울수도 아님 많은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낯선 그 무엇은 두려움과 함께 원인모를 동경과 호기심을 동반하기에 우리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것도 사실이다.이렇듯 충분히 매력적인 제목에 비해 내용은 어떠한가.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명 남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인 내가 바라보는 그녀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연한 만남과 여러번의 의도된 혹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남자가 그 여자와 또한 그 여자의 남자들의 면면을 본의 아니게 알게되지만 그녀를 대함에 있어 시종일관 차갑고 냉소적으로 일관한다.남자에 비해 여자는 눈치없게 느껴질 정도로 남자에게 불쑥 찾아오기도 하고 곤란한 부탁을 별 고민없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채 냉소적인 모습을 보일 뿐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타인에게 다가서려는 여자와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다가서지 않는 누가 다가와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남자의 소통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어찌보면 상반되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의 소통 방식에서 누가 더 상처받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언뜻 보면 여자가 더 상처받는 듯이 보이고 이렇듯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를 다른 타인에게서 치유하려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는 보면 남자가 더 상처받기 쉬운 타인이 아닐까 싶다.아니 언젠가 상처받았던 기억으로 인해 아니면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기 내부에 경계선을 만들어 놓고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침범을 허락치 않는지도 모르겠다.이런 남자에게 계속 무시당하는 듯한 여자는 애처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눈치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 여자는 이 남자가 아닌 다른 타인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듯 보이며 어찌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다른이의 탓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다른 남자들 앞에서 한없이 바보스럽기만 했던 그 여자지만 냉소적이기만 한 이 남자 앞에서는 무릇 당당하기까지 하다.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그여자가 냉소적인 그 남자를 향해 던진 말이다. 이 말은 상처받는데 익숙해있던 여자가 차갑기까지한 그 남자에게 눈치없게 굴었던거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그 여자는 타인에게 받아왔던 상처를 다시 되풀이한다는게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결코 친절하지 않고 냉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남자에게 거절당한다는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고 거절당한들 상처의 강도도 낮을 것이기에 다른 타인을 뒤로하고 그 남자에게 눈치없이 부탁하기도 했던 것이다.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상처받게 되는 순간과 가장 큰 상처를 주는 타인들은 누구일까? 그건 다름아닌 가깝고 친절하고 친밀하기까지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일정거리를 두고 있는 타인들, 그리 친밀하지도 않고 멀기만한 타인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상처를 준다한들 기대하는게 없기에 받아들이기 힘들만큼의 큰 상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믿었고 또한 거리를 두지 않았던 사람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우리는 쉽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게 사실이다. 그러면서 누구를 사귀던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할까봐 라고 넋두리를 하게 된다. 물론 머리로는 알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 다음번에 다시금 넋두리를 하게 될지언정 생각한대로 지켜내기란 쉽지만은 않은게 사실이다. 만약 이대로만 행동한다면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 싶다. 타인을 향해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냉소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아님 상처받는걸 각오하고 타인에게 다가서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