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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 감상 및 분석
    오시이 마모루의 감상 후…사람들이 공기가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듯이 아니 처음부터 인식조차 않듯이 나도 나란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니까 나라는 존재는 의심이 되지 않는다. 오감으로 명백히 느껴지는 나만의 고유한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통 철학적으로 깊이 사유하기 이전의 평범한 사람의 소박한 존재론이다.만일 이렇게 명백한 것 같은 나의 존재에 대해 의심받으며 증명을 요구당한다면 우린 보통 어떻게 대처할까? 아마 대부분 자신의 기억들을 토대로 ‘나’를 설명하려 애쓸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이런 사람들이 나와 관계된 사람이라고 말이다. 존 로크(John Locke)는 일찍이 그의 저서『인간의 지적 능력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인격 동의성’, 즉 어떤 사람을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리하여 그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변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그와 동일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를 펼쳤는데 그는 이에 대해 ‘기억’과 이것들에 대한 지속적 인지가 인격 동일성의 조건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자신이 신체적으로 얼마나 변했든지 간에, 만일 내가 나의 과거 행위들을 나 자신의 것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지난날의 나와 동일한 인격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로크의 의견이 참이려면 내가 나 자신을 말하는 데에 있어 기억은 진실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기억은 진실한가? 그리고 기억이 왜곡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아가 없는 것인가? 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철저한 회의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인간의 본질을 정신(기억)으로 규정하고, 육체?감각 경험만을 의심하던 근대의 이원론보다 한 차원 더 나아간 회의이기도 하다.그럼 과연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를 규정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공각기동대의 질문이다.인간 ‘정신’에 대한 회의-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할까?서기 2029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세계는 초고속의 광대한 통신망으로 연결된 세상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얻고자 하는 정보들을 네트워크들을 통해 마음껏 얻을 수 있게끔 되었으며 더 나아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사이보그화된 기계 육체, 즉 '의체'에 의해 실현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세상에서 주인공 ‘쿠사나기’는 공안 9과라는 정부기관의 행동 대장을 맡고 있다. 그녀는 뇌의 일부와 척수를 제외하고 육체의 대부분을 사이보그화 한 인간(?)이다. 그녀는 그 사이보그 육체의 힘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방금 나는 ‘쿠사나기’를 인간이라고 하였다. 영화속에서도 역시 ‘쿠사나기’는 그녀의 (사이보그 몸으로 인한) 초인간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인정받고 생활한다. 그녀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은 인간의 뇌, 즉 인간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는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라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 영화의 진행은 그 시작을 해체해가는 과정이다. 즉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라는 근대적 사고를 해체해가는 과정이다.‘쿠사나기’의 조수 ‘토쿠사’는 공안 9과의 신입대원이다. 공안 9과에는 의체를 가진 요원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공안 9과에선 거의 유일하게 신체의 대부분을 본래의 몸으로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쿠사나기’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했죠? 내 능력은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는데…” 이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이랬다. “너는 거의 대부분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량생산된 제품들은 오류가 있기 마련이야.” 바로 그녀는 ‘정신’만 가진 내가 과연 인간일까 하고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정신이라는 명제는 그 명제 자체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쿠사나기 자신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사이보그는 믿을 수 없기에, 대부분 인간인 ‘토쿠사’를 신체적 능력의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조수로 선택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육체(감각)를 의심하고 그로 인하여 의심할 수 없는 ‘정신’을 찾아냈다면, ‘쿠사나기’는 그 의심할 수 없는 정신만을 갖춘 나는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갈등은 ‘인형사’라는 해커의 등장과 함께 더욱더 심화된다. 영화에는 인형사에 의해 고스트 해킹, 즉 정신을 해킹당한 한 청소부가 나오는데 그 청소부는 자신의 정신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의 정신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육체를 사이보그로 대치할 수 있는 것처럼, 정신도 대치되고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유하는 정신’마저도 ‘나’로써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쿠사나기’는 인간의 정신이 저렇게 조작될 수 있다면, 몸마저 사이보그인 자신은 누구인가라고 고민하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본다. ‘나는 인간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영화에 따르자면 육체는 물론이며 기억을 비롯한 정신 역시 살면서 조작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인간을 규정하는 정체성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는 기존의 정체성 관념에 대한 폐기를 요구한다. 정체성을 간직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제약하는 하나의 관념을 틀을 형성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을 때 개개인은 비로소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에서는 나에 대한 정체성은 고유한 기억도, 매일 매일 같은 나도 아닌,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오로지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그리고 그 관계는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나 역시 변하고 있다. 어느 한 순간의 나를 나 전체의 본질로 또는 정체성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 관계 안에서 형성되어지는 나의 자리에 의하여 정체성이 주어지는 것이다.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정의는 더 이상 사이보그와 차이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오히려 사이보그는 슈퍼인간으로서, 인간의 과학적 정의에 더 적합한 인간이 된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명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보아도 역시 그 답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진다. 과학의 한계를 초월하여 생명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현상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인간은 관계와 관계로 맺어져있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관계와 관계로 형성된 네트에서 나의 위치를 정의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나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공기가 없을 때 공기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이 관계의 단절인 개인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명과 개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는 원리이다.
    인문/어학| 2008.03.11| 3페이지| 1,000원| 조회(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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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에르 부르디외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을 읽고 평가B괜찮아요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신문방송학전공 학생으로서 “상징폭력”이라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삐에르 부르디외의 개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화두이다. 계급 문화에 관한 상세한 서술을 통해 각인된 그와 같은 핵심적인 주제어는 개인의 주관성에 큰 의미를 두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도 그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계급이론에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개입할 여지는 작았지만, 부르디외의 계급이론은 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환론이나 결정론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 학자들로 하여금 조금 더 계급이론에 대해 학제적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시사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개념이 계급투쟁과 계급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실천적으로 아무리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이론적 수준에서는 정교하지 못하며, 사회재생산과 관련된 가정들과의 연결에서 몇몇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글에서는 부르디외의 주 저작 중 하나인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을 통해 부르디외의 핵심적인 개념들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이 갖는 긍정적인 함의를 열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석을 거쳐 이 텍스트가 갖는 한계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 특히, 부르디외의 견해에 대하여 한계점이란 측면에 초점을 맞춰 보다 비판적 시각을 갖고 고찰할 것임을 분명히 하겠다.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부르디외 이론의 중심축은 그의 저서의 제목과도 같이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원제, Language and Symbolic Power)이라고 할 수 있다. 위 테마에는 오인을 통한 인식, 합의, 공모, 위임, 정당화, 제도화, 검열, 구별 짓기 등의 개념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구조의 측면을 갖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의 설명은 위의 과정들을 일관된 것으로 쉽게 풀어내고 있다. 본 절에서는 위의 과정을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이라는 텍f institution를 제정한다. 이 제도화 의례는 제도적 경계선의 자의적 속성을 부인하는 한편,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그에 상당하는 것으로 용인하게끔 함으로써 자의적 경계를 신성화(사회적으로 인지, 승인)하거나 혹은 정당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경계는 ‘구분선’을 만들어낸다. 제도화 과정은 사회적 속성을 자연적인 속성인 양 만드는 사회적 마술행위와도 같다(p.198~201). 이러한 구분선은 ‘정통’과 ‘이단’의 구분, 검열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러한 검열은 표현에의 접근통로와 표현형태를 동시에 통제함으로써 표현―형식 부과를 통해 형식을 결정할 뿐 아니라 내용도 결정(p.230)―을 지배하는 장field의 구조 자체이다(p.228).이러한 제도적 행위는 어떤 개인에게 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즉 그에게 그의 정체성을 부과하는 식으로 의미화 작업(p.203)을 하는 것이고, 차이를 자연화하고 그것을 아비투스habitus의 형태로 만들어 주입함으로써 ‘제 2의 자연’이 되도록 한다(p.206). 구분선(분리의 선)은 계급 취향과 같은 지속적인 성향을 주입한다(p.207). 제도화적 행위에 의해 생산되는 진정한 기적은 (의례를 통해) 신성화된 개인들이 그들의 존재가 정당화되었다고 또 그들의 존재는 어떤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p.211).아비투스, 오인, 상징 폭력아비투스는 ‘구조화하는 구조이면서 구조화된 구조이며, 행동과 인지 판단의 성향체계’이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에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내재함을 명확히 한다. 첫째, 과거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 아비투스는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수정된다. 즉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항상 발명해 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행동은 예측될 수 없으며, 이에 행위자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전개한다. 둘째, 아비투스는 개인들의 실천을 한계 짓는다. 각 행위자들은 아비투스를 지니고서 각각의 상황에 맞닥뜨리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니고 전략을 , 피지배자든)는 장에 들어가, 게임에 참가하는 순간 오인한다. 특정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의 인식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은 뒤집어서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대의 사회공간은 상이한 룰에 따라 움직이는 장들의 집합이요 행위자는 장에 따라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모두는 그가 활동하는 장에 따라 조금씩 달리 인식한다. 이 상이한 인식이 오인이다. 장마다 검열과 공모의 방식이 각각임을 떠올린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물론 오인은 강제나 억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인을 통하여, 행위자들은 그가 보유한 자본을 어떻게 사용해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오인은 행위자로 하여금 장에서 실천할 수 있게 해주며, 모든 행위자는 장에 들어가기 위해 그 장의 질서를 승인하는 것이다”).그러나, 부르디외에게 있어 오인과 인식은 같은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하자. 장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곧 오인하고, 오인의 체계 내에서 인식행위가 이루어진다. 모든 인식이 행위자가 속해 있는 장의 상태 그리고 그가 보유한 자본과 아비투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상징폭력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한 끊이지 않는 체계이다. 왜냐하면,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그러한 공모와 합의를 통해 정당화시킨 상징체계의 틀 내에서 사유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전략마저 도출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디외에게는 오인과 인식의 구별이 명확화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오인과 인식의 구별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정통 상징자본들에 대항하는 이단적인 상징의 출현은 설명이 불가능해진다.결국 부르디외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인과 인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계가 상상과 분해 불가능하고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상상이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상상이 인식이 아닌 것처럼 인식은 결코 단 하나의 인식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의 지배 아래서 인지하는, 즉 살아가는, 그대로의 직접적인 본, 상징자본)은 상대적인 자율성이 아닌, 모두에 물질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부르디외는 주장하는데,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라는 각각의 층위(instance)는 상대적인 독자성을 전제로 전체의 구조 속에 분절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복합적으로-구조적으로-불균등하게 발전하고 결정된다.부르디외의 설명 중에 자본의 ‘전환전략’이라는 것이 있는데, 각각의 독자적인 자본들은 다른 자본의 형태로 전환(자본a → 자본b, c, d)하여 상징권력을 위해 복무하려 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상징자본”이 다른 세 자본의 수준과 배열에 있어서 차별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는데, 그것이 다른 자본들의 불평등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한편, 부르디외는 자본과 장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경제 결정론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장들이 고유한 논리와 위계를 지니고 있는 반면에, 자본의 종류들 간에 형성된 위계와 서로 다른 자산들 간의 통계적 관계는 경제적 장이 다른 장들에게 그 구조를 부과하는 경향이 있다.”), 또는 “사회공간은 다차원적 공간이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들의 열려진 집합이다. 이 장들은 그들의 기능 작용과 변형에 있어서 다소 강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경제적 생산의 장에 종속 된다.”)고 직접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경제적 희소 자본의 점유 투쟁만이 아닌 상징적 소유권 투쟁의 측면을 강조한다로 대표되는 그의 기본 논리가 범한 오류라 할 수 있다.‘사회 공간’과 ‘전략’부르디외는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의 논리 속에서 구조화되는 구조의 측면에 관련된 설명만을 하는 듯이 보이다가도, 그에 대한 자신의 전략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그것은 그가 ‘구조화하는 구조’라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간에, 그의 전략은 다분히 상징권력을 벗어나는 데에 집중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오인에 기초한 상징을 부과하는 권력이 해체되는 것은 그문화적 조건을 전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p.219). 정당성 문제는 문제제기 가능성으로부터 또한 일상적 질서를 당연시하는 억견과의 단절로부터 제기된다(p.305).”그의 전략은 다분히 대항-상징의 틀에서 논의되고 있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을 독자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상징자본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부르디외는 여타의 자본을 둘러싼 투쟁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그의 상징자본-환원론에서 기인한 것 아니면 다른 자본과 관련된 투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중간에 지식의 한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제적-문화적 조건’을 전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징자본 내에서의 투쟁을 위한 기초이지 그것 자체로는 마치 투쟁의 핵심을 이룰 수 없는 듯이 비치기까지 한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데, ‘이론주의’라는 비판의 멍에를 부르디외도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적 토대를 둘러싼 현실적인 투쟁과 분리 가능한 상징투쟁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앞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부르디외가 오인과 인식에 대한 애매모호함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론적異論的 담론의 생성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본래부터 자율성을 가진 결정에서 벗어난 순수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라고 이에 대해 답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개별적인 의식의 전환으로 전체의 장이, 갖가지 고정된 제도화 의례들이, 그것에서 파생되는 각종 구별 지음과 나에게 또 다시 체화되는 아비투스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적 낙관주의에 불과하다. 자본이, 그리고 장이 끊임없는 상징적, 물적 투쟁의 공간이자 세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의식의 전환에 더해 물적 토대에서의 지원이 필요하며,
    사회과학| 2007.06.02| 6페이지| 1,500원| 조회(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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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벨바그, 누보시네마
    누벨바그 (Nouvelle Vague)? 1957년경부터 프랑스 영화계에 일어난 새로운 물결? 영어로는 'New Wave'로 번역? 앙드레 바쟁이 창간한 프랑스의 비평지 '까이에 뒤 시네마'를 위주로 활동하던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쟈끄 리베르 등이 '영화 비평의 최고의 형태'로서 영화를 직접 만들기에 이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카메라가 비추는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담으며, 종래 허구적이고 과장된 형식을 탈피하여 생생한 영상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악, 위선, 모순 등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시네마 베리테'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누벨바그의 기본태도였다. 이들은 전통을 거부하며,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논리나 질서가 부재하는 세계에서의 존재를 그리며, 형식면에서는 이야기 구조의 느슨함과 개방성을 추구하여 영화제작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들 간에 뚜렷한 미학적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몇 가지 생각을 공유한다.1) 작가주의 이론 - '영화에서도 만든 이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2) 다양하고 자유로운 영화 기법 - '영화의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들은 줄거리보다 표현에 중점을 두고 현실과 카메라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중시하였다. 예컨대 즉흥연출, 장면의 비약적 전개, 완결되지 않은 스토리, 영상의 감각적 표현 등을 통해 종래의 영화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칠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카메라 워킹과 편집을 포함하여 사실주의적 또는 표현주의적인 기교들이 씬(scene)의 극적 요구에 따라 사용되는 등 실존주의 철학에 근거한 사상적 배경과 프랑스 문학의 특성인 이야기 서술의 개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누벨바그'는 장 뤽 고다르의 나 프랑수아 트뤼포의 , 알랭 레네의 등의 대표작이 있다. 누벨바그란 사조는 2~3년 후 자연 도태되었으나 세계 영화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험프리 보가트를 흉내 내길 좋아하는 주인공 미셸(장 폴 벨몽도)은 별 다른 죄의식 없이 자동차를 훔치고, 경찰을 쏜 뒤 도망 다니는 빈털털이 악한이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그의 미국 여자친구인 파트리샤(진 세버그)와 함께 그들은 경찰들을 따돌리며 도망 다니면서도 사랑을 나누며,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기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차를 훔치며 시간을 보낸다. 경찰의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자 파트리샤는 경찰에 미셸을 고발하고 미셸은 거리에서 경찰의 총을 맞는다.점프 컷(jump cut)과 들고 찍기, 세트에 제한받지 않는 야외촬영 등의 영화언어의 쇄신과 브레히트 소외효과의 영화적 응용으로 관습적 서사구조의 파괴, 그리고 그 유명한 누벨바그의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로 세계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영화의 ABC도 모르는 철부지 평론가가 저지른 장난'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점프 컷(jump cut)등의 새로운 영화언어의 사용이라는 측면만이 과대 포장되어 우리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미덕은 프랑스의 1950년대를 특징지었던 실존적 불안과 권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의식과, 그 이전의 주류영화로부터 소외되었던 할리우드 B급영화에 경의를 바친 아웃사이더 정신이다.(고다르는 이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소규모 상업영화를 제작하던 Monigram 영화사에 바치고 있다.) 고다르의 영화 중 가장 '관습적인(?)' 이 영화는 그나마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밀고자로 잠시 얼굴을 내비치는 이가 바로 장 뤽 고다르이다.누보 시네마2차대전 직후 반(反)파쇼 인민전선의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의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제작된 영화들. 레지스탕스의 저항정신, 전후의 폐허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애환을 주로 다뤘다. 이탈리아의 , 프랑스의 , 오스트리아의 , 영국의 , 미국의 , 일본의 등이 1940~50년대 초반의 새로운 시네마 부류에 속한다. 네오리얼리즘의 붐이 지나고 다시 프랑스에서 꽃피운 것이 누벨바그 영화. 아메리칸 뉴시네마도 넓은 의미에서 이 부류에 속한다.
    예체능| 2007.06.02| 4페이지| 1,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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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국가로의 이행에 관한 토론
    글로벌 국가로의 이행에 관한 토론사회자 : 세계는 전화, 텔레비전, 컴퓨터로 대표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글로벌 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는 문화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궁극적인 민주주의와 정보 평등의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지금만큼 폭력, 불평등, 차별, 기아가 난무하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세태에 의문을 품고 토론을 개최하려 합니다. 과연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이른바 지구촌으로 일컬어지는 글로벌한 세계를 추동하는 것일까요? 한편, 그것이 맞다 해도 그렇게 만들어진 지구촌이 정말 낙관적인 이상향인 것일까요? 거기서 더 나아가 지금처럼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요? 이런 것들에 대하여 의견을 나눠볼 오늘 이 대담에는 지구촌 개념의 주창자인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학자 마셜 맥루한과 그의 비판가로 유명한 미국의 생태학자 제리 맨더가 열띤 토론을 펼칠 예정이고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도 보조적으로 참여합니다.맨더 :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쇄술 이전의 청각?구어 문화를 살던 통합적 인간integral man의 완전성the wholeness에 대한 맥루한의 천진스런 신념이다. 아는 게 병이라 하니, 모르는 게 많았던 예전 사람들이 현대인들에 비해 더 행복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더 온전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전기 통신이 인간을 온전한 인간(全人)으로 복귀시킨다는 생각 역시 인간 심리 작용과 그것의 주도권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데리다 : 나는 언어, 이성, 논리 등을 통해 모든 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서구고유의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언어를 갖고 세계를 인식하는 형이상학 본래의 동기를 폭로해서 그 기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 본래의 동기를 폭로한다는 점에서는 니체, 들뢰즈의 계보가 형이상학의 숨겨진 동기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있다는 표현으로 그것을 시도했다. 이 `전략'은 말하자면 형이상학 외부로 내부의 모순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오히려 스스로 형이상학 내부에 들어가 그것에 따르면서 그 내부에서 형이상학이 내세우는 문제설정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철학을 형이상학이라는 건물의 `탈 구축'(재편성 해체)이라고 하는 것이다. `탈 구축'은 무엇보다도 근원관념에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서구의 `세계 관념'을 일단 백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인 것이다.하버마스 : 하지만 나는 사회가 개개인으로 해체되며 권력과 개인이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고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반대한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의사소통 과정에서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가 형성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적 실천을 통해서 인간 해방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러한 문제점들의 해결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맨더 : 이제부터 핵심으로 들어가자. TV는 현 세계에 청?촉각적 공간을 만들고 있는가? 그보다도 TV는 알파벳과 인쇄술이 만들어놓은 조각 난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복귀시키고 있는가? 미디어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말은 당신의 예언과 정반대의 현상들이다. 당신도 어느 대담에서 TV의 병폐를 인정한 적이 있다. TV는 인간 담론을 조각내고 있고, 인간 체험을 표피화, 진부화 시키고 있다. 소위 사운드바이트sound-bites라는 것이 조각난 담론의 예가 된다. 인쇄술은 교양인을 생산했지만, TV는 교양인을 탈교양화 시키고 있다. TV는 당신의 조각 난 인간을 더욱 조각내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의 상황은 어떤가? 요즘 십대 학생들이 애용하는 Chat Gate라는 인터넷에서는 서로 온통 거짓말들만 하고 있다고 한다. TV와 컴퓨터 세계 안에서 전인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맥루한 : 서기 1,500년경부터 1,900년까지 계속된 기계화된 프린트 시대는 전신(電信)의 발명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됐다. 마르코니의 전신은 구텐베르크의 은하를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는 전기(電氣) 미디어의 시대이다. 전기 미디어는 전신, 전화, 영화, 라디오, TV, 컴퓨터 등을 망라한다. 전기 테크놀로지는 음성 알파벳이나 프린트와는 정반대로 작용한다. 시각 공간을 일으켰던 음성 알파벳과 프린트는 배타적exclusive 매체로서 외파적explosive 효과를 가져왔다. 즉, 조각 난 사람들, 사회 계층들, 분업들, 전문화 등을 일으켰다. 이와는 반대로, 전기 테크놀로지들은 수용적inclusive 매체로서 내파적implosive 효과를 일으킨다. 이 새로운 전기 테크놀로지는 내파 효과를 일으켜, 이성적이고 시각적이며 조각 난 서구인들을 퇴행시켜서 먼 옛날의 부족민으로 재 부족화 시킨다.맨더 : 그렇다면 지구촌이 과연 TV와 컴퓨터의 산물인가? 지구촌의 시작을 따지자면, 그것은 유럽 제국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유럽 제국주의는 〈해가 지는 법이 없는 대영 제국〉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영국은 해저 케이블로 전 세계를 템즈 강에 연결시키고 있었고, 이 통신망을 통하여 세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이 이러한 유럽 제국주의의 상권 독점을 깨뜨리기 위해서 개발한 것이 인공위성 통신망이다. 이 인공위성 통신망에 TV망, 전화망, 컴퓨터 망이 연결됨으로써, 세계는 그야말로 전자 코팅이 된 것이나 다름없어지고 있다. 인터넷으로 시작되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범세계적 확장은 과연 세계를 지구촌화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지구촌은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지 않은가? 전기?전자 테크놀로지는 그 이데올로기의 실천에 복무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에 편승해서, 영어(英語)는 사이버스페이스의 확장과 더불어 인터내셔널리즘의 모국어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맥루한 : 전기는 통합적이고 수용적인 까닭에 프린트 테크놀로지가 낳은 개인주의적이고 조각 난 교양인들을 참가자들로 만들어, 모든 일에 깊이 참여하는 세계의 부족the world tribe을 일으킨다. 인간은 이러한 전기 환경과 문화 안에서 전 인류를 자신 안에 품게 된다. 또한 전기의 순시성과 동시성은 시공의 제약을 영화(零化)시켜 버리므로, 세계 곳곳을 한꺼번에 연결하여 지구촌으로 만든다. 전기 미디어 중에서 TV는 잊혀진 옛날의 청?촉각 문화를 되살려내고, 세계를 지구촌으로 만드는 데 주역을 담당 한다.맨더 : 지구촌으로 상징화된 새 사회는 과연 이상적 통합 세계인가? 시스 헤임링크Cees Hamelink같은 학자들이 적절히 지적한 대로, 서구 선진 제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지구촌을 통째로 수퍼마켓화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지구촌이란 자본주의를 교의로 삼고, 끝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장바닥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는 가운데, 정치?경제?문화의 식민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지구촌이다. 거기에는 이상향의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맥루한 : 전혀 새로운 사회가 오고 있다. 그것은 통합된 지구촌 공동체이다. 그것은 모자이크 세계이다. 그것은 신부족주의neo-tribalism가 전기라는 테크놀로지의 기(氣)를 받고 일어나는 곳이다. 거기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공명하는 옛날 부족 사회의 공명함echo chamber과 같아서, 사람들은 전반적 인식을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지난날의 유물인 낡은 가치들, 조건 반응이나 태도라는 개념, 관점points of view 같은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지구촌이라는 에코 챔버 안에서 사람들은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사태를 다 알게 된다.하버마스 : 게다가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인해 등장한 “가상공동체”의 형성은 사회구성원간의 공론형성의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새로운 담론체계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공론장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 및 도구적 합리성의 폐단에 대한 비판이론가들의 회의론을 극복하고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간사회의 계몽 가능성과 합리적 사회건설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정보사회를 통한 글로벌 사회로의 진화는 민주주의 측면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인터넷이라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정보사회에서의 새로운 담론체계의 등장이라는 시대적 상황 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준다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 2007.06.02| 3페이지| 1,000원| 조회(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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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를 잃는 것은 존재를 잃는 것 - 영화 마리포사를 보고
    감상문을 쓸 작품으로 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처음에는 매우 단순했다. 첫째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때문에 스페인 영화에 꽤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 의 감독인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이 영화에선 특이하게도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뻔한 성장영화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을 거의 빗나가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기 위해 관련된 역사들을 살펴보고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평소보다 더 깊게 생각해봄으로써 내가 예상했던 것들 이상을 얻게 될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개봉 당시 ‘아름답고 인간적이며, 친숙하고 시적이며, 마지막에는 머리끝이 쭈삣거린다.’[ABC방송], ‘온 몸을 감싸는 정치적 폭풍을 통해 바라보는 넓은 세계를 스케치한 풍경화.’[NEW YORK TIMES], 'San Sebastian 영화제 최고, 아니 1999년 최고의 작품.'[GUIA DEL OCIO] 등과 같은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선생으로 분한 배우 페르난도 페르난 고메즈에게는 ‘인간 존엄함의 아름다운 연기.’[ABC방송]와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영화는 1936년, 스페인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인 가르시아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다. 여덟 살 짜리 꼬마 몬초(마누엘 로자노)가 학교에 입학해 돈 그레고리오(페르난도 페르난 고메즈)라는 자상하고 따뜻한 인품을 지닌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대지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 배워 나간다. 이 당시 스페인 정국은 공화주의 정부와 정부에 반기를 든 극우 보수 세력이 팽팽히 맞서고 있던 시대였다. 사람들을 곧 내전이 일어날 것이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불안하던 정국은 결국 스페인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들의 반란 때문에 평화롭던 가르시아 사람들도 갑자기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공화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든가, 극우세력에게 숙청당하든가 어느 한 쪽을 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졌고 몬초의 엄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공화주의자인 남편과 아이들에게 공화주의를 철저히 부정하라고 몇 번 씩 다짐시킨다. 공화주의자 편에 섰던 선생님은 `숙청'의 대상이 되고,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눴던 몬초는 가족으로부터 선생님을 비난하라는 재촉에 시달린다. 어제까지 모두가 그렇게 존경하던 그레고리오 선생은 만인의 적이 되어버렸고 공화주의자들이 파시스트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날 몬초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레고리오 선생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이 작품은 스페인의 혁명 쿠테타 이전의 공화정 시대의 낭만과 이후의 이념적 혼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부터 39년 3월까지 무려 3년 동안 스페인에서 군부, 우익 등 여러 세력이 인민전선정부에 대해 일으킨 내전이다. 스페인 내의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싸움과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대결구도로 바뀌는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의 성격이 강한 전쟁이다.가 다루는 내전 발발 직전, 아직 공화파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는 매우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웠던 시절로 주인공 소년 몬초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다. 어수선하고 불안한 한 시기를 통과하는 아이의 눈을 빌려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성장영화들의 예는 무수히 많다. 는 그러한 성장영화들이 종종 취하곤 하는 소재들을 거의 고스란히 끌어오고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선생님의 사상이 영화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를, 전쟁 속의 한 소년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를 연상시킬 수 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배경으로 성장영화의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스페인 판 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는 “자유를 잃는 것은 존재의 이유를 잃는 것”이라는 소박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극 중 가장 큰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는 ‘돈 그레고리오’ 선생. 그는 몬초에게 자유와 사랑, 우정,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는 '나비의 혀'라는 뜻으로 꽃의 달콤함을 빨아들이고 꽃가루를 퍼뜨려주는 역할을 하는 나비를 통해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그레고리오 선생의 곤충 교육 부분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람의 혀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주변의 상황에 맞게 얼마든지 번복할 수 있다. 공화파를 지지하는 그레고리오 선생님을 따르던 마을 사람들의 혀가 자유가 그립다고 내 뱉었던 그때의 자신들의 혀를 쉽게 부정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선생님만은 자유를 향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아마 그는 진정으로 나비의 혀를 가지고 있었나 보다. 즉, 나비의 혀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를 살펴보아도 나비는 생명을 뜻하고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나온다. 이런 조그마한 나비도 혀가 있고 그것으로 꿀을 몸 속 깊숙이 빨아들인다. 인간이 자유를 찾아 열망하는 힘이 그러하지 않을까한다. 그리고 자유와 권리는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상에서 그레고리오 선생님은 희생물이 되었지만 그의 행동은 세상을 바꿔 가는 당당한 자유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자유에 대한 설파는 중국인 여인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헤어져야만 하는 몬초의 형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영화상에서 섹소폰을 연주하는 악사로 등장한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섹소폰 소리에는 사랑과 자유가 느껴진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이룰 수 없는 그들이지만, 섹소폰이 연주될 때,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지옥, 공화당, 국가주의, 무신론자, 살인자, 빨갱이라는 말은 모두 이 섹소폰 소리와 동시에 모두 묻혀버린다. 여기에서 왜 하필 중국 여인인가 하는 의문도 드는데, 이는 중국이 그 당시에 자유가 없는 나라도 비춰진 점을 감독은 영화에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자유의 의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마지막은 그레고리오 선생님이 몬초에게 준 ‘보물섬’이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그레고리오의 독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의 보물이란 자유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보물섬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신을 갖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감독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신뢰하고 대립과 증오 보다는 화해와 사랑을 택하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
    예체능| 2007.06.02| 3페이지| 1,000원| 조회(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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