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한국교육 변천의 사회적 배경우리의 교육은 처음부터 현재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세월과 함께 변하여, 오늘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제도는 세계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학교 본위의 공교육제도)이다. 각 시대마다 교육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면서, 동시에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가해온 제약에 대응하면서 그 모습을 만들어 간다. 이 장에서는 학교제도의 발전과 아울러 학교제도 개혁론을 사회문화적 맥락에 비추어 살펴보고자 한다.Ⅰ. 근대학교 제도의 도입1. 개화기 이전의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도학정신이 정신적인 지표와 교육이념의 중추를 이루었다. 이에 기초한 유교교육은 일반 서민을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한 것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교육내용에 있어서 경전 중심의 인문교육을 숭상하고 실업교육을 천시하여, 교육의 대상과 내용에 배타성이 깊이 내재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유학교육은 그 자체가 생활 규범화되어 전 국민에게 도덕적 윤리관을 심어 주었으며, 유학자들의 깊이 있는 학문체계는 한국 교육사상 및 정신문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으로 실학사상이 대두되어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의한 새로운 학풍이 등장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근거로 한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성균관(成均館)이 있어 최고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교육기관으로 중앙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으며, 사립교육기관으로 서원(書院)과 초등사설교육기관인 서당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한 교육행정은 육조) 중 예조가 주관했으며,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감독하기 위해 과 등 각종 교육법규를 제정했다. 성균관에서는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육내용은 경술(經術)과 문예를 주로 하여 강독?제술(製述)?서법으로 나눈다. 향교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지방재정에 의하여 운영되던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부?목?군?현에 각각 향교를 하나씩 설립하게 되었다. 향교의 기능은력, 유학 일변도로부터 서구의 새로운 과학주의를 받아들이려는 노력,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한반도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투쟁하는 열강의 무력한 희생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필사적인 국력배양의 요청,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 교육의 개혁을 조야(朝野)가 한마음으로 추진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교육변혁은 사회변혁의 한 부분이지만, 사회변혁을 촉진시키고 때로는 선도하는 적극적 부분인 것이다.Ⅱ . 일제 (日帝) 강점기한국에서의 일제 식민지주의 교육의 발전단계는 관점에 따라 여러 단계로 구분되고 각 시기에 명칭도 각기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일제의 교육침략 전개과정과 우리의 교육적 저항에 근거해 다음과 같은 4단계로 구분지어 보도록 한다.1. 일제 식민지주의 교육 준비기 (1910 이전)이 시기는 1904년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본의 국가권력이 한국인의 교육에 행정적으로 직접 관여한 때부터 1910년, 「한일합방조약」의 체결로 한국이 일본에 강점될 때까지의 기간, 소위 보호정치기를 말한다.(1) 일제 식민지 교육침략의 전개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침략긍정론을 배경으로 일본문물이 한국을 근대화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일본문물의 이입을 한국교육의 과제 」로 삼았다. 이때의 식민지 교육정책은 「문명적 교육」이었다.「교육은 한국신민을 일본에 감화시킬 것들 주안으로 한다.」고 하여, 동화교육을 한국인교육의 기본노선으로 삼을 것을 결정했다. 곧 위에서 언급한 문명적 교육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문명인 일본이 구문명인 한국을 지도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속셈이 있었다.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았던 1890년대에는 자주성과 민족계몽을 지향하여 무수한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모두 민족독립의 사상을 고취하는 학교들이었으므로 일본의 억압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는 없었으므로, 교육적 침략의 정당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쓰인 것이 문명적 교육이다.① 근대화의 요결인 실학사상으로부터 과학학생 차별대우 반대, 한일학생간의 교육적 차별 반대, 한국인 교사 채용, 교육제도의 개정 같은 것들이었는데, 전차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어 일본어강요반대, 일본인교사 배척, 한국어와 한국역사 교수, 신사참배 반대 등의 조건을 내세우게 되고, 드디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조건을 내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항일동맹휴교도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4. 황민화 교육 정책기(1938~1945)1938년 3차 조선교육령의 개정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할 때까지의 기간.(1) 격화된 황민교육이 시기는 동화정책으로 일관된 일제식민지교육정책의 전기간 중특히 황국신민화교육을 강요한 기간이라 하여 황민화교육추진기라 부르기도 한다.① 교육정책 및 교육목적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에 따라 완전한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조성, 대륙경영의 병점기지로의 사명을 다함과 동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서 이상과 같은 정신을 배양한다.ㄱ. 국체명징(國體明徵)ㄴ. 내선일체(內鮮一體)ㄷ. 인고단련(忍苦緞鍊)② 교육실천 : 학교에서는 물론 가정에서까지 일본어 사용을 강요 했으며, 국어를 조선 어라 했던 그들은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하여 가르치지 않다가 1941년 국민교육령 에 따라 교과과정을 완전히 없앴다.ㄱ.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ㄴ. 수신; 일본에의 복종 주입, 민족정기 배제ㄷ. 역사; 고대역사 정치적으로 날조, 내선일체의 역사적 필연성, 동근동조론,황국사관, 신풍사관ㄹ. 지리;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로 침략주의 은폐, 지리결정론적 입장에서 편협한성향 가르침ㅁ. 각종행사;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체조 실시(2) 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정책① 사학의 수난② 전문학교는 군사훈련소, 요원양성소로 전환③ 전통 있는 사학의 교가나 교표까지 바꾸게 강요④ 모든 교육기관에서 한글을 일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함※ 교육 독립투쟁우리의 조상들은 식민지치하에서 총독부의 교육 정책에 결코 수동적으로 지배만 당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저 표면적 제도와 방법의 도입은 단순한 모방의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미군정기는 교육의 민주화보다는 교육의 관료 지배체제와 그에 따른 교육의 정치적 종속성을 심화시켰고 이러한 교육구조는 지금가지 계속되고 있다.② 미국유학자들의 교육주도-변화폭의 제한미국은 유학의 독점지역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다른 나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유학하였다. 이 점은 한국교육계가 한국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의 교육을 모방하거나 참조로 이용할 때에 선택의 폭을 제한하는 원인이 되었다.③ 교육과정의 편협성일제교육을 제거하는 데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교육과정을 모색할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④ 새교육 운동당시 학생이나 교사 모두가 일제시대의 교육으로 인해 획일적 사고에 너무나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⑤ 학제일반적으로 대도시나 부유한 지역에서는 6-3-3제를 실시하는 경향이 있고, 중소도시나 빈곤지역에서는 8-4제 또는 6-6제를 실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등학교를 둘로 구분하는 것은(하급중등학교와 상급중등학교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지역에서는 힘겨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한국적 현실에서 6-3-3제를 무조건 받아들였다는 것은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미군정기시대는 현대 한국교육의 기틀이 만들어졌던 만큼 한국 교육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 미군정 당국은 이 땅에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한다는 방침에 따라 한국인 인사들의 힘을 빌어 일제시대의 교육제도를 혁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제도 개혁을 뒷받침할 만한 물질적인 투자가 따르지 않아 많은 문제들을 초래하였다. 특히 대책 없는 의무교육제 실시는 과밀학급 현상을 낳았으며, 갑자기 졸업생들이 늘어나게 됨으로써 취업난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취업난은 학력에 대한 가수요를 부채질하였고 이로 인해 학력 인플레이 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치열한 입시 경쟁이 초래하였다. 한편 민주 교육의 상징으로서 아동중심 교육을 표방한 새교감당하기 위한 교육정책과 교육의 양적 팽창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 문제들, 즉 과밀학급화, 학교규모의 과대화, 교원부족과 교육여건의 악화, 중?고등학교 입시과열로 인한 부작용 등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1969, 7.15 어린이 해방) ? 교원양성교육체제의 정비? 지방대학의 확충, 예비고사제도 등 입시제도 개혁? 방송통신교육제도의 확립 등 ? 고등학교 평준화 시책(1973)이 시기의 교육정책은 국가의 경제발전에 따른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교육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큰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산업발전의 요구에 따른 인력양성의 양적 공급에 치중하다보니 교육의 질이 등한시되었고, 교육의 양적 팽창에 따라 발생된 교육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5. 제4공화국의 교육정책(1972 ~ 1980)제4공화국은 소위 “유신헌법”을 토대로 강압적 통치시기였다. 이 기간 교육정책 중 주목할 만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1973년 발표된 고교평준화 정책은 입시로 인한 부작용을 완화 시킨 것은 사실이나결국 중학교 교육도 대학입시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획기적인 성과는 기대할수 없었다? 실험대학제도 도입1973년 실험대학 정책은 대학 자체적으로 교육의 질을 자율적으로 관리하게 한다는것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규격화된 실험대학의 숫자가 증가해 오히려 대학의획일화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학교수 재임용제 실시1975년 대학교수 재임용제도는 대학의 질적 향상과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었으나,민주화활동에 적극적인 교수들 또는 사립대학의 부정?비리를 폭로한 교수들의 추방에악용되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교육 악법으로 지적되고 있다.6. 제5공화국의 교육정책(1980 ~ 1988)교육의 양적 성장에 부응하는 질적 발전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추구하는 양태를 보여줌. 정권 출범과 더불어 ‘7. 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함으로써 과외금지를 통한 고교교육정상화를 꾀하는 등 교육체제 정비를 위 책
3장 교육제도의 변화들어가는 말현대 공교육제도는 최근에 나타난 매우 독특한 현상으로 2000년 전 까지만 해도 오늘날처 럼 교육의 의무화나 국가 운영 하의 교육통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 때에도 사회적 교육의 기능, 형식 ,국민생활에 주는 의미가 지금과는 다른 교육제도와 활동이 있었다. 이처럼 교 육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각 시대마다 적합한 교육을 형성 하지만 때로는 사회체제와 교 육사이에 모순이 존재하여 사회나 교육의 변화를 가져온다. 사회와 교육은 상호간의 동 (動)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 장의 목적은 교육은 항상 변화과정에 있고, 교육과 사회는 매 우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다.1.공교육제도의 등장과 그 특징근대국가와 공교육제도의 등장그리스?로마중세르네상스종교개혁실학주의계몽주의국가주의현대B.C753~476 395년 ~ 14~16C 16C 17C 18C 19C 20C~15세기까지(약 천년) ( ) ( ) ( )?공교육제도의 형성과정1789년 프랑스 혁명→근대국가 형성→교회와 세속 정부간의 쟁탈전→근대국가가 교육장악→산업사회의 요구 결합1)근대국가 이전 교육‘교육권 신수설‘의 지배시대 : 종교가 교육을 지배사람들의 임무: 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 숭배적 학습 중시: 위로부터의 가르침사(私)교육사상이 지배적: 교육은 부모의 결정사항교육형태-가정교사: 귀족계급, 부유층 / 교회학교: 신앙교육과 빈민층 자녀의 교육2)절대주의의 등장과 국가의 개입(16~17C)절대주의[16~17세기]: 종교, 문화, 교육 등을 국가권력의 지배 하에 두고 통제국가 교육: 국가를 통한 교육이 아닌. 기회의 결정, 방임결정, 교육의 방향과 내용의 결정 을 국가가 함절대주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하여 중세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16세기부터 형성되었 다. 중세의 영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적, 봉건적 정치형태로부터 근대의 민족적, 시민 적 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절대군주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형태를 말함. 여전 히 중세 봉건제도의 잔재가 한 국가보호와 발전을 꾀하고자 하였다. 당시 위정자와 지도자들은 문맹의 노동자가 일할 때보다 교육을 받은 노동자에게서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게 나타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19세기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나타난 의무교육제도: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모두의 이익을 고려한 것으로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문맹의 노동자보다 교육을 받은 노동자가 좋은 노동 의 질과 훨씬 더 높은 능률을 올려 자본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문맹의 노동자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당시에 학교교육의 의무 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나라별 공교육등장프랑스: 국가통제 교육체제가 자리 굳힘나폴레옹 학제로 근대교육제도를 확립, 국가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민 교육제도 수립. 프랑스학제의 기초이자 근대국가에 있어서 국가에 의한 통일된 학교교육제도의 시초. 1882년 개정된 교육법으로 처음 의무교육 실시, 처음으로 공립 의무 무상의 보통교육제도 확립영국: 교회와 세속 국가 간의 균형유지와 국민교육체제 형성私學으로 출발하여 늦게 국민교육제도가 확립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의 복지개념과 대조를 이뤄 프랑스는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모든 아동에 대한 국가교육제 도를 수립한 데 비해, 영국은 가난한 사람과 교육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선적 수단으 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방식을 택하였다.미국: 각 주의 책임 하에 공교육체제 발전1642년 메사추세츠주에서 일찍부터 공교육체제를 정비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설립, 시의 재정으로 학교를 운영 의무교육령을 발표하여 의무교육의 시도를 하여, 19C 중엽에 호레 이스 만, 헨리 버나드 등에 의해 의무교육제도가 수립되었다.독일: 통일된 독일의 융성과 발전을 위한 국민교육제도 구축[피히테(Fichte)"독일국민에게 고함?]-1807년~1808년, 베를린 학사원에서의 강연집.국가를 정신생활의 보호자로서 보고, 이러한 조국을 섬기는 인간의 교육은 국가의 관심사 가 아닐 수 없다고 함. 당시 나폴레옹군의 점령 하에 있었던나, 선발기능을 담당하고 있어서 통일된 지식과 규범을 학습을 확인한다. 시험은 통일적 보편 교육의 확인 장치인 셈이다. 근대적 학교 제도 에 있어서 시험은 관료제도의 전문 관료를 선발하는 기능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 일찍이 맑스 베버가 지적 하였듯이 사회적 지위 분배의 기제가 되었다.*맑스 베버 :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계급은 물질세계를 지배할 뿐 아니라 사회적, 정신 적 생활도 지배 받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을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②학력: 산업화로 인한 경제 산업구조의 변화와 근대 시민 사회등장은 오랜 신분제도를 무 너 트렸다.) 학력은 과거의 신분제도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였듯이 그 기능을 물려 받 았다. 학교 교육의 전 정이 사회적 지위 분배를 위한 기제로 기능하게 된다. 따라서 상 급 교육의 학력은 상위의 지위를 보장받는 증명이 되므로 모든 사람이 학력 경쟁에 뛰어 든다. (대학 졸업장의 여부에 따라 사회적 지위의 상하가 결정 되고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는 초, 중, 고등학교의 졸업장이 있어야함)*기능주의적 주장에서는 학교교육은 경쟁적 상승이동의 통로라고 하였다. 갈등 주의론 자 들은 교육은 계층재생산의 매개변수라고 하였다.)6)학력 경쟁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치열한 형태로 학력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학교 교육을 의무화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려들게 된다. 교육을 받으므로 내야하는 적지 않은 돈을 스스로 부담하는 수익자 부담원칙 제도 하에서 취학률은 높아지고(수익자 부담원칙은 교육 의 평등을 포기한 것이다.)) 획일적인 교육 내용도 저항 없이 수용 된다. 지위 경쟁의 장 으로 공교육체제가 확립되면 교육의 자유와 학습의 자유는 더욱 축소된다. 어떻게 해서든 공교육체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지위 획득에 도움이 되지 않은 교육은 현실적으로 의미 를 잃게 되며 성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만 강조 된다. 입시 준비를 위한 ‘과외’가 대표 적이다. (사교육은 수험생들의 불안한 마음에 기대어 새로운관과, 학문과 실제 능력 에서 균형잡힌 평민, 하나님과 이웃, 세계와 지역,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것이다. 유기농산물 생산과 가공 복지시설 등 에서의 실습, 노동 등 현장실습과 환경교육등이 이루어지고 있다)㉣의미: 학교교육의 한계에 직면하여 새로운 대안적 교육을 모색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학교교육의 부분적 개혁보다는 훨씬 더 나아간 것으로 보여진다.*초기에는 정규학교로서의 법적인 인정이 없었으나 1998년부터 일정요건 갖출시 정규학교로 인정하는 추세이며 이는 공교육제도 안으로 비정형적 교육과정을 끌어 들이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개정된 교육법 제 69조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 적인 삶의 전수를 교육목표로 학습자중심의 비정형적 교육과정과 다양한 교육방식을 추구하는 학 교”로 대안학교 정의하고 있음)②가정에서의 학교교육 운동㉠등장: 종교적 이유로 가정에서 교육해야 할 필요성 느낀 부모들이 주류가 되어 시작공교육제도, 취학의무를 수용하되 실제교육은 가정에서 부모가 담당,교육진행상황 검토, 학업성취수준 평가는 학교가 담당.㉡발달:-1980년대 교육운동, 사회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함-학교의 교과내용을 그대로 부모가 가르치던 방식에서-->학교교육과는 상관없 이 다양한 내용을 자유롭게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위주로 자유롭게 가 르치게 됨.-미국의 경우 재택학교 교육 운동에 대한 법적인 인정과 지지 획득하게 됨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재택학교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현재 전국에 100여 가정 정도가 가정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 다).*?*미국의 경우 몇 년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93년 부모가 유치원에서 대학까 지의 모든 교육과정을 집에서 가르치는 것이 합법화되었다).*?*현재 우리나라는 초등학교와 농촌의 중학교가 의무교육이다. 현행 교육법과 그 시행령에 따르면 의무교육을 거부할 경우 이에 대한 행정 조치로 과태료 를 물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아이들 대부분이 학교 장에게 전문가 소견서를 제출하고 서류상으개념사회교육이란 다른 법률에의 한 학교교육을 제외하고 국민의 평생교육을 위한 모든 형태 의 조직적인 교육활동으로 학교에서의 정규교육과정 이외의 과정이며 평생교육을 위한 하 나의 교육형태이고 학교교육 이외의 모든 조직적 교육활동으로 청소년과 성인이 정보, 지 식, 기능, 태도 등의 변화를 목적으로 일생동안 계속하는 자기교육으로서의 평생교육의 한 부분이다.)성인교육은 사회교육과 유사한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사회교육과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사회교육에서 소년을 제외한 청년이후의 사회교육을 성인교육이라 한다.)순환교육이란 OECD의 정의에 따르면, 산업사회의 생동적인 갱신을 위한 반복적 교육으 로서 성인들에게 수시로 적절한 시기를 택하여 계속적인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시작되어, 기업 내 또는 사내연수 등 직업훈련과 직업인에게 유급휴가를 주어 교육기관 또는 연구기관 등에 파견 교육케 하는 모든 형식의 교육프로그램을 말한다.)생애교육은 일본에서의 Lifelong Education의 해석으로 진로교육, 생애직업교육이라 하고 한국의 Career Education으로 평생 동안에 걸친 학교 및 학교 외에서의 직업교육이며 청 소년들의 직업선택을 위한 기초를 개선하여 주고, 직업상의 기능획득을 촉진시켜주며, 교 육을 그들에게 뜻있는 것이 되게 하면서 훈련기회의 폭을 넓혀준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 다.)평생교육이 학습자의 자발적인 학습의욕과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학습과 관련된 종합 적인 환경을 정비하는 활동이고 학습자의 학습활동에 필요한 제도, 조직, 시설, 설비를 정 비? 제공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면 교육의 중심을 학습자 자신에게 두고 학습자가 스스로 일생동안 지식, 기술, 태도를 개발하는 전 과정을 평생학습이라 구분정리 할 수 있다.)4. 필요성1) 학교본위의 교육제도로부터 탈피교육이 학교교육으로 제한되거나 왜곡됨으로 해서 교육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인류가 학 교라는 교육제도를 국가적인 체제로 구축한 이래 그 기능과 역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 로 성장하여 이제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그와 그녀 그리고 우리에 대하여]과목 :담당교수 : 교수님학과 :학번 :이름 :0. 나난 이 책을 예전부터 읽고 싶었고 이 책에 관한 명성을 많이 들어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여자친구랑 더 좋은 만남 더 뜻 깊은 교제를 하고 싶었고 그리고 그 기간도 오래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물론 지금 내 여자친구와 교제를 하면서 좋은 일들도 많지만 그 만큼 트러블도 많다. 이를 처음에는 5년이라는 나이차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성이 다르기에 사고방식, 행동, 이해, 언어 등에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나이라는 것보다 이성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각부터 키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읽으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싸우는 상황을 이렇게 잘 알고 있고 내가 바라는 것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난 빨리 내 여자친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졌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된다.친구, 동료, 선?후배 등등.인간관계의 경험은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지속될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중요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은 가정이다. 또 이 가정을 이루는 가장 밑바탕은 부부관계이고 부부관계 이전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된다.1. 화성과 금성 그리고 저자이 책의 저자 존 그래이는 자기의 경험과 연구에 의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자기의 딸이 태어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아내가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출근을 해야 했고 아내는 마침 진통제가 다 떨어져 약이 필요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전화를 하는 대신 그의 동생에게 부탁을 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그가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내는 그에게 화를 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그의 아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당신이고 옆에 있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에게 남편이 가장 필요한 때가 이런 순간임을 알고 존 그래이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고 아내는 고맙 느끼고 방법을 알게 되자 그의 아내에게 의지가 되어 주는 일이 의외로 쉽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그는 내가 왜 이런걸 알지 못했을까? 누가 나에게 이런 걸 먼저 알려 주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느끼면서 그는 많은 연구를 했고 상담과 세미나를 통한 경험에서 이러한 책을 펴내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남녀를 화성과 금성이라는 다른 행성에서 온 다른 생명체라고 가정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남녀가 이해하고 해결하고 나가는 과정을 서술해 나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줄거리를 잡아보고 남녀의 차이를 이해하도록 해보겠다.2. 화성 남자, 금성 여자의 삶이 책은 남자는 화성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남녀는 서로 성, 문화, 언어, 등등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그럼 지금부터 화성인과 금성인과의 차이를 탐구해 보기로 하겠다.가. 이성적인 부분화성인은 금성인들의 상담을 신청해 오면 심각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하지만 금성인의 반응에 화성인들은 놀라게 되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금성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화성인들을 변화시키려 하고 충고 하려한다 하지만 화성인들은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무능력하다고 느낀다.이것은 결국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바라봐 주기를 서로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푸는 문제도 화성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조용히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것에 반해 금성인들은 그 문제를 남에게 이야기하고 그 문제에 대해 서로 위로해 주면서 그 문제를 잊는다. 그러나 여기도 충돌이 일어난다. 화성인들이 동굴에 들어갈 때 금성인 들은 자기가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화성인들은 더 동굴에서 나오기 힘들어한다. 화성인들은 또 어떤가! 금성인 들이 이야기하고 싶어 할 때 자기가 비난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방어 면서 내가 힘든 일이 있거나 기분상하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기대려고만 했다. 남자가 동굴에 들어가고 여자가 대화를 필요로 하는 이러한 문제를 한 번에 확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는 남녀의 이해를 통해 남자가 우울하고 문제가 있을 때는 여자가 믿어주는 마음으로 격려를 해주면 남자는 나중 동굴에서 나왔을 때 더 좋아진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여자 또한 대화가 필요한 시기에 남자가 꼭 문제를 인식하고 자기 때문에 배우자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말며 배우자 입장에서 그것을 그냥 들어주고 같은 감정으로 느껴주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 지를 느낄 수 있었다.화성인들은 상대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을 느낄 때 마음이 움직이고 금성인들은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면 의욕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것은 화성인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금성인은 화성인의 자상한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나 또한 이렇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과시하려 하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여자는 어떤 한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느낀 바로는 세심한 관심을 좋아하고 자기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는 한없이 주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결국 이것 또한 남녀는 서로 배우자에 관해 관심과 사랑으로 서로를 배려한다면 서로의 욕구를 충족 할 수 있고 좀 더 나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나. 언어적인 부분화성과 금성과는 언어도 다르다. 자기감정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금성인들은 마치 시인이 된 듯 각양각색의 과장과 은유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화성인들은 멍청하게 이러한 표현은 곳이 곳대로 받아들이고 잘못 해석해 오해를 하게 된다.남자는 직설적이고 여자는 감성적이다. 남자는 여자가 하는 말을 곳이 곳대로 이해하지 말고 그것을 자기에 말을 들어달라고 하는 표현으로 인식하면 맞을 것 같다. 내 생각엔 이러한 것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문제는 아니고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자를 향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 배려를 해 준다면 논쟁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화성인들이 문제가 생겨 말을 하지 않을 때 금성인들은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인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는 동굴로 들어가 버린다. 하지만 금성인은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까 하며 그를 자꾸 동굴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 하지만 동굴 밖으로 억지로 끌어내려 하면 동굴을 지키고 있는 용의 불에 다치고 만다. 여기서는 화성인이 말을 하지 않을 때는 그냥 그를 믿어주고 이해하고 그의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다른 것을 하도록 충고하고 있다.남자가 심각할 때 여자들은 관심과 대화를 하려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에게 있어서는 관심이 아니라 참견이 되고 대화가 아니라 짜증만 나게 할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나도 사람을 사귀면서 느낀 점이지만 여자는 위에서 말한 봐와 같이 무슨 일이 있거나 기분이 조금 나빠 말하는 않으면 나를 짜증나게 하는 발언들을 많이 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나 때문에 그러는 거냐?”는 둥 나를 가만 내 벼려 두지를 안았다. 그런 것을 볼 때 조금 일찍 결혼과 가정 수업을 들었다면 그러지 안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려면 여자는 남자를 자기 식대로 다루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이 문제 또한 서로 차이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화성인은 고무줄 같은 습성이 있다. 길게 늘어났다가 어느 정도 되면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금성인은 화성인이 멀어지면 불안함을 느끼고 자꾸 가까워 지려한다. 하지만 가까워지려 하면 할수록 화성인은 더욱더 돌아오지 않게 된다. 그런 고무줄 습성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냥 놓아두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온다. 금성인 또한 우물을 가지고 있다. 금성인은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면 무조건 적인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분이 바뀌면 사정없이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렇게 되면 화성인이 자때는 그저 금성인의 말을 들어주면서 밑바닥에 빨리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러한 상황이 있을 때는 논쟁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논쟁들은 우리가 상대방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려고 힘쓴다면 감정이 개입된 언쟁이나 입씨름은 피해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화성인과 금성인은 서로 점수를 주는데 그 채점 방식이 다르다. 금성인에게 있어 사랑의 선물이 크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선물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 가의 점수의 높고 낮음이 결정된 것이다. 화성인이 점수를 매기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자기가 일을 해 그녀가 기뻐한다면 자기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며 오히려 그녀에게 점수를 준다. 화성인에게 있어 주된 사랑의 원천은 그녀가 보여주는 애정 어린 반응이다.이건 내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는 모든 걸 해주고 싶고 그녀가 좋아하면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진다. 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어떤 일을 하자고 했을 때 그녀가 무조건 적으로 딸아 주었을 경우 그리고 그녀가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경우 그녀도 나랑 똑같은 만족을 얻었으리라 생각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내방식 대로 그녀에게 사랑을 준답시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 그녀의 욕구는 무시되고 그녀는 언젠가 내가 싫어지게 될 것이란 걸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 쪽에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남자는 여자가 요청을 하지 않으면 도움을 주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아주는 것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문제는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자는 여자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여자 또한 자기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해 오해를 없게 하는 것이 중요한 생각이 든다.다. 갈등을 풀고 관계유지 하기복잡한 감정을 전할 때는 편지를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상대방에게 자기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쓴
“칼의 노래”를 읽고[한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의 숭고함과 외로움, 인간미를 바라보며]과목 :담당교수 : 교수님학과 :학번 :이름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난 우선 이 책의 전개 방식에 처음 놀라게 되었다. 글의 전개는 1인칭 독백체를 이루고 있다. 보통의 소설은 2인칭이나 3인칭의 제 2자(얘기를 당사자에게 듣는 자) 혹은 제 3자(그들의 대화를 바라보거나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혹은 모두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루어지기에 현장감은 조금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칼의 노래”(이하 : 책)에서는 다른 책의 산만한 서술형식의 글이 아닌 본인이 최초 갖게 되는 마음속에 핵심적인 이순신 자신의 내면의 말로 이루어진 글이다. 나(이순신)로 그 상황에 직면하고 나(이순신)을서 그 생각을 하고 말하는 것이다. 화려함이 아닌 간결함 속에 오히려 그 상황의 생동감이 나로 하여금 그 자리에 서있게 하였다.그리고 또 다른 전개 방식으로는 보통의 위인전이나 역사를 다룬 책에선 주인공을 보통 사람보다는 위대하고 절제되며 매우 용맹하거나 나약함이란 없는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이 책에선 이순신, 그는 한 나라의 용맹하고 숭고한 성웅이지만 그 이전에 그는 단지 한 나라의 백성과 다른 특출한 사람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살고 있는 시대, 그의 직위, 그의 전쟁이라는 상황이 단지 그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를 고뇌하게 만들었다.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이 참으로 불행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생각에 서글프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통한 두려움과 슬픔이다.바로 그러한 것들이 ‘칼의 노래’를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지배한다. 나약한 임금, 불쌍하기까지 한 임금의 눈물, 백성들에게 아무런 보호를 해주지 못하는 조정,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무방비상태로 잔인한 왜구에 의해 파괴되는 우리 민족의 모습, 도도한 명나라, 그 앞에 비굴할 수밖에 없는 임금, 모략…이제부터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서술해 나가겠다.이 책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임진란 전 기간이 다루어지지 않고, 다만 정유재란이 발발한 직후, 곧 이순신이 백의종군에 처해지면서부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고 명량대첩을 거쳐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를 그리고 있다.우리는 보통 전쟁이라 하면 이미 헐리웃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영웅적인 삶과 선택 그리고 웅장함과 승리만을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난 전쟁영화 마니아는 아니지만, 보통사람보다는 좋아하는 편이다. 전쟁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승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우리가 직접 겪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TV뉴스 보도를 통해 보는 전쟁과 내분 역시 격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전은 참담하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 할 정도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그렇고, 이보다 더한 것이 “더 씬 레드라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선 전쟁의 참혹함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책 중 내용을 인용하자면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개별성을 느낄 수 있는가? 전쟁의 참혹성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치며 지천에 깔린 시체들의 개별성을 생각해 보았는가?그리고 분명 ‘칼의 노래’는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지휘한 무장의 모습에서 보통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이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적인 모습과 그의 섬세한 인간미를 볼 수 있다.이 책을 읽으며 난 또 다른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함께 언제 그 임금에 의하여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이미 한차례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을 하면서 모략과 중상에 의해 언제 자신이 희생될지 모른다는 고뇌가 그를 따라다녔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장의 칼과 임금의 칼, 그 두 칼 모두 자신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매일 매일 전장에서 서서 싸우는 그는 얼마나 외로운 장수인가.강하게만 느껴지는 이순신장군의 내면은 어떠했을까. 매우 인간적인 면이 있다. 전장의 상처와 모략에 의해 투옥 당시 고문을 당한 통증에 의한 후유증으로 항상 잠을 설치는 모습, 명나라 장군과의 과음으로 인하여 취하고 토하는 모습, 인간의 본성인 성욕을 느끼는 모습, 그리고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삼도수군통제사의 외로움과 고뇌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목차약력개요미켈란젤로의 피에타초기 생애와 작품들중기말기평가와 영향미켈란젤로 [Buonarroti Simoni, Michelangelo di Lodovico]출생지 : 이탈리아 카프레세출생일 및 사망일 : 1475. 3. 6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1564. 2. 18 로마.별명 : 천재거장화제 :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약력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 출생1489년 조각가 베르톨도에게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며 메디치가 고대 조각 연구1489년 로렌초 일 마니피코에게 인정받아 로렌초의 집에 체류1492년 로렌초 사망,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1496년 조상「바쿠스」제작1499년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산 피에트로대성당의「피에타」제작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 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의뢰받음1504년 대리석상「다비드」완성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위촉 받음1512년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화「천지창조」완성1534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화를 의뢰 받음1541년「최후의 심판」완성1542년 바티칸궁의 파올리나 성당 장식 위촉1547년 산 피에트로대성당 조영 주임1550년 파올리나 성당 장식「바울로의 개종」,「베드로의 책형」완성1564년 2월 18일 로마에서 사망대표작품1498-1949년 피에타(Pieta) :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1501-1504년 다비드(David) : 아카데미아 미술관1508-1512년 천지창조(Genesis) : 로마 바티칸 궁전1534-1541년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 로마 바티칸 궁전, 시스티나 성당개요미켈란젤로의 피에타미켈란젤로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왔다. 수많은 그의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은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그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조각가라고 디의 저술에 따르면 더이상 배울 것이 없어 그곳을 떠났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기를란다요와 그 이전의 피렌체 거장들인 조토와 마사초가 그린 인물화를 묘사한 것과 몇 점의 소묘가 남아 있다. 확실히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로렌초는 주변에 시인과 지식인들을 불러들였으며, 미켈란젤로도 그 무리에 끼었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메디치가(家)의 소장품들을 접하게 된 것인데, 소장품들은 주로 고대 로마 조상(彫像)들의 단편이었다. 이 시기에 메디치가의 친구이자 가문의 소장품들을 담당하고 있던 청동조각가 베르톨도는 거의 미켈란젤로의 조각선생에 해당되는 사람이었으나, 미켈란젤로는 재료라든가 조각방식에서 그를 따르지는 않았다. 초기에 제작된 2점의 대리석 작품 가운데 하나는 베를톨도도 청동으로 비슷한 것을 제작한 바 있는 고대 로마 석관의 변형작인 〈켄타우로스들의 전쟁 Battle of Centaurs〉(1492경)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몸짓과 힘은 미켈란젤로가 이후에 갖게 되는 관심을 뚜렷이 예고해준다.이당시 피렌체는 유럽에서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으나 이전보다 큰 주문을 얻기가 힘들어져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피렌체 출신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1494년 미켈란젤로도 메디치가가 몰락하고 정치적 혼란기가 종식되기 이전에 피렌체를 떠났다. 볼로냐로 간 그는 성 도미니쿠스의 묘소와 감실을 완성하기 위해 작은 조상들을 조각했다(1494~95). 이 3개의 대리석 조상들은 독창적이고 표현력이 강하며 응축된 형태표현으로 작품에 진지함을 부여했는데, 이는 그가 고대 및 조토에서 이어지는 피렌체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은 재료의 선택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대리석 덩어리의 단순함을 살린 것이 그의 예술의 특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특성들이 몇몇 예외적인 작품에서는 무시되거나 수정되기도 했는데, 그 예가 〈바코스 Bacchus〉(1496~97 순간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능력과 무게나 힘을 보여주는 자신의 능력을 통합할 수 있었다. 그결과 미켈란젤로 특유의 힘찬 동작을 취하고 있는 육중한 몸의 이미지가 창조되었다.중기1504년 〈다비드〉가 성공한 후, 미켈란젤로에게는 거의 거대한 주문들만 들어왔다. 그는 이런 야심만만한 일들에 마음이 끌렸을 뿐 아니라 조수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들은 대부분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1504년 그는 피렌체 시청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막 시작한 또다른 벽화와 1쌍을 이루게 되어 있었다. 두 벽화 모두 피렌체의 군사적 승리들을 다룬 것이었지만, 각각은 그 도시가 가장 자랑하는 예술가들의 특이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복사본과 부분적인 예비 습작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대성당에 12사도들의 대리석상을 계획하고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단지 하나 〈성 마태오 St. Matthew〉만을 손댔을 뿐이다. 이 작품에 표현된 인물의 동작에서는 처음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흐르는 듯한 유기적인 움직임과 미켈란젤로 자신의 위풍당당한 힘이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다. 이 조각은 또한 훗날 관람객들을 사로잡게 되는 그의 미완성작들 가운데 첫 작품이다. 그가 조각한 인물들은 마치 돌의 내부로부터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미완성 상태가 고의적인 것임을 암시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모든 조상들을 완성하고자 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인물들이 내재해 있음직한 돌덩이로부터 완전한 인물을 끄집어내는 조각가의 고충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에 관한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시간의 부족이나 다른 이유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작품들은 미완성임에도 그가 창조과정에서 절감했던 긴장을 반영한다.1505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40개의 거대한 조상들로 장식하는 묘소를 주문했으나, 성베드로 대성로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뒤에 제작된 부분들에 이전의 순수한 육체적 양감을 좀더 명상적으로 절제함으로써 더 큰 내적 표현력을 보여준다.천장화가 완성되자마자 미켈란젤로는 그가 선호했던 교황 율리우스의 묘소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1513~15년경에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예언자들과 흡사한 〈모세상 Moses〉을 조각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육중함을 손상하지 않고 세부묘사를 더 풍부하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갇혀 있는 노예를 다룬 2점의 조각을 제작했는데, 이것은 묘소를 장식할 조각의 일부였으나 묘소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 조각들 역시 천장화에 삽입한 나체의 청년상들처럼 변화무쌍한 인물 유형을 돌에 새긴 것이다. 강렬한 느낌을 나타내는 그들의 복잡한 자세는 르네상스 시기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1506년에 발견되어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라오콘 Laocoon〉군상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 작품들에서만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라오콘〉 군상은 분명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는 필요한 때에만 헬레니즘 시대의 뒤틀림과 복잡함을 사용했을 뿐이며 〈라오콘〉이 발견되기 이전에 이미 그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성 마태오〉(1505)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자 그의 묘소 제작을 위한 자금이 대부분 삭감되었다. 그의 후계자이자 소년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레오 10세는 그를 피렌체로 불러들여 메디치가의 영광을 과시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저택의 개조 및 그 가문의 교구에 있는 산로렌초 교회의 개조를 위한 건축설계를 하게 되었다. 산로렌초 교회의 거대한 개조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그 교회에 딸린 메디치가의 묘소를 짓게 되었다(→ 메디치 예배당).이 일은 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을 따라 줄리아노와 로렌초라고 각각 이름 지어진 메디치가의 젊은 두 후계자들이 가 특별한 경우에는 그의 설계 방식을 수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좀더 평온하고 조용한 효과에 맞추었다. 바로 그 이유로 이것은 그의 작품연구에서 간과되곤 했다.1527년 로마가 정복당하고 레오 10세의 사촌으로 그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가 수치스럽게 도망가자, 피렌체는 메디치가에 항거하여 전통적인 공화국을 재건했다. 이는 곧 포위당해 패배했고 1530년에 메디치가의 통치가 재개되었다. 1530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가족묘소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특정한 정부형태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식으로 피렌체 시에 정치적으로 더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당시에 별도로 주문받은 2점의 조각으로는 새로운 정치 권력자에게 바치는 선물로 사용된 〈아폴론 Apollon〉 혹은 〈다비드〉(정확한 주제에 대해 논란이 많음)와 패배한 적의 한 노인을 짓밟고 있는 조상인 〈승리 Victory〉가 있다. 〈승리〉에서는 정복자와 패배자 모두 매우 복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패배자는 한 귀퉁이에 쑤셔넣은 것 같고 정복자는 〈아폴론〉처럼 유연한 나선형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조각은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추구한 젊은 조각가들의 애호를 받아 수많은 우의적인 주제들의 본보기가 되었다.1534년에 미켈란젤로는 마지막으로 피렌체를 떠나게 되지만 주문작을 끝마치는 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을 로마에서 보내며 때때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작품을 주문받아 작업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작업을 했다. 이때부터 피렌체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가 보존되었다.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무렵에 사랑하던 형도 죽자, 그는 나이와 죽음에 대해 점점 더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무렵 거의 60세가 다 된 이 노예술가는 젊은이들에게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편지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주로 그 상대는 나중에 로마의 도시사업에서 활약하는 귀족 출신의 재능있는 톰마소 카발리에리였다. 이 시기 이후로는 그가 쓴 시도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