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의 세계에서 생겨난 비극소포클라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는 부녀지간이자, 남매간인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비극의 전형을 가장 모범적으로 성취했다는 평가를 받는 소포클라스에 대표작인 이 작품들의 주인공이 ‘부녀’ ‘남매’라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모순된 관계를 이중적으로 맺고 있다는 데서, 이 희곡들이 갖고 있는 비극성을 우선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안티고네의 비극성은 이 혈연의 문제에서 약간은 빗겨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음’이라는 불가역적인 힘에 의해서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파국을 향해 치달아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극성이 파생된다.오이디푸스왕은 근친상간을 범한 부친 살해자라는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오이디푸스의 점진적인 발견의 이야기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오이디푸스의 정체에 대한 공개적인 폭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극은 자신의 과거를 밝혀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이 자신을 파국으로 이끌고 간다는 아이러니를 축으로 전개된다. 즉 자신의 나라 테바이를 재앙에서 구하고, 자신의 과거를 명백하기 위한 선한 의도에 의해 추동된 행동이 오히려 오이디푸스 자신의 이득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아이러니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리러니에서 비극성이 생겨난다.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을 정의하면서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런 정념들의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카타르시스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수천 년 동안 서양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논쟁거리였으며, 여전히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우므로 일단 제쳐둔다고 하더라도, ‘연민’과 ‘공포’가 비극에 수반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연민과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다. 한 눈을 팔다가 자신의 부주의함으로 맨홀에 빠지는 이를 볼 경우, 우리는 그의 부주의함을 비웃으면 웃었지, 연민과 공포를 느끼지 못하며, 자신의 부와 명예를 달성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자수성가한 인물에 대해서도 그가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고자 애쓴 노력에 대해서 연민과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맨홀에 빠진 이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나 모두 그들의 고통이 그들의 정신의 크기나 엄격함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해서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인간적인 위대함, 영웅적인 면모라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고통 앞에서 드러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급한 성질과 같은 인간적 결함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지혜와 이성을 가진, 테바이에서 가장 우수한 젊은이다. 그가 말한 바대로 ‘테바이인 중의 테바인’이자 위대한 왕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를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은 이런 단순히 뛰어난 지혜를 갖춘 인간임을 넘어서 자신의 운명에 철저하게 저항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규정하려는 외적인 힘을 초월하고자 코린토스를 떠났으며, 선한 의도로 테바이에 닥친 재앙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부주의하게 맨홀에 빠진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외적 강제에 순순히 순응하지 않는 그의 정신이, 그의 저항이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길을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줌과 아울러, 이 아이러니에 대해 공포를, 그리고 그에게는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에게 닥친 재앙과 고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강한 자유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점,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마는 비극적 운명이라는 이 결합에서 우리는 ‘비극’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는 안티고네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 테바이를 침공해서 벌인 전투를 벌이다가 죽고, 테바이의 왕이자 그들의 외삼촌인 크레온은 폴리네이케스가 조국의 반역자라고 해서 시신을 장사지내면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왕의 규범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신의 규범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장사를 지내다가 ‘하데스의 신방’에 갇히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안티고네는 금지명령을 어길 경우,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이미 다 알 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규범을 따르고자 했다는 데서, 그녀 역시 그녀의 아버지이자 오빠인 오이디푸스처럼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신이 정해 놓은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안티고네는 신의 규범을 따르고자 했다는 단순한 표피적인 일만 놓고 본다면, 신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없어보이지만, 신이 정해 놓은 운명, 크레온의 규범을 인간의 행동을 외적으로 강제하려는 절대 권력으로 생각한다면, 이 외부의 절대 강제에 수동적으로 응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공통된 삶의 모습의 보여준다. 어쩔 수 없는 운명, 폭력적인 권력으로 인한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들의 영웅적인 면모, 범인인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정신의 크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과 함께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은 모두 인간이 주어진 조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함‘으로 인해 빚어진 것들이다. 드높은 자유의 정신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비극이 생겨난 것. 그렇다면 우리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운명이라 체념하면서 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새삼스레 그런 운명론을 깨닫기 위해 소포클라스의 희곡을 읽는 것인가. 주어진 운명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가 지금 소포클라스의 희곡을 읽을 필요조차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