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연극제 출품작인 을 보러 갔다. 공연 시작 20여분 전임에도 정면과 바닥을 하얀 천으로 두른 무대 위에선 검은 옷을 입은 두 여배우가 몸짓(?)을 하고 있었다. 공연은 연출자인 듯한 이의 공연준비 독려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 아니였다. 곧 연극의 끝이였다.연출자는 다른 한 배우는 어디 있냐며, 전화를 해오라고 하지만, 전화를 받은 배우는 연극을 그만둔 단다. 그걸로 무대의 불은 다시 켜지며, 연출자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사정이 이러니 연극을 같이 만들자고 한다. 그게 싫으면, 환불해 주겠다고...이렇게 연극은 끝난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정말로 나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도로 계산된 연출이였으며, 이는 객석과 무대는 물론 극단대표, 배우, 연출자, 관객의 간극을 없애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여기에서 계산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로 인해 반감을 가질 필요는 물론 전혀 없다. 극단(劇團)의 극단(極端)적 절박함 속에서도 공연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였을 뿐이니까....원래 작품의 다섯 명의 배우가 셋으로 줄고, 다시 연극제 기간에 둘로 줄어드는 과정에서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연극 속에서 형상화 된 장애를 가진 새가 그랬듯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날아오른 것이다. 연출의 변에서 밝히다시피, 배우는 배우의 모습으로, 연출자는 연출자의 모습으로, 대표는 대표의 모습으로 연극에 선다. 대표인 김미연씨의 극단 끼판 소개와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장애인으로 연극판에 끼어든다는(!) 것에 대한 진솔하고도 담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정말이지, 입구에 세워진 무수한 휠체어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없이 문예회관 소극장의 그 무수한 지하계단을 내려온 내 자신을 너무 부끄럽게 만든 한마디 한마디였다.이어 등장한 연출가 오순한씨는 관객과 ‘연극만들기’를 시도한다. 관객 모두에게 배우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먼저, 공간을 이야기하며 손을 들어 바라보라고 한다. 모든 관객이 일제히 손을 들자, 구한다. 오른쪽, 왼쪽, 위, 아래로 움직여가며, 몸으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이 작업은 자연스럽게 공간을 나누고 있는 경계에 대한 사유에 이르고, 이에 대한 극복의 준비단계가 된다. 이어서 옆사람의 얼굴을 관찰하고는 내부의 생각만으로 자신의 외모를 상대방과 닮아가도록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작업 역시 자?타의 구분과 차이, 그것의 경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옆자리의 사람과 내가 자연스레 동화되어가는 묘한 체험을 하게 해주었다.다음으로는 관객들에게, 배우들에게, 물론 연출자에게도, 마름모꼴의 하얀 박하사탕 한 알씩이 주어졌다. 씹어 먹지 말라는 연출자의 굳은 당부와 함께 모두들 일제히 박하사탕을 입에 문다. 순식간에 익숙한 박하사탕 그 특유의 상쾌함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간다. 모두가 끝까지 참을성 있게 녹여 먹은 후에는 그 향과 맛, 상쾌함을 온 몸으로 퍼트려 보내기를 시도한다. 꾹꾹 눌러 발끝, 손끝까지 박하사탕의 여운을 내려 보내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뤄졌다고 느껴졌을 때, 이내 그것들을 몸에서 털어 내는 작업을 한다. 손발을 흔들어주고, 머리를 돌리며, 온 몸을 춤을 추듯 움직여 가며, 박하사탕의 그것을 말끔히 털어낸다.나는 어느 샌가, 극장 전체에 그 싸한 박하향이 떠도는 듯한 착각에 빠져 버린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서 공간과의 일체감은 물론 해방감까지 맛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소통과정은 관객이 연극을, 그 중에서도 을 수용하고 이해하는데, 최적의 조건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는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관객참여나 급작스런 경계 허물기에서 오는 당혹스러움이나, 어색함이 전혀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였다.이러한 소통 후에는 의 연습 과정이 연극되는 메타연극의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라는 게 너무나 고통스럽고 안쓰러워 연출자가 “이건 연극입니다”라고까지 하며 시작된다. 펴지지 않는 손을 펴기 위해 끊임없이, 주무르고, 또 주무른다. 20년간 뭉쳐있던 다리 근육을 풀어주는 고통스런 훈련과정 속에서 장애인 배지만 모두 알리가 극복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연출선생님은 못하겠으면 그만두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지고, 비장애인 배우인 파샤 역시도, 알리를 도와주지 못하고 알리만을 무대에 남기고 사라진다.무대에 홀로 남은 알리를 비추는 조명은 파란 조명이다. 무대를 싸고 있는 하얀 천으로 인해 그 우울함은 한층 강조되지만, 그 파란 것은 그녀가 앞으로 날아야 할 하늘이기도 하다. 한쪽 구석에 펼쳐져 있는 노란 우산으로 거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노력하고, 동시에 무대 정면의 하얀 천을 스크린 삼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진다.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고는 알리는 연극을 계속하기로 맘먹는다. 이러한 고통스런 연습과정과 힘겨운 결심은 뒤의 공연과 중첩되어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암튼 이러한 과정이 연극된 후 정말 그들이 공연하고자 했던, 이 공연되었다. 그 준비는 정면의 하얀 천 뒤에서 두 배우들이 입고 있던 검은 옷을 하얀 옷으로 바꿔 입고는, 머리에 하얀 수영모자를 쓰는 것 뿐이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한층 더 비장해 보이고, 또 한층 서글퍼 보였다.알라와 타샤는 서로의 몸을 교차하고 알속에 함께 웅크려 있다.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체, 둘은 알속에서 하나가 되어 장난을 치고 있다. 알은 심한 요동을 치며, 그녀들을 껍질 밖으로 밀어낸다. 먼저 깨어난 타샤는 새라면 으레 그렇듯, 튼튼한 두 날개를 푸득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러다 앞에 꼬꾸라지듯 누워 있는 알리를 발견한다. 타샤는 알리를 부리로 쪼기도하고, 그 위를 풀쩍풀쩍 날아다니기도 한다.그제야 비로소 알리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움직임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고개를 치켜들지만 이내 다시 머리를 처박는다. 알리의 한쪽 날개는 채 펴지지 않았고, 다리 역시도, 형편없이 꺾여 있다. 타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알리의 주위를 맴돌고, 타샤는 그런 알리를 쫓으려 사력을 다한다. 알속에서 그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알 밖의 공간은 그녀들을 나누고 누구에게는 힘찬 날개와 튼튼한 다리를 누구에게는 둘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운명이라고 그리 쉽게 말해버리기에는, 그 것의 결과가 너무나 가혹하고 처절하다. 알리의 눈물겨운 몸짓은 계속되지만,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알리는 타샤와 마주선다. 서로의 날개와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대를 빙빙 돌며, 서로의 몸을 통한 교감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옷 아니 그들의 몸, 상처를 안고있는 몸을 가리고 있는 것들이 거두어 진다. 날개를 덮었던 옷이 내려지고 머리를 덮고 있는 모자가 벗겨진다. 알리의 드러냄에 이어, 타샤의 드러냄이 이어지고, 거울처럼 서로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다. 한발 한발 다가가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눈물짓는다. 그녀들은 알속에서 그랬듯이, 서로를 부퉁켜 안는다. 다시금 그녀들은 한 몸이 된다. 누가 알리인지, 누가 타샤인지 구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된 그녀들은 무대 위에서 계속 흐느끼고, 스크린에선 두 마리의 새만이 힘찬 날개짓으로 창공을 웅비하고 있었다.그녀들의 둘 몸짓은 곧 알리를 하늘로 올려보내기 위한 고통스럽고도, 처절한 몸부림이였던가보다...정말 너무나 평범한 몸짓들이였지만, 그의 준비과정을 관객이 함께 했기에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도 가슴을 졸이며, 한치도 눈을 땔 수 없었다. 연극은 끝났지만, 누구 하나 자리를 뜨려하지 않았다. 그만큼 연극과 현실의 허물어진 경계 속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극장을 나서면서 사실은, 연극이 끝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배우는 그 ‘배우들’만이 아니였고, 무대는 그 ‘무대’만이 아니였다. 그 연극을 보고 있었던 우리 모두가 배우였고, 그러한 우리들이 서있는 공간이 곧 무대였다. 이는 우리 배우들이 타샤와 알리의 몸짓을 기억하고 일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것을 연기하고, 몸짓하는 한 연극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 주위의 그 경계와 나눔으로 인해, 그 것을 가능케하는 차이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 한, 그네들 모두가 푸른 창공을 위용을 뽐내며, 웅비할 수 있을 때까지야 한다...1. 제목 : 둘몸짓2. 분류 : 실험적 무언극 (퍼포먼스 + 소리 + 에니메이션과 비디오 영상 + 설치미술)3. 연도 : 2001 -20024. 수상 : 2001년 제 4회 변방 연극제 최우수작품상 수상5. 주요 초청공연- 제 7회 죽산 국제 예술제, 2001- 제 16회 부산 연극제 초청공연, 2001- 대구 전국 휠체어 마라톤 대회 기념 축하공연, 2001- 전국 5대도시 순회 투어 (서울, 부산, 대구, 전주, 제주), 20016. 작품개요"둘몸짓"은 인간모두의 대립하는 혹은 혼재하며 갈등하고 화해하는 이중의, 양면성을비언어적인 퍼포먼스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무대공연화를 지향하는 작품이다.장애여성의 무성화 된 상징성의 둘몸짓, 제도권과 비제도권, 장애와 비장애, 여성과 남성, 그리고 소외와 참여 등의 상반되지만 한 몸에 담아질 수 밖에 없는 모순 된 우리 삶과 몸의 이미지를 무대라는 형식을 빌어 표현하고자 한다.7. 작품 내용2001년도 장애여성문화공동체 극단 끼판의 전국순회공연 [둘몸짓]은 두 번째 창작무대 공연 작품으로 장애의 몸을 고려한 독특한 무대공연 형식을 만들어 내고 극단 끼판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실험적인 형태의 공연물로서 비언어적인 형태의 퍼포먼스를 통해 장애여성 배우들의 몸짓을 통해서 장애여성의 여성성과 창조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기획된 작품이다. 그리고 지난해의 창단공연 작품인 몸짓 하나 '나는 나' 가 정극 형식에서 약간 벗어나 퍼포먼스적인 몸짓을 구현하려 했던 작품이라면 둘몸짓은 장애라는 육체적 정신적인 이중의 장애를 딛고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장애인과 장애여성 전체의 자유를 향한 몸짓을 구현해 내고자 한다. 일반 배우들의 자아찾기 과정의 의식적인 옷벗기 몸짓과 장애여성배우들의 몸짓이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다. 하나의 거대한 자유로운 인간전체의 몸짓으로 관객에게 다양한 커뮤니티를 시도하고 극이 진행되면서 장애라는 육체적 정신적인 이중의 장애를 딛고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고립되고 소외품이다.
Ⅰ. 들어가며...Ⅱ. 신자유주의의 기원1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2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적 전통3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세력Ⅲ. 신자유주의의 세계1 WTO 체제의 출범2 다자간 투자협정(MAI)3 양자간 투자협정(BIT)Ⅳ. 문화적 예외 규정으로써의 영화l 국제통상에서 문화생산물2 각 국의 전략Ⅴ. 한국의 스크린쿼터제1 스크린쿼터제 관련 법규2 스크린쿼터 관련 주요일지3 스크린쿼터 사수투쟁4 스크린쿼터제 유지에 대한 기존의 수세적 논리 검토Ⅵ. 맺으며...Ⅰ. 들어가며...하나의 유령이 지금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이. 전 세계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 환경단체, 여성단체, 문화단체 등 인간성을 옹호하는 모든 단체와 전 세계 민중들은 이 유령을 몰아 내기 위해 신성한 연대를 맺었다.{) 1848년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맑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2001년, 우리는 아직도 신 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만 한다.이러한 연대는 1999년 11월말 미국 시애틀에서 WTO 각료회담을 저지시킨 대규모 군중시위가 발생시킨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2000년 4월 중순 IMF와 세계은행의 춘계회의가 열린 미국 워싱턴에서, 5월초 아시아개발은행 연례회의가 열린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9월초 세계경제포럼의 아시아태평양 정상회의가 열린 호주의 멜버른에서, 9월말 브레튼우즈 기구 추계회의가 열린 체코의 프라하에서, 10월말 아셈 정상회담이 열린 서울에서, 금년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세계사회포럼이 열린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여성, 노동자, 농민, 원주민, 동성애자, 학생, 지식인, 시민 등이 이루어낸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이 바로 그 성과들이다.이러한 시점에서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에 대해서 역사적 형성과 정체를 알아 볼 작정이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오늘날의 문화적 과정이 그것과 어떤 물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오늘날 문화에 관해서는 과잉담론{) 원용진, 「대중문화 우리의 대응 , 진보평론 2000 여름호 (국 제연대정책정보센터 홈페이지 http://picis.jinbo.net/ 각종자료실 에서). 이하 내용은 이 글(이하 이창근A)과 이창근, 시애틀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 2000. 2; 이하 이창근B)를 참 조함.그 핵심은 생산부문에서의 이윤율 저하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금융적 팽창 {) 사회진보연대 실업정책생산모임, 실업자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 pp.45-46; 이창근A에서 재인 용. 멕시코 및 우리나라를 포함한 90년대의 외환위기 사태 이후 파생금융상품의 과도한 확대 와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외환시장에서의 거래, 자유화의 확대 등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불 안정성을 불러일으키는 현상들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초국적 자본의 유출입이 가져오는 불안 정을 제어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논의로는, 카피레프트 모임, 초국적 금융자본 통제의 가능성 과 의미 , 읽을꺼리 3호, 1998. 8; 문성혁, 지구화 시대의 초국적 금융자본 통제: 쟁점과 동 향 , 관악 1999. 겨울 등을 참조할 수 있다.을 추진하는 것과 이를 위한 국제적 강제수단의 계발 및 강화였다. 8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가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최근의 한국을 포함해 외채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들에 구조조정 프로그램(SAPs) 을 강요해온 국제통화기금(IMF){) 현재까지 제3세계와 동유럽의 76여 개국에 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적용되었다.과 세계은행(IBRD)이 대표적인 국제적 강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시장 자유화, 최저임금 철폐, 쿼터 및 보조금 철폐, 국가독점(기업)의 축소, 가격통제, 변동 환율제, 민영화 {) Parselelo Kantai, The Onslaught of Economic Imperialism, 1999. 5, p.56; 이창근A에서 재인 용.를 주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탈냉전과 함께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라는 보다 포괄적인 무마하기 위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국제기구 및 협정 내부로 NGO 및 노동조합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것과 지역 간·양자간 자유무역 및 투자협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MAI 이후 아직까지 국제적인 투자규범이 없는 상황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속적인 금융 팽창 전략의 추진을 위해 지역 간·양자간 자유무역협정 및 투자협정을 활용하고 있다. 이는 명실상부한 투자협정이 존재하지 않는 WTO 체제를 훌륭하게 보완하는 것이며, MAI를 향한 새로운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자간 투자협정의 표준안은 MAI의 그것과 거의 같은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지속적 추진과 완성, 금융세계화 체제로의 적극적 편입을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98년 미국과 일본에 양자간 투자협정(BIT)의 체결을 제안했으며, 현재 한미·한일 투자협정 모두 협상은 거의 완료된 상태이고 사실상 체결의 단계만 남아있는 상태다. 또한 칠레와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며, 멕시코에 FTA 체결을 위한 연구작업반 설치를 공식 제의하는 한편, 뉴질랜드, 태국, 싱가포르 등과도 협정 체계를 위한 공동연구를 서두르기로 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정부는 공산품 관세인하 와 반덤핑 분야 등 국내 재벌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분야들을 중심으로 EU, 일본 등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뉴라운드 출범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와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비슷한 멕시코는 지난 94년 12월, 페소화 폭락사태를 겪고 우리보다 3년 먼저 IMF 관리체제 로 들어갔다. 집권 초기 외환위기를 겪은 세디요 대통 령 행정부는 IMF의 정책 권고와 미국에서 교육받은 경제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긴축을 통한 재정 건전화,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수출 확대, 국영산업의 민영화, 금융 구조조정, 외국 인 투자유치 등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정책을 먼저 추진했다. 특히 멕시코 정 부는 94년 미국·캐나다와 맺은 북미 20일 범위 안에서 단축-.관람권 발매의 전국통합전산망에 참여하는 경우 20일의 범위 안에서 단축-.성수기 때 한국영화 상영시 최고 20일까지 감경-.그러나 상기 단축일수와 감경일수는 최대 40일을 초과할 수 없다.▷또한 스크린쿼터 위반극장에 대한 행정처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여 강제하고 있음(자치단체가 행정처분 부과)a의무상영일수 미달의 경우(영화진흥법 시행령에 명시)-.미달일수 20일 이내의 경우 - 미달일수 1일당 영업정지 1일 이하-.미달일수 20일을 초과하는 경우 - 미달일수 1일당 영업정지 2일 이하b한국영화 상영을 신고한 뒤 외국영화를 상영하는 경우(허위공연/공연법에 명시)-.과태료 500만원 이하2스크린쿼터제 약사-.1962년영화법 제정-.1963년수입추천제 실시 - 한국영화 제작자에 한해 외국영화 수입추천이 가능-.1966년스크린쿼터제 도입 - 의무상영일수 90일 이상-.1970년의무상영일수 30일 이상-.1973년의무상영일수 121일 이상-.1974년교호제 실시 - 외국영화와 한국영화 상영일수를 2:1의 비율로 순차적으로 상영-.1981년의무상영일수 165일 이상-.1985년의무상영일수 146일 이상, 필요시 20일 단축-.1986년미국영화사의 국내영화업 허용수입편수 쿼터제 및 수입가력 상한제 폐지-.1994년외국영화 수입프린트 벌 수 제한 폐지-.1996년의무상영일수 146일, 필요시 40일 단축교호제 폐지3스크린쿼터제와 시장점유율 변동한국에서 스크린쿼터제는 1966년 첫 도입됐으나 사문화된 제도였으며, 1993년 민간기구인 스크린쿼터감시단 출범으로 극장과 감독청에 대한 감시활동이 시작되면서 정착되어 가기 시작(표1) 스크린쿼터제와 시장점유율 변동{93949596979899한국영화편수636565655943외화편수3*************0271292허위공연일수48일51.7일-37.6일20.5일10.8일6.9일시장점유율15.9%20.5%20.9%23.1%25.5%25%36.1%※1999년 외화편수중 미국영화 159편, 유럽영화 33편2 스크입장을 미국영화협회(MPAA)쪽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스크린쿼터제의 문제가 사회적·국제적{) 한국과 미국정부 간의 공방이 오갔던 작년 7월(1999년), 자크 랑 프랑스 하원 외교워원장은 한국의 스크린 쿼터제 유지에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고 이를 고수하여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서한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미국영화협회(MPA) 회장에게도 협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했다.(양건열 외, 한국 스크린쿼터 의 현황과 발전방안에 관한 연구 , 한국문화정책개발원, 1999, p.7.) 다른 한편, 스크린쿼터 감시단 이 스크 린 쿼터 문화연대 로 조직을 확대개편하면서 지난 5월 제53회 칸 국제영화제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의 경과를 설명하고 세계영화인들의 공조를 촉구하는 등의 국제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이슈가 되어왔던 것이다.그러나 스크린쿼터제의 문제가 바로 이러한 거대한 전지구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서는 이 문제를 단지 우리 영화를 상업적인 미국 할리우드 영화 독점자본으로부터 보호하자는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컸고, 영화인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스크린쿼터제 사수투쟁은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거나 그 의의가 평가되었던 것도 사실이다.이를테면 양자간 투자협정(BIT) 중에서 특히 스크린쿼터제가 문제가 되는 조항이, 앞서 설명한 이행 의무 부과 금지 원칙{) 한미투자협정 초안 제6조(A): 각 체약국은 적용투자의 창설, 취득, 경영, 관리, 운용의 조건으로서 다음과 같은 어떤 조건(정부의 허가 혹은 인가를 받는 것과 관련된 의무 혹은 약속도 포함)도 명령하거나 강제해서 는 안 된다.a) 어떠한 수준 혹은 비율의 내국 생산량을 달성하도록 하거나 혹은 국내에서 생산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지 국내에서 비롯된 상품 또는 용역을 구매하거나 사용하거나 다른 형태로 특혜를 주도록 하는 조건.인데, 이 금지 원칙에 따라야 한다면 단지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명시한 스크린쿼터제가 폐지되는 문제뿐만 아니라다.
Ⅰ. 롤즈와 정의론존 롤즈(John Rowls)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윤리학자이며 정치철학자이다. 특히 1971년 '사회정의론 A Theory of Justice' 출간 이후 그에 관한 연구 붐은 윤리학과 정치철학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정치철학적으로는 특히 규범론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1971년의 '정의론'에서 그는 사회 계약론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데 특히 그것을 '구성'과 '합의'의 대상으로 본다는데 그의 독창성이 있다. 그의 접근방법은 상당히 고전적이다. 정의를 찾아 나선 긴 여로의 출발점은 사회의 기본구조를 운영하는 원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개인들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다.롤즈는 사회 기본구조를 설정하는 정의의 원칙들을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도덕적 신념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과거의 방식을 피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대적이다. 또한 그는 정의를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서 그것을 알아내어 사회 운영에 적용하려는 직관주의의 전통과 결별한다. 그가 취하는 입장은 구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특히 정치적 구성주의에 의해 그의 작업은 구체화된다.롤즈의 정치적 구성주의는 실천이성과 원초적 입장이라는 장치를 통한 정치적 합의로 구체화된다. 전통적 사회 계약론에 있어 '자연상태(state of nature)'에 해당하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은 공적 문제 또는 정의의 원칙을 이끌어내기 위한 합의의 장치인데 그 핵심적 특징은 '무지의 베일 (veil of ignorance)'이다. 이 무지의 베일은 합의 당사자의 타고난 능력 및 재능, 심리 상태 및 가치관,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을 모르게 한다는 가상적 장치이다. 이런 장치는 합의의 공정성을 보장하여 합당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기능을 한다. 흔히 정의를 '분배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로 대립시킬 때 롤즈가 후자에 서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정의 개념의 핵심은 '공정성으로칙을 채택하리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인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존 롤즈 『사회정의론』 서광사, 1985, p.36.첫 번째 최대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무지의 베일에 가렸더라도 구성원들이 시민의 기본적 자유를 침해받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때 시민의 기본적 자유란 정치적 선거 및 피선거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 등을 가리킨다. 요컨대 각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 자기에게 초래될 비용을 극소화하고 보상을 극대화하려는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사회계약으로 탄생하는 제도가 보장하는 보상 즉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혜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기본권, 자유와 기회, 소득과 부 등의 기초재화는 사회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the worst off)에게 우선적으로 극대화되어야 한다. 롤즈는 이것을 최소극대화 원칙이라 부르는데, 최소극대화 원칙(maximin principle)이란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자의 후생을 극대화하는데 우선적으로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최소 극대(maximin) 라는 말은 최소 중의 최대(maximum minimorum)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 규칙이 주는 지침은 제시된 행동과정을 취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에 주목하고 그에 비추어 결정하라는 것이다.{) Ibid, p.172롤즈의 이 같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은 자유주의적 속성과 공동체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것은 각각 공동체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들을 살펴봄으로써, 이를 통해 롤즈 정의론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속성제제기로 롤즈의 이러한 가정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그 가정을 수락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처럼 현실과 유리된 자아(disembodied self)가 사회제도나 도덕적 실천을 평가할 기반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롤즈에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본래 롤즈의 주체개념은 공동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구성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정의개념은 주체개념이 기본전제에서 거부했던 공동체개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주체가 공동체와 연관성이 없다면, 롤즈의 배분적 정의론은 그 기반을 상실하는 셈이 된다. 그러기에 샌들은 롤즈가 결국 공동체와 背馳되는 자아개념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적이고 상호 주관적인 용어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롤즈의 가설적 논리를 비판하는 샌들은 단지 의지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추상적 자아(unencumbered self)가 아닌 반성과 자기이해가 요구되는 현실적 자아를 강조한다. 그러나 도덕적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성격, 자기인식, 우애 등은 자아가 자기반성과 자기인식을 초래하는 데 필요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분자로서의 주체는 자기반성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샌들은 주장하기를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니고 있는 사회적 맥락-구성적 목적 constitutive-에 의해 부분적으로 형성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샌들은 공동체는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행위자의 정체성을 부분적으로 구성하는 자기이해의 양식을 묘사한다 라고 하면서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공동체의 연대감을 도덕적 논의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경험을 설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샌들에 의해 의무론적 자유주의 (deontological liberalism)라고 명명된 롤즈의 자유주의의 특징은 개개인의 자율성과 자유의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보편적으로 논증된 권리의 우선성을 주장하는데 있다. 즉, 개개인의 권리는 인용2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왈쩌는 진정한 공동체는 정의의 원칙에 의해 규제될 필요가 없고 정의의 강조는 공동체와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다른 공동체주의자들(특히 샌들)과는 달리, 정의의 가치와 공동체는 완전히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각자가 자신의 특수한 가치관과 사회적 위치를 모르는 무지의 베일 아래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롤즈의 도덕철학적 방법론을 거부한다.그는 개인의 역사는 사회역사의 한 부분 이기 때문에 사회적 제도 및 관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개인을 가정하는 자유주의의 인간관을 비판한다. 즉, 사회적 제도 및 관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개인이 스스로 선택할 때만 사회적 제도와 관계의 일원이 되는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왈쩌는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도덕의 보편성에 대해 공동체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비판을 하고 있다. 먼저 그는 구성원들이 그들 자신의 제도와 법률을 만드는 모든 역사적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삶의 보편적 양식이 아니라 특수한 양식을 생성한다 고 하면서 도덕적 규범의 공동체적 가치에의 종속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도덕적 논의가 우리들의 공유된 가치 (our shared understandings)에 근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관점은 그것이 발달되어 온 사회적 세계에 관련되는 것이지 모든 사회적 세계에 관련되거나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주어진 사회는 그것의 본질적인 삶이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그 구성원들의 공유된 가치에 충실한 방법으로 영위된다면 정의롭다고 한다. 이는 도덕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왈쩌의 정의론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다원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사회가 하나의 배분적 공동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 그는 개인주의적 전제로부터 추론된 롤즈의 정의원칙의 보편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정의 의 상대론적 관점에서 철학자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보편적으로 타당한 터 파생된다 고 언급한다.이러한 왈쩌의 주장은 분배적 정의 원칙들은 선 특수적 (good-specific)이고 문화 특수적 (culture-specific)이어야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회적 가치들의 정의로운 분배는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가치의 사회적 의미 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공유된 사회적 이해 에 달려있다. 따라서 정의는 사회적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 분배적 정의의 원칙과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의미의 문화의존성에 충실해야 한다. 분배의 기준과 방식은 가치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 내재해있다. 그 가치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이유에 따라서 분배되어야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분배는 가치의 사회적 의미에 상응하여 정의의 여부가 결정된다.{) 자유주의를 넘어서 마이클 왈쩌 지음 김용환 외 역 철학과 현실사 p.275-276.Ⅲ. 자유주의자들의 롤즈 비판롤즈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라고 일컬어지지만, 자유주의의 광범위한 스펙트럼 속에서 보면 그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로 세분되어진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는 롤즈의 차등의 원칙이 표현하듯 강력한 평등주의적 경향에 의해 규정된다. 즉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그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 즉, 최소수혜자의 이득을 증진시키지 않는 한 모든 경제적, 사회적 가치는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롤즈에 의하면, 재능이나 체력 등의 자연적 자산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갖지 못하며, 오히려 이러한 자연적 불평등은 사회정의의 원칙에 의해서 수정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복지국가에 대한 강력한 이론적 근거가 된다. 때문에 이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며, 사회적 경제적 권리들(예를 들면 복지에 관한 권리, 교육에 관한 권리, 보건에 관한 권리 등)이 결부된 시민의 자유 체계를 선호한다.반면 롤즈를 비판하고 있는 노직(Robert Nozick)과 하이에크(F. A. Hayek), 벨(David .
에어 포스 원(Air Force ONE)볼프강 페터슨 감독해리슨 포드, 게리 올드만,웬디 크류슨 ,글렌 클로즈 주연미국 1997년 제작미국의 대통령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구소련의 붕괴이후 언제나 미국은 세계의 경찰 국가를 표방하고 해외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분쟁국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해 왔다. 물론 최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평화 유지 임무를 위한 미군 파병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미국 대외 정책의 기조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져야 할 원칙과 세계적 판도에서의 힘의 관계, 국내외적 여론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미국이 지금까지 맡아온 역할을 계속 행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 방법의 차이는 엄청나며, 그로 인한 국제적 정세의 변화와 파장은 어마어마하다. 여기 그러한 미국의 국제적 역할과 정책을, 미국 대통령의 의지와 존재감으로 설명하려는 영화 한 편이 있다. 제목은 에어 포스 원(Air Force One)'....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공군 제 1호기, 즉 대통령 전용기를 말한다. 핵폭발에도 안전하며, 미사일 유도체를 탑재하고 있어 웬만한 전투기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날으는 집무실 이라 불리는 이 비행기는 그 규모나, 성능 등으로도 미국 대통령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이 영화의 감독인 볼프강 페터슨 은 독일 출신의 감독으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대한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1993년에는 라는 작품으로 1966년 케네디 암살사건을 막지 못한 늙은 대통령 경호원의 이야기를 통해 우회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중요성과 의미를 묻더니, 이번엔 완전히 대통령 자체를 주인공로 삼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미국 대통령인 제임스 마샬(President James Marshall: 해리슨 포드 분)은 러시아의 고관들이 운집한 대형 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인 라덱 장군이 최근 카자흐스탄에서 저지른 인권을 유린하는 폭거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열정적인 연설을 한다. 아울러 마샬은 정치적 독재를 겨냥한 총체적 전쟁의 포성을 알리는 조치로 라덱 장군을 체포하기 위해 전개한 러시아와 미국의 합동 작전의 성과를 치하한다. 이 연설이 끝난 후 마샬은 아내(Grace Marshall: 웬디 크로슨 분)와 딸(Alice Marshall: 리슬 매튜스 분)과 함께 워싱턴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통령 전용기, 에어 포스 원()'에 오른다. 이 비행기에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6명의 러시아의 취재진이 동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들과 한패인 경호담당관의 신호에 따라 테러리스트로 돌변, 기체를 장악한다. 경호원들은 대통령을 비상 캡슐에 태워 방출한다. 테러리스트 리더인 이반 코슈노프(Ivan Korshnov: 게리 올드만 분)는 백악관에 통신을 연결해, 억류 중인 독재자 라덱 장군을 석방을 요구한다. 만약 그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면, 30분마다 승객을 한 명씩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대통령일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그러나 라덱 장군이 석방될 경우 수백, 수천 명이 더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백악관의 부통령(Vice President Kathryn Bennett: 글렌 클로즈 분)은 속수무책의 상황에 빠지고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도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 테러리스트의 만행을 저지시키는 임무는 전적으로 단 한 사람, 탈출 캡슐을 타지 않고 화물칸에 남아있던, 미국 대통령 제임스 마샬의 어깨에 달려 있다. 테러리즘과는 추호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용기와 확신은 싸울 줄 아는 대통령의 모습으로 그려져,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을 해치우고 연료를 유출시켜 인질의 대부분을 낙하산으로 탈출시킨다. 그러나 가족이 이반의 손에 있다.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굴복한 그는 모스크바에 전화해 라덱을 출감시킨다. 엎치락뒤치락 싸우던 두 사람 중 결국 이반이 낙하산에 목이 졸려 죽는다. 모스크바에 다시 전화한 마샬은 라덱의 출소를 간신히 막는다. 난리통에 손상된 에어포스원은 자동조정 능력을 잃고 급강하한다. 대통령 구출작전이 벌어지자 마샬은 아내와 딸을 먼저 보낸다. 마지막 결전을 치른 그는 일촉즉발의 순간 에어포스원을 탈출한다. 에어포스원은 바다에 추락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테러 가담자는 기체와 함께 수장된다.영화는 미국 정치의 영화의 시작은 이 만 명을 학살했다는 카자흐스탄의 독재자를 침실에서 잡아들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쉽사리 발칸 반도에서의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를 생각게 한다. 클린턴이 유고를 공습했듯이, 영화속 대통령인 마샬도 러시아와 합동작전으로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간단히 잡아 버린다. 내정간섭과 인권이라는 미묘한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발칸 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아랍의 국가, 북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속 대통령 마샬은 평화는 대립의 부재가 아닌 정의의 존재다. 더 이상 경제적 제재 정치적 가식 뒤에 숨지 않고, 도덕적 의무를 다하겠다. 더 이상의 관용도, 두려움도 없다. 고 연설을 한다. 흡사 인간 권리에 관한 아브라함 링컨 같은 연설로 지극히 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은 법. 정의라는 것은 결국 미국의 정의 아닌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무리 초강대국이라 하여도 과연 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간섭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침공을 용인하는 것은 아닐까? 테러는 미국에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닌가? 이는 영화속 테러리스트인 이반은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기름값 5센트 아끼려고 이라크인 10만 명을 죽였잖아. , 총으로 사람 쏴 죽이는 나와 점잖게 버튼 누르라고 지시하는 너의 아버지가 뭐가 다르지? 이 질문에 마샬의 딸인 엘리스는 그저 아버지는 당신과 달라 당신은 괴물이야 라는 빈약한 답변밖에 던질 수 없다. 이는 곧 세계 패권국으로 군림하려는 미국의 억지 논리이며, 답변이다. 라덱 장군은 어찌되었건 한 국가의 지도자이다. 그가 독재자이긴 해도, 미국이 그런 식으로 끌어낼 자격은 없을 것이다. 라덱 장군이 출감되는 동안 죄수들이 불렀던 인터내셔널가는 그에 대한 지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물론 인터내셔널가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었다는데 는 분노를 금할 수 없지만) 수많은 인권의 유린이 자행되었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 니카라과의 소모사정권, 과테말라의 아르마 정권,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아이티의 뒤발리에 정권에 대한 지지와 찬사는 어떻게 볼 것인가? 반대로 무고한 베트남 양민 학살, 그라나다 침공과 파나마 침공 등을 자유의 성전 이로만 볼 수 있을 것인가? 약간의 비약이 있겠지만, 이 영화는 무척이나 무서운 논리를 미국인들을 비롯한 세계 관객들에게 퍼트리고 있다.영화는 또한 대통령에 대해 집요하게 말하고 있다. 월남전에서 무공훈장까지 받은 대통령은 목숨을 함부로 할 권리가 없으십니다 라는 부통령의 말이 무색케하는 무적의 전사 람보다. 냉철한 판단력과 강인한 체력, 순발력과 재치, 가장으로서의 인간적인 면까지, 실로 완벽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와 대조적으로 부통령과 자문위원들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부통령은 영국여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혼자선 비행기표조차 끊지 못합니다. 고 이야기되며, 블라우스에 진 땀 흘리고있지? 라며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그들은 전적으로 대통령 마샬에 의존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대통령제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데, 1967년에 비준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 25조는 대통령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 할 수 없는 경우, 현존하는 대통령을 대체시키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는 부통령과 대통령 자문위원이 대통령이 통치능력이 없음을 공동으로 결정하려는 장면이 나온다.(물론 부통령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고 마지막에 그걸 찢어 버리지만...) 아무튼 미국의 무기력하게 책상머리에서 고민 만하고 있는 부통령보다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고 싸우는 대통령이 훨씬 멋져 보인다.(그래서 부통령 출신인 고어가 부시한테 밀린건가? ^^;) 미국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대통령은 아마 그런 모습인가보다. 하긴 라는 영화에서는 직접 우주선을 몰고 나가 외계인과 싸우기까지 했으니. 그래서 얼마전 대통령의 날에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가장 많이 꼽은 건가? 미국인에게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Ⅰ. 들어가는 글인간은 정치적 동물 이라는 이 고대 그리스의 테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거듭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이는 인간의 존재양식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특성인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개인으로는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로, 집단으로는 국가의 법과 권력의 규제를 받으며 사는 것으로, 전형화되고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인류의 삶은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계속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생각된다.이러한 계속되는 인류의 삶 속에서, 인간을 규정짓는 단어라 할 수 있는 정치란 무엇이며, 그것을 연구하는 정치학은 어떠한 학문적 의미를 가지는가? 무척이나 막연하고, 어려운 질문이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지고, 발전되어온 정치의 모습과 정치학의 정의와 범위의 변화, 그리고 앞으로 정치학이 나가야할 길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대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Ⅱ. 정치의 정의정치(政治 politics)는 원래 그리스어로 도시국가(City-state)를 의미하는 'polis■■에서 유래되었다. 이를 공공이익이나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listotle) 이래로 정치에 대한 정의는 학자마다, 다양하게 내렸다. 정치의 본질에 대한 주요 논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분쟁은 조정되고 통일적인 질서가 유지되어야한다. 국가라고 하는 공동 생활 형태 속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풍습이나 도덕 등의 자율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질서를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한 법과 그 밖의 방법을 통하여 유지시키는 작용을 정치라고 보는 견해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도 소위 위로부터의 통치만을 정치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통치 내지 지배에 대하여 피치자쪽으로부터의 반항 및 그 밖의 활동, 즉 국가 권력 자체를 스스로 운영하려는 활동 등도 정치라고 보는데, 이러한 견해는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논하려 하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2 여기에 반하여 정치는 국가만시키며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시키는 작용으로 보는 점에서 1, 2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경제적 내지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항쟁 속에서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활동을 그 본질로 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자기편에게는 가장 우호적인 단결과 협력을 제공하고 상대편에게는 엄격한 대항과 극복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곧 정치의 형태이다. 또, 정치는 스스로의 의지에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상대방을 통제하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질서를 유지·강화하는 작용이다. 현대의 많은 국가에서야말로 사람들의 공적인 적대와 항쟁이 무엇보다도 결렬하게 전개되고있음을 감안할 때, 이 견해는 자연히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보는 경향이 짙다고 할 수 있다.4 한편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정치를 계급적 지배를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고 있다. 국가는 특정계급의 이익을 근본적으로 지키는 권력기관이며, 국가의 통치는 적대적인 제 계급의 저항을 누르고 스스로의 권익에 적절한 질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작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모든 대중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부단한 저항, 적극적인 요구 및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다양하고도 조직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이러한 지배와 저항을 본질로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다.앞에서 살펴본 견해들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가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며,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임은 공통적으로 발견되어진다. 그럼 이번엔 정치의 발생과 전개를 살펴보자.Ⅲ. 정치의 발생과 전개정치의 발생과 전개는 가장 기초적인 안간에 대한 고민 즉 인간학으로써, 인간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본성상 선한 존재 인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본성상 악한 인간 을 전제하는 지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러한 전제를 기반으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조화롭고 평화로운 상태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폭력과 광기, 무질서의 상태를 보는지에 따라서 국가의 형성 배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원시사회에 벌써 권력적인 지배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의심할 여지가 많다. 사회가 계급대립과 빈부의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발전 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사회질서의 유지가 공권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여기서 정치현상이 나타났다고 아야 마땅할 것이다.따라서, 고대 국가가 최초의 정치체제이며, 거기에는 노예제도가 존재하였다. 데모크라시(Democracy)가 태동된 아테네에 있어서도 노예는 전혀 권리를 갖지 못하였고, 몰락한 농민이나 수공업자층도 대단히 힘겨운 생활을 하였다. 민주주의는 비교적 부유한 자유시민의 전유물이였다. 노예 및 농민 대중의 반항은 고대국가에 있어서 정치적 불안의 요소로서 이를 외부에 대한 정복으로 해소하려는 의도 때문에 전쟁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정치의 목적이 최고선(最高善)에 있고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노예제도를 국가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긍정함으로써 노예는 그 노예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에 그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계급의 철학과 그에 아울러 거대한 부를 축척하여 막강한 권위를 가진 교회의 교의가 피치자의 순종을 가져오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대국가의 형태는 아테네의 민주제, 스파르타의 귀족제, 이집트·바빌로니아·페르시아 등의 군주제, 로마의 공화제, 로마 제국 등 수많은 형태가 있었으나, 민주제·공화제에서 볼 수 있는 약간의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체제가 피치자인 일반 대중의 자유로운 정치활동과 권리보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2 봉건 국가고대국가에서 계속된 봉건국가에서는 이미 능률성을 상실하였고, 더욱이 반항·반란을 자주 일으키는 노예로는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었으므로 농노제로 옮겨갔다. 그러므로 권력은 소수의 귀족(대지주)에 의하여, 행사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군사·재판·일반행정 등 모든 독점적인 권력을 쥐고있었으며, 교회 또한 자신의 광대한 교회령 내에서 재판국가론의 주창에 그친 것도 필연적인 사실이었다.3 절대주의 국가봉건제도 속에서 상품의 생산과 교환이 발달하여 도시중심으로 성장한 시민계급이 사회에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농민대중의 반항은 해를 거듭할수록 치열해져서 봉건국가가 동요하게 되었다. 영주·귀족 상호간의 이기적인 야심과 영토 확장을 위한 투쟁은 대중의 희생과 불만을 동시에 증대시켰고, 봉건영주의 재정을 궁핍하게하는 동시에 신흥시민계급의 힘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강대한 절대 군주가 나타나 통일 국가를 세우고 모든 권력을 자기 밑에 두게 되었다. 그것은 또 교황이나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여 스스로를 지상최고의 권력자로 고양시켰다.이 절대주의 국가는 가장 집약적인 관료적 전제지배, 상비군의 강화 상품생산과 교환의 육성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여기서도 피치자 대중은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N.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군주론(The Prince) J. 보댕(Jean Bodin)의 국가론(six Books of the Commomwealth 1576), T. 홉스(T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Leviathan 1651) 등은 모두 이 절대 군주제를 정당화하는 사상이였다.4 근대 국가농산물의 상품화 도시수공업 및 상업의 발전, 도시에 있어서의 봉건적 공화제의 수립, 시민계급의 성장, 해외항로의 개발과 식민지획득 등은 급속하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촉진하여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봉건제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근대민주혁명은 부르주아지를 봉건적 사슬로부터 해방시킨 혁명이었다. 봉건제 내부로부터 성장한 가내수공업이나 매뉴팩처(工場制手工業 manufacture)는 대규모의 공장생산으로 전환하였다. 자유경쟁의 원리 하에서 모든 상업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자유경쟁의 원리 하에서 모든 상업활동이 전개되었으며, 자유평등의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인 정치사상이 되었다.루소(Jean Jacque Roussean)나 로크(John Locke)의 은 부르주아의 정치적 등장이 시민사회질서에 치사상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자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 권력의 개입으로 경제의 민주화·사회화를 이룩하려는 정책이 자본주의 각 국에 널리 채택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는 지금까지 붕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5 현대 정치의 과제현대정치는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모순의 해결을 근본 과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의 독점적인 자본주의 경제 조직, 권력체제와 국민 대중의 생활권 및 그밖에 기본권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기초 하에서 선진국제국이 전지구상에 설정한 식민지, 종속국의 독립과 구소련의 붕괴로 인한 공산권의 몰락으로 인해 변화된 국제 정치 환경속에서 어떻게 국제 평화를 달성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핵무기와 환경오염 등의 위협을 전인류가 느끼고 있으며, 자원부족, 남북문제, 인종, 종교 등으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지금의 국제 사회에서 이러한 우려와 무력 충돌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조직적 노력이 창의적 정치에 의해 이뤄지지 않으면 안된다.Ⅳ. 정치학이란?정치학(政治學 political science)이란 위에서 살펴본 그러한 정치 및 정치 현상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 정치학은 그 기원이나 관심사가 기타의 여러 학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즉, 정치과정, 정치형태, 정치제도 및 기능, 정치 사상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정치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그 밖의 학문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관심사와 항상 중복된다고 할 수 있다.금세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정치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주로 공공 정부 및 정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미국의 정치학자인 A. 레니는 정부를 특정 사회에 있어서 법을 제정·집행하는 인사와 제도의 잡합체 로서 정의하는 동시에 정치를 정부의 여러 정치를 정부의 여러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 으로 정의함으로써 정부와 정치의 두 개념을 완전히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치학자들은 정치를 보다 폭넓게 정의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