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개론Ⅰ. 머리말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변혁의 세기이다. 경제 체제는 토지·자본·노동에 기초한 자원기반경제에서 지식이 생산과 성장의 기본이 되는 지식기반경제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으며 기술적으로는 아날로그 체제에서 디지털 체제로 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단위 국가 체제에서 국경이 무의미한 세계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교육은 학교교육 중심, 공급자 중심에서 평생교육 중심, 수요자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인구 구조는 인생 50년형에서 인생 80년형으로 바뀌고 있다. 평생 직장은 사라지고 평생 고용 가능성이라는 말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와 같은 총체적 변화는 생애에 걸친 체계적인 인적 자원 개발·관리라는 평생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평생교육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특히 사회가 분화 발전함에 따라 평생교육은 그 폭과 깊이를 꾸준히 넓혀 가는 경향이 있다. 교육 대상을 학령 아동이나 청소년뿐만 아니라 유아는 물론 가정 주부, 직장인, 일반 시민 및 노인으로까지 확대 하였고, 교육기관 역시 매우 다양한 형태로 확장시켰다.우리 나라의 경우 1970년대는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공장 노동자 혹은 예비 노동자들에게 직업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훈련원이나 사설학원 등의 사회교육 시설들이 들어섰는가 하면, 비진학 청소년들에게 학력 보충의 기회를 제공하거나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질을 함양시키는 야학, 산업체부설학교, 방송통신고등학교와 대학 등 각종 평생교육시설들이 생겼다.1980년대 전반에는 경제적 여유의 증대와 함께 여가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취미, 교양교실이 개설되었는가 하면, 광주민주화 운동을 빌미로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신군부세력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위해 대학생, 노동자 등이 중심이 되어 사회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각종 정치교육이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등장하기도 했다.급격한 사회 변화와 정보화,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날로 새로워지는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 하며, 이러한 평생 교육은 적극적으로 확대네스코 기본교육 사업으로 채택 되었고, 그 해를 「국제교육의 해」라는 주제로 내걸고 평생교육을 표방하기도 했다.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큰 구실을 담당하여, 1973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평생교육 발전을 위한 전국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고, 제 5공화국(1980년) 시절, 전면 개정된 헌법에 평생교육 진흥에 관한 조문이 제정되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1) 평생교육(Life Long Education)의 정의누구에게나 어느 때에나 그리고 어느 장소(Any one, Any time, Any where) 에서나 학습할 수 있는 기회와 場이 제공되어 영위하는 ‘인간의 삶과 성장’을 총칭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이념 추구를 위하여 태교에서부터 시작하여 유아교육, 아동교육, 청년교육, 성인 전기교육, 성인 후기교육, 노인교육을 수직적으로 통합한 교육과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수평적으로 통합한 교육을 총칭하여 말하며 그것은 개인의 잠재능력의 최대한 신장과 사회발전에 참여하는 능력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다.? 교육 양태 상으로는 형식, 비형식, 무형식 교육, 교육 영역 상으로는 가정교육, 사회교육, 학교교육을 포괄하는 총체적 이념이며, 궁극적으로는 학습자의 자율적 학습 수행과 교육적 선택의 자유를 통한 학습권이 보장되는 학습사회를 지향하는 교육 이념이다.※ 평생교육을 교육과 동의어로 보는 견해가 있다? ※ 평생교육 개념에는 교육의 이념이 내포되어 있다.? ※ 평생교육의 목표는 계속적 자아실현과 사회발전의 능력 신장에 두고 있다.? ※ 평생교육을 모든 교육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으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다.? ※ 평생교육은 교육의 통합개념으로 본다.(수평적 통합, 수직적 통합)? ※ 평생교육은 새로운 교육의 통합체제를 의미한다.? ※ 평생교육의 개념에는 국민에 대한 교육권 보장이 내포되어 있다.? ※ 평생교육의 강조는 교육개혁사업의 촉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 유사한 개념① 사회교육(Non-formal Educatio 가진 성인으로서 교육의 주목적은 노동시장의 변화에 따른 직업적 재적응과 생산성 제고 등 교육의 계속 통합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평생교육과 직업이 순환적·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고유 형태를 취한다는 점, 직업 진로와 관련하여 교육 주기를 설계한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개념들과 차이를 보인다.2. 평생교육의 의미와 특징평생교육은 한 개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는 만큼 그 연장성이 사회적으로 퍼지게 되며 의미 또한 매우 크게 된다. 평생교육이 어떤 면에서 필요하며 왜 중요한지 그것의 의미와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1) 평생교육의 대두 배경평생교육은 사회변화 따른 새로운 교육적 요구를 기존의 교육체제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비롯했다. 전통사회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단순한 성격의 교육을 필요로 했으나, 현대사회는 그 특성상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교육적 요구를 하게 한다. 우선, 현대사회의 새로운 교육적 요구를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김신일,1983, 평생교육의 기초와 체제. 서울: 법문사, 53-71.).첫째, 산업화 및 탈산업화와 그 여파로 인해 교육의 요구가 다양해졌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산업부분은 물론이고 비산업부분에서도 취업과 직무 수행에 필요한 교육의 수준이 크게 높아졌고, 도시화는 도시이주인구의 교육요구(직업기술교육, 도시생활 적응교육)를 유발했으며, 가족구조와 기능의 변화로 가족 구성원들의 교육적 요구가 높아졌다. 중류 이상 비취업 가정주부들은 증가한 여가시간을 교육적으로 활용하려 하고, 수명의 연장은 정년 및 가족 기능의 변화와 아울러 노년층의 노인교육은 물론이고 장년층들의 노년기 준비교육의 필요를 증대시켰다.둘째,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과 그에 따른 직업세계의 변화는 반감기(내용의 절반이 진부해지는 기간)를 끊임없이 감소시키고 있어 직업세계의 재교육 내지 계속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끊임없는 변화는 사회 그 자체의 불확실성을 증대시켰고, 그만큼 고정된 인간형의 사회화를 무의미하게 만듦과 동시에 주체적으로 유연하들 간의 연계를 의미 있게 모색하여 확장과 혁신의 과정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통합의 원리이다. 통합이 없는 확장은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낭비적이게 되며, 통합 없는 혁신은 성공하기 어렵다. 평생교육에서는 지식의 통합으로 학제간 연구의 실현 및 지식의 양적 팽창에 따른 질적 가치를 고양할 수 있고, 가정 지역사회 이보다 더 큰 사회 그리고 일과 매스미디어의 세계 등 교육적 잠재력을 통합하여 교육의 과정에서 보다 효과적인 새로운 학습상황을 창출할 수 있으며, 인간의 신체적 도덕적 미적 지적 발달 등 제반 영역을 통합하고, 학교교육 이전 학교교육, 학교교육 이후 및 순환교육의 학습단계를 통합한다.(3) 평생교육의 필요성◆ 랭그랑(Lengrand)의 견해 : 평생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인간의 이상, 관습, 개념의 가속도적 변화나. 인구의 증가와 평균 수명의 연장이 교육의 양적 확대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를 초래한 점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산업 직업구조의 변화라. 정치의 변동마.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정보처리 능력의 필요성 증대바. 여가의 증대와 활용사. 생활양식과 인간관계의 위기아. 현대인의 정신과 육체의 부조화자. 이데올로기의 위기에 있어서 정체감의 혼란현대 사회가 평생교육을 필요로 하게 된 동기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첫째, 정보 지식기술 개발의 주체가 되기 위한 계속학습의 욕구 증가,둘째, 기술의 발달과 작업 구조의 변화로 새로운 기술, 기능의 필요성 증가셋째, 평균 수명의 연장, 자동화에 의한 가사 노동의 감축, 출산 및 양육부담의 감소 등으로 여가시간 증대넷째, 대중교육시대의 도래에 따라 여성, 노인, 근로자, 농민 등의 교육기회의 다양화 등을 주된 요인으로 볼 수 있다.Ⅲ. 우리나라의 평생교육1. 우리나라의 평생교육현황(1) 평생교육기관의 개황우리나라 1998년도 평생교육기관의 유형별 총 현황을 보면 14개 교육 기관에 총 205,424개로 교육 연인원이 27,675,111명이며, 이용 연인원은 무려 228,779,317명에 달한다. 이 중에서 학원과 일반 평생복에서 1950년대)(1) 교원의 양성과 재교육(2) 성인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3)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의 제도화(4) 문맹퇴치 5개년 계획의 추진(5) 농촌계몽 활동과 농촌문고 설치2) 평생교육과 계속 교육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1) 재건 국민운동과 마을 문고(2) 사설강습소(3) 향토학교와 새마을 교육 운동의 전개(4) 도서관의 법제화와 정비 확충(5) 미취학 및 근로 청소년 교육의 추진(6) 해외교포 교육에 대한 관심의 증대3) 평생교육의 확립 (1980년대에서 현재까지)(1) 평생교육의 헌법 조항 신설과 사회교육법 체제의 정비(2) 방송통신대학의 발전과 개방대학의 신설(3) 독학에 의한 학위 취득제의 실시(4) 대학의 평생교육(5) 각종 문화센터나 회관의 평생교육(6) 기타 사회교육 시설의 확충우리나라의 평생교육 정책은 문교부와 교육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사회교육이나 평생교육을 담당하는 기구로 자주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사회교육만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국(국)수준으로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채, 때로는 문화, 예술, 체육과, 때로는 국제교육이나 해외동포 교육, 또는 직업교육이라 하여 전문대학의 학무나 행정까지 포함하거나 덧붙이는 등 교육부에서 영세한 주변적인 기구로 전전하다가 최근에 평생교육국에 이르러 겨우 모든 국민의 평생학습을 기획하고 진흥하며, 평생교육제도를 관리하는 중심적 부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3. 우리나라 평생교육의 문제점(1) 평생 학습권 사상에 대한 인식의 부족평생 학습권은 아동·청소년에게만 한정되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전 생애에 걸친 권리이다. 종전까지 우리 나라는 학습권을 아동·청소년기의 교육에만 한정시켜 보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보장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를 보장하기 위한 학습 체제를 구축하고 학습자(수요자) 중심의 교육체제 개편이 요구된다. 그리고 평생교육의 이념과 철학을 공고히 정립함으로써 평생교육 기관의 교육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한다.
▣들어가며..‘프랑스건축’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흔히들 에펠탑이라고 말할 것이다. 에펠탑은 프랑스의 상징이 될 만큼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펠탑만 가지고서는 프랑스건축의 전반적인 이해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 레포트에서는 프랑스 건축의 역사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건축양식을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프랑스건축은 유럽의 경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독자적인 그들만의 양식으로 창조하기도 했다. 또, 과거에 창조된 건축물을 토대로 더욱 더 세련되고 개성있는 건축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역사의 흐름과 발맞추어 걸어온 프랑스건축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본문◈로마네스크 시대의 유럽로마네스크는 10~12세기 서?북유럽을 기반으로 성립된 조형양식이다. 5세기부터 시작된 민족대이동의 여파가 안정을 찾은 것은 프랑크족이 9세기 초 샤를마뉴대제의 치하에서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만들었을 때였다. 프랑크 왕국도 9세기 말에는 동?서의 두 왕국으로 분열한다. 그리고 동 프랑크 왕국(지금의 독일에 해당)은 오토왕 치하에서 이탈리아 북부를 수중에 넣고 교회와 제휴하여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으로 강력한 봉건제도를 통해 지방의 영주를 결합하고 문화면에서도 유럽세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서 프랑크 왕국(지금의 프랑스에 해당)도 또한 왕권 하에서 국내 통일을 추진하였으나 이곳 지방 영주의 세력이 강하여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특성상 각 지방의 고유한 전통이 문화적으로 표출되었다. 게르만족 중에서 가장 늦게 이동을 시작했던 노르만족은 이 무렵 북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하여 11세기에는 윌리암 왕이 영국을 침공하였고(1066) 이 지역을 통치함으로써 자신들의 항해민족적 성격을 발휘하여 남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에 이르기까지 국토를 넓혔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거하여 그곳에 이슬람교국을 세웠던 사라센인은 이 무렵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에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로마네스크 시대의 이탈리아는 북부는 신성로마제국, 중리움층과 지붕의 안쪽에 해당하는 부분의 주랑 벽면은 작은 아치로 정리되었다. 또한 2층랑 위에 별도의 트리포리움층을 첨가하여 4층의 구성조차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2층 구성도 적지 않았다. 성당의 외관은 라인강 유역의 성당과 같이 탑군으로 인해 생기가 부여된 것은 드물고 일반적으로 주랑과 트란셉트가 교차하는 공간 위에 솟아 있는 커다란 조명탑으로서 특정지어진다.라 마드레느 성당그러나 노르망디 유파에서는 성당 정면에 눈에 띄는 3개의 탑을 좌우로 배치하는 형식이 지배적이며 이는 후에 고딕 성당의 기본인 정면형식이 된다. 벽면 처리는 보통 간소하고 육중하지만 점차 정면성이 의식되어 특히 서남지방의 성당에서는 파사드가 종종 다른 면보다 섬세하에 장식적으로 처리된다. 정면 입구가 중요시되며 그 위의 반원형 벽변은 도상조각으로 채워진다. 또한 점점 비대해지는 제실부는 내부공간이 방사상 제실로서 분절화됨에 따라 외부공간이노트르담 라 그랑드 성당규제되고 성당의 배면도 율동적인 볼륨의 배열에 따라 생기를 띈다. 성당의 내부는 디테일에 조각된 도상과 문양 조각이 풍부히 사용되는데, 주두 역시 라인강 유역의 비교적 간소한 것과는 달리 서술형 도상을 새긴 것 등 복잡한 형식이 선호되었다. 그런데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왕의 영지를 포함하는 북부지망은 11세기초에 이미 오르데앙의 구 성당과 같은 왕랑식의 큰 성당을 갖고 있었으나 이 지역은 대체로 로마네스크 예술이 빈약한 지방이었다. 현존하는 트루네의 대 성당은 몇 개 안 되는 북프랑스 로마네스크 성당의 일례로서 4층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주랑을 지닌 성당이다. 3엽형의 제실이나 높게 솟아있는 탑군은 이 성당이 라인강 유역의 로마네스크 성당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은 예부터 수도원이 번영했던 곳으로 그 중에도 클뤼니의 대수도원은 가장 유력하였으며 당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초에 걸쳐 개축된 이 수도원의 교회당은 제4 클뤼니 성당으로 불리우며 현재는 서쪽 트란셉트 가설하여 초기 고딕 건축 요소의 장점을 건축가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첨주에서 피어를 겹쳐쌓아 선에 의한 수직성을 추구하는 수법과 스테인드 글라스에 의한 신비로운 빛의 표현 등이 초기 프랑스 고딕 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①성 드니 성당파리 근교에 있는 성 드니 성당은 고딕 건축의 초기 형식으로서 도 시 교회형식의 규범적 개념을 잘 보여 주고 있다.이 성당의 수도원장인 슈젤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는 당 신 프랑스 왕국의 번영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슈젤 은 고딕 건축을 로마네스크에 뒤이은 단순히 하나의 건축적 경향이 아니라 그것과의 경쟁관계로 보았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을 강하게 부정하는 건축적 의도를 보여주었다. 슈젤 수도원장의 고딕 건축에 대한 이해는 우아하고 경외감이 충만한 내진, 즉 빛으로 가득한 연 속된 채플을 중시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건축관은 당시로서는 혁신 적인 의도였는데 그 이유는 로마네스크 건축이 단순히 빛을 끌러 들이기 위한 건축방식이었을 뿐 슈젤이 의도한 바와 같은 빛의 사용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드니 성당의 채플 부분과 납골당은 이러한 면에서 혁신적인 건축적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노트르담 성당전체적인 건물의 특징은 이성과 신앙심을 중세적으로 종합한 표현 즉, 이성은 수학적 비례의 모습으로 건물 각 부분들간의 완벽한 조화의 관계를 제공해 주며 신앙심은 성 드니 성당의 내부에 지극히 신성한 창을 통해 들어온 신비스러운 빛으로 충만하게 해 준다. 충만한 빛과 부분들간의 조화는 초기 고딕 건축이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했던 미적 가치라 할 수 있다.②노틀담 성당파리의 노틀담 성당은 프랑스 초기 고딕의 대표적인 교회당으로서 1163년 사제 모리스 드 슈리에 의해 착공되어 1250년경에 완성된 건물이다.2개의 종탑이 있는 서측정면은 매우 기념비적인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최하층에는 좌로부터 “성모”, “최후의 심판”, “성 안나”의 이름이 붙은 3개의 입구가 있다. 그 위에는 구약의 유대왕 28명의 “ 프랑스의 풍토에서는 결국 르네상스 양식이 넓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르네상스의 영향은 왕가의 그 주변에만 한정되었으며 종교건축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국왕은 로와르강 유역을 중심으로 궁전을 지어 생활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은 대부분 왕과 귀족의 궁전에서 나타났다.샤를르 8세(Charles VIII/재위 1483-1498), 루이 12세(Louis XII/재위 1498-1515), 프랑소와 1세(Francois I/재위 1515-1547), 그리고 30년 전쟁의 혼란기를 거쳐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Henry IV/재위 1589-1610)에 이르는 시기는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의 기초가 구축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이래 석공들 밖에 없었던 프랑스에 이탈리아에서 유입된 건축가라는 직업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다.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의 기초가 되었던 아탈리아 양식은 상당부분 변형된 형태로 프랑스에 전해졌다. 초기에 강력했던 밀라노 등 북 이탈리아의 도시는 르네상스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그 건축물 또한 지방양식에 지나지 않았다. 후에 로마나 피렌체 등에서 초대된 이탈리아인 건축가들은 이미 르네상스 말기 메너리즘 시대의 사람들이었다.이러한 양식이 프랑스 고딕풍의 건축과 혼합되엇을 때 나타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은 상당히 특이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프라지오콘도(Fra Giocondo)와 쥴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등 15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에서 일했던 이탈리아인 건축가들은 체재기간도 짧았으며 그만큼 중요한 작품을 남기지도 못했다.퐁테느블로 궁전미술가를 지원하여 본격적으로 이주시켰던 때는 프랑스가 자주 이탈리아에 원정했던때이며 르네상스 문화에 대해 접촉했던 프랑소와 1세(Francois I)시대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앙보아즈의 근교에 집을 얻어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프랑스에서 회화뿐아니라 궁전설계에도 관여했다고 한다.베니스에서 건축서롤름과 레스코였다.프랑스 초기 르네상스의 주도자였던 왕족과 귀족들은 이탈리아의 팔라쵸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궁정 설계에 착수했으나. 그것은 주로 파사드나 실내의 외피적인 구성 그리고 디테일에 한정되었으며 프랑스의 왕이나 귀족의 관심은 이탈리아 팔라쵸의 도시적인 표준 회랑식배치나 그 평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세 저택의 불규칙한 평면을 답습하든가 아니면 전원 빌라의 구성을 추구했다. 프랑스의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에 엄숙한 기념성을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참신한 위락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원풍에 대한 선호의 경향은 17세기 이후에도 귀족의 저택에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갔지만 왕궁은 그 본래의 성격에 따라 건축가 레스코의 루브르궁이래 도시적 개념 하에서 건설된다. 16세기 전반 프랑스의 건축활동은 처음에는 로알강 연안의 지방에서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그 이름을 따서“로알파”라 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주도자였던 프랑소와 1세는 1520년경 브로아의 옛 궁에 새로운 익부를 새로운 형식으로 증축했다. 이익 부의 증정에 면하는 파사드는 고전의 반주(半住)와 엔타블레이춰를 사용하여 질서를 표현하고 있으며, 다소 증세 적인 나선형 계단을 사용하여 성기 르네상스에 대한 완화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슈농소 성이 곳에 사용된 고대의 모티브는 아직 장식적 프레임에 그치긴 했으나 충분한 질서와 절도가 지배하고 있으며 모방을 초월한 새로운 프랑스 건축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프랑소아 1세가 샹보르에 신축한 성곽(1519년 경)에서는 그 파사드를 구성하는 고전의 모티프가 브로아의 그것과 비교해 단조롭고 지나치게 큰 원추형의 지붕으로 된 원탑이 있어 중세성곽의 망대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옥상부의 복잡한 구성은 이탈리아 팔라쵸의 거대한 프리즈로 이루어진 직선적인 구성과 현저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알 지방의 아젤리드와 슈농소의 성곽은 모두 당시귀족 저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아젤리드의 성곽(151이다.
프랑스 영화의 역사 Cin ma Fran ais뤼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영화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먼저 영화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즉, 미국의 T.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 와 바이타스코프 를 발명한 시기를 전후하여 시네마토그라프 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는 1895년 《리옹의 뤼미에르공장 출구(出口)》 《열차 도착》 등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멜리에스는 《로베르 우댕극장에서의 한 부인의 증발》(1895) 《달나라 여행》(1902) 등 트릭을 사용한 공상적인 영화를 만들어 구경거리로서의 영화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이에 자극을 받아 영화의 기업성에 착안하여 파테와 고몽 등의 여러 영화제작사가 설립되었다. 특히 파테사(社)는 1910년경까지 멜리에스를 능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화사까지도 앞지르는 맹렬한 기세로 영화산업을 정착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필름 다르사(Film d art 社)도 발족하여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영화를 제작, 대중적인 흥행물로부터 영화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리면서 새로운 관객층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제1회 작품은 1908년에 제작된 《기즈후(侯)의 암살》이었으며, 같은 해에 에밀 콜은 최초의 애니메이션영화를 만들었다. 1909년의 단편 M.란데의 《지고마:Zigomaar》, 1913년 발표된 《판토마》는 활극영화의 효시로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그러나 파테사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영화계도 거대한 미국 영화자본의 공세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917년 루이 델뤼크는 포토제니(photognie)이론을 제창하면서 포토(사진) 와 제니[精靈] 의 통합을 주장, 영화는 빛과 그림자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 곧 시각에 호소하는 음악이 내적인 생명을 불러일으킨다는 포토제니파(派)를 형성하였다. A.강스는 대표작 《철로가의 백장미》(1923)에서 기관차가 질주하는 속도를 역동적으로 컷 백하는 등 시각적 표현기법을 구사하였고, 《나폴레옹》(1925)에서는 3면 스크》(1958), 프랑수아 트뤼포의 《어른은 알아주지 않는다》(1959), J.L.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 마르셀 카뮈의 《흑인 오르페》(1959) 등이 누벨 바그파(派)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현실의 문제의식 촉발, 전통적인 영화문법의 부정 등이 공통점을 이루었다.누벨 바그의 주류는 평론가 앙드레 바쟁이 주재하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비평가 그룹으로서, 이들은 시네마테크(필름 라이브러리)에 드나들면서 고전적 작품을 통해 영화를 배웠다는 점부터가 이채로웠다.한편, 누벨 바그의 파문 밖으로부터 등장한 A.레네는 《게르니카》(1951) 《밤과 안개》(1955) 등의 기록영화를 만들었으나, 그 후 극영화 《24시간의 정사》(1959)를 연출, 과거 현재를 의식의 시간으로서 전개시켜 의식의 일상성을 거부하였고, 계속하여 《지난 해, 마리엔바드에서》(1960)를 발표하였다. 누벨 바그의 폭발적인 유행은 수많은 젊은 감독들을 일거에 데뷔시켰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자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점차 자연도태되고, 기록영화 수법의 시네마 베리테[映畵眞實]도 그 발전형태로서 파악되는 가운데 영화 전체의 새로운 경향으로 주목되었다.누벨 바그를 계기로 영화 자체가 크게 변모한 오늘날의 프랑스 영화는 시네마 베리테나 레네, 고다르, 트뤼포, C.를루슈 등의 작가 활동으로 요약된다. 당초, 누벨 바그가 문제를 제기한 전통적인 영화작법에서 벗어난 방법은 오늘날의 영화제작 형태를 통해서 보더라도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내용적으로도 줄거리의 흥미 같은 것보다는 직접 카메라에 의해 현실을 주체적으로 포착한다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 B.바르도, J.가뱅이 간판처럼 되어 있던 영화로부터 작가의 영화 또는 개인의 영화 라는 색채는 점차 더 짙어졌다. 이는 프랑스 영화의 전통인 독립 프로덕션 제도에 의한 제작 시스템과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영화제작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독자적인 기능이라는 견지에서는 언제나 세계의 첨단에 위치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8)으로 때묻지 않은 감수성을 보여 주었고, 최초의 장편 극영화 《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1959)에서는 자서전적인 작풍과 신선한 카메라워크로 주목을 받았다.《쥘과 짐 Jules et Jim》(1961)에서는 기법 내용이 모두 원숙하고, 새로운 연출수법은 프랑스 영화의 미래를 짊어질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 후의 작품 《부드러운 살결》(1963) 《흑의(黑衣)의 신부(新婦)》(1967) 등은 누벨바그의 퇴조와 함께 신선미를 잃었으나 그 사이 미국에서 제작한 SF영화 《화씨 451》(1966)은 하나의 문명비평으로 기억될 만하다.고다르 [ Godard, Jean-Luc , 1930.1.23 ]소르본대학교에서 인종학을 전공하고 영화평론을 쓰다가 단편영화를 제작하였다. 1960년 《네 멋대로 해라》를 발표하여 누벨바그(전위영화의 한 파)의 총아가 되었다. 종래의 연출 상식을 무시한 즉흥적 표현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대표작으로 《여자는 여자이다》 《여자와 남자가 있는 포도(道)》 《경멸(輕蔑)》 《미치광이 피에로》 등이 있다.고다르가 보여준 전통적 영화문법의 전복과 새로운 영화 형식의 탐구는 상당수의 영화학자들로 하여금 세계영화사의 흐름을 고다르 이전의 시기 와 고다르 이후의 시기 로 분류해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만큼 고다르는 새로운 영화 약식의 적극적 실험가로서, 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부단한 탐구자로서 현대 영화의 수많은 기법들을 만들어냈고 다양한 영역을 개척했다.1. 영화의 탄생 - 뤼미에르 형제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빠리의 한 카페에서 인류 최초의 영화 상영이 있었죠.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카메라와 영사기로 등의 아주 짧은(지금으로선 거의 홈비디오 수준의 -_-;) 영화들이 상영되었죠. 영화사가들을 이 때가 영화가 탄생된 때라고들 하는데요. 사실 그 이전에도 에디슨이나 몇몇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발명을 했었지만, 뤼미에르 형제를 높이 쳐 주는 건 영화의 제작 뿐 아니라 상영이라는 개념을 시도했다쑤였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라는 영화 잡지의 젊은 평론가들은 헐리우드의 장르 영화에 매우 열광하며 당시 프랑스 영화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60년대로 넘어오며 이 평론가들이 영화 감독들이 되었는데요. 이들은 누벨 바그(New Wave, 새로운 물결)라고 불렀습니다. 기존의 영화 형격을 해체하는 파격적인 영상과 알베르 까뮈 등 후기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내용 등 당시 침체된 프랑스 영화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영화사가들은 그 당시를 기점으로 현대(모던) 영화가 시작됐다고들 합니다. 그 유명한 장 뤽 고다르(네 멋대로 해라), 프랑소와 트뤼포(400번의 구타), 알렝 레네(히로시마 내사랑) 등이 당시 유명한 감독들입니다.6. 프랑스 누벨 이마주80년대에 들어서 프랑스는 세계가 주목할만한 새로운 감독들을 또 다시 배출했습니다. 레오 까락스(뽕네쁘의 연인들), 뤽 베송(니키타, 그랑 블루), 장 자끄 베넥스(베티 블루) 등이 그들인데요. 그들은 사각적인 이미지를 매우 중시하는 감독들이었죠. 60년대 말 이후 침체되어 있던 프랑스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 넣던 이들은 사실상 서로 연관성이 없는 감독들이었지만 프랑스의 영화사적 분위기에 맞추어 묶어서 이야기 하곤 하지요. 잘 알고 계시다시피 뤽 베송 같은 감독은 후일 이나 같은 대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프랑스영화 초창기 | 낙서장영화의 시작영화는 언제 우리 앞에 나타났을까. 100년전 1895년 12월 28일 그랑호텔의 그랑카페에서 영화가 최초로 유료상영 되었다. 이 1895년은 영화의 대중 상영을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영화비는 1 프랑이었으며 33명의 관객이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1895)'이 첫 선을 보였는데 이때, 달려오는 기차에 놀라 관객들이 도망쳤다고 한다. 1829년 잔상이라는 생리적인 현상이 발견되면서 미국의 에디슨은 카메라를 발명했다. 그러나 에디슨의 카메라는 대중적인 의미의 것이 아니라 주로 혼자 보는 의미의 것이었다. 1895년의 7)'-르네 끌레르'안개낀 부두(1939)'-마르셀 까르네'무도회의 수첩(1937)'-줄리앙 뒤비비에 : 댄스파티때의 파트너를 되새겨보는 미망인의 심리를 추적해 시적 리얼리즘을 성공케 했 다.'게임의 법칙(1939)'-장 르느와르 : 프랑스 영화의 고전2차 세계대전 이후1930년대는 프랑스다운 믿음과 독특한 색깔을 가진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그 영화적 권위를 다 잃게 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 르느와르 같은 감독은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영화 종사자중 일부는 독일 등의 선전 영화에 이용되기도 했다.'금지된 장난(1952)'-르네 끌레망 : 어린아이 눈으로 본 전쟁 고발영화.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전쟁 영화의 새로운 모형을 제 시해 주기도 했다.* 칸느 영화제 ***1946년 유명한 휴양도시 칸느에서 프랑스 영화의 꿈을 다시 키우게 된다. 칸느는 현재까지 명작의 산실이며 영화축제의 중심지로 또한 영화 축제의 자존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칸느가 그해 주목한 영화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세계 각 유명 영화인들의 스케줄에는 칸느 참석이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화려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cinematheque) ** (1968)시네마테크는 영화 박물관으로서 대형 영화 보관소이다. 80만점의 사진을 비롯해 시나리오, 포스터, 의상 및 각종 촬영 기재를 전시해 영화의 모든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앙리 랑글로와의 영화 상영은 아주 희귀해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보여주는 명소로서 1910/20년대 영화 및 뤼미에르 시기의 영화까지 볼 수 있었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앙리 랑글로와 :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필름 수집가로 불린다.시네마테크 운동은 많은 학생, 젊은 감독들이 영화 공부에 몰두하게 했다. 영화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그동안 도외시된 감독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졌다.*앙리 랑글로와 구명운동(1968) - 국가 문화정책에 반감을 가진 랑글.
프랑스와 만화1. 제 9의 예술, 만화 그리고 프랑스.만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림, 칸, 이야기로 이루어진 종이 인쇄물. 혹은 비현실적이고 코믹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움직이는 그림. 소설책 한 권을 완전히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만화책 한 권 정도는 아마 완독했을 것이다. 만화라는 것은 그만큼 가볍고 대하기 쉬운 장르이다. 그런 이유에선지 몰라도 만화의 위치는 우리나라에서 영화나 소설만큼의 사회적인 위치를 갖지 못했다. 80~90년대까지 한국에서 만화는 비주류의 세계였다. 만화라고 함은 어둡고 퀴퀴한 지하단칸방의 가난뱅이 만화가나 담배연기 가득하고 라면냄새 나는 만화방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존재였다. 주로 일본 만화의 불법복사본을 돌려 보고 그것이 팔리던 때도 있었다. 지금처럼 만화가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 자리 잡고 펜을 든 만화가들이 예술가로 존경받게 된 것은 불과 십년 안팎이다.만화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 프랑스를 부러워한다. 만화의 여러 가지 사회적인 면에서 프랑스는 그 위상이 매우 높은 문화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만화는 역사가 깊고 예술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만화를 제 9의 예술로 인정한 것도 바로 프랑스) 이다.장제르 혹은 뫼비우스 라는 필명으로 활동중인 만화가 - 그는 한국에서 베스트 셀러로 팔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 사진출처 : 필름 2.0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서점에 가면 우리나라와는 다른 풍경이 엿보이는데 만화책들이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15세기의 인쇄문화의 발달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혁명과 대중만화의 발전을 일구어 냈다. 혁명이라는 정치적인 토양에서 싹이 튼 프랑스의 대중만화는 철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이 점에서 더욱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린이 대상의 만화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만화를 저급한 문화로 여기는 인식도 없지 않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에서 91년 앙굴렘시에 국립 만화이미지센터를 설립하고 국제적인 만화 페스티벌을 열면서 훌륭한 작가주의 만화들을 널리 알렸고 그 덕분에 만화의 예술성과 위상이 한결 높아지게 된다. 프랑스 만화는 스토리 이상으로 그림체와 스타일을 중시하여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더욱이 그런 만화풍토를 이어주는 것은 대중적인 소재의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 말고도 작가주의 를 지향하는 만화가들의 인기라는 것이다.육십년 대부터 장 제르와 뫼비우스라는 두 개의 필명으로 남이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고 있던 만화가 뫼비우스는 이나 와 같은 진보적인 만화 잡지에 대단히 실험적인 판타지 작품들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1968년 프랑스 혁명의 진보적 기운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가장 중요한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때 그이의 만화를 보며 엄청난 감동에 사로잡힌 뤽 베송은 이십여 년 뒤 를 통해 그 세계를 영화로 표현해 냈다고 한다. 뫼비우스 말고도, 고도의 정치적 비유로 무장한 공상과학물로 이름 높은 엔키 빌라르, 영원히 방랑하는 정신의 매력적인 주인공 를 탄생시킨 위고 프랏, 독특한 에로틱의 세계로 미국 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은 이탈리아의 밀로 마나라와 같은 만화가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많은 유럽 사람들이 만화를 자신들의 교양 체계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으로 삼고 있는 까닭을 이들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올 4월에 개봉한 뫼비우스가 참여한 애니메이션 타임마스터(1982년작) : 뫼비우스는 유럽의 미야자키 하야오라 불리는 애니메이션 광(狂)들에게는 전설적인 존재이다.프랑스에서의 만화는 1960년대 혁명정신을 나타내는 장르로 사회적 책무를 이행했으나 1963년 라는 만화로 인해 모든 연령층의 독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만화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어떤 잡지는 어른들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만화를 읽을 수 있는 시대를 단언했고 만화는 일종의 예술적 성과물이 된 것이다. 아직 만화를 소비성 짙은 경박한 아이들의 문화로만 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부러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2. 프랑스의 만화프랑스라는 나라에서 만화라는 예술이 차지하는 위치만큼 표현하고 있는 장르도 다양하고 그 수도 많겠지만 프랑스를 대표할 수 있고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몇몇 재미있는 만화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1) 아스테릭스 (Asterix)1961년 프랑스의 작가 고시니가 글을 쓰고, 우데르조가 그림을 그린 만화 주인공의 이름 1961년 프랑스의 작가 고시니(Rene Goscinny)가 글을 쓰고, 우데르조(Albert Uderzo)가 그림을 그린 만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 다. 프랑스인(人)을 가리키는 골족(族)을 상징하는 인물로도 통한다.발매 후 1993년까지 세계 전역에서 2억 6천만 권이라는 놀라운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총 5800억 원을 벌어들였고, 31번째 아스테릭스 시리즈인 《아스테 릭스와 라트비아타》는 2001년 3월 유럽에서 일제히 발매되기 시작하자마자 이를 구입하려는 인파로 장사진을 이룰 정도였다. 아스테릭스 시리즈는 이 제 프랑스의 국민만화가 되어 미국에 대항하는 프랑스인의 상징이자 자존심 으로 떠올랐고, 1999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프랑스 영화 사상 최대 제작 비인 576억 원을 투입, 프랑스 국내에서만 1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타이타닉》의 모든 기록을 단숨에 깨뜨려 버리기도 했다.미국의 미키마우스, 영국의 해리포터 시리즈 등과 함께 프랑스의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캐릭터로 통하고 있으며, 원작자인 고시니가 1977년 세상을 떠난 뒤에는 만화가 우데르조가 뒤를 이어 계속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1961년 처음 등장한 이래 전 세계 42개 국가에서 출판된 프랑스 만화 '아스테릭스'가 국내에서도 출판됐다. 지금까지 약 3억 권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스테디셀러 '아스테릭스' 는 영화로도 제작돼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던 화제작이다.(2) 프린스 앤 프린세스프린스 앤 프린세스(Princes Et Princesses/Princes And Princesses, 1999)미쉘 오슬로 감독의 99년 작으로 2003년 부산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이라는 독특한 표현법을 사용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소심하고 겁이 많지만 용기를 내서 111개의 다이 아몬드를 찾아 공주의 마법을 푸는 왕자. 싱싱한 무화과의 맛과 바보스럽게 순 수한 소년의 정성에 감복해버린 거만한 여왕. 군중들의 비웃음에 개의 치 않 고 차분히 때를 기다리다가 멋쟁이 마녀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 어리석은 도 둑을 통쾌하게 넉아웃 시키는 가공할 다리 힘의 노파. 메가 레이더 살인을 즐기는 미래 여왕과 그녀의 잔인함 속에 짙게 드리워진 고독을 치유해준 파블 로 조련사. 황당한 마법의 키스로 인해 개구리, 나비, 코뿔소, 코끼리, 애벌레, 사마귀, 거북이, 벼룩, 기린, 고래, 황소로 변신해가는 왕자와 공주의 불길한 키스의 전주곡 등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성과 감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인간적인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프린스 & 프린세스 > 의 특징은 단순한 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점이다. 관절이 있는 종이 인형을 그림자만 보이게 해놓고 찍은 일종의 그림자극인 셈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의 가장 원초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기법은 장편 애니메이션에는 그리 많이 쓰이지 않아 이 작품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으나 지나치게 2차원적이고 영상정보가 적기 때문에 짧은 에피소드를 여러 개 엮은 것도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다.3. 부러울만한 프랑스의 만화 산업 정책과 우리나라의 현실프랑스의 자유주의 문화정책은 문화정책의 영역을 전통문화와 문화 복지 차원에서 대중문화와 문화 사업을 확대한다. 그 지원영역에 포함되는 주요 문화 사업은 영화, 애니메이션 분 아니라 음악, 멀티미디어, 게임, 교육디지털콘텐츠, 고급예술산업 등 포괄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 만화 산업에 대한 정책만을 살펴본다면 1984년 프랑스 정부는 만화 기술 분야 지원을 정하고 매년 만화잡지 제작비용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자금을 지원, 그리고 만화의 시나리오 작가와 만화가에 대한 지원사업도 추진 조형예술지원(Delgation aux du arts plastiques : DAP)도 1만~5만 프랑까지 만화가들의 작품계획에 따라 창작을 지원하고 있다. 또 프랑스의 중앙정부는 만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파리가 아니라 이미 만화가 지역의 특정산업으로 자리 잡은 앙굴렘시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는 국립만화영상센터(Centre National de la Bande dessinee et de l'images : CNDB)가 있는데 1년에 총 3~4회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내부에는 ‘자료센터’가 설치되어 관련 참고서적, 논문, 보고서, 전문잡지 등을 보관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프랑스는 ‘문화적’예외와 문화적 다양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문화산업을 둘러싼 통상협상에서 문화산업을 문화정체성을 담보할 파수꾼으로 인식한다. 프랑스의 경우, TV 애니메이션의 쿼터제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전체 애니메이션의 60%가 유럽연합(EU)회원국 작품이어야 하고, 또 전체 애니메이션의 40%가 불어로 제작된 것이라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TV 애니메이션이 거의 일본 작품 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라오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나라의 작품인 줄 알고 커온 세대였다. 나중에 그 것들이 죄다 일본 것인 줄 알고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던가. 한국은 세계에서 만화영화 제작만 3위권에 드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방영 애니메이션의 대다수가 미국과 일본 제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애니메이션 산업의 투자가치가 높아지면서 제작자들이 늘어나고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어느 정도가 자국 제품인 정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 만화의 현실은 어렵기만 하다. 방송사의 애니메이션 방영분 중 국산 작품을 20~30 %로 의무화 하여 방영하게 한 정책도 최근에야 실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류는 한국의 작품이 아니다.
다산(茶山)정약용에 대하여목민심서(牧民心書)를 대하기 전에 아마 우리는 그 책을 쓰신 다산(茶山)정약용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애를 알게 되면 『목민심서』가 어떤 동기와 경위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한 층 더 깊이 이해를 더하게 될 것이다.정약용은 경기도의 작은 마을에서 정재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인파의 양반으로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라 진주목사 등 지방수령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윤씨는 유명한 화가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됨됨이는 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거라 할 수 있겠는데 정약용의 아버지는 다산이 태어나던 해에 일어난 사도세자의 참변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래서 다산의 이름을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다산은 학문에 능하고 영특하여 스물한 살에 진사로 성균관의 학생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정조의 눈에 들어 임금에게 을 강의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로 인해 정조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고 임금의 총애를 받으나 이로 인해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실학을 중시여긴 다산은 서양문물을 접하고 새로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이는데도 앞서 나갔다. 그러나 서학에 가담했다하여 그를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유배 보내지게 된다. 그러나 다산을 아끼는 정조가 그를 곧 풀어주고 다시 자신의 옆에 둔다. 다산의 학문이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것임을 보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수원성을 쌓은 일인데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그 성을 쌓고 그 일을 다산에게 맡겼다. 다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명품인 거중기를 발명하여 성을 축조하고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남긴다. 다산은 이런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기술만 개발한 것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을 가차 없이 적발해내고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다른 수령들이나 양반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여 다른 옳지 않은 양반들에게 적대시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에게 든든한 벽이 되어주던 정조가 돌아가시자 다산은 험난한 인생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동안 그를 적대시하던 공서파에서 다산이 속해있는 남인들을 내 몰기 시작했다. 그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결국 18년 동안 강진 산정에서 유배를 살게 된다. 다산은 그곳에서 농민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관리들의 수탈이 얼마나 심각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런 삶에서 나오게 된 책이 바로 『목민심서』인 것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의 뜻을 살펴보자면 다산이 책의 자서(自序)에서 그 점을 밝히고 있다.“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반이요 반은 목민이다. 목민이란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이요, 심서라 한 것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유배에 몸이 묶여 백성을 보살피고 싶어도 보살필 수 없기에 그 마음을 책에 담은 다산의 뜻이 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목민심서의 구성을 살펴보면 수령이 되어 부임하여 관직을 물러날 때까지 명심해야 할 일을 12강(綱)으로 크게 구분되고 이 강(綱)마다 6조(條)씩 조목을 두어 모두 12강 72조로 되어있는데 이는 목민관의 생활을 총 망라한 것이다.목민심서(牧民心書)제 1편은 부임(赴任)에 관한 육조(六條)이다. 목민관으로 발령받고 부임하기까지 유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적어놓았다. 목민관은 임금의 뜻에 따라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직책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다. 그리하여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구분해야한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제 2편은 율기(律己), ‘몸을 다스리는 원칙’이란 뜻으로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이 담겨있다.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제 3편 봉공(奉公)은 임금을 섬긴다는 뜻으로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방법이 적혀있다.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당시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絞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써서 백성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법을 잘 지키는 한편 지방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는 데 힘써야 한다. 공문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또한 공납과 같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서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제 4편은 애민(愛民)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4궁(窮)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4궁이란 홀아비와 과부, 고아,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홀아비와 과부를 재혼시키는 일에 힘써야 하고 집안에 초상이 난 사람에게는 요역(搖役)을 면제해 주고 환자에게는 정역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자연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제 5편부터 10편까지는 각각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편까지로 각 방의 세부업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아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이전 편에서는 목민관은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고 인재를 적재적소(適材適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명한다. 호전 편은 세금을 거두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약용은 공장한 세금 징수를 위해 해마다 직접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적을 정비하고 부정방지에 힘써야 하며 국민 경제의 근본인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전 편에서는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병전 편에서는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병역의무제에 있어 부정이 많았다. 목민관은 이러한 부정을 가려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병기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형전에서는 재판과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재판을 할 때는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지나친 형벌은 피하고 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일삼은 흉악한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공전은 산림과 수리 시설, 환경 미화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제 11편 진황 에서는 재해가 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구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듯하게 위로해 주어야 한다.제 12편 해관은 관직에서 물러날 때를 말한다.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와 그 이후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랜 병으로 눕게 되면 거처를 옮겨서 공무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하는 것으로 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