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으로 가야한다』중심으로-1. 시인인가 감독인가.작가 유하는 1988년 에서『무림일기』로 등단한 이후 두 번째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는 시집이 나오자 그 시집 때문에 압구정동의 명성이 높아 졌다고 할 정도로 유명 해 졌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가 알려지자 그는 시집과 동명으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계에도 입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첫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제목의 영화는 1993년 1월22일 개봉했으나 관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쓴잔의 고배를 마셔야 만 했다.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영화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 대중이 아닌 고급 독자만을 상대로 했던 자신의 시적 언어가 일반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와 방법으로 터득되지 못한 것과 또한 90년대 강남 거리를 활보하던 오렌지족들의 심리를 탐색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하는 자신의 시적 언어의 상식을 깨지 못한 것이 영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첫 영화 실패 이후 좌절하지 않고 계속 영화를 제작했다. 2000년에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 2006년 ?비열한 거리?. 등을 계속 제작 개봉하면서 영화감독으로도 성공을 해서 지금은 시인보다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 해 졌다.시인 유하 자신도 첫 영화란 영화를 찍기 전까지 시인이었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시인 출신의 영화감독이고 싶다. 라고 한다. 시인 유하도 어쩌면 욕망의 아궁이에서 불타는 뜨거움이 있었기에 해 냈으리라 생각 된다.2. 배나무 숲과 빌딩 숲의 사이의 갈등평론가 박철화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의 시집을 평하면서 두 갈래로 정리하고 있다.) 무림일기 이후 하나는 『비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도시 계열의 시와 정글어가는 ?하나대를 바라보며?와 같은 농촌 문화의 몰락을 그린 서정의 시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런 관점에서 뿌리 없는 문화에 대한 비판과 그 뿌리에 대한 복원이라는 과제를- 말하고 있다.이처럼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한다』의 시집을 두 갈래로 나누어 보면 ?고향의 향수와 욕망의 아궁이?라고 제목을 붙여본다. 부연 설명을 하면 배나무 숲이 우거진 고향과 도시로 개발되어 빌딩숲이 들어선 욕망의 도시를 말한다. 시인은 어린 시절에 지냈던 잃어버린 고향의 정취와 시인이 된 지금 뿌리 채 변해 버린 압구정동의 문화를 꼬집고 있는 것일 게다.고향과 같이 바람이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서 떨어진 배를 주워 먹으며 곯은 배를 채우던 그날을 추억해 보지만 이제는 배나무 숲은 사리지고 거리에는 고급 세단이 질주를 하고 현대 백화점, 한양아파트와 같은 빌딩 숲에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놀아나는 가진자들의 흥청거리는 모습을 보며 시인은 압구정동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밤이면 옹골지게 익은 배가후두둑 후두둑 녀석은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주워 담았다배로 허기진 배를 채운 새벽, 녀석과 난 텅 빈 신사동 사거리에서(........)펜트하우스, 바람 부는 날이면 녀석 생각이 배 맛처럼 떠올라 압구정동그 넓은 배나무 숲에 가야 했다 그의 십팔번 김인순의 여고졸업반휘파람이 흐드러진 곳에 재건대원 복장을 한 배시시 녀석의 모습(........)배 맛처럼 떠오르는 그애 생각에 배 나무숲 있던 자리 서성이면그 많던 배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수많은 배들이...... 지금이곳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배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가 배나무보다?바람이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 부분한양쇼핑센타 현대백화점 네거리에 떡하니 결가부좌 틀고앉아온갖 심혜진 최진실 강수지 같은 황홀한 종아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不淨觀이라도 해야 하리 옛날 부처가 수행하는 제자에게 며칠을 바라보라 던져준 구더?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6? 부분< 구정동(......)진이정의 압구정동에서>작품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지만 유하의 시를 읽다보면 이분법 적으로 느껴진다. 박철화의 평대로 ?하나대와 압구정동 사이의 긴장?이란 제목처럼 ?바람이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의 시를 분석 해 보면 과거 압구정동이 개발되기 전의 배나무 밭이 무성하던 시절 배고픈 젊은이들이 바람이 부는 날 떨어진 배를 주어먹으며 놀던 그 때를 기억 해 보면 고향과 같았을 것이다. 동무가 있었고 나눔이 있으며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배나무 숲 대신 각박한 빌딩이 숲을 키 재기를 하고 서 있다.어느 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시화에 먹혀버린 압구정동은 이제는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일손이 바빠 아주머니를 부르던 소리가 이제는 변해서 오색 불빛이 춤을 추는 빌딩 숲속에서 밤 낮 없이 욕망을 부르는 사장들의 술 취한 소리가 밤을 깨운다. 결국 문화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쾌락과 욕망의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거리는 심혜진, 최진실, 강수지 같은 영계들의 황홀한 종아리를 아래위로 훔쳐보며 옛날 부처가 수행하는 제자들을 앉쳐 놓고 참 선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처럼 쾌락의 용솟음과 싸움을 해야만 하는 절간이 되었다.3. 새로운 문학의 태동70년대 와 80년대가 민중문학의 주된 흐림이었다고 하면 2000년대에 들어서 강남 문학이 태동하고 있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2006년 정미경이 발표한 단편 소설 ?내 아들의 연인?이 이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고 한다. 정미경의 ? 내 아들의 애인?은 이른바 강남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강남의 부유층 여인인 나는 ‘아들의 가난한 애인 도란’을 주인공으로 하여 압구정동을 무대로 ‘가난과 부’를 대조 시키면서 강남문학이란 형태의 새로운 글쓰기가 태동되었다.원래 문학의 미덕이란 편협한 계급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사회와 개인에 대한 깊이읽기를 보여 줌으로서 공동체 내부에 소통과 화해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야 한다. 문제는 일부 탐욕스런 강부자들이 새로운 문학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다. 물론 정미경의 강남 문학이 꼭 강남에만 국한 된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문정희 시인의 시집 『나는 문이다.』는 2007년 강남 중산층 주부의 생활을 진솔한 언어로 풀어 섰다.“빈 몸에 도끼 하나들고/ 젊은 강도처럼 숨어 들어와/ 수십 년을 눌러 산 압구정동을 떠나”라는 표현은 문 시인 자신이 충혈 된 불면으로 부유의 노예였다고 자복하면서 자나간 젊음을 아삿짐에 싸지 못하겠다고 한다.) 정미경, 문정희와 같은 시인들이 강남의 부와 쾌락의 문화를 소개 했다고 한다면 강남 리얼리즘문학의 선두주자는 1991년도에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 한다.?를 발표한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를 들 수 있을 것이다.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사과맛 버찌맛 온갖야리꾸리한 맛, 무쓰 스프레이 웰라폼 향기 흩날리는 거리웬디스의 소녀들, 부띠끄의 여인들, 까페 상류사회의 문을 나서는구찌 해드백을 든 다찌들 오예, 바람불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저 흐벅진 허벅지들이여 시들지 않는 번뇌의 꽃들이여하얀 다리들의 숲을 지나며 나는, 끝없이 이어진 내 번뇌의 구름다리를출렁출렁 바라본다?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언제 부터인가 압구정동의 빌딩 숲과 네온사인 번쩍이는 거리의 문화는 서울 장안에서 부의 상징이 되었다. 상류 사회의 문을 나서는 여인들은 꾸찌 핸드백을 들고 웰라폼 향기를 날리며 한양 백화점을 들락거리는 모습은 어느 날 체제가 만들어 낸 부의 상징이 되는 거리이다. 문학은 언제나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60년대 나라가 살기 어려운 시대에는 사랑방 손님이나 젊은 느티나무 같은 휴머니즘의 ?서정문학? 형태의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그리고 70년대를 지나면서 독재 시대에는 감옥을 가더라도 독재에 항거하는 글쓰기로 그때는 ?민중문학?이란 형태의 이름들이 붙여졌었다.물론 이에 대하여 반론자들도 있다. 몇 편의 글이 쓰여 졌다고 해서 특정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 시대를 그대로 뛰어넘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성민엽은 『한글세대와 시인』이란 글에서 한글세대와 일본어 세대를 구분했듯이 우리는 유하로부터 비롯되는 일군의 시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굳이 그 출발점을 유하로부터 할 필요는 없겠지만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세대 시인들은 시적 특성이나 그 외에 그들의 정신적 풍토를 보았을 때 기존의 시인들과는 많은 차이를 두고 있다
영화 밀양 비평문-인생의 베일과 신적존재-차례Ⅰ. 서론 / 2Ⅱ. 본론 / 21. 내면과 외면의 이중성 / 22. 무의미가 주는 힘 / 33. 소멸을 향한 욕망 / 44. 반복과 인생의 권태 / 55. 신의 눈이 된 카메라 / 5Ⅲ. 결론 / 6Ⅳ. 참고 문헌 / 7영화 밀양 비평문-인생의 베일과 신적존재-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20091101009 황의일극 문학 비평 1Ⅰ. 서론주인공 신애는 남편의 사고사 후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아들과 함께 내려가는 그녀는 자신의 차를 고치러 온 카센터 사장 종찬에게 이렇게 말한다.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이어지는 답은,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자신을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밀양에 피아노 학원을 열고 나름대로 정착해 살아가는 신애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유괴된 아들, 그리고 아들은 곧 처참히 죽임을 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곧 신애는 변한다. 변하지 않으면 이상할 고통스런 시련의 연속이 그녀를 종교의 힘에 의지하게 만든다. 아들이 죽기 전 햇빛을 예로 들며 자신을 전도하려는 약사에게 신애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이건 그냥 햇빛이에요. 하나님이 어딨어? 그냥 햇빛인데?” 그런 그녀가 아들을 잃은 후 종찬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어요?”주인공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교도소에 면회를 간 신애. 하나님을 통해 그를 용서하려던 신애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이미 범인도 하나님을 통해 스스로 용서를 받은 상태인 것이다. 범인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자신인데 하나님은 이미 그를 용서했단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하나님은 하나인데 이렇듯 다른 두 사람의 입장을 볼 때 신애는 용납할 수 없었고 또 그런 상황에 절망하고 미쳐간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신을 불신하고 부정하며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주인공을 통하여 실존과 신앙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Ⅱ. 본론1. 내면과 외면의 이중성「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인간으로서 '자기결정'의죽은 척, 거짓으로 사라진 척, 거짓으로 코 고는 척한다. 그리고 마침내 거짓은 진실이 돼 아이는 눈앞에서 사라지고 만다.또한 신애는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괜히 아는 척 하며 산다. 첫 장면, 밀양으로 내려오는 도로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신애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그런데 '밀양'이 '비밀의 햇볕'이라는 의미라며 종찬에게 아는 척을 하지만 실제는 밀양이 어떤 곳인지 자신도 모르는 곳이다. 특히 그녀는 우월의식 속에 산다. 남의 가게 인테리어를 바꾸라고 훈수를 하는가 하면 돈벌이의 이치를 '아는 척' 진짜 위에 가짜로 포장을 덧씌우고 살아간다. 신애의 포장 된 그런 행동은 후에 부자로 오인 받아 아들의 유괴로 이어진다. 유괴범의 협박 앞에 절박한 심정이 된 신애는 "돈 있는 척 거짓말한 것"이라고 애걸하지만 '거짓말'의 대가는 그녀에게 혹독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그런 진실과 거짓게임의 결정타는 신앙의 반항 행위로부터 시작 된다. 신애는 자신이 믿는 신을 모독하기 위해 그녀는 목사의 설교 도중 아이러니한 노래 '거짓말이야'를 틀어버린다던가 윤리적 배반자로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 된 삶을 통하여 신을 응징하는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녀의 행위 역시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이외에도 진실과 거짓의 숨바꼭질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러니까 신애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는 건 안 믿는 거네요. 세상에는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있어요." 라는 약국 집사의 말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진실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설교한다.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거짓은 아니라는 것. 이 명제는 일종의 영화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지만, 가장 분명한 대상의 형태를 묘사하는 영화는 최고로 '신실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예술이다. 신실한 이미지는 가시적 영역 뒤에 숨어 있는 비가시적 영역까지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빛'이라는 '밀양'의 뜻풀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밀게 다짐하는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무의미로 추락한 뒤 겪게 되는 절망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신애는 자의 던 타의 던 간에 자신이 믿던 신에게 배신당했다고 판단한 뒤 좌절한 나머지 나는 과연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 나의 삶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무너질 순 없다고 일어선다. 날 이런 벌레 같은 무의미한 존재로 만든 신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신애는 작정한다. 즉, 그녀의 분투는 '무의미와의 투쟁'인 셈이다. '밀양'이라는 공간 역시 그 자체로 무의미의 장소다. 세상 어디에도 있을 법한 도시, 어디에도 무방한 공간, 가장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가장 평범하게 가장 평범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도시가 밀양이다. 진부함, 특징 없음, 사소함, 무의미, 그러나 그 공간자체, 실재하는 공간의 밀양은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또한 「밀양」의 무의미성은 영화 매체의 속성과 연결된다. 영화는 무의미를 보여주는 매체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말하는 장치가 아니라 대상의 표면을 차갑게 재생하는 냉혹한 기계장치다. 카메라는 인간의 속마음을 투사해서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X레이가 아니며 투시경도 아니다. 대상을 취사선택해 재생할 수 있다는 것 외에 카메라가 가진 능력은 없다. 하지만 카메라를 활용한 영화는 그 본질을 왜곡시켜왔다. 카메라는 현실을 담는 기계장치지만, 영화는 현상 혹은 현실을 '허구적인 구조' '작가에 의해서 해석된 완결된 이야기'로 재현해왔다. 카메라는 '진실 된 기계'지만, 영화는 신적인 지위를 남용해 현실을 가짜로 만드는 '거짓 예술'인 것이다. 여기서 신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은 영화의 서술 주체, 즉 감독이다.「밀양」은 카메라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창동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실존의 위기라는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반대로 영화의 윤리에 대해서도 동시에 질문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밀양」의 윤리적 순결주의는 의심받을 만하다.. 소멸을 향한 욕망말의 비유적인 의미에서 「밀양」은 '소멸을 향한 욕망'에 의해 추동된 영화처럼 보인다. 의미의 소멸, 영화적 이야기의 소멸, 연기의 소멸, 의도의 소멸, 사건의 소멸 등등.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했다는 건 단지 전문가를 쓰지 않았다는 것보다 '연기'를 부정하려 했다는 걸 의미한다. 연기의 소멸은 영화가 조장하는 거짓들에 맞서려는 창작자의 의지 표현이다. 하지만 「밀양」에는 의미화 작용의 틀 속에 감싸인 까닭에 무의미로 향하는 소멸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한다. 이창동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의미'이며, 강렬한 '메시지'이며, '각성'이며, '계몽'이다. 종종 서사의 유혹을 피해 달아나는 듯한 이미지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작가의 시선이 매개하는 숭고한 의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궤멸돼가는 한 여자의 인생 주변을 관찰하는 작가 자신의 눈과 구별되지 않는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신의 시선이 그 자신, 이창동의 목소리임을 알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인간사에는 과연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일까. 아니면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힘의 세계가 있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은 영화 「밀양」을 찍으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질문하는 관객들에게 어떻게 나타내 보여 줘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했다고 말했다. '비가시성의 가시화'가 그의 화두였던 셈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고 했을 때, 그 계기는 필연적인 '동기'가 아닌 완전한 '우연'에 의해서이다. 어쩌면 그건 감독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발생한다. 신애가 한 치 앞에 있었던 구원의 빛에 둔감했던 것처럼. 「밀양」에서는 이 같은 우연적인 계기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영화는 여전히 놀랍도록 촘촘히 짜인 드라마를 통해 전진하는 이야기를 보여줬을 뿐이다.적어도 신애의 자학 앞에서 삶은 의미가 없었다. 또한 그가 거주하는 곳 역시 삶의 의미는 없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이다.소설가들과 영화감독들은 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선택권을 가졌을 때부터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 이창동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신비주의를 벗겨내려 했다"는 요지의 말로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지만, 그의 카메라는 지극히 작가 중심적인 시선의 위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무의미가 아닌 '의미'가 앞서는 순간들에 의해서 확인된다.4. 반복과 인생의 권태주의 깊게 영화를 봤다면, 사소하게 넘겨버릴 수 있는 계기들마저도 모두 이후에 올 사건들에 대한 복선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반복'이다. 「밀양」은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적인 이미지들을 복선처럼 사용하고 있다. 첫 장면은 파란 하늘을 보여주다가 차 안에서는 무료하게 하늘을 보고 있는 준이로 커트된다. 그리고 준이의 사체가 발견된 현장검증의 장면에서는 다시 한 번 파란 하늘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또다시 차 안에 앉아 있는 신애에게 커트된다. 두 번의 급정거도 반복되고, 유괴범이 요구한 돈을 쓰레기통에 넣고 나오던 신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급정거를 하는데, 그때 차에 받힐 뻔한 아이는 유괴범의 비행소녀 딸이다. 이후 신혼부부로 보이는 남녀를 칠 뻔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신애에게 그들은 "사람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됩니까?"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치 신애의 처지를 알고 있다는 듯 뼈 있는 말을 던진다. 반복은 계속된다. 신애의 하늘 쳐다보기가 반복되고, 준이의 속이기 게임이 반복되고, '밀양은 어떤 곳입니까?'라는 질문이 반복되고,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기가 반복되고, 유괴범과의 최초 전화통화가 반복된다.5. 신의 눈이 된 카메라「밀양」이 윤리적인 주제를 다룬 영화라는 걸 의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존재를 위협당하는 인간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죄에 대한 용서, 또한 용서권의 박탈로 인해 비롯된 인간과 신의 반목,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구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편의 윤리극임에 틀림없다. 원작
-김혜순 시 『불쌍한 사랑기계』를 중심으로-1. 들어가는 말김혜순 시인『불쌍한 사랑 기계』의 시들은 시간과 공간을 요리하는 기계들이다. 이 기계들은 과거로 미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현재의 위치에 위에 놓는다. 또한 공간들을 한 몸속에 집어넣고 흔들어 뒤 섞었다가 토해 내기를 반복한다. 그러기에 김혜순의 시는 다른 시인과는 달리 차별화된 형식이 있는 독특한 화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시인은 삶과 관련된 정서적인 감정의 방출을 위해서, 직접 경험한 현실을 작품에 표현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변형시킨다. 이런 변형은 그녀가 표현주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난다. 따라서 표현주의는 시인의 느낌에 따라 표현되어져서 시가 독특한 개성으로 빛을 발하지만 때로는 표현하고자 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사실 시인의 독자들은 두 분류인데 하나는 시인의 시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유형과 또 하나는 처음부터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해 배척하는 유형으로 나뉜다. 그러기에 김혜순 시인의 시는 단번에 그 주제와 이미지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고 해석이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불친절한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인의 그런 불친절함이 오히려 독자 들에게 오랜 사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또한 김혜순 시인의 시는 실존적 고통을 고백하는 형식이 아니라 고통을 연기하는 유희의 형식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시인이 체험의 사실적 재현보다는 언어를 통해 현실과 똑같은 새로운 현장을 구축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김혜순 시의 독특한 소재는 여성의 몸이다. 그의 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넘나드는 다층적 시간을 완강하게 가두고 있는 현실의 벽을 부수고 새로운 길로 이끈다. 몸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시인의 시적대상은 외부세계를 몸으로 껴안음으로써 현실 문제를 절실하고 생동감 있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외부의 사건을 내부로 끌어들여 그의 몸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며 단순한 상상 같지만 김혜순의 시 안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2. 아이를 낳은 기계로서의 몸 이미지김혜순 시인의 주 된 시어는 몸 이미지이다. 사람의 몸을 기계로 보고 있다. 몸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떠한 일을 하던 몸을 사용해야 한다. 몸을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글을 쓰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몸이 없이는 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몸을 시인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기계로 보았다.“저만치 산부인과에서 걸어나오는 저 여자옆에는 늙은 여자가 새 아기를 안고 있네“(.......)“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나님이 키운 그 나무 그 열매 다 따먹은저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붉은 몸뚱이 하나씩잘라내게 되었을 때“(........) -김혜순“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 오시는 그분이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그 별이 터져서 네 몸 속에서 쏟아지고 있는가 봐이제로부터 이 별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야“-김혜순여자의 몸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나님이 키운 그 나무 그 열매 다 따먹은 저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 붉은 몸뚱이 하나씩/ 잘라 내게 되었을 때”/라는 표현은 여자로써 자녀를 낳을 때 참을 수 없는 그런 고통이 있음에도 그 고통을 참고 자녀를 낳는 어머니의 위대한 몸에 대한 표현이다. 아버지가 씨를 심었다면 그 씨를 몸이라는 밭에서 키워 출산하는 것은 하나의 공장이다. 지금은 하나나 둘만 낳아 기르지만 우리 어머니의 시대에는 아이를 낳은 기계 내지는 공장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많게는 10여명의 자녀를 낳아 길렀다. 만약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10명을 낳으라고 한다면 내가 애 낳는 기계냐고 따질 것이다.여성은 태고로부터 자신의 몸 안에서 뜨고 지면서 커지고 줄어드는 달처럼 죽고 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본다. 그러기에 여성의 몸은 무한대의 프랙탈 도형이다. 이 도형을 읽는 방법으로 여성인 나는 생명이 흘러들고 나가는 길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산다. 나는 사랑하므로 내 몸이 달의 궤적처럼 아름다운 만다라를 이 세상에 그려 나가기를 바란다.“이 몸의 스크린만 찢고 나면내 몸에서 홀로그램이 터져 나온다.(..........)“고독하다든가 뭐 그런거. 왜 안터지지? 그런거. 몸통이 너무 부담스러워 하면서 몸을비비꼬는 거 말이야. 그랬더니 남자는 뭐 자기는 벌써부터 그런 느낌으로 살아오고 있대나!그래서 5분만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 몸이 비비 꼬인대나 어쩐대나(들은 척도 안하고)“-김혜순문학평론가이며 시인인 신수정은 김혜순 시인은 시를 자신의 등허리에 꽂혀있는 수많은 케이블 선들을 자르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스크린을 찢고 내장된 홀로그램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아마도 주문을 비밀번호로 전환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 그녀의 마법은 동세대의 아날로그 방식을 넘어 거의 '디지털-매직'의 수준에 이른 것 같다. 당신들에게 오늘 그녀에 관한 비밀 하나 털어놓겠다. 그녀는 가슴이 터져버린 사이보그다. 혹 그녀를 만나게 되면 아직도 푸른색으로 칙칙 거리는 모니터의 소음부터 죽이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바란다고 충고한다. 그녀에게는 안식이 필요하다. 더 이상 "수천개의 수상기들이 철썩거리는 소리" 속에 혼자 내버려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녀는 시인기계의 절망, 고장, 고통, 고독을 통해 우리는 이곳 바깥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된다.3. 사랑을 만드는 기계로서의 몸김혜순 시집의 책 제목에서 불쌍한 사랑기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랑은 태곳적부터 여성인 내 몸에서 넘쳐 나오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고유한 실존의 내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고 한다. 사랑이란 행위가 아니라 몸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여성의 몸은 사랑을 만드는 불쌍한 기계라고 선언하고 있다. 진정 김혜순 시인의 선포에 동의하는 사랑이 있을까.기계란 돌리기만 하면 만들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는 감성도 대가도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계는 돌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여자란 집에서 남자에게나 자녀에게나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만들어야만 하는 기계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너는 밤마다 이 기계를 하러 온다.문이 하나도 없는 기계너는 어느 순간 공처럼이 기계 속으로 뛰어들 수는 있다그러나 들어오는 순간 너는 죽음을 먹게 된다이 기계는 너를 먹고, 먹을 뿐아는가, 너는 없다오아시스에서 잠들었지만자고 나면 늘 사막이라고나 할까“(...............)“ 모두 불쌍한 사랑 기계 자체의 물건들이다밤하늘에서 가늘게 떨고 있던 행성들을통제하는 기분인가인생 전체를 배팅하는 기분인가그러나 속지 마라 떠들지도 마라“ -김혜순너는 밤마다 이 기계를 하러온다는 이 말의 뜻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일 것이다. 문이 하나도 없는 기계 너는 어느 순간 공처럼 이 기계 속으로 뛰어 들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여성의 몸은 자신의 몸속에 뛰어 들어오는 그 무엇인가를 위해 그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계와 같은 사명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몸은 문이 없다. 입구는 있는데 출구가 없는 기계 방이다. 너는 들어 올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다. 오아시스 같은 자리에서 잠들었지만 자고나면 늘 사막이라고나 할까. 사랑이란 항상 오아시스와 같은 기쁨이 배어 있지만 하룻밤 자고나면 또다시 다가오는 현실은 사막과 같아서 항상 또 다른 갈증이 만족을 느끼지 못함의 안타까운 고백이다.하룻밤 인생 전체를 배팅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속지 말라고 권면한다. 그렇다 모두가 불쌍한 사랑기계 자체의 물건들일 뿐이다. 아무리 만들어 보지만 메마른 사막과 같은 사랑은 먼지만 날릴 뿐이다.이주영은 그의 논문에서 그런 표현을 ‘욕망으로 갈등하는 몸’이라고 전한다.) 이 때 갈등의 양상은 가부장제 사회와 지배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여성의 권익을 늘 남성의 권익아래 종속시켜왔던 권력구조들은 가부장제라는 사회질서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여성은 자기 육체를 자기 소유로 볼 수 없었으며 육체에 대한 애정을 가질 겨를 없이 부정하게 되었고 성욕이나 오르가즘을 오히려 불결한 욕망으로 억압해 왔다. 즉 그간 여성의 몸은 사물로서와 혹은 도구화된 몸으로 강요되어 온 것이다.)칼이 칼을 사랑한다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1. 들어가는 말소설 『그 남자네 집』은 한국 현대소설사의 연륜을 그대로 담고 있는 거목, 소설가 박완서가 4년 만에 내놓은 열다섯 번째의 장편소설이다. '문학과 사회'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은「그 남자네 집」에 기초한 소설로, 현대문학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나이를 먹은 주인공이 후배의 집 구경을 갔다가 50년 전 첫사랑인 그 남자가 살았던 기와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건재하게 남아 있는 기와집은 그 남자에 대한 기억으로 주인공을 이끌어간다. 50년 전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인 그 남자네가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기와집으로 이사를 오고, 겨울 저녁 퇴근하는 전차에서 우연히 마주쳐 서로 집안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 남자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그들은 1950년대 폐허의 서울 거리를 누비며 구슬처럼 빛나는 겨울을 보내지만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주인공은 은행원인 민호와의 결혼을 결심하며, 그 남자에게 이별을 선언하는데... 미시적 리얼리즘의 농밀한 압축과 일상과 일탈에 대한 팽팽한 대비, 특유의 입심으로 풀어낸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통해 순수한 첫사랑에 대한 지나간 기억을 되살려 주는 소설이다. 결혼 이후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결혼생활이 점점 힘들어질 무렵, 우연히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나’는 같이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지만 그 남자는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은 다시 흘러 ‘나’는 그 남자가 뇌수술을 해 시력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당당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모진 말을 건넨다. 그렇게 남자와 헤어진 주인공은 그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마지막으로 그 남자를 만나고, 마지막 포옹을 나누며 서로를 떠나보낸다.2. 과거 시절의 나작가 스스로 말하기를 “연애편지를 쓰듯 썼다”는 소설이지만 흔히 생각하듯 ‘남자’에 대한 ‘연정’의 마음을 되새기는, 오랜 기억 속에 묵혀 두었던 달콤한 사랑의 추억에 대해 쓴 소설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소설의 발단은 '그 남자네 집'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깊은 감회에서 시작하지만, 정작 소설 전체가 아우르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를 사랑했던 그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부푼 마음이라기보다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돌아갈 수도 없지만 생각하면 눈물 나는 삶의 기억에 보내는 편지라고 해야 할까. 지옥 같은 기억의 터널을 건너왔는데 어느새 모두 다 사라져버린, '모두가 잊었는데' '내 기억에만' 남아 있는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나에게 있어 당시의 한국전쟁은 '이념대립에 의한 동족상잔'과 ‘남북 분할의 표면적 계기’ 정도로써의 앎이 전부였다. 그걸 깬 것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위시한 작가 박완서의 소설에서였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시대는 역사의 기록물이 아니라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박완서 소설의 주인공에게 한국전쟁은 이념도 뭣도 아니다. 이들은 저 하늘 위로 보이지도 않는 '선'이 왔다 갔다 하는 걸 지켜보며 지금쯤 그 ‘선’은 북쪽으로 치우쳤을까 남쪽으로 내려왔을까 애간장을 태울 뿐인 개인의 일일 뿐이다. 한국전쟁과 휴전 후의 시기 역시 그렇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 빈 집을 털고, 국군-인민군에게 강요된 협조를 하며, 전쟁 후에는 되지도 않는 영어실력에 단지 ‘서울대 출신’이라는 간판 하나로 성격에도 안 맞는 호객꾼, 점잖게 말하면 영업사원이 돼야 했던 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했던 시기였을 뿐이다.작가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신의 전작(前作)을 통해 끊임없이 반문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5)> 혹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7)>의 물음이 그것이다. 살아왔는데,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그 시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소설로 열심히 써온 자신의 지난 삶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들, 정말 그 일이 있기는 했던 걸까요?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던 걸까요? 그러나 소설 「그 남자네 집」은 이들과 달리 물음이 아니다. 어쩌면 작가는 스스로 끊임없이 자문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있었을까? 하지만 그 해답은 '얻을' 수 없다. 그 시대가 분명히 우리 역사의 줄기 안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많다. 수많은 매체, 작가 자신과 같이 그 시대를 겪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에게서는 답을 구하지 못한다. 이 답은 순전히 작가의 기억 안에서만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기억들, 예컨대 같은 물음이 아니라 라는 독백 혹은 읊조림에 가깝다. 아직 남아있다고 아무리 외친다 한들, 자신의 외침의 울림에 고스란히 공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박완서 소설은 고상함이나 내숭은 쑥 뽑혀나가는 그대로의 소설. 독자의 본능을 자글거리게 하는 본능적인 소설. 그러나 그 꾸며지지 않은 날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축조된 소설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런 솜씨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비유할 수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그 남자네 집」은 연애편지를 쓰듯 썼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이전의 소설과 결코 다름없는 날것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한 ‘연애편지 쓰듯’이라는 말은, 이 소설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3. 첫사랑 그 시절의 나어쩌면 이제 작가에게 지나간 ‘그’ 시기들은 고통의 기억을 넘어 '지나간 어떤 기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의 기억을 회상하는 마음, 독약과도 같던 첫사랑의 쓰라림조차 달콤하게 음미할 수 있는 지금, 조용히 떠올려보는 기억속의 「그 남자네 집」은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를 중심축으로 구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제 고통 없이 그 시대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 ‘당당하게 현실을 받아들여라’라는 건 결국 작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첫사랑이란 짝사랑과는 달리 처음으로 맺은 사랑을 뜻한다. 그 깊이를 어디까지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시기가 아닌가 싶다.“그해 겨울 퇴근하는 전차 안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남자가 먼저 반색을 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누나라는 말은 묘했다. 마음을 놓이게도 섭섭하게도 했다. 늦은 시간의 전차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 이상의 감정표현을 하지 못했다. 종점에서 내려서 불빛이 희미한 빵가게로 들어갔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발밑의 언 땅이 고무공처럼 나의 온몸에 탄력을 주었다.”(29쪽)박완서 소설의 특징은 소설에서 인물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인물, 한 개인의 삶의 모습이 없이 박완서 소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아주 개인적인 소설이 된다. 그러나 그 인물과 삶은 고스란히 그 시대를 반영한다. 즉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지극히 보편적인 소설이 된다는 것이다. 「그 남자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와 ‘나’는 당연히 소설의 중심에 놓이기에 지극히 사적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무게를 긍정하게 되는 요인은 ‘첫사랑’의 유혹적인 달콤함이 있었기에 ‘나’는 ‘그 시대’를 살아날 수 있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의 유혹적인 달콤함’보다는 어김없이 ‘살아남았던 그 시대’에 초점이 맞춰진다. 즉 「그 남자네 집」이 최종적으로 아우르는 건 ‘그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네 ’이라는 것이다. 집도 시대도 역사도 모두 ‘나’, ‘그’, ‘오빠’, ‘어머니’, …가 있었기에 의미를 갖지만 이들은 다시 ‘역사’, ‘시대’, ‘집’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박민규 소설의 작품분석-카스테라를 중심으로--현실위에 세워진 판타지)-Ⅰ. 서론작가는 1968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로 2003년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곧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제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 일약 주목받는 작가가 된다. 작품집으로 《카스테라》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이 있다. 2007년 〈누런 강 배 한 척〉으로 제8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박민규의 세계관 또한 독특한데 그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어릴 때부터 학교 가기가 싫었다. 커서도 학교 가기가 싫었다. 커닝을 해 대학에 붙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 가기가 싫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먹고 살기가 문학보다 백 배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회사 가기가 좋을 리 없었다. 해운회사, 광고회사, 잡지사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불현듯,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직장 생활을 접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꼴에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쉬엄쉬엄 밴드 연습도 하며, 밥 먹고 글 쓰고 놀며 나무늘보처럼 지내고 있다. 누가 물으면, 창작에 전념한다고 얘기한다. “말로는 뭘 못해”라고 모두를 방심시킨 후, 정말이지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2003년 여름,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선보이며 한국 소설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소설가 박민규가 등단 이 년 만에 첫 작품집 『카스테라』를 선보인다. 2003년 여름부터 2005년 봄까지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열편이 실려 있는 작품집 『카스테라』는 그야말로 유쾌한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글쓰기의 모범이라기보다는 파격적 상상력, 이를 아우르는 스타일리시한 문체와 유머는 박민규 소설의 큰 특징이다. 다음은 박민규의 작품 카스테라에 대한 작품 분석이다.Ⅱ. 본론박민규 소설의강한 발언권을 가졌으며,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 투쟁의 역사이고, 인류 최초의 냉장고는 지구이며, 20세기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인데,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우리가 발 디디고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화자의 외로움이 얼마나 지극한지 알 수 있다. 화자의 몽상은 이제 냉장고와의 친구 되기를 넘어 환상의 영역에 가닿는다. 그리하여 친구인 냉장고 안에 '소중한 것과 해악이 될 만한 것(예를 들어 미국이나 코끼리)'을 무작정 집어넣기 시작한다. 《걸리버 여행기》를 시작으로 소중하고도 해악적인 존재인 '아버지'와 어머니에 이어 미국과 중국을 집어넣는 등 화자는 한 세기를 냉장고 안에 정리한다. 그리고는 세기의 마지막 날 밤에 '다음 세기에는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야'겠다고 결심한 화자는 다음 날 냉장고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을 지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씹으며, 외로움과 슬픔과 쓸쓸함과 괴로움이 복잡하게 담겨 있을 '개인적·시대적 눈물'을 흘린다. 화자의 외로움이 화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세계를 냉장고 속 카스테라로 압축 정제하여 눈물로 승화해낸 것이다.1. ‘카스테라’의 의미작품속에 등장하는 “카스테라는 수많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로 응축된 그 무언가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카스테라는 주인공이 원하는 이상적인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해악적인 것, 소중한 것, 이루고자 원하는 것 등이 모두 들어가 있는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주인공은 이 세계를 냉장고에 넣었고, 어느 날 열어보니 소위 하나의 세계가 한 조각의 카스테라로 변해 있었다. 이것은 곧 카스테라가 주인공이 생각하고 원했던, 어떤 이상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소중한 것과 해악적인 것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바라는 주인공의 심정이 한 조각의 카스테라로 나타난 것이다. 카스테라는 작가가 원하는 사회 그 자체를 의미하며, 주인공이 사회의 형태가 카스테라로 정리된다. 그래서 그 카스테라를음속에 담은 것이고, 세기가 끝나던 날 밤에 가득 찬 냉장고 속을, 카스테라로 바꾸어 마음을 비운다.특히 냉장고는 부패한 세상을 정화시켜주는 존재이다. 냉장고는 부패를 방지하기위한 투쟁이며 이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냉장고는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도구이다. 주인공이 냉장고 속에 해악적인 것을 넣는 것은, 이 사회의 부패인 동시에 마음의 부패요 그리고 부패 된 사회가 정화돼야 한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주인공이 미국을 냉장고에 넣은 후, 사람들은 그러고 보니 맥도날드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 이전에 넣은 학교에 대해서도, 그제야 학교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작가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이웃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하게 살아가는지를 표현하고 있다.3. 냉장고 소음의 의미요즘은 전자제품들을 자주 바꾸기 때문에 냉장고의 소음을 듣지 못하는데 20여년 전만해도 소음이 나는 냉장고를 사용하는 가정들이 꽤나 있었다, 냉장고가 덜덜거리거나 모타의 소음이 심하면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다. 이처럼 작가는 냉장고의 소음을 통하여 현 사회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와 사회상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작품속에 시끄럽게 울리던 냉장고는 한 세기가 넘어가면서 침묵한다. 그리고 냉장고가 활동을 멈추는 동시에 마지막 결과물로 카스테라를 남긴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냉장고가 소음을 내며 그 세기를 열심히 살아가고, 세기를 넘기면서 침묵하게 되는 것은 부패와의 투쟁을 벌이고, 다음 세기에서는 부디 부패와의 투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일지도 모른다. 결코 이하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지만 작가는 카스테라라는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다양한 의도하는 바를 읽어 낼 수가 있다.‘카스테라’ 는, 냉장고 속의 세계를 통해 주인공이 어떻게 카스테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서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결국 작가는 수많은 것을 모아져 『카스테라』라는 이름의 세계를 내놓은 것이다. 이 없이 붕괴된 화자의 내면이 그려지고, 그것의 기원이 되는 초라한 가정, 화자를 따돌리는 학교, 소외를 강요하는 사회, 후기자본주의에 물든 타락한 시대, 화자를 배제하는 세계, 개체를 외면하는 인류, 지구를 객관화하려는 우주 등이 화자의 상상 속에서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종횡무진 한 널뛰기 같은 사유가 진행된다. 상상력의 수준에서 보면 박민규의 소설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친다면 그의 작품은 대중소설이나 인터넷 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진중하게 당대의 모순점들을 포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형식적 가벼움은 내용적 무거움과 이질적으로 조합되면서 새로운 소설 문법을 형성한다. 그것은 기승전결이라는 논리적 인과성과 서사적 필연성을 필요로 했던 전통 서사에 대한 하나의 반기에 해당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전개되는 1인칭 화자의 장광설은 때로는 시대의 정곡을 찌르고 때로는 신경증에 걸린 환자의 어법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믿거나 말거나'식 소설의 세계를 빚어낸다. 《지구영웅전설》(2003)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거쳐 《카스테라》(2005)를 지나 《핑퐁》(2006)에 이르기까지 박민규가 그려낸 네 권의 지도는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나와 세계, 나와 지구, 나와 인류, 나와 우주, 나와 후기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 가볍고도 진지하고 무거우면서도 얼떨떨한 질문과 그럴듯 하면서도 아무렇게나 혹은 어쨌거나 그렇고 그렇다는 식의 의뭉스런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무규칙 이종소설가'인 박민규의 어투에 빠지면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끌리고, 끌려가다 보면 이런 식은 아닌데라는 밀고 당김의 거리 조정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미학적 파장이 그의 매력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걸어온 궤적을 살펴보면 그것이 곧 21세기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성에 대한 하나의 존재론적 표정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민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누런 강 배 한 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하나를 지목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박민규라는 작가의 출현을 지목하겠다고 소설가 이외수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평론가와 작가, 독자들이 '그는 다르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다르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를 차별화시킨 그 독특한 상상력은 곧 우리의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의 소설이 상쾌하고, 통쾌하고, 유쾌한 것은, 그 상상력이 전혀 새로운 것,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평범한 우리들에게서 빌려간 것들이기에 가능한 것이다.전혀 낯선 것, 전혀 새로운 것, 이질적인 것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뒷걸음치게 만들고, 저항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게 만든다. 스스로를 '무규칙 이종 소설가'라 부르는 작가는, 외계인이 등장하듯 그 출현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그는, 우리를 경계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대신 책장을 펼치는 순간 무장 해제시켜버린다.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책장을 덮은 이후이다. 맘껏 낄낄거리며, 양 손을 들어 항복 선언을 한 이후에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것이다.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마냥 즐거울 수 있는 건, 작가인 그에게 빚진 게 없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리를 굴려가며 공감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느끼고 즐기면 된다. 그의 소설과, 박민규라는 작가와 한바탕 놀면 된다. 그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오히려 그에게 빌려주고, 우리는 그 대가로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제공받는 것이다.(실제로 이 작품집의 대부분은 그가 빚진 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한밤중에도 쉬지 않고 웅웅-거리는 냉장고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무능한 아버지부터 미국까지를 냉장고에 '처'넣어버리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겠으며, 길게는 보름씩 변비에 시달리며 누렇게 뜬 얼굴로 야쿠르트 아줌마의 '느닷없는' 출현을 반기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한둘이겠는가. 몸 하나 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