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 실크로드의 악마들실크로드는 우리의 인식 속에 아라비아 나이트와 같은 화려하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개 비단을 실어 나르고 이슬람 상인들과 중국 상인 그리고 유럽 인들이 오고가는 오아시스의 풍경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된 물건이 비단 만이 아니고 또한 화려한 오아시스만이 존재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근대에 지어진 것으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닌 독일의 학자에 의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실크로드라는 단어에 다분히 패권주의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서술한다. 실크로드라는 고유명사의 등장으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의 진실과 관련한 어떠한 다른 시각이 존재할 여지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실크로드에 대한 몽환적 이미지를 부여받음으로써 역사의 진실성은 밀어내 버리고 환상적인 이야기 속으로 우리의 인식을 이끌어 서구의 여러 사람들이 약탈한 문화재들을 마치 탐험의 대상인 것처럼 미화하여 이해하게끔 만들어 버렸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란 책에서는 현재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중앙아시아의 유물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내력과 그것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던지는 한 가지 질문은 과연 탐험가들이 유물을 가지고 나온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의 여러 오아시스에서 행한 탐험이 정당한 예술품의 보호인가? 아니면 문화재의 약탈인가? 저자는 이것에 대하여 딱 떨어진 해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거쳐 간 여러 사람들과 거기서 일어난 여러 이야기들을 나열 해 놓고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실크로드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위의 문제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보고자 한다.중앙아시아의 타클라마칸 사막은 여행자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 고금을 막론하고 대상들은 단지 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점점이 박혀있는 오아시스를 오갈 뿐 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몰 흉노의 약탈에 못 이겨 새로운 동맹국을 찾으려는 한 나라 무제의 명령으로부터 출발한다. 비록 새로운 동맹국을 찾지는 못하였으나, 실크로드를 발견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실크로드는 장안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감숙성의 하서회랑지대를 통과하여 고비사막안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돈황으로 연결된다. 돈황을 출발하여 옥문관을 통과하면 두갈래의 길로 갈라져 한길은 하미, 투르판, 카라샬, 구차, 악수를 지나고 한길은 니야, 케리야, 호탄, 야르칸드등을 통과하여 카쉬가르에서 합류하여 파미르를 넘어 서쪽으로 가게된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로마를 포함한 유럽은 큰 교역로를 가지게 되었다. 비단 뿐 아니라, 상아, 산호, 유리, 호박, 모피, 도자기 등 무수히 많은 물건들이 교류되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아시아 횡단 교통로를 통해 비단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것이 옮겨 갔다. 그것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의 예술과 사상을 완전히 변화시켜 놓은 기원전 6세기의 동북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이다. 불교의 중국 전파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식의 미술을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이 불교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곧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먼 우회로를 통하여 들어왔고 그러는 과정에서 중간의 여러 요소들이 첨가 되었다. 또 거기서 다른 미술적인 혼합이 이루어 졌는데 그것은 인도의 미술과 그리스 미술과의 결합이었다. 이전까지의 불교는 부처를 하나의 상징으로서 나타내었으나, 이 간다라식 미술은 부처를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여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보여 주었다. 물론 불교만이 실크로드를 거쳐서 중국에 들어온 유일한 외래 종교는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가 그것이었으나, 역시 실크로드의 연변에서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유물을 남긴 것은 불교 미술이었다. 실크로드의 문화와 미술은 당나라 때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여 당시의 장안(수도의 이름)은 최고의 국제 주변을 우회해 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 내무 깊숙이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탐험가들이 속속 그의 뒤를 이어 탐험에 나섰다. 헤딘이 그의 생에에서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은 누란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목간과 지편 등을 통해 그곳 주민들의 생활을 밝혀 내였다. 이 무렵 동양학 학자이자 고고학자이었던 스타인의 탐험도 시작 되었다. 스타인은 단단윌릭에서 고대 불교의 프레스코벽화와 스투코부조, 문서, 목판에 그려진 그림 문서 등을 발견하였고, 근처의 또 다른 유적에서 여러 벽화와 필사본 조각 등을 다량 발굴하였다. 그는 사막을 동쪽으로 가로질러 니야를 향하여 출발하였고 그 행로 중에 또 다량의 유물을 발견하였다.1902년 독일인과 일본인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에서 고대 불교유물을 발견하려는 국제적 경쟁의 막이 올랐다. 이때 그들이 가져간 유물은 유럽, 러시아, 미국, 등의 30개소가 넘는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1902년에서 1914년에 걸쳐 독일 탐험대는 네 차례의 탐험을 하였다. 첫 탐험대의 대장은 박물관의 인도부서의 부장이며, 불교미술에 관한 탁원한 전문가였다. 그들은 투르판 일대를 최초의 탐험지로 선택하여 주로 예비조사를 실시하였다. 두 번째 탐험에서는 카라호자에 도착했다. 투르판 동쪽의 사막에 있는, 진흙으로 건축도니 이 고대 도시에 이들은 얼마간 머물며 발굴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여러 벽화와 필사본, 천에 그린 걸개그림, 각종 직물의 찬란한 유물들을 대거 발굴했다. 이들은 간다라 양식의 아름다운 등신대 불상을 발겨하였고, 한 주물 공장터를 발견하여 고전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과 그리스풍의 조각의 발견하였다. 르콕을 포함한 탐험대는 베제클릭의 불교 석굴 사원군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에서 르콕과 바르투스는 일련의 눈부신 발견을 하게 된다. 두 독일인은 베제클릭의 불교석굴사원군에 본부를 차리고 테라스를 따라 북쪽 끝에 있는 굴들을 탐사하였다. 모래를 입구 양 벽면에 각 3명씩 모두 6명의 등신대보다 큰 승려의 상류로 올라가 열개가 넘는 사원을 발견했다. 꼬불꼬불한 계곡의 석굴 사워 한 가운데서 르콕은 흙으로 막혀서 보이지 않은 승방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다량의 종교문헌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후에 쿰트라로 이동하여 또 하나의 천불동을 발견했는데 이미 유물 수색자들에 의해 송두리째 껍질이 벗겨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르콕이 그 지역의 유적 몇 곳을 기대를 가지고 둘러 보았으나 대개의 경우 습기에 훼손되어 발굴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그들의 탐험을 통해 가장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이 키질의 벽화이다. 미술사가들은 키질의 프레스코를 전체 중앙아시아 미술의 정수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석굴에서도 광택을 발하는 청색안료가 풍부하게 칠해져 있었고, 이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좋아하는 색체로서 그 안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게의 두배에 해당하는 금도 지불할 정도 였다. 그것들은 지금껏 발굴한 다른 모든 유적의 벽화들과는 달리, 전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이것은 쿠차가 중국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한편 스타인은 누란을 두 번째 목적지로 삼았다. 누란으로 가는 도중 카다릭, 도모코, 라왁, 니야, 미란 등의 많은 유적들도 발굴하였다. 누란은 요새도시였기 때문에, 그들은 훌륭한 프레스코 벽화나 거대한 불상 등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스타인은 제국의 전초 기지였던 이 도시가 쇠미해 버린 제국과 완전히 단절된 채 혼자서 서서히 고사해 간 그 애절한 비사를 밝혀냈다. 고대의 쓰레기 더미에서 그는 우연히 군사기록들을 발견했다. 변방에 있는 전선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중에 누란의 교전 상황을 간략히 개괄한 내용이었다. 누란에서 스타인은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을 했다. 수많은 중국 공문서 외에도 카로슈티목록을 다량 찾아낸 것이다. 이 기록들은 중국 군정이 토착 행정을 지방 호족들에게 위양해 종전처럼 그들이 운영하도록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들의 탐험에서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드러났다. 스남아 있었다. 그가 발굴했거나 왕에게 구입한 여섯 종류의 언어로 씌어진 수천 권의 필사본과 경전들을 연구할 자격을 갖춘 학자들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 뿐만 아니라 천불동에서 수집한 수백 점에 달하는 사찰 번화와 당대 회화 작품들을 펴고 깨끗이 할 고미술 전문가도 필요했다. 오래지 않아 국제적인 전문가들이 돈황의 고문헌에 대한 해석과 감정 작업에 매달렸다. 세 차례의 탐험 동안 스타인이 중국에 가져온 미술 유물도 많았으나, 그의 가장 큰 일은 돈황의 비밀 서고였다.프랑스는 뒤늦게야 중앙아시아 유물 사냥의 경쟁에 뛰어 들었다. 1906년 펠리오가 중국령 투르키스탄에 도착했을 때 다른 나라 탐험대가 이미 수차례 다녀간 뒤였다. 하지만 펠리오는 우연히 툼슉에서 불교유물을 다량 발견하고 돈황으로 옮겼다.프랑스의 펠리오 일행이 돈황에 도착해 천불동에 온지 한 달여 만에 비밀의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펠리오는 먼지투성이의 꾸러미들을 뒤지면서 3주라는 시간을 보냈다. 펠리오는 자신이 따로 챙겨놓은 두 부류의 필사본을 팔라고 왕도사를 설득했고, 일정량의 금액을 주고 합의가 이루어 졌다. 그 문헌 더미들은 선편으로 프랑스로 운송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포장되었다. 이렇게 실크로드의 유물이 또 한번 세상에 드러났다.그러나, 고고학자들이 중앙아시아의 어디든 다니며 자유롭게 탐험을 하던 시대도 끝나가고 있었다. 스벤 헤딘이 첫 번째 탐험을 감행한 이래 30년 동안 고고학자들은 실크로드상의 사라진 도시들과 폐허화된 사원들을 찾아가는데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또한 불교 미술의 걸작들을 떼어가는 데 돈 한 푼 들이지 않았다. 스타인과 르콕 같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장기간 활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후기 탐험가인 랭던 워너의 경우 현지인들은 그들을 격렬한 적대적 태도로 대했다. 이어 외국인에 대한 분노의 물결이 전 중국을 휩쓸었다. 이제는 벽화를 떼어 내는 것은 고사하고 천불동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마저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숱한 곤란에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