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중심 교수법에 대한 분석과 초등학교 수업사례연구1.내용중심교수법의 의미와 가설(1) 의미내용중심교수법(content-based Language Teaching)은 의사소통교수법, 총체적 언어 접근법 등과 더불어 상황맥락과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용중심으로 학습이 이루어질 때 의사소통능력이 신장한다는 개념의 교수법이다. 의사소통 중심 교수법이 어느 특정 상황에 대해 예측하는 문장 만들기를 통하여 의사소통적 기능을 사용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내용중심 접근방법은 기능이나 항목 등 미리 정해진 언어내용 보다는 언어학습 진행과정에 초점을 두고 지도하는 방법이다. 즉 학생들이 ‘영어 사용하기를 학습’(learning to use English)한 다기 보다는 ‘영어를 학습하기 위해 영어를 사용’(use English to learn it)하는데 관심을 둔다. 따라서 내용중심 교수법은 목표언어를 의사소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하여 목표언어를 가르치는 교수법이다. 다시 말해서 내용중심 언어교육은 단순하게 학습자들이 언어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목표언어를 모국어와 같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사용하는 이중 언어의 병용을 목표로 한다. 내용중심 교수법은 학습자가 목표언어를 통해 정보 수집이나 지식 습득을 할 때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Snow에 의하면 영어교육에서 ‘내용(content)'이라는 말은 전통적 문법 번역식 교수법에서는 목표어의 문법적 구조를 의미하였으나 최근에는 제2언어 혹은 외국어 교육 목적을 위한 과목 사용의 문제로 본다. 이는 학습자의 요구나 흥미를 고려하여 선정한 주제나 타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을 영어 학습에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Brinton, Snow와 Wesche(1989)는 내용중심 교육의 의미를 언어의 형태나 구조보다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언어는 학습자의 흥미를 끄는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어떤 교과의 교육이 영어로 행하여진다면 학생들은 교조하였다. 그리고 가르치는 언어는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학생들은 실생활과 연관된 내용을 학습하는 부산물로 언어를 배우게 된다.이러한 내용중심 교수법의 발달배경을 살펴보면 먼저, 1970년대 중반 한 영국의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외국어 읽기와 쓰기 수업을 모든 다른 교과목 수업에 통합하기 위한 교과과정 전반에 걸친 언어교육(language across the curriculum)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교육과정상의 모든 과목에서 읽기와 쓰기에 중점을 둘 것을 제안하며, 언어기능을 여러 교과목 내용에서도 가르쳐져야 하며 영어교사에게만 전적으로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미국 교육에도 영향을 끼쳐 “모든 교사는 영어교사다”라는 구호를 모든 교사들에게 친숙하게 만들었지만 교실 수업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연습을 다루는 연습문제를 포함시킨 “일반 교과교재(subject-matter text)"가 나타났고, 일반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와 영어 교사 간의 협력 필요성도 강조되었다. 그리고 다른 교과목의 주제와 언어교수의 목표를 통합시킨 교육과정의 자료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싱가포르 초등학교 예비계획은 과학, 수학, 언어 학습을 통합한 교실 수업용 교재를 출판하였다.또한 1970년대 후반 이래 언어 그 자체를 공부하기 보다는 언어를 통해서 내용을 습득하는 원리를 강조한 내용중심 교수법을 사용한 몰입교육(Immersion Education), 이민자 영어교육 프로그램, 부진아를 위한 영어교육 프로그램, 특수목적을 위한 언어교육 프로그램 등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내용중심 접근 방법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몰입교육을 간단히 살펴보면 정규 학교 교육과정을 외국어로 가르치는 외국어 교육의 한 유형으로 외국어가 내용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되어 지는 교수법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캐나다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몰론을 통해 주제 및 주제와 관련된 어휘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주제와 관련된 오디오, 비디오 자료가 학생들의 듣기 활동에 기초를 제공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하는 작문 과제가 학생들에게 부여될 수 있다. 주제는 개별적인 내용 단위(content module)로 구성되며, 각 단위는 세부적인 하위 주제를 갖기도 하고 개별 단위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주제 중심 모형은 제도적 장치 및 학생들의 능숙도 측면에서 융통성이 있어 별다른 제약 없이 어떠한 교육환경에든지 적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다양한 주제를 통해서 여러 가지 언어 기능을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사나 전문가가 학생들의 흥미를 조사하고 학생들의 언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주제, 자료 및 학습 활동을 선택해야 하고 언어와 내용을 균형 있게 통합하여 교수해야 한다. 이 모형은 초등학교는 물론 다른 수준에서도 도입이 가능하며 외국어로서 영어를 가르칠 때도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위에서 제시한 모형들을 적용 대상에 따라 분류해 보면 아동을 대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모형은 몰입모형과 내용 강화 초등 외국어 모형, 주제 중심 모형이며, 보호 모형과 부가 모형은 중등이나 고등 교육 기관에서 적용하기 위해 개발된 모형이라 할 수 있다.(4) 보호 모형(Sheltered Model)보호모형은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에 존재하는 학교의 모형으로 Shetered라는 이름은 제2언어학습자들을 내용교수를 위해 일부러 모국어 화자와 분리시켜 놓는데서 기인하였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수업시간에 쓸 수 있는 전략에 대해 15분 정도 이야기를 해준다. 그런 다음에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 하는 것이다. 이 학생들은 따로 제2언어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제2언어 수업을 들은 학생들만큼의 언어 구사력을 지니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소수언어 학생들에게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업이 없다면, 그들은 영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이런 종류의 수업의 접근에 한계를 가지고 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학습자들은 매우 유용하고 실제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언어를 학습하므로, 학습자의 내적 동기를 높여주게 된다.③ 내용 중심 언어 교수법은 언어의 4가지 기능을 통합해서 가르칠 수 있으며, 학습 기능까지 가르칠 수 있다.(3) 단점① 영어의 선택이나 제시 순서가 그 과목의 내용을 따르게 되어 학습자의 언어 능력과 괴리됨으로써 영어는 물론이고 그 과목의 학습도 전혀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다.② 교사가 영어뿐만 아니라 그 과목의 내용에 통달한 전문가여야 한다.③ Team teaching의 경우, 언어교사와 교과목교사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학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④ 학생들에게 내용학습과 언어학습의 이중 부담이 될 수 있다.5. 수업 설계 시 유의점① 내용중심 교수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수업 내용의 수준이다. 실제 수업은 언어의 형식이나 기능보다도 수업내용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에 수업내용이 학습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며 수준도 학습자의 지적 수준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어휘와 수업내용에 대한 사전 지식을 학습한 대학교 이상의 수준이나, 어휘 수준과 내용의 수준이 그리 다를 것 같지 않은 유아기 아동의 수준에서 내용중심 교수법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시 되지 않으나, 자신이 가진 어휘수준과 다른 사고수준을 가진 중고등학교 학생에게 내용중심 교수법을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어휘수준을 따라가면 내용 수준이 낮아져 학습자에게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할 수 있고, 사고수준을 따라가면 어휘수준이 높아져 기본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마저 불가능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②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내용을 중심으로 영어를 학습하므로 교사 또한 수업 내용에 대한 내용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하고 사전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통합교과 지향의 교사가 되어야 하겠다.③문화적인 정보와 경험들도 통합할 수 있는지 고려한다. 이는 외국어 교육이 단순히 언어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도구로 그 나라의 )2. 긴장깨기(icebreaking)이야기 전 활동1. 중요 단어 소개2. 이야기의 내용 추측전 시간의 복습1. 전 시간의 이야기 듣기2. 이야기의 내용 말하기이야기 중 활동1.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 듣기2. 자신의 말로 이야기의 내용 말하기영어-수학 교과 통합 활동1. 수학교과의 소재나 내용을 적용하여 수업2. 소집단 활동이야기 후 활동1.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듣기/말하기/읽기/쓰기 활동정리활동1. 수업의 정리 및 확인2. 자기 평가3. 인사정리활동1. 수업의 정리 및 확인2. 자기 평가3. 인사1,2차시3,4차시(2) 5학년 영어 - 수학 내용중심 이야기 활동을 위한 동화선정수학교과와의 통합을 위해서는 우선 초등학교 영어교과의 교육 목표를 중점적으로 분석한 후 수학교과와의 통합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할 것이다. Ellis가 제시하는 것과 같이 동화를 이용한 수학교과와의 통합 교육은 담임제도 하에서 실시하는 초등교육 현장에서 손쉽고 유의미하게 시행할 수 있다. 즉 교사가 학습할 여러 교과의 내용을 통합하여 유기적인 학습을 실시할 수 있다. 영어-수학 통합교과 지도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하여 초등학교 영어교과서(A교재,5학년)를 단원별로 분석한 후 관련동화를 선정하고 수학교과와의 통합 가능한 단원을 선정하였다. 표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A교재 수업단원의 주요 내용단원의사 소통 예문의사 소통 기능(활동범주)수학교과와의관련-선정동화8. I'd likesomeapplesI'd like chicken and a hamburger./Can I have a pear, please?/ How much is it?/ How much are they?/ What do you want to eat?/ Which pears do you want?I want the small ones.원하는 음식주문하기물건 구입하기개인의 생각 묻고 답하기수학(수세기, 돈세기)The very hungrycaterpillar12. chusokCan I help you?/ This is my 한다.
나치만 ‘특수한 범죄자 집단’인가?- 아트 슈피겔만의 ‘쥐(Mous)’ 시리즈를 읽고아우슈비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아직 있기는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현대 문명이 낳은 가장 야만적이고 끔찍한 사건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인간사를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전쟁과 침략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처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하나의 인종이 전멸에 가깝다시피 ‘청소’된 적은 없었다. 역사가 진보하고 인간이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 상태로 진입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하루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이다.그러나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시대가 역사의 실수였거나 우연, 특수라고 치부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오히려 아우슈비츠 학살은 자본주의와 경쟁, 기업 세계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이 사회가 낳은 여러 가지 야만과 파괴 중 하나로 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적으로 온갖 종류의 야만과 학살을 자행되고 있다. 중동에서는 스스로를 아우슈비츠의 피해자로 자처하는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수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체첸에서도 독립을 말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고 있다.이뿐이 아니다. 비록 체계적인 학살은 아니지만, 기업 세계화의 야만성은 아우슈비츠의 그것을 능가한다. 전 세계적으로 백혈병과 에이즈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수 천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치료약이 있는 현실에서도 대부분은 병을 고칠 수 없다. 지적재산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약값이 원가의 40배에 가깝게 책정(글리벡의 원가는 800원이나 시가는 3만원)되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공공부문 사기업화 이후 짐바브웨나 남미 국가들은 의료 복지비용이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그런 길을 걷는 중이다.환경 문제 역시 이 사회가 낳은 야만이다. 부시 미 대통령의 거부로 어렵사리 발효된 도쿄의정서는 배출권거래가 가능해지면서 그 의미가 크게 퇴색했다. 직간접적으로 환경 파괴 때문에 사망한 사람, 동식물의 숫자는 정확히 통계낼 수는 없어도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몇 배는 되지 않을까 한다.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모순된 시선독일인을 고양이, 유태인을 쥐로 그린 아트 슈피겔만의 『쥐』시리즈는 여타 다른 아우슈비츠 관련 작품들과 그렇게 많은 차이를 드러내주는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유태인들은 철저히 독일인들에 의한 희생자로 그려진다. 동물에 대한 은유부터 시작해서 독일인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에 잘 드러나 있다. 작가의 아버지이자 만화의 주인공인 블라덱의 시선에서 본 독일인들은 전시의 독일 병사들은 물론이고 전후의 독일시민도 다들 유태인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마치 골드하겐이 ‘독일의 반유대주의 전통’을 강조한 것처럼 말이다.독일인이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시리즈 전체에서 단 한 장면이다.(2-54) 그 독일인 병사는 유태인 포로들에게 말도 걸고 웃음도 지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가스실 임무를 경험하고 나서 그 역시 다른 병사들처럼 변하고 만다.주인공 블라덱은 2차대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군에 의해 파괴된 뷔르츠부르크라는 도시를 보며 흡족해 한다. 파괴된 집에서 물 한 모금 못 먹고 있는 독일인들을 보며 “독일놈들도 자기들이 유태인에게 한 짓을 좀 맛보라고 말이야.”(2-130)라며 통쾌해 한다.반면 유태인들은 대개 희생자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권에 나오는 블라덱의 사촌 하스켈과 페사크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협잡꾼으로 그려지는데 이들조차도 유태인들을 위해 나름대로 물심양면으로 애쓰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아우슈비츠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이반 음침하지만 결론적으로 주인공을 도와주는 캐릭터이기는 마찬가지다.물론 작가는 아우슈비츠 사건과 그 생존자의 이야기를 되도록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애썼다. 때문에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모순적인 단면 역시 여과 없이 그려진다. 현실에서의 블라덱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존재다. 책에서 끊임없이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블라덱의 편집증은 아우슈비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블라덱은 “인종차별적인 늙은 구두쇠 유태인”이었다.(1-131)블라덱과 아티(작가)의 부부가 차를 몰고 가게를 다녀오는 길에 흑인을 태워주는 장면은 블라덱의 모순된 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블라덱은 “검둥이가 우리 물건을 훔쳐 가는지 지켜봤다”면서 “검둥이는 유태인과 비교할 수도 없”(2-99)다고 말한다. 아우슈비츠를 살아 나온 자신이 어떻게 저런 ‘검둥이’와 같은 차를 탈 수 있느냐는 것이다.이처럼 이 만화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모순된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블라덱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이라고 생각한다.이스라엘 = 나치 독일과 닮은 꼴중동에 급작스레 출현한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의 형성과정과 행동양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행동양식과 질적인 차이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정부의 철저한 후원) 속에서 이스라엘은 중동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강탈하고 등장한 이스라엘이 순식간에 군사 강국이 되었으니 주변 아랍 국가들이 불안에 떤 것은 당연했다. 유명한 시온주의자이자 이스라엘 초리를 지낸 다비드 벤 구리온은 자신의 일기에서 “필요한 것은 잔인하고 강력한 대응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전투 현장에서는 그들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잔인하게 탄압했으며, 심지어는 이를 구실로 이웃 나라 레바논을 침공하기도 했다. 독일인들을 보호한다면서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의 행태와 뭐가 다를까.팔레스타인 해방군에 대한 억압과 폭력은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그것과 흡사하다. 노암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에는 이스라엘 점령 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는 주로 어린이와 십대 들이다. ··· 가자 지구에서 대니 치드코니는 어린 아이 몇 명이 무장한 (유태인) 정착민의 차에 돌을 던지자 ‘보복’으로 오는 소년의 다리와 한 소녀의 손을 부러뜨렸다는 한 아랍 마을 정보원들의 말을 보도했다.나이든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지도 않는다. ··· 85세 된 아랍 늙은이는 알 아크사 사원에서 기도하는 동안 근처 율법 학교의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에게 공격당했다. ··· 그 노파를 구하려 했던 한 아랍 젊은이도 폭행당해 옆 병실에 누워 있었다.이는 마치 1권의 80쪽에서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들겨 패는 장면과 비슷하다. 여기서 아트 슈피겔만은 “몇 시간동안 비명소리며 총소리가 들린다”고 썼다.심지어 일부 시온주의자들은 나치에 공감하기까지 했다. 1930년대 시온주의자들의 말들을 들어보자.“우리는 국가가 우선이다. 만약 이 아이들(유태인들)을 도울 수 없다면, 도와서는 안 된다.”)“각 나라는 제한된 소수의 유대인들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란에 빠지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이미 독일에는 유대인들이 너무 많다.”)“우리는 인종 원칙을 확립한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고 나서 ··· 우리에게 배정된 영역에서 조국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 우리도 상이한 인종간의 결혼에 반대하고 유대인 집단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찬성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Ⅰ. 들어가며'식민지 근대화론'이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넓게는 최근의 동남아 신흥공업국가에서 보여지듯이 세계적으로 과거 피식민국가들이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통칭하는 것이지만, 좁게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나라가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어갔다는 것을 이른다. 이 용어는 '식민지 수탈론'에 대칭되는 말로서, 종래 일제 하에서 일방적으로 수탈을 당하기만 했다는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된 '식민지 자본주의화론' '식민지 개발론', '식민지 공업화론' '식민지 산업화론' '식민지 미화론'등을 통칭해서 역사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식민지근대화론은 1960년대 한국 산업화 과정을 보면서 그것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주장하는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나라는 식민시대에 근대화를 경험하였으며, 60년대 급속한 발전은 이러한 근대화에 대한 기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경제사적인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시키며, 실증적인 예로 토지조사사업과 식민시대 이뤄진 공업화, 산업화를 주장한다.우리 조는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을 보다 총체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하기 위해 많은 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논의를 진행시키기에 앞서 한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쪽에서 제기한 문제에 관한 것인데, 이것에 대한 명확한 논의가 선행되어야만 우리가 지지하는 부정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시작하겠다.우선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제에 대한 긍정론으로 볼 수는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의해 민족주의 사관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은 더욱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왜냐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사관(植民史觀)도 친일사관(親日史觀)도 아니기 때문이다.식민지 근대화론을비판하는 입장은 대체로 식민지 근대화론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그 결과, 식민지 근대화 논 중심으로 긍정론에 대한 비판을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조가 여러 책을 읽으며 느끼고 제기하고자 하는 바를 몇가지 첨가하여 우리의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Ⅱ. 쟁점사항에 관하여1. 내재적 발전론 거부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는 기존의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의 취지로 나온 이론이다. 일제시대에 앞서 조선후기 이미 우리에게는 근대화를 취할 수 있는 역량이 싹트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근대화론은 비판에 대한 논거를 미국의 경제사학자들의 주장에 의존하며 특정한 논거 없이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들의 조선의 전근대적 사회 모습을 주장하며 당시 조선은 근대화로의 그 어떤 태동도 찾아 볼 수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회의 사회, 경제적 모든 분야에서 서양식 근대화에 대한 싹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는 다음과 같이 농업, 상업, 수공업, 신분제등 사회 전반적 부분에서 근대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1) 농 업시비법과 농기구의 발전, 관개 공사의 진전과 더불어 새로운 농법으로서 생산성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는 이앙법과 견종법의 출현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새로운 농법 등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늘어나고 노동력이 절감되는 속에서 1인당 경지 면적이 확대되어 빈부 간의 계층 격차가 커지기도 하고,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토지를 늘려 가는 속에 양민의 토지를 약탈하는 사례도 늘어나 소작농이나 날품팔이로 전락하는 농민도 생겨났으며 일부는 농촌을 떠나기도 하면서 농촌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하면서 농업 경영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앙법의 실시로 노동력을 덜게 된 농민들은 경작지를 확대하여 광작을 하게 되었다. 광작은 경작의 규모가 1두락(4~5정보)에서 200두락에 달하는 대규모 농업 형태로, 광작농은 경작 규모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상품 작물의 재배 등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여 결국 하층 빈농은 소작지를 얻지 못해 몰락하였다. 일부는 임금 노동린 가장 큰 이권으로 대한제국은 이들에게 하나 둘 빼았김으로써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였다.4) 신분제 변화양반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수조권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신분에 근거한 토지지배가 사라지고, 인간을 구속하는 것은 과거의 신분적 요소가 아니라 경제적인 요소로 바뀌어 간다. 신분제의 구속력이 약화된 것이다.또한 권력이 소수의 세도가문에 집중되는 정치 형태가 나타남으로써 양반이라 해도 평민보다 몰락하는 경우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신분적 계급과 경제적 계급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처럼 농업, 상업, 수공업등 경제 전반에 걸쳐 이전사회와는 다른 모습이 조선후기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는 자본주의 발달의 초기 모습으로 조선후기 근대사회로의 사회변동 가능성이 혁신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신분적 계급과 경제적 계급의 불일치는 근대사회 이행의 초기 조건을 만족시키는 내용으로 근대사회로의 태동이 사회적으로도 명백히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2. 철저한 경제적 관점을 지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전에 근대화에 대한 개념부터 먼저 확실하게 정의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근대화란 경제적으로는 중세적 경제조직과 생산방식으로부터 산업자본주의의 공업화를 달성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전근대 신분제사회로부터 시민권을 가진 국민들의 근대시민사회로 변화하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특권귀족층 중심의 귀족문화로부터 일반평민?국민 중심의 근대 민족문화로의 변혁적 발전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1인 독재 혹은 왕에 의한 일방적 통치에서 벗어나 입헌정치에 의한 민주공화제의 성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사회 전반에 걸쳐 식민지 근대화에 대해 규명해보면,첫째 정치적 근대화는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의해 입헌정치가 수립되기는커녕 독립국가도 이룩하지 못하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근대화 그 자체가 말살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정치적 근대화가 임시적으로라도 일부 달성된 것은 상해질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가난에 허덕이던 조선인은 수탈에 이용되는 일본의 노예에 불과한 삶을 살았을뿐, 근대화된 사회 속에서 과거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렸을 것이라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참고표 3> 사립각종 학교 상황학교수직원수학생수19101,9735,50080,76019111,6713,36271,52219121,3623,06557,37719131,2823,00058,76619141,2444,62565,72519151,1543,70856,79319161,0453,46054,19719178682,99149,74519187782,55844,91519197422,54438,204자료 : ‘조선인교육사립학교 각종학교 상황’(조선총독부), ‘일본제국주의 조선지배’(1986, 박경식)에서 재인용참고표 4 > 조선농가 1호당 평균 부채액(1930) (단위 : 원)농업용 부채농업용이외 부채합 계자 작 농68,91775,533144,450자 소 작232,0400.200232,240소 작 농13,23721,51734,754평 균104,73132,417137,148자료 : 일본농업연구회, ‘일본농업연구’, ‘한국 근대 민중운동사‘(1989)에서 재인용참고표 5 > 걸식, 궁민, 영세민 (단위 : 명)연 도걸 식궁 민영 세 민합 계192610,066295,6201,860,0002,155,6201930?876,2833,466,1044,342,3871931163,7531,048,4674,203,1045,439,446자료 : ‘숫자조선연구’(이여성), ‘한국 근대 민중운동사‘(1989)에서 재인용또한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도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의문점이 많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 보다 더 자세히 논의 할 것이다.일제시대 근대화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 있어 그 관점이 경제적 측면에만 한정되어 있기보단 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이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보는데 있어 경제적 측면에만 치우친 관점으로 일축한다면, 더 중요하고 큰 사회변동의 모습을 제대910년부터 1918년까지 8년 간에 걸쳐 우리나라 전역에서 시행된 일제 식민통치의 기초작업이었다. 이 때 조사된 내용은 행정구역의 명칭, 토지의 명칭과 사용목적, 과세지와 비과세지, 경지의 경계, 산림의 경계, 토지의 등급과 면적, 결의 등급별 구분, 토지소유권, 소작인과 지주와의 관계, 토지에 관한 장부서류, 인물조사 등이었다.이와 같은 거대한 토지조사사업은 자본주의적 토지확립으로 식민통치의 안정을 확립으로 식민통치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행정구역?도로?헌병주재지를 설정하고, 일본인의 정착에 필요한 토지 수단의 확보를 위해 필요했으며, 무신고 토지의 국유화로 통치재정을 굳건히 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실히 하며, 전통적인 양반계층의 지주권을 식민지적 지주계층으로 개편하여 식민사회를 구축하고, 거주를 토지와 결부시켜 한국인의 동정을 살핌으로써 영구적인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하며, 모든 자금과 세금파악을 확실히 하는 수탈경제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토지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 왔던 많은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 또는 화전민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하였고,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다.토지의 약탈에 있어서 종래 조선의 사유지?민유지 가운데는 ‘무토역둔토’(無土驛屯土)라 하여 정부에서 특정 관청이나 황실에 그 조세의 징수권을 할당해 놓은 토지가 있었다. 이는 단지 지세를 징수하는 곳만 특정 관청이나 황실로 되어 있을 뿐, 엄연한 민유지였다. 그런데 일제는 이를 ‘국유지’로 간주하여 조선총독부 소유지에 강제 편입하였다. 또한 ‘제 1종 유토역둔토’(第一種有土驛屯土)라 하여 조선의 국?관유지나 궁방전(황실 소유지) 으로 등록되어 있던 토지에는 관청이나 황실의 소작료 징수권 뿐 아니라, 거기서 농사짓는 농민들의 ‘경작권’, ‘도지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들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편입하면서 이들 농민들의 권리를 모조리 무시해버렸다. 그리고 국유지 중5.1
세계사 교과서는 여성사를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들어가면서현재 7차 교육과정의 세계사 검·인정 교과서는 3종이 출판되고 있다(교학사, 금성출판사, 지학사). 이들 교과서와 관련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점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여전히 유럽사 혹은 강대국 중심의 역사 서술, 황제와 영웅 혹은 지배계급에 편중된 정치사 중심의 서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7차 교육과정에 따라 발행된 교과서는 사회사적 연구 경향이 반영된 측면이 다소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상황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세계사 교과서 서술의 문제는 바로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이라는 점이다. 유럽과 미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여성은 과연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매우 인식론적 질문이 제기되면서 여성들은 더 이상 종속된 침묵의 존재가 아닌 나름대로 고유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지닐 수 있는 문화적 집단이라는 점이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토대로 여성사가 역사학의 한 분야로 등장하였다.여성사는 역사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여성의 경험, 문화 및 언어를 이해하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 관계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여성사는 역사적 변화와 발전 속에서 여성들이 수행한 역할들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역사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와 그 차이점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살피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식이 역사적인 요소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를 탐구할 수 있게 한다.과거 6차와 현행 7차의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된 여성에 대한 내용은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여성들이다. 그러나 역사가 절대적으로 영웅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수의 위대한 여성이 전체의 여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교과서에 수록된 여성에 관한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본론□ 교과서 속의 여성모든 국가의 역사 속에는 확실히 여성이 존재하였다. 등 정치적으로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여성들에 대한 언급이 근대사에 많이 남겨져 있다. 이들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다면 여성의 생활과 경험에 대한 교과서의 언급은 산업혁명 시기의 여성문제 혹은 여성참정권운동 정도에 불과하다.교과서의 저자들은 여성이 왕 혹은 그러한 지위에 버금갈 정도의 위치에서 특정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한 경우에만 언급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잔 다르크, 서태후, 카르티니, 락슈미바이, 퀴리부인 등을 언급한 것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역사속의 여성은 교과서 내에서는 사라졌다. 단지 왕과 영웅적 행동을 전개하였던 여성만이 교과서 안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들의 삶이 보편적인 여성의 삶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다.이미 정치사 혹은 사건사 중심의 역사 서술이 근대 산업사회의 변동과 사회 문제를 적절히 파악할 수 없다는 역사주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과학적 역사 즉 사회사가 탄생하였다. 최근에는 소위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맞이하면서 사회를 더 이상 계급갈등의 장이 아닌 의사소통의 장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사회적인 것의 담론적 구성’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였다.)이와 같은 역사학 연구 이론과 방법론의 중대한 전환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는 여전히 그 과거의 잔해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세 번째 특징은 일반 여성의 문화적 공간에 대한 서술이 미약하다는 점이다. 즉, ‘역사에 남을만한’ 업적이 없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내용이나 그 여성들에 대한 사진을 제시하면서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불이익만을 언급하고 여성들의 수동적인 모습들만을 제시할 뿐, 여성의 고유한 문화적 경험의 공간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일례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을 제시하면서도 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6차, 보진재, p.39) 또한, 서양 중세의 “귀족층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였으며, 남편의 부재시에는 봉신들과 예속민들을 다스렸다”(6차, 보진재은 남편이 수행하는 업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듯 한 교과서의 서술은 학생들에게 왜곡된 사실을 알릴 수 있다.세 번째 서술된 일본 무가의 여성에 대한 서술도, 가문이나 남편의 ‘도구’로 취급되는 여성의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남성의 주체적인 모습에 반하여 여성의 수동적이고 도구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남성은 생계유지를 위한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는 반면, 여성은 가사 노동 및 육아와 같은 다소 비생산적으로 간주되는 노동에 종사하거나 남성의 생산적 활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남성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이러한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내용의 왜곡과 관련하여 지적될 수 있는 또 다른 왜곡은 남성과 여성의 교육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 내용은 한 종류의 교과서에서 서양 근대 사회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보진재, p.184 - 시민층은 성공의 열쇠로서 교육을 중요시하여 소년들은 학교 교육을 받고 주로 가업을 이었으며, 소녀들은 가사와 육아법을 배웠다.]이 내용은 단지 소년들만이 학교 교육을 받아 성공에 이르는 열쇠를 가질 수 있었던 반면 소녀들은 가정 내에서 어머니에 의해 행해지는 이른바 ‘신부 수업’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근대 사회에 해당되기보다는 차라리 서양 중세 사회에 어울린다. 즉 중세의 교육은 대체로 기도와 손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노동을 기계적으로 반복 학습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삼았기 때문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교육 체계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중세의 국가나 교회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엘리트 계층의 소년들은 대학에서 고전 교양을 공부하여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던 반면, 소녀들은 그야말로 가정을 충실하게 보전하기 위한 각종 사소한 기술들을 배우는 것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차 그 주장에 대한 지지자들이 증가하면서 그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영국의 경우 여성 참정권 문제가 거론된 것은 1831-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집단적인 문제 제기가 시작된 것은 1860년대부터이다. 또한, 영국에서는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시점부터 즉시 보통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즉, 영국은 1918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만 21세 이상의 남성에게는 보통 선거권을 부여한 반면 여성에게는 만 30세 이상으로 제한하였다. 이러한 불평등성이 사라진 것은 1928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만 21세 이상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보통 선거권을 부여한 시점이다.이처럼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운동은 20세기가 아닌 19세기부터 시작된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내용을 살펴보면 운동의 의의를 퇴색시키려는 의도에서 그 한계만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성 대중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단지 중간 계급의 여성들에게 한정된 운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 대전 이후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목적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면 의회 민주주의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나타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도 펼쳐진다. 이는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여성들이 전개한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여성들에게 투표권의 획득은 단순한 정치적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권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이 지니는 본성의 차별을 뒤엎으려는 저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많은 남성들은 여성의 참정권 요구에 그토록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성들에게 참정권 요구는 근대 초기부터 발전되어 온 여성으로서의 자아의식의 표출인 동시에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해주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이마저도 올바른 서술을 하고 있지 않다.□ 대안교과서 『살가 권력으로 둔갑하여 특권을 유지하려는 순간, 잉태되는 비극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⑤남편 따라 불길 속으로 뛰어든 아내 (p.149): …인도에는 남편이 죽으면 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아내도 같이 불 속에 뛰어드는 관습이 있다…그러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남편 따라 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당시 사회는 여성들이 죽은 남편의 재산을 지닌 채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고, 이 때문에 원하지 않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⑥황제가 되기 위한 어려운 조건 (p.175): …‘자귀모사(子貴母死)’는 황제의 아들 중 하나가 황위를 이을 황태자가 되면, 그를 낳은 생모를 죽이는 북위의 제도였다. 황태자의 생모와 그 집안이 정치에 끼어드는 상황을 막으려 하였던 것이다…북위 황실의 입장에서는 여성들의 활약이 국가의 안정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여성들의 활동을 막으려 애썼고, 황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제도까지 만들었던 것이다…⑦제국이 탄생하기까지 숨겨진 희생 (p.213): …유목민 여성들 또한 칭기즈 칸의 어머니처럼 남성 못지않은 강인한 생활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끊임없이 이어진 칭기즈 칸의 정복 전쟁과 몽골 제국의 확대 뒤에는 이렇듯 유목민 여성들의 고난이 함께 하였다…⑧아름다운 하렘의 숨은 실력자 (p.235): …술탄의 여인들이 사는 은밀한 곳 하렘의 모습이다. 이 곳에서는 아름답게 치장한 이국적인 여인들을 만나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술탄을 위해 여기저기서 팔려 온 사람들이었다…당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⑨베르트랑드의 결심 (p.263): …프랑스 어느 농촌 마을, 베르트랑드는 남편 마르탱에게 버림받은 후 혼자서 가정을 꾸려간다. 그러나 8년 뒤 남편이 다시 그녀앞에 나타난다…베르트랑드는 돌아온 마르탱이 가짜인 줄 몰랐을까? 알면서도 모르는 체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베르트랑드 역시 가짜 남편과 함께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던 것이었다.⑩포카혼타스의 진실 (p.273): …다…
국채보상운동 (國債報償運動)『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① 방곡령 :일본 상인의 곡물 반출, 흉년지방관들에 의해 미곡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 실시 - 함경도(1889), 황해도(1890) 등일본의 반발로 실효를 못 거둠, 배상금 지불② 상권 수호 운동 :청, 일본 등 외국 상인의 내륙과 서울 진출서울 상인들이 황국중앙총상회를 조직(1898)③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1898) :아관 파천 후 열강의 이권 침탈만민 공동회를 개최러시아의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 프랑스의 광산 채굴권 요구 저지, 한ㆍ러 은행 폐쇄④ 보안회 활동(1904)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저지농광 회사 건립(직접 황무지 개간)⑤ 국채 보상 운동(1907)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재정 예속화 정책에 저항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 대구에서 시작(서상돈)국채 보상 기성회 조직(서울), 전국으로 확대거족적인 경제 구국 운동 전개(금주, 금연 운동, 여성들의 패물 납부)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언론사를 중심으로 모금 활동 전개일본의 탄압으로 중지경제적 구국운동와 국채보상운동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신민회, 대한자강회, 독립협회 등 다양한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이 경제적 구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경제적 구국을 위한 활동 중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을 중심으로 경제적 구국운동과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애국계몽운동에서 본 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은 한국 민족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본 제국주의의 실력과 국권을 빼앗긴 한국 민족의 실력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개화자강파들이 한국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적으로 한국 민족의 배양된 실력에 의해서 자기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전재한 운동을 가리킨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된 부분은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문화, 학술, 언론, 종교, 문화, 예술, 군사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즉 종래의 개화자강파의 흐름이 1904년~1910년 사이에 침탈 과정에서 경제침탈의 하나인 차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정부는 지속되는 재정난 속에서 개항에 따른 제반 경비의 증대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자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수행하지 못하고 악화발행과 차관에 의존하였다. 조선 정부의 이러한 차관도입에서 열강들은 관세나 광산, 조세 등을 담보로 차관을 제공하고 이권을 얻고자 하였으며, 정치적 지렛대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차관문제는 정치경제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생하게 되었으며, 1905년 이후 일본의 교묘한 차관 제공은 국채를 급증시켰고 결과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① 개항 이후 ~ 청일전쟁정치적으로 청일의 각축 가운데 청국이 상대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던 시기이다.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해관을 장악하고 이를 담보로 차관을 제공하면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가지 유의할 것은 이 시기 청국 자신이 전근대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비록 조선을 종속국화하고 실질적인 경제적 이권을 장악하려 하였다고는 하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청국은 그 스스로가 근대적 은행제도나 본위화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조선을 자국의 자본 아래 포섭하고 이에 기초하여 조선 재정을 장악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에 이 시기부터 일본은 대단히 교활하고도 체계적으로 조선에 침투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명목으로 배상금을 청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은행, 보험, 해운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서도 제일은행은 일찍이 지점을 설치하고 관세금취급권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일찍부터 조선을 자국의 화폐유통권과 신용권에 포섭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근대성이 조선에서의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② 청일전쟁 이후 ~ 러일전쟁일본이 보다 노골적으로 조선에서의 화폐발행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시기이다. 청일전쟁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의 재정을 정리하고 조선을 일본의 화폐유통권내로 포섭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에 필요한 차관을 일본은 1902년에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는 단서를 열었다.③ 러일전쟁 이후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 한국의 화폐 및 재정제도를 식민지적으로 개편한 다음 식민지지배의 기반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차관을 제공하고 수도, 도로 등을 비롯한 제반 사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차관은 제일은행이라는 식민지은행을 통해 신용을 공여하는 형태로 차관을 제공하여 일본으로서는 자본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하였다. 따라서 1905년 이후의 차관은 그 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고 극히 침략적이고 기만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국채보상운동과 차관)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목하여 6.5%의 높은 이자로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일본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 수탈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이 관세 수입을 담보로 빚을 쓰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1905년의 경우 6월에 200만원은 화폐정리 자금으로, 200만원은 회계 부족금 등으로 11월에 150만원은 민간 금융 자금으로, 1906년 3월에 1,000만원은 시설 자금으로 차관을 도입하였는데, 차입금 가운데 상당액은 이전 채무를 상환한다고 명목만 바꾼 것으로 실제로는 도입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결과 1906년 말경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빌려 온 국채가 1300만원으로 계산되었다. 당시의 정부의 예산으로는 거액의 국채를 갚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일제의 강압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가 경제의 자주적 권리를 회복하고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7년 1월 30일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제의 발기하여 2월 21일 단연회를 설립하고 단연동맹운동을 일으켰다. 그 실천방법으로 “2천만 국민들이 3개월간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이 매월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원의 국채를 상환할 수 있다”는 것가 결성되었다. 이의 소식을 들은 고종은 단연을 하고 영친왕의 예식을 연기하도록 명하여 이 운동의 활력소가 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일제의 상업 침탈과 일본 상인의 침투로 위기에 몰리게 된 한국인 자본가들과 지식인층이었다.또한 이 운동을 거국적인 운동으로 전개시킨 때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이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논설을 통해 운동의 당위성을 호소, 역설하였으며, 날마다 의연자의 명단 및 납부금액을 게재, 보도하여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의연금을 접수하는 실무까지 담당하기도 한다.이러한 거국적인 운동에 대해 통감부는 이를 일종의 항일운동으로 단정하고 간교한 탄압과 모략으로 이 운동을 좌절시켰다. 한편 주도 세력들의 소극적인 대처로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말을 전후하여 점차 쇠퇴하였는데, 대한자강회의 강제해산과 언론탄압 등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소장을 역임한 김종한의 일진회 가입, 국채보상운동회의 핵심이었던 자강회원들의 소극화, 국채보상기성회 총무 오영근의 보상금 횡령혐의 사건 등 운동 주도층이 분열되었고, 일반국민들은 불신감이 갖게 되었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의 사주였던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기 위한 지속적인 공작을 폈으며, 대한매일신보가가 보관하던 성금을 마음대로 사용하였다며 양기탁을 구속하였다. 4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양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이에 대해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층은 소극적인 대처를 하였고, 주요인사의 구속과 비리 문제와 일본의 언론플레이는 국채보상에 대한 국민들의 열의를 좌절시켰다.국채보상운동의 결말)국채 1300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갚으려는 시도는 모금 금액으로 보아서는 턱없이 부족한 실패한 운동이었다. 의연금과 관련하여 중앙의 조직적인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의연금의 총합금액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전국에서 거둔 액수는 대략 16만원~19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목표금액의 달이나 은행을 설립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의연금처리회가 구성되었는데, 양기탁이 이를 각 지방에 다시 돌려주어 지방단위로 키워나가다가 국가가 이를 필요로 할 때 일시에 다시 내놓자는 안을 제시하였지만, 그 행방은 모호하며, 민립대학 설립의 결의가 있었으나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국채보상운동의 한계성① 임원구성의 위약성과 문제점 :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체로 부상되었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는 강력한 전국적 지도부로서 통일적 지도체계를 확립하지 못하여 그 기능을 유효적절하게 발휘하지 못하였다. 임원의 경우 구성 가운데 일제 침략의 추종적 성격을 지닌 고급관료가 많았다. 이 두 보상소가 일제 통감부의 탄압행동을 감안하고 이 운동을 보다 폭 넓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략으로 이들을 내세웠다 할지라도, 이러한 지도부 구성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후 일본의 탄압과 방해공작에 지도부 일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② 여러 언론, 단체 간의 분파적 활동 : 강력한 중앙 지도부를 형성하지 못한 조직체계는 다른 단체와 언론을 통괄하지 못한 채 분파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여러 언론과 단체간의 알력이 존재하였고, 독자적인 보상운동으로 통일적인 조직체계를 이루지 못한 것은 운동전개의 큰 한계가 되며 결국 일본의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③ 운동의 초기 목적 :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국채보상을 위한 의연금 각출을 강조하는 운동이었으며,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애국운동적 성격으로 발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운동이 계획되지 못하였다. 일제로 의연금을 어떻게 관장하며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보상한다는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운동이 시작되어 전개과정에서 일관성 없는 지도원리와 자세를 보여주게 된 것으로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불신감을 조성시키게 한 것이다.국채보상운동과 여성참여)국채보상운동은 기존의 조선 사회에서 도외시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