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The Eastern Origins of Western Civilisation- 서양의 승리에 대한 동양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서구 문명의 동양적 기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과제.서지정보존 M.홉슨 지음 , 정경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05 , 456p저자소개존 M. 홉슨은 셰필드 대학의 정치학 및 국제관계학과 강사이다. 그는 《국제관계 역사사회학(Historical Sociology of International Relations)》(2002년, 스티브 홉든 공저), 《국가와 국제관계(The State and International Relations)》(2000년), 《국가의 부:국제간의 정치 및 경제적 변화에 관한 비교사회학(The Wealth of States: a Comparative Sociology of International Economic and Political Change)》(1997), 《국가와 경제 개발:비교역사학적 분석(States and Economic Development: a Comparative Historical Analysis)》(1995년, 린다 웨이스 공저) 등의 책을 썼다.역자소개정경옥-1971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를 졸업했다. Gates Korea㈜와 에릭양 에이전시에서 근무했으며,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전쟁에 반대한다」「제인 에어-고전문학 강의 노트」「대지-고전문학 강의 노트」「생활의 조건」「나는 무질서한 것이 좋다」「Self-Talking」등이 있다.본문 요약 및 감상평서론우리는 언제 부터인가 서양(특히 서유럽과 북미)의 모든 것들은 선진적인 것이고 그 이외의 지역들의 것들은 후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모든 지식, 법칙 그리고 물건하나하나 모두가 그리스부터 시작되는 서양 문명의 덕분이라고 배워왔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이런 사고들이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는 생각이다. 이런 이론들은 모두 ‘잠재적인’ 서양이 내재적이고 우월한 미덕이나 번영의 결과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성공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내재성이 확고한 논리를 통해서 혼자 힘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의 도움이 없었으면 서양의 발흥이 없었을 것이라는 예를 차례로 제시해 볼 것이다.선구적 개발자로서 동양유럽 중심주의에서 보이는 1500년 이전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서로 고립된 세계였다. 하지만 이는 1500년 이전의 동양이 상당한 경제 발전을 통해 이미 정해진 세계적 망이 있었고 이에 유럽인들이 기존의 망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왜곡한 것에 불과 했다. 1800년 이전에 세계 경제의 주도적 칼자루는 동양의 여러 사회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기원전에도 미숙한 연결망이 있었지만 500년에 이르러서야 각 지역 간의 접촉을 단절 시켰던 틈새가 매워졌다고 주장하고 있다.중국의 당나라, 중동의 우마이야?아바스 왕국, 북아프리카의 파티마의 발흥은 세계 무역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동양적 세계화는 유럽의 카롤링거 제국의 탄생과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출현에 따라 세계무역 체계로 확장 된 것이다. 이런 세계화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이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지금 서구 세계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을 공공의 적으로 놓고 이들은 합리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게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모습을 보기 좋게 깨드린다. 상인 출신인 이슬람의 성인 ‘무함마드’ 는 무역과 합리적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고 “가난은 배교와 흡사하다” 라고도 말을 했을 정도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이런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상당한 확장력을 가지고 650~1800년 사이에 동양의 많은 ‘자원’들을 서양으로 전달한 세계의 다리 역할을 했다. 이 시기 동안의 집중적인 혁신과 기술?사상적 진보는 대단해서 지금도 수많은 과학 기술적인 발명이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직물제조와 강철, 과학 신화일 뿐이다.인도와 동남아의 경우에도 동양적 전제주의로 인해 후퇴한 곳으로 보는 유럽 중심주의의 신화에 의해 비춰지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제국의 통치자들은 오히려 유럽의 군주들에 비해서 상인들을 보호하고 자본주의에 대해서 관대하고 그것을 오히려 장려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그들의 산업과 금융은 유럽에 비해서 오히려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유럽 중심주의는 동남아시아를 말라카 해협만 언급하고 이외는 탐험가와 관련된 이야기에 실리는 지명 정도로 축소했다. 이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무역의 중심지로 이슬람과 중국과의 교류의 중요한 지역이라는 점은 간과한 것이다.일본은 앞선 지역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 바라 볼 수 있다. 전제주의와 고립으로 인해 후진적인 지역이 서구의 현대화의 물결을 받아들임으로써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예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메이지 시대의 성공은 이전 도쿠가와 바쿠후하가 밑거름이라고 주장한다. 이 당시에 국가 형성과 자본주의 기관의 구축, 자본주의 경제 형성에 필요한 상당한 기반이 마려되어 있었다는 점이 이에 대한 근거로 볼 수 있다.1부에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동양이 서양보다 항상 뒤쳐진 사회로 살아왔다는 생각을 뒤집어 주는 것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결국 동양의 전제적이고 고립된 성격 때문에 후진적으로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사고는 서구인들의 유럽 중심적인 이론에 빠져 있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무역이나 경제적이거나 기술적인 면에서 모두 동양사회가 서구(유럽) 사회를 앞서 있었던 것이다.서양은 꼴지였다.1부가 뒤쳐져 있다고 생각한 동양의 선진적인 모습을 부각시켰다면 2부는 앞서 있다고 생각되던 서양의 동양에 한발 뒤쳐진 모습을 살펴보는 장이 될 것이다. 농업의 발전은 유럽의 봉건사회의 발전에 핵심적인 요소였다. 아울러 중세의 상업과 원자본주의의 부흥이 서양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강조되어왔다. 이런 농업 기술의 발전이 동양에서 왔다는 사실을 살펴본다면 유럽의 봉건 경제의 동양적 기원을 주장하는 것은 무 그들에게 부흥과 발전을 가져다 준 것은 동양의 세계화를 통해서 이슬람이라는 다리를 거쳐서 건너간 것이다.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이탈리아는 후진적인 유럽대륙의 선두주자였지만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단역에 불과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가 창안했다고 알려진 금융제도는 중동의 이슬람에서 그 기원을 볼 수 있는 것이나 항해술, 수차와 풍차, 직물 및 종이 제조, 그리고 철 생산과 시계의 기원이 모두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진 것을 살펴보면 그 주장을 뒷받침해 볼 수 있다. 결국 서양인들이 자랑하던 르네상스의 수학이나 과학 기술이 모두 동양에서 전해 졌음으로 르네상스의 배후는 동양이 있다.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이후 유럽이 아시아를 정복해서 서구 주도의 세계가 열렸다는 주장들에 대해서 저자는 이것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어쩌면 이는 지금까지 서구 중심주의 주장중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수용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주장중의 하나 일 것이다. 이시기 이후 서양은 급속히 발전을 했고 결국 18세기 산업혁명 그리고 제국주의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근거를 통해 이런 생각들은 하나하나 깨어지게 된다. 먼저 유럽인의 이른바 대항해 시대를 통해 아시아가 발견되고 신대륙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동양에서 앞선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으로 항해를 한 것을 통해서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유럽인들에게는 대단한 발견이었지만 이미 동양인들에게는 작은 뉴스거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이 항해가 가능한데는 동양에서 발명된 기술이 핵심적이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아시아에서 앞선 군사력을 바탕으로 무역을 독점하고 정치적으로 지배했다는 주장 역시 이들의 희망사항이나 과장에 불과 했다. 1800년경까지는 이들 아시아 국가들이 정치적 경제적 침입에 충분히 대항 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유럽의 상황과 아시아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의 주장은 마치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더 뒤쳐져 있던 왜가 삼국을 물리바꾸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중요한 인쇄기의 발명은 세계적으로 독일인인 구텐베르크가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목판 인쇄술과 이동식 인쇄기는 중국과 한국에서 발명되어 서쪽으로 전해졌다. 일련의 인쇄물과 제지술이 동양에서 넘어 간 것을 증거로 인쇄술 역시 서구로 넘어갔다는 것을 들고 있다.서양의 발흥에 대해 일반적으로 수긍하는 유럽 중심적인 연대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영국의 산업 혁명이다. 영국에 관한 이야기는 유럽 중심적인 서술의 주축으로 영국의 성공은 자생적인 변화에서 오는 것으로 외부의 개입이 전혀 없었다고 지금까지는 이야기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영국은 뒤늦은 개발자에 불과하여 초기 동양의 개발자에게서 나온 더 진보한 기술과 사상을 모방하고 흡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공자의 사상이 유럽과 영국으로 전달되어서 계몽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사상은 정부, 도덕철학, 예술양식, 의복, 가구 등 많은 분야에서 유럽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중국의 사상과 기술이 유럽으로 전달되는 데는 선교사들과 여행가들이 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유럽인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진보한 중국의 기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사상가와 발명가가 없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점이다.하지만 영국의 농업 혁명과 산업혁명이 큰 영향을 받은 중국적 기원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농업 부분에서는 로더 햄 쟁기와 회전식 풍구, 조파기와 마력 중경기를 이용한 경작 법, 윤작 기법 등이 훨씬 이전 시대 중국에서 발명되어 사용되어 있던 것으로 농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중국의 것이었다. 산업부분에서는 산업 혁명의 가장 중요한 발명인 증기기관과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석탄과 용광로, 철과 강철의 생산, 면직물 산업, 등을 통해서 영국의 산업화는 700년에서 2300년이 앞선 중국의 많은 발명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영국이라는 ‘강조’는 편협한 유것이다.
‘여왕 마고’- ‘마고’ 그 종교적 광기와 권력의 모습을 통한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1. ‘여왕 마고’ 그 몰입의 어려움..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파트리셔 셰로가 만든 ‘여왕 마고’가 처음 나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영화의 포스터 때문인지 아주 야하기만 한 역사 영화로 각인이 되어 있었다. 사실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지나쳐 버렸음에도 그 부분이 상당히 신경이 쓰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던 이유는 프랑스영화에 대한 낯설음에 인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역사적 배경 지식이 얕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역사를 공부하면서 서양사 부분에는 담을 쌓다시피 해왔고 고등학교까지의 정규 교과 과정에서는 접해 볼 수 없었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 영화를 통해 역사의 완벽한 재현이 가능 할까? 또는 영화를 통한 역사의 왜곡에 대한 문제라는 논쟁은 뒤로 잠시 접어두고 ‘여왕 마고’ 라는 영화를 통해서 종교 개혁으로 혼란을 겪던 프랑스로 다가가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종교적 광기라 표현 될 수 있는 대립과 그 이면 속에 숨어 있는 권력투쟁의 모습을 살펴보고 지금의 모습과 어떻게 비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역사적 배경과 ‘여인들’영화는 1572년 8월 23일과 24일 ‘성 바르톨로뮤 데이’의 기간 동안에 빚어진 5천 여 명의 위그노 학살 사건을 중심에 두고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 권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광기, 인간들의 극단적인 선과 악, 관능과 사랑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당시의 가톨릭은 ‘절대적’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하는 것은 성직자의 입장에서는 ‘파문’과 ‘파멸’을 의미하는 것 이고 군주의 입장에서는 ‘권력’에서 낙오되어 버리는 가톨릭 하나만이 유일한 정의의 시대였던 것이다.프랑스 왕 샤를르 9세의 어머니 까뜨린느가 프랑스를 통일하여 셋째 아들인 앙주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시키는 ‘마고’는 오빠들의 애인이자 귀족들의 창녀로써 권력이나 종교 , 음모에는 관심 없이 오직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정략 결혼한 앙리와의 관계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마고는 아주 융통성이 있고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합리적인 여인이다. 자유로운 사랑을 즐기지만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고 하는 그런 매력적인 인물 인 것이다.하지만 사랑 이외의 정치적이나 사회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그 당시의 절대 군주의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했었던 까뜨린느를 주목해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까뜨린느를 보면 그 당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권력층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까뜨린느는 가톨릭이라는 가치에 도전해 오는 것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고 이는 절대 간과 할 수 없는 부분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는 이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역사상의 권력자들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기득권들이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3. 종교라는 ‘가면’을 쓴 지배층의 이중성영화 ‘여왕 마고’는 역시 두 교파 간 대립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바탕으로 여러 유형의 등장인물들이 갖는 특성( 대표적으로 마고의 문란해 보이지만 합리적인 성격과 앙리의 신념을 위해 잠시 몸을 숙이는 판단력과 어머니를 죽인 집안과의 정략적 결혼 그리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갖추다가 또 다른 음모를 생각해 내는 까뜨린느의 모습)과 그 특성을 통해 인간이라는 동물이 갖는 극단적인 선과 악의 본성이 잘 표현돼 있다. 하지만 영화는 당시 권력층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나 실제 일반 민중들이 종교 분쟁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조금 부족 한 것 같다. 역사의 균형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이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당시의 민중들에 있어서 가톨릭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절대적인’ 것이었고 수도사적인 검약한 생활과 절대 권력을 지켜야 하고 명령에 따라야만 했었다. 이는 ‘성 바르톨로뮤 데이’ 의 학살 장면에서 선악의 판단 없이 지배층의 신교 학살하는 장면에서 잠시 비춰지기도 한다.까뜨린느로 대표되는 권력과 종교의 결탁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 천 명의 신교도를 학살하고 종교와 관련 없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없는 사람들이 희생되게 한다.신교도의 지도층인 앙리 역시 그리 다르지는 않는 것 같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종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 의심되는 세력인 가톨릭 왕가와의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신교도들에게는 학살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적인 종교적인 신념을 강조하고 결국 그들의 희생만을 강조하고 있다.여기서 나는 다른 두 종교 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통점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당시 백성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백성들에게 종교적 신념과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굳건히 하는 수단으로 그 대가를 얻게 된다. 종교를 가면으로 씌어서 자신들의 권력 투쟁을 위해 백성들을 도구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런 모습을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서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4. 종교전쟁과 현대‘여왕 마고’는 중세의 종교 전쟁을 바탕으로 한 잔혹극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현대의 어느 영화보다도 ‘현대극’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 있었던 장면을 어느 영화보다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오히려 16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현대의 모습과 대비해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현대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종교 전쟁은 중세에 끝난 것이지만 이런 대립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업 혁명이후 빈부의 격차의 확대, 그리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그리고 우리 사회 내부의 보수와 개혁세력의 대립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시대의 차이만 있을 뿐 그 본질은 똑같기 때문이다. 이런 대립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세처럼 잔인한 학살과는 또 다른 형태이지만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자신들의 이익과 세력의 독점을 위해서 세계에 자신의 힘의 논리와 경제 논리를 강요하고 있고 이를 거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 보복한다는 점에서 중세의 종교 전쟁에 비해 더욱 한 발짝 더 나아간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수 백 년 동안 이런 역사가 반복이 되어 왔듯이 앞으로도 이런 역사의 반복은 계속 되리라는 것은 ‘여왕 마고’를 통해서 우리는 쉽게 찾아 낼 수 있는 것이다.5. ‘마고’의 사랑과 현재지금까지 종교 전쟁의 모습을 통해서 현재와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인 ‘사랑’을 통한 현재의 문제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점을 주목해 보았다. 영화는 마고가 사랑하는 사람의 수급을 들고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겉으로 본다면 종교와 권력으로 인해 사랑이 희생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제목을 ‘여왕 마고’라고 한 점에서 일련의 사건에서 까드린느 보다 덜 핵심에 서있는 마고를 굳이 왜 타이틀로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다. 그리고 마고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 현재 수많은 갈등에 휩싸여 있지만 인류가 공멸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 전쟁 시대나 지금이나 욕심을 해결하는 것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이 그 열쇠라는 것을 작가가 보이고자 한 것이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과정과 평가(評價)目 次((머리말))((본말))1. 군중 운동의 발흥과 심화1) 이권 회수 운동과 보로 운동2) 사천의 보로 운동과 폭동2. 신해혁명의 발전1) 무창 봉기와 각성의 호응2) 중화민국의 수립3) 신해혁명의 좌절3. 신해혁명의 평가에 대한 고찰((맺음말))((머리말))1911년 10월에 청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1912년 1월에 공화정체의 중화민국이 수립된 변혁을 흔히 신해혁명이라 부른다. 신해혁명은 전제 주의적 봉건 체제로부터 해방을 통하여 청조의 타도와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성과를 가진다.그러나 이러한 성과로 이루어진 중화민국은 이른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라 불리는 근대 중국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해혁명은 그 성공보다는 실패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실패’하거나 ‘불철저’한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의 연구는 중국, 대만은 물론 일본이나 구미의 중국근대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해혁명과 그것이 남긴 역사적 과제의 계승을 둘러싸고 각기 그 정통적인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중국과 대만 측의 경쟁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쳐놓더라도 신해혁명 자체가 20세기 중국사회의 변동이라는 거대한 ‘혁명’의 기원 내지는 출발점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중국 현대사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신해혁명을 보는 관점은 변혁과 혁명의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먼저 변혁으로 보는 관점은 신해혁명을 단순히 전제 군주제가 봉건적 성격을 가진 다른 세력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구질서는 거의 아무런 변혁을 받지 않고 제국주의 세력은 제거 되지 않는 채 유지 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 까지 주류를 이뤄온 신해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관점은 청조의 타도가 2천년이래의 전제 주의적 봉건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임을 강조한다.이렇듯 신해혁명은 부르주아적인 관념적 지향을 가졌던 지식인층에 하였고 이는 새로운 국민의식의 자각과 그 성장에 의해 반제국주의적 국민주의와 그에 기초한 다양한 대중운동은 중국자본주의의 발전에 상당히 유리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이러한 대중운동은 새로운 근대적 국민운동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외국인에게 빼앗긴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을 회수하자는 ‘이권 회수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운동에는 개명된 향신과 입헌 파들이 표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를 통하여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군주 입헌의 정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산서성에서 일어난 광산 채굴권 회수운동을 시작으로 철도 부설권의 회수 운동으로 이어 졌다. 중국은 1905년 이래 이권 회수 운동으로 광 권과 철도 부설권을 외국으로부터 상당부분 회수 하였다. 그리고 철도를 중국인 스스로 건설하기로 하고 각지의 신상들은 주식을 모으게 된다. 하지만 기대만큼 자금이 모아지지 않아 공사는 순조롭지 못하게 된다. 철도 건설이 늦어지자 중앙조정의 관리들은 차관을 해서라도 철도를 부설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고 결국 청 조정은 철도 국유화를 발표하고 영, 프, 독, 러 네 개국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게 된다. 지방의 이익을 외국으로 넘김으로써 해당 지역에서는 보로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혁명당 들은 보로 운동을 반청운동으로 결집시켜 혁명으로 이끌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2) 사천의 보로 운동과 폭동청정의 철도 국유화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곳은 사천 성 이었다. 따라서 사천성의 보로 운동은 더욱 격렬하고 지역도 넓었다. 입헌 파 자의국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방법 시작된 보로 운동은 후에 격렬한 무장 대결로 번지게 된다. 사천 총독 조이풍은 초기에는 완화정책으로 입헌 파들의 찬양을 받았으나 이내 적극적인 진압 정책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는 군중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사천은 결국 동지 군이 이끄는 군중들에게 점령당하고 무창 기의가 일어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마련해 주게 된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기는 전국적인 농민투쟁의 확산으로 상할 수는 없다.2. 신해혁명의 발전1) 무창 봉기와 각성의 호응호북 성 무한은 수륙 양 방향의 교통의 편리로 중국 내지의 최대 화물의 집산지가 되었으며 남방 각성의 제일 정예 부대중의 하나인 호북 신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군의 문화 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나 가정이 빈궁하고 군대 생활도 고된 형편이어서 청정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쉽게 혁명 사상에 젖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혁명당의 활동이 활발했던 상해나 보로 운동이 일어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던 사천에서 혁명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것에 비하여 무창에서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호북성 만이 갖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음을 지적 할 수 있다.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1911년 10월 10일 무창 신군의 봉기는 심각한 통치위기에 처해 있던 청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신군병사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혁명군은 그날 밤 호광총독 아무을 점령하고 11, 12일에는 무한 삼진을 완전한 통제 하에 두면서 전국적인 혁명의 전개에 도화선이 되었다.이 무창 봉기는 호북의 혁명파가 일반지식인이나 학생, 회당과 신군에 대한 혁명공작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이는 최초의 혁명기관이라 할 화원산 기관, 과학 보습소, 일지회, 호북 군대동맹회, 군치학사, 진무학사, 문학사와 공진회에 이르기까지 혁명조직의 계속적인 명칭변경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본방향이 꾸준히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혁명조직에 참가한 호북의 신군 사병은 총수의 1/3이상에 달하는 5~6천명 정도였고, 이렇게 신군이 ‘혁명화’하여 봉기의 주력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혁명파 지식인에 의한 장기적이고 꾸준한 선전과 조직공작에 있었다. 혁명군은 11일 호북 자의국에서 도독의 선출과 군정부의 수립을 위한 회의를 가지고 여원홍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혁명군정부를 건립했다. 군 정부는 성립 후 즉시 국호를 중화민국이라 개칭하는 동시에 전국에 봉기의 정당성과 이에 대한 호응을 요청하는 통전을 하였다. 나아가 대내적으로는 가연 잡세의 폐지, 군인?관료봉급 이점은 혁명의 목표나 성격에 대한 혁명파의 인식의 한계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결국 혁명에서 핵심적인 과제인 권력의 장악에 실패하는 결과와 혁명파 자체의 분화를 초래하였다.한편 또한 혁명파는 무창봉기에 의해 활성화 된 회당이나 농민대중의 반항투쟁과 혁명봉기에 대해 이를 적절히 유도함으로써 혁명의 진전을 가져오는 데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혁명군측은 무창봉기 후 10, 11월의 시기에 분명히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혁명파가 가장 우려해 왔던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에 의한 간섭이 나타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에 의한 ‘과분’에 대한 위기의식에 그다지 개의치 않고 청조에 의해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무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해오던 원세개의 의화제의를 단호히 거부한 것은 이러한 정세에 기초한 자신감의 반영이었다. 또한 남방의 혁명군측은 11월 중순부터 통일적인 임시중앙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여하튼 이렇게 하여 혁명군측은 12월 중순 이후 혁명의 목표를 청조의 폐위와 공화정의 수립 및 남북의 통일에 의한 조속한 국내질서의 회복이라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 위하여 청조 측과 타협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의화는 12월 18일부터 오정방과 당소의를 각기 남북대표로 하여 상해에서 개시되었는데, 이 남북의화에 대해 12월 30일 영?미?불?독?노?일 6개국은 신속한 협의에 의해 남북간의 충돌을 마무리 짓도록 요구하는 집단적인 간섭을 행하였다.2) 중화민국의 수립혁명 직후 정치적인 중심은 무창과 상해 두 곳이 되었다. 각 성 대표단은 상해에 모여 임시 정부 조직에 관한 의논을 하게 된다. 상해에서 대표 회의를 개최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무창에서 개최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을 하게 되고 결국은 무창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혁명군이 한양을 잃어버리게 되어 무창에서 회의를 열 수가 없게 되자 회의는 한구의 영국 조계 순창 양행에서 열리게 된다.무창 혁명이 일어 났을 때 손문은 미국에서 혁명 자금을 모으고 있절혁명군의 오색기가 채택 되었다. 손문의 영도력과 지도력의 실상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손문이 대총통에 취임하면서 그 동안 있었던 주도권 싸움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러나 입헌파와, 구관료, 투기정개들은 원세개를 옹호하고 손문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견지하면서 , 청 정부를 먼저 물러나게 하는 사람이 대 총통이 된다는 약속을 이용하여 손문에게 그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한다.손문은 우선 중국의 구 관료 계에서의 악습이나 형식적인 폐풍을 폐지하고자 생각하였다. 제복은 관위의 상하에 관계없이 간소한 차림의 中山服의 착용을 지시한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임시정부 공보》는 1912년 1월의 창간호부터 58호로 끝나기까지 정부 기관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다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시책으로 주목되는 것은 매국적 관료에 대한 징벌이다. 이홍장, 성선회, 서징, 풍계군 등의 토지 재산, 상공업 시설이 몰수되었다. 이런 조치가 민중의 정치적 의식을 끌어올리고, 봉건적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이리하여 남경임시정부의 성립은 중국에서 수천년이래 전제주의의 종결과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파가 제국주의로부터 압박을 받아, 부득이 원세개와의 타협을 추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력에 대하여 행한 민주적 자세의 집약으로서 귀중한 의미를 갖는다.3) 신해혁명의 좌절남북화의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원세개가 청제를 퇴위 시키고 전제 정치를 공화정으로 바꾸게 된다면 혁명에 있어 그 공로가 제일이므로 원세개가 총통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손문도 귀국 초에는 철저하게 혁명을 하려 하였으나 혁명파가 단결되지 못한 상태여서 타협하려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손문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면서 청제의 퇴위가 실현되면 원세개에게 총통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선언을 한다. 원세개는 손문의 보장을 받은 후 황실을 강하게 위협하고 결국 청정은 황실이 우대 받는 조건으로 퇴위 조서를 발표하게 된다. 청은 북경으로 건도한지 268년 만에 그다.
1. 들어가며 - 칼라일은 가라!학창시절부터 역사를 공부하면서 늘 한 가지 의문점에 부딪히곤 했다. 세계사를 좌우했던 중요한 사건에서부터, 사람들에게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사건까지, 역사적 사건에는 늘 중심인물로 부각되는 주인공이 있다는 점이었다. 교과서에서 임진왜란하면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면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것을 구해 낸 사람에 대한 설명은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그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병들과 수하 장수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묻히고 이순신만이 모든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부조리(?)한 사실에 대해서 아는 것은 쉽지 않았고, 알려 들지도 않았다.) 왜 역사적 사건이 한사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님에도 오직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부각되는 걸까? 종래에 역사를 공부하거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일반 민중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이는 사료의 특성상 모든 이들을 기록하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한계 때문 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유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영웅 숭배적’ 영웅관의 대표적인 주자인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라 주장하여 근래에도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다. 『영웅 숭배론』에서 했던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는 그 유명한(?) 말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 될 정도이다. 그가 주장한 ‘영웅은 그에 합당한 조건을 가지고 역사를 유지하고 이끌어온 원동력’)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해 온 것이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하던, 칼라일의 주장에 반기를 들며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은 주변의 조건과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 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개인의 천부적인 능력과 노력이 아닌 보이지 않는(?) 뭔가에 의해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품은 서양사 전공자들이 『영웅 만들기』라는 책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기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친숙해진 영웅들. 그런 이들이 세계를 이끌어 왔다고 생각해 온 나에게 이 책은 서론에서 부터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면서 영웅이 만들어 지는 제작과정을 친절히 설명해 준다.2. 본문(1) - 영웅들 이제 화장을 지울 때.『영웅 만들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다섯 명 -나폴레옹, 잔 다르크, 엘리자베스, 무솔리니, 비스마르크- 으로 서양에서(특히 유럽) 근, 현대사를 거치면서 각 나라의 영웅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역사적 평가에 부침이 많았다는 것과 자신들 혹은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실제의 모습보다 더 크게 혹은 중요하게 만들어 진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각 나라별, 시대별로 필요한 이미지들을 가져오고 각색해 오면서 이들은 원래의 이미지보다 더 악랄하게 비춰 지기도, 때로는 절대 선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색칠과 덧칠 또 다른 이미지의 덧칠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지금까지 누려온 영웅 혹은 위인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각색되고 변색되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위인이 아니라고 필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칼라일이 주장했던 것처럼 성실성과 통찰력을 가진 -흔희 말하는 타고난- 영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영웅은 이런 여러 겹의 가면을 둘러쓴 인물들이지, 실제로 그렇게 살아온 인물은 아닐 수도 있기에 보다 객관적으로 그들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저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가면을 벗은 채 사실만을 가지고 그들을 평가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예를 든 다섯 인물을 굳이 살펴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서론에서 언급한 충무공의 혁혁한 공이 성웅화되어 지금은 모든 이들이 민족의 영웅으로 꼽는 ‘전국구 영웅’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민족주의 사학들에 의해 부각되었고, 개발 독재 시대에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국가 부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위해 현충사를 짓고 광화문 앞에 충무공 동상을 만드는 등 후대에 부각된 사실을 보더라도 필자들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있다.) 살아생전에는 그리 각광 받지 못하던 인물들도, 죽은 후에 오히려 더욱 신성시 되고 영웅이 되는 매커니즘이 ‘만들기’ 라는 단어를 통해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본문(2) - 만들어진 영웅, 이렇게도 보자.하지만 책에 나오는 필자들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윗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로 서양의 근, 현대사와 관련된 인물들을 예로 들고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떠나서 수많은 영웅들이 - 거의 모든 국가에는 다양한 형태의 영웅이 존재한다. -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런 『영웅 만들기』라는 매커니즘이 각 시대의 각 지역의 다양한 영웅들에게 모두 적용이 될 수 있느냐? 는 것이다. 사회마다 다양한 문화와 발전 형태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영웅사관과 관련하여 이를 모든 상황에 적용 시킬 수 있느냐?는 주장을 해볼 수 있다.또한 이 책은 ‘만들어진 영웅’은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갖게 한다. ‘만들어 진다.’ 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나는 처음 글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만들어 졌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조작과 허구, 사기 이런 것들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만 그대로 본다면 자칫 만들어진 영웅= 사기라는 공식이 성립 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상상의 공동체』라는 민족주의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우리나라가 단군의 고조선 이래로 한민족을 유지해 왔다는 믿음의 뿌리인 ‘민족주의’가 사실은 근대에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 일 뿐이라고 저자는 주장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자체가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배타적 민족주의 등으로 인한 부작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생국가들의 성장 동력이 되거나 식민 지배하의 국가들의 독립을 근간이 된 것을 보더라도 완전히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들어진 영웅의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필자들이 주장하듯이 이들을 화장을 지운 객관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긍정적인 면이 혹시나 훼손되지나 않을까? -마치 부정적인 것이 긍정으로 덧씌워 졌던 것처럼- 라는 염려에서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3. 나오며 - 우리 시대의 영웅 만들기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는 영웅을 만들어 내기를 원하고 있다. 물론 아무나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영웅을 만드는 것이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듯이 현재 우리사회에서 탄생되는 영웅도 그와 같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만들어 지는 과정은 어떻고, 그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먼저 영웅을 만드는 주체는 이전의 일부 상위계층에서 대중으로 바뀔 것이다. 언론의 발달로 이전처럼 일부계층이 정보를 독점하던 현상은 사라지고 원하는 이라면 누구나 많은 양의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예전과 같은 방식의 영웅 만들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만들어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영웅이 만들어 질 재료 - 가능성- 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 같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우리는 공동체 - 집단 -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집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허울뿐인 공동체 속에서 파편화되어 고독을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공허함은 자신의 주체를 맡겨서라도 열광할 무엇, 몰두할 무엇, 기대할 무엇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탈출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이를 대신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자리에 자신만의 영웅을 채워 놓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끝난 ‘주몽’ 신드롬이나 ‘박태환’ ‘김연아’ 신드롬은 또 하나의 영웅 만들기의 모습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전과는 다른 것은 자신들의 능력과 대중들의 대리만족의 욕구 그리고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영웅으로 탄생되게 된 것이다.)
중국 사상사동경대 중국 철학 연구실 지음 / 조경란 옮김 , 동녘 , 1992 , 260P역자 소개조경란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수료(중국 현대 철학 전공)하고 숙대, 대전대 강사, 현재 국민대 강사. 논문으로는 〔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역사유물론에 대한 철학적 검토], 『시대와 철학』 제 4호, 1991 [중국 신해혁명시기의 사회주의 수용], 『현상과 인식』,1990 [중국 맑스주의 수용의 초기적 특징], 『역사비평』, 1990 겨울호 〕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 개설』 이 있다.[목차]역자 서문서설제1부 중국사상의 형성제1장 정통적 사상제2장 논리사상의 발생과 영향제3장 반 정통사상제2부 중국사상의 전개제1장 정통적 사상의 지위 확립(漢代)제2장 신비사상의 대두(漢代)제3장 불교의 수입과 영향(六朝唐代)제4장 정통적 사상의 철학적 전개제5장 전통사상과 서양사상참고문헌머리말중국 사상사의 시작은 중국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칠지 몰라도 그 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중국 문화는 서구와는 아주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왔고 그 사상사 역시 서구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발전되어져 왔다. 지금으로 부터 4000여 년 전부터 거슬러 올라가 사상사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특히 개설서의 경우는 방대한 연구량과 작업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뛰어 들 수 있는 작업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중국 사상의 흐름이 이전에 성인들이 썼던 혹은 이야기 했던 경전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에서 비롯되었듯이 이 책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통해서 사상사의 흐름을 파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것이 될 것 같다. 흐름 못지않게 읽는 독자가 얼마나 쉽게 이해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 역시 한 권의 저작을 파악하는 것에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상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글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상고 시대에서한 설명이 부족함을 볼 수 있다. 천(天)은 통치자가 천명을 부여 받았느냐에 따라서 왕조의 안위와도 관련되는 중요한 개념이고 각 사상가들에 있어서도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중시했었기 때문에 천(天) 개념이 빠진 것은 좀 아쉬운 점이었다.춘추 시대에 예(禮)는 다스림의 근본이라는 측면과 몸의 근본이라는 측면에서 이해가 되었다. 이는 예와 국가 통치의 관계를 밝힌 것임과 동시에 예를 일신의 수식 규정으로 여겼던 유가 윤리학이 발생하게 된 것을 밝힌 것이다. 책에서는 제자백가 시대의 유가 사상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공자가 시, 서, 예, 악 등을 교과서로 사용하면서도 이를 전통적 의미 그대로 계승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한 것이 계몽적 태도를 가졌다고 본 것이다. 의미 자체는 흔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계몽적’이란 단어를 썼다는 것이 조금 독특하다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대 사상을 후대의 발달사에 맞춰서 편의상으로 윤리학설과 정치학 설로 나누고 있는데 이는 개설서의 취지로 보기에는 처음 사상사를 접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서로 영향을 준 사상가들을 순서대로 놓는 일반적인 분류가 더 이해하기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맹자], [중용], [대학]을 주관적 윤리설로 놓고 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성선설을 바탕으로 인간은 본래부터 윤리성을 가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순자를 객관적 윤리설의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윤리가 인간의 마음 밖에 존재하면서 인간에게 복종을 강요한다고 보는 주장이다. 윤리 사상의 발달은 외재설이 내재설로 발달을 했고 그런 과정에서 점차 정밀한 설명이 가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비판에서 유가의 정치 철학이 성립했고 이가 정치 전략이었다. 하지만 정치사상에 대한 설명 부분에 맹자와 순자의 정치사상에 대한 언급이 다시 한 번 나오는데 한 사서 많이 벗어나서 그런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듯했다. 약간은 불친절하고 복잡하게 되어 있던 유가에 대한 설명에 비해서 도가와 법가의 사상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다. 도가는 무위 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노자와 장자의 독특한 사상 체계에서 나왔다. 사상과 문화의 난숙도가 높아져서 그 진보와 발전에 불안감을 느낀 사람들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 나온 것은 잘 설명이 되어 있으나 노장의 무사상은 동양 문화에 대해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는 언급 한 줄로 끝나고 만다. 법가주의 정치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 역시 비교적 잘 서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법가의 가장 중요한 통치술인 법치와 술치, 세치에 대한 설명을 통해 통일 국가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도가와 마찬가지로 설명을 이것에서 끝냄으로써 이후 중국 사상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한 것으로 자칫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춘추 전국 시대의 사상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의 제자 백가의 사상은 백가쟁명이라고 불리는 서로 간의 논쟁을 통해 중국 사상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하지만 이들 사상에 대한 너무 간단한 설명과 이후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사상사는 그 흐름이 중요하다 할 수 있는데 이런 흐름을 제대로 연결해 주지 못한 약점이 있는 듯하다.2부는 유교가 정통적 사상의 지위를 확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한 듯하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漢 대를 경학의 시대라고 보아 왔으나 이 책의 저자는 경학이 한 대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라고 해도 한 대를 경학의 시대라고 규정짓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한 대에서는 경학뿐만 아니라 많은 중요한 사상적 움직임들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하나의 특별한 점을 부각시켜 보아온 연구 시각에 대한 정당한 비판으로 볼 수 있겠다. 한 왕조의 초기에는 법가와 도가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왕조의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면서 국가 조직을이다.중국인은 고대부터 윤리 도덕이나 언어문자, 역사적 기록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민감했던 반면에 우주론이나 종교와 같은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사회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것에 대해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배층에 한정 될 뿐 하층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오행 참위와 같은 사상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이는 너무 편향적이라 볼 수도 있다. 오행설은 수,화,목,금,토의 다섯 가지의 원소가 천지 운행을 통해 만물을 조화 시킨다는 사상으로 고대에서부터 있어 왔다. 경학자들도 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이는 한 대의 참위설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멀리는 송유시대에도 오행설은 자주 언급이 된다. 참위 사상은 후한의 광무제 때는 황제가 굳게 신봉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緯)설을 통해 유교의 경전의 정설을 혼란시킨 측면도 있지만 경설을 계발 시킨 측면도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위진 시대에는 노장 철학의 ‘무’와 불교의 ‘공’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논의가 자유분방하게 이루어졌던 시대였고 이전 시대의 상고주의와 형식주의를 초월하려고 했던 이례적인 시대로 필자는 보고 있다. 왕필과 하안, 그리고 죽림칠현이 대표적인 사상가였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이 너무 간다하여 언급하지 않고 넘어 갈 수가 없다. 기존의 선입견을 버리고 절대적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던 이 당시 청담 사상에 대한 중요성의 언급이 빠진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라 지적하고 싶다. 불교는 정확한 전래 시기는 모르지만 전한 말아니면 후한초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불교사는 번역 불교와 중국 불교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이 시대 불교의 주류는 반야 사상인데 중국인들이 불교를 이해한 맨 처음 단계는 노장의 무를 통해서 공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무와 공은 분명 다를 것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말 그대로 전무(全無) 이다. 무와 공을 정말 무 그대로 이해하라는 것인지 너무나 난해한친 서술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수당 시기에 대한 서술이 한페이지에 불과 하다는 점에서 내용의 빈약함을 지적 할 수 있다.송의 학문이 중국의 정통적 조류 속에서 이상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고 보는 것이다. 송나라 시기의 학문은 손명복에 의해 자유로운 해석의 물꼬를 틀었다. 손명복은 [춘추]에 대한 혹독한 비평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당시와 후세에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을 보면 당시의 자유로운 해석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이지 여전히 유교적 전통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송의 성리학에 대한 연구는 북방의 이민족들이 변경을 침략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당시의 학자들이 하늘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인간 사회의 원리에 대한 실제적인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상 상의 변화가 있는데 이에 대한 서술이 빠져 있다. [춘추]에 나와 있는 존양왕이는 결국 문화우월주의로 유가사상의 발달을 불러일으키는 큰 계기 인데 그 설명이 빠져있는 것이다. 주자는 오경을 중심으로 송대의 학문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는 당의 학문에서 보이는 통일적 경향이 깨어지고 개인마다 자유롭게 경서를 바라고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후대에 경서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성격과 실천의 이행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발전한다고 보면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사서의 제정을 통해서 학문을 평이화하는 과정으로 이행시켜 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주자의 행적에 대해서만 설명을 둘 뿐 주자가 나오기 이전 시기에도 유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주자의 큰 업적은 이곳에 있는데도 이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너무 독자들의 배경지식과 추측을 유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송학이라 불리는 학문은 이기심성론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형이상학적이었다. 필자는 경학에서 자유비판의 길이 열린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 또한 유교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라 주장한다. 우주의 구성과 인간의 심성을 완전히 철학적 입장에서 유교를 해석하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