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다른 문화 텍스트보다 영화를 선택한 것은 영화가 가진 기호학적 특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액션 영화, 로맨스 영화, 호러 영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영화는 사회의 산물이다. 특히 장르 영화는 그 시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간단하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기 장르 이고,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분석해볼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선택했고, 여시서는 무간도 시리즈를 중점으로 다루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계열체와 통합체 분석을 통해 내러티브의 구조를 파악하고, 기호학적 사각형을 통해 인물 간 대립 구도를 알아본다. 또한 어떤 문화적 코드가 영화를 보게 만드는지 서술하고, 영화 속에 나타난 상징, 도상, 지표에 대해 설명 하도록 하겠다.1)계열체와 통합체영화에서의 계열축과 통합축은 크게 보자면 영화의 내러티브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통합축적인 성격이고 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들이 계열축적인 성격이다. 영화는 소설처럼 글로 쓰여진 것을 시각화 시켜 보여주는 시각 예술이다. 하나의 문장을 완성시키기 위해 여러 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 장면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시각화 시켜 보여주는 것들이 선택축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문장이 단어와 형태소 음운으로 분절 시킬 수 있듯 영화도 쇼트 하나하나로 분절할 수 있고 한 쇼트 내에서도 다시 그 쇼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로 분절 할 수 있다. 두 명의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줄 때 한 쇼트로 두 사람을 잡고 끝까지 두 사람 모두를 보여 줄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음 각 각의 리버스 쇼트를 보여줄 것인지, 그렇다면 쇼트의 사이즈는 어떻게 할 것인지 앵글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모두 선택적인 사항으로 감독은 자신의 의도를 최대한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하여 보여준다. 영화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아마도 편집에 대해 말할 때 더 중요할 것이다. 어떻게 편집-선택되어진 쇼트들-이 되어 졌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무간도에서는 2가지의 엔딩이 존재한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엔딩으로 마지막에 유건명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면서 진영인의 장례식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DVD에 있는 또 다른 엔딩은 진영인이 유건명을 만나기 전 그가 스파이라는 증거를 경찰에 신고 한 것으로 되어 마지막에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유건명을 경찰이 체포하면서 끝난다. 다른 결말을 구성하는 쇼트는 겨우 5쇼트이다. 그 전까지는 똑같다. 그러나 그 5쇼트가 달라짐으로 인해 영화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선택축에서의 다른 가능성을 선택함으로 인해 영화의 결말이 바뀌는 경우다.차이가 관계를 형성한다는 소쉬르 언어학의 이항 대립적 요소들을 무간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경찰과 갱이라는 두 집단간의 대립 구조를 들 수 있다.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대립 구조로써 두 집단간의 갈등으로 인해 진영인이 조직 내 경찰 스파이가 되고 유건명이 경찰 내 조직 스파이가 된다. 무간도 1편에서 진영인과 유건명은 서로 대립구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진영인과 유건명을 구분 짓는 요소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유건명은 지금은 경찰이지만 그의 본질은 갱이고 진영인은 지금은 갱이지만 그의 본질은 경찰이라는 것에 있다. 진영인이 유건명의 정체를 알아내고 유건명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경찰이야.” 무간도3에서 유건명은 양반장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 이것은 그의 본질이 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찰은 이마에 총을 쏘지 않는다. 이마에 총을 쏘는 것은 갱이다. 바로 이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그 둘을 구분하게 된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 할지도 모른다. 그 둘이 같은 운명, 서로의 도플갱어 같은 존재이기에 그들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운명 공동체라고 해서 그 둘이 같은 사람은 아니다. 분명 같은 운명이지만 운명이 같다고 그 둘이 똑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그 둘을 구분 짓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고, 나는 그 요소를 그들의 본질인 경찰과 갱으로 본다는 것이다.대립관계는 차이만이 아니라 둘의 유사성에도 무게를 둔다. 앞서 잠깐 논의가 되었듯 진영인과 유건명은 유사성이 많다. 경찰과 갱 사이에서 각각의 스파이로 두 집단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또한 둘 다 자신의 존재를 위해 투쟁한다. 진영인은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유건명은 경찰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한다. 둘 다 이렇게 말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진영인은 경찰이 되고 싶은 이유를 이렇게 얘기하고, 유건명은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라는 말로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경찰이 된다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고, 경찰이라고 해서 좋은 사람일 수가 없었다. 무간도 3편에서는 이런 점이 유건명의 자아 분열로 나타난다. 진영인과 자신을 일치 시키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메리가 떠나고 휠체어에 혼자 남은 유건명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손가락으로 영인이 사용하던 모르스 신호를 보내고 있다. 유건명과 진영인은 모두 무간지옥을 향해가는 동반자 이다.이항 대립에서 네러티브의 동기화가 생긴다고 볼 때 이 둘의 대립적 요소들은 네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축이고 원인이다.2) 기호학적 사각형진영인과 유건명은 대립 관계이다. 진영인은 경찰의 스파이로 경찰의 범주에 속하고 유건명은 조직의 스파이로 갱의 범주에 속한다. 황국장과 한침은 경찰과 갱의 대립으로 성립한다. 진영인은 한침의 부하이지만 그를 잡기 위해 투입된 비밀 요원이라는 점에서 모순 관계이고, 유건명과 황국장 역시 유건명은 황국장의 부하이지만 한침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심어둔 스파이 라는 점에서 모순 관계이다. 황국장은 영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한침은 유건명에게 명령을 내리는 점에서 둘의 보충관계가 성립된다.3) 문화적 코드영화와 문화적 코드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영화라는 것이 사회와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둘을 떨어뜨려 생각하는 것은 반쪽짜리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무간도는 갱스터 무비이다. 갱스터 무비의 네러티브는 신문의 헤드라인 뉴스를 각색한 것이다. 그만큼 사회와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양조위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나?”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양조위는 “물론이다. 홍콩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을 심심치 않게 신문에서 본다.”라고 답했다.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영화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실미도 같은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은 말 할 것도 없고, 하물며 스타워즈 같은 SF영화를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가진 현실과의 유사성,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외계인인 E.T가 나오는 영화도 영화 속 외계인인 E.T는 인간의 감성-우정이라는-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E.T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에일리언은 외계인이 나오지만 인간의 감성을 갖고 있지 않지 않느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에일리언은 처부수어야 할 대상이고 그것을 쳐부수는 과정에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영화는 공통적으로 인간을 다루고 있고, 그 인간은 우리이기 때문에 문화적 코드라는 것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멜로 영화의 내용은 주로 남녀간의 사랑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 사랑은 비극적 결말로 끝이 난다. 속 여주인공의 죽음은 멜로 영화의 공식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처음엔 주로 여자 주인공이 죽고, 그 변주로 남자 주인공이 죽는다. 죽는 이유는 불치병 내지는 갑작스러운 사고이다. 그렇게 한쪽 연인이 죽고 난 후 남겨진 사람은 슬픔의 눈물을 보이면서 영화가 결말에 이른다. 하지만 최근 2000년대 들어서 일본 멜로 영화는 죽음 그 이후를 다룬다. 여기에 환타지를 입혔다. 연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 안타까움을 관객의 마음속에 남겨둔 채 끝을 내리던 멜로에서, 연인의 죽음 그 후 혼자 남겨진 이들의 환타지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는 의 예를 통해 어떤 점이 기존 멜로드라마-여기서 말하는 기존 멜로드라마는 주인공 둘 중 하나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멜로드라마를 말한다.-와 같은 부분이고 어떤 점이 다른지-왜 죽음, 그 이후를 다루는지-를 살펴보고 장르의 진화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기존 멜로드라마의 틀 적용1.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기존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장치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에서도 쓰여지고 있다. 미오의 죽음은 여기서도 비극적 장치이며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주요한 소재이다. 멜로드라마에서 죽음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가장 완벽하고 강력한 장치로 오랜 시간 다루어졌던 소재이다. 현실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매우 빈번히 등장하여 익숙함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속 익숙한 이야기는 장르 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멜로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죽음이 영화 속 익숙함이다. 이런 익숙함을 내러티브가 가지는 ‘약호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머리에 충격을 가하면 기억 상실증에 걸리고 다시 충격을 가하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 경우들은 커뮤니케이션과 재현을 약호화하는 보다 복합적이고 의식적인 체계의 관습체계들과 비슷하다. ‘습관 manner'은 관습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장치들을 넣는 것도 관습적인 구성 방식이다.2. 여성스러운 여자 주인공, 가부장제의 승인에서 미오는 집안일 하는 상냥한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타쿠미와 유우지(아들)는 엄마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며 너무 좋아한다. 집안은 미오가 온 날부터 깨끗해지고, 까맣게 탄 토스트 대신 맛있는 밥상이 차려진다. 그리고 유우지 에게는 항상 상냥한 엄마로 아주 전통적인 여성을 보여주고 있다. 늘 웃는 얼굴을 하고, 하얀 원피스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여성스러운가를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멜로드라마 속 여성들은 언제나 너무도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가부장제를 옹호한다. 집안의 풍경은 너무도 이상적으로 그려진다. 바깥에서 일을 하는 남편과 집안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에게까지 너무도 상냥한 엄마의 모습은 이 가족의 행복의 근원이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엄마가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타쿠미는 환자다. 당장 죽을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상인처럼 일을 하고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은 타쿠미이다. 드라마 상 미오는 아프지 않았다. 그 죽음이 굉장히 갑작스럽게 그려지고 있는데 그 전에 아팠다거나 한 적은 없다고 나와 있다. 미오는 타쿠미의 상태를 알고 결혼한 것인데도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타쿠미의 몫으로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건강한 미오가 돈을 벌어오고 집에서 일하는 것은 타쿠미의 몫으로 해야 이치에 맞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아픈 타쿠미가 밖에서 일을 하고 집안일은 미오가 하게 한다. 여기에 대해 영화 속 인물 모두는 타쿠미와 미오의 역할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그러면서 영화는 가부장제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3. 순수한 사랑, 사랑의 지속 - 배경으로의 시골 풍경멜로 영화가 다루는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부적절한 불륜의 관계라 할지라도 적어도 두 주인공만큼은 그들의 사랑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까지 진전되지 않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치 저 사람은 영영 한 사람만을 마음에 담고 살아갈 것처럼 보여주면서 결말을 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순수하고 한결같은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다. 의 사랑도 순수하다. 두 주인공은 서로 고등학교 동창으로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된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얼마나 순수한 사랑을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로 돌아온 미오가 죽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타쿠미를 선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사랑하겠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데 이런 행동을 통해 이 영화가 얼마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을 담아내려 했는지 알 수 있다.이런 순수성은 의 배경으로 시각화 하고 있다. 일단 둘이 사는 집은 도시의 맨션이 아니다. 호숫가를 지나면 있는 숲 속의 집이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숲 속의 집은 두 사람의 사랑의 순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어린시절의 학교 역시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나 숲 속의 터널이나 공간은 그림 같은 풍경을 잡아내기 위한 롱 쇼트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배경을 통해서도 영화가 얼마나 순수한 사랑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4. 운명성의 강조비의 계절에 죽었던 미오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자신이 남긴 동화책에서처럼 비의 계절이 끝나면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을 보기 전까지 왜 그토록 미오가 돌아가려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동화책에만 비의 계절이 끝나고, 엄마는 아카이브 별로 돌아갔습니다.’ 라고 써 있을 뿐이다. 이것만 가지고 미오는 돌아갈 운명에 처하고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는다. 어쨌든 과거로 다시 돌아가야 미래가 유지되겠지만 굳이 그렇게 빨리 떠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떠나야 할 운명을 안고 돌아온 것이라는 설정을 영화는 유우지의 책을 통해 끊임없이 각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서 관객에게 ‘미오는 비의 계절에 돌아온 것처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장르를 섞어 놓음으로써 관객이 영화에 대해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한다. 그래서 요즘 영화들은 한 장르, 예를 들면 공포, 스릴러, 액션, 드라마 등등의 한 장르로 불리지 않는다. 스릴러와 액션의 형태처럼 두개 이상의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역시 이런 추세 속에 멜로와 환타지를 결합시키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는 멜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것과 미래로의 시간 여행이라는 두 가지의 환타지를 섞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환타지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근간을 제공한다. 환타지 자체-죽은 사람이 기억을 잃은 채 돌아온다는 것-는 황당한 것이지만 환타지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그저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의 이야기로 익숙함으로 다가 온다. 환타지의 당혹스러움을 익숙한 이야기로 풀어나가면서 관객의 거부감을 없앤다. 그러면서 기존의 멜로드라마와는 다른 소재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환타지의 적용은 멜로드라마 장르의 또 다른 변주, 혹은 현대 영화의 추세인 sub장르의 한 가닥으로 이해 될 수 있다. 하지만 둘 모두 장르의 변형을 통한 관객 끌어 모으기란 점에서 장르의 진화적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2. 불안정한 구조에서 안정된 구조로의 결말의 결말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해결 될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해결되지 못하고 떠나감, 돌아오지 않음으로 귀결된다. 결론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의 반복으로 보이지만 결말은 오히려 처음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던 불균형의 측면들과 불안정의 요소들을 덜어냄으로써 결말에 가서 오히려 안정적인 내러티브가 된다. 같은 비극적 결말이라 해도 처음의 불안정의 정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안정된 정서로 끝이 난다. 기존의 멜로 영화가 가지고 있던 불균형을 이루면서 끝나던 내러티브와는 달리 불균형에서 안정으로 오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이런 내러티브의 구조는 이야기를 마냥 비극으로만 몰고 가던 기존의 멜로드라마와 차이를 보인다.3. 죽음, 그 이후기존의움이 동반된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관심사는 그 사람의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가 먼저 죽게 된다면, ‘그 사람이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이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궁금증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적 궁금증을 장르에 변주에 이용하여 그리고 있다.)일본인들이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간지 와루이 히토’(재수 없는 사람)가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좋은 이미지, 항상 최상의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긴장 속에 대인관계를 만들어 나간다.…이런 대인 관계의 스트레스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우을증 증세가 심해져서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게 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제 12회 세계정신의학회(2002년)에 따르면 일본인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5명으로 사실상 세계 1위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 우울증이 자살 원인의 60%를 차지한다는 보고도 있다.이런 긴장된 인간관계는 ‘간지 와루이 히토’가 되어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중 심리(일본인들은 인간관계와 비즈니스에서도 이런 긴장을 유지하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를 들어낸다. 어쨌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고, 그 죽음 자체 보다는 혼자가 된 나의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4. 패턴의 변화과거 미오와 결혼전에 타쿠미는 자신의 병 때문에 미오와 헤어지는 것을 결심한다. 자신의 병 때문에 연인과 이별을 결심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결국 둘이 화해하고 함께 지내는 것도 패턴) 이런 패턴대로라면 죽는 것은 타쿠미 쪽이고 슬퍼하는 것은 미오였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미오를 죽게 하고 타쿠미를긴다.
1. 주요 갈등1). 갱이 되고 싶은 어린 헨리와 그것을 반대하는 가족과의 갈등.이 갈등은 현실의 사회를 고수하려는 보수적 집단과 그것을 거부하는 어린 개인과의 갈등으로 비춰진다.2). 헨리가 감옥에서 나온 후 마약에서 손 뗄 것을 요구하는 폴리와 그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폴리 몰래 마약 거래를 하는 헨리와의 갈등.갱 family에서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폴리의 규칙을 헨리가 위반함으로써 그는 헨리의 보살핌 대신에 헨리로부터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마약으로 인해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영화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헨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갈등이 초래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이야기 하고 있다.3). 가정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캐런과 그렇지 못한 헨리의 갈등.헨리 역시 가정을 꾸리게 되고 가장이 되지만 헨리는 그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다. 여전히 친구들과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하고 갱 family를 더 우선 시 한다. 이 갈등은 전통적 가족에서의 가장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이 영화에서의 주요 갈등은 전통적인 사회의 질서와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주인공과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2. 화면 구성의 특징1). 주인공의 시점 쇼트.주인공의 시점 쇼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주인공과 보는 관객을 동일시하여 반(反)사회적인 주인공의 행동에 관객이 동참하게 만든다. 편법으로 편의를 취할 때나 살인을 저지를 때도 이런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나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인 주인공에 대한 혐오감을 줄인다. 오히려 일반적인 사회에서의 질서를 무시하는 장면들은 오히려 그가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2). 주인공의 등뒤를 따라가면서 보여지는 카메라 무빙과 커트 되지 않는 쇼트.이때의 주위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바쁘게 지나다닌다. 그들만이 사용하는 공간을 주인공은 어디든 갈 수 있다. 주인공은 뒷모습만 보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잘 보인다. 이런 쇼트로 이 인물이 어떤 보여 진다.3). 쇼트가 계속 이어지다가 화면이 멈추고 나오는 내레이션.이 내레이션은 그 순간의 주인공의 마음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암시를 나타낸다.4). 로우키의 조명조명의 사용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로우키의 조명을 사용한다. 밖에서 촬영되는 데이씬에 경우를 제외하고 실내의 장면들은 대부분 로우키의 사용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이따금씩 붉은색의 강하고 과장된 색조명으로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를 표현한다.3. 내레이션내레이션의 기능이란 것이 영상에 대한 설명의 기능이라서 어쩌면 영화적 기법과는 거리가 먼 기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내레이션도 이런 내레이션의 기능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철저한 1인칭 시점이 되는 이 내레이션의 사용은 주인공의 생각과 화면에 나오지 않은 편집된 시간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생각뿐만이 아니라 감독의 주관이 적극 개입하게 된다. 주인공의 마음의 소리를 통해 아주 쉽게 감독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내레이션의 사용이 비교적 효과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4. 영화 속에서의 갱영화 속에서 갱은 길게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로 물건을 살 수 있고, 훔치는 일로 힘들지 않게 보통의 사람들보다 쉽게 큰돈을 벌고, 좋은 차, 좋은 집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얻고, 모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현실의 평범한 사람들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비웃으며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을 아주 쉽게 해낸다. 감옥에서의 삶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들의 생활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아니다. 최고급 고기와 랍스터로 요리를 해 먹고 술도 마신다. 마치 감옥으로 휴가를 나온 사람들 같다. 이렇듯 갱은 참 매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특히 주인공은 범죄자로서의 갱이 아니라 호탕하게 세상을 사는 로멘티스트로 보인다.(캐런과의 데이트 씬에서) 영화의 마지막에서 경찰에 체포된 헨리의 모습은 다르지만 그때의 헨리는 이미 폴리의 갱단에서 벗어나 있었다.5. 주자들의 경찰같은 존재이다. 모든 갱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헨리에게도 그렇다. 조직은 폴리에게 돈을 상납하고 폴리는 그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한다. 여기서 폴리와 경찰의 관계가 성립이 된다. 폴리와 경찰은 이미 한 family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에게서 보호가 가능한 것이다. 폴리는 갱과 경찰의 중간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 사이를 조율하는 기능을 폴리가 하고 있다.2). 지미헨리의 갱 family의 스승 같은 존재다. 어렸을 때는 헨리의 우상이었으며 성장한 후에는 훌륭한 동업자로 기능 한다. 그는 헨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남자가 지켜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친구를 배반하지 않고, 입 다무는 것. 이것이 남자가 지켜야 할 일이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칭찬해 주는 것이다.”3). 토미지미의 소개로 만난 헨리의 갱 family로 사고뭉치고 수다쟁이이다. 이테리계 갱으로 영화마지막에 마피아가 되는 듯하지만 마피아들에게 죽음을 당한다. 다혈질의 성격으로 살인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죽게 된다. 헨리가 이야기하는 좋은 친구들이다.1. 주요 갈등1). 이혼을 하려는 엘리와 그것을 막으려는 사회와의 갈등.자유로운 사상과 관습을 깨는 엘리의 행동들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90년대의 뉴욕의 최 상류층의 사람들은 그들의 관습에 얽매여 그 관습을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엘리는 그 모든 것을 어기고 있다.2). 전통적인 순수함을 지닌 메이와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엘리 사이에서의 뉴랜드의 갈등뉴랜드는 이런 갈등을 겪지만 결국 메이와 결혼한다. 그러나 끝내 엘리를 잊지는 못한다. 전통적인 관습의 표본인 메이와 그것을 깨는 엘리 사이에서의 뉴랜드는 메이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을 희생한다. 결국 사회에 통념에 굴복하고 자신을 희생한다. 거대한 사회에 한 개인은 묻혀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굴복한다. 그리고 다시 엘리를 만날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사회화한다.3). 다시 만난 엘리에게 가지 못하는 뉴랜드의 갈등메이와 만나게 되고 다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결국엔 다시 헤어지게 된다. 이미 뉴랜드와의 이별로 자신을 사회적 통념에 묶어두기 시작한 엘리 역시 뉴랜드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굴복하게 된다. 마지막 늙은 뉴랜드가 엘리의 아파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은 이미 자신들의 상상의 세계에서만 서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사회화되었고 그들의 자유와 순수는 상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2. 화면 구성의 특징.1). 공간 설명적인 카메라 무빙에 의한 커트되지 않는 쇼트.백작부인의 연회장 씬에서의 쇼트는 커트보다는 카메라 무빙에 의한 시각적 설명이 이루어진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90년대의 최 상류층의 집과 연회장, 연회에 쓰이는 소품과 집을 꾸며놓은 소품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 화려함과 웅장함을 커트된 한 화면에 담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감을 주기 위해 감독은 커트 하지 않고 주인공의 뒤에서 주인공이 걸어가는 곳을 따라간다.2). 조명뉴랜드의 집과 엘리의 집은 어둡고 로우키의 조명을 쓰고 있다. 이 작품은 그 동안에 갱스터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던 마틴 스콜세지의 아주 예외적인 작품이다.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도 감독은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것이 조명에서도 나타난다. 드라마의 장르에 일반적인 하이키의 조명을 버리고 암울한 로우키의 조명과 어둠을 이용하고 있다.3. 내레이션여기서의 내레이션은 아주 설명적이다. 이 내레이터는 영화 속의 인물이 아니다. 제 3자로써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주 객관적으로 주위에 인물을 설명하고 성격을 설명한다. 이 내레이터는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주인공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본다. 여기서의 내레이션은 감독의 적극적 개입이 없다. 설명하기에 바쁘다. 건너뛴 시간과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때로는 그 내레이터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최악의 내레이션이다. 이것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자주 등장한다.4. 영화 속에서의 결혼영화 속에서의 결혼은 단순한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니다. 가문과 은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이 이루는 가족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 두 가문이 한 가족이 된다. 그러나 엘렌과 뉴랜드는 그런 결혼에 따라오는 개념들을 거부한다. 결혼이 하나의 사회 통합의 기능으로 작용한다.5. 마틴 스콜세지의 예외적인 필모그라피그의 주류의 작품들과의 연관성을 찾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좋은친구들 같이 그의 주류의 작품들과는 성격적으로 매우 다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그의 스타일은 녹아있다. 카메라의 무빙에 의한 커팅되지 않는 쇼트들과 그 쇼트들을 채우고 있는 주변 사람들과 배경들은 그의 영화라는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다. 조명에 있어서도 로우키의 사용으로 갱스터 영화에서의 조명과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용이 효과적이든 그렇지 않든 내레이션의 사용 또한 그의 영화와의 공통점을 갖는 연결 고리 이다.1. 주요 갈등.하워드 휴즈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그려냄에 있어 이 영화는 그의 화려함만을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비중을 둔 것은 그의 내면적 분열이다. 18세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그는 늘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는 늘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하고 그런 그도 그의 이런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미칠까봐 두려워한다. 결국에 그는 미치게 된다. 이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가 유산을 상속받는 날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릴적 자신에게 전염병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는 어머니로부터 그는 결벽증을 얻었고, 18세에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은 그의 귀를 잘 안 들리게 만들었다. 그는 모든 최고가 되고싶어했다. 최고의 부자와 최고로 빠른 비행기를 만들고 조종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그가 속한 사회는 그런 그를 늘 감시하고 무모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가 해낸 성공에 갈채를 보내지만 그의 실패엔 그의 성공도 실패의 이유로 간주한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를 적대시한다. (그의 동료를 제외하고 때론 동료른다.)
다분히 연출자의 입장에서 촬영 속도를 올리기 위한 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연기자들이 알아두면 좋은 테크닉 들이다. 이런 것들을 잘 모르면 현장에서 배우 때문에 답답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예전 3학년 2학기 워크샵때 이런 일이 있었다. 낮 촬영이었으나 따로 조명을 치고 촬영에 들어갔다. 조명을 치면 노출을 재야한다. 더구나 배우의 스킨 톤이 다른 배우들보다 어두웠기 때문에 신경이 더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배우는 쉬는 시간처럼 담배를 피러 나가고 없었다. 리허설을 하는 것은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 워킹 프레임들을 그대로 똑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허설 때와 본 촬영 때 연기가 달라지고 행동을 달리 하였다. 가장 어이가 없었던 사건은 간단한 C.U 쇼트로 놀란 얼굴로 카메라 쪽으로 돌아보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리허설을 하면서부터 감독과 배우 사이에 의견이 다른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감독은 “배우 준비되면 바로 들어갈게요.”라고 했고 배우는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액션!”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갔다. 그러나 배우가 갑자기 연기를 하다 말고 “잠깐만 이거 아닌 것 같은데, 다시 한번 갑시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컷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액션과 컷을 외치는 건 감독의 역할 아니었던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촬영 감독과 감독이 짜증이 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필름이 소모되고 시간이 소모되고 나중에 편집 때 그만큼 고생하게 되있다. 이런 점들은 배우들이 좀 알아줬으면 한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 가는 부분은 ‘촬영할 때 사랑할 수 없는 배우와 촬영할 때 사랑스러운 배우’ 부분이다. 정말 스크린 연기 잘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하신다. 그러나 준비 되지 않은 배우를 만나면 일일이 어떻게 서야 하고 방금 찍은 쇼트에서 마지막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등등 스크립터가 고생을 한다. 한 쇼트 찍고 나면 다음 쇼트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꼭 연기 못하고 현장 분위기 파악 못하는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배우 대접 받기를 원한다. 모든 세팅이 완료 되어야지만 카메라 앞에 서려고 한다. 배우가 위치를 잡아주고 카메라와 리허설도 해보고 조명 세팅도 도와줘야 하는 것이 배우의 일중 하나이다. 자기가 무슨 대 배우라고 찍을 때만 얼굴을 비춘단 말인가?사운드에 대해서도 공감이 간다. 지난번 매체 연기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었다. 부부싸움 장면이었는데 연극과 분과 파트너를 하게 되었다. 수업에 반 정도가 연극과 분들이었다. 교수님이 대본을 주고 각자 연습을 하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용하던 연습실이 시끄러워 졌다. 여기저기서 “어제 대체 어디서 뭘 한거야!” 버럭 하는 소리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화내는 연기다보니 있는 대로 발성을 하면서 연기를 하시는 것 같았다. 흩어져서 연습을 하는데도 그 소리가 장난 아니게 컸다. 그러자 교수님이 한 팀 한 팀 방문을 하셔서 “너 현장 가서 이러면 녹음 기사한테 혼나. 이러다 짤린다.”라고 말하면서 진정을 시켰다. 나도 상대방이 화를 너무 심하게 내서 그 에너지에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 목소리를 담으려면 정말 큰 풀샷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화내는 장면은 미디엄이나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마이크의 특성상 원음에서 멀어지면 원음은 줄어들고 대신 엠비언스가 세진다. 그렇기 때문에 원음인 배우가 내는 소리에 가까이 가려 한다. 그럴 때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 버리면 어떻게 될까? 동시 녹음을 하고 계신 분의 귀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또 사운드로 깨끗한 소리 보다는 그 음압 때문에 찟어지는 소리가 날지도 모른다. 클로즈업으로 카메라가 다가올수록 마이크도 함께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나는 장면을 찍는다고 하더라도 그 화난 감정을 소리를 키움으로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물론 소리가 커지겠지만 그 한계선 까지는 잡아줘야 한다. 이런 것과는 반대로 내가 저번학기 매체연기 실습에서 받았던 지적은 소리를 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소리를 크게 내라는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전달을 하라고 하는데 그때 정말 힘들었었다. 내가 듣는 나의 목소리는 분명히 크게 웬만큼 들리기 때문에 상대방도 그렇게 들릴 거라고 생각 했었다. 평상시에 내가 목소리가 작다고 타박받은 적은 없었으니까 난 내 목소리가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면 할수록 소리의 크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중간고사 이후에 한번 교수님이 찍어온 것을 보고 “이제 소리를 좀 미네, 들리지? 니가 지금은 소리를 밀고 있잖아.” 솔직히 아직도 소리를 민다는 것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히 내가 아는 내 소리는 마지막에 호흡을 먹으면서 말을 끝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할 때에도 불편함을 조금 느낀다. 그래서 말을 조금만 많이 해도 금방 피로해지고 목소리가 가기 시작한다. 발성 수업 때에도 발성교수님이 늘 “이 친구는 지금 내숭 떠는 거야. 충분히 소리를 낼 수 있는데 안내고 있어.”이런 얘기를 들었다. 발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다.책에 나온 것 중에 “말은 빠르게, 동작은 느리게”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카메라가 흔들리거나 팬이 빠르면 눈이 아프다. 일부러 그런 효과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가급적 흔들리지 않게 천천히 카메라 워킹을 한다.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는데 배우가 동작이 빨라서 카메라를 벗어난다면 당연히 NG이다. 또 그런 배우를 쫓아가겠다고 빠른 워킹을 하면 보는 관객의 눈이 피로해진다. 그래서 리허설을 할 때 카메라와의 호흡을 맞춰보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리허설은 정말 중요하다.
머쉬멜로우.. 그냥 재목에 끌려서 예매를 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포스터만 보고 ‘그냥 사랑 이야기인보다.’생각 했었다. 결국엔 그저그런 클레시한 사랑이야기였다. 약 한 50분가량의 연극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담기란 쉽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내러티브의 부재는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 머쉬멜로우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주요인물은 이혼위기에 처한 부부, 그리고 그 집에 우연히 들어온 도둑이다. 처음 오프닝 장면은 부부싸움으로 시작한다.(그전에 암전을 이용한 몇 장면이 있지만)그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는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저 유치한 부부싸움일 뿐이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는 남편의 능력 부족과 남편의 친구 보증으로 퇴직금마저 거의 날린 것에 대한 불만으로, 남자는 그런 것들로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인에 대한 불만으로 부부싸움이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집을 나가 버리고 그 사이 도둑이 들어온다. 이 도둑은 고아로 자랐고, 어쩔 수 없어서 도둑질을 하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결국 도둑에 의해서 부부의 관계가 급속히 회복되는데 이런 네러티브 구조는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서로 싸우던 부부가 도둑이 칼을 들고 위협하면서 옛날을 생각해 보라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모습은 너무 어의가 없었다. 둘이 어떤 사랑으로 결혼했는지는 모르지만 외부의 조건들로 인해 싸우게 되고, 다시 외부의 압력으로 재결합을 한다. 단 네 명이 나오는 연극에서 외부의 조건들은 너무도 크게 작용한다.굉장히 맘에 안 드는 부분은 결말에서 옛 생각을 하자 곧바로 다시 시작되는 사랑에 있다. 사랑이 지쳤을 땐 처음 사랑했던 그 마음을 떠올려 보라는 상투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걸어서 왔는데 처음 사랑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고 해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게 사랑은 아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서 끌려간다면 그 사랑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끝나는 것이다. 그건 조건에 의한 것이지 마음에 의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과거의 내가 사랑했던 그 모습을, 그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이라는 조건은 마음을 돌리기에는 너무 약하다.이 연극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50분의 짧은 시간이라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너무 연극이 ‘상황극’으로만 몰고 간다. 이런 상황극에 50분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길다. 그래서 지루하게 느껴진다. 내용의 전개 없이 하나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뻔한 이야기를 웃음으로 대처하려고 한다. 코미디의 기본 구조는 반복에 있다. 머쉬멜로우는 코믹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미디를 위해 반복적인 대사와 대상, 행동이 이어진다. 문제는 이것이 내러티브 없는 상황극에서 50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빠른 대사에서만 얘기되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그건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누군가의 재미난 일화보다 재미가 없다. 관객은 이야기를 들으러 간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야기는 없고 상황만이 존재한다. 이야기의 부재를 웃음으로 대처하려는 자세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이 연극은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을 너무도 무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 속에서의 상황극은 극의 긴박감과 쉬어가는 타임으로서의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50분 내내 상황극인 연극에서는 보고나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코믹극이라는 타이틀을 걸고도 그다지 코믹하지는 않다. 앞서 말한 이야기의 부재도 한 몫을 하지만 배우의 연기에 있어서의 강약조절 실패가 크다. 웃음의 포인트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상황극에 맞게 상황을 점점 몰고 가서 한번 터트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포인트 없는 웃음만 공허하다. 관객의 얼굴에 웃음기는 남아있지만 정말 배꼽잡고 웃는 장면은 없다. 굴곡이 없이 너무 무난하게 이어진다. 배우의 연기가 주거니 받거니 강약의 조절이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인데 비교적 잘 연기 한 것 같아 보이는 도둑역의 배우가 강약조절에 실패해 극의 재미를 잘 못 살렸다. 연극 내에서 도둑은 늘 코믹하지만은 않다. 그의 내면엔 고아로 자라 사랑받고 싶어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슬픈면이 있지만 그 슬프고 어두운 부분을 부각을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도둑은 매우 비현실적 인물로 보인다. 그의 내면을 부각 시키면서 코믹적 요소를 중간중간 잘 살렸다면 더 재밌었을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시종일관 웃기기위해 나온 사람처럼 연기했기 때문에 웃기는 하지만 딱히 기억나는 장면은 없는 것이다. 또한 집주인 남자의 연기도 극의 재미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연극의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 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한다. 계속 지나치게 흥분되고 긴장되어 있어 이 말랑말랑한 극을 딱딱하게 만든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좀 심각한 장면이라고 해서 그의 팔과 다리, 목이 딱딱하게 긴장된 모습과 끝까지 끌어내리지 못한 호흡이 계속 가슴호흡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내러티브 없는 뻔한 극에서의 지루함을 더는 것은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인데 그게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5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이 연극은 굉장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은 도둑과 집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둑과 집주인간의 남성주의적 시선에서 능력 없는 남자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여성의 목소리는 담겨있지 않다. 이 연극에서 여성은 그저 능력부족인 남편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정도로만 다뤄지고 있다. 그 불만은 남성으로서의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이 가정의 불화 역시 남편이 남성으로서의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마음을 돌리면 언제든지 같이 돌아설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마지막 엔딩에서 남자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하자 그간의 미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감동까지 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물론 여자가 완전히 남자를 미워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한마디에 모든걸 용서하다니.. 이런 장르적 관습으로 관객은 또 한번의 이데올로기적 학습을 당한다. 남성중심의 이야기와 해피한 엔딩...이 연극의 인물들은 연극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어딘가에 있을 사람이 아닌 저 무대위에서만 존재하고 연극이 끝나면 사라져 버리는 소모품적인 인물이다. 한 예로 도둑은 이 연극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관객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그의 마음을 해아 릴 수 없다.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철저히 극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그 인물이 들어오질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인간의 다양한 마음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 가지 감정으로 하나의 사건으로 몰아가는 집중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하나의 감정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인물의 성격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고 하나의 이야기로 몰고 가려면 인물의 내면 심리작용을 관객이 알아야 하고 거기에 동의해야 한다. 관객은 인물이 하는 행동에 동의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인물에 빠져들고 집중할 수 있고, 마지막에 가서는 그 인물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이 중요한 것은 그래야 관객에 마음에 감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고두심이 하는 연극에서 고두심이 연기하는 엄마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 이것은 고두심이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다.(물론 연기를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관객들이 고두심이 연기하는 엄마를 보고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두심의 ‘연기’에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라 내 현실 속에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에 들어왔기 때문에다. 우리 엄마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엄마에게 잘못한 것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감동하는 것이다. 머쉬멜로우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현실 속으로 들어올 수도 있었는데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머쉬멜로우의 인물들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고, 때문에 감흥을 일으킬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