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라이벌’이라는 책은 다른 책들과 다르게 어떤 노선을 놓고 각기 다른 주장과 행동반경을 연출한 두 인물을 대비하여 이를 조명하고 분석한 사람들의 강연을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역사 속의 인물들, 역사의 중심에 서서 그 족적을 남겼던 인물들에 대해서 내가 몰랐던 부분을 평가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나 존경할만한 위인이라 하면서 오늘날까지 칭송받지만 어떤 인물은 폭군이나 민족의 반역자 등으로 무덤 속에서까지 비난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즉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들 사이의 대립에 있어서도 승리자는 역사 속에서도 승리자가 되고 패배자는 폭군이나 간신 등으로 매도되는 것이 가진 자의 역사의 현실이다. 이는 곧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해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고 가진 자의 역사관 하에서 가졌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여러 사람의 시각에서 그리고 그 시대상 속에서 객관적으로 역사상의 인물들을 평가하는 시도가 있어야 함을 이 책에서 의미하고 있고 해방 전후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들에 대한 행적을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평가 하였다.본 서는 [김구와 김원봉], [안재홍과 송진우], [여운형과 이승만], [정인보와 백남운], [박헌영과 김일성], [장준하와 박정희] 이상 12명의 대립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잘아는 사람들도 있고 생소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서로 엮인 사람들끼리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결론적으로 대립된 것을 추구한 사람들. 이 사람들은 해방 후 국내에서 활동 하였을 때 우파, 좌파, 중도파의 라인을 형성하여 각 계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우선 식민지 시대에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면서 27대 519년만에 망하게 되면서 36년간의 일본에 의한 치욕적인 식민지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 예로만 이루어진다.”는 한 관리의 진술이었다.」 이런 반일 분위기와 독립의 의지 속에서 많은 한국인 중에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영웅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의열단 ? 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과 안재홍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활동을 하게 된다.독립군 만주지역을 발판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항일무장 투쟁을 펼치는 한편, 테러를 통한 폭력투쟁, 미국에서의 외교독립운동, 안창호의 준비론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의 인재들이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허나 여기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런 뛰어나 인재들이 독립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목숨을 바쳤는데도 불가하고 일제로부터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해방이후에도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민족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뛰어난 인재를 하나로 통합되어 그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였다고 생각이 든다. 당시 있던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평만 보더라도 느낄 수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후에 ‘거기에 있어보니 불을 지르고 싶었다’ 라고 하였고, 일화를 들자면 1956년도에 우리나라 야당 대통령 후보였다가 기차간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신익희씨라는 사람이 임시정부의 간부로 있을 때, 영어를 잘 해서 중국의 어느 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했는데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중국여자들을 꼬시는데 선두주자였다는 소리가 있었다. 피해를 당한 중국여자들이 신익희를 욕하고 다닌 것을 장준하 선생이 알고 독립군 몇 사람하고 몽둥이를 들고 가서 임시정부 유리창을 몽땅 부수고 신익회를 찾았지만 도망쳤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선생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을 깨버리기에 충분하였다. 김구 선생이라 하면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항상 이순신, 세종대왕 등과 같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며, 정치인들과 일반 민중들의 된 임정을 지키기 위해 1923년 민족독립운동통합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에 불참한 것은 물론 유일당 운동에서도 임정이 주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세력의 결집에 소극적이었다. 여기서만 봐도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구성원들 사이의 불협화음 등으로 초기부터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고 권리욕으로 인해 자력 독립에 차질이 있던것이 안타깝게 여겨진다.식민지 시대의 한국 독립운동 노선에는 한국에 남아있는 사람, 외국(주로 중국관내, 만주, 노령, 미주 등) 에 망명 나가 있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있으며 또한 국내 남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급진주의자들과 점진주의자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망명자들은 독립을 위해 군사적인 무장투쟁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외교적인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더욱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자유주의와 레닌의 사회주의의 영향이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매료된 한국의 자유주의 신봉자들과 막대한 대중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된다.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됨에 따라 국내의 민족운동은 좌우의 양대 세력으로 분리되면서 보수우파의 민족운동이 민중계몽에 의한 민족적 역량의 구축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면서, 일본의 식민지통치자들에 대한 전체 민족적·단일적 결속에 의한 투쟁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파의 경우는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을 동질적인 차원으로 수용하였으며, 일본 당국자들에 대한 투쟁에 앞서서 민족내적 계급모순의 극복에 치중하였다. 다시 말하면, 민족 내에서의 지주와 자산가를 적대계급으로 간주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계급적 투쟁을 강화하였다. 특히나 1920년대에 들어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사회주의자들이 잡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사회적 기반이 약했던 자유주의와는 달리 사회주의는 아래에서 보듯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을 볼 수 있다.그들은 한국인들, 특히 학생들, 청년단체들, 노동자들, 농민들 사이에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깊이 심었다길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의 희생은 민족주의자들이 이따금 행한 폭탄투척보다 훨씬 더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고문을 당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초췌한 모습, 모든 한국인들의 공동의 적을 향한 그들의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하지만 좌파의 이러한 성격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어느 의미에서는 민족운동선상에서의 민족간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기능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좌파에서는 자본가들 특히 지주들을 적대계급으로 하여 그들에게 대항을 하였기 때문에 지주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로 우파에서도 3·1운동이 일어난 뒤부터 우파의 일부에서는 친일적인 변신이 자행되어 이른바 자치정부론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자치론자 이광수, 최남선 등의 친일적인 행각은 우파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광복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지만 좌 ? 우익의 대립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역사 속에서 승리자의 입장된 우익들의 행적을 돌아보면 이번에도 역시 가장먼저 김구 선생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이 이끌었던 대한임시정부의 법통을 강하게 주장하고 그 임시정부에 의해서 정국을 주도하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사상 면에서도 사회주의를 배척하여 단일당 운동의 결실인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항하여 자파세력을 규합해 1935년 한국국민당을 결성한 것을 비롯해 해방 후에도 1947년까지 좌파에 대해서 완고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그 역시 어느 정도의 권력욕과 정치에 있어서 독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좌파에 대해서는 그러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해서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강력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가진 친일파를 해방 직후의 민족의 열정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그 뒤로는 민족해방투사들때,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서 김구가 한민당과 결별하지 않고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도 오늘 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 규명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는 단언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가장 큰 비판은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라는 그 역시 남북분단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면서 그 당시 좌파와 중도파가 찬탁을 지지했던 것에 대해 힘이 실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구는 가장 먼저 반탁 운동에 힘썼다. 물론 그가 즉시 독립을 열망하는 소망 때문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의 반탁투쟁이 중경임시정부추대운동과 표리관계에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민당계통의 동아일보와 미국의 교묘한 언론 플레이의 결과 이러한 반탁운동의 결과 ‘찬탁=소련 공산당=매국노’, ‘반탁=반소, 반공=애국자’ 라는 정서가 민중적으로 굳어지며 일제하에서도 굴하지 않은 반일투쟁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지켜온 사회주의 계열이 졸지에 매국노로 전락하고 친일파들이 애국자가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되고 결국 남한 내에서 좌익이 모두 사라지고 남북의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귀결되어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승만, 한민당 계통의 책임이 주가 되겠지만 김구가 반탁운동의 선봉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책임일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들은 인지하지 못하고 오직 삼팔선을 베고 죽겠다는 김구의 이미지만을 떠올리며 아직도 그를 가장 완벽한 지도자로 존경해 마지 않고 있다. 김구는 해방 후 정치적 실권을 잡지도 못했고 결국 암살당했으므로 그 시대의 권력투쟁의 승리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날까지 이러한 이미지만을 심어주고 있는 까닭은 현재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우익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즉 그 시대의 우익의 3영수인 김구, 이승만, 김규식 중 나중엔 우익들의 근간이 되는 한민당과 등을 돌리고 독재자로 추방당한 이승만이나 중도파에 더 가까웠고 월북한 김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