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방식1.서론현대사회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방식에 대한 레포트를 처음 받았을 때 쉬운듯하면서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에 약간은 막막했다. 그래서 처음 레포트를 쓸 때 레포트의 방향을 잡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거기서 의사소통이 단순히 언어소통의 개념에서 벗어나 몸짓·손짓·얼굴표정·눈짓·몸의 자세·신체적 접촉 그리고 나아가서는 웃음과 울음, 하품, 옷과 화장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개인과 개인만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등 다양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런 다양한 의사소통에서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대해 알아보고 또한 이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2.본론현대사회를 많은 사람들은 정보화 사회라고 이야기를 한다.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정보가 아닌가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의 의사소통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범위를 넘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보를 습득하고 또한 남에게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이 정보화 사회 즉 현대사회에서의 의사소통방식이라 생각한다.하지만 사회에서는 항상 원활한 의사소통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현 정부는 정부와 국민들간의 의사소통과정에 있어서 정보를 제공하고 습득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소리를 듣기 보다는 단순히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를 국민들이 습득하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의사소통방식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고 올바르지 못한 의사소통 방식인지는 여러 사건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는데 먼저 YTN 구본홍 사장의 취임과 국영방송인 KBS사장의 해임, 그리고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최시중씨 임명등 이러한 사건들은 단순히 사장의 취임과 해임 그리고 임명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매체는 정부가 하는 일을 감시하고 잘못된 정책이나 사안등을 비판하고 또한 이를 국민에게 알려야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서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인물들을 언론매체의 중심에 놓으면 과연 언론매체가 제 기능을 다 하여 정부의 정책비판과 제대로된 정보를 국민에게 알려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이렇듯 지금 현 정부는 국민과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그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고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의사소통을 하려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과거 70~80년대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언론탄압과 장악으로 수많은 국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는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생겨났다. 여기 인터넷에서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고 있는 “미네르바“ 사건을 살펴보면 현 정부가 국민과의 의사소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과거 독재시대에 이루어진 언론의 탄압과 장악을 현 시대에서 그대로 하려하고 있다. 미네르바 사건을 살펴보면 미네르바라는 한 인터넷 논객의 경제에 대한 예측이 언론과 정부가 말하는 것 보다 더 잘 맞으면서 인터넷에서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이 미네르바라는 인물의 신상조사와 언론에서 미네르바에 대한 이야기가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먼저 KBS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네르바에 대해 너무 비관적이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아주 나쁜 사람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다음날 MBC뉴스에서는 미네르바에 대해 앵커는 정부가 이 사람을 보고 배우라고 말을 하며 뉴스를 마쳤는데 너무 상반된 반응이 언론을 통해서 보여 지고 있다.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정부가 의사소통과정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의사소통과정을 지금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KBS와 MBC의 상반된 반응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저는 정부의 압력에 의해 두 방송사의 반응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먼저 MBC는 민영방송으로 정부에 큰 영향을 받지 않지만 KBS는 공영 방송으로 정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또한 KBS의 사장이 해임되고 이병순 사장이 임명 되었는데 이 사장이 대통령의 측근으로 이번 미네르마 사건에 영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개요-문화충격에 대한 개인적 생각문화충격이라는 말을 이 수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접해 보았다. 이 말을 언 듯 들었을 때 충격적인 문화에 대한 설명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중 이것이 문화충격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과제를 통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해 보고 싶다.2.서론-문화를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문화충격과 에티켓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문화충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문화충격이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자신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접촉하게 된다. 이에 무의식적으로 이질문화를 자신의 방식대로 기대하며, 대응함으로써 상호 불일치나 위화감이 생기게 되는데 이와 같은 불일치, 위화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로 일어나게 되는 심리적 부적응 상태를 문화충격이라 부른다.그렇다면 문화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문화를 볼 때는 두 가지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문화 중심주의 혹은 자민족 중심주의가 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각 문화 마다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고 자문화 중심주의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것을 배제 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나아가 나 이외의 모든 것은 없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국수주의다. 국수주의는 자문화 중심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에서 나온다.나에게는 익숙하고 편한 문화가 남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문화가 될 수도 있으며 나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문화가 남에게는 편하고 익숙한 문화가 될 수 있다. 이는 보는 시각에 따른 차이인데 이런 차이를 인정 하고 문화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앞서 알아본 문화를 보는 두 가지 관점 중에서 문화적 상대주의 관점을 취해야 하고 자민족 중심주의 관점과 국수주의는 버려야 한다.3.본론-문화충격의 예와 이해 방법문화적 상대주의 관점에서 문화충격과 에티켓간의 상호 관계를 살펴보면 문화충격이란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아서 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대부분이 옷을 최소한의 것만 걸치고 나머지는 다 벗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농사를 짓지도 않고 채집과 사냥에 의한 생활을 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게을러서 농사도 안 짓고 더럽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옷을 껴입을 필요가 없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하고 비도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또한 동물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에 사냥을 주로 하는 것이다. 게으르고 더럽고 무식하다는 것은 서구적 자본주의와 합리주의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가 자본주의와 합리주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것은 게으르고 더럽고 무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속에서 나온 하나의 문화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런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문화는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 봐야 한다. 에티켓은 문화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문화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 했을 때 남을 위한 배려라고 했던 행동들이 남에게는 결코 배려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우리는 처음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청한다. 하지만 상대가 무슬림의 이성이라면 절대 악수를 청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무슬림은 이성간의 접촉을 금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하는 악수를 그들에게 함부로 청해서는 안 된다.
1. 청일전쟁이란?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조선과 중국은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대상이 되어갔다.2. 청일전쟁의 배경1) 정치적 배경1890년 일본은 처음 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는 12월 6일 이른바 시정연설에서 "국가독립자위의 길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주권선이란 강역을 말함이요, 이익선이란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를 갖는 구역을 말하는 것이다"고 전제하면서모든 국가에 있어 주권선과 이익선을 옹호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같은 3월에 집필한 [외교정략론]이란 글에서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 철도는 이미 중앙아시아에 이르고 수년 후 준공되면 러시아 수도를 떠나 십 수일이면 흑룡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으며,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는 날이면 곧 조선에 사건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고 썼다.2) 경제적 배경혹자는 일본의 면사 면포 수출의 시장 확보를 둘러싸고 청나라와 경쟁을 벌인 것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수출되던 주요 일본제품은 면사와 면포였다. 그런데 1891,92년간 일본 면사의 총수출량의 75-100%가 조선에 수출되었으나 그 금액은 겨우 8천원에 불과하였고, 그 금액은 조선에서의 수출총액의 0.6%에 지나지 않았다. 면포는 일본 면포 총생산량의 0.3%, 0.4%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일본의 입장에서 더욱 중요했던 것은 수출보다는 수입에 있었다. 즉 원료공급지 또는 본원적인 부의 원천으로서의 조선이 중요하였던 것이다. 양국 무역관계에서 1885년의 경우 일본의 대 조선 총수출액이 46만원, 수입이 47만원이어서 거의 비슷하였으나, 1892년에 이르자 조선에의 수출이 141만원인 되었고, 청일전쟁 직전에는 청국이 일본보다 더 많은 금을 수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본원적인 부의 원천으로서의 조선의 금에 대한 보장을 얻어야만 하였다. 그런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무역은 수출초과이기 때문에 금이 유출될 까닭이 없었다. 많은 금이 유출된 것은 일본의 은화, 은행권 또는 제일은행의 어음 등이 유통됨으로써 일본인이 조선의 채금업자나 가난한 농민들로부터 사들인 것이거나 금광개발권을 얻어 금을 생산한 것들이었다. 청국에 더 이상 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본은 이를 견제하는 것이 필요했다.3. 청일전쟁의 전개과정1894년 7월,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 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1. 풍도해전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吉野), 나니와(浪速), 아키츠시마(秋津洲)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遠)과 군함 광을(?乙)과 마주쳤다. 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操江)호와 만나기 위해 아산을 떠나 있었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高陞)호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가오슝호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Major von Hanneken)도 승선하고 있었고, 7월 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토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순양함 나니와호가 두 배를 가로막았다. 군함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 법으로 처리되었다2. 성환과 평양의 전투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공주 동쪽의 성환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82명에 불과했다.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8월 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3,000 ~ 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1894년 9월 15일,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2,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 ~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일본군은 1894년 9월 16일 아침, 평양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3. 황해해전황해해전은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1894년 9월 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청나라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명,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4.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망 4명,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가쓰라 다로의 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중국군을 쫓아 요동 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되었다.5. 여순 함락1894년 11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수천 또는 2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6. 우금치 전투동학의병은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이 연합하여 수만의 병력이 되었다. 이들은 1894년 10월, 관군이 지키던 공주 감영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곧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였고, 11월의 우금치 전투에서는 1만여 명 중 500명만 살아남는 등 크게 패하였다. 12월 말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7. 웨이하이 요새 함락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웨이하이의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년 1월 20일 부터 2월 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3월 5일에는 잉커우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8. 대만 침략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澎湖群島)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같은 해 3월 29일 모토노리 가바야마의 지휘하에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9. 전쟁 종료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4. 청일전쟁의 결과-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을 파견함-30일에 휴전하고, 4월17일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함*강화조약 결과①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② 요동반도와 대만·펑후섬의 할양③ 배 두고 러시아와 갈등을 겪기 시작하여, 러일전쟁의 불씨가 생김5. 군사력과 사상자1) 군사력 - 사용 무기 , 병력 , 전술개전 당시 : 일본군은 육군 7개 사단, 동원병력 12만(출동병력은17만) 신식 무리타 소총用 해군은 총 28척으로 총 톤 수는 5만 7천여 톤 , 평균 2천 톤 이하 청국군은 총 병력이 35만명 , 북양 함대는 총 21척 , 총 톤 수는 약 4만 톤 척 당 크기는 일본과 비교해 별 차이 없었지만 큰 배와 작은 배의 조합 크게는 7천 4백 톤 급에서 작게는 수백 톤 급 까지 있었다)평양 전투 : 성환에서 패전한 청국군은 북부 지방으로 들어오던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서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의 청군-북양 육군은 마우제르형 연발 장총과 크루프식 후장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에 반에 일본군의 주무기는 무라타 소총과 청동포였기 때문에 육군의 장비를 따지자면 청군이 한발 앞서 있었다. (그러나 청군은 병참설비와 군인들의 투지?사기 문제로 전투에서 패함)황해 해전 : 청의 해군은 총 14척에 3만 6천여 톤 . 그러나 청의 함정들은 장비와 크기가 비례하지 않았다. 구경 10~26㎝ 이상의 함포는 모두 합해 30여문 정도가 장착되어 있었을 뿐 나머지는 기관포 따위였다. 그러나 일본은 12척에 총 톤수가 약 4만톤으로 구경 32㎝ 포 4문을 필두로 10~26㎝급이 모두 200문 이상 장착되어 있었다. 속도에 있었서도 최고 30% 까지 일본 함대가 빨랐고 화력으로는 6 대 1 이상 차이가 나 있었다. 속사포가 처음 사용된 것 역시 황해 해전이었으며, 이때 일본 해군이 지니고 있었던 12~15㎝ 속사포는 청구함대의 대구경포를 압도하여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화포-속사포만 따질 경우 일본군이 246문, 청군은 79문을 각각 정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일본 해군은 요시노(최고 속력 23노트 , 15㎝ 속사포 4문 장착)함을 필두로 일렬 종대의 대형을 갖추고 전투에 임했으며, 청군은 팅위엔함을 가운데에 놓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