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그리고 오래된 과거개인적으로 수필이나 기행문보단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번 독후감 책 두 권중 물론 소설을 읽으려 했으나 책을 구하지 못해 친구가 보던 오래된 미래를 읽기로 했다. 사실 제목부터가 먼가가 있는 듯하게 살짝 시적이어서 끌리기도 했지만 레포트를 위한 인위적인 동기가 부여되어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추천한 책이라 그런지 왜 이 책을 레포트로 과제를 냈는지 알거 같았다. 물론 재미라기 보단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책의 내용은 제목만큼 그렇게 시적이지는 않았다. 사회 시간때 잠깐 배웠던 문화와 문화의 충돌. 갑자기 중학교 사회시간이 생각났다. 내가 1987년에 태어났으니 거의 산업사회에 태어나 산업사회의 메커니즘에 익숙해져 아마 자연보다는 기계에 익숙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산업화가 되면서 자연보다 우월해 지려는 우리의 인식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상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사회책 윤리책을 맹목적으로 암기하는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 책을 천천히 읽어보니 분명히 우리 인류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길을 돌리기엔 사회가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산업화...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라다크... 물론 저자가 말 한 것처럼 라다크의 전통사회가 이상적은 낙원은 아니지만 문호를 개방하고 문명에 멍들어가는 라다크의 모습을 읽으면서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련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래된 미래. 무엇이 그리도 오래되었단 말일까. 사실 저자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할 만큼 정독하지 않았기에 내가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건 좀 우스운 얘기지만 내가 생각하는 오래된 미래란 물질과 문명에 찌든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행복한 미래의 모습이 이미 오래전부터 라다크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감상문에 저자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 넣기 싫지만 이 책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소개하고 싶다. 스웨덴뿐 아니라 유렵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연구를 했으며, 여섯 개 외국어에 능숙했단다. 나도 외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부럽기도 하고 샘도 난다. 놀라운 건 체류 1년만에 복잡하고 까다로운 라다크말을 습득했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다. 16년간에 걸쳐 라다크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라다크는 작은 티벳이라고도 불리우는 곳으로써 기본적으로 라다크 전통문화와 티벳불교문화의 영향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라다크에서 겪은 놀라운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산업화와 진보에 대한 전혀 새로운 생각을 제시한다. ‘산업 단일문화의 확신은 다차원적인 비극이다.’란 말을 통해 알 듯이 저자는 산업화에 대해 호의적이진 않다. 나 또한 산업화에 대해 호의적인 편은 아니다. 하지만 산업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산업화 결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혜택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산업화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가 그것이 문제 아닐까. 기술의 변화가 당한 것으로 느끼고 산업화의 방향에 따라 거기에 맞쳐 살아온 나라서 아직 산업화의 진정한 방향에 대해 생각한 것이 없어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기엔 나 자신이 너무 철이 없는 것 같다. 저자의 생각을 빌려 결론을 내자면 결국 환경에 대한 우호적이고 생태적 균형을 기초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한다.책의 구성은 3단계다. 1부는 `전통`, 2부는`변화`, 3부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이다.1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전통. 제목 그대로 문명의 침략을 받지 않은 라다크의 모습을 저자가 묘사하고 있다. 1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제4장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중 ‘경제적 정치적 상호작용은 거의 언제나 직접 대면해서 이루어지고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연결을 갖고 있으므로 부주의나 속임수가 행해지기 어렵워 부패나 권력의 남용이 아주 드물다.’는 부분이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유토피가가 이런 곳이 아닐까. 물질보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다른 라다크를 보며 대한민국이 미워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쟝느가 기행수필 정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서 인지 사진이 많다. 1부에는 한없이 맑은 라다크 사람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들이 많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거나 사회적으로 유명한 곳도 아닌 작은 마을에 불과한 그 곳에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순간 대한민국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별로 달갑지 않은 상상. 우리는 그들보다 휠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입가에 웃음꽃이 피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행복이란 물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천한 것이 아니란 것을 절실히 느꼈다.2부 변화. 유토피아를 닮은 라다크가 변화한다. 2부 제9장의 ‘화성에서 온 사람들’이란 제목처럼 서구의 문명은 라다크 사람들에겐 외계문명이었을 것이다. 화성에서 온 외계인들은 특별한 능력과 무궁무진한 부를 가지고 있단다. 관광사업을 시작으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날마다 백달러 이백달러 쓰면서 돈이란 의미가 라다크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방인과의 비교로 가난을 느끼게 된다. 비극의 시작이다. 개발을 관광사업뿐만 아니라 서구와 인도의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까지 등장시켰고 이것들로 하여금 라다크 전통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했다. 나 또한 할리우드의 블랙버스터 영화들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어이없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된 과거쯤 되는 것 같다. 가난이 없던 나라가 이제 점점 돈이 나라를 돌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충돌로 전통적인 농사일도 우리와 같은 상부상조의 방식이었으나 점차 사라지고 농장을 점점 임금노동에 의존하게 된다. 라다크의 변화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와 많이 닮은 것 같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련하다. 끝으로 인간관계 있어서도 분리되어 가는 공동체 개인주의의 등장이다. 그리고 집단과 집단 그리고 계급의 나뉨. 대한민국의 오래된 과거의 모습이다. 3부에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한 부분은 ‘문화적 붕괴의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현대세계와의 접촉에서 비롯하는 열등감이다.’란 부분이다. 앞에도 언급했듯 라다크 전통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확산되었다 했는데 결론적으로 보면 라다크가 변화된 건 이 명제에 맞혀 보면 어쩌면 라다크 사람들 자체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리 문명이 침략을 해도 자문화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강하다면 그 문화는 보전할 것이고 타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난 이 명제가 참이길 바라지 않는다. 라다크가 변화한건 전통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 어쩔 수 없이 침식되는 파식대처럼 라다크 문화도 서구 문명이란 거센 파도에 상처 입은 변화라 표현하고 싶다. 책에서도 말하듯 단순히 옛 사회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라다크의 전통사회가 이상적인 낙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삶의 개선을 위한 창조적인 노력을 계속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방향은 인간의 진장한 행복은 물론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증대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 제목, 솔직히 비호감이다. 근데 낯이 익다.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께서 그렇게도 읽어야 된다고 추천해 주신 책 중 하나였다. 물론 그땐 공부한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교에 와서 까지 읽어라 하니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우선, 핵심소재인 감옥은 나에게 있어 어떤 느낌일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나 할까. 사색이라 그 또한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재다. 사색이라고 해봤자 감옥에서라면 자기반성, 후회, 감옥 밖 삶에 대한 미련 쯤...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있지 않은 것, 일어나지 않았던 일에 대해선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요즘은 그것에 관련된 일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 TV에서 보면 추적 60분이라든지 여러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우리나라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 사건 등을 보면서 그냥 아! 저런 일도 있구나.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뿐이지 그 사건에 대해서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지 하며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나도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참 바보 같이 겉만 보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죄명, 감옥에서 몇 년을 사는지 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 해왔구나 하는 생각에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책 커버로 책을 고르지 말라했던가 맞는 말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한번쯤 더 생각하게 되었다.이 책은 신영복 선생님께서 감옥에서 20년 20일을 살면서 계수씨, 형수님, 부모님께 보낸 편지로 엮어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신영복 선생의 책에 관련된 홈페이지를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의 책에 관련된 글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봤더니, 책에서는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에서 썻던 글과 한양 교도소에서 적었던 글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 글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이었다.남한산성에서 쓴 글 중에서“한 두 마리의 지렁이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길다란 지렁이가 거의 같은 속도로 내려올 때 나는 공포를 느낀다. 끈적끈적한 공포가 서서히 나를 향해서 기어오는 듯한 느낌이 눈앞의 사실로 다가온다.” 는 말이 있었다.아직 옥살이에 익숙치 않은 신영복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감옥에서의 쓸쓸함, 공포 등을 알 수 있었는데, 이 감정과 기분은 우리 사람에게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도 과연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아무런 공포와 쓸쓸함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 이 구절에서부터 신영복 선생의 글은 그 분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글처럼 자신의 처지와 느낌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적은 것이었다. 이 글을 보면서 책에서의 내용들이 그 분의 정신세계와 그 분의 마음 등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서 더 책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분의 내면세계, 사람들의 본능,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는 구절이었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 될 진 모르지만 나에게는 처음 교도소를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과장하면 오히려 내가 그 감옥에 있으면서 느끼는 기분 같았다. 국어시간에 배운 감정이입이라고나 할까.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어려운 사자성어라든지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어서 처음엔 지겨웠다. 나와는 동떨어진 사람의 이야기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하지만 나도 이제 대학생이고 이런 사색도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으니 읽을수록 점점 빠져 들었다. 이 책에서 이 분이 얼마나 작은 사물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평소에 보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 관심 없이 스쳐 지나가는 조금만 사물에 대해서 신영복 씨는 조그만 것에도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계수씨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꿈마저 징역살이라는 편지 글이 있었다.그 글 중 “징역살이 십년을 넘으면 꿈에도 교도소의 그 거대한 인력을 벗지 못하고 꿈마져 징역 사는가 봅니다.” 라는 부분에서 10년을 징역살이 해오면서 몸이 힘든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징역살이라는 것은 그냥 지내면서 개과천선 하라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0년 동안의 징역살이가 신영복씨에게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는지 그리고 징역살이를 한 사람들의 고통, 정신적인 압박감, 꿈에서도 시달릴 수밖에 없는 마음이 내 가슴에 주먹질했다. 감옥이라는 하나의 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 까지 이중의 벽속에 있는 셈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몸이 힘든 것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을 더 힘들어한다. 우리가 감옥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생활도 이런 감옥에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저번 주가 시험 기간이었다. 시험 기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압박감, 부모님의 기대, 내가 내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 등에 있어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몸이 아픈 것은 쉽게 나을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것은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정신적인 것은 생각을 바꾸면 금방 낫는 것이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있어서 쉽게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계수씨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여름 징역살이라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교도소의 우리들은 사람살기는 겨울이 낫다고 택하는데 그 이유가 여름에는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이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신용복씨는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부당한 증오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없이 사는 사람들은 따뜻한 가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조금 오래 된 이야기지만 조그마한 장사를 하시면서 조금씩 모은 돈을 장학금을 주라면서 턱하니 내놓는 분들이 있고 자신 생활하는 것이 어렵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히려 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책을 읽다보면 신용복씨께서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글을 적은 부분이 있다.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즉,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생활하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각자 개인만 생활을 한다면 서로 도우는 법도 서로 이해하는 법도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우리들 개개인이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친구를 사귀고 애인을 만나고 선생님, 교수님을 만나는 것은 여러 사람들과 연대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신용복씨께서 하신 말처럼 우리가 튼튼한 연대감을 가진다면 우리 사람들 마음과 마음사이에 닫힌 공간을 열 수 있고, 서로간의 긴장, 갈등마저 넉넉히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서로간의 믿음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서로 믿음으로써 서로의 단점 등 여러 가지를 감싸줄 수 있다. 사랑을 하는 것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없다면 서로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었까? 나도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첫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었었던 나의 마음을 열어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람은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힘든 일, 나의 기쁜 일, 나쁜 점, 좋은 점 등을 모두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인지 신용복씨의 글 중에서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글에 사람들 사이에 이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믿고 친구가 되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같다.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여기서 끊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얘기한다. 신용복씨의 교도소 뒷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특히 이 날이 추석이여서 인지 사람들이 공동묘지에 많이 왔다. 그러나 여기를 자주 찾는 것을 보면 “무덤 하나하나가 저승의 것이기 보다는 이승의 살아있는 사람들과 끈끈히 맺어져 있는 질긴 인연을 실감케 해줍니다.”라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공동묘지에 가서 성묘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도 생각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책은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성묘를 가는 것은 죽은 사람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연은 그 사람이 죽으면서도 끝나지 않는 다고 우리들 마음속에 자기도 모르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매번 성묘를 가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도 우리들과의 인연은 끊히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기를 죽으면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죽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끊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더욱 인연이 깊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