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주의 미학이론과 정립과정서론2. 16세기 르네상스에서 17세기 신고전주의 시대로의 이행2.1 시대적 전환기2.2 사회 구조의 특수성3. 신고전주의의 비극관과 극이론3.1. 진실다움 (박진성)3.2. 카타르시스3.3. 시적 정의/교훈성3.4. 삼일치3.5. 데코럼 (적합성)3.6. 모방의 대상3.7. 희비극 분리4. 결론5. 참고문헌서론신고전주의는 고전주의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생긴 용어이다. 이것은 고전주의, 즉 고전들(classic / classical antiquity)을 모델로 하여 이룩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이후에 탄생한 문화 일반과 특히 문학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번역과 해석을 중심으로 나타난 16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의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의 고전 문학을 지향하는 문학과 예술적 태도를 통틀어 신고전주의라고 한다. 이경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고전주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5쪽 인용신고전주의는 자연에 다름아닌 고전을 따르자는 데서 출발하였다. 신고전주의 비평가들에게 이 고전의 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었다. 왜냐하면 신고전주의 비평가들은 『시학』이 모든 후세 작가들이 따라야 하는 작시법 혹은 극작법을 제시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범한 첫 번째 잘못이었다. 그들이 범한 두 번째 잘못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호러스의 『시론』을 통해서 이해함으로써 일차적 자료를 소홀히 한 실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호러스의 『시론』이란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연극관을 피력한 일종의 실용적 지침서이다. 신고전주의자들에게 잘못 이해된 몇 가지 지점은 첫째 비극과 희극은 반드시 분리되어야한다는 점, 둘째 행위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장소의 일치가 반드시 시켜져야 한다는 점, 셋째 연극은 즐거움 뿐만 아니라 교훈이 담겨있어야 한다는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시학』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그리스 비극을 보고 그 속에 나타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한 인물이 프랑스 왕 루이 14세였기에, 각국 군주는 앞 다투어 루이 14세를 모방하려고 했으며 유럽 정치를 좌우하는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절대군주들은 우선 군사력을 장악하고, 법률체제를 정비했으며, 조세의 징수와 배분을 통제하며 효율적인 관료 집단을 꾸려나갔다 E.M.번즈 R.러너 S.미첨, 손세호 옮김, 『서양 문명의 역사 Ⅲ』, 소나무, 2004, 711~715쪽 참조’. 군주와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진 특정의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계급에 대한 배척이 이루어졌으며, 앞서 언급한 정책 역시 이를 위한 것이었다. 교회와 귀족, 반자치지역들, 그리고 독립적인 대의 기구는 모두 강력하고도 중앙 집권적인 군주 정부수립의 장애물이었다. 때문에 절대주의의 역사는 군주들이 이러한 장애물을 복종시키려는 시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루이 14세는 ‘하나의 왕, 하나의 법률, 하나의 신앙 (un roi, une loi, une foi) E.M.번즈 R.러너 S.미첨, 손세호 옮김, 앞의 책, 718쪽 인용'라는 절대주의의 신조 아래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되며, 귀족들의 정치권력은 박탈하면서 한편으로는 사회적 지위를 높여주고 상업 활동을 지원해 주는 등의 정책으로 귀족 계급을 자신의 손 안에서 통제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무엇보다도 절대군주제 대두의 주요 요인은 상업혁명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국내외의 상업 활동을 보호 육성하고 식민제국을 세워 원료 공급지와 해외시장을 확보하였다. 그 결과 군주들은 강력한 병력과 많은 함선을 보유할 수 있게 되고, 왕권 확장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풍부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때문에 이렇게 안정된 환경은 프랑스 연극에 변화를 이루어 낸다.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절대주의 단계를 경험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오페라와 발레의 바로크적 요소가 자본주의 사회를 반영하는 새로운 형식의 고전적 희곡이 구축되기 시작한다 남상욱, 「연출사에 관한 고찰 : 고대연극에서 사실주의까지」, 중앙대학교 예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개화된 것이다. 이것은 신고전주의 세계관과 그 문학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이 절대주의는 첫째로 르네상스때의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한 하나의 결과다. 많은 제품을 단시일 내에 생산하고 또 단시일 내에 판매하여 부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판매의 시설과 수단이 좋아야 하며 이것은 모두 과학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은 합리주의의 소산이다. 베이컨의 『신기관』과 로크의 『인간오성론』으로 이어지는 경험철학은 상업자본주의의 발달을 가져온 근대 과학정신을 대변한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되어 조심스런 관찰과 실험으로 확장된다는 것이 경험철학의 과학 정신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홉스의 말은 베이컨의 경우 ‘아는 것이 경험적인 것이다.’로 전환되었다. 이런 합리주의의 소산인 상업자본주의는 16.17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에스파니아, 홀란드 등 유럽 여러나라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장과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경향으로 발전했다. 많은 시장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보다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했다. 경제체제가 자유방임주의를 폐기하고 통제체제의 성격을 띨 때 소위 중상주의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초기 자본주의는 이 시가에 중상주의로 발전한 것이다. 중상주의는 많은 재화의 확보라는 목표 밑에 국민의 경제적 활동,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 강력한 통제를 가한 경제 정책이다. 경제에 내려진 통제가 정체적, 행정적 영역에 가해졌을 경우가 절대주의다.이처럼 상업자본주의의 발달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로서 절대주의가 발생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일반에 까지 국각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절대주의의 통제란 규칙에 의한질서화다. 규칙에 의한 질서화란 ‘규격화’다. 이런 점에서 절대주의는 ‘규격화’를 달성하려는, 절대군주를 비롯한 소수자의 적극적 시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절대 군저 체제에서 모든 국민은 철저하게 규칙을 준수해능한 플롯을 지향하는 것이다. 즉, 이상적인 플롯은 시작, 중간, 결말이라는 통일된 구조에 의해 삶을 ‘알기 쉬운 형태(intelligible shape)'로 만들고 사건의 인과율에 따른 개연성으로 논리적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Amolie Oksenberg Rorty, 「The Psychology of Aristotelian Tragedy」, ed. Amelie Oksenberg Rorty, 『Essays on Aristotle's Poetics』 (Princeton : Princeton UP, 1992), 8쪽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신고전주의의 절대적 근간을 이룬다. 특히 프랑스 신고전주의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이성은 동일한 의미였다. 즉, 『시학』에서 말하는 법칙은 모두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고전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이성은 아리스토텔레스만으로 충족되지 못했다. 서서히 『시학』에서 그들이 믿는 이성과 다른 부분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그들이 말하는 냉엄한 이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살아남게 되고, 도비냑과 같은 신고전주의자가 ‘무대의 규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보다는 이성에 기초해야 한다 Abbe d'Aubinac, 「The Whole Art of Stage」, 『European Theories of the Drama』, ed. Barrett H. Clark (New York : Crown publishers, 1965), 93쪽’고 주장하게 되면서 신고전주의는『시학』의 선택적 수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신고전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의 미학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신고전주의자들은 이윽고 연극이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극적 창작력을 통제하는 규칙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그들이 기준으로 삼은 이성에 의해 규정된 규칙이 신고전주의 연극을 지배하게 되고, 그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작품이 검토평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그것이 연극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때문에 극의 내적인 논리에 따라 ‘그럴법한 있을법한 사건(probability)’을 의미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연성의 법칙’은 관객의 상식적인 믿음에 따라 판단되는 ‘진실다움’으로 변했다. 이렇듯 극을 판단하는 기준은 ‘관객의 상식’이었으며, 그것은 인과관계에 따른 작품의 내적 일관성보다 더욱 중요시 여겨졌다.이 때 ‘관객의 상식’이란 다소 귀족과 같은 상류계급의 상식을 의미했으며, 이러한 상류계급에의 지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아닌 호라스의 『시론』에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배격한 것”, “기쁨을 주기 위해 쓰여진 작품은 가능한 사실과 같아야 한다”라는 맥락에서 잘못 이해된 것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시론》도 고상한 취향을 가진 로마의 귀족을 즐겁게 하고 교화시킬 시문학을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호라티우스의 《시론》에서 무식하고 천박한 대중은 시문학을 타락하게 하고, 고상하고 점잖은 귀족만이 세련된 취향으로 시문학을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Horace, 「The Art of Poetry」, trans. C. Smart, 『European Theories of the Drama』, ed. Barrett H. Clark (New York : Crown Publishers, 1965), 27쪽 참조.3.2. 카타르시스신고전주의 극작론의 가장 주된 혼선 혹은 변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정의(VI,2)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이 정의 중에서도 비극이 무엇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것인가와 관련하여 언급한 액션의 ‘모방’과 비극이 어떤 효과를 내는가 하는 기능과 관련된 이른바 카타르시스론, 곧 ‘동정과 두려움을 통해서 이 정서들을 정화하는 효과를 낸다’는 대목이 혼선을 빚거나 변질되었다. 또한 XIII,2에서 다시 부연하여 ‘완벽한 비극은... 모름지기 동정과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액션들의 모방이어야 하며 이것은 비극적 모방의 두드러진 자료원)
첫 번째. 은희경의 상자은희경은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1남 2녀의 맏이인 그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거짓 감정으로 써낸 “내 동생”이라는 글이 칭찬을 받자, 거짓말로써의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읽어볼 것을 의식해서 쓴 일기가 그녀의 첫 소설쓰기였다. 전주에서 중.고교를 마친 후 1977년 숙명여대 국문과에 입학, 연세대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동안 그녀는 시를 쓰고자 했으며, 역사적인 체험을 경험하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80년대에 은희경은 생활인으로서 충실했다. 고등학교 교사, 여성지, 출판사, 이벤트 회사, 기획 회사등 여러 직장을 옮겼다. 이런 그녀의 이력은 그녀가 아는 것을 쓰기, 혹은 섬세한 묘사의 근본이 된다. 1984년 결혼하고 아이를 두 명 낳으면서도 계속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던 그녀가 1994년 11월, 다니던 출판사에 한 달간 휴가를 내고 소설을 쓰기 위해 지방으로 떠났다. 그녀가 열두 살에 가졌던 꿈, “아득한 아름다움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다.이 때 쓴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 중에서 중편 “이중주”가 1995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같은 해에 다시 장편 “새의 선물”이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았다. 첫 번째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로 1997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하고, 단편 “아내의 상자”로 1998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움켜쥐었다. 등단한지 3년된 신인 작가로서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신문, 문예지 뿐 아니라 통신에도 글을 연재하였고, 이후에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책들이 다시 베스트셀러의 정상을 차지하였다.그 외에도 1998년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000년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2001년 “마이너리그”2002년 “상속”2005년 “비밀과 거짓말”2007년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하다” 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두 번째. 남편이 들려주는 아내이야기.아내는 전문대 비서학과를 나온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한때는 미대를주동한 인물임과 동시에 아내가 되고자 하는 이상형이기도 하다.㉣그의 남편 :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다 돌아왔고 아침 7시경에 출근하는 보통의 세일즈맨 이다.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없지만 그 또한 나와 같은 평범한 인물 이다.네 번째. 아내의 상자속에는 ...① 상자 - 밀폐되어 있는 아내의 자아아내는 상자를 많이 갖고 있다.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십자수를 놓은 탁자보’나 ‘종이색이 누렇게 바랜 편지 뭉치’나 ‘하얀 배냇저고리’, ‘조잡한 조개껍데기 목걸이’ 뿐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쓸모없는 물건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것은 ‘아내의 상자에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를 스쳐 지나간 상처들이 담겨 있는’ 탓이다. ‘사람들은 상처가 회복된 다음에도 몸에 남아 있는 흉터로써 그 상처를 기억’하는 것처럼 아내는 상자를 쌓아가면서 지나간 상처들을 기억하는 것이다.일반 사람들이 머리의 대, 소뇌로 기억을 하는 것을 아내는 왜 상자를 통해 기억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자가 가지고 있는 폐쇄성 때문이다. 어떠한 아픈 상처일지라도 뚜껑만 닫아버리면 지워져 버리는 상자의 기억은 인간의 두뇌보다 훨씬 간편하다. 또한 상자는 언제나 밀폐성을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절대 그 내부의 물건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상자는 비밀처럼 속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상자의 주인은 물론 그 상자를 발견하는 타인들이 상장의 내용물을 눈치채게 된다면 굳이 상자에 물건을 넣어 뚜껑을 닫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자는 외부에서 아무리 관찰해도 하나의 상자일 뿐 그 속에 담아놓은 상처를 재기억하게 동기유발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상처를 잠으로 유보시켜 놓았다면 과거의 상처는 상자로 유보시켜 놓은 것이다. 한편, 본문중“아내의 상자들도 단정했다. 큰 것은 큰 것끼리 작은 것은 작은 것끼리 네 귀퉁이를 맞추고 쌓여 있었다. 다른 날과 다른 거라고는 아내답지 않게 상자 위에 먼지가 조금 있다는 점 정도였다.”부분은 그녀가 자신의 생을 한순간 방치시켜 놓았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있는 자의식이 중심을 잃고 분해되어 버린 것이다. 그 때는 아내는 이미 아내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한 남자의 여자일 뿐이다.페미니즘 시각에서 보면 아내의 폐쇄적 자의식이 남편에 의해 상실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좀 더 광의의 의미로 본다면 아내의 자의식은 이미 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의미를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비단 아내 한사람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세기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영혼이 아무리 자기 자신을 대자적 위치에서 자아를 반성할 것을 요구할지라도 이미 우리의 육체는 즉자가 되어 순간적인 쾌락과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아이러니한 이분법적 괴리를 은희경은 아내의 폐쇄적 성행위와 대비시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지난 발레타인 데이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연구실에서는 수컷 초파리와 암컷 초파리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짝짓기를 하려고 날갯짓을 하며 암컷에게 달려드는 수컷을 암컷이 계속해서 머리로 들어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다리로 수컷의 머리를 걷어차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암컷은 수컷이 정액을 뿌려도 알을 낳지 않았다고 합니다.아내나 좋아했을 얘기였다. 나는 물끄러미 화면을 쳐다보았다.그 이유는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연구팀은 이 실험으로 돌연변이 유전자가 신경 계통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유전자에는 '불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나는 불타 버린 결혼사진과 아내의 화상을 떠올렸다.“이 작품의 원제목이 [불임 파리]였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위 글은 가지는 의미는 작품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암컷의 자궁에 정액을 뿌려도 알을 낳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임신을 단순히 육체적 행위로만 축소시켜 해석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타인의 정액이 싫다고 하지만, 설마 임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문학적 관점에서 위 부분은 전혀 이상한 것이 없다. 아내는 것인가. 은희경은 이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옆집 여자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아내의 말처럼 걸을 만한 흙길은 없고 찻길만 있는 신도시에서 그것은, 한 번 더 아내의 잡학 용어를 빌리자면, '우성'임을 뜻했다. 그 여자의 차에 실려 아내는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 따라다녔다.”즉, 환경적응력, 생활력 등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아주 적절한 말이다. 신도시에서 살고자 하면서 차가 없다는 것은 분명 열성 종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드는 의문들, 과연 인간의 가치 판단을 이러한 경제력과 생활력으로 해야만 하는 것일까.④잠 - 일시적 현실 망각“창가에는 아내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다. 책상을 뺀다면 이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이다. 아내는 이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낮잠을 자곤 했다. 의자 속이 깊숙해서 무덤처럼 편안하다고 했다. 다리를 가슴께로 끌어당긴 채 웅크리고 앉은 아내는 나뭇잎 뒷면에 몸을 둥글게 말고 숨어 있는 공벌레 같았다.”탈출할 수도, 미칠 수도 없는 자가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을 망각하는 것이다. 잠은 망각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잠은 죽음의 일종처럼 현실에서 완전 벗어나게 한다. 비록 잠 속에서 꿈을 꿀 수는 있지만, 그것은 환상의 공간일 뿐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다. 아내가 '무덤처럼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은 잠자는 동안만큼은 현실 속의 자신을 완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영혼이 불편하거나 인위적으로 망각하고 싶은 현실에 부닥치면 언제라도 잠을 통해 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회사에서 낮에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때가 많았다. 웬 잠이 그렇게 깊어? 라고 물으면, 베란다에서 아파트 단지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잠이 와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무료하고 단조로운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잠을 통해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지문은 아내의 잠에 대한 현실 도피 욕구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아내의 잠은 이상할 만큼 깊었다. 그녀는 몸이 아플 때나 걱 외도 역시 그녀의 탈출구는 될 수 없었는 모양이다.“숲 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그곳은 그녀가 갇혀 있는 신도시의 집이나 불임클리닉처럼 회색 건물이었지만 훨씬 더 평온해 보였다. 희망 따위를 볼모로 잡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헛된 희망을 갖는 일도 없을 것이다.”그녀가 희망 따위를 볼모로 잡지 않고 헛된 희망을 갖는 일도 없는 요양소라 짐작되는 곳에 화자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아마 지금쯤 그녀는 자고 있을 것이다. 약을 먹을 시간이 되면 깨어난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전까지 하는 일이라고는 오직 나를 기다리는 것뿐이다.”그녀는 다시 잠으로 현실을 망각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요양소에서 하는 일은 '오직 나를 기다리는' 일보다는 자는 일이 더 중점적이게 된다.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내의 이러한 잠을 통해 도피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 유사하다. 요양소라는 체계화된 일상으로부터 탈출이라는 희망은 이제 완전 봉쇄되어 버린 것이다. 일상적 현실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화자의 동의 없이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출구 없는 현대적 삶의 비극성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망각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상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미 이상은 소멸해 버렸다. 오직 환각을 통한 환상과 잠을 통한 망각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탈출 열망을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잠이라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⑤신도시 - 자가당착에 빠진 도시처음 화자와 아내에게 있어 신도시는 ‘변화’와 ‘삭막하지 않은 생활’이 있는 가능성의 도시였다. 하지만 신도시에 살아본 사람은 안다. 신도시가 얼마나 가식적인지, 인간 중심의 도시가 아니라 건물 중심, 도로 중심의 도시였다는 것을 살아본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이다.“언제 봐도 단정한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 언했다.”
I.한국 근대무용의 기점1)사회학자와 국문학자들이 근대사를 보는견해2)무용사에 있어서 근대사를 보는견해II.무용에 반영된 근대적 사회현상1)궁중무의 변화양상2)민속무용의 동향3)신무용의 등장III.근대사의 주요 무용가1)한승준2)배구자3)최승희4)조택원IV. 참고문헌I.한국근대무용의 기점1)사회학자와 국문학자들이 근대사의 기점을 보는 견해① 18세기 후반 영정조시대 (김윤식,김현이 [한국문화사])② 1860년대설인 동학의 창시 (전규태[현대 문학사])③ 1894년대 설인 갑오경장 또는 동학혁명 (조윤제가 [국문학전사])④ 1945년대설인 광복의 시기로 자주적임2)무용사에 있어서 근대사를 보는견해① 1900년대 서구식 무대를 갖춘 극장이 생기면서 근대 무용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 (성경린, 조경원, 이송)② 이시이 바꾸의 (무용시공연)을 새로운 근대 무용사의 기점으로 잡은 경우 (안제승, 박용구)③ 갑오경장 전후로 보는 경우 (송수남) 근대무용 1기(1895- 1925)④ 1945년도 까지 문화적 분위기일 뿐 춤 역사에서는 큰의미가 없다는 주장(조동화)⑤ 갑오경장으로 부터 1919년 3.1운동 직전까지, 2. 3.1운동 직후부터 1927년까지, 3. 1928년 배구자의 창작 무용과 1930년의 최승희의 창작 무용까지 언급 (유민영)⑥ 1894년 갑오경장으로 잡고 그 이후 춤의 발전단계를 교방무의 무대화(1894- 1918), 서양 무용의 유입(1919- 1926), 신무용의 수립(1927- 1933), 한국 무용의 세계화(1934- 1944)등으로 구분(정승희)II. 한국무용에 반영된 근대적 사회현상.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공포되고 일제의 최고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억압,공포정치를 감행하는 한편, 국가의 모든 제도를 무단통치(武斷統治)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편 또는 폐쇄시켰다. 이에 따라 악원제도와 여악제도가 폐지되고 왕실에 예속되었던 여령(女伶)과 무동들도 해산시키기에 이르렀다.이렇게 해산된 악인과 여령, 그리고 무동들은 전전하다가 직업을 옮기기도 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민간조직단체에 흡수되어 후진양성에 헌신하기도 하고 직접 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바로 이돌에 의해 왕실과 상류층에서만 볼 수 있었던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이 함께 맞닿아 일바나 관중을 만나게 됨에 따라 5백여 년 동안 계승되었던 궁중무용이 민간과 접촉하여 민간무용으로 점차 모습이 바뀌게 되었다.한편으로는 서구무용이 유입되어 일본 빛 서구, 특히 러시아의 발레와 민속무용이 들어왔는데 이들 서구 무용을 신무용(新舞踊)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식민지 치하에서 들어온 이들 외국무용은 광복 이후 현대무용과 외국무용 부분에서 모체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창작무용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때 창작무용의 유형을 보면 우리나라 전통적 소재와 춤사위를 이용하여 서구식 전개방법을 도입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서구양식을 혼합하여 창작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 무용은 모두 신무용의 범주에 해당되었다.1)군중무의 변화양상여령정재는 한일합방전까지는 궁중내에서 연희되어 왔다. 당시도 이들은 궁궐내의 행사를 마친 뒤에는 외부의 가무활동이 허용되어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영역을 일부 특수계층까지다.1902년 고종등극 40주년 기념 경축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희대라는 극장이 건립되었고, 이와 함께 궁내부 관할하에 설치된 협률사라는 기관에서는 기생,재인,창우,무동 등 구성원이 다양했다. 회대개관공연 프로에는 관기들의 궁중무용도 들어있었고, 민속무용과 탈춤도 들어있었다.즉 회대개관공연의 다양한 구성원이 이기회를 통해 궁중정재를 배우고 여령들의 활동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기회삼아 1910년까지 외부활동이 계속되었으며 나중에는 지방공연까지 했다가 1914년 해산되었다 .궁중 정재가 지방에 분포된 전통 무용으로는 진주(晋州)의 검무(劍舞), 통영(統營)의 승전무(勝戰舞)가 있다2) 민속무용의 동향1902년 협률사가 원각사 무대에서 공연할 때 민속무용의 일부가 들어있었는데, 이것을 민속무용이 무대에서 공연된 효시로 볼 수 있다.이때 민속무용으로는 승무, 농악, 살풀이 등과 가면무극이 상연되기도 하였는데, 공연보다도 명창대회격인 판소리 연주회에 곁들여진 것이었다.무용사의 전개.첫째, 1984 갑오경장부터 1910년대까지를 신문화를 통한 근대 무용 형성,둘째, 1911년부터 1933년까지는 서양 무용의 유입과 수용,셋째, 1934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 민족 무용의 세계화로 시기 구분을 하고자 한다.3)신무용의 등장신무용이란 신문물과 함께 외국에서 유입된 서구무용 등을 가리키는 말이나 그뒤 국내에서 창작된 것까지 포함하여 신무용이라 하였다.신무용은 1920년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유학생들이 고국을 방문하여 러시아의 민속무용과 민속음악으로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외국무용이 소개된 최초의 일인데 이때부터 러시아의 민속무용인 ‘코팍댄스’가 유행되어 각종 음악무도회에 등장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체육댄스와 사교춤 등이 전파되어 유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이춤은 바르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춤이란 광대,재인만이 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켜준 계기가 되었다.그뒤 코팍댄스와 사교춤은 화류계에 침투되어 기생들에게 교습되어지기 시작했으며, 또 무대에서 출 수 있는 무용으로 레뷰식의 춤을 작품화해서 교습시키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고급요정.박람회.연예무대.등에서도 추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39년대에 가극단,악극단이 생겼고 이 단체는 2차세계대전 때는 위문공연까지 하게 된다.III.근대사의 주요 무용가1)한성준근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인 한성준.전통 춤의 보존에 위험을 느낀 한성준은 본격적으로 전문 무용 단체를 만들어 전통 춤의 교육과 공연 활동을 하며 민속무용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조선 무용 연구소’를 1934년에 열어1938년에 원각사 무대를 시발점으로 하여 1941년까지 4여 년 동안 민속무용을 공연함으로서 세련되고 틀이 잡힌 민속무용을 이룩하였다.또 조선무용연구회의왕성한 공연 활동으로 고전무용을 알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춤을 추었을까?1938년 1월 창립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조선무용연구회의 종목은 37가지가 있는데 실제 공연에서는 37가지가 모두 추워지지 않았고, 28가지만 공연되었다. 그 중 노래인 가야금 병창과 속곡, 애국가 행진곡을 빼면 25종목으로 바라무, 살풀이춤, 태평무, 검무, 학무, 상하무, 사자무, 급제무, 군로사령무, 동자무, 소경춤 등이 있었다. 검무, 학무, 고무는 궁중무에서 승무, 살풀이춤, 한량무는 기방무에서 상좌무, 사자무, 노승무는 탈춤에서 태평무는 무속무에서 모티브를 따왔으며, 농악은 풍물을 무대화시킨 춤으로 조선의 모든 춤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또한 급제무는 진사급제를 환영하는 잔치의 등장인물과 행장과 의식들을 무용극으로 소경춤은 흉내내기, 사호유락은 네 노인이 백운청산을 동무로 하여세상의 근심을 잊고 즐거이 지내는 광경을 표현하는 등 작품 모두가 조선 고유의 정신, 일상, 인물들에서 기초하고 있었다.2)배구자신무용을 최초로 시도한 무용인으로서 우리나라 신무용사상 선구자적인 열할을 한 배구자.배구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공연이 아닌 일본인 덴가쯔 곡예단의 일원으로무대 생활을 시작으로 춤만 고집하기보다는 가무극의 형태를 발전시키는데 더 관심을 가졌다. 악극, 혹은 가무극 형태의 종합적인 것이 그녀를 순수한 무용가로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그러나 그녀의 한국무용의 무대화를실험한 역사적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그렇다면 그녀의 근대 무용에 대한 사상은 어떠했을까? 그녀는 미국 유학을 계획하며 열게 된 1928년의 고별 발표회에서 자신이 배워온 서양 춤 유모레스크 . 짚시댄스만이 아니라 자작한 창작 춤인 아리랑을 발표했다. 그녀의 평소의 소신대로 서양 무용의 소개와 한국 춤의 개량을 과감히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려는 의도가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 시도는 1929년의 제1회 무용 발표회에서 보다 본격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이처럼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혼돈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 무용을 중요시 여기고 제대로 인식 재창조를 통하여 근대무용을 정립해나가려는 그녀의 의지 속에서 계몽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 그녀의 공로로 무용을 기방 예능으로부터 예술 무용으로 승격시킨 점과 권번과 같은 기생 훈련소의 성격을 철저히 배격하고 순수 예술 무용을 시도한 점을 꼽을 수 있다.3)최승희신무용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승희.그녀는 이시이 무용단에서의 탈피를 계기로 조선에 돌아와 아직 새로운 예술에 눈뜨지 못한 조선 무용계의 개척에 나섰다. 1930년 제 1회 발표회를 가진 최승희는 이시이에게서 배운 서양 무용을 무작정 모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민족 무용을 찾아내서 무대예술로 재현시키고 민족주의 무용으로 발전시키려는 주체적인 예술 작업에 들어갔다.이 공연은 조선무용의 재창조 및 민속춤의 무대화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될 가치가 있다. 영상무는 연산회상이라는 조선 고악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더한층 조선의 향(香)을 발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는 무용 예술을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I.외국무용의 근현대화II. 근현대 서양무용의 특징1)발레의 쇠퇴2) 현대무용의 등장III.근현대 서양무용의 주요 무용가1) 근현대무용의 태동에 영향을 미친 무용가2) 현대무용의 기수IV. 참고문헌I.외국무용의 근현대화19세기 말까지 유럽의 무용을 주도했던 것은 발레였다. 낭만주의(18세기에 전통을 중시하는 학교에 의해 확립되었던 융통성 없고 엄격한 예술을 타도 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본래의 낭만주의는 문학운동이었는데 예술이 빅토르?위고의 시나 극과 같은 문학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를 기초로한 이 로맨틱 발레는 19세기 초를 절정으로 하여 발레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한 것이 러시아의 고전 발레였다. 그러나 고전 발레는 황금기 발레리나들의 퇴보와 지나친 기교의 과시나 시각적인 스펙타클로 인해 낭만주의적 표현성과 호소력은 상실되어 1870년 아서 생-레옹의 를 끝으로 소멸해 갔다. 더구나 20세기는 모든 의미에서 인간 해방과 평등 정신이 예술적으로 중시되는 시대였다. 이같은 시대적 경향으로 인간성을 억압했던 기교의 편중과 일정한 형식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게 된 발레에 불만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 국면을 타개하려는 운동이 발레계 자체에서 일어났다.이 시기는 근대적 예술개념을 확립하면서 성숙단계에 들어선 중요한 시기로 볼 수 있는데 일반인들에게 문화적으로 개화를 시도한 시기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정신을 창조적으로 표출하면서 다양하게 춤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낭만주의는 이전의 고전주의가 규격과 형식에 치우치고 계몽주의가 지나치게 이성을 중시하는 것에 반발하면서 인간의 감적과 정서를 강조하며 참된 무용 정신을 회복하고 독자적인 무용 예술을 확립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다. 이것이 곧 모던 댄스(Modern dance)가 되었고, 발레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미국과 독일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모던 댄스는 관례적인 운동이나 의상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II. 근현대 서양무용의 특징1) 발레의 쇠퇴발레가 1830년대와 1840년대에냉담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발레를 지원하기 위한 왕실의 발레와 그 밖의 국가기관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관계로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발레는 형편없는 음악과 무대장치 및 안무로써 음악홀의 프로그램에 의례적인 순서가 되었고 파리에서는 오페라극의 일부분으로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19세기 말의 미국에서의 발레는 당시 유럽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거에 불과했다. 기술적 숙련도와 시각적 볼거리를 강조하는 폐단은 결국 표현적인 내용과 깊이가 상실되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발레 장면들은 가끔 무대장치, 의상 및 무대 효과상의 화려함과 정교함을 갖고 관객들의 눈을 어지럽힐 심산에서 계산되어졌으며, 보기흉한 광상적인 짓거리를 작품의 일부로서 드러내곤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춤은 소모적이며 절실하지 않은 오락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이런 유형의 연출물 가운데 미국적 사례로서 가장 유명했던 이 있는데 이들을 모방한 몇몇 춤꾼들이 예술적 가치보다는 짧은 의상 때문에 드러나기 마련인 각선미를 자랑하는 레뷰 쇼에서 허우적거렸다.당시의 주요무용가인 데이숀에 의하면. “20세기초의 발레는 매우 쇠퇴하였다. 멋 없고 인공적이며 연기나 아이디어가 뛰어나지도 못하고 오페라 작곡가에 의해 쓰여진 발레를 하는 동안에 관객들은 기계적이며 생명력이 없는 연기를 보느니 휴게실로 걸어나가는쪽을 택하게 되었다.” 라고 전해진다.2) 현대무용의 등장20C등장한 현대무용은 유일한 예술양식이던 발레에 대한 도전으로 고전 발레의 유미주의에 반기를 들고 자유로운 개인의 정서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하여, 모든 형식주의를 버리고, 낭만적인 분위기나 감정이 아닌 그야말로 낭만주의의 본질인 정신을 구현하려는 무용이다. 여기서 낭만주의란, 인간의 경험이나 신체의 자연스러운 경향과는 상관 없이 공간에서 미리 정해진 규율에 맞추어 움직여야 하는 고전주의 발레에 반하여, 낭만적인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려고 했던 운동을 말한다. 이런 낭만파 무용에는 그 새로운 정신을 나타내는눌려 있던 인간 정서를 표출시키고 영혼, 즉 본질적인 정서에 반응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러한 작업이 덩컨, 세인트 데니스, 쇼운, 비그만 그리고 여타의 무용가들에게 의해 이루어지면서, 발레의 절대적인 군림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형식의 기틀이 마련되었다.1927년 무렵, 현대 무용(Modern dance)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춤이 당대의 당면 문제와 마음가짐을 반영해야 한다는 뜻에서 동시대적(contemporary)이라는 의미와 20세기의 관점이라는 뜻에서 명명한 것이지 현대 생활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은 것은 아니다.이처럼 시대적인 요청과 혁신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현대 무용은 움직임과 미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게 되었다.현대 무용은 '동작이 무용의 실체'라는 점에서 무용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로서 분리시켰다. 고전 발레에서 인위적인 노력들에 의해 동작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현대 무용에서는 아무런 근육 활동의 노력 없이 외적인 힘에 의해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포즈나 태도를 취하고, 더 나아가 동작이 무용을 만드는 재료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용의 본질적인 실체임을 강조한다. 이럴 때 동작은 무용가가 의도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지각과의 사이를 연결해 준다.또한, 현대 무용은 모든 정서적 경험의 표현 방법으로 이성을 초월한 감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합리적, 과학적으로 규명되어 알고 있는 사실은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지만, 규명하여 알아낸 사실들의 범위는 아직까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외의 사실들은 과학이 아닌 적합한 방법으로 밝혀져야 하는데, 이러한 진실을 직시하고 가시적 이미지로 표현해 내는 기능을 예술이 담당해야 한다면 현대 무용이 그 기능을 크게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체적인 동작을 키네시스(Kinesis)라 부르고, 어떤 정신적인 것을 메타키네시스 (Metakinesis)라 하는데, 머레이(Marray,G.)는 합리적인 서들이 부르는 “긴장과 이완” 혹은 “제약과 해방”을 보여준 처음 인물은 바로 델사르트였다.에밀 쟈크- 달크로즈(Emile Jacques-Dalcroze 1865-?)달크로즈는 스위스의 음악선생이자 작곡가로서 19세기말부터 20세기까지 음악과 무용교수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달크로즈의 기술은 “음악적 시각 굴절” 및 “운동의 점진적 시스템”을 통하여 무희나 음악가의 리듬과 하모니에 대한 구조감각을 강화하는데 기초를 제공한 것이다.로이 푸우러(Loie Fuller 1862-1928)일리노이주(州) 풀러스버그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배우로 데뷔하였으나 무용가로 전향하여 성공하였다. 그녀의 무용은 전기조명을 이용한 것으로, 넓고 긴 스커트를 펼쳐 흔드는 데 따라 여러 불빛을 비추어 ‘스커트댄스’라는 아름다운 색채무용을 펼쳤다. 나중에는 스커트에 뱀이나 나비 무늬를 넣어 뱀춤 ·나비춤을 추어 큰 인기를 모았다. 같은 시대의 이사도라 덩컨과 함께 종래의 무용음악에 따르지 않고 베토벤, 멘델스존, 드뷔시 등의 콘서트 음악에 따라 춤춘 최초의 무용가로도 알려져 있다. 푸우러가 준 교훈은 무대위의 독무가 많은 관객을 사로잡고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과 당시 대중의 찬탄을 받던 스타급 발레리나들의 무기였던 전통적인 고전무용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2) 현대무용의 기수이사도라 던칸(Isadora Duncan, 1878-1927)던칸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정은 예술가정이었으며 어머니느 음악을 가르쳤다. 던칸은 어릴 때 발레를 공부했으나 이내 그녀의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고전 발레 형태로부터 이탈하였다.던칸의 춤은 극적 요소는 없었고 대신에 개성표현의 예술로서 전통적인 콜세트와 발레화 그리고 당시의 발레복을 벗어버리고 맨발과 맨 다리로 얇고 짧은 그리스 가운같은 겉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이사도라 무용의 특질은 그녀 자신이 기술한 것에 잘 나타나있다. 그녀는 미국 무용에 관해 개인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속에서 다음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그때까지 발레가 연기한 것 보다 훨씬 정확하게 이국적인 무용 스타일을 이루었다. 데니스의 동작 기술은 고도로 개발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녀의 기술은 주로 “장식의상에서 합성수지, 포즈, 스카프 의상의 조작에 관계된 것으로 모두 그림같고 분위기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데니스는 동작에 대한 지성적인 재질과 즉흥연기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달크로즈가 전에 한것과 상당히 비슷한 “음악의 시각화”란 안무기술도 개발하여 오케스트라 총보에서 각각의 무희들은 정해진 악기에 따라 춤을 추었다. 그때의 데니스의 기술은 주로 전달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던 미국인들에게 무용을 전한다는 견지에서 볼때에는 본능적인 무대감각, 종교적인 신비감, 사명감등에 그 기본을 들 수 있다.대조적으로 테드 숀은 대니스에 비해 덜 신비적인 반면 더 분석적이었다. 숀은 무용에서 기술적인 훈련을 중시하여 데니숀 학교에서 가르치던 시스템에 맨발로 고전 발레 고유의 이교도적이고 민중적 무용스텝과 스타일, 달크로즈식 훈련, 초기 독일 현대무용등 여러 가지 요소를 이용하였다. 숀의 남성 무용훈련의 개념과 더불어 숀은 남성 댄서들의 필요성에 역점을 두었고, 남성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넓히기 위해 미국 전역의 연주회 무대, 단과대학 및 종합대학 등에서 분투 노력하였다. 숀은 무용의 위대한 개혁자였다. 그는 [무용 교육의 원리]와 [우리가 해야 할 무용]을 포함하여 널리 읽혀지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스피링 필드 대학과 피바디등 많은 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쳤다. 그는 교육적 매개체로서 창조적인 댄스에 대한 인식을 얻는 것도 도와주었다.마샤 그래햄(Martha Graham 1898-?)미국 현대무용의 상징이며 단 하나의 위대한 인물로 대중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마샤 그래햄을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발레 안무가 아그네 드미으는 미국 최고의 안무가이며 자신을 넘어서 국제문화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록했다. 특히 그래햄은 새로운 형태의 동작을 창조한 소수의 인물중의 하나였다.마샤 그래햄이 무용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