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를 읽고나는 이전부터 막연하게 느껴왔던 현대 산업사회의 폐해와 심각성을 마음 속 한 구석으로 밀어 넣은 채 모른 척 해 왔었다. 그러나 이 책 를 읽은 후, 그것은 더 이상 감추기 곤란해졌고 내가 속해있는 이 현대문명사회와 그 척도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라다크. 지금은 인도 영토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지만, 천년 넘게 독자적인 언어와 티베트 불교문화에 뿌리를 두고 자급자족의 삶을 꾸려나가는 공동체이다. 라다크는 거칠고 황량한 풍토와 풍요롭지 못한 자연환경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해 왔다. 그들의 생활은 풍족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코 가난하지 않으며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크게 불편을 겪지 않고 살아나가던 민족공동체이다.이 책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이 책에 문호개방 이후 서구적 세계관에 의해 ‘개발’ 되어가는 라다크의 모습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며 담담히,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기술하고 있다. 서구의 문화가 주도하는 개발과 그에 기초한 과학 기술들은 라다크의 전통과 문화를 ‘진보’ 라는 이름 하에 무너뜨리고 서구의 획일화된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집어넣었다. 이 문제는 비단 라다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그중에서도 이른바 ‘제 3세계’ 라 불리우는 국가와 민족공동체에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원시공동체에 선진문명과 올바른 가치를 심는다’ 는 이데올로기 아래 개발을 실시한다.서구의 세계관에 맞지 않으면 뒤 떨어진 것인가? 뒤 떨어 진다는 것은 불행과 가난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것들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묻고 싶다. 현대 사회와 현대 문명 이라는 시계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과연 당신의 삶은 진보된 삶이며, 행복한 삶인가? (물론 이 질문은 나에게 먼저 던져지겠지만.)극히 최근까지의 라다크 공동체의 삶은 매우 건전했으며,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깊은 평화와 만족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 정부의 결정에 따라 1975년 라다크 문호개방 이후 이 소규모 공동체 사회는 급격하게 변화했다. 두 문화의 충돌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불안했다. 사회는 빠르게 개인주의화 되어 갔으며,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특히 종교적·정치적- 내분과 폭력이 빈번히 생겨났다. 문화의 충돌 이전의 라다크를 돌아가게 하던 경제적 싸이클은 농업과 가내 수공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지만 현재에는 화폐, 즉 돈이 라다크를 움직인다. 사회에서 극히 소수인 돈의 소유자가 사회를 돌아가게 하며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행복을 측정하려 한다. 이러한 가치관과 현상은 더욱 더 확산되어 가고 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세계의 여러 나라들 또한 라다크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산업 문화적 침략을 통해 진보라는 이름을 쓴 빈곤에 젖어 들었다. 이러한 침략적 사조는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한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문화만을 정상적이고 유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세계 전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무한경쟁과 탐욕, 개인 이기주의적으로 되어가며, 이러한 경향들은 우습게도 단지 인간 본성의 탓으로만 돌려진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경향들은 인간 본성의 결함보다는 현대 물질문명과 문화 침략이 결합하여 탄생시킨 사생아들로 보고 있다.현대 산업문명은 서구사회가 산업화로 인해 변화되는 동안 세계의 대다수 민족과 사람들은 계속하여 다른 원칙과 다른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서 분리시킨다. 그들의 시각에서 ‘다름’ 은 곧 ‘틀림’ 이고, 틀림은 바로잡아 올바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산업 문명적 패러다임은 경제의 규모를 늘리고 개발을 가속화하여 성장을 이루는 것이 이 세계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 좋은 옷, 더 빠른 자동차, 더 많은 급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 뒤에 가려진 낭비와 오염, 폭력과 범죄, 실업과 인플레이션, 환경파괴 등과 같은 문제들을 과연 누가 떠맡게 되는가? 인류의 출현 이후 이토록 파괴적인 개발과 문명을 가졌던 시기는 없었으며, 그것을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가치로 여겼던 적은 더더욱 없다. 서구 산업문화는 단기적, 일시적으로는 물질적 풍요와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도시와 농촌, 남자와 여자, 문화와 자연 등의 균형을 깨어 버렸다. 이러한 경향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속도는 증가하고 있다.나 자신도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에 속해 있으며, 그 나의 머리와 가슴은 물질문명의 편리와 그 이면의 추악함과 모순 됨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패러다임이 가져올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개발과 진보라는 일직선적인 방향에서 눈을 돌려 바라보아야 할 곳은 바로 공존과 공생의 길이다.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서구 중심적 경제논리- 이것을 해체시켜야 하며, 이것을 타 국가와 민족에 강요하지 않아야 함을 주장한다. 이 말은 문화와 경제의 고립, 또는 과거로의 무조건적인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우리의 문화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이국적 문화를 무조건 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정치적·경제적 구조를 탈 중심화 하고 농업중심에 기초를 둔 소규모 공동체적 경제원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구의 이원론적 가치관, 즉 진보와 야만 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거시적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의 가치관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모든 문화와 전통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으며 가치를 지닌다. 일례로 티베트의 일처다부제를 원시적인 야만행위라고 욕할 수 있는가? 그것을 서구적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타문화를 자신의 것과 비교해 우열과 틀림 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각 문화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균형과 조화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한국 기독교의 양상과 특성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종교 백화점 국가이다. 한국에 들어와 있지 않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 세계의 주류 종교는 거의 없다. 또한 종교의 형태로 보기엔 미미하지만 그 근본이 종교와 상통하는 정신적 관념-예를 들어 유교, 도교, 무교(巫敎) 등- 까지 포함한다면 한국사회는 가히 온갖 종교가 공존하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 중 특히 급성장한 종교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카톨릭은 1784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1884년에 한국에 도입되었다. 카톨릭은 조선의 제사를 위시하여 기존 한국의 종교 문화 전통을 무시함으로써 숱한 박해를 받았다. 개신교 역시 한국의 전통 - 특히 무속신앙 및 유교사상을 원시적이고 비생산적인 사상으로 보며 멸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개신교(이후 기독교로 통일하겠음)는 한국의 무속을 전근대적 미신의 전형이자 타파의 대상으로 보고 그것의 계몽을 위해 힘썼으나, 한국 내 무당 및 무속인의 숫자는 줄기는커녕 도리어 늘었다. 왜 그럴까? 무교, 즉 샤머니즘은 한국인의 기질을 가장 잘 반영해주는 세계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민족은 알게 모르게 무속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의 뿌리는 수천 년을 이어온 것이다. 인도에서 현행법상 카스트 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그것이 없어지리라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한국의 기독교 도입과 발전이후 한국 기독교는 그간의 노선을 선회하여 한국 무속을 포용하는 정책을 사용하게 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샤머니즘과 결합되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한 사회 내의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데 한국 기독교 역시 이러한 양상을 띄며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종교의 결합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국의 기독교’ 가 되어 한국 사회에 뿌리박게 된다.○샤머니즘의 역할(가) 기독교의 정착과 샤머니즘기독교가 홀로 한국에 뿌리내리고 느님과 기독교의 절대자인 여호와를 접맥시켜 ‘하나님’ 이라는 개념을 확립시키며 성경번역에까지 적용하게 된다. 이러한 ‘하느님’ 신관은 ‘하나님’ 신관으로 바뀌며 대중들에게 녹아들게 된다. 이러한 하느님 신관을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나)교회의 양적 성장과 샤머니즘세계 50대 대형교회 가운데 25개의 교회가 한국에 있다. 기독교의 본고장인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의 변두리 국가, 그것도 도입된 지 100년이 갓 넘은 이 조그만 땅인 한국.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야경을 보며 “무슨 나라가 이렇게 공동묘지가 많으냐?” 라는 웃지 못 할 질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한국에서는 매일매일 수 없이 많은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이렇게 양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샤머니즘과 기독교의 결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샤머니즘은 기본적으로 소원성취 및 욕구의 충족, 한풀이 등 기복적인 요소가 강하다. 가정적인 복락을 최고로 치는 것이 한국사회와 샤머니즘의 제 1원리이자 목적 그 자체이다.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시기는 60년대 전후반 이었는데, 이때의 시대적 상황은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시기였다. 급격한 사회변화는 그에 따른 혼란을 야기하게 되는데, 이촌향도, 상대적 빈곤, 정신적 스트레스, 절대적 가치관과 진리의 붕괴 등이 그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고독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낄 때 어떠한 ‘가치’에 기대어 안정을 취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시대 가운데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한국인의 성향은 복을 기원하고 소원의 성취를 위해 무엇인가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띄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샤머니즘과 결합한 한국 기독교는 거대한 변화 앞에 벌거벗은 인간을 수용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독교회는 샤머니즘을 비판해왔으나 동시에 현세적, 물질적 복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성격은 한국인 의식 기저에 깔린 샤머니즘과 끌리게 되며 많은 사람들이 기 거대 교단이 아닌 군소 교단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목사를 많이 양성하는 것, 즉 목사를 성직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와 한국의 산업화, 물질화가 결합하여 탄생한 것으로 교회를 ‘직장’ 으로 보는 개념이다. 조금 비약하면 목사는 교회회사의 사장이며 신도들을 노동자 정도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목회가 진행되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인격과 신앙심이 배제된 목회자가 사회에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를 잘 시사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2006년 7월 2일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공동회장인 장효희 목사의 사망이 그것이었는데, 사망한 이유가 한 여신도의 아파트에서 여신도와 간통을 하다가 여신도의 남편이 들이닥치자 베란다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이었다. 신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하지는 못할망정 지도자라는 자가 대낮에 불륜행위를 저지른 일, 한국 기독교의 근본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사건이었다.물론 이 일화로 모든 선량한 목회자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사망한 목사와 같은 거짓 목사가 수도 없이 많다. 한국 기독교측은 무분별한 목사 안수를 중지하고, 목회자의 자질이 검증된 사람을 목사로 안수해야 한다.(나)외적 성장에 치중하는 교회2004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가 양적 팽창, 외형에 너무 치우친다." 라고 답한 것과 비개신교인들이 "양적 팽창에 치중하고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이다" 라고 답한 것은 한국의 교회가 외적인 성장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한국 교회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해마다 3천 개가 넘는 소형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반면 대형 교회들은 문턱이 닳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다.한국 기독교는 교회, 즉 ‘성전’ 은 기왕이면 크고 화려한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전이 좀기독교에 확산되었다. 세계 50개 대형 교회 가운데 25개가 한국에 있다는 말은 언뜻 보면 한국 교회가 굉장히 성령적이고 부흥적이라는 말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수없이 많은 교회가 하루하루 ‘폐업’ 하는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새길기독사회문화원 유상태 사무국장은 "한국 개신교는 부흥한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살이 쪘다. 살을 빼지 않으면 앞으로도 여러 증세가 나타날 것이다. 대형 교회가 많이 없어지고 건강한 중소 교회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라고 역설한다.물론 교회, 다시 말하면 예배당이 크다는 사실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예배를 드리며 신도들 간에 서로 영적인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 그러나 이상과 실재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 즉 현재 한국 교회내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그것을 가로막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예전에 내가 다니던 청주 서OO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청주에서도 상당히 커다란 교회로 인식되고 있던 그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실상은 오히려 수많은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재정이었다. 초기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시작한 그 교회는 어느 순간 새로운 ‘성전’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기 시작했다. 즉 양적인 성장을 시작했던 것이다. 성전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고, 그것의 대부분은 신도들의 헌금에 의해 충당되었는데, 내 생각에는 도가 지나쳤다고 본다. 각종 명목이 붙은 헌금 봉투가 신도들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수가 한 두개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더구나 미성년자들에게까지 그 헌금봉투들이 돌아갔었으며, 매주 설교 후 봉헌기도 시간에 목사님이 불러주는 ‘헌금자 명단’ 은 나로 하여금 씁쓸함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했던 일화이다.한국 교회는 양적인 성장에만 치우친 자신들의 모습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교회가 크다고 믿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질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양적 팽창은 교회의 진정한 모습, 한국의 치유은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들을 생각하며 한국 기독교 치유의 참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선 혼란스러운 기독교 치유가 과학적 치료시기를 놓치게 함으로 병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 치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켜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보다 오히려 기독교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는 해악을 야기하고 있음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목사님의 고백을 예로 들어보자.“무리를 해서 몸살이 걸렸고 그로 인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입원한지 2시간도 못 되어 교회의 장로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교인들이 목사님께서 숨은 죄가 있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빨리 퇴원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억지로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후에 건강을 찾기 위해 테니스를 쳤는데 건강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회의 권사가 오더니 ‘목사님, 건강이 안 좋으시면 기도로 치유하셔야지 테니스가 뭡니까? 그거 인본주의 아닙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실 내 마음속으로 ‘이놈에 목회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한국 기독교의 치유 은사의 발로는 샤머니즘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질병이나 고통의 이유를 육체의 쇠잔에서 찾지 않고, 어떠한 신비스럽거나 영적인 부분의 문제로 간주한다. 즉 육체의 질병과 고통은 악신(기독교식으로는 사단, 혹은 마귀)의 농간이자 술수이므로 그것을 영적으로 뛰어난 무당(기독교식으로는 안수기도 전문목사 정도)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기독교적 치유의 기저에 깔려있는 인식, 즉 ‘모든 병은 마귀의 역사 때문이며, 혹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생기는 것이다.’ 라는 생각은 전근대적인 믿음이다. 얼마든지 의학으로도 치유할 수 있고, 치유해야만 하는 질병을 잘못된 신앙의 껍질것이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그리고 도덕교육-인간 변화의 교육, 그리고 공동체주의-Ⅰ. 도덕교육과 공동체이론.도덕교육에 있어 새 교육 과정에서는 공동체 이론(community theory)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바로 도덕적인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주의적 삶은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사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간의 논쟁은 끝이 없어 보인다. 도서관이나 각종 매체를 조금만 뒤져보면 이 둘 간의 논쟁을 다룬 책과 논문, 잡지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사상에 대해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어느 하나의 이론에만 치우쳐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복잡하고 급변하기 때문일 것이다.Ⅱ.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현재 우리나라 도덕교육이 어떠한 색채를 갖고 있는가에 앞서, 우선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지를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이념이고, 공동체주의는 개인은 공동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공동체의 번영이 있은 후에야 개인의 행복도 있을 수 있다는 이념이다. 둘 다 어떠한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굳이 더 중요한 한 가지를 고르라면 개인주의가 더 우선이다. 개인이 행복하지 못하면서 그 외의 공동체만 번영하고 행복하다면 그 개인 당사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개인이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해주고, 더 많은 지식과 효용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흐르면 공동체는 성립할 수가 없다. 개인이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이익을 아무 원칙 없이 침해할 수 있다면 그 공동체는 투쟁의 장이 된다. 그 결과 그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타인과 원칙을 지키며 협력, 경쟁하는 것보다 더 손해를 보게 된다.이처럼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완전히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서로 밀접히 관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이 둘의 목적이 결국 인간의 행복에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Ⅲ. 공동체주의의 문제점공동체주의자들이 롤즈를 위시한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비판하는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주의는 잘못된 개인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둘째, 자유주의는 공동체에 참가하는 것을 단순한 도구적 재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 있다고 평가절하 한다. 셋째, 자유주의는 자아의 개념이 특정한 집단 아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넷째,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결국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공동체주의는 완전한 것인가? 공동체주의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유치한 생각일 뿐이다. 신라대학교 목영해 교수는 공동체주의의 문제점으로 4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공동체주의의 구체적 청사진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사회 및 교육을 총체적 집단주의화 하여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셋째,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만을 추구한다. 넷째, 대립하고 있는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과잉 단순화하여 비판한다는 점이다.) 공동체주의의 문제점을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동체주의는 자칫하면 타 공동체에게 부당한 해를 끼칠 수 있고, 또 집단구성원의 행복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나 일본이 그 첫 번째의 예가 될 것이고, 북한의 김일성정권이나 그보다 훨씬 덜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인권억압이 두 번째의 예가 될 수 있다. 가족의 단계로 본다면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 타 가족에게 해를 끼치는 마피아패밀리가 그 첫 번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어려운 시절에 장남몰아주기가 두 번째의 예가 될 것이다. 공부 잘하는 장남을 위해 차남과 여자들은 희생을 해야 했다. 다행이 성공한 장남이 형제들을 나중에 도와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러한 예들을 보자면,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우리나라 교육사상가들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공동체 교육론을 대하는 우리나라 교육사상가들은 미국의 공동체 교육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데, 어떠한 이론이든 간에, 특히 그것이 자생적 이론이 아닌 외국에서 수용된 이론이라면 더욱 비판적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 문화적 풍토가 다른 곳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사대주의에 지나지 않는다.Ⅳ. 도덕교육 교수목차의 변화 - 개인의 합리성에서 공동체 중심으로.1980년대 까지 주류를 이루던 콜버그의 인지발달 접근법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그는 청소년의 도덕적 발달에 관한 3 수준 6 단계의 이론(전관습, 관습, 후관습)에서의 계열적이고 순차적인 도덕적 발달이 문화적 특수성에 관계없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임을 주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콜버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내부적 힘, 즉 자생적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도덕적 발달이 문화적 특수성에 관계없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와 문화에 예속되어 살아가는데, 콜버그의 주장은 이것을 무시한 단순한 논리일 뿐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도덕 이론을 비판하며 두각을 나타낸 이론이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등장한 공동체주의(communitarism)이다. 공동체주의는 과거에는 주로 일반 저널리스트들이 소위 ‘동아시아 모델’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서 사용했으나 이제는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하나의 이론적 모델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함에 있어서 개인주의의 범람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찬양으로 이어지고 이 경향은 공동체의 복지를 향한 노력들이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을 초래하므로 사회의 진보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동체주의자들의 강력한 비판은 곧 미국교육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그에 속하는 교육론들이 바로 인격 교육론(character education)과 배려 교육론(care education)이다. 인격 교육론이 공동체를 유지ㆍ존속시켜 주고 있는 공동체의 합의된 규범의 내면화를 강조하였다면 배려교육론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 고양시켜주는 배려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러한 교육사조는 어떠한 식으로든 미국 교육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 교육에도 곧 적용되게 되었다.
세계풍속사 - ‘르네상스에서 섹스혁명까지’를 읽고보고서 작성을 위해 교수님께서 주신 리스트를 주욱 읽다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 있었다. 세계풍속사. 제목만 봐도 왠지 위험스런 분위기를 풍기고, 뭔가 자극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바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을 펼쳐 보니 노골적인 삽화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기쁨도 잠시였다. 이 책의 내용이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으며, 반어법과 은유법 등의 수사법이 굉장히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게 되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이 책의 내용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났다. 그러나 그 구성은 비교적 단순한 듯 하다. 성개방과 성억압, 다시 개방과 억압, 시대별 지역별 인종별 국가별 각종 성풍속의 양태를 넘고 넘다 보면 이 책의 끝에 와 있는 것이다. 파울 프리샤우어는 마치 변증법처럼 그 내용을 물 흐르듯 책 속에 기술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책을 읽으며 역시 기억에 남는 내용은, 사회가 바뀌고 여성이 경제력을 얻어 더 이상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이루어지고 보니, 섹스 또한 그 목적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전까지는 가족을 이루기 위한 섹스, 즉 결혼과 출산과 연계된 섹스만이 중세적으로 정상적인 섹스였던 반면, 이제 섹스는 출산과 가족 구성만이 목적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 오늘날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단적인 예로 dink)족을 들 수 있겠다. 섹스는 즐거움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식이 섹스혁명 이후에 확립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세계풍속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서양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의 성풍속과 성관념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읽는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다만 이 과목이 서양사개론이므로 그 내용은 나의 머리 속에만 남겨 두었다.1.의 그것보다 더욱 자유분방했다. 시민들의 집에는 욕실이 거의 없었고, 때문에 목욕탕은 남녀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서로의 알몸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함께 목욕하고 있는 남녀가 부부인지 아닌지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인적인 문제였다. 부도덕은 사회적인 것이었다. 위대한 시인인 단테나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시인 페트라르카는 이런 사회상에 분노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교회 내부의 도덕적 타락도 커져갔다. 남자 수도원에서는 남색이 만연하였다. 기독교는 기적에 의해서 그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나 그 밖의 도시에서도 남색이 만연하였다. 총독이 ‘매춘을 장려하여’ 남색을 근절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교황과 황제의 무능함이 조소되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칭찬받았던 것은 넘치는 정력뿐이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굶주린 짐승이었다.2. 종교 개혁에서 로코코) 시대로1495년 카를 5세의 조부는 호소문을 인소하여 여러 민족들에게 악성농포를 주의하도록 경고했다. 그것은 부도덕의 벌로 지상에 내려진 질병에 대한 경고였다.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그 죄값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병은 남녀의 생식기에 수포가 생기는 것으로 육체의 파괴를 알리는 전조와 같았다. 나폴리를 공격한 프랑스 군사들 중의 혈액 속에서 최초로 독을 확인한 데에서 이 병은 모르부스 갈리쿠스(morbus gallicus), 즉 프랑스 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 발병 시기가 콜롬버스와 함께 인도로 향했던 선원들의 귀국과시기가 일치함으로써 아메리카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의학자도 적지 않았다. 이 무서운 성병은 시필루스(syhpilus)라고 불리며 사랑에 열을 올린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갔다.사제든 수녀든 시민이든 농민이든 죄를 범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할 수 있었다. 면죄부(Ablaβzettel)를 사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유쾌한 죄인들은 남녀 모두 아무런 거리낌없이 악행에 빠져 들었다. 행동의 기준이 되는 최음제 등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죄목으로 독일에서만 10만명 이상의 여성을 희생시켰다. 성적 쾌락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는 마녀재판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었다. 성관계는 오직 자손번식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주장이 겁에 질린 주민들을 지배했다.그러나 교회 헌당제(Kirchweihfest) 기간과 사육제(Fastnacht) 기간에 벌어지는 광란의 축제만큼은 자유로왔는데, 이는 일상생활의 여러 규제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에 며칠쯤은 자유롭게 즐기는 편이 낫다는 오랜 세월의 교훈에서 온 것이었다.청교도무리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후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함꼐 여성들의 힘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다. 그들은 여성적인 동시에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또한 아내의 바람기는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갔다.30년 동안 유럽의 정치가 서로 뒤얽혔던 종교전쟁(30년전쟁)에서 격전을 겪은 양쪽 병사들은 방화와 살인을 멈추지 않았으며 모든 법들이 휴지가 되고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따라서 풍속과 기강이 문란케 되었다. 그러한 시대에서 찰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고집하다 크롬웰에게 목숨을 잃고, 스웨덴의 정치가인 악셀 옥센셰르나는 루이 13세를 하찮은 분별력의 소유자라 비난했다.이러한 상황속에서도 루이 14세는 신의 은총을 받은 왕홀을 움켜쥔 존재였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했다. 그 곳에는 1만명의 남녀가 어느 곳에서나 왕에게 봉사하기 위해 항시 대기했다. 그는 로코코의 아버지이자 많은 적자들과 서자들의 아버지였으며, 인생향락의 교사였다. 그는 약탈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죽었을 시 사람들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로코코의 상징이란 슬픔이 아닌 아름다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3. 로코코시대부유층의 향락욕을 위해서 사용되는 거액의 자금 중 상속재산이나 관직의 수입에서 온 것은 극히 일부였다. 루이 14세 때 중상주의에 의해쇠퇴했던 매춘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창녀라는 사실이 명예가 되었고, 창녀들의 음탕하고 난잡한 행동들을 꺼리는 사람은 이성을 거스르는 자로 간주되었다. 흥청거림과 난잡한 소동으로 이어지는 파티가 연일 베풀어졌다. 귀족적인 로코코의 프랑스를 소시민화한 것은 혁명도 통령 정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황제로서 유럽 지배자들의 원수가 되려고 한 풍운아 나폴레옹이었다.영국은 루이 16세 처형 이후 나폴레옹의 결정적 실각에 이르기까지 짧은 휴전 기간 뒤에 프랑스와 싸워왔으며, 이곳에서도 대륙에서의 풍속의 시민화가 간접적으로 진행되어갔다. 개인을 위해, 국가를 위해 부를 추구하는 것이 영국정치의 본질적인 내용이 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곳곳에 상사를 세웠으며, 식민지 정부를 세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넘치는 부를 배경으로 하여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부도덕한 도시가 되었다. 부자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치에 겨워 관능의 자극을 추구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쾌락만 높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돈벌이가 되는 사업으로 번창했다.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곳은 채찍질을 하는 은밀한 저택과 유곽이었다. 이 곳에서는 고통의 쾌락을 맛보고 싶어하는 남자들에게서 많은 돈을 우려냈으며, 솜씨있는 채찍질로 그들에게 서비스했다.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에서는 그 이전 시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매춘, 도박, 음주가 성행했다. 그러나 그런 실상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밖에 내려 하지 않았다. 기록으로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성적, 사회적 생활이 이중적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등장한다. 그가 엥겔스와 공동으로 집필하여 출판한 공산당선언은 현재와 과거의 사회질서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사상이 흘러넘쳤으며, 대중을 위한 미래를 제시하는 분명한 지표였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출현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5. 세기의 중반기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모범적인 결혼은 사람들에의 위선적인 도덕의 가면은 점점 더 흉악해져갔고, 나폴레옹 3세의 궁정 귀부인들과 신사들은 조형 미술에서의 나체의 부도덕성을 단죄하고, 황제의 검열 기관은 문학의 적나라한 진실을 금지하고 서적을 압수하여 작가들을 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친 죄목으로 고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2 제정시대에 세워진 ‘상테 거리의 극장’에서는 여전히 대담하고 외설적인 연극이 공연되었다. 관객은 천한 것을 거부하고, 기지가 뛰어난 대화나 멋있는 풍자를 원하고, 악덕과 방종의 변명을 들으면서 함께 체험하고 싶어했다. 제 2 제정시대에는 팅겔탕겔(Tingeltangel)이 인기를 끌었다. 야한 노래는 교묘하게 작곡되어 상류사회에서까지 불렸는데, 포인트가 강조된 각 부분에 내포된 이중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닐 경우 그것을 추잡한 것으로 단죄하지 않았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그 저속한 노래는 크게 유행하여 사회적인 도덕성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자 저속한 노래의 음탕함은 울적한 관능성을 토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것이 유곽에 가거나 창부를 사서 지껄이는 상대로 삼거나 하는 것보다는 안전했던 것이다.거리의 여자들은 그녀들의 보호자인 뚜쟁이가 없이는 좀처럼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여자들끼리의 경쟁에서지지 않으려면 강한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 뚜쟁이 패거리는 대개는 여자들의 기둥서방으로서 그녀들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여자가 충분한 벌이를 못 하고 돌아온 경우에는 혹독하게 학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여자들은 고분고분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기둥서방이 성교에서 쾌락을 주는 유일한 남자였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관능을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 남자와의 성교를 통해서일 뿐이고, 정부만이 사랑에의 동경을 충족시켜준다는 것이었다.많은 거리의 여자들이 유곽의 안전 속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러나 포주에게 빚을 지게 되고, 포주는 그녀가 유곽에서 달아날 수 없도록 행동
성공지능 첫 페이지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내 인생을 바꾸어주신 알렉사 선생님께 이 책을 바친다.” 과연 무엇이 저자의 인생을 바꾸게 한 것일까?성공지능의 저자인 스턴버그는 예일대 심리학과 정교수이자 IBM 지정 교육학 교수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그는 책에서 스스로 자신이 저능아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IQ 테스트에서 큰 실패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조금 소심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했으며, 당황해서 문제를 잘 풀 수 없었다고 한다. 문제를 제대로 풀기도 전에 시험은 끝나버렸으며, 테스트의 결과는 그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는 책에서 ‘게임에서 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거의 대부분의 교사들은 그에게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저능아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스턴버그와 학교의 교사들은 낮은 기대치를 가졌으며 그것의 부응에 서로 만족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4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인 알렉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초임교사라서 IQ 테스트 점수가 무엇인지 몰랐고, 따라서 그것과 스턴버그를 연관짓지 않았다. 그녀는 스턴버그에게 더 많은 과제, 더 높은 성취를 요구했으며, 스턴버그 역시 그 기대에 부응했다고 한다.나 역시 IQ 테스트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 굉장히 좌절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수첩을 분실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내 친구가 찾아냈고, 우리는 그것을 선생님께 돌려 드리기 전에 그것을 살펴보았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반 아이들의 아이큐 테스트 결과였다. 거기서 나는 나의 아이큐가 93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당시 반에서 가장 공부를 못했던 아이보다 더 아이큐가 낮게 나온 것이다. 그 때 당시로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고,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아무튼 IQ가 인간의Q는 문화성을 가지고 있어 한 문화권에서 인정된 지능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우둔함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IQ의 가장 큰 실수는 테스트 중심의 방법에 있다고 한다. 즉 심리측정학이 지능의 정의를 확실히 내려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와 다르다.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심리측정 방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다양한 방법들이 중에서 심리측정학만이 IQ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심리측정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IQ만 믿는 것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다. 물론 학업성적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는 게임의 핵심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이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의 세계로 들어갈 때 학업성적이 선택의 기회는 많이 줄지 몰라도 들어간 이후에 직장이나 사회는 그 개인에게 학업성적외의 여러 가지능력을 요구하게 됨으로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스턴버그는 책에서 IQ는 하나의 감안 요소일 뿐 절대요소가 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IQ는 지능에 포함되는 것이지, 지능 그 자체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인간의 지능을 단지 IQ테스트에 의한 지능, 혹은 대학입학시험이나 대학원 입학에 사용되는 여러 테스트에서 추출된 지능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이러한 지능들은 단지 불활성 지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불활성 지능이란 다시 말하면 다른 요소와 결합되지 못하는, 고립된 지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 지능인가? 이 책 제목처럼, 스턴버그는 중요한 것은 바로 성공지능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존의 (IQ)테스트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수치’로 표현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차이를 믿는다. 그러나 스턴버그는 그의 성공지능관을 통해서 종래의 지능관을 비판하고 있다. 성공지능관은 모두 12가지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1. 종래의 검사는 지능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측정했을 뿐, 적극적 성공지능을 다루지 않았다.2. 성공지능이란 분석적, 창조적, 실천적 지능이다.3. 야 한다.5. 지능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발휘되며, 성공지능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균형을 취하도록 도와준다.6. IQ와 같은 분석적 지능을 과신하는 사람보다는, 그런 능력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인생에서 더 잘 살아 나간다.7. 종래의 지능검사는 창조적, 실천적 능력을 잘 측정하지 못하며 또 그런 능력들은 기존의 테스트와는 별로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능의 다른 측면도 측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8. 학교는 사회에 나가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학교는 학생들에게 나중에 부분적인 능력밖에 발휘하지 못할 선택안을 택하게 만든다. 따라서 학교의 요구사항과 일상생활의 요구사항을 보다 긴밀히 조화시켜야 한다.9. 지능은 유전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지능의 유전성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성공지능의 유전성은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10. 인종과 민족에 따라 나타나는 IQ의 차이는 이들 인종과 민족의 전체적 지능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부분의 반영일 뿐이다. 그 증거는 IQ의 차이가 거의 전적으로 환경적 영향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11. 지능의 중요한 요소로서는 탄력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여러 관점에서 문제를 살피는 탄력적 태도와, 다른 민족과 문화의 세계사에 대한 관점을 파악하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12. 성공지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하여,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단점은 보완한다. 또 능숙하지 못한 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그렇게 해서 원만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왠지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다. 초등학교 시절 맛보았던 좌절감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스턴버그의 12가지 성공지능관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혁신적인 교육가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특히 분석적, 창조적, 실천적 지능이라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데, 이것은 성공지능이란 바꾸어 말하면 분석적, 창조적, 실천적 지능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사용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디어의 질을 판단하는 데에는 분석적 지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점과 아이디어를 훌륭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창조적 지능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상생활에서 훌륭한 아이디어와 분석 방식을 활용하려면 실천적 지능이 있어야 한다.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사고방식이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 방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분석적·창조적·실천적 지능을 섞어서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들 중 어느 한 가지 지능에만 의존하지 말고 세 가지를 골고루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학교는 물론이고, 졸업 이후 사회에 나가서도 이들 세 가지 지능을 잘 활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일의 종류에 따라 특정 지능을 더 동원해야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 지능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 세 가지 지능을 적절한 때에 적절히 활용해야만 한다. 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해결안을 마련해야 하고 그 다음에 실제적인 해결안을 만들어야 한다.세 가지 지능 중 특정 지능이 뛰어나게 발달한 사람만이 우수한 성공 지능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성공 지능인은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이렇게 하면 자연히 분석적·창조적·실천적 지능을 고루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 지능관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학생들로부터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내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성공 지능의 첫 번째 요소인 분석적 지능은 문제의 해결안을 찾아내기 위해 사고 과정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분석적 사고는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문제 해결 과정이란 문제 상황 속의 각종 장애를 극복하면서 문제 해결로 이동해 가는 것이고, 의사 결정 과정은 여러 가지 선택안을 가려내고 기회를 평가하는 것이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 문제의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 일단 문제가 규정되면 그리고 문제에 대한 정보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제시하고 그 정보를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장기적인 목적이든, 단기적인 목적이든 자신의 자원을 조심스럽게 배분한다. 손익비율을 잘 따져본 다음 이익을 극대화하는 배분 방식을 선택한다. 늘 자신의 결정 사항을 모니터하고 평가하면서 오류가 있을 때는 그 즉시 시정한다.성공 지능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견적 방법을 쓴다. 그들은 특정한 생각을 고집하거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다. 문제와 마주친 성공 지능인은 그 문제를 세심하게 분석하고 그 다음에 해결안을 찾기 위한 창조적 전략을 구사한다.창조적 지능은 주어진 것을 뛰어넘어 새롭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 그들은 일반 대중에게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일반 대중을 선도한다. 바로 빌 게이츠같은 사람이다. 그는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실패한 소프트웨어를 헐값에 사들였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새롭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섞었다. 오늘날 그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창조적 지능을 개발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창조적인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 남들에게 창조적 지능을 개발하라고 말만 하고 시범을 보이지 않으면 결코 그런 지능을 개발할 수 없다.전제 조건에 의문을 품으며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권장한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긴다. 합당한 모험을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장한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남들을 위해서 창조적인 일을 찾아낸다. 문제를 적극적으로 규정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다. 창조성을 높이 평가한다. 창조적 사고를 할 시간을 늘 확보한다. 애매모호함을 수용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권장한다. 창조적인 사람이 직면하고 극복해야 하는 문제점을 잘 인식한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정한 경계에 갇히기 전에 스스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