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前期의 軍事制度-目 次-Ⅰ. 序論Ⅱ. 軍事組織1. 中央軍 制度 2. 地方軍 制度1) 建國初期의 中央軍 1) 建國初期의 地方軍2) 5衛制度의 確立 2) 鎭管體制와 制勝方略Ⅲ. 軍令?軍政機關의 整備Ⅳ. 軍役制度1. 奉足制의 成立2. 保法의 成立Ⅴ. 良人에게만 役의 義務를 지운 이유는?Ⅵ. 結論Ⅰ. 序論예로부터 “兵可百年不用 不可一日不備”란 말이 있다. 즉 군대는 백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아니할 수 있으나, 단 하루라 할지라도 이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에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밖으로는 外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고 안으로는 叛徒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항시 군비를 갖추지 않았던 나라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朝鮮前記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이성계와 같은 武將과 정도전과 같은 신흥사대부들이 易姓革命을 일으켜 세운 왕조이다. 새로 성립된 조선왕조는 안으로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 밖으로 외적을 막아내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하여 군사력의 강화는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이에 부합하기 위하여 중앙의 5위를 비롯하여 지방의 진관체제로 개편 과정을 겪었다. 또한 군사력 강화의 일환으로 군역자원의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이에 본고에서는 조선전기 군사제도의 변화과정을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분류하여 알아보고 이러한 군사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군령?군정기관과 군역자원의 효율적인 확보를 위한 군역제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Ⅱ. 軍事組織1. 中央軍制度1) 建國初期의 中央軍이성계는 고려의 2軍 6衛의 조직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즉위 9일 만에 이름뿐이었던 고려의 2군 6위 제도에다 그가 친히 거느리고 있던 義興親軍 左衛와 右衛를 합쳐 10衛制度로 개편하였고, 각 위에는 中?左?右?前?後領을 두어 모두 50領으로 조직하여 일단 엉성하게나마 중앙군을 성립하였다.) 그러나 중앙군의 실태는 법제적인 측면에서의 10위와 사실상 중앙군사력을 이루고 있는 왕실 사달리하는 각종 특수병들 까지도 거의 포함시켜 하나의 지휘체계로 분속을 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5사제도로의 전환은 전투편성을 전제로 한 5군(중?좌?우?전?후군) 편제와 진법을 전제로 한 5陣法과 직결되는 편제로 세조 때에 마무리되는 5위제도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2) 5衛制度의 確立5司 제도는 세조 3년(1457) 5衛制度로 개편 되었다. 즉 세조 3년에 지금까지의 5사체제를 전면 무시하고 여러 군사를 그 병종에 따라 특정한 위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지금까지 중?좌?우?전?후의 5위의 이름은 5사의 것을 본뜨게 됨으로써 5사는 진법상 편성인 5위에 병합된 것이다. 5위는 의흥위(중위)?용양위(좌위)?호분위(우위)?충좌위(전위)?충무위(후위)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각기 분담된 지방을 통활 하였는데, 의흥위는 서울 중부와 개성부?경기?강원?충청?황해도의 군사를, 용양위는 서울 동부와 경상도, 호분위는 서울 서부와 평안도, 충좌위는 서울 남부와 전라도, 충무위는 서울 북부와 영안도(함경도)의 군사를 각각 통할하였다.따라서 이 5위 체제는 중앙에서의 수도경비의 책임을 지는 동시에 유사시에는 가장 강력한 국방력으로 활동이 가능한 조직체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여기에 세조 12년 5衛都摠府를 설치하여 5위 지휘권을 장악하였다.5위 제도는 여러 군사를 그 병종별로 각기 분속시키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5위 제도는 성종 원년(1469)에 그 소속 병종에 대한 재조정을 거쳐서 경국대전 상으로 정비되어 갔다. 그리하여 중앙군사력을 이루는 모든 병종은 5위에 들게 되었다. 또한 5위에는 전국 진관의 지방군사가 衛?部별로 분속되어 있다. 즉 각 衛에는 5부별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는 4統으로 나뉘었으며 각 통 아래는 旅?隊?伍의 계통으로 세워져 있다. 결국 전국의 진관을 망라한 지방 군사까지 위별로 분속되어있다. 그러나 이들 지방군은 지방의 절도사에게 지휘권이 맡겨져 있다. 따라서 지방권의 분속은 그들이 직접 번상하여 수도방어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대열 등에 대비하여 私兵혁파와 甲士제도의 조직 강화 등으로 시위패의 일부는 영진군으로 분속되고 일부는 기선군에 편입됨으로써 기선군의 수가 늘어나 그 당시 번상 숙위하던 시위패의 중요성이 줄어들음으로써 강화된 것이다.서북면과 동북면의 국경지대에는 고려 이래의 翼軍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익군 조직은 일정한 지역에 몇 개의 軍翼 두고 이것을 합쳐서 하나의 군사단위로 삼는 것으로 이에 속하는 군인을 익군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들 북방지대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중요한 據點을 중심으로 모든 지역을 몇 개의 도 즉 軍翼道에 分屬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던 것이다.이러한 군익도체제는 하나의 有機的 군사단위를 이루어 一元化된 계통을 가지고 군사행동을 할 수 있게 짜인 조직체였다. 군익도는 구체적인 군사행동상의 단위를 이루어 서로 협조하여 함께 대처하도록 했던 것으로 그 군익이나 그 밑의 翼들은 모두 그 지방의 행정책임자인 지방관이 군직을 겸대하고 그 지휘 아래에 있었다. 익군의 성분은 남방의 영진군과 비슷하였으나 그들은 그들의 거주지가 곧 복무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南方營鎭軍의 번차에 의한 赴防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2) 鎭管體制와 制勝方略지방 군사조직이 鎭管體制로 전환된 것은 世祖 1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 진관체제의 조직은 북방지대에서 시도되고 있었던 軍翼體制가 전국화 되어 가는 과정을 거쳐 고정화하였다. 즉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營ㆍ鎭은 주로 沿海岸지역에 설치되어 사실상 內陸지역은 비록 雜色軍이 있다고 하나 거의 쓸모가 없어 이것을 보완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불합리한 지방의 방위체제를 제거하기 위하여 내륙지역에도 巨鎭 등을 설치하고 그 주변의 여러 고을을 이에 분속시키되 그 체제는 북방지대에서의 군익조직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즉 행정상의 各道를 몇 개의 軍翼道로 나누고 그 군익도마다 거진을 설치하여 이를 좌ㆍ중ㆍ우익의 3翼으로 나누었다. 또한 익군 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獨鎭을 두는 二元체제를 갖추었다.이 같은 군익도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世祖 3년 10월에 모두 진관체제로 개편되었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방에서는 경장의 응원이 없는 형태로 나타났으나 진관체제를 대신하는 전법이라는 점에서는 사실상 양자가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제승방략은 제승할 수 있는 방략이라는 의미로 종래 방어체제인 진관체제가 군사의 피폐와 지방관의 무성의 등으로 그 기능이 상실되자 남아 있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집중적으로 적을 막는 방책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Ⅲ. 군령?군정기관의 정비조선 초기의 군령?군정기관은 經國大典상으로 정비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改廢와 廢合과정을 겪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초의 군사통수기관으로는 태조 2년에 설치된 고려 말의 三軍都摠制府를 잇는 것으로 생각되는 義興三軍府로 새로운 왕조의 집권화를 위한 시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의 지휘관은 판사로 삼군에는 각각 절제사가 있으며 또한 진무소가 있어 삼군부의 참모부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이는 10사 등의 중앙군의 총괄은 물론 지방에서 번상 숙위하던 侍衛牌까지도 그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때의 시위패는 아직도 宗親?勳臣의 사병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철저하고도 직접적인 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방의 육수군과 기선군도 역시 그 도의 都節制使에 의하여 지휘되고 있어 이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고려 이래 있어 온 都評議使司의 기능이 삼군부의 設置로 군령에 관한한 아무런 권한이 없게 되었고 兵器?軍政?宿衛?警備 등을 장악하고 있던 중추원의 虛構化시켰다. 삼군부는 정종 2년 사병이 혁파되어 병권이 집중되고 집권화에 진전을 보이게 됨으로써 삼군부에 중추원을 합속시켜 軍令系統을 一元化하였다. 그리고 중추원 기능의 하나인 王命出納의 기능은 承政院을 별도로 두어 이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삼군부의 要員은 都評議使司의 후신인 議政府의 구성원이 될 수 없게 하여 행정부와 군부를 구분하고 상호 견제하게 하여 비대화를 막았다.태종원년(1401) 7월에 삼군부는 다시 承樞府로 개편되어 中樞院제도로 되돌아왔으나 3년 6월 三軍都삼군진무소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세조 3년 5위 체제가 확립되면서였다. 이 때 삼군의 편제가 없어지고 오위가 형성됨으로써 삼군진무소는 五衛鎭撫所로 개칭된 것이다. 그리고 이 오위진무소는 세조 12년 五衛都摠府로 개칭되었다. 오위도총부는 오위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행사하는 군령기관이었으나 국방정책 전반에 걸친 기획과 집행은 역시 병조가 장악하고 있어 군정상으로 오위를 그 屬衙門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위도총부가 비록 군령기관이라고 하나 병조의 군령기능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두 기관은 서로 협조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군정기관의 최고 기관은 병조라고 하면 군령기관의 최고 기관을 오위도총부라 할 수 있으며 이들 두 기관은 사실상 협조관계에 있는 것이다.Ⅳ. 군역제도1. 奉足制의 成立조선왕조의 역은 남정이면 누구나 그 신분에 따라 국역을 져야 했다. 이 국역의 가장 전형적인 것이 바로 군역이다. 군역의 대상자는 나이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양인이상의 모든 장정이 져야 하는 의무적인 역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이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에서의 지배계층은 관직이나 혹은 다른 특전 등으로 사실상 군역에서 제외되었으며 양정들만이 져야하는 고된 역이었다. 그러나 모든 양정이 현역병으로 복무하게 되면 토지 경작의 노동력이 결핍되어 경제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에 양정 모두를 징발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립된 것이 국가 초기의 정군과 봉족제도이다. 즉 신체가 강건하고 또 집안이 그 중에서도 약간 부유한 자를 현역병으로 교대 복무하게 하였는데 이를 정군 혹은 정병?戶首라 하였다. 그리고 이들 정군들이 복무하는 동안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는 자들을 봉족이라 했는데 이들은 신체적으로나 재산상으로나 정군보다 떨어지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군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정군을 위한 재정적인 부담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는 양정 상호간에 있어서의 군역을 해결하도록 한 조처였다.봉족제도의 시초는 태조 6년(1398)이었다. 즉 품관마병의 경우 봉었다.
주제: 현 교육의 문제점과 경험을 통한 올바른 학교 교육목차Ⅰ. 서론Ⅱ. 현 교육의 문제점 제기Ⅲ. 나의 경험을 통해 본 올바른 학교 교육이란?Ⅳ. 결론Ⅰ. 서론전 근대사회의 교육이란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전유물 이었으나, 현대 사회에서의 교육이란 의무교육의 확대를 통한 배울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평등한 교육으로 변모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교육의 확대와 평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더 나은 교육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여 간다. 물론 이를 통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흔히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항의한다. 요즘 사회의 한 부면을 예로 들어볼 때 교원평가제 도입을 위한 전교조, 학부모, 정부의 갈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낳은 교육을 위해 실현 되어야 할 정책이 자신이 이권 다툼으로 전략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과연 우리의 교육 정책이 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이처럼 어는 것도 정확한 답이라 할 수 없는 교육에 대해 현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더 나아가 나의 경험을 예로 들어 우리가 원하는 아니 그보다 내가 원하는 학교 교육에 대해 조심스럽게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Ⅱ. 현 교육의 문제점 제기내가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교육문제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문제 또한 그러하지만 그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두 획일화 된 것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획일화란 서열화를 의미하며, 서열화란 대학입시를 의미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방송과 매체를 접해볼 때 갈 수 록 대학은 늘어가고 그래서 정부가 통폐합을 시도는 하고 있지만 갈수록 늘어가는 대학 의로 인해 몇 년 후면 대학 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즉 학생 수 보다 학교가 더 많아지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 대학 조사에서 보아도 알 수 있는데 2006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최신호에서 학생과 교수의 비율, 교수들의 논문 인용수, 연구성과, 외국 학생 입학생수, 외국인 교수진수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정한 '세계 100대 글로벌 대학 명단'에 한국 대학은 한 곳도 없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가 세계의 100위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이 가까운 나라인 일본의 도쿄대가 16위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으며 교토대(29위), 오사카대(57위), 도호쿠대(68위), 나고야대(94위) 등 일본의 5개 대학이, 싱가포르 국립대(36위) 난양기술대 2개가, 홍콩의 홍콩대(69위)와 홍콩차이니스대(96위) 등 홍콩의 2개 대학이 각각 100대 글로벌 대학에 뽑혔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의 학교가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수만 늘려가는 비정상 적인 형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반증해준다.그리고 또한 문제의 심각성은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제대로 취업을 하지 못하는 사회구조를 들 수 있다. 이를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리는데 현 체재는 이를 조장하고 있는 모습으로 굉장히 비경제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도 자신이 왜 대학을 가야하는지 명확한 가치관이 없어지고, 학교 또한 그런 가치관을 쌓도록 가르치지 않는 다는 것이다.이러한 가치관의 형성은 어려서부터의 교육이 잘못 되어져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능이라는 하나의 맹목적인 목표 앞에 이루어지는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언제 어느 때부터 잘 못 되어 온 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수능이라는 것에 목매여 교육 방법 또한 그렇게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에는 먼저 교육내용이 입시 위주로 편중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중, 고등학교 때 중학교 입시 및 고등학교 수능 상관없는 과목들은 이름만 그 시간이었으며 실상은 국, 영, 수 및 그 외에 중심이 되는 과목으로 편중되어 그 시간이 운영되어 공부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학교교육만으로 전문적인 입시 준비를 하기 힘드므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너도 나도 아니면 남들 다 하니까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모님 졸라서 덩달아 학원에 등록하여 학교보다 학원에 또는 수십 아니 수백의 고가의 과외에 학교교육보다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이외에도 학교에서 입시준비를 위해 비중 있는 과목들을 정규교과시간외 거의 타율적으로 보충수업을 시키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입시라는 맹목적인 환경에서 자라고 거기에 맞추어 양성되어 왔던 것이다.이외에도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학생 외 에는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생을 보는 기준을 성적에 두고 바라보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C·A활동의 부재, 즉 저 학년 때야 아직 입시에 대한 부담감이 적으니까 적당히 활동하게 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입시준비를 위해 활동을 줄이거나 다른 교육시간이나 자율학습 등으로 대체하고 있는 실정과, 봉사활동이 성적의 일부로 반영되면서 실질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시간 채우기에 급급한 형식적인 봉사활동으로 변질. 그리고 직접적으로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도 관공서나 기타 기관 관계자의 인맥을 이용해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고 있는 모습에서 보듯이 우리 현 학교 교육의 문제가 보이고 있다Ⅲ. 나의 경험을 통해 본 올바른 학교 교육이란?초등학교 시절의 교육은 다가올 미래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장차 미래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 적합한 교육이 요망되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며, 이를 위해 미래의 모습을 전망하고,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초등교육의 모습을 정립하는 일은 명백히 선행되어야 할 과제이다.그러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의 교육모습은 미래를 주도해 나갈 한국인으로서의 긍지함양, 전인교육, 창의성 배양, 미래대비교육이 아닌 획일적인 수업 운영으로 인해 잘하는 학생들은 할 일 없이 앉아 있게 되고, 못하는 학생들은 수업 결실이 누적되어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되었으며, 긴급하지 않는 일에 대한 교내방송, 수업중의 교사호출 등 수업방해가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는 금ㆍ은ㆍ동상, 후에는 학업우수상이라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러한 미명하에 성적위주의 열등감을 조장하는 교육이었다. 지금은 이러한 것이 많이 시정되었음을 알고 있으나 아직까지 수ㆍ우ㆍ미ㆍ양ㆍ가로 나뉘어 성적을 기록하는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나 내가 생각 했을 때 초등교육은 사회생활에서 기초적으로 필요한 태도 및 기술과 아울러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기초능력을 교과적 지식보다 예술적ㆍ언어적ㆍ사회적 상호작용 기술, 관찰과 분류 등의 과학적 사고력, 정직하고 창의적인 태도 등을 길러 주는데 더 치중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육의 운영과 관련하여서는 수월성ㆍ다양성ㆍ자율성 등의 이념이 중시 되 교육내용과 방법 측면에도 아울러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육체제의 여건과 관련하여서는 교육환경의 인간화와 현대화 및 사회의 교육적 기능이 강조되어야 한다.나의 중학교 시절은 이전의 교육에 비해 많은 변화를 추구하려 시도하였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토요일을 학급회의와 CㆍA 시간으로 편성해 가방 없이 학교 가는 날로 만들었다. 그리고 학급회의 및 학급대표의 전체회의를 통한 학생 자치권을 부여해 주려는 시도 바람직한 시도였다. 물론 “빛 좋은 개살구”로 끝나 안타까운 면이 남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중 2, 3학년으로 학년이 한 학년씩 올라가면서 어쩔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 및 입시위주의 교육은 더욱 심해졌다. 방과 후 자율학습 및, 보충수업 등이 그것이다.또한 중학교는 고등학교 진학의 기로에 서게 된 다. 즉 실업계와 인문계라는 두 가지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중학교의 교육은 자신의 흥미, 적성 및 의지와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인문계를 종용 받는 교육이 자행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면에는 편한 직장의 선호와 공업과 상업, 흔히 말하는 3D업종을 천시하는 우리의 사회 풍토가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이러한 중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직업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및 자신의 적성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도록 각종 검사방법과 학생의 여러 행동 및 흥미 있는 과목의 데이터 수집을 통해 유도 해주어야 하며 이에 걸 맞는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나의 고등학교 교육은 시작부터가 순탄치 못하였다. 흔히 이해찬 세대라 불리는 83년생이 고1에 진학할 때 당시 교육부 장관이던 이해찬이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 또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다.’ 등의 발언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 했었다.이러한 발언으로 인해 당시 학교에서는 입시위주의 교육을 잠시나마 탈피하고 수업보다는 컴퓨터 자격증 및 여러 자격증의 취득을 많이 획득할 수 있도록 권유했었고, 이전까지 관행처럼 되어왔었던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은 사라지고, 방과 후 특기적성교육을 통한 자신의 취미 및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기반도 제공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교육부의 말 바꾸기 및 무책임한 발언으로 학생, 교사, 학부모, 심지어 학교 까지도 많은 혼란을 야기했었다. 그러나 번복되는 교육 행정당국의 교육 정책으로 인해 결국 2학년에 와서는 다시 전과 같은 입시위주의 보충수업 및 자율학습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海山 全基泓)의 義兵活動-目次-1. 序論2. 海山 全基泓에 대하여1) 家系와 成長背景2) 義兵의 倡義背景3. 義兵活動의 展開1) 倡義同盟團의 參謀2) 大東倡義團의 組織3) 湖南同義團의 組織4. 南韓大討伐作戰과 義兵의 解散5. 結論1. 序論한말(韓末) 항일구국의병(抗日救國義兵)은 크게 을미의병(乙未義兵),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의 세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을미년에 일어난 기우만(奇宇萬)이나 최익현(崔益鉉)의 의병운동은 기려(起旅)단계에서 끝나고, 의병부대의 실질적 작전활동으로 전개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반하여 정미년에 일어난 기삼연(奇參衍), 김태원(金泰元), 전기홍(全基泓) 등의 거병(擧兵)은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본격적인 의병활동이었다.6월 이후로 關東과 嶺南지역에서는 의병이 날이 갈수록 熾烈하게 일어나고 있는데오직 湖南에서만 의병이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湖南人의 수치이다.)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지역에서는 이렇다할 의병활동이 없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호남의병이 곳곳에서 봉기(烽起)하였는데 이 가운데 전기홍은 호남의병이 가장 활발히 투쟁했던 1908년 8월부터 1909년 5월까지 독자적으로 조직한 의병부대의 將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 전에는 다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정미 호남의병운동을 파악함에 있어 전기홍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정미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전기홍의 생애와 의병 창의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더불어 의병활동의 전개 과정을 통해 그가 항일 투쟁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 海山 全基泓에 대하여1) 家系와 成長背景사람이란 어차피 한 번 죽고 마는것이니 왜놈과 가까이해서 죽게 될진데 어찌 의병에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全海山陣中日記」1879년 10월 18일 전북 고 원근(遠近)의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전기홍은 성장하면서 학식과 견문을 넓히기 위해 호남 각지를 두루 여행하였는데 이때, 호남의 명유지사(名儒志士)들인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김영엽(金永燁), 오성술(吳聖述) 등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날로 기울어가던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구국의 방책을 모색하는 등 학문과 시국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2) 義兵의 倡義背景1903년 임피(臨陂)의 낙영당(樂英堂)에서 베풀어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강론(講論)은 전기홍에게 매우 깊은 감명을 준 뜻있는 행사였는데, 나라의 정세가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고심(苦心)하던 청년에게 장차 실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예시(豫示)해주는 강론이었다.전기홍은 임피 낙영당의 강회유감(講會有感)에서 “시국(時局)이 매우 어지러운데 장차 닥쳐올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담겨있는 7언절구(七言絶句)를 읊으면서, 당시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서 스스로 취(取)할 길을 모색하였다.최익현의 창의(倡義)는 이러한 그에게 실천의 길을 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최익현이 태인(泰仁)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석용(李錫庸)과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그때는 기병(起兵)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각지에 격문을 돌리던 시기였으며 아직 순창으로 내려가기 전의 일이었다.그러나 전기홍과 이석용은 태인에 머무른지 얼마 안되어 귀향하고 말았다. 최익현을 만났으나 최익현의 의진(義陣)이 전력과 전술면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빈약함을 알고 실망을 느껴 귀향하고 말았다. 이후 최익현은 정읍, 순창, 남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그러나 위정척사의 거두(巨頭)로서 그때까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백성으로부터 추앙(推仰)받던 최익현의 창의는 전기홍으로 하여금 의병항쟁에 투신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3. 義兵活動의 展開1) 倡義同盟團의 參창, 구례, 곡성 등 호남 동부지역 9개 군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도처에서 경찰서, 헌병분파소, 수비대 등의 건물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본군 '토벌대' 와도 여러차례 격전을 벌이는 등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3월 남원 사촌(沙村)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데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웅(大熊)전투에서의 연패로 의진(義陣)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이에 전기홍은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기삼연 의병장이 전사한 뒤, 장성부근에서 활동 중이던 김태원과 합류하기로 하고 이석용과 결별하였다. 그러나 전기홍이 장성에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태원이 광주 어등산(魚等山)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 후였다.기삼연에 이어 김태원 의병장 마저 순국하게 되자 김태원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曺京煥)이 의진의 일부를 거두어 진세(陣勢)를 확장하고 있었고, 오성술(吳聖述)이 흩어진 의병을 규합,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다. 전기홍이 오성술의 의진에 참여하여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일시적으로 의진을 정비하고 있을 때, 8척의 헌헌장부(軒軒丈夫)인 정원집(鄭元執)이 고종황제의 조칙(詔勅)을 휴대하고 수십 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전기홍을 찾아왔다. 정원집은 시위대 참위 출신으로 일찍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규탄하다가 국사범(國事犯)으로 몰려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를 탈출했던 것이다.2) 大東倡義團의 組織전기홍은 오성술이 강권(强勸)해 온 의장(義將)을 고사해 오던 터였지만, 정원집이 이끄는 해산 군인들이 합세, 의병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전기홍은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1908년 7월 25일에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였다.전기홍의 의병 정신은 가장 중요시한 문제가 대민관계였다. 그는 우선 민폐(民弊)를 근절하여 민생을 안정시켜야 항일 투쟁이 가능하며,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만이 국권회복의 첩경(捷徑)이라고 판단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먼저, 일본의 사주를 받아 우리 백성을 착취하는 토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의진이 해체될 때까지 10여 개월 동안 일제 군경과 70여 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이중 15회의 조우전(遭遇戰) 가운데 가장 치열하면서도 큰 전과를 올린 작전은 광주 대치전투(大峙戰鬪)를 꼽을 수 있고, 이와 반대로 고전(苦戰)한 싸움으로는 함평 석문전투(石門戰鬪)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동단의 활동지역은 호남 서남부의 곡창지대인 함평, 나주, 영광, 장성, 광주 등지였고 그 밖에도 장흥, 순창, 무안, 고창, 화순, 담양 등지에 이르기까지 활동영역으로 삼았다.)*전기홍의 의진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 외에도 부근에서 활약하던 심남일, 조경환, 김영엽, 김원국, 박경욱 등의 의병부대와 자주 연합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40~100여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15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총 500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누어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필요시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이다.3) 湖南同義團의 組織대동창의단의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인 1908년 겨울에, 전기홍은 심남일, 김영엽, 오성술 등의 의병장과 함께 수차례에 걸쳐 호남의병 연합체 결성을 상의한 끝에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전기홍은 여러 의병장들의 추대(推戴)를 받아 동단의 의병대장에 선임되었다.이 호남동의단의 의병장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전라남북도 전역을 망라하고 있었으며 전기홍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본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지방관, 일본의 위세를 믿고 횡포하던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의 횡포를 징계했고 세금징수원을 위협하여 친일 내각의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대신에, 면장이나 동장을 시켜 마을마다 군수전(軍需錢)을 배정하되 도세(道稅)로서 공평하게 가산(家産)에 따라 연패를 당한 뒤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이에 전기홍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이동을 결심하고 새로운 항전(抗戰) 기지를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하자고 권고하였으나, 가족의 생계문제 등 많은 난관이 있어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그는 제부장(諸部將)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듣자하니 만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데 원컨대 여러분도 나와 같이 만주로 가자”고 권(權)하였으나 효과(效果)를 거두지 못하였고, 더구나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당도하자 전기홍은 사세가 다했음을 판단하고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여, 동년 5월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박영근(朴永根)에게 넘겨주고 후사를 도모하고자 했다.그러나 예전 그의 의병에 출입하던 조두환(曺斗煥)이란 변절자의 밀고(密告)로 1909년 말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그가 전라도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으므로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변절(變節)할 것을 종용(慫慂)하다가 끝까지 굴하지 않자, 1910년 7월 18일 사형 선고를 내려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5. 結論지금까지 시대적 상황을 전제로 한 전기홍의 생애와 의병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전기홍은 호남지방 의병부대의 핵심이었던 대동창의단과 호남동의단을 조직하고, 대장이 되어 호남의병을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호남의병과 다른 지역 의병과의 유기적인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것은 한계라 할 수 있다.그의 창의(倡義) 목적인 구국항일투쟁(救國抗日鬪爭)은 비록 승리로 이끌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제국주의 일제의 침략에 대한 민족의 항쟁사(抗爭史)를 빛나게 하는 데에는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남긴 구국항일투쟁은 정미 호남의병운동의 성과(成果)와 의의(意심어줌.
Ⅰ.서론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660년의 일이 아니었다.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당하고 의자왕이 항복을 했다고 하지만, 백제 유민들이 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부흥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백제유민들은 무너진 백제왕조의 부흥을 위해 활발하게 부흥운동을 전개 하였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부흥운동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였다. 부흥운동군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백제의 이름은 역사 속에 지속되었던 것이다.백제의 멸망으로 당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겨루던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멸망에 이르렀다. 일본열도의 왜는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백제의 멸망과 함께 새로운 국제질서 내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왜로 건너간 수많은 백제인들은 일본고대의 정치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이렇듯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던 백제의 멸망, 그리고 그 복구 움직임의 중심인 백제부흥운동, 여기서는 부흥운동에 참여한 백제유민들은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를 살피기 위해 백제멸망 후 유민의 동향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고, 이들 백제유민들이 부흥운동에 참여하게 된 직간접적인 원인 즉, 백제 부흥운동의 발생 배경과 원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전개과정및 부흥운동이 갖는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Ⅱ. 본론1. 백제유민의 동향백제멸망 후 유민의 동향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전쟁포로가 되거나 나당연합군에 투항하여 당과 신라에 끌려가 부류이고, 둘째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해외로 달아난 부류이다. 이중 일부는 고구려로 달아났고, 일부는 왜로 달아나 정치적 망명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는 백제고지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대부분의 백제유민들이었다.이들 백제 유민들은 이후 전개된 부흥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부류도 있고, 부흥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흥운동 자체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유민들이만 호 보다도 많았다.나당연합군의 백제침략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당하고 난 이후에 국왕 대신들을 비롯한 지배계급 1만 3000여 명이 당으로 끌려가고, 일부는 신라에 투항하였고, 일부는 외국으로 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유민들은 백제고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당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비롯한 백제지역의 일부만을 점령하였고, 대부분의 백제고지는 고스란히 백제유민들의 손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군 역시 사비성에 留 陣한 당군과 마찬가지로 백제고지를 점령하지 못하였고, 단지 炭峴과 황산벌, 기벌포를 거쳐 사비성에 이르는 백제 공격로상에 위치하였던 백제의 일부 거점만을 攻陷시켰을 뿐이었다. 나당연합군이 점령한 사비도성 등 일부 거점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地方郡城들은 여전히 백제 지방세역들의 영향권에 들어있었고, 風達郡長 黑齒常之와 같은 지방군장들이 일시 당군에 투항하기도 했으나 곧 자기의 지방세력을 거느리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2. 부흥운동의 발생 배경과 원인백제 멸망 당시 백제군의 동원 가능한 전력은 중앙군과 5개 方城의 병력을 합하면 최소 5만 명 이상이었다. 거기에다 지방의 郡城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더하면 훨씬 많은 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가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입은 전력의 손실은 황산벌 싸움에서 전사란 계백의 5천 결사대와 당군의 기벌포 상륙 방어전에서 죽은 수천 명, 사비성 밖 싸움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 1만 명 등에 사비성 싸움에서 손실된 전력을 합쳐도 대략 2만 명 정도로 추청할 수 있다. 결국 백제군이 입은 전력의 손실은 매우 큰 것이었지만 잔존 전력 또한 만만치 않게 남아있었다. 나당군과 직접 전투를 치르지 않은 지방의 군성들은 큰 피해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신라군은 계백이 거느린 5천 결사대와 치열한 전투를 치른 황산벌 근처에 있는 이례성마저도 사비성함락 이후에야 겨우 점령하였다. 신라군은 사비성으로의 공격로 상에 있던 백제의 여러 성들도 미처 다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사비성만을 공략하여 료 1,2,3의 흑치상지 열전에서 보듯이 점령군인 당군은 늙은 왕인 의자왕을 가두고 丁壯者를 많이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한 흑치상지를 비롯한 백제의 군장들은 本部로 달아나 흩어진 유민들과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아 任存山에 柵을 만들어 스스로 지키고자 하였다.둘째는 당군이 의자왕과 군신들을 사로잡아 가두고 핍박하며, 결국에는 백제를 신라에 넘겨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유민들은 몹시 성을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자왕이 항복하였을 때의 비참한 모습에서 의분을 느껴 부흥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셋째로, 직접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방의 군장들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부흥운동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의자왕의 항복과 더불어 당군에 항복의 예를 갖추었으나. 이후 흑치상지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흥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이상을 통해 볼 때, 나당군의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시작된 백제유민들의 봉기는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끊어진 사직을 다시 잇겠다는 명분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 아래 백제유민들은 부흥운동군으로 조직화되었고 일본에 가있던 故王子 豊을 귀국시켜 백제왕으로 옹립하게 되었던 것이다.3. 부흥운동의 전개 및 좌절泗泌城을 수호하던 百濟의 貴族層이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데 반하여, 지방을 지키고 있던 귀족 및 유민들은 분연히 일어나서 都城을 탈환하고 王統을 잇게 하기 위하여 4年에 걸친 復興運動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은 高句麗와 倭가 백제의 國權回復을 위하여 출동하여 국제적인 양상을 띄게 되었다.백제의 부흥운동은 滅亡(660年 7月 18日)직후부터 시작되어, 마지막으로 遲受信이 抗拒하던 任存城 함락(663年 11月)될 때까지 볼 수 있다.여기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좌평 정무등의 백제 부흥 운동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그와는 반대로 任存城에서 결집한 福信과 道琛 및 黑齒 있는 것은 백제부흥군에 대한 토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의자왕 등 구심점을 제거하여 부흥운동을 조기에 진압시키려는 고도의 전술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복신은 10月에 佐平 貴智 등을 倭에 보내어 당이 의자왕 등 군신을 잡아갔음을 알리고 왜군의 출병과 함께 당시 왜에 머물고 있던 왕자 풍을 맞이하여 국왕으로 삼겠다고 하여 왕자 풍의 귀국을 요청하게 되었다.나?당군의 공격을 물리쳐 기세를 떨치게 된 부흥군은 사비남령 등 사비부근의 4고에 성을 쌓고 곧 사비성을 포위하여, 이들 나?당진수군을 공격하였으니, 이때 20여성이 이에 호응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나?당진수군은 사비성만을 고수하고 있을 뿐 여타지역에 대하여서는 나?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당시 삼년산성에 머물고 있었던 무열왕은 이와 같은 부흥군의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구하고자 10月 9日 친히 태자와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여 10月 18日에 이례성을 함락시키니 부흥군에 호은하던 20여성이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열왕은 계속 요충지를 점령하여 나?당 연합군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백제 부흥군의 이 사비성 공격은 나?당 연합군을 한 때 위기에 빠뜨렸으나 호응하고 있던 20여성이 쉽게 무너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 조직적인 항거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백제 유민의 주된 활동지역도 임존성과 두양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錦江 서쪽 지역에 국한되었던 것 같다.661년 초에 부흥군은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재차 사비성의 공격에 나섰으며 이에 당은 부임 직후에 병사한 왕문를 대신하여 유인궤를 파견하여 신라군과 같이 이를 구원토록 하였다.이에 백제 부흥군은 본진을 임존성에서 주류성으로 옮기게 된 것은, 주류성이 금강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금강을 통하여 사비 및 웅진으로 유입되는 당의 원군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으며, 또한 수로를 이용하여 왜 및고구려와의 통교를 더욱 긴밀하게 전개하기 위함이다.그럼 두 번째 거점이 된 주류성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현장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한산지방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에 들어 부안에 위치했다는 설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반증되고 있어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661년 1월에 일본에 머물던 왕자 풍을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이 옹립하여 주류성을 거점으로 백제왕의 이름으로 항전을 시작했다. 부흥군은 부여를 완전 포위하고 연합군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으며 신라 가 상당 규모의 원군을 보내 반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패퇴하였다. 한편 백제 겸달풍의 군장으로 있던 흑치상지가 부여 함락 당시에 패전병력 3만여 를 재편성하여 3백여성을 수복하고 복신과 연결하여 661년 2월에는 백제의 서북부가 모두 백제왕군의 세력권내에 들게 되었다. 웅진도독으로 임명된 검교대방 주자사 유인궤가 3월에 도착하여 백제군에 대한 공격채비를 차리자 백제군은 백강에서 맞아 싸웠으나, 1만여의 전사자 만 낸 채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의 전세는 아직도 유리하게 전개됐으며 공주와 부여는 고립된 상태에 있었다. 또한 신라에 불리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말갈과 손잡고 신라 영토인 북한산성을 공격하니 백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가 간접적으로나마 응원을 하는 결과가 됐다. 더구나 당이 고구려까지 칠 마음을 먹고 신라에 식량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서나 신라는 어려움에 빠지게 됐다. 백제군은 내사 지성 등 대전 방면의 모든 성을 점령하여 공주. 부여 방면으로 보급로를 차단하여 버렸다. 이러한 눈부신 백제군의 활동도 만 2년이 지난 662년 7월부터는 퇴색의 조 짐이 보여 전력이 약화되었다. 평양(고구려)을 쳤던 당군이 다음 기회를 도모하고 철수함에 따라 김유신 등의 신라군이 본국에 돌아왔고, 백제군 내에 서는 자체 반란이 일어나 승려 도침은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은 다시 풍 왕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이 웅진도독 유인궤가 본국에 원병 을 청하여 7월에 당고종은 우위아장군 손인사를 웅진도행 군총관으로 삼아 7천의 군사를 보내 지원하게 했으며, 유인궤는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전공을 세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