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관념 교육은 필요한가?루소의 「에밀」, ‘아동기’ 부분을 읽고Ⅰ. 들어가며Ⅱ. 지식과 관념 교육을 거부하는「에밀」의 아동기Ⅲ. 지식과 관념 교육① 독서 교육을 중심으로② 신체와 감각 훈련 VS. 지식과 관념 교육Ⅳ. 나오며Ⅴ. 참고문헌Ⅰ. 들어가며지난 5월 수현(가명·5)이는 눈을 반복적으로 깜빡이는 틱 장애가 심해져 소아청소년정신과를 찾았다. 눈을 깜빡이는 버릇은 지난해 말 잠실로 이사해 영어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겼다. 수현이는 상담 과정에서 자주 “유치원이 싫고 선생님도 친구들도 싫다”라며 유치원 스트레스를 호소했다.(후략)- 주간동아, 11월 11일자 기사에서 발췌지금의 대학생 세대들은 겪어본 적이 없을 영어 유치원 이야기 이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영어 유치원이 유아들의 스트레스의 주범이라고 한다. “친구들이랑 나가서 신나게 놀고 싶은데 방학 때 학원이 많아가지고 좀 힘들어요.”“오후 1시에 학원 와서 영어, 수학 특강 같은 거 한 다음에 저녁 먹고 태권도 하러 가요.”) 초등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요즘의 어린이들에게는 겨울 방학이라고 늦잠과 텔레비전, 여행 등을 꿈꿀 수 있는 현실은 적용되지 않는다.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의 어학 교육을 시키고, 수준 높은 독서와 논술 교육을 통해 사고력 신장을 바탕으로, 서울대와 같은 명문대에 한 발짝 먼저 다가서려고 한다. 혹은, 아이비리그에 합격한 학생이나 부모들의 수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볼 때, 서울대보다 더 뛰어난 세계의 순위권 대학을 노릴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그런데 미래의 교육자인 사범대생들이 교육학의 고전으로 많이 읽고 공부하는 루소의 「에밀」은 유아나 아동기의 교육에 대해 현재의 교육 세태와는 전혀 다른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에밀」에서 루소는 아동기에 도덕, 지식, 관념, 독서, 어학 교육 등을 전면 거부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루소의 말처럼 아동기의 지식 교육은 불필요한 것인가? 루소의 말처럼 도덕적인 관념이나 독서를 통한 지식 습득, 혹은 어학 교육 등은 아동들에게 진정으로 이해될 수 없는 교육 활동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아동들에게 전혀 무의미한 활동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먼저 루소는 「에밀」을 통해 어떤 근거로 도덕, 관념, 독서, 어학 교육 등을 거부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Ⅱ. 지식과 관념 교육을 거부하는「에밀」의 아동기루소는 「에밀」의 아동기 부분의 저술을 통해 크게 자연 교육 방법, 소극적 교육, 신체 및 감각의 훈련의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먼저 자연 교육 방법이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이 아이들의 본성 자체가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다. 아이 시절에는 아이 시절의 본능을 따라서 놀이를 통해 기쁨을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동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존하게 하여 행동의 결과를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루소가 말하는 자연에 따르는 교육이다.자연에 따르는 교육은 때로는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깥에서 눈싸움을 하다가 아이의 손이 얼었다면 아이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손을 녹이게 한다면 아이는 구속을 체험하게 된다. 루소는 여기서 자유를 빼앗긴 아이와, 고통을 체험하는 대신 자유를 느끼며 노는 아이 중에 행복한 아이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이어서 루소는 자연주의 교육관과 연관지어 소극적 교육을 주장한다. 이성이 생기기 이전까지는 선을 실현하기 어렵고, 다만 12세 이전까지의 시기에는 악으로부터 보호하여 악덕이 생기지 않게 방지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교육이 행해져야 한다. 아동의 타고난 재능과 성격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게 시간을 소비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가 설교와 교훈을 일삼으면서 열 마디 스무 마디 이야기해 보아도 아동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지식을 주려고 하지 말고 단순하게 한정되어야 한다.특히 루소는 어학 교육의 무용성을 강조한다. 이성이라는 것은 만국 공통의 것이지만, 개개인의 정신과 사상은 언어에 기초하여 형성되고, 각 나라 특유의 어법에 따라 차이가 생기게 된다. 아동들은 그가 속한 사회의 풍속을 경험하면서 한 가지 언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데, 관념을 모르는 아동들이 만약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아동기에 배운다면 관념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사한다는 것은 정신에 기초하지 못한 일시적인 기억의 단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아동들은 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신에 주변의 사물을 통해서 의미 있는 자신의 지식 창고를 형성할 수 있고, 책을 읽기 보다는 실제로 듣고, 보는 것을 통해 기억이 풍부해질 수 있다. 독서는 지식을 쌓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교훈을 주기에도 무의미한 것이다. 어떠한 우화를 통해서 교훈을 주어 아이를 도덕적으로 훈련하고자 하지만, 아동은 관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독서가 유용하게 될 때 책을 읽게 해야지, 12세 이전에 책을 읽히는 것은 진저리나게 만드는 것일 뿐이라고 루소는 말한다.루소는 5세부터 12세 까지의 아동기에 신체 단련과 감각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아동들은 외부의 사물과 자신의 감각과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에 이성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최초로 계발되는 이성은 감각적 이성이다. 이러한 감각적 이성에 기초하여 지적 이성이 형성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동기에 책으로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남의 이성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특히 감각 훈련 중에서 촉각을 따로 계발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낮 시간에는 시각에 의존하지만, 어둠이 찾아오는 밤이 되면 맹인보다 반 정도의 장님이 되는 것이 인간이다. 이성으로 공포심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둠에 익숙하게 만드는 습성을 길러주는 것이 오히려 유용하다.이러한 자연에 따른 교육, 교사의 역할은 줄어들고 아이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소극적 교육, 그리고 신체와 감각을 단련하는 교육들을 거친 아동들은 감각을 통한 경험에 의해 단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러한 관념들이 모여서 복합 관념을 형성하게 되어 이성을 발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루소는 충분히 이성이 발현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 에밀의 아동기는 자연이 그에게 준 것을 아무것도 잃게 하지 않는 동시에 행복하고 자유로웠다고 서술하고 있다.Ⅲ. 지식과 관념 교육① 독서 교육을 중심으로루소가 「에밀」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자연에 따른 교육, 소극적인 교육, 신체와 감각을 훈련시키는 교육은 오늘날의 교육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루소의 주장과 반대로 지식과 관념을 기르는 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루소와 달리 지식과 관념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러한 교육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지식과 관념을 쌓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강조되는 독서 교육을 통하여 어떤 논리로 지식과 관념 교육이 강조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시기별로 존재하는 발달과업)에 근거하여 아동 중기(5, 6세에서 12, 13세까지)에는 신체적 기술 학습과 더불어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의 기본 기술 익힘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개념학습, 그리고 양심, 도덕, 가치 체계와 사회 집단과 제도에 대한 태도의 발달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발달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지식 습득의 차원에서나, 앞으로 한 평생 누릴 수 있는 생애 교육적 측면의 경험을 주기 위해서, 지식과 관념 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자들은 독서 교육을 중요시한다. 즉, 아동기의 독서 교육을 통하여 독서를 통해 얻은 내용을 실생활에 응용하도록 하고, 더불어 책 읽는 습관을 몸에 붙여주기 위하여 독서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다.특히 루소가 「에밀」에서 아동기에 우화를 통해 교훈을 심어주는 독서 교육의 무용성을 강조했던 것과 정반대로, 현대의 독서교육자들은 아동기의 독서를 통해 등장인물의 행동을 평가하게 하고, 선과 악, 진실과 허위, 현명과 우둔 등의 도덕적 가치관을 명백히 하여 아동들의 도덕성을 발달시키고, 옳은 모델을 발견하게 하여 도덕적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고자 한다. 또, 아동기의 끝 무렵에 가서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역사, 문학, 공상과학소설을 읽게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독서 교육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궁극적으로 인간 형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② 신체와 감각 훈련 VS. 지식과 관념 교육루소의 「에밀」에서의 교육관과 현대에 행해지고 있는 교육 사이에서는 큰 거리감이 존재한다. 교육 방법에 있어서 아동기에 신체와 감각을 훈련시키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지식과 관념 위주의 교육을 시키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 하나를 강조하고, 하나를 부정하는 교육 방법, 즉, 신체와 감각 훈련만이 필요하고 지식과 관념 교육을 부정하는 것, 그 반대도 역시 현대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선생: 그런 짓 하면 안돼요.아이: 왜 안됩니까?선생: 그건 나쁜거니까.아이: 나쁘다니요. 나쁘다는 건 뭔데요.선생: 하면 안되는 거죠.아이: 안되는 것을 하면 왜 나쁘죠?선생: 말 안들으면 벌을 받아요.아이: 몰래 하면 되죠.선생: 누군가가 보게 되요.아이: 숨어서 하죠.선생: 사람들은 알게 되죠.아이: 거짓말을 하죠.선생: 거짓말은 안되요.아이: 왜 거짓말은 안되나요.선생: 그것은 나쁘니까.다음은 루소가 「에밀」에서 이성에 호소해서 아이를 설득시키는 도덕 교육을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예시로 들은 대화문이다.루소는 이런 상황에서 말과 이성에 의한 것보다는 경험과 그 결과를 통해 그 행동의 나쁜 점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육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제시문과 다르게 아이에게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도 당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간단한 역지사지의 자세를 먼저 설명해준다면 아이가 수긍하는 상황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면책- 히로히토의 천황으로서의 전쟁 책임과 그 면책에 관하여1. 들어가며1-1. 일본의 황실1-2. 히로히토2.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면책2-1.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2-2. 히로히토의 면책3. 나오며3-1. 히로히토와 전후 일본3-2. 후기4. 참고문헌 및 사이트1. 들어가며1-1. 일본의 황실일본의 한적한 동네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었다. 자전거 없이는 생활이 불편한 한적한 시골인 그 곳에서 어느 날 자전거 통행을 하지 못하게 막는 날이 있었다. 천황 부부가 그 곳을 방문한다는 이유였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길거리에 나와서 일장기를 흔들며 천황 부부를 환영하였다. 그렇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에는 아직도 황실이 존재한다. 일본 방송에서는 왕세자의 딸인 아이코 공주가 유치원을 졸업했다는 것에서부터 영화를 관람했다는 등의 신변잡기가 뉴스로 다루어질 정도로 황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이 크다.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황실은 아직까지도 존속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점에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제까지 배워왔던 짧은 지식으로 생각해보자면,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이 복고되었으며, 그러한 천황 체제 속에서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심지어 연합국에 의하여 패전을 겪었기 때문에 패전 국가로서 일본의 황실은 책임으로 붕괴되어야 마땅했을텐데 여전히 건재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의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재위하였던 히로히토(쇼와천황)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이 생기게 되었다.1-2. 히로히토일본의 제124대 왕(재위 1926∼1989). 중일전쟁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아라히토가미[現人神]로서의 신격을 부정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하여 일본국 헌법제정과 함께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위는 히로히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이 글은 히로히토에 대하여 일본의 팽창주의 역사를 체험하였다고 설명명에서도 일본의 팽창에 대하여 일본 천황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면, 일단 일본 제국주의로 싸잡아서 일본 황실을 비난하기에 앞서 히로히토에 대하여 명확히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먼저 히로히토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책임 유무를 밝혀, 책임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지 않았는지, 책임을 지지 않고 처벌 또한 받지 않은 것인지, 책임이 있음에도 어떻게 천황제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인지에 초점을 둘 것이다.2.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면책2-1.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일본 문화에 대하여 널리 알려진 책인 「국화와 칼」이 있다. 여기서 국화는 평화를 상징하고 칼은 전쟁을 상징하는데, 메이지 천황 이전의 일본의 지배가 막부 쇼군의 ‘칼’에 의한 것이었다면, 메이지, 다이쇼, 쇼와, 이 셋은 국화와 칼을 하나로 통합하여 육해군의 통수권을 가지게 된 천황들이었다.) 제국주의 일본 하에서 천황들은 어떤 지배자로서 역할하였는지 그에 따른 책임을 따져보고자 한다면, 1889년 메이지 천황이 제정·공포한 메이지헌법을 살펴보아야 한다. 메이지헌법이 입헌군주제에 입각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른다면 히로히토의 책임은 가벼워 질 수 있고, 따라서 면책의 정당화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이지헌법에서의 입헌군주제는 내각의 보필에 의한 규정만 있을 뿐, 오히려 천황을 신성불가침한 국가원수이자 군대의 최고 통솔자로 지정하고 있어서, 입헌군주라기 보다는 절대군주에 가까운 천황상을 제시하고 있다.) 더군다나 1935년 도쿄대 교수였던 미노베 다츠키치가 주장한 ‘천황도 입헌군주로서 헌법의 규정에 의한 국가기관’이라는 천황기관설이 군부와 우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천황주권설’이 의회의 만장일치 결의로 헌법개정)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천황은 헌법상으로도 면책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945년 7월에 독일의 포츠담에서 논의된 일본 항복 권고와 전후 일본 처리 문제를 담은 포츠담선언 도조 히데키와 군부의 압력에 서명한 천황의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군국주의자들은 결정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러나 절대군주로서 천황은 분명히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29년의 쇼와 천황은 당시 다나카 기이치 수상이 장작림 사건)을 얼버무리려 하던 것을 질책하여 내각을 총 사퇴)시키는 권력 행사를 보여주었다. 또한 만주사변 당시 일본의 관동군은 만주국을 세우기 위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에게 만주로 복귀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비록 괴뢰 황제이기는 하나 푸이에게 관을 씌우기 위해서는 천황의 승낙이 필요함이 분명하다. 만주사변과 관련한 일본의 공식적인 태도는 천황이 관동군에 의해 철저히 기만을 당했지만, 일단 사태가 진전된 다음에 악화 방지와 장교들을 자제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주모자들을 좌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육군 고위직으로 승진시킨 점 등)은, 천황이 군부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넘어서 오히려 지지하는 듯 보이는 부분이다.개전과 종전에 관련하여 히로히토의 책임도 지적되어야 한다.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과 천황의 동생은 1941년 12월 개전 재가가 없었더라면 태평양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다고 술회한다. ) 또한 고노에가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이후 1945년 2월 항복을 권고하였는데, 천황은 군부를 의식하여 한 번 전과를 올려야만 군부에게 종전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 종전을 결정하였더라면 3월의 도쿄 대공습, 4월의 오키나와 격전을 비롯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를 심판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는 ‘침략적 전쟁 또는 국제법 위반의 전쟁을 도모한 계획 및 공모에 가담한 지도자, 조직책, 선동자, 공범자’를 비롯한 여러 기소 항목 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천황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로히토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1947년 12월 31일 어떠하였는가? 1945년 6월 미국의 갤럽 조사에서 77%가 어떠한 형태로든 천황의 처벌을 요구했고, 중국공산당, 국민당, 오스트레일리아 등 연합국의 각 정부 역시 천황이 육해군의 통수권자로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천황제의 폐지라는 극단적인 주장 일부를 비롯하여 천황제는 유지하되 히로히토의 퇴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천황의 최측근이었던 기도 고이치를 비롯하여 도쿄대학 총장 등의 지식인으로부터 나오기도 하였다.) 일본 내에서 조차도 천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의가 다분히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연합국의 최선의 이익이 무엇이었길래, 천황의 면책이 의심의 여지없이 결정된 것인가?2-2. 히로히토의 면책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더글라스 맥아더가 일본 군정의 최고 사령부로, 맥아더는 일본의 패전 이후 1951년까지 히로히토와 11차례 회담을 가졌다. 일본 국민들은 천황과 개인적으로 회담을 가지는 맥아더를 전능한 권력자의 이미지로 보았지만, 영국이나 소련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권한을 “계속적인 권한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4대국 위원회가 설치된다면 맥아더 원수가 총사령부를 사임할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맥아더는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권력자로서 점령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히로히토라는 권위가 필요하였다.) 1945년 말에는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대일관리의 최고결정기관으로 극동위원회 설치가 결정 되었고, 이듬해 2월 26일에는 발족하기로 되었다. 따라서 맥아더는 모스크바 회의 전날 종교의 자유, 군국주의의 배제, 국가 신토의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국가와 신토의 분리 지령’을 내려 천황제에서 군국주의의 색채를 지워 천황을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는 데 용이하게 만들었다. 또한 1946년 1월 1일에는 ‘신일본 건설에 관한 조서’에 히로히토가 현인신(現人神)임을 부정하는 ‘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평가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방위하는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고, 이에 맥아더 역시 미군의 장기 주둔이 필요하다는 의사표명을 하였다. 미국의 일본 주둔에 대하여 히로히토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심이 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951년 4월 15일 맥아더와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11차 회담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 중 천황의 재판을 주장하는 것은 소련과 중공 뿐이라는 맥아더의 말에, 히로히토는 공산주의 사상의 당연한 결과이며, 이는 일본의 안정을 파괴하고 국내 치안을 어지렵혀 혁명을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화답한다.) 전범 재판의 책임 문제가 공산주의로 귀결되는 대목은 미일양국의 이해관계가 공산주의에서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3. 나오며3-1. 히로히토와 전후 일본히로히토는 그것이 실질적인 지도자였든 형식적인 지도자였든, 전쟁을 수행했던 나라의 총 통수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제 유지와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는 일 등을 목적으로 모든 책임은 군국주의를 추구하던 군부의 탓으로 몰아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어떠한 책임도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본의 군국주의로 인하여 피해를 본 아시아 민중들에게 사과의 말 한마디 없는 일본 왕실이 이어져 온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아키히토 일왕은 식민지배와 과거사에 대하여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재판에도 회부되지 않았으니 어떠한 책임도 없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옳지만, 피해자인 한국인으로서는 모호한 사과의 말 한마디가 더 분통을 터트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오키나와 관련 문제도 있다. 아직까지도 오키나와 섬의 20%는 미군이 차지하고 있으며, 미군 주둔에 의한 피해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히로히토는 오키나와 군사 점령을 미군에게 25년에서 50년 정도의 대여 체제로 가자는 ‘오키나와 메시지’의 발표를 통해 일본 헌법 9조의 ‘전쟁 포기 조항’으로 오는 불안
‘환경 차이가 다양화를 빚어낸 모델 폴리네시아’를 읽고역사에서는 세계 4대문명 중에서 메소포타미아문명은 현세적이지만 이집트문명은 내세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문명은 여러 공통적 특징이 존재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처럼 성격적 특성이 발생하는 이유를 그 환경적 원인, 즉 두 문명이 발원한 곳의 지형의 다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요컨대, 메소포타미아는 개방적 지형이었기 때문에 외세의 침략이 빈번했고, 따라서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생관을 갖게 되었다. 반면에 이집트는 바다와 사막과 고원으로 가로막힌 폐쇄적 지형 속에서 외세의 침략 없이 오랜 세월 그 문명을 유지했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내세적인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총, 균, 쇠」2장인 ‘환경 차이가 다양화를 빚어낸 모델 폴리네시아’에서 작가의 논지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농경민이었던 폴리네시아인의 후손이었고, 마오리족의 일부가 채텀제도로 이동하여 모리오리족이 되었다고 한다. 농경민이었던 마오리족은 수렵채집민이었던 모리오리족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섬을 점령하였다. 작가는 폴리네시아 여러 섬의 다양한 환경적 변수의 연구를 통해, 특히 기후, 지질유형, 해양자원, 면적, 지형적 분열, 고립성의 연구, 같은 조상에게서 유래하였더라도 환경적 차이가 부족의 특성의 차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폴리네시아의 구체적 예를 들면서, 여러 환경의 요인에 의해 집약 농업을 하는 농경 지역일수록 인구밀도가 높고, 인구규모가 크며, 이로써 잉여생산이 가능해지자 계급이 분화되고, 정치적 조직이 더 발달되었다고 한다. 반면 모리오리족과 같이 수렵채집을 하는 사회는 오히려 점점 더 단순한 기술을 가지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후퇴하게 되었다. 따라서 결국 평화를 추구하는 모리오리족과 ‘관습대로 섬을 점령했을 뿐’이라는 마오리족의 서로 다른 특성이 두 부족 간의 충돌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나 역시 2장을 읽고 작가의 논지에 상당 부분 동조하며, 앞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차이를 유발하는 원인을 생각할 때, 인간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이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폴리네시아의 예를 통해 나타낸 부족성이라는 특성은 전세계적 차원에서는 민족성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여기서 잠시 우리나라 민족성의 예를 한 가지 들어보면, 우리나라는 침략을 하지 않는 민족이라고 한다. 내가 이 점에 대해 조심스레 해 본 추측은, 우리 민족은 마오리족과 같이 온난한 농경 기후 지대의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라는 대국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기후라는 자연환경적 조건보다 주변 국가와의 대외관계가 오히려 우리의 민족성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총, 균, 쇠」의 작가가 마지막에 강조했듯이, 폴리네시아의 예를 통해 전세계 인류적 다양성도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정도에 주목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연환경적 차이가 주는 결정론에 너무 큰 우위를 두게 된다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결정권을 너무 도외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결정권에도 상당 부분 가능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둘의 상호 적절한 조합이 전세계 인류의 다양성 분석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베네딕트 앤더슨Ⅰ. 들어가기 전에? 민족주의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 민족주의의 기원 대한 일반적인 견해세계사적으로 보면, 민족주의가 세계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은 18세기 초였으나, 영국은 이보다 빨라서 17세기에 이미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과학적 정신을 발전시켜,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국가와 국토를 국민의 것으로 만드는 혁명적인 정치이론을 창안하였고, 17세기의 청교도혁명을 통하여 최초로 실천하였다. 이것은 미국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쳐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투쟁하는 가운데 민족주의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18세기의 프랑스혁명(1789)에서이다. 군주의 절대권을 부인하는 한편, 성직자·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자유·평등·박애'의 기치아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무력간섭이 시작되자, 애국심과 민족주의로 이를 완전히 물리쳤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정부와 귀족들은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그들의 권위를 지켰고 혁명을 방지하는 방패로 삼았다.19세기 말, 제국주의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민족주의의 반동화는 점차 심화되어 갔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테두리를 무너뜨리고 다른 민족을 한 국가의 지배하에 두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파시즘이 나타나, 민족주의가 파시즘의 노예가 된 단계에서 극에 달하였다. 제국주의 제국에 의하여 핍박받고 있던 식민지에서는 새로운 민족주의가 등장하였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먼저 동부아시아에, 이어서 동부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로, 서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로 퍼져 나갔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 중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말하였으나, 그 프롤레타리아가 아이러니하게도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하여 그들의 조국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소련을 그들만의 조국이 아니라 온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소련 한 나라뿐이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점차 늘어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의하면, 사회주의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원리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지 민족주의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오직 상대국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하고, 내정간섭 없는 평등의 입장에서 원조를 제공하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전근대적 농업국에 머물던 후진국도 더불어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해 가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Ⅱ. ?상상의 공동체? 들여다보기민족에 대해 민족주의자들은 '고대성'을 주장하지만, 역사가들은 '근대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작가는 민족을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로 정의한다. 이러한 민족이라는 개념의 등장 이전의 사회는 사람들을 종교공동체와 왕조국가의 문화체계 안으로 묶어주었다. 구체적으로 기독교세계는 라틴어와 순례의식 등을 통해 공동체성원 사이의 무의식적 일관성을 갖게 해주었고, 신에 의한 정통성은 왕조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시켜 주었다.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이 인기있게 된 것으로 인쇄자본주의의 발달을 중요하게 든다. 초기 서적시장이 라틴어를 읽는 광범위하나 얕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했다면, 각자의 지방어를 사용하는 대중들을 향한 서적시장은 훨씬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다양한 개별언어들을 타겟으로 삼게 되었다. 또한 내부 편의상 관료계층들이 사용했던 지방어의 영향까지 겹쳐 라틴어는 점차 쇠퇴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공동체 근간을 흔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근대 민족국가의 구체적 형성이 결코 특정 활자어의 결정적 도래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새로 출현한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순수한 유럽 계통이지만 신대륙에서 출생한 '크리올'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저자는 크리올 공동체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전에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스페인이 방대한 신대륙의 영토를 독립된 행정단위로 분리통치한 점, 그리고 크리올들이 본국이나 다른 식민 행정지의 관리로 부임할 수 없게 한 식민정책과 거기에서 오는 동료의식, 그리고 지역신문의 발행으로 생기는 공동체의식 등의 요인 때문이다.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민족해방운동 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유럽에서는 2세대 종족언어민족주의가 출현한다. 유럽에서는 당시 언어계보학과 문헌학, 지방어 사전과 고전의 지방어로의 번역 출판이 활발하였고, 이는 유럽인들로 하여금 민족의식이 깨어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민족주의의 민족국가, 공화제, 시민권 등의 모형을 모방하여 유럽민족주의도 대중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유럽 내 대중민족주의의 발전은 왕조국가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정책들을 실시하였으며 이것은 관주도민족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왕조들은 처음엔 행정상의 목적으로 특정지방 활자어를 국어로 정착시켰으나,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 이후에는 자신의 영토 내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전통을 강요해 동화시키려 하였다. 이는 러시아와 영국, 일본의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제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에서 발달한 민족주의는 서구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들은 식민지인으로서 근대식 학교제도에의 해 교육받는 동안, 학교에서 만난 다른 식민지인들과 성지 순례의 동지처럼 공동체 의식을 확인한다. 그들은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 안에서 관리로 임용된다. 신생국들은 고유의 언어를 쓰기보다, 식민모국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민족주의를 발명한 것은 한 특정한 언어 자체가 아니라 '활자어'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식민지 민족주의는 이전까지의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를 모방하여 결국 관주도 민족주의의 형태를 띤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노스 컨츄리」1. 영화의 줄거리 소개2. 영화의 법적 쟁점 분석3. 영화 속 주인공들의 법 관념과 태도 분석4. 영화가 청소년들에 미칠 효과4-1. 법학 교육적 측면4-2. 의식, 가치, 태도적 측면1. 영화의 줄거리 소개조시 에임스는 남편의 폭력 때문에 아이 둘, 새미와 캐런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새미와 캐런의 아버지가 다른 것을 비롯해서, 항상 딸이 자신을 실망만 시킨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딸의 귀환을 반기지 않는 것에 비해, 어머니는 딸과 손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미용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친구인 글로리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고, 탄광에서 일하는 글로리에게 여성도 탄광일을 하면 지금 하는 일에 비해 6배나 많은 임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광산은 북부 미네소타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원이었고, 조시의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남성들이 탄광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조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자는 탄광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반대를 하지만, 조시는 두 아이를 키워 나갈 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북부 미네소타의 탄광에 취직하게 된다.성희롱적인 언어와 욕설들이 난무하고, 남성의 성기 모양의 장난감을 도시락에 넣는 등 참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 발생하지만, 탄광의 여자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위해 그런 고초를 감수한다. 조시는 탄광에서 바비 샤프라는 학창 시절의 동급생을 만나고, 여러 번 강간당할 뻔한 위기를 겪지만, 그것에 대해서 항의해도 상사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한다. 동료인 셰리가 간이 화장실에서 남성들의 장난에 오물을 뒤집어 쓰는 수모를 겪자, 조쉬는 피어슨 탄광 회사의 사장을 동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애로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상황 개선을 요구하러 사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사장과 현장 주임을 비롯한 상부의 남성들은 조시에게 사직을 권고한다. 사직을 거부한 조시에게 상부에서는 다른 여자 노동자를 선동하거나 남자를 유혹하는 짓을 하지 말고, 일에나 충실하라고 말한다.마을에서는 조시가 바비 샤프를 비롯한 탄광 노동자를 유혹하는 창녀라고 소문이 나고, 이런 소문 때문에 조시의 아들은 하키부를 관둘 정도로 괴롭힘을 당한다. 또한 여성 노동자의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해 사장에게 갔다온 일로 인해, 남자들로부터는 배신자, 밀고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여자들로부터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 뿐이라는 이유로 외면을 받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탄광 노조 활동을 통해 그나마 여성 권익을 위해 노력하던 글로리는 루게릭병으로 인해 더 이상 탄광에 나가서 일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터 상황 개선을 위해 집단 소송을 결심하는 조시는 친구인 빌 화이트에게 변호를 부탁한다. 처음에 거절하던 그는 조시가 남자가 아닌 스스로에 의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에 감화되어 변호를 맡게 된다. 집단 소송을 위해서는 원고가 3명이 있어야 한다는 판사의 말에, 소송을 꺼리는 여성들 때문에 난항을 겪지만, 소송 과정 중에 조시의 끈기에 감동 받은 사람들에 의해, 특히 바비 샤프가 극적으로 조시의 편으로 돌아선 것 때문에 조시는 재판에서 이길 수 있게 된다.2. 영화의 법적 쟁점 분석이 영화는 1984년 미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소송 승소 사건인 젠슨 vs. 에벨레스 광산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 내에서의 법적 쟁점은 조시 에임스라고 하는 한 여성이 여성의 취업률이 극히 낮은 광산의 노동자로 취업을 하게 되면서 겪는 정신적 육체적 성폭력에 관한 일이다.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행위는 조시 에임스와 그의 여성 동료들에게 가해지는 성희롱이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에 관하여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그 밖의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 상의 불이익을 주는 언행'을 범죄 요건의 성립 기준으로 두고 있다. 조시 에임스는 광산 내의 여성 노동자 전원에게 가해지는 성희롱 전반과 더불어 자신이 바비 샤프에게 당했던 강간 행위에 대하여 소송을 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간죄와 강제 추행죄의 구분이 보다 엄격하여 성기의 삽입만을 강간죄로 인정하고, 이외의 모든 행위는 강제 추행죄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외국의 경우에는 강간죄를 성기 삽입보다 널리 보아서, 구강 등에 가해지는 폭력도 강간죄로 인정하기 때문에, 조시 에임스가 바비 샤프를 강간에 관하여 소송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따라서 영화의 법적 쟁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는 직장 내의 성희롱에 대하여 집단 소송을 하여 피해를 보상받는 것이다. 집단 소송에서 승소할 경우, 법적 피해 보상금은 물론이며, 광산 내의 간이 화장실 설치와 여성 노동자를 배려한 사업 전반의 개혁, 그리고 출산 유급 휴가가 주어지며, 이 소송이 전국 모든 일터의 판례로 남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집단 소송을 위해서는 원고를 3명 이상 확보할 필요가 있는데, 영화 내에서 보여지듯이 조시 이외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원고로 나서게 되면, 직장에 다시 복귀하였을 때 가해질 불이익이 두려워서 집단 소송의 원고로 나서길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영화의 법정에서는 조시가 자신과 여성 노동자들이 당했던 피해에 대해서 증명하는 동시에, 여성 노동자들이 당했던 성희롱을 하나씩 곱씹으면서 그들이 원고로 나설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졌다.영화의 두 번째 쟁점은 조시 에임스가 바비 샤프에 의하여 강간을 당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바비 샤프는 조시 에임스가 광산의 남자 노동자들에 대하여 사장에게 고발하려고 했던 행위에 대해 괘씸하다고 여겨 다른 남자 노동자들을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조시 에임스를 강간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영화에서 보기에 성기의 삽입이 이루어졌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불분명 하였지만, 강간에 준하는 폭력 행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하여 조시 에임스는 고소를 하려고 하지만, 바비 샤프 측은 강간이 아닌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주장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자 한다. 이 부분에서 바비 샤프 측은 합의에 의한 성관계 였다는 점을 증명받기 위하여 조시는 원래 무분별한 성관계를 즐기는 문란한 여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위를 위해서 학창 시절 조시와 바비의 담임 선생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조시가 담임 선생과 성관계하는 것을 바비가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바비는 조시가 담임 선생으로부터 강간 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시와 담임 선생이 합의된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 조시가 바비로부터의 강간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3. 영화 속 주인공들의 법 관념과 태도 분석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법과 정의에 대하여 상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인 조시와 다른 여성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분석함으로써 영화의 첫 번째 법적 쟁점을 다시 한 번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인 조시는 우선 처음에는 다른 여성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성 노동자에 의한 성희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광산에서 일하기 위하여 여성으로서 불쾌한 신체검사를 받아들이고, 도시락에 성기 모형을 넣는 등의 장난에도 참고 넘어간다. 그러나 동료인 셰리가 남녀공용 간이 화장실에서 오물을 뒤집어쓰는 모욕을 받고, 그것을 사장에게 고발하여 상황을 시정하려고 했지만 실패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변하게 된다. 바비 샤프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그녀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져 노동의 현장에서 자신을 비롯한 여성들의 피해 보상을 받고, 권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굳힌다. 반면에 여성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성희롱에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 상황을 꾹 참아낸다. 오히려 조시가 너무 예민하다며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며, 조시 때문에 오히려 여성들이 배신자로 낙인 찍혀서 더 피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단 소송의 원고로 나서주지 않는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시가 과거에도 강간을 당했고, 자신들이 당했던 성희롱들이 계속하여 언급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원고로서 참여하게 되는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법과 정의에 대하여 상이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인 조시와 다른 여성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을 분석함으로써 영화의 첫 번째 법적 쟁점을 다시 한 번 파악할 수 있다. 써이들은 노동의 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동료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밥줄을 위협하고, 노동의 효율성을 떨어 뜨리고 이것 저것 귀찮은 일들을 만드는 방해물로 취급한다. 따라서 여성들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고, 항상 성희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성희롱의 행위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장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법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조시의 고발이 이들의 분노를 가져오는 것이 당연하였다. 따라서 까칠하고 예민한 조시에 대한 보복책으로 바비 샤프는 강간이라는 행위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조시의 광산 취업을 반대한 같은 광산 노동자인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바비 샤프를 비롯한 남성 노동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가 자신의 딸, 즉 가족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하고 보니 서서히 정의가 무엇인지, 옳고 그름에 눈을 뜨게 된다. 따라서 조시의 아버지는 노동자들 집회의 연설에서 가족일 때는 욕설도, 성적 장난도 하지 않으면서, 여성이 동료로 나설 때는 왜 이런 행위를 하는지 지적하고, 그 행동의 추악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비롯하여, 법정에서는 바비 샤프가 담임 선생이 조시를 강간한 사건에 대하여, 같은 친구로서 왜 조시가 곤경에 처하였을 때 도움을 주지 않았느냐는 조시의 변호사의 추궁에 대하여 태도를 바꾸는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태도의 변화에 따라서 갈등이 해결되고, 법이 올바를 심판을 하고, 정의가 회복되는 결과가 생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