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이의 7가지 법칙법칙1 배우는 이의 법칙1장 배우는 이의 기초, 모델 및 원리저자는 그의 스승의 이야기로 배우는 이의 법칙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위대한 스승 ‘하워드 핸드릭스’ 박사의 옛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학생을 발견하고 217초 만에 참을성의 한계를 드러내신 그의 열정적인 스승의 이야기이다.배우는 이의 원리원리1: 교사는 학생에게 배움을 야기 시킬 책임이 있다오늘날 많은 교사들이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더 이상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배우는 이의 7가지 법칙’의 핵심은 학생으로 하여금 배우게 하기 위해 교사가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전적인 책임감을 매우 강조하는 데 있다.가르치는 과정에 있어서 교사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음은 물론, 이 책임을 다른 이들도 함께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학생들, 부모들, 그리고 관심을 가진 다른 이들. 나아가 사회전체가 말이다 학생들에 대한 책임은 교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단지 교사만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있을 뿐이다.원리2:교사는 자신이 끼친 영향에 대해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이다.‘전적인 책임’과 짝을 이루는 말은 ‘책임을 짐’ 이라는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떤 계획안에 대한 책임을 부여할 때, 우리는 대개 그 실행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한다.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를 어떻게 수행했는가에 대해 우리들 각자가 그분 앞에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미래에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 말, 행동과 신실함에 대해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중 일부에게는 추가 책임도 물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지도자들의 책임과 그 책임에 따르는 심판의 심각성에 대해 거듭 경고하고 있다.원리 3 : 내용, 스타일과 강연자를 통제하는 것은 교사이기 때문에, 교사에게 책임이 있다.첫째, 교사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모든 말, 즉 내용에 대한 전적인 통제를 할 수 있다.둘째, 교사는느끼는 사람은 없지만, 일부 학생들은 단지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기 위해 죽기 살기로 쫓아오는 데 급급해 있다.학과 관계에 가장 약하다면, 아마 그 교사는 내용에 대해 자신이 없고 노트에 지나치리만큼 의존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을 두려워할 것이다.관계 2 : 강연자 대 학생 .학생에 대한 관계가 주된 장점일 때, 그들은 아마 당선을 친구나 격려자 또는 그들과 매우 ‘친숙한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당신은 학생들과의 관계가 수월하다. 학습 내용이나 전달보다는 학생 그 자체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학생들은 당신이 품위 있으며 실제적인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들은 당선이 그들을 좋아하며, 당신이 진실 되고 솔직한 인물이라고 여긴다. 그들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당선을 찾아온다.학생 관계에 있어 가장 약하다면, 당신은 학생들 사이에서 매우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 들은 교사가 그들 자신보다 내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느낄 것이다.관계 3 : 강연자 대 스타일스타일이 가장 큰 장점일 때, 학생들은 당선을 ‘커뮤니케이터’ 또는 ‘설득력 있는 연설자’ 또는 ‘동기 유발에 강한 교사’라고 부른다. 당신은 의사 전달을 좋아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그들이 가르침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낀다. 당신은 자료를 작성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좋아하며, 그것을 통해 자료는 훌륭한 이야기들과 근사한 시각 자료를 가진 균형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지고 알기 쉽게 표현된다.스타일에 대해 가장 취약하다면, 당신은 교탁 뒤에 서 있는 것을 선호하며 교탁을 떠나 학생들 앞에 설 때, 무방비 상태에 처한 것처럼 느낀다. 당신의 학생들은 아마 수업이 무척 지루하고, 모든 것이 너무 틀에 박힌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교실의 문제를 알아내는 방법은 학생들의 고충과 불평을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 불평들은 모두 가르침의 실패와 배용의 역기능을 나타내는 언어적 신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평들은 교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배우는 이의 활용활용 1 : 학생들을 일무자들에게도 그 새 기계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얼마나 많은 카드를 타이프 해야 되는지 그 기대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그룹이 매일 카드를 얼마나 처리했는지 추측해 보라. 한 사람당 평균 2,100개였다. 그들은 정상인이 하루에 단지 550개를 타이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신체적 압박이나 스트레스 없이도 일을 해나갔다. 이것이 바로 기대감이 가지는 믿기 어려운 힘이다원리 3 : 기대는 과거에서 유래하며, 현재를 좌우하며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우리는 과거에서 유래하는 정보 또는 그릇된 정보에 따라 기대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기대는 한 번 형성되면, 현재의 우리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미래에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원리 4 : 기대는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 노출된다.교실에서 학생과 함께 있을 때, 낮은 기대를 지닌 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보인다.·학생이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오래 참지 못한다.·질문하기 위해 학생을 지명하는 일이 별로 없다.·학생이 틀린 대답을 할 경우 제대로 고쳐주거나 격려해주지 않는다.·학생이 대답하지 못할 경우 너무 서둘러 학생에게 답을 말해주거나 다른 학생을 지명한 다.·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질문을 반복하거나 풀어서 말해주지 않는다.·학생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거나 학생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대답을 한다.·학생이 실수할 때 서둘러 간섭한다.성취도를 설정할 때 낮은 기대를 지닌 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다.·실패에 대해 학생을 비판한다.·성공에 대해 학생을 거의 칭찬하지 않는다.·채점된 시험지에 설명을 아주 간단히 적어준다.·확연하게 드러날 만큼 느린 진도로 성의 없게 가르친다.·어중간한 경우에 의심스러운 점을 학생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주지 않는다.·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교수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의미 있는 연구 과제보다는 활동적이더라도 무익한 과제를 더 많이 내준다.학생을 개인적으로 대할 때 낮은 기팔꿈치로 툭 치면서 남자들만의 애정을 나눌 수도 있다. 어린 소녀라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어 무릎을 꿇고 부드럽게 손을 잡아주라. 그가 함께 일하는 동료라면, 손을 그 사람의 어깨에 올려놓고 친근감을 표현할 수도 있다.바로 이 기대의 법칙’을 삶의 모든 순간 속에 적용하라. 다른 이들을 위해 충분히 관심을 갖고 그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일련의 과정이다.기대의 활용기대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돕는 일곱 가지 비결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활용 1 : 의도적으로 기회를 만들라.활용 2 : 창조적으로 기대감을 표현하라. 기대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기대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기대를 적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화를 이용해서 기대를 표현하고, 가끔 적절한 선물로 기대를 격려할 수 있다.활용 3 : 언어를 정확하게 선택하라.활용 4 : 시선을 마주치라.활용 5 : 신체 언어를 조심스럽게 전달하라.활용 6 : 다른 이들을 적절하게 터치하라.활용 7 : 자신감 있게 기대를 세우라. 기대를 설정하되 긍정적인 기대들을 만들라.법칙3 적용의 법칙5장 적용의 기초, 모델 및 원리디모데후서 3장 16-17절 “성경은 ...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행하기에 온전케 함이니라.”의 구절을 통해, 성경이 주어진 최종 목적은 온전케 하는 것이고 이는 즉‘아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과 하는 것’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 이든 대다수의 교사들이 단지‘지식을 알게 하기’를 가르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본래 의도된 목적과 동일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반되는 목적을 가지고 가르치는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다.자원, 즉 성경은 믿는 자들을 위한하나님의 영감 된 계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모든 삶과 모든 학습의 기준이 되는 일에 사용하는 표준이다. 그것이 교사가 가르치는 주제이다.성경은 기 때문에, 청중은 그 진리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효과적으로 가르쳤을 때, 사람들은 곧 이 진리가 그들을 위해 있음을 깨닫는다. 진리가 너무나도 생생히 살아 있어서 다른 이들이 그 교실에 있다는 사실도 잊는다. 그들의 편지 또는 심지어 마음을 읽었음이 분명하다.단계3 : 개인화한다.'개인화 한다’는 두 개의 개별적이면서도 상호 연관된 부분들을 갖고 있다.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 학생은 무엇을 할지 알게 되며,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이 두 조건에서 만족될 때 그 다음 중요단계인 ‘설득하다’가 시작된다.‘개인화 한다’는 일반적이며, 영원한 원리는 때에 적절한 특별한 적용으로 옮겨질 때 일어난다. 이 단계에서 학생은 성경에 있는 그 구절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야 할지 깨닫는다. ‘신학’이 물러가고 ‘실용’이 들어오는 셈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형성되기 위해서는, 인간 교사와 신적 교사인 성령 사이에 놀라운 협력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앞뒤에서 끌고 밀어줄 때, 각각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단계4 : 설득하다4단계에 이를 때쯤, 학생들은 그 구절을 이해하고, 원리에 대해 확신해 왔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느끼는 동시에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아왔을 것이다. 이 4단계는 주안점이 감정에서 의지 쪽으로 옮겨감에 따라 일어난다. 이제 그 진리를 적용하기 위해 학생을 '설득하는' 것을 강조한다. 학생이 자신이 해야 한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성경에 순종할 수 있도록 헌신되어지도록 교사들은 그들을 '권해다' 한다.단계5 : 행하다.이 마지막 단계는 삶을 변화시키는 가르침에 대한 질적인 점검이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하는 질문은 교사로서의 당신에게 뿐만 아니라 당신의 학생들에게도 가장 도전적인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그것을 했는가? 그들이 그 구절을 이해하는 데서 그 원리에 대해 확신한데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아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헌신할 만큼 설득되어 그것을 했는가?"그것을 행하는 것"이 실제로 수업시간.
모던 타임즈 감상문시험 기간이라 그 시간에 공부나 할까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궁금했다. 제목이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나에게 낯설지가 않았다. 모던 타임즈는 중학교 사회 시간 때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이미 선생님께서 영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셨던 터라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산업화가 뭐고 인간소외가 어떻지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찰리채플린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로만 여겼던 거 같다. 처음엔 그냥 무성영화이고 흑백 영화라 진짜 재미없는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찰리채플린의 연기가 퍽 인상 깊었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를 보듯이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난다. 찰리채플린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떤 의도로 저런 행동들을 하는지 모르고 찰리채플린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즐거워했었다. 허나 이제 와서 영화를 보니깐 그저 보고 즐기고 웃을 수만은 없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 씁쓸한 웃음이 어느덧 안타까움에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찰리채플린은 코믹하게 표현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의식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슬픔을 웃음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채플린의 역설적 창의성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존경심마저 들었다.모던 타임즈의 주제는 1930년대 미국 산업사회의 비인간화와 기계만능주의가 낳은 인간 소외 현상으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발생하였던 혼란과 그 혼란 속 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일반 노동자들의 현실이 신랄하게 풍자 하고 있다. 모던 타임즈의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관한 영화라 볼 수 있는 것 같다.1929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쟁 물자 사업으로 돈을 번 자본가들은 새로운 생산 기계를 도입하였고 생산량을 늘린 결과 미국에서는 생산물의 과다한 공급으로 공황이 발생하게 된다. 공황이 3년간 지속되자 미국에서만 실업자가 1500만 명에 달하게 되었으며, 격렬한 노동운동이 미국의 주요 공업도시를 휩쓸게 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는 바로 이 당시 미국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태동 하던 때라 기업은 대량 생산에만 중점을 두어 노동력의 착취 및 노동자의 인권 침해 등의 문제들이 발생했다. 영화의 제작시기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이었으므로 영화의 주제는 충분히 현실적이며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대략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찰리채플린이 말하는 이론들은 상당히 다양하다.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인간소외, 테일러리즘과 포디즘 등등..영화의 처음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철강회사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자신이 맡는 부분에 위치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장은 그런 그들을 모니터로 감시하고 작업이 늦으면 속도를 올리라고 명령한다. 화장실까지 감시를 하면서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또한 식사시간까지 줄이려고 식사를 먹여주는 기계까지 도입하려고 한다. 인간대우라곤 하나도 없고 오직 일만 시키려고 하는 지배계급의 욕심만 있을 뿐이다. 채플린은 한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작업하는 조립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임무는 너트를 조이는 일뿐이다. 과도하게 반복되는 단순노동에 그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된다. 너트처럼 생긴 것은 무조건 조이려고 한다. 결국 그는 정선병원에 가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만드셨는데 이런 단순노동을 하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본다. 채플린처럼 미치지는 않더라도 아마 많은 스트레스에 고생 했을 것 같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채플린은 목재 운반차량이 흘린 깃발을 돌려 주기위해 깃발을 들고 따라가다가 시위주동자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붙들려 투옥된다. 채플린은 밥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던 감옥에서 나오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배고픔과 실업이 일상적이었던 대공황 당시의 사회로 다시 던져진다. 감옥에 있는 게 행복하다는 것에 그것이 과연 행복일까, 참다운 행복이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게 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본 것 같다. 인간의 최소한의 요구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서 감옥에 있으려고 하는 모습에 눈물이 난다. 감옥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벌을 받는 곳인데 그 곳을 가려고 죄를 짓는 사람이나 또한 그 곳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출소하여 조선소에 취직을 하지만 미완성된 배를 진수 시켜버려 직장을 나오고 여기에서 그는 시위 현장에서 아버지를 여읜 가난한 고아소녀를 만난다. 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에서 경비로 일하지만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다시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 나와 그 소녀와 사랑에 눈을 뜨고 허름한 판잣집에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민다. 그러는 와중에 공장이 다시 가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일을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파업을 하게 된다. 우연하게 돌이 놓여 있는 널빤지를 밟아 그 돌이 경찰관의 머리에 맞는다. 결국 그는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다시 출소 하여 그 소녀의 소개로 한 음식점에 취직하게 되고 소녀는 음식점에서 춤을 추고 그는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로 일을 한다. 웨이터로 일하다 노래도 부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호응도 얻는다. 그렇게 두 주인공의 행복한 순간은 그 소녀를 청소년보호원에 감호하려는 국가의 개입으로 금세 깨어지고 만다. 두 주인공이, 잡으러 온 경찰을 피하여 삶의 터전을 잃고 새로운 방랑을 시작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제1장 로마의 발흥1. 동방인의 눈에 비친 로마 -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유역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제국을 이룬 도시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시는 주전 18세기 함무라비 대왕 시대에 세력을 떨쳤던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그후 주전 6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주변 국가들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지중해와 이집트 변경까지 영토를 확장했다.2. 구릉지대의 정착촌에서 세계제국으로 - 로마는 원래 티베르 강 서안 라틴평원에 있는 구릉지대에서 목축과 농업을 영위하면서 정착해 살았던 소수의 무리였다. 로마의 세계정복의 역사는 티베르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의 베이시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때로부터 로마는 체음에는 라티움, 이어서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주전264년 시칠리 분쟁에 개입함으로써 로마는 시칠리에 교역상의 이권을 갖고 있었던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위기에 쳐했으나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를 대패시킴으로써 로마는 지중해 서부지역의 지배자로 떠오르게 되었다.제2장 이방인의 지배 아래 놓인 유대인1. 고레스에서 베스파니아누스까지 - 바사 제국의 창건자인 고레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고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개화된 제국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속국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속국의 백성들이 자기네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속국으로 하여금 종주국의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하지 않고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예배하도록 권장했으며, 어떤 때는 그러한 목적으로 재정적인 지원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바사제국은 속주인 유대에 대하여 이중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바사 왕을 대표하도록 했다. 총독은 안전보장과 조공의 징수 등과 같은 제국의 이익들을 지키는 책무를 띠고 있었다.하지만 유대인 내정은 사독 반열에 속한 대제사장의 손에 맡겨졌다. 유대에서 유대인들 사이의 내부적인 문제들은 대제사자으이 직무상 의장을 겸하는 70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와 대제사장이 처리하였다것이었다.베드로와 야고보는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 내부에 있었던 서로 다른 두 집단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가 이R는 집단은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집단은 이로부터 수년 후 베드로가 예기치 않게 헤롯 아그립바의 감옥에서 탈출했을 때 찾아간 집단이었다. 그는 그들을 떠나면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베드로와 함께 십오일을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야고보를 방문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들엇다는 결론이 나온다.3. 계시와 전승 - 바울을 회심시킨 것은 계시로서의 복음이었다.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부활의 주로 고백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 바울을 회심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증언은 바울을 자극하여 전심전력으로 그들을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증언은 바울의 귀에는 신성모독으로 들렸던 것이다. 바울로 하여금 예수가 진실로 부활하신 주라는 것을 확신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건은 다메섹 도상의 계시였다.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예수라고 밝히셨다. 이것이 그 이후로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다. 그가 이 복음을 아는 데 지상의 어떤 증인도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이 유효했다.바울이 차차 이 계시의 꾸러미를 풀어감에 따라 거기에는 복음의 수많은 독특한 내용물들이 많이 쌓여 있음을 알게 되었고 바로 그 내용을 선포했던 것이다.4. 바울이 수리아와 길리가아를 향해 떠나다 - 예루살렘에서 십오일 동안 머문 다음에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짧은 방문기간 동안에 헬라파들과 이전에 스데반과 다른 사람들을 핍박했던 옛 동료들은 바울의 생명을 위협했다. 바울을 변절자로 보았기 때문이다.기독교인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이전에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자기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16장 구브로와 소아시에서 확장되는 교회1. 바나바와 바울의 구브로 선교 - 안디옥의 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구브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 섬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안디옥에 그 섬을 더 조직적으로 복음화하기 위한 시도를 계획한 구브로 출신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나바였다. 바울은 이미 마음속으로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파하고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와 바나바가 헤어져서 바나바는 고향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소아시아와 그보다 더 서쪽에 있는 지역들로 향할 기회는 올 것이었다. 하지만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 계획을 함께 수행했다.2. 복음이 브리기아에 이르다 - 회중 가운데 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바울의 메시지에 특히 끌렸고 동료 이방인들에게 이 소식을 널리 퍼뜨렸다. 그 결과 일주일 후에 회당 예배에는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기분이 나뻐서 두 전도자에게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많은 이방인들은 이 전도자들이 전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아들였고 회당과는 별도로 기독교인 모임을 이루었다.3. 이방인 선교의 문제점 -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소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 전도자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누가의 보도는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는 유대인들에 관한 바울자신의 말과 일치한다.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일가 친척의 구원이 너무도 절실했다.4. 루가오니아의 성읍들 - 바나바와 바울이 갔던 루가오니아의 첫 번째 성읍은 이고니온에서 남남사로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지금의 하툰사라이 근방에 있는 조스테라의 작은 산인 루스드라였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아구스도는 루스드라를 로마의 식민시로 삼았다. 이 두식민시는 이고니온을 통과하지 않는 군사도로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록 160킬로미각오를 단단히 하고 이 말도 되지 않는 칙령에 죽음을 불사하고 저항했다. 이 위기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종말 기대가 충천했으며, 이 시기를 즈음하여 지중해 연안의 많은 유대인 공동체를 가운데서는 호전적인 메시야 사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제 22장 바울과 아덴 사람들1. 베뢰아 방문바울은 빌립보에서 비아 에그나티아를 따라 여행하여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었는데, 그런 후에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에 계속해서 그 길을 따라 갔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부름을 받았고, 비아 에그나티아는 마게도냐를 거쳐 아드리아 해에 있는 종착지인 디르하키움까지 뚫려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주도로를 떠나 거기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베뢰아를 행했다. 키켈로가 베뢰아를 “도로에서 떨어져 있는 성읍”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이 성읍이 비아 에그나티아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2. 아덴에서4세기에 아덴은 마게도냐의 침입을 막는 데 지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케로네아 전투(주전 338년)에서 빌립에게 패한 후에도 빌립은 아덴을 관대하게 다루어서 아덴은 이전에 누렸던 자유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이러한 상태는 주전 146년 로마가 헬라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플라톤의 고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제논은 이곳을 제2고향으로 삼았다. 누가는 바울이 유대적 유일신론과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인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원칙으로 양육 받은 자의 눈을 통하여 아덴에 있는 신전들과 제단, 상들을 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0)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꾼” 것이라고 주장했다.3. 아레오바고 연설루스드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덴에서도 사도행전의 바울을 청중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을 구약의 예언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는 단지 헬라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말하고자 하는 바를 예시해 주는 그림들을 차례차례 보여주는 영사용 슬라이드를 통한 강연에 비유했다.①에베소의 제자들 - 이 그림들 가운데 첫 번째 그림은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한 직후에 누가가 제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열두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다. 바울은 그들이 신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체험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곧 그들이 성령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질문을 해본 결과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이 제자들에게 요한의 사역이 복음을 예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②두라노서원으로 옮겨감 - 누가의 두 번째 그림은 바울이 회당에서 석 달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하다가 쫓겨나는 장면이다. 에베소 회당의 유력자들은 바울이 방문한 대부분의 다른 성읍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보다 바울이 상당히 오래 받아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에베소애서는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유력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한 어떤 사람들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바울은 새신자들과 동료 기독교인들을 데리고 떠나서 두란노 서원이라는 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두라노의 문하생들은 하루 가운데 시원한 시간에 그의 강의에 참석한 후 선생과 문하생들은 모두 낮잠을 자기 위해 정오 경에 집으로 돌아갔다.③마술 - 사람들이 바울을 이런 종류의 마술을 하는 마법사로 여겼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바울이 장막 짓는 일을 하면서 사용하던 순수건과 앞치마를 가져다가 여러 가지 병을에 걸린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얹었는데 실제로 신기하리만치 효험이 있었다.④연극장에서의 시위 - 누가가 보도하는 모든 에베소 사건들 가운데서 가장 생생한 것은 이 성읍의 연극장에서 일어난 소요에 대한 묘사이다. 바울이 복음전도 활동이 성공한다는 것은 큰 여신 아데미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고 이에 따전한다.
★천로역정을 읽고★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존 번연은 1628년 영국 베드포드 엘스토우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경건서적들과 부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회심하고 또한 역사상 길이 남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평신도 설교가 및 저작가로 활동하다가 목사 임직을 받았다. 그러나, 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차례 감금을 당했다. 그 당시에 설교를 법으로 금지하였음에도 12년간의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또한 약 60권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이 작품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저술된 것이다. 번연은 설교자요, 복음전도자요, 목사로서의 열심과 근면과 헌신 때문에 '번연 주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대표작은 「천로역정」이외에도, 그의영적 자서전인 「죄인의 괴수에 넘치는 은혜」와 「거룩한 싸움」(Holy War)이 있다.우선 나에게 천로역정이라는 단어는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중고등부 때 수련회 프로그램 중 천로역정이란 게 있었고 신학교 들어와서는 주위의 목사님 및 선배들이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너무 게으른 탓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고전이라 그런지 나에게 쉽게 나가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그러던 중 교수님께서 독후감을 쓰라는 반 강압적인 지시로 읽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왜 내가 지명당해서 이런 고생을 할까 교수님을 원망아닌 원망도 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후반부만 읽고 독후감을 쓰라고 하시는 말을 위안삼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몇 주위 사람들이 그 책은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는 꼬임에 넘어가 결국엔 처음부터 읽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2부만 읽을걸 하는 회의도 느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책 속에 빠져드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 책을 보고 기독교인으로서 많은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볼수 있는 소중한 기회들을 얻게 되었다.천로역정의 구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크리스챤이라는 주인공이 천국을 소원하며 가는 여정을 그리는 이야기 이고 2부은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그의 4명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가는 이야기이다.유순, 질투, 정직, 등등 의 감정적인 부분들을 의인화 시켜 때론 주인공과 동행하면서 또는 특별한 만남을 통해 주인공에게 힘을 주기도하고 때론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게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이것이 천로역정이라는 책의 특징인 것 같다.간단히 이 책의 내용을 말하자면 1부는 주인공이 광야를 걸어 다니다가 동굴에 들어가 잠에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자기 집을 등지고 섰는데,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등에는 큰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울었고 무서워하였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슬픈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나 큰 두려움에 절규하고 슬퍼하는 이 사람은 이 책의 주인공인 크리스챤이다. 그는 자신의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괴로움을 털어놓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하며 고민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에 전도자를 만나게 된다. 전도자는 그에게 빛을 향해 곧장 가면 문이 있을 터이니, 그 문을 두드리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크리스찬은 집을 떠나 그 빛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부터 크리스챤의 하늘도성을 향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 아내와 자녀들이 뒤 따라와서 울부짖으며 되돌아가자고 조르지만, 그는 귀를 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고 외치며 광야 저편을 향해 달려간다. 크리스찬은 이윽고 언덕 위에 있는 좁은 문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교훈을 받고 새 힘을 얻게 되는데, 크리스챤 지고 있던 죄의 무거운 짐은 저절로 땅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그는 축복과 한 권의 책을 받아 들고 다시금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가는 앞길은 험난하기만 하였다. 어려움의 산, 겸손의 골짜기,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 등 고난의 길을 지나며 믿음이라는 동역자와 동행하게 된다. 그러나 허영의 성에서 전도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다. 거기서 믿음는 순고의 죽음을 당한다 그 후 많은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천국 문에 이르게 된다. 그 도성은 태양처럼 빛났고, 거리는 황금으로 깔렸으며, 시민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와 거문고를 들고 그를 맞이함으로 끝이난다.허나 저자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2부을 지어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매정하게 무지하고 떠나보냈던 크리스티아나는 남편을 보낸 후 죄책감에 시달렸다. 날마다 죄책감에 시달린 그녀는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속에 비밀이라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초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달 받게 된다. 이러므로써 그녀와 그녀들의 4명의 아들들이 순례자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그의 이웃 자비심이 순례자의 길에 동참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은 크리스챤과 마찬가지로 그가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걸으면서 받았던 고난들을 받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구조자나 담대라는 주의 사자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고 담대를 인내자로 하여 순례를 계속 해 나간다. 겸손의 골짜기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가이오의 집에 유숙을 하던 중 가이오가 집근처에 순례자들을 잡아먹는 거인을 처치해 달라고 요청하자 일행은 원정을 나가 거인 살선을 죽이고 또 다시 순례를 시작한다. 몰욕의 산을 지나 의심의 성에 사는 절망거인과 아내 자포자기를 죽이고 마지막 마법의 땅을 지나게 된다. 너무나 지친몸이라 쉬어가라는 유혹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대한 소망을 품고 유혹을 이겨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간다. 순례의 과정에서 불굴, 정직, 진리의 용사, 심약 등등 많은 동역자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며 순례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유혹하는 악한 사람들도 만나 어려움도 당하게 된다. 결국엔 크리스챤과 마찬가지로 여러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감으로 행복한 결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는 이 천로역정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겪는 여러 감정적인 갈등, 외부적인 어려움, 그리고 그런 상황 가운데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태도 교훈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천로역정을 다 읽고 난후 내 마음속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먼저 다 읽었다는 성취감이 컸지만 그것보다도 내 자신을 다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비록 지금은 신학교에 다니고 오래전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차츰 차츰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하고 있다는 내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보단 세상과 타협하고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단 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갈려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고 주님께 죄송스런 마음도 들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주인공 크리스챤과 크리스티아나가 어려울때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봤을 때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들의 믿음이 부럽기까지 했다.
-우리 시대의 소수자 운동 서평-소수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참 암담했다. 과연 소수자란 무엇이기에, 무엇이 중요하기에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라는 집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했나 궁금하다. 내가 생각하는 소수자 운동이란 다수가 있으면 소수가 있기 마련이듯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운동쯤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먼저 소수자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싶어서 백과사전을 찾아서 이 단어의 정의를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육체적·문화적 특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불평등한 차별대우를 받아서 집단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소수자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의 수만큼 다양한 범주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형성되는 범주라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라고 말한다.구체적인 예로, 이 우리시대의 소수자운동이란 책에서는 성매매여성운동, 장애인운동, 동성애자운동, 이주노동자운동, 죄수운동,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넝마주이운동, 탈북자운동, 북파공작원운동, 어린이운동, 불안정노동자운동, 청년운동, 실업자운동, 부랑자운동, 중독자운동, 환자운동, 정신병원수용자운동 등 셀 수 없을 만큼 소수자는 이 사회에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렇듯 나는 윤종수교수의 소수자에 대한 정의에 동의를 하지만 기독교관점으로 본 소수자 운동은 과연 어떻게 봐야할까 많은 고민들을 해봤다.나는 신학생으로서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이 글에 대해서 서평 할까 한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있다. 나는 이들 소수자의 자기 권리들을 찾고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사회에서 살기 위해 하는 운동이기에 긍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다수의 의견 때문에 피해를 봤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들도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신학생이다보니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옳지 못하는 운동들에는 거부감이 드는건 사실이다.먼저 나는 소수자집단으로 레즈비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레즈비언..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확실한 죄이다. 그런 그들의 운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많은 고민들을 해본다. 매년 시드니에서 열리는 동성애 축제가 있다고 한다. 규모나 참석인원 등 그 규모가 세계 최대인 동성애 축제인 마디그라 축제는 1978년 6월, 시드니의 동성애자와 성전환자들이 동성애 차별법에 대항하기 위하여 행진을 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참가자들이 모두 잡혀갔으며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잘못된 인식탓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4년 호주 방송국인 ABC에 의해 마디그라 퍼레이드가 호주 전역에 생생하게 방영되고 시청률이 큰폭으로 상승하자 이 퍼레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행사로 자리를 굳혔다. 1996년에는 전세계에서 모인 이반 단체 및 개인들이 65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시드니의 관광수입 역시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시드니 지역 주민들과 단체, 지방의회에서도 이 축제를 후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시드니 주민들에게 있어 이 행사는 단순히 동성애자들만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가 동성애자와 어울려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위의 사항들을 살펴볼 때에 레즈비언운동은 그들의 정체성들과 취향들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하는 운동이다. 그렇다. 솔직히 나는 동성을 더 사랑하는 레즈비언이 아니기에 그리고 신학도로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남자는 여자와 결혼하여 번성하라고 하나님께선 명시하셨기 때문에 나는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내세우며 운동을 해간다. 인권!! 인권은 존중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레즈비언들은 가정을 이루려고 한다. 그들은 아이를 입양하여 자신들의 자녀로 삼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입양한 자식들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가? 그 자녀들이 성장하여 다수의 사회에 들어갈 때 그들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하지만 레즈비언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조금 더 깊이 살펴본다면, 이런 레즈비언도 있다는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남자지만은 남자의 호르몬이 부족하여, 여자의 성향을 나타내어 자연스럽게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사회질서상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남자와 관계를 맺고 번성해야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욕망들을 감춰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일어나는 사회적인 트렌드상, 그리고 색다른 성욕을 즐기기 위해 레즈비언들이 된 그러한 운동들을 적극 반대하지만, 위에 기술한대로, 생리학적인 남성여자, 여성남자들은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 교회가 품고 나가야 할지가 가장 큰 문제 일듯 하다.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다. 이것을 권리로서 주장할 때 양심적 병역거부권, 양심적 집총거부권, 양심적 반전권이라 한다. 이에 관한 입법례를 보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네덜란드 ·이스라엘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은 헌법 또는 법률로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독일은 그 기본법 제4조 3항에서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여 집총병역을 강제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폴란드 ·러시아 ·타이완 등에서는 법제화하고 있지는 않으나,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제도를 인정하는 근거는, 종교적 ·윤리적 확신에 따라 전쟁에 종사는 것을 반대하는 자에게 병역을 강제한다면, 그것은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데 있다. 오늘날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각국의 특수한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그 구체적인 내용에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근거가 종교적인 이유 이외에로 확대되어 가고 있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과연 진실로 양심에 따라 병역이나 집총을 거부하는 것인가의 여부를 심사하는 심사기관을 설치하고 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대체역무를 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하여 한국의 판례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상의 결정으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행위는 병역법의 규정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하며,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러한 양심적 병역거부는 전체사회적인 관점으로 볼 때, 사회의 전체질서를 해침으로 당연히 반대되는 것이 맞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면서까지, 그들의 이념을 굽히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위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증인들이고 이단들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현 사회가 분단된 사회이고 어쩔 수 없이 징병제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환경이 해결되면 병역거부보다는 우리나라의 징병제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버리는 게 좋을 듯싶다. 그렇게 한다면 종교와는 별 상관 없을듯 싶고 양심적 병역거부란 말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