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현대인의 두 가지 모습2016.05.11-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1965), 황석영 「삼포 가는 길」(1973)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1965)과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은 여러 모로 닮아 있는 작품이다. 우선 급격하게 산업화가 진행되던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특정 공간에 대한 상징성을 바탕으로 현대인의 소외와 방황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서울’과 ‘포장마차’, ‘여관’ 등의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며, 「삼포 가는 길」에서는 ‘삼포’라는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 공간들은 각기 상징성을 지니고 있고, 주제의식을 강화하고 있다.「서울, 1964년 겨울」에서의 ‘포장마차’는 쓸쓸하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서민들이 찾는 곳이다. 특히, ‘여관’은 분산되고 깨어진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곳이다. 벽으로 나누어진 여관방들처럼 그들의 인간관계는 자잘하게 나뉘어져 있다. 「삼포 가는 길」에서 그들은 고향 ‘삼포’라는 공간을 잃어버리고 그것은 그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삼포’에서의 변화가 가속화된 시점에서 그들은 평화로웠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고향이라는 공간이 없어짐으로 공허감과 쓸쓸함에 빠지게 되었다.또한 두 작품에는 산업화와 근대화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서울, 1964년 겨울」의 인물들은 산업화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공동체 의식이나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개인주의를 완전히 수용하지도 못한 채, 의식들 사이에서의 방황과 의미 없는 말장난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들이 술집을 떠나 찾는 곳도 여관이나 불난 집 등 황폐하고 암울한 곳들뿐이며,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하나같이 비현실적이고, 앞으로의 삶의 모습 또한 밝지 않다. 「삼포 가는 길」에서도 산업화로 인해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고통이 나타나 있다. 가려던 고향이 개발 사업으로 인해 예전의 모습이 사라진 사실을 알고 갑자기 갈 곳을 잃는 ‘정 씨’의 모습에서 당시 사람들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도시와 고향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한 채 소외 계층으로 전락한 것이다.그러나 소설 속에서 인물간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모습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포 가는 길」의 세 인물 ‘영달’과 ‘정 씨’, 그리고 ‘백화’ 사이에 처음에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존재했으나, 계속되는 여정 속에서 서로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 1964년 겨울」에서의 세 인물 ‘나’와 ‘안’ 그리고 ‘사내’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다. ‘나’와 ‘안’은 서로에게 자세한 소개는 하지 않은 채, 의미 없는 단편적인 대화만을 나눈다. 또한 ‘나’와 ‘안’은 아내를 잃고 절망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내를 혼자 둠으로써 자살까지 이르게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철저한 개인주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인간과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2016.05.18-박완서 「해산바가지」(1985),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해산바가지」(1985)는 정신이 망가져가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며느리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입장에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서술자가 특정 인물과 함께하면서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가고 있다.「해산바가지」에서는 소설의 첫 장면부터 지독한 남아선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나’의 친구를 등장시킴으로써 남성 우월주의와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만연한 당시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여성에 대한 인식 수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과도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성에 근거하여 딸과 아들의 가치를 매기고, 딸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앗는 일조차 서슴없이 이루어진다. 여성은 아이(여기서는 아들)를 낳기 위한 도구로 여겨지며, 아들을 낳는 것이 그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서술자인 ‘나’의 말처럼 무식하고 저급하며 잔혹하다. 이는 여성으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도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나’는 친구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 자신의 시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야기는 치매에 걸린 홀시어머니의 갖가지 기행과 ‘나’와의 갈등으로 인해 극으로 치닫는 듯싶더니 ‘나’가 시어머니의 정결한 해산바가지를 떠올리는 것으로 반전이 이루어진다. 지금은 비록 망가진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한때는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며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할 줄 아는 아름다운 정신을 가졌던 시어머니는 생명의 존엄성과 소중함을 알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이는 앞서 나타난 병적인 현실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인다. 이처럼 서술자는 시어머니의 해산바가지를 통해 현실의 남아선호주의를 간접적으로 고발하며, 남녀를 떠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생명의 존엄성과 소중함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생명이 탄생할 때도 우리는 그 소중함을 느끼지만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더없는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다. 소설 속의 ‘나’는 암에 걸린 남편 옆에서 그와 함께 했던 마지막 일 년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서술한다. ‘나’와 남편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매순간 느끼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하루하루 빛나는 시간을 보낸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어둡고 절망적인 내용이 될 수 있음에도 ‘나’와 남편은 결코 비탄에 빠져있지만은 않는다. 살아 있음에 대해 매혹을 느끼며 순간순간에 열중을 다해 보통처럼 살아가고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과 삶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작품 속 인물들의 형상화를 통해서도 그러한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두 작품 속의 ‘나’는 모두 매우 현실적인 인간들이다. 현실 속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소설 속의 그들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해산바가지」의 ‘나’는 정신이 망가져가는 시어머니 앞에서 음전한 효부이기를 거부한다. 큰 소리로 분풀이도 하기도 하지만 애정 표시에도 인색하지 않는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동시에 영정사진을 준비하기도 하며, 항암치료의 가혹함에 치를 떨면서도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토악질을 하는 남편을 보며 그의 괴로움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도 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은 현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감이 된다. 그리고 작가는 말로는 이해될 수 없는 모순성과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인간을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기법과 형식을 통한 주제의 효과적인 구현2016.05.25-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은 전통적인 소설의 개념에서 벗어난다. 사건이 어떠한 목표를 향해 계획적으로 배열되어 있지 않으며, 위기나 절정에 해당하는 갈등 구조도 없다. 소설은 주인공 ‘구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을 독자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구보의 내면 의식을 흘러가는 대로 담아내고 있다. 구보의 행동은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소설의 주제나 명확한 줄거리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소설의 형식적이고 기법적인 측면은 독자에게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다소 난해함을 준다.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관되지 않은 사건의 나열과 파편화된 구보의 생각들로 인해 집중이 흐트러지기 십상이었다.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러한 작법과 형식을 사용했을까. 소설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하의 서울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소설 상에서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배경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거나 희망을 노래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현실임을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는 일상인들뿐만 아니라 평론가와 시인 같은 문인들까지도 황금광 시대의 열풍에 동조할 정도로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주의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정과 직장이라는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평균적인 생활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있는 구보는 소외감을 느낀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월급쟁이보다도 못하게 취급받는 현실에 대한 괴리감, 그리고 돈이 되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일상인들과 다르다는 거리감은 구보에게 고독을 느끼게 한다.이러한 구보는 오늘도 외출을 한다. 늘 그래왔듯 특별한 목적이 있는 외출은 아니다. 행복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서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구보는 나름의 탐색을 한다. 광교, 조선은행 앞, 장곡천정, 다방, 태평통, 경성역 등에서 주변 인물들과 상황을 관찰하고 탐색한다. 전차 안에서 예전에 선을 보았던 여자를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열등생이었던 자신의 동창이 예쁜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돈 때문에 부정적인 기사를 써야한다는 사회부 기자인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구보는 정다운 연인들을 보면서 고독감과 질투심을 함께 느끼기도 하고 동경에서의 사랑을 추억하며 한 여자에게 아픔을 주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술집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세상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려 하기도 하고 가난에 대한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이렇듯 구보는 끊임없이 여인과 행복, 그리고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탐색한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 구보는 끊임없이 걷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생각의 흐름도 함께 일어난다. 과연 해답이 없는 조선 사회에서 구보에게 어떠한 미래와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 구보는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구보는 그 행복을 진정한 행복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 소설에는 이러한 구보의 본질적인 고뇌와 정신적 방황이 담겨 있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구보의 이러한 내면적 흐름과 생각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왠지 모를 공감이 가는 부분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그리고 이러한 구보의 고뇌와 방황은 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정한 사건이나 갈등 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 간 인과관계도 없고 단지 시간의 흐름대로 사건을 나열할 뿐인 새로운 형식을 통해 당시의 혼란한 현실과 무너진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패배적 인물들의 슬픈 자화상2016.05.04-이태준 「달밤」(1933), 「밤길」(1940)이태준의 「달밤」(1933)과 「밤길」(1940)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소외되고 불우한 처지의 인물 유형에서부터 감정의 표출을 절제하는 담담한 필치까지 작가의 특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소외된 인물에 대한 연민을 통해 인간애를 중시하는 작가의식이 드러나 있으며, 나아가 그런 인물들이 살아가기 힘든 냉혹한 현실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갈수록 소외된 인물에 대한 연민, 그 너머로 한없이 무기력하고 의지박약한 그들의 모습에 답답함과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태준의 「달밤」과 「밤길」에 대한 짧은 소회는 그의 작품 속 두 가지 인물 유형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밤길」의 중심에 놓여있는 ‘황 서방’은 식민치하의 하층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무기력함과 패배주의적 면모는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서울 주인댁에 처자식을 맡겨 놓고 인천에서 모간꾼 생활을 하는 황 서방에게 아내의 가출로 인한 불행이 드리워지고, 그는 주인 나리가 업히고 들려서 데려온 계집애 둘과 목숨이 간당간당한 젖먹이까지 황망히 떠안게 된다. 그리고 ‘참고 참던, 누구에게 대들어야 할지 모르던 분통’은 ‘무…… 무돈년…… 제년이 먼저 급살을 맞지 살 줄 알구……’하며 그제야 상대를 찾게 된다. 아내를 향한 황 서방의 분노는 그 방향이 내부로만 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황 서방 자신을 향한 분노로 귀결됨에 다름 아닌 것이다. 황 서방의 분노는 왜 다른 대상과 방향을 찾지 못한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 그에게 다른 대상과 방향이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황 서방은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어린 자식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참하고도 가혹한 상황에 놓인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아비의 심정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순간 황 서방은 ‘남의 일두 생각해 줘야’ 한다는 권 서방의 말을 따라 ‘아무래두 죽을 자식인데 남헌테 구진 짓 헐 것 뭐 있나!’하며 아직은 죽지 않는 자식과 그를 묻을 삽을 들고 밤길을 나선다. 극한의 처절한 상황에서조차 자신보다는 남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그들의 순박함은 독자로 하여금 말을 잃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순박함과 인정에서 왠지 모를 불쾌감이 느껴진다. 집을 짓는 주인과 집에 들어올 주인을 향한 인정과 배려가 도시 빈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이 그들에게 갖춰야할 예의이자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인정과 배려를 하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감수해야할 무언가를 더 먼저 생각해야만 했던 것일까.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피붙이를 생매장해야할지도 모르는 비극의 상황에서조차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분노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황 서방과 권 서방은 아이의 생사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길을 걷는다. 이내 묻을 만한 자리를 찾아 아이를 누인 황 서방은 ‘한 자리 통곡을 한’다. 담담하게만 보이던 황 서방의 감정이 처음으로 폭발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는 극적으로 꼴각꼴각 소리를 내며 빗물을 게워 낸다. 황 서방의 감정의 표출과 곧 이은 아이의 기적 같은 회생은 왠지 모를 기대감을 갖게 한다. 끈질기게 연명하는 아이의 목숨 줄처럼 암울하기만 한 이들의 삶에도 과연 한줄기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어떤 의지의 표현이나 반전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죽은 아이를 구덩이에 묻는 것으로 무참히 꺾이고 만다. 그 어떤 처절하고 가혹한 상황에서조차 몸부림을 보이지 않는 극도의 무기력함과 패배주의적인 모습은 마치 스스로의 한계를 이미 정해놓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과 결단의 순간마저도 그 누군가에게 모조리 내어놓은 듯하다. 그리고 황 서방은 ‘누구에게 대들어야 할지 모르’는 분노를 다시 한 번 표출한다.‘저것 원술 누가 갚어…… 이년을, 내 젖퉁일 썩뚝 짤러다 묻어줄 테다.’「밤길」에서는 식민치하의 하층민의 무기력이 나타나 있었다. 물론 「달밤」의 ‘황수건’ 역시 순박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고 불우한 ‘못난이’이다. 그는 학교 급사나 신문 보조배달, 참외장사 등 여러 시도를 하지만 그의 태생적 장애와 시대적 제약으로 인해 계속적인 실패를 겪고 미래 또한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노래는 그 이상은 외우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담배를 퍽퍽 빨면서 지나가’는 결말에서 그 역시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적인 황 서방의 삶을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달밤」에서는 식민치하의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나’에 주목하고 싶다. 「달밤」의 ‘나’는 「빈처」의 ‘나’와 「치숙」의 ‘아저씨’와 같은 ‘식민지 지식인’이다. 「빈처」의 ‘나’와 「치숙」의 ‘아저씨’ 역시 현실의 부조리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부재하거나 의지를 상실했다는 점에서 무기력과 패배주의를 엿볼 수도 있겠지만, 「달밤」의 ‘나’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목표가 될 ‘이상’의 부재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그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무기력과 패배주의의 한 단면을 느낄 수 있다.황수건을 향한 ‘나’의 따뜻한 연민과 애정의 시선은 그것이 자신과 관련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음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원배달이 제일 부럽노라’고 말하며 ‘원배달의 방울만 차면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고 말하는 황수건 앞에서 ‘나’는 ‘그럴 것 없이 아주 신문사 사장쯤 되었으면 원배달도 바랄 것 없고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상관할 바 없지 않겠느냐?’고 조금은 허망한 소리를 한다. 반편이 황수건에게 신문사 사장이 웬 말인가.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치부하기에는 ‘나’와 황수건이 살고 있는 현실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 보이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못난이’ 황수건보다도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갖게 한다. 이러한 필자의 의문을 방증이라도 하듯 황수건 역시 그의 황당한 말에 ‘뚱그레지는 눈알을 한참 굴리며 생각하더니 ‘딴은 그렇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경난이 없어 거기까지는 바랄 생각도 못 하였다고 무릎을 치듯 가슴을 친’다.이처럼 「달밤」의 ‘나’가 보여주는 황수건에 대한 연민과 애정의 시선은 시대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그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와 다른 세상을 관찰하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얕은 관심일 뿐인 것이다. ‘그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는 그의 고백에서 황수건에 대한 이러한 ‘나’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즉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는 현실의 냉혹함이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달밤」의 ‘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이상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무기력이라는 점에서 「빈처」의 ‘나’나 「치숙」의 ‘아저씨’와 같은 지식인들과 구별되고, 이는 곧 작가의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를 벗어나 온전한 ‘나’를 추구하려는 날갯짓2016.04.20-이상 「날개」(1936), 채만식 「치숙(痴叔)」(1938)「날개」(1936)는 천재와 광인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 이상의 대표작이다. 「날개」는 이상의 작품 중에서도 내용의 난해함과 형식의 파격으로 한국현대문학사의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날개」가 내포하는 의미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은 다양한 관점에서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으며, 쉽게 해석되지 않는 작품에 대한 관심은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져 ‘이상’이라는 사람과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 대한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이상은 친부모의 경제적 곤궁함으로 인해 세 살 때부터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입적하게 된다. 그는 차가운 성정을 지닌 백모의 질시 속에 함부로 방임됨으로써 치명적인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고 한다. 어린 이상은 아주 가끔 제 부모와 남매를 찾아 그들이 사는 집으로 달려갔으나 친부모의 집을 무단 방문한 사실이 알려진 뒤에는 백부에게 꾸지람을 듣고 했다. 어린 이상은 이러한 환경적 요인들에 의해서 남과 ‘다름’을 강요받았고, 어린 이상의 대인기피와 조숙, 그리고 성장한 뒤 ‘이상’이라는 가명의 차용은 양자 입양이 빚어낸 내면 심리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친부와 양부 모두 아버지의 권위와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상은 심리적 고아라는 정체성에 고정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입양아적 분열증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이상의 유아기적 트라우마는 그의 정체성과 내면 심리를 형성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상의 여성관과 연애관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날개」는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부부관계를 아이러니컬하게 다룬 소설로 이상이 ‘금홍’과의 2년 남짓한 동거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왜 ‘나’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일 수밖에 없었을까. 이어지는 본 이야기는 그에 대한 이유이자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나’는 33번지 유곽에서 일하는 여인의 남편이다. 작품 내에서 ‘나’와 아내가 어떻게 해서 같이 살게 되었는지는 나타난 바가 없으며, 유곽의 사정상 ‘나’에게는 공간과 시간의 측면에서 금지와 억압이 주어진다. 아내가 손님과 일하는 시간에는 일하는 공간인 아랫방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고, 이 규율을 지키면 아내는 내가 있는 윗방으로 밥을 가져다주며 돈도 준다. 즉 주인공은 아내에게 철저히 예속된 관계이자 서식 당하는 존재이다. 아내가 준 돈을 모았다가 아내에게 주면 아내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잘 수도 있는 ‘나’는 윗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아내가 일을 하지 않고 외출하면 아랫방에 가서 놀기도 한다.실제로 금홍은 기생이나 작부, 창부의 부류에 해당하는 여성으로 이상과 동거하는 동안에도 남자들을 만나기 위해 자주 외출하고 때로는 이상과 동거하는 방에까지 남자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상은 금홍의 편의를 돕는다며 제 방을 개방해주고 친구 박태원의 집에 가서 자고 오는 일도 있었지만 이러한 이상의 나태와 방만, 그리고 무능력에 진절머리를 치며 금홍은 사나운 말과 손찌검으로 되갚았고 그런 금홍을 이상은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상과 금홍의 기묘한 관계를 고려할 때 「날개」의 일그러진 부부관계와 전복된 남녀관계는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렇듯 양자 입양과 백모의 질시 속에서 심리적 고아라는 정체성으로 인한 유아기적 트라우마는 예민한 성정을 가진 어린 이상의 내면 심리와 자아 분열 양상에 영향을 주어 이후 그의 여성관과 연애관에 반영되었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와 이에 대한 극복 의지가 「날개」에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33번지의 ‘아무와도 놀고 싶지 않고 인사하고 싶지 않’으며 오직 아내만을 아는 ‘나’의 사회적 관계는 고립되고 폐쇄되어 있는 아이와 같다. 또한 ‘나’는 경제적으로도 아내에게 철저하게 예속된 상태이다. 옷 한 벌 갖고 있지 않고 돈이 있어도 쓸 줄 모르는 ‘나’는 생존의 모든 부분에서 아내의 주도권 하에 놓여 있으며, ‘나’는 그런 아내에 대해 어떠한 거부나 저항을 표시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렇듯 ‘나’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행동성향을 드러낸다.또한 ‘나’의 소아적인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자신의 윗방과 아내의 아랫방이 세계의 전부인 ‘나’는 아내가 외출을 할 때만 아랫방에 들어갈 수 있다. 아내의 화장도구를 가지고 노는 '나'는 햇빛이 잘 드는 아내의 방을 놀이터 삼아 현실을 등진 생활을 한다. 화장품의 병마개를 열고 그 냄새에 취하는 ‘나’는 일찍이 받을 수 없었던 사랑을 보충하기 위한 작가의 시도인지도 모른다. 이는 ‘아내’로 상징되는 애정의 대상을 추구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받기를 원했지만 현실적으로 충족될 수 없었던 이상의 왜곡된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 이렇듯 외출을 감행하기 전까지의 ‘나’의 행동양식과 아내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과거 어린 이상의 불안정한 심리상태와 충족 받지 못한 애정에 대한 추구양상인 동시에 현재의 삶까지도 놓아주고 있지 않은 유아기적 트라우마에 대한 총체적 상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나’의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행동방식과 비정상적인 아내와의 관계는 ‘나’의 외출을 기점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폐쇄적이었던 ‘나’는 외출을 시도하며 아내와의 규율을 어기기도 하고, 쓰지 않고 모은 돈을 아내에게 쥐어주고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결국 ‘나’는 아내의 매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그 후 아내가 자신에게 먹여온 약이 아스피린이 아닌 아달린이란 것을 알고는 아달린 여섯 알을 한 번에 삼키며 아내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아내에게 돈이 왜 많은가를 연구하기 위해서 그러고 나서는 아내에게 돈을 쥐어주고 아내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자기 위해서 외출을 시도했지만 반복되는 잦은 외출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이는 ‘나’의 신경을 자극하고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유폐된 방을 떠나 거리로 나서는 순간 ‘나’는 윗방과 아랫방 사이에서의 비정상적인 관계로 인한 피로와 권태, 환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낳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