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행동론 신동엽 교수님1. 서론기술 개발 비용의 증가와 제품 수명의 단축으로 인하여 R&D 투자 대비 성과가 감소하고 있다. 인텔은 20년 전 약 3천만 달러면 가능했던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을 위해 2006년 약 30억 달러를 지출하였다. 신약 개발 비용 또한 10년 전과 비교할 때 10배 이상 상승하여 약 8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심지어 소비재의 개발 비용도 증가하여 P&G는 10년 전 약 천만 달러면 가능했던 생리대 개발을 위해 현재 2천만 달러에서 5천만 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R&D 비용은 크게 상승하는 데 비해 제품 수명은 급속도로 단축되고 있다. 제품 개발에 따른 기대 매출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저장 용량이 18개월 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1년 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으로 대체된 지 이미 오래이다. 80년대 약 4년에서 6년 걸렸던 하드 디스크 드라이버 신제품 출시가 90년대에는 6개월에서 9개월로 단축되었다. 제약 업계에서도 길어지는 승인 기간과 모방 약품의 빠른 진입으로 신약이 수익을 향유할 수 있는 기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이러한 R&D 효과 감소에 대응해 많은 기업들과 연구자들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 중 유력한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open innovation이다. open innovation은 기업 내부에 국한되어 있던 연구 개발 활동을 기업 외부까지 확장하여 외부 아이디어와 R&D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투입 자원과 시간을 절약하고, 내부 기술을 타 기업에 이전(License-out)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P&G의 ‘Connect & Develop’를 비롯하여, Cisco, Nokia, IBM 등 다수의 선진 기업들이 오픈 이노베이션을 도입하면서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사례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업들은 오픈 이노베이션의 도입을 주저하거나, 도입은 했지만 성공적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리 대학의 오픈 이노베이션 센터 책임자인 헨리 체스브루(Chesbrough) 교수는 open innovation을 ‘내부혁신(Innovation)을 가속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내외부 아이디어를 모두 활용하고,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내외부의 시장 경로를 모두 활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이처럼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업 내외부의 지식과 시장 경로를 활용하는 다양한 행위들, 즉 기업간 공동 개발, 제휴, 조인트 벤쳐 (Joint Venture), 오픈 소스 모델 (Open-Source Model, 대표적인 예는 Linux) 등을 포괄한다. 이러한 오픈 이노베이션은 과거에도 광범위하게 실행되어 왔으나, 대부분의 경우 외부 지식의 활용이 일회성에 그치거나 내부 지식을 보완하는 제한적인 형태였다.이와 달리 현재의 오픈 이노베이션은 외부 지식을 내부 지식과 동일한 중요도로 취급하고, 외부 지식/기술의 도입과 내부 지식/기술의 시장 진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과거와 차이점이 있다.Open innovation의 효과는?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업들에게 R&D 투입 자원의 절감 및 추가적인 매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R&D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이러한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과는 크게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첫째, 외부의 새로운 아이디어 도입을 통해 투입 자원 및 시간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R&D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세계적인 식음료 포장 업체인 Tetra Pak은 획기적인 살균 포장재의 개발을 시도하였으나, 내부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하였다. 이에 병원 기기 소독 회사와 협력하여 원하는 제품을 개발하였다. 이를 통해 제품 개발 기간을 2~3년 단축하였고, 유통점 점유율도 50% 향상시켰다.둘째, 내부 지식의 라이센스 아웃 (License-out)은 추가적인 매출을 창출해 주고, 내부 인재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인재 유지에도 도움을 준다. 1980년 약 30억 달러였던 특허 라이센싱 시장 규모는 최근 약 1,100업종에서 매출을 창출한다는 자부심을 줌으로써 동기를 부여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한다.셋째, 내부 아이디어를 외부의 시각으로 평가함으로써 현재 추진중인 연구 개발 프로젝트의 가치를 측정하고 향후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약회사인 Eli Lilly는 개발 중인 신약에 대해 과감히 라이센스 아웃을 실행함으로써 제품의 가치를 측정하고 이를 개발 전략에 반영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내·외부간 아이디어 교환을 통하여 기업은 자사가 잘 할 수 있는 핵심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기업들은 자사의 핵심 역량에 대해 과신하기 쉽고, 이로 인해 모든 것을 내부에서 개발하려고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항공기 제조 기업인 Boeing은 외부와의 다양한 시험을 통하여 자사의 핵심 역량은 생산이 아니라 시스템 통합과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연구 개발 자원을 시스템 통합 기술과 디자인에 집중하고 대부분의 부품을 아웃소싱함으로써 전체적인 이익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기존 조직의 한계 - 왜 Open innovation의 성공적인 도입은 어려운가?적지 않은 기업들이 성공적으로 오픈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성과를 향상시키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아직 도입을 주저하거나, 시도는 했지만 그 성과는 미미한 상태이다. 왜 이들은 오픈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도입,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오픈 이노베이션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외부 기술에 대한 불신이다. 기업 내부에서 개발되지 않은 기술에 대해 불신하는 소위 ‘NIH (Not Invented Here) 신드롬’은 외부 지식/기술의 도입 및 활용을 방해한다. 또한 R&D 과제 수행 시, 외부 기술이나 아이디어의 활용은 외부 기술을 확보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하는 데다 기술에 대한 통제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제의 불확실성을 높인다고 생각하기 쉽다. 연구 개발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외부 기술이나 아이디어 활용이 성공 가능성을 높여 준다 할지라도 내부 개발을 선택하기 쉽다.이와 더불어 연구자들로 하여금 오픈 이노베이션의 도입을 회피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픈 이노베이션의 성과까지 축소 왜곡되게 만들 수 있다.한편, 내부 기술의 라이센싱을 저해하는 것은 ‘NSH (Not Sold Here) 바이러스’이다. 자신들이 직접 팔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는 믿음이다. 이 또한 기저에는 사업 부서간 이기주의와 불안감이 존재한다. 사업 부서는 오픈 이노베이션이 활발하게 실행될 경우, 이전까지 독점적으로 사용, 판매할 수 있었던 연구 개발 성과물을 놓고 외부와 경쟁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오픈 이노베이션이 성공적일 경우, 성과를 창출하지 못한 사업 부서의 필요성이 감소할 것이며, 사업화를 성공하지 못한 데 대한 문책 가능성으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기 쉽다.오픈 이노베이션의 실행과 관련한 장애요인으로는 관련 지식과 네트워크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들 수 있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성공적 실행을 위해서는 필요한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누가 보유하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관련 법규 및 실행 프로세스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필요하다. 충분한 준비와 관련 역량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기업들이 오픈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시행착오를 겪기 쉬우며, 이러한 실패 경험으로 인하여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용성 자체를 의문시하고, 추가적인 실행을 더욱 회피할 수 있다.Open innovation의 성공 전략오픈 이노베이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먼저 소규모 실험을 통해 필요 역량과 성공 체험을 축적하고 이를 조직 내에 전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P&G의 ‘Connect & Develop’를 주도했던 Sakkab와 Huston은 최근 「Research Technology Management」誌와의 인터뷰에서 오픈 이노베이션 초기에는 소규모로 한가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성공적인 모델을 구축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Air Products and Chemicals사의 오픈 이노베이션 시스템 구축을 이끌었던 T고, 이를 조직에 전파함으로써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과에 대한 믿음이 조직에 뿌리 내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또한 관련 조직 구성원들과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오픈 이노베이션의 효과를 설명하고, 선진 기업들의 성공 사례를 공유하는 동시에 동기 부여를 통해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IBM의 경우, 오픈 이노베이션 도입 이전 실적 부진으로 최대 규모의 감원을 단행하였다. 여기에는 다수의 R&D 인력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오픈 이노베이션 도입 이후에는 추가적인 감원이 없었다. P&G의 경우, ‘Connect & Develop’ 도입 직후 대규모 감원이 있었으나. 이는 기업의 성과하락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처럼 구성원들과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과 함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IBM과 GE는 라이센싱으로 인한 성과를 관련 사업 부서의 성과에 반영함으로써 NSH 신드롬을 제거하고 내부 기술의 라이센싱에 대한 사업 부서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 냈다.마지막으로 오픈 이노베이션의 성공적인 도입과 실행을 위해서는 오픈 네트워크의 적극적인 활용과 오픈 이노베이션과 관련된 모든 프로세스를 지원하는 전문 조직의 구성이 요구된다. P&G 또한 초기에는 NineSigma, YourEncore, InnoCentive 등의 외부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외부 네트워크의 활용은 도입 초기 적은 비용으로 필요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실행을 위해서는 지적 재산권 등 관련 법규와 기업간 계약에 대한 지식, 그리고 실행 프로세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경험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팀을 발족시켜 R&D와 사업 부서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3. 결론폐쇄적 혁신으로는 이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개방형 혁신을 더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R&D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으로 인식되어 많은 기업들이 도입을 본다.
국문학특강 제출과제 설성경 교수님김영랑 詩論- 김영랑의 시에 나타난 저항의식Ⅰ. 序論한국 현대시의 전개에 있어서 1930년대는 우리가 각별한 관심을 갖고 살펴볼 만한 시기하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김소월로 대표되는 그보다 앞선 시기의 시인들이 닦아 놓은 일정한 발판을 기반으로 하여 한국시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주었던 때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우수한 작가들로 꼽히는 이들이 주로 이 시기에 그들의 핵심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일제치하의 이 땅에서 씌어진 대부분의 문학이 이 시기의 소산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이 시기의 시는 그것 자체로 거둔 일정한 성과와 뒷 세대를 위한 적지 않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30년대 한국시에 가해질 수 있는 비판의 전형적인 것은 아마도 그것이 일체의 정치적 이념을 배제해 버린 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영랑 김윤식(1903~1950)은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전개한 시문학파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의식이나 현실참여적인 요소들을 배격하고 오로지 순수서정을 바탕으로 언어의 심미성과 음악성을 추구한 시인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그의 시에 대한 논의나 평가도 초기시를 중심으로 언어미학적 우수성이나 순수서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데 집중되어왔고, 교육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획일적으로 고착화된 인식이나 접근방식은 김영랑에 대한 편향된 이미지를 만들 뿐 아니라, 그의 총체적인 시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김영랑의 시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저항적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유미주의만을 탐닉한 ‘순수서정시인’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개념의 ‘민족저항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새롭게 위상을 정립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Ⅱ. 本論 1 - 김영랑 시에 나타난 저항의 배경한 시인의 이미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특히 영랑의 경우와 같이 기존의 개념과는 정 반대되는 ‘저항시인’으로써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시 작품에 나타난 저항적 면모와 함께 그의 생애 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저항적 행적을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식인의 행보가 그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민족저항시인으로서의 김영랑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사적, 전기적인 관점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나 저항적 행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저항적 경향을 해석하고,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1. 개인적 배경앞서 언급하였듯이, 흔히 영랑을 일제의 압박과 고통스러운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적 감성과 감미로운 서정에 침잠하여 언어의 조탁에 의지한 현실도피적인 연약한 시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많고, 현 교육계에서도 그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부유한 가정 출생에 부족함 없는 그의 배경은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왔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행적과 생애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우리의 선입관과는 달리 김영랑은 식민지 지식인이자 시인으로서 일제에 저항했던 뚜렷한 행적을 지니고 있어, 이를 네 가지로 간추려서 제시하고자 한다.첫째, 고등학교 재학시절 고향 강진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는 점이다. 그리고 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그는 독립투사로서의 행보를 기약하며 중국 상해로 건너가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최근 강진군에서는 김영랑의 독립운동 전력과 관련하여 그를 독립유공자로 추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둘째, 동경 유학 시절 혁명가 박열과 친교를 맺었다는 점이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한 그의 시세계를 구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추론할 수 있다.셋째, 1930년대부터 황국신민화정책으로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해방이 될 때까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삭발명령,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을 일체 거부하였다는 점이다.) 김영랑의 3남 현철씨의 『나의 아버지 영랑 김윤식』에서 그의 이러한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넷째, 김영랑은 단 한편의 친일 문장도 남기지 않은 작가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사실을 감안해보면 김영랑의 삶은, 물론 죽음에 맞서 억압받는 조국의 현실에 저항했던 이육사와 윤동주의 항거에는 못 미친다고 할지라도, 식민지 조국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이자 시인으로써의 저항적 행적으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다.2. 시대적 배경김영랑이 창작활동을 했던 30년대에 이르러, 일제의 탄압은 서서히 심화되었고, 특히 1940년을 전후한 시기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체제 강화와 함께 최고조에 달하면서 ‘문화의 암흑기’였다. 더불어 일제는 ‘내선일체론’을 내세우며 식민지 조선을 그들에게 동화시키려 하였고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조선인들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에게 일본천황의 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여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를 강제하고 1939년에는 창씨개명을, 잇따라 교육령 개정을 통해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를 상용하도록 강요하였고, 1941년에는 한국어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조선어 말살정책과 더불어, 그들의 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이 아니면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또한 『조선일보』,『동아일보』등 민족지는 1940년 8월 10일자로 강제 폐간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태는 절정에 다다랐다.)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친일 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붓을 꺾고 자취를 감춘 문인이 많았고, 징용으로 끌려가거나 구금상태에 놓인 문인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문학작품의 자유로운 창작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랑은 한국어 사용을 전면 금지한 1941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일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의 행동은 절필한 작가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독을 차고』가 황국신민화정책이 덜 발효되던 1939년에 쓰여진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고 볼 수 있겠다.Ⅱ. 本論 2 - ‘저항문학’으로써의 영랑의 시‘저항문학’이란 ‘압제나 외국지배에 대하여 싸우는 문학’이라고 정의되며,)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당연히 그 대상은 일제이다. 따라서 저항문학을 우리나라의 항일 문학적 상황에서 재정의하면, 일본의 한국 식민지 통치에 대하여 저항하는 내용을 지닌 문학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저항문학의 경우에도 적극적 저항과 소극적 저항으로 나뉜다. 적극적인 저항이 보다 직설적으로 일제 당국이나 통치체제 및 친일적 대상에 대하여 강렬한 거부태도와 항거의식을 나타낸 데 비하여 소극적인 저항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완곡하게 표출하는 작품들이 속한다.) 일부는 적극적 행동만이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지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경우, 시를 쓰는 일 자체가 곧 행동이고, 그 시안에 저항적 문맥이 그러날 때, 그 시로써 충분히 시인 본인의 사상을 표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작품이 아닌 행동에만 그 기준을 두고 있는 태고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시인의 저항정신은 작자의 시정신과 시작 태도를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고 보는 바이다. 어둡고 궁핍한 식민지 시대에 작자의 친일성과, 조국과 삶의 문제, 자아의 고민. 민족의 현실등을 노래한 시 등을 모두 저항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면모를 담고 있는 김영랑의 시도 저항시의 일부라고 보아야 하며, 지금부터 김영랑의 실제 작품을 통해 그의 시속에 농축된 저항시적 면모를 살펴보도록 하겠다.1. 당대 현실의 반영과 지식인으로써의 비애김영랑의 시에는 통념과는 달리 당대의 열악한 시대적 상황을 비유를 통해 반영하는 한편 그 현실에 처한 지식인으로서의 갈등과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검은벽에 기대선채로해가 수무번 박귀었는듸내 기린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그가슴을 퉁 흔들고간 노인의 손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었으려나땅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이저졌을 나박같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사람인양 꾸민 잣나비떼들 쏘다다니여내 기린은 맘둘곳 몸둘곳 없어지다문 아조 굳이 닫고 벽게기대선채해가 또한번 박귀너늘이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거문고」1939년 『朝光』1월호에 발표된 이 시의 핵심어는 ‘기린’이다. 기린은 시의 제목인 거문고의 비유적 표현물이자 동시에 영랑 자신이며,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던 우리민족 전체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인다. 즉, 영랑은 이 시에서 신령스런 상상의 동물인 기린과, 자신의 거문고를 통해 시대를 잘못 만나 제 노래를 잃어버린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리떼’와 ‘잣나비떼’는 애국지사나 우리민족에 비유된 ‘기린’괴 대비되는 일제와 매국노를 암시한다. 동물의 대비관계에 빗대어 민족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시가 발표된 1939년은 국민징용령과 창씨개명이 본격화되어, 황국신민화정책이 그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시기였다.北으로北으로울고간다 기러기南郡의대숲밑뉘 휘여 날켯느뇨앞서고 뒤섰다어지럴리 없으나간 열픈 실오랙이네목숨이 조매로아-「가야금」같이 발표된 이 시는 위태로운 민족의 현실과 운명을 가야금의 속성에 빗대고 있다. 1연은 일제의 탄압과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이주해가는 민족의 상황을 그리고 있으며, 2연은 그 이주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냉혹한 현실에 의한 것임을 드러낸다. 또한 3연은 이주하고 있는 광경에 대한 묘사이며, 4연에서는 그러한 비극적 상황에 처한 우리 민족의 삶이 ‘실오랙이’처럼 날아가는 기러기떼와 같이 위태로움을 한탄하고 있다. 이 두 시와 「북」과 같이 우리 고유의 악기를 빌어 표현한 것은 그것들이 민족의 정서나 정신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므로, 민족의 대체물로써 손색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한글전용, 그 객관적 근거찾기 작업1. 표기방식의 종류와 그 차이)① 한글전용 : 한글 만으로 표기하는 방식보기) 토박이말 '사람'에 해당하는 한자어는 '인간'이다.② 한자병용 : 한자를 병기하는 방식한자 나란히 쓰기?한자 덧쓰기?한자 함께 쓰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보기) 토박이말 '사람'에 해당(該當)하는 한자어(漢字語)는 '인간(人間)'이다.③ 한자혼용 :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쓰는 방식보기) 토박이말 '사람'에 該當하는 漢字語는 '人間'이다.2. 한글전용론의 주된 근거① 교육의 진정한 효과를 겨누기 위하여② 기계화의 효과③ 겨레 문화의 창조적 발전을 위하여④ 글자 발달의 원리에 순응하기 위하여글자 발달의 다섯 계단: 매듭글자>그림글자>뜻글자>낱내글자>낱소리 글자⑤ 시대 정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하여⑥ 겨레의 독립 자존의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⑦ 겨레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다.3. 한글전용론의 객관적 근거① 한글의 실효성한자능력검정시험 열풍이 일고 있다. 일부 대학은 한자능력검정시험 자격증 급수를 입학전형의 기준 중 하나로 반영하고 있으며 공무원 취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 국어생활에서 한자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한자가 ‘부가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우리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동떨어진 격리적 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일간지 및 잡지가 한글만으로 쓰이고 있는 것에서도 또한 입증된다. 또한 대학 신입생의 한자능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현재의 모습은 한자가 일상생활 및 기초학문 학습에 있어서 그 필요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② 북한의 예북한은 1949년 한자폐지 이후 ‘말다듬기 운동’을 실시했고, 1966년의 문화어 사업을 통해서 일본어 및 한자어를 지양하고, 고유어를 살려 쓰기 시작했다. 문화어는 한글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③ 사전의 60%가 한자어?쪽수단어총수안 쓰는단어가용단어현재 쓰고 있는단어의 비(%)현재안 쓰는단어의비(%)앞 집단2**************************166423416436중간집단1*************12**************************뒤 집단2*************21**************************위 표는 ?동아 새국어 사전?(이 기문 감수, 1991)을 대상으로 표집 처리한 것이다. 편의상 신뢰도와 한자 용어의 집중성을 피하고 평준화하기 위해, 이 사전의 앞 부분, 중간 부분, 끝 부분의 세 곳을 무작위로 택해서, 각각 세 쪽씩을 뽑아 대상으로 삼았다.이 분석 통계표를 보면, 70 퍼센트가 아니라 59 퍼센트 중에서 순 우리말 단어를 제외하면 50 퍼센트도 안 된다. 곧 70 퍼센트라고 하는 한자어에서 사어화되어 현재 쓰고 있지 않은 40 퍼센트를 빼내면 30 퍼센트 정도의 한자 용어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비율인 것이다. 이렇게 50~60년 전과 지금과의 변화는 엄청나다.)④ 전문용어의 한글화한자혼용자들은 한글이 전문용어로서 쓰이는 것에 대해 ‘대안 없는 한글 찾기’라며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법률 용어를 필두로 아래 표의 예시와 같이 철학 전문서적까지도 한글화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를 실행하려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한자혼용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4. 한글전용론이 해결해야 할 문제① 법조계의 한글화)다양한 전문용어를 필요로 하는 법조계 등의 특수한 영역에서는 아직은 한글만으로는 모든 용어를 대체하기 힘들다. 이는 그 분야에 있어서는 한글만으로의 의미가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한자를 병기하되, 순화 가능한 우리말을 찾아보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② 학습의 문제북한에서도 한자어 교육을 폐지하고 나서, 고전 영역 연구를 위해 한자 교육을 재개한 실례가 있다. 즉, 생활에서 쓰이는 용어가 아닌 전문 분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우리의 옛 기록들이 한자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을 볼 때, 한자교육은 필요하다. 다만, 한자교육을 위한 한자병기의 필요성은 주객전도의 상황으로, 적절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1. 序論 - 「춘향전」의 개괄「춘향전」은 탄탄한 ‘만남-사랑-이별-시련-재회(보상)’이라는 탄탄한 스토리와 어사와 춘향이라는 흥미있는 인물간의 사랑이 소재라는 점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온 거대작품군을 구성한 한국의 대표고전이다. 현대로 오면서 춘향전은 판소리를 넘어서 영화와 연극 등으로 수없이 개작되었고, 지금도 ’살아있는 고전‘으로써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그러나 춘향전은 한국 최고의 고전이라 불리며 아낌없는 갈채를 받으면서도 표지에는 항상 ‘작가미상’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녔다. 이에 작가 찾기에 관한 연구들이 시작되었고, 촌평적 작가설과 광대설화 엮음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춘향전이라는 대작을 만들어냈다고 보기에는 불합리한 점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이 점을 직시하고 2000년 「산서 조경남 작가설」이 제기된다. 이전까지의 연구와는 다르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한 철저한 근거를 바탕에 둔 이 주장은 한국 국문학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고, 지금도 끝없는 연구를 통해 발전과 보완을 거듭하는 중이다. 따라서 이 글은 춘향전의 작가 찾기에 관한 종전의 두가지 주장과 「산서 조경남 작가설」세 가지 주장을 살펴본 후에, 춘향전의 고전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향유되는 한 차원 더 승화된 「춘향예술」로써의 활용방안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2. 本論Ⅰ -「춘향전」의 작가연구2.1 촌평적 작가설먼저 춘향전의 작가에 관해 가장 먼저 김태준, 이가원, 권상로 등에 의한 ‘촌평적 작가설’이 제기 되었다. 이 주장은 체계적인 논리나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단순한 언급들이었다.촌평적 작가설의 예남원땅에 춘향이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얼골이 지극한 추물임으로 시집을 갈 수 없어서 자살하야 원혼이 되었더니 그 후로는 남원부사가 오는 쪽쪽 죽었음으로 폐읍지경에 이르게 되었더니 어느 대작가가 원호을 위로하기 위하야 소설로 지어낸 후에는 무사하였다고 한다.)2.2 광대설화엮음설두 번째는 광대설화엮다는데서 시작한다. 그는 춘향가가 그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진해진 살풀이 굿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이를 수정 보완하며 제기된 것이 김동욱(1961))의 광대설화엮음설이다. 그는 ‘무가→춘향전’의 논리가 비약이라고 판단하고, 무가와 춘향전 사이의 어떠한 중간적 과정이 있었으리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중간적 과정을 광대의 적층문학에 의해 탄생한 판소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천민이었던 광대를 춘향전의 엮은이로 제기하면서 충격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춘향전은 이러한 광대의 원춘향전이 양반이나 서리에 의해 개작되고 그 내용이 보완되고, 외정창사문학으로 체제를 갖추어진 것이라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이 주장이 논리적 설득력을 지니기에는 많은 한계가 보인다.광대설화 엮음설의 한계)1. 광대가 어떤 방법으로 근원설화들을 해체하고 극적 서사구조의 춘향전을 탄생 시킬수 있었는가?2. 왜 소설의 배경이 남원과 광한루인가?3. 천민출신인 광대가 어떻게 금준미주시 소재를 통해 변부사를 풍자하고, 암행어사의 활동을 그토 록 자세하고 치밀하게 서술할 수 있었는가?4. 광대에 의한 창작시기가 1754년 이전시기임이 밝혀져야 한다.5. 광대에 의한 판소리가 어떻게 양반층의 지지를 얻어 한문소설로 개작될 수 있었는지 밝힐 수 있어야한다.2.3 조경남 창작설세 번째로 제기된 주장은 산서 조경남 작가설이다. 이 주장은 춘향전의 여러이본들 속에서 공통화소)를 찾아내고 이 공통화소를 추출, 결합할 수 있는 대상을 작가로 상정하고 탐색하여 찾아냄으로서, 가장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작가찾기 연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이 주장은 이전까지 의병장으로만 알려져 온 ‘산서 조경남’을 춘향전의 작가로 추측하면서 그가 춘향전을 창작할 수 있었던 근거들을 제시한다. 그 근거는 크게 4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먼저 조경남이 문장력을 갖춘 성리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13세 때 세무리의 해)를 관찰하고, 잡록을 쓰기 시작하여 57년간의 기록을 글로 남긴다. 의 상황들을 「난중잡록」에 기록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 사고에 기초한 잡록 지필과 당대 설화들을 엮은 「소견록」의 창작, 에서 보여주는 당대 현실인식은 그가 춘향전의 작가임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춘향전에 나타나는 삽입시가의 ‘보여주기’ 기법이나 당대 현실에 대한 비유적 비판은 춘향적 속에 녹아서 나타난다.두 번째는 그가 암행어사 계서 성이성(1595~1664)의 스승이라는 점이다. 조경남은 성이성의 부친인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재직하던 시기(1607~1611)에 춘향전의 인물모델로 추측되는 소년 성이성을 가르치게 된다. 이러한 인연은 성이성이 첫 번째 암행어사 길에 남원에 들러 조경남과 광한루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기록이 공적문서인 암행어사 일지에까지 나와있음을 통해 둘이 각별한 사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만남에서 조경남은 성이성으로부터 당대 피폐한 조선의 현실과 관장들의 부정을 전해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리고 이 충격이 춘향전의 창작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세 번째는 그가 남원출신이라는 점이다. 춘향전의 배경은 항상 남원과 광한루이다. 남원과 광한루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기에 그가 춘향전의 작가라는 근거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된다. 또한 우리 중?노년층의 머릿속에 6.25라는 전쟁의 비극이 생생하게 살아있듯이 조경남도 양란을 겪었던 인물이기에 그는 남원의 전쟁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그가 남긴 「난중잡록」,「속잡록」에서 그가 현실에서 느꼈을 비참함과 굴욕감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전쟁의 땅이었던 남원을 배경으로 하고, 광한전을 모티브로 삼은 광한전을 사랑 즉, 희망의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서 조선의 재건의 꿈을 춘향전에 담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金 樽 美 酒 千 人 血玉 盤 佳 肴 萬 姓 膏燭 淚 落 時 民 淚 落歡 聲 高 處 怨 聲 高금준미주시네 번째는 ‘금준미주시’의 인용이다. 금준미주시는 어사가 변부사를 풍자하는 대목에 인용되는 시로 춘향전의견록』에서 먼저 이 글을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암행어사 성이성과의 관계와 금준미주시의 인용은 조경남이 춘향전의 작가라는 주장의 신빙성을 제고시킨다.3. 本論Ⅱ -「춘향전」은 더 이상 고전이 아니다.3.1 「춘향전」, 그 문학적 우수성「춘향전」은 앞서 말했듯 한국 고소설의 대표작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많은 분량의 연구서를 만들게 했으며 아직도 연구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는 학계의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고소설로써의 「춘향전」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참신하고 현대적인 해석이라 할지라도 학문으로서의 고소설 연구의 답습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점을 지닌다.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300여 년이라는 시간동안 -근원설화를 고려한다면 창작 훨씬 이전부터- 대중들로 하여금 보고, 듣고, 읽고 즐기게 하는 그 요소가 무엇이며 장르의 구분 없이 끊임없이 재창작하게 하는 힘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이것이 대중과는 동떨어진 연구대상일 뿐인 단순한 고전작품으로서의 한계에서 벗어나 21세기인 현대에 이르러서도 「춘향전」이 고전이면서 고전이 아닐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춘향전」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문학적 요소가 있다. 첫째로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이다.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없다는 점에선 한계를 지니지만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이룬다는 숭고한 사랑의 승리는 단순하면서도 대중을 감동시키기 쉽고 명쾌하다. 둘째로는 방자나 월매로부터 보이는 권위의식을 무너뜨리는 생동감 있는 인물상이다. 코믹한 요소를 통한 스토리의 전개는 대중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배계층의 횡포성과 부패성을 폭로하고 그들의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는 해학을 통해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대리만족을 통한 통쾌함을 준다는 점이다.3.2 「춘향전」, ‘춘향 예술’로의 승화「춘향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판소리는 구비문학적 요소를 띠고 요 성장문학이며 적충문학이다.이러한 점에서 「춘향전」에는 모든 계층과 모든 상황의 한국인들이 두루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보편적 문학소를 가지고 있고 더불어 변화 가능한 개방성을 지니고 있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춘향전」을 일개 고전작품으로 독립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복합적 개념으로써 ‘춘향 문화’이자 ‘춘향 예술’로 이해해야 좋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의 현실에 비춰볼 때 「춘향전」은 다른 의미의 고전으로서의 의미마저도 많이 퇴색한 것 같다.판소리는 더 이상 모든 계층의 향유물이 아니며 춘향의 절개 또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먼 과거처럼 보인다. 조상현 명창의 춘향가를 바탕에 두고 영상언어로 춘향전을 만든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만 하더라도 그 이전의 서편제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에 비했을 때 국내에서의 흥행 실패는 「춘향전」의 스토리전개방식과 판소리라는 형식이 이미 현대의 젊은층에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판소리 생성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춘향전」이 민중의 갈채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춘향과 몽룡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변학도에 항거하여 이도령에 대한 절개를 지키는 춘향의 모습은 모순을 내포하면서도 상승을 희구하는 조선 후기 민중의 자화상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이도령이 극적으로 내려와 변학도를 응징하는 모습은 현실적으로는 불가했지만 민중의 꿈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 자아의 신장과 꿈의 형상이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 갈구되는 새로운 시대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기 때문에 열렬히 환영받았고, 춘향의 수절이 당시의 봉건윤리에도 합치되었기 때문에 양반이나 하층민 누구에게나 영합되는 국민 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민중 최고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춘향전」이 여러 장르로 재창작되는 노력은 여기저기에서 엿보이고는 있지만 조선후기 창자가 청중을 위해 소리를 했던 것처럼 청중에 비견되는 관객이나 독자가 있어야 하는데 춘향전 창작 당시에 비하면 상황은 극도로 열악하다. 소수의이다.
『고양이 대학살』서평지난 방학 때, 과외 학생의 영어 만화 그리기 숙제를 해주느라 오랜만에 ‘빨간 모자’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빨간 모자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편찮으신 할머니께 음식을 드리러 간다. 가는 도중 늑대를 만나지만 무사히 피하고 할머니 댁에 도착한다. 그러나 할머니 댁에서 문을 열어준 것은 할머니를 잡아먹고 침대에 누워 있던 늑대였다. 빨간 모자는 늑대에게 잡아먹혔지만, 사냥꾼의 도움으로 할머니와 함께 살아나게 된다.하지만 이 책의 제 1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빨간 모자’의 진짜 내용은 이보다 더욱 잔인하다. 늑대는 할머니를 죽인 후 그 피와 고기를 따로 두었다가 그것을 빨간 모자에게 먹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빨간 모자의 옷을 하나씩 벗긴 다음 침대에 들어오게 하여 잡아먹는다.한때 ‘동화 다시읽기’ 열풍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었다. 권선징악의 고전적 결말과 선남선녀의 행복한 결합으로 끝나는 동화의 전통적이고 식상한 구조에 반기를 들어 아이들의 창의적 사고 향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관련 서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힘입어 ‘어른이 읽는 그림동화’, ‘스무살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 등의 성인판 재해석 동화도 등장했고, 나도 나름대로 관심있게 사 보았던 기억이 난다.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된 ‘고급 문화’에 의존한 해석을 거부하고 역사 서술의 방법론에 중점을 둔 비판적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사료를 해석한 단턴의 저술도 기존의 방식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해석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양이 대학살』은 로버트 단턴이 ‘관념의 사회사’적인 입장에서 18세기의 프랑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연구한 책이다. 단턴은 이 책에서 총 6개 장에 걸쳐 농민들의 민담,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학살 소동, 몽펠리에 주민의 도시 설명서, 한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등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들을 제시하여,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이라는 부제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듯이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에 대해 논하였다.그는 역사 서술의 방법론에 중점을 둔 비판적 역사철학을 바탕으로 대량 인쇄의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끼진 영향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그는 계몽사상을 연구할 때,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된 ‘고급 문화’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으로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대중의 영향력을 연구하여 역사적 의미를 얻으려 하였다.로버트 단턴은 ‘빨강 모자 소녀’를 포함하여 초기 마더 구스 이야기를 하나의 사료로 보고 접근을 했다. 사실 18세기 초반의 프랑스 농민들에게, 삶은 지극히 잔인하고 치졸하였으며, 비정한 전쟁과도 같은 경쟁이었다. 인구는 너무 많았지만 먹을 것은 너무 적었다.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층의 착취는 가혹했고, 그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라고는 없었다. 험하고 고단하기만 한 세상을 살아갔던 구체제, 앙시앵레짐의 농민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공유하던 민담은 ‘소망의 상징적 충족’도 아니었으며, ‘환상을 통한 현실 도피’는 더더욱 아니었다. 민담의 잔인하고 가혹한 측면은 현실이 반영된 흔적이었고, 민담이 주는, 사람들을 함부로 믿지 말고 생존 경쟁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등의 교훈들은 실제 삶에 적용해야하는 덕목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볼 때, 18세기 프랑스 민담이 그에게 사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구체제 프랑스 농민들의 시대적 상황을 엿보게 해줄 희귀한 자료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이것은 사료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본다.이렇듯 18세기 프랑스 농민들에게 민담은 일종의 지침이었으며, 농민들은 민담을 통해 세계를 인식했고, 그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익혔다는 것이 이 책의 제 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 :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가 가질 수 있는 정의라고 결론지으며 1장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를 짓겠다.서문에서 로버트 단턴은 ‘함께 모아놓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텍스트들’이 제공하는 놀라움을 추적하며, ‘낯선 세계관을 탐색’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제 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대학살’에서는,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의 견습공이 남긴 기록을 통해 막 싹트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드러낸다. 인쇄공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무자비한 착취를 당하는 동안 장인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있었다. 에 시달리던 인쇄공들은 가뜩이나 모자란 그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든 고양이들을 약간의 트릭을 동원하여 모두 잡아 죽인다. 인쇄공들의 트릭에 속아 넘어간 부르조아들은 고양이를 "학살"하는 인쇄공들을 두 눈 멀거니 뜨고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 대학살은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민중 봉기’를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결과적으로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부르주아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건인 것이다. 이렇듯 단턴은 이름없는 인쇄공이 남긴 기록을 통해,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노동자의 지위, 싹트기 시작한 노동자의 계급 의식을 알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간 개인의 기록은 민담과 더불어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공감하게 하는 글이다.역사학자 E.H.카는 충실한 사료, 그리고 사실적 사료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떤 시대에 있어서의 사건이나 사실은 모두 역사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며 그 선택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이에 따라 단튼은 고양이 대학살 사건 이외에도 기존의 정통 역사서에서는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 민담, 도시 설명서, 수사관의 조서, 서적에 숨어있는 역사적 의미를 읽어냄으로서 종래와는 다른 밑으로부터의 역사라는 새로운 차원의 역사 서술을 하였다.그는 위와 같은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가 그간 교과서 등의 텍스트를 통해 기존의 왕조변천이라는 틀 속에 갇혀서 한정적으로 알고있던 프랑스 역사를 다르게 바라보도록 돕는다. 기존의 역사서에서 '빨간 모자'와 같은 농민들의 민담은 그들의 살아있는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없었고, 그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에나 적합한 이야기꺼리 한 자락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이를 단턴은 새로운 사료의 발굴을 통해 민담이 실제 삶에 뿌리가 닿아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역사 속에서 농민들의 삶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동안 무시되어오던 자료에 그에 걸맞는 사료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단튼은 다양한 방면에서 프랑스 18세기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아날 학파가 주장하는,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파생된 문화적 요인을 엿볼 수 있다는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 아울러 더 나아가 역사는 과거의 한 영역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아날 학파의 입장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역사서술은 기득권 층, 즉 왕가나 사상가로부터 만들어지던 역사가 아닌,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논증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의심하던 자료를 전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이 그 가치를 지닐 수 있었던 원인은 아무리 개별적이고 특이한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징의 체계 속에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라는데 있다. 즉 개별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가 함께 받아들이는 관용적 표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이 과정에서 단턴의 저술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는 사료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점이라고 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동안 왕조사의 변천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사, 문화사에 대한 역사연구로부터 탈피하였고, 사료의 재발견을 통한 재해석을 통해 역사학과 인류학의 만남이라고 감히 정의내릴 수 있는 이러한 역사 서술을 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역사서술을 이루어내었다.그리고 단턴은 이 책을 통해서 문화의 해석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기여하였는데, “문화란 궁정이나 사상가의 서재에서나 만들어져 '낮은 곳'으로 하달되거나 파급된다”고 하는 종래의 문화사가 지니던 편견을 깨고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쓰려고 했다. 이에 따라 종전보다 많은 사람들을 역사의 서술대상으로 편입시켰다. 아울러 사료의 범위도 객관적 사료만을 증거로 삼는 것이 아니라, 민담과 같은 전해져 내려오는 신빙성이 덜 한 이야기들로부터 과거 사람들의 생각,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함으로써 과거를 통해 현재의 나, 그리고 현재의 사회를 읽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사료와 서술에서 벗어나 민중의 일상생활과 언어 등이 역사의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었다. 예전에 역사 서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들을 문화사는 포용하고 있고, 그런 사료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서 역사를 훨씬 풍성하고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일화에 대한 여러 가지 층위에서의 접근과 그런 다양한 해석을 통합하는 깊이 있는 시각과 열린 태도가 필요하다. 아울러 역사학 외에도 인류학, 민속학, 문학비평 등 다양한 학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이들간의 조화 역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