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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서양 근세사 르네상스 시대 세 거장
    목 차▶ 프롤로그▶ 르네상스 사회와 세 거장- 르네상스 예술의 흐름- 르네상스 사회적 배경-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 젤로- 라파엘로▶ 에필로그▶ 프롤로그르네상스라는 말은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의 그리스 ·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단순히 미술의 황금시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중세기의 종말을 가져오고 생동하는 근대를 이끌어 온 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문예부흥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그것은 결코 문예나 미술에만 국한된 문화운동이 아니고, 정치와 경제와 사상의 인류생활의 모든 영역에 결친 일대 개조운동 으로서 근세사의 흐름치고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은것이 없으며, 근대 문명의 모든 요소와 요인이 또한 거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세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삶과 맞물려 그 들이 살았던 근대사회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의 흐름르네상스 시대에 후원자들은 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지식과 기술을 최고로 발휘하고 더 발전시키도록 아낌없이 밀어 주었다. 예술가의 운명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동시대의 걸출한 위인들, 강대한 도시, 군주의 궁성과 얽히면서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된다.르네상스 요람인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어떤 도시보다 먼저 시민경제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직인 조합이 경제 활동에 질서를 부여하고 메디치를 비롯한 은행 가문들 덕분에 도시의 삶이 윤택했다. 정치에서도 도시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민들은 안정된 삶을 누렸다. 이와 더불어 고대 농업시대의 사회에 자극을 준 활동적인 힘은 결코 봉건적인 것도 아니고 교회적인 것도 아니었다. 중세 문화에 새로운 다이나믹한 힘을 가져다 주고, 새로운 형태의 재화를 낳게하고, 또 순수한 농업 경제의 정치적, 문화적 제약성으로부터 서구인을 해방시킨 것은 도시 생활과 화폐 경제의 부흥에 수반한 『상업의 부활』이었다. 지중해를 장악하던 이슬람세력이 약화되고, 봉건 사회가 점차적으로 안정됨으로써 내륙여행이 비교적 안전해지자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동방과의 직접적인 교역이 재개됨으로써 비로소 야기될 수 있었던 십자군은 지중해에서 기독교 세계의 상업을 자극하였고, 또 레반트(Levant)에 항구적인 상업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서구 기독교 세계의 다른 일단에서 노르만의 해적 행위의 중지는 평화 교역의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교역의 부활이 도시 공업의 기술 향상에 필요한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경제 활동은 곧 자연 경제의 한계를 넘어서 발전하게 되었고, 또 교환의 매개로서 화폐의 사용이 필요하게 되었다.상업의 부활은 일반적으로 도시 생활의 부활을 수반하였다. 초기 봉건 시대를 통해서 도시들이 요새도시로, 또는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중심지로서 명맥을 유지했었지만, 이러한 도시들이 도시 사회의 참다운 특징인 인구나 경제 생활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집단이, 무역 루트의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은 요새도시나 성, 수도원 혹은 대사원을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 비로서 활기에 넘치는 도시 생활은 부활하게 되었다. 도시의 발생은 봉건경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이며, 자극적인 경향을 가졌다. 도시는 농촌 지역에 대해서 잉여 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제공하고, 그 댓가로 농민층에 외래 상품과 공업 제품을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 경제를 정지 상태로 동결시키고 있었던 장원 경제의 고립 상태와 자급 자족적 형태의 붕괴를 초래하였다.새로운 도시 경제력의 발생이 끼쳐준 게 된다. 불과 14살 때 베로키오의 제자가 되면서 다빈치는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보인다. 그는 다른 견습생들과 함께 소묘와 그림과 조각 기술을 익혔으며 때로는 베로키오가 하는 작업을 도와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다빈치는 베로키오 공방에 입문한 뒤 20살이 되었을 때 베로키오 작품인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왼편의 천사를 완벽하게 그려 넣음에 따라 명실공히 거장으로 인정받게 된다. 다빈치의 대표작으로는 , , , , , , , , 및 다수의 작품이 있으며, 그 외에도 수십 편에 이르는 습작들이 있다.당대 최고의 대작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 분야에서만 두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기계 설비, 인체 연구, 지질학, 고생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의 뛰어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시대를 크게 앞질러 갔기 때문에 실행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따랐다. 만약 그의 생애 동안 정리해 놓은 수천 장의 기록물들 가운데 그가 계획하고 설계한 아이템들이 무수한 실험을 거쳐 실행에 옮겨졌더라면 오늘날 에디슨보다 더욱 뛰어난 발명왕이라는 칭송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회화를 통해서만 일부 찾아볼 수밖에 없다. 그의 완벽한 걸작은 과학적 논리와 투철한 탐구 활동을 통해 얻어 낸 소산물을 회화와 절묘하게 결합시켰기에 탄생될 수 있었다.다빈치는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에서 삼십 대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피렌체의 로렌초 대공은 다른 도시의 군주들에게 학자나 예술가들을 보내서 외교적 우호 관계를 맺곤 했는데 이번에는 레오나르도가 뽑혔다. 실력자로 알려진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부강한 도시 밀라노느 하고 싶은 일을 맘 껏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였다. 여기서 그는 각종 무기, 비행기구, 잠수정, 건축 구조물 설계, 인체의 각종기관 연구, 토목 설계, 여러 가지 악기 고안 및 제작 그리고 여러 가지 떠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간다. 그동안 미뤘던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원근법, 인체비례이론, 시각이론, 수로학, 항공학, 열역학 같은 학문에 눈치 보니 않고 몰두 했다. 프랑스 국왕은 레오나르도에게 틈틈이 그림을 그릴 것을 허락했는데 이 시기에 ‘바쿠스’와‘성안나와 성모자’같은 작품을 그렸다. 피렌체에서 손대다가 만 모나리자도 꽤 진척을 보였다.그러다 레오나르도에 일생 일대의 위기가 온다. 그의 뒤를 봐주던 프랑스 총독 샤를 당부아즈가 죽고 교황 율리우스 2세를 선두로 이탈리아 도시연합과 스페인 군대가 밀라노로 쳐들어 왔다. 교황을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연합에서는 프랑스에 봉사했던 시민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다빈치는 제자들과 함께 피신하고 자신의 친구인 레오10세가 교황이 되면서 로마로 온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만년에 이르러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1519년 67세의 나이로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례와 조화, 그리고 완벽성을 추구하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천재성을 방대한 분야에 걸쳐 부단한 노력으로 갈고 닦았으며, 한순간도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탐구와 대담성, 그리고 뜨거운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다. 중세 카톨릭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성을 추구했던 르네상스기에, 시대의 흐름을 발판 삼아 이른바 정통성이라 일컬어지는 인습을 과감히 탈피하여 한 차원 높은 과학적 예술 세계를 이룩했기에 현재까지도 그는 르네상스 시대가 낳은 만능 예술인으로 역사 속에 빛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천재는 100%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면에서 볼 때 다빈치에게는 천재라는 호칭조차 그의 노력에 비해서는 너무나 약소한 호칭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선에서 만족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며,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나가고, 돌아갔다.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응징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65년이나 전쟁이 계속되었다. 로렌초를 계승한 피에로는 모든 면에서 우유부단해서 시민과 사보나롤라를 중심 으로 도시 귀족가문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피렌체는 이제 무정부 상태나 다름 없었다. 시민봉기가 일어나기 직전 피렌체를 떠난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갔다1496년 로마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을 제작하고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다윗'상을 1504년에 완성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한때 유럽세계를 호령했던 피렌체의 영광과 르네상스의 황금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의 기수이자 용병사령관인 피에르 소데리니는 시장으로 선출되면서 옛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도시를 떠났던 예술의 거장을 불러 들인다. 하지만 이미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넘어가고 있었다. 미켈란 젤로는 성서의 등장인물의 인문주의의 새로운 영웅으로 재해석했다. 다윗 상은 알몸을 승리의 상징으로 내보이며 적장을 보는 꾀쟁이 영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로마로 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인연을 맺게 된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고집스럽게 강경정책을 고수하면서 세속 권력에 맞서 교황권을 확장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전쟁을 불사하면서 문화정책도 병행했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묘지 조각상을 만들 적임자로 미켈란 젤로를 떠올려 일을 맡겼다. 하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에 신이 난 율리우스는 8개월 동안 대리석을 채취하러 다닌 미켈란젤로에게 계획을 없던일로 하자고 해 상처받은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떠나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시스티나 천장벽화를 그려달라 청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조각가지 화가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꺼려했지만 교황과 편한 관게를 유지하기 위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훌륭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 1000평방미터가 넘는 천장을 아무한테도 참견 받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 아이디어로 채울 작정을 했다. 4년의 시간동안 20미터가 넘는 까막득한 작업.
    인문/어학| 2007.06.02| 9페이지| 1,000원| 조회(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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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역사문화]백제의 흔적을 찾아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 만큼 알 수 있다’ 고 한다. 「백제문화의 이해」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토대로 현장에서 직접 가서 보니 어려운 불교용어도, 이해가지 않던 부분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7시 30분에 모여 백제의 절, 탑, 불상을 찾아 떠났다. 조금 설레 이는 마음도 있고 익산에 있는 유적은 5번도 넘게 간 곳이라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예상을 철저히 빗나갔다.이른 시간에 맨 처음 간 곳은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이였다. 탁 트인 전경에 마치 공원을 연상케 하는 이 곳은 왕궁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곳이 였다. 왕궁리 유적은 탑을 중심으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고 현재까지 성벽유적을 연구하는 듯 비닐로 덮여져 있었다. 왕궁리 유적은 왕궁리 사지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무왕의 천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 유적은 적어도 누층 지형형식을 보아 (후백제~통일실라 후기)를 지나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백제 무왕 때에 조성된 궁성 유적으로 보는 입장은 ①행궁설 ②별도설 ③천도설 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백제 무왕이 이 곳에 궁궐을 짓고 자신의 세력을 주둔 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탑을 중심으로 왕궁리 사지를 보았다. 익산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 289호)은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사진으로 봤을 때 보다 훨 씬 웅장하고 탑의 위용에서 시간의유구함이 묻어 나왔 다. 안개속에 당당히 서있 는 왕궁리 5층 석탑은 우리 를 넓은 가슴으로 맞아 주 는 듯 했다. 왕궁리 5층 석 탑은 목탑지 밑에서 나왔으 며 그 증거로 심초석의 발 견을 들 수 있다. 심초석은 목탑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백제의 석탑이라는 증거로 중요한 한가지는 바 로 단층 기단이라는 점이 다. 미륵사지도 단층기단이 며 통일 신라 시기 부터는 기단이 2층이 된다. 또한 심초석 속에서 사리장원부 가 나왔는데 금강경단의 한 자가 통신 이전기 백제의한자글씨체 였한 곳에 모여 살았던 중요한 거점 이였음을 거듭 확인 시켜주는 중요한 유구 ”라고 말씀해주셨다. 비록 하찮은 화장실일지 몰라도 그 곳을 통해서 백제인의 식생활과 질병도 유추 할 수 있고 생활정보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다음으로 떠난 곳은 익산 제석사지(사적 제 405호) 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이런 곳에 유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마을길을 들어가 풀숲에 자리하고 있는 제석사지는 칠층 목탑의 탑지가 있던 토루(土壘)중앙에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나있는 심초석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 곳은 제석천을 모시면서 왕실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내불당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했다. 선생님 께서는 심초석 주위의 대밭이 금당지 강당지가 있었던 곳이고 4-500m 떨어져 쓰레기장이 있다고 하셨다. 풀잎 댓잎 스치는 바람 소리 저편에서 바로 이 곳에서 울고 웃었을 삶이 있었다는걸 생각하니 그 시대 사람들의 애환이랄까 하는 뭉클한 무언가가 느껴졌다.다음으로 간 곳은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 105호) 였다. 이 곳은 매우 친숙한 곳인데 아침에 간 미륵사지는 또 뭔가 새로운 느낌이였다. 미륵산 허리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그곳에 호젓이 서있는 미륵사지 동탑은 그야말로 장관 이였다. 미륵사지는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고 말로만 듣던 3탑 3금당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당간지주 뒤는 백제 때 조성된 것이고 앞은 통일기에 지어진 건물지라 했다. 우리가 밟고 있던 가운데 대로를 보아 미륵사지의 사찰 규모가 얼마나 컸음을 대략 짐작 할 수 있었다. 또 동탑 옆으로는 공방지(와요지)라는 곳이 있는데 실제 사찰에서 그때 그때 기와편을 보수하기 위해 기와를 직접 구웠다고 한다.우리는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유물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미륵사지 모형도 였고, 그 규모와 백제 사찰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물 전시관에는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이 있었는데 어천사백년이 되어 간다. 그 기나긴 세월을 모진 풍파와 전란을 겪어 오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보다는 이제는 좀 쉬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만 들 뿐이 였다. 이제 병원을 만들고 해체 작업을 해서 좀 더 보수된 석탑으로 만든다고 하니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부서진 석탑을 보고 있노라니 가운데 심초석을 발견할 수 있었고 목탑형 석탑의 증거였다. 심초석 주위로는 큰 돌과 작은 돌이 불규칙하게 엉켜 있었다. 하루 빨리 미륵사지 석탑이 1400년 전의 위풍 당당한 모습을 찾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 했다.미륵사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석불사좌상(보물 제 45호)을 보러 갔다. 마침 스님께서 부처님께 정례를 드릴 시간이라 양해를 구하고 법당 안으로 들어 갔다. 들어가자 2m는 되보 이는 큰 석불이 있었다. 석불의 광배의 조각은 섬세하고 화려하기만 한대 석불의 형태는 투박하고 우직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 부분은 새로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그도 그런 것이 툭 튀어나온 눈, 짧은 코, 부풀려진 턱 등은 서툰 솜씨로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연꽃 무늬를 새긴 불상대좌, 고주형 광배의 불꽃무늬(화염문)는 완숙한 백제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번 답사지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 이였다. 먼가 우직하면서도 정감 있는 모습과 시원하게 펼쳐지는 광배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다음으로 발길을 돌린 곳은 태봉사 삼존석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1호) 이다. 중앙에 결가부좌한 여래좌상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두 협시보살을 두었으며 광배를 갖추었다. 광배는 212cm 크기인데 3분이 쓰고 있어 비좁은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백제인은 광배를 만들 때 주로 넉넉하게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 태봉사 삼존석불의 광배는 좀 예외적인 경우였다. 본존불은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내려 배 앞에 댄 특이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또한 본존불의 머리 윗부분 관배 에는 화불이 한 구 있었다. 화불은 연꽃 안에서 신비하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안군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국보 제 307호)이 였 다. 일반적인 백제의 평지 사찰과는 달리 산에 마애불 을 조성했는데 우리 일원 역 시 이 태안마애 삼존불을 찾 아가기 위해 백화산을 오르 는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삼존불에 도착하였다. 힘든산행을 한 보람이 있었는지 누각 안에 보존 되 어 있는 태안마애 삼존불은 백화산 정상 바로 아래 병풍 처럼 서 있는 부채꼴 바위 면을 파서 만든 것이였다. 1구의 여래상과 2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보살입상을 본존불로 좌우에 2구의 여래 입상을 협시불로 하고 있었다. 이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백제의 독자적인 삼존불상이라고 했다. 처음 삼존 불상을 보았을 때 무슨 구름 위를 두둥 떠다니는 부처님 같았다. 그런데 이 것이 연화 대좌라고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탁자 같은 게 있어 삼존불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엔 아쉬움이 있었고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촛불의 그을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니 우리 나라 문화재 보존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마음에 속상한 마음까지 들었다. 중앙의 보살입상 은 뒤로 약간 물러나 있는 듯한 입체적인 느낌에 깜 짝 놀랐다. 보살입상의 천 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 분에서 y자형으로 교차하 고 있으며 배앞에서 모은 두손은 오른 손을 위로 하 여 보주를 감싸 쥔 봉보주 인을 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희미해진 미소였 지만 은근하면서 잔잔한 미소가 백화산을 오르는 동안의 지친 숨을 간결하게 해주었다. 양쪽에 배치 되어있는 여래입상은 얼굴에 살이 있는 듯한 느낌이 강건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보살입상의 보디가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육계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큰 두광에는 무늬가 없었다. 왼쪽 여래상의 수인은 도형(?形)이고 오른쪽 여래상은 왼손은 단지를 들고 있으며 통인을 하고 있었다. 특히 오른쪽 여래상은 U자형이고, 속옷은 Y자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누각을 나와 삐져나온 바위 뒷부분에는 백제 후대의 누군가 석불을 자깊은 것은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는 연봉이였다. 이 연봉의 용도는기와가 낙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자로 구운 눌림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용적인 용도와 함께 마치 물방울은 처마 끝 마디마다 올려 놓은 듯한 귀엽운 듯 하면서도 미적 요소도 갖춘 무척 아름다운 건출물 이였다.이제 드디어 백제의 미소를 보러 갈 차례 재미있는 나무꾼의 해설과 백제의 미소로 칭송받고 있는 서산마애 삼존불상(국보 84호)을 보러 갔다. 서산 마애 삼존 불상 역시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거대한 층암절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역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가 마침 해질 무렵에 가서 저녁노을과 함께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 있는 서산마애 삼존 불상은 당시 백제인의 낭만적인 기상을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 께서 서산 마애 삼존불이 있는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수업할 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 신비한 모습은 볼 수 없어 조금 섭섭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 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 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 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고 한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위에 서 있는 석 가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 썹, 복숭아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 딱 열 살 꼬마의 장난 기 어린 웃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화염문안에는 화불이 있어 그 신비로움을 더하였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제화갈라보살입상은 .
    인문/어학| 2006.06.09| 7페이지| 1,000원| 조회(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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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임상덕, 정약용,안정복,중인사학
    ▶ 논평 ◀다산의 정신으로 다산을 말하라!다산에게는 “우리나라가 낳은 최대의 사상가”, “독창적 사상가”, “조선 실학의 완성자”, “실학의 집대성자” 등 온갖 찬사가 다 붙어 있다. 대개는 시소놀이처럼 다산을 높이 올리면서 그 반대편의 성리학을 바닥으로 쓸어내린다. “송학의 구렁에서 연꽃처럼 피어난 다산의 사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다운 우리 것의 우뚝한 학풍”이다. “다산 이전에 다산만한 사상가가 없었고 다산 이후에도 다산만한 학자가 쉽사리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여유당전서 국역본에 불어있는 말들이다.물론 나도 다산을 무조건 평가절하하거나 그저 비판만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산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 안에서 다산이 담당한 역할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다산의 주자학을 비판한 시각에 대해 비판해 보려 한다.다산의 말을 빌어보면 다산은 맹자에게서 인의예지는 천성적으로 부여된 내면적 덕이 아니며, 인간의 내면은 오히려 비어있고 실천을 통해 비로소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의 실천을 인간 관계 안에서 자기 분수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경험적으로 부과된 분수의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 내면의 본질적 평등성, 理一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일이 부정되고 분수만 강조될 때, 그것은 결국 名分과 禮로서 인간 삶을 구속하는 질곡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맹자의 정신이기 보다 오히려 순자나 법가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공맹정신의 왜곡은 다산이 주장하듯 불교에 의해서 또는 주자학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산 자신에게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000여년을 이어 유학의 도통을 확립하고자 한 주희의 진지한 노력을 묵살해버리는 것, 불교와 유학이 융합하여 새로운 신유학이 완성된 후 그것이 우리 조선의 국가건립과 통치이념 그리고 일상의 윤리이념의 역할을 하였는데, 그 장구한 사상적 흐름을 송두리째 변질된 왜곡의 역사로 몰아버린다는 것, 그 긴 기간동안 공맹의 기본정신을 제대로 살 따라 동사강목은 기자숭배의 유교사서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안정복이 새로운 사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묵은 지식, 혹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회의의 자세를 거부한 것이다. 이렇게 내가 보기엔 조선 성리학자의 표본이요, 서문난적으로 불리길 두려워한 학자인데 어떻게 현대에는 경세치용의 실학파로 불리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또한 안정복의 책 동사강목의 번역본을 읽어보면 우리중국 이라는 용어도 자주 보여, 사대사상 까지 지닌 민족지향성이 이라 고는 보이지 않는 역사가 인 것 같다.결국 내가 순암 안정복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은 그는 이 시기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 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 이였으며 이러한 위치에 있던 안정복은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 보다는 학문적·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에 대해 평가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제 10장 임상덕(林象德) 1683~17191. 생 애- 전라도 무안에 생활근거를 둔 사대부 출신- 자는 이호(彛好)이고 호가 노촌(老村)인 임상덕- 23세인 1705년에 숙종 즉위 30주년 기념 증광시에서 장원으로 합격- 소론계열의 학자이며 정치가, 특히 윤증을 평생 스승으로 모심- 명에 대한 의리론이 대두되고 노론의 집권이 굳어가면서 1711년에 동사회강 12권 저술 함 여기에는 노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 나타남2. 학문관- 학문관은 송학(宋學)중심.- 경학·사학·문학의 순으로 학문순서를 정함- 경학과 성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함- 경학과 사학을 분리하지 않았고 학문습득의 과정에서 필요한 책을 들 때 조선의 서적은 전혀 거론하지 않음- 송대의 학문을 학문의 핵심이라고 파악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불교나 노자 장자, 양명학에 대해서도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 취함- 관리로 진출한 후에는 불교에 대한 배척 강도 높아짐.3. 『동사회강』의 편찬(1) 저술동기- 노촌집에 실린 「동사회강서」가 1711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 같은시기에 편찬 된 것으 로 보임.- 문화국가인것이나 삼국시대 무통론, 기년(紀年) 의 표시방법 등을 받아들였다.- 17세기의 여사제강과 18세기 후반의 동사강목을 이어주는 역사서이다- 임상덕의 고구려 지리고증과 같이 북방영토에 대한 의식이 일어남- 임상덕의 소중화 의식은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자부심과 조선이 중국과 분리된 독립적 민족국가임을 발견해 가는 단초가 됨-제 14장 안정복(安鼎福) 1712~17911. 생애와 저술- 자는 백순(百順)이며 호는 순암(順菴)이다.- 숙종조 말에 태어나 정조 중반기를 살다갔고 학문적·사상적으로는 근기 남인의 맥을 이었 고 사회적으로는 향촌의 사족 가문 출신이였다.- 일가가 전라도 무주에 은둔하게 되면서 일찍부터 과거를 통한 입신에 뜻을 두지 않았다.- 유가적 관점을 넘어 박학다식함을 추구하였으나, 광주로 올라와 성리대전을 접하면서부터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35세때 이익을 방문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식 성호학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경사(經史) 에 대해 토론하고 서신을 왕복하는 과정에서 성호일문의 영향을 받기도했지만 근기남인 실학파 가운데 우파로 분류될 정도로 굳혀가고 있었다.- 38세 때 경학이 뛰어나다 하여 교관에 추천된 이래로 미관말직 생활을 3년간 하였고이후 고향에 돌아와 61세까지 「동사강목」등으로 대표되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완성시켰다.- 61~73세의 노년기에는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목천현감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경륜을 펴기도 하였다.- 73~80세에 이르기까지는 저술과 후진 양성으로 말면을 보내는 한편 근기 남인 내 소장 파들이 천주학에 경도하는 현실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고 주자 성리학을 옹호하였다.- 실제 그의 저술로 확인되는 것은 저술23종, 잡문 100여 편 정도이다.- 「순암집」은 우리나라 역사·사상·제도에 관한 중요한 저술로 인정되고 있다.- 「하학지남」은 29세때 쓴 그의 최초 저술로서 초학자의 입문 지침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이미 형성하고 있던 학문관·독서관을 잘 반영하고에 의해 체계 화 하려 한 데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강목체라는 형식을 통해 정통을 부각 하는 방향으로 저술하였다.3. 「동사강목」의 편찬(1) 편찬과정- 영조 30년부터 저술하여 5년 만에 완성 되었다.- 체제공의 천거로 서연에 참여하여 후일 정조가 된 세손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동사 강목]은 정조의 관심을 끌게됨.- 실사의 측면에서 수기치인과 아울러 역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2) 체 재- 수권(首券)과 본문 17권, 부록 2권을 합하여 모두 20권으로 되어있다.- 수권은 이익의 서문, 18절의 범례, 전수도, 각종 역사지도, 관직도 등으로 구성되었다. 범 례는 주자의 강목을 기준으로 하면서 세년·명호·개원·붕장·조회·정벌·인사등의 서술에서 주 자의 강목과 달리 표현하였다. 또 11조의 잡례를 두어 사실고증과 사론에 관한 문제를 다 루었다.- 목차를 도형화 하여 전수도를 작성함으로써 정통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계보화하고 [지리고]를 지도화하여 각종의 역사지도류를 작성하여 강역문제 특히 북방의 강역에 관해 비상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동사강목의 부록으로 들어있는 [고이],[괴설변증],[잡설],[지리고],[분야고]등은우리 역사의 사실고증에 관한 문제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3) 사실고증과 지리고증- 동사강목은 통계·찬역·시비·충절의 문제를 다루어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고증의 문제를 치밀하게 다루어 완성도 높은 저술이 되었다.- 서술에 있어 삼국시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기본사서로 하였다.- 고려시대는 [고려사]와 [여사제강]을 기준으로 하고 고려 말기의 경우는 문집류와 비문 등을 많이 이용하였다.- [지리고]를 통해 요동지역을 단군조선·기자조선·부여의 강역으로 비정하였다.- 요동을 천하의 요충지로 인식하고 우리나라가 단군·기자의 옛 영토인 요동을 차지하지 못 한것이 약소국이 된 중요한 원인으로 보았다. 고토회복의식과 잇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4) 사론- 그는 사론에 관한 한 당색을 가리지 않고 수나의 정점에 다다른 것이였다.-제 18장 정약용(丁若鏞) 1762~18361. 머리말- 정약용이 살았던 조선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상관계와 분업이 정착해 가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신분제의 해체가 막을 수 없는 대세였고 정치적으로는 탕평정치·세도정치가 행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극심한 변화에서 현실문제를 철저히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계혁안을 제시하였다.- 정약용의 개혁안은 한국 역대제도에 대해 고찰한 것이 바탕이 되었으므로 사상을이해하기 위해서는 역대제도에 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살펴야한다.2. 생애와 저작(1) 생애- 영조 38년에 태어나 현종 2년에 주었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이묘 어머니는 해남윤씨로서 윤두서의 손녀다.- 정약용의 가문은 기호남인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28세에 벼슬길에 오른 정약용은 규장각 근무를 통해 많은 서적을 열람하여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방관을 역임하여 농민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가 노로측 정치적 공세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된다- 18년의 유배생활 동안 실학의 집대성 작업이 이루어 졌다.- 1818년 유배에서 풀린 이후 고향인 경기도 마재의 여유당으로 돌아와 강화학파의 신작등과 교유하면서 죽을 때까지 이전의 저작에 대한 수정·증보작업을 계속하였다.(2) 저작- 500여권의 경집과 문집으로 나뉘어 진다. 경집은 6경과 4서에 대한 주석서가 들어가고 문집에는 이른바 1표2서와 잡문·시 등이 포함된다.- 6경과 관련하여, 시(모시강의, 시경강의보)·서(매씨상서평, 상서고훈, 상서지원록, 합편상서고훈)·예(상례사전, 상례의편)·악(악서고존)·역(주역사전, 역학서언)·춘추(춘추고징)에 대한 주석서를 내었다.- 4서와 관련해서는(논어고금주, 맹자요의, 중용자잠, 대학공의, 대학강의)등의 주석서를 내었다.3. 역사의 동인 및 사관과 역사학의 방법(1) 역사의 동인 및 사관- 사관의 면에서 유학의 전통적 사관인 상고주의 및 순환론적 역났다.
    인문/어학| 2006.06.02| 11페이지| 1,000원| 조회(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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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한국 사학사
    -총설- : 우리나라 역사학의 흐름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 기록-과거-평가-교훈으로 이어지는 정신활동, 실용성 띰㉡ 역사 비유어구 : “과거와 현재의 대화”“모든 역사는 현대사”“역사는 역사가와 사실이 상호작용하는 끊임없는 대화”→ 역사가의 주관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토대“정치의 거울” → 역사의 실용성 +교훈성강조 +공정성㉢ 역사의 교훈성 : 역사의식 (=이데올로기)역사의 과학성 : 역사 인식방법2. 고대의 역사편찬㉠ 古記의 예 : 단군신화(조상의 원초적 역사의식) =선민적 통치이념 + 천신 숭배의 원시적 종교관념㉡ 역사편찬 순서 :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 편찬 목적 : 국력 과시, 국가체제 정비3. 고려시대 역사서술㉠ 김부식-[三國史記]: 우리 나라 최초의 정형화된 기전체 사서㉡ - 고려초기: 삼국사(三國史) → 고구려 계승정신, 단군언급, 자주의식 높음,기전체 형식의 유교사서는 아님.- 문벌귀족사회 :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계승정신, 칭제노선 억누름,금(金)과의 평화공존, 국왕중심 도덕적 관료정치 안정의도- 무신집권기 : 유교적 역사서술 비판적.이규보-(東明王篇) → 자료수집, 문헌고증 없음,다음시대 민족의식 성장의 토대- 원 갑섭기 : 성리학 수용→ 국왕중심 관료정치, 도덕정치로의 개혁[관찬사서]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본군편년강목, 고금록, 사략, 해동금경록→ 무신 집권기 변태적 막부 비판[사찬사서] : 일연-(三國遺事) → 고조선,삼한 역사소개, 정치사도 다룸이승휴-(帝王韻紀) → 유학자이면서 도교적극 수용중국과 우리나라 역사 7언형식 빌림4. 조선시대 역사서술㉠조선 초기: 도덕정치 구현, 민족지향 → 국호 “조선”, “한양”도읍㉡조선 중기: 부국강병책 폐단, 왕도정치 풍미ex) 동국사략, 동국여지승람 → 북진정책 비난㉢조선 후기: 왜란, 호란 → 민족의식 강화, 사회개혁ex) 동사강목, 해동역사 → 문헌고증에 의한 역사연구㉣ 조선후기 역사책의 특징:① 만주수복열망, 해방(海防)관심 → 고대사 강여긔 역사지리 연구 활발② 동이 문화권 인식 높아짐, 독자성 자각③ 유교문화 정통론 도입④ 문헌고증방법 도입 → 사학의 전문화 세습화5. 한말 일제시대의 역사학㉠ 민족주의 역사학- 1910년대: 극단적 국수주의,사회진화론(제국주의 반대 vs 제국주의팽창추구)의 양면성-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 중심, 일제에 대응-사회주의 역사학과 경쟁- 제국주의 긍정하는 자기모순 극복 과제- 1930년대: 조선학운동 (민족지향, 민중지향, 실용지향)→ 민족말살정책, 유물사관 대응논리(신채호, 안확, 안재홍, 문일평, 정인보 등)㉡ 사회주의 역사학 (유물사관) : 노동자-농민 계급적 각성 고조, 사회경제사 연구민족단결저해, 한국사 개성 무시(이병도, 이북만, 백남운, 이청원, 문석준, 계봉우 등)㉢ 문화주의 역사학(진단학회) : 항일투쟁에 소극적, 학문수준은 최고경지,학회지 발간.(이병도, 이상백, 김상기 등)6. 해방 이후 남한의 역사학㉠ 신민족주의 : 민족주의 + 맑스주의 +문화주의 역사학 장단점 보완, 만민공생, 계급평등 (안재홍→정치사상발전, 손진태→역사학방법론 승화)㉡ 신민족주의 계열 강제로 북으로 이동 + 맑스주의 학자 자발적 월북 →진단학회 계열 남학학계 장악 → 남한에 문화주의 역사학 뿌리내림㉢ 1960년대 : 조국근대화, 주체적민족사관 표방.정치권과 갈등하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함.㉣ 1980년대 : 식민주의 사학 극복단계, 연구분야도 다양하게 확대.젊은 학도의 민주사학의 대두㉤ 1990년대 : 실천목표약화, 학문적 내실기함 → 기성세대와 구분되는 독자적사관과 방법론 세우지 못함.7. 해방 후 북한의 역사학㉠ 6.25전란 :1952년 역사연구소 건립, 로동당 정책지원 관학 성격띰㉡ 해방직후 : 맑스 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과 당성의 원칙 → 북한의 정치노선덩당화㉢ 1970년대 : “주체사상”정립 인간중심, 고구려-고려위상 높임, 실증 연구 줄어듬토론 사라짐, 관념론 쪽으로 선회㉣ 1980년대 : 주체사상후퇴, “민족대단결노선” - “조선민족제일주의”전략 등장→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 단결심 고취-제 1부 고대- : 고대의 역사인식1. 머리말㉠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서 - 삼국사기 : 고려 이전 여러 古記에 토대㉡ 시대적 배경고려 하여 역사책 성격 및 역사인식 추측2.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 편찬㉠ 고구려의 역사 편찬- 유기(留記) 100권 : 여러 종류 신화·전설, 왕가의 계보를 기록한 역사책책이름 자체- 훌륭한 조상의 신이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라는 뜻.- 신집(新集) 5권 : 고구려 정치·사회 발전과 전반적 역사인식 발달→현실적 실용적 성격 띰.㉡ 백제의 역사 편찬- 근초고왕 때 : 국사 편찬, 서기(書記)- 백제 3서 : [백제기(百濟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기 : 전설적 가사→ 백제본기 : 일자와 간지 기록, 실록으로서 확실성 풍부㉢ 신라의 역사 편찬- 진흥왕 - 이사부 건의에 따라 거칠부가 중심으로 국사(國史)편찬- 제도·문물 정비→ 김씨 왕실 정통성 천명,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한교훈적, 실용적 목적 지님.3. 통일신라 시대의 역사인식 -김대문과 최지원을 중심으로-㉠ 260년간 통일신라 시대 : 관찬사서 편찬된 확증은 없음. 사찬사서로는김대문의 [고승전(高僧傳),화랑세기(花郞世記),악본, 한산기(漢山記)]+계림잡전최지원의 [계원필경집, 제왕연대력]㉡ 김대문 - [계림잡전] : 신라불교역사, 신라왕호에 대한 김대문의 견해, 신라역사상 중요한 사실·사건들을 기록한 책[화랑세기] : 화랑들에 대한 전기[고승전] : 승려에 대한 이야기 [악본] : 신라 고유음악에 관한 책[한산기] : 한산주 장관으로 재직 하던 때 저술한 지리지 or 역사서- 김대문 저서의 특징: ① 신라사, 왕경(王京)중심, 진골귀족 역사 중심.② 객관성 띄면서도 자신만의 해석 제시③ 신라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의식→ 유교에 대항④ 국왕중심→진골귀족 이라는 더욱 광범위한 계층 역사 서술㉢ 최치원 - [제왕연대력] : 신라 연대기 정리 편찬.- 국왕중심 개혁정치에 밀착한 6두품 출신- 유교적, 중국문화 중심의 입장 천명.-제 2부 중세- 고려시대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고려의 건국 : 10c초, 왕건 일파(=예성강 일대 고구려 후예)유교정치 사상 + 불교 + 도교 + 풍수지리사상 절충→ 새로운 통치이념.국가이상(북진정책) → 발해 유민 포용하여 민족대통일 이루고자함.㉡ 고려전기의 사서 : -삼국사[三國史]: 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삼국시대 역사 정리.단군·동명왕 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전통 계승. 천손의 후예- 편년통재[編年通載]: 삼국사의 역사인식 계승하면서 고려 건국사 정리.- [해동비록, 진단구변국도, 비사]: 풍수지리 관계 서적.문종~인종까지 우문정치. 유교 문화의 높은 수준 이룸.㉢ 삼국사기(三國史記) : 거란쇠퇴하고 금 등장→ 북진정책 다시 고개 듬(묘청일파)→개경의 유학파에 의해 진압됨.-편찬목적 : 유교정치의 재확립, 금과의 평화와 안정, 국왕중심 중앙집권 체제 구축-내용: ① 고구려(힘의 논리로 중국과 겨루다가 패망)의 전통보다는 신라(유연한외교술과 충의로 삼국통일 이룸)의 역사전통을 높이 평가함.② 역사의식의 합리성과 자료수집의 충실성.
    인문/어학| 2006.05.31| 5페이지| 1,000원| 조회(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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