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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4.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박정희정권기의 고도경제성장은 사회체제의 총체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경우 냉전체제하의 종속 및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반공독재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질서 재편 구상은 대공산권 봉쇄정책의 한계 내에서 변용되어 수행되었다. 1947년 일본은 대공산권 봉쇄의 중추로 부각되었고, 한국은 경제적 배후지로서 반공전초기지라는 범위 내로 한정되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보다 안정을 중시하였고, 이는 196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전쟁 특수는 한국경제가 ‘이륙’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차관도입과 경제성장에 의해 금융자원이 증가하였으며 수출증가율이 증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공업화는 지대를 중심으로 한 유인체계가 관료주의의 폐해로 생산을 위축시키는 결과가 초래되어 부실기업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결과 8?3조치라는 강압적 국가 개입을 통해 대기업에 엄청난 특혜를 수반하면서 중화학공업화로 전환했다.한편, 박정희정권에게는 냉전구조의 균열 등 국제정치환경의 변화가 경제개발전략에 대한 도전보다 더 위협적 요인이었고, 한?미간 갈등도 표면화되었다.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는 주한 미지상군 철수계획을 입안하면서 한?미관계는 ‘긴장된 동맹(strained alliance)'의 양상을 띠었다. 박정희정권의 대응은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유신체제로 나타났다. 1970년대 초의 경제위기는 경제성장을 정당성의 기반으로 추인받고자 한 박정희정권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또한 미군철수를 매개로 한 한미간 갈등은 안보위협을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군수산업 육성의 견지에서 중화학공업화를 추구하게 했던 것이다.한국 자본주의의 순환구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분업구조 속에서 ‘생산공장’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기능할 수 있었다. 정치군사적 대미종속은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대미?대일의존에 기반한 고도성장은 독재권력의 내포화를 통한 상의하달식 조직체를 완성시키는 과정임과 동시에 원인이었다. 독재권력의 내포화는 정당조직의 탈정치화, 관료조직의 개편, 기타 사회조직의 신설 및 정치행정의 효율화를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조직의 이익 보장과 균점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대미?대일종속에 기반한 고도성장과 독재체제는 대북생산력 경쟁에서의 우위 확보를 요구한 냉전적 조건을 통해 완성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반공독재와 경제발전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경우, 박정희정권기의 특징은 1950년대에 정치적 구호에 머물었던 반공을 경제적 개념으로 질적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독후감/창작| 2009.05.24| 1페이지| 1,000원| 조회(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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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8?15와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적 재편1. 미국체제에 편입된 한국경제.1) 민족경제 건설의 가능성.2) 미국 중심 국제분업체제로의 편입.2. 경제환경의 악화와 경제건설정책의 부재.1) 중소공장의 활성화와 경제건설의 한계.2) 공출제의 재개와 농업생산력의 약화.3) 식민지적 금융제도의 존속과 통화남발.3. 식민지 유제 처리의 한계.1) 귀속농지 불하 및 농지개혁법 제정.2) 귀속재산 불하.1. 미국체제에 편입된 한국경제.1) 민족경제 건설의 가능성.해방 후 우리 민족에게는 식민유제를 없애고 민주적으로 바꿔 생산력을 높이는 일이 급선무였다. 특히 경제건설의 관건은 첫째 적극적인 경제건설정책을 통해 공장의 가동을 회복하는 일, 둘째 적산기업을 국가관리 하에서 생산적인 평화산업으로 활성화하는 일, 셋째 토지개혁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일이었다. 8?15 이후의 정국에서 이념적 지향점과 현실적 이해관계가 다른 정치세력들이 개혁의 타협점을 찾아 수렴하는 과정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8?15 이전 민족해방운동 전선에서는 토지와 중요사업을 국유화하여 민족의 자산으로 만든다는 합의틀을 갖고 있었다. 8?15 직후에도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등 좌파 또는 중도파 정당과 지주 및 유산층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의 경제재건의 원칙과 방향은 당시 경제현실과 민심을 반영하여 일정 수준에서 수렴될 여지가 넓었다. 개혁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어떤 주도세력에 의해 통일정부가 세워지며 생산력의 장기적 발전, 민중경제의 회복, 민주적 제도 등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구체성 여부에 달려있었다. 따라서 각 정치 세력 사이에 큰 차이를 드러냈던 토지개혁이나 중요산업, 귀속재산의 처리방법 등을 둘러싼 대립은 이념의 차이 때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토지개혁론의 경우, 농민의 입장에서는 세금이든 농지가이든 실제 부담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반면 각 정치세력마다 이념적인 원칙론이나 현실적인 기득권 유지에만 집착할 경우 통일정부 수립의 지지기반이 될 수 있는 중간계층과와 결부된 강력한 민족주의가 대두하자, 미국의 종래 정책은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즉 미국이 통제하는 지역경제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양국의 생산력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재건을 이끌 축으로 평가하여 확충전략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정부 구상도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방안에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기울어졌다. 1947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마샬의 극동국장에 대한 지시에 따르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각국을 연결하는 지역통합전략 운용을 위한 주요 수단은 원조였다. 이러한 세계전략 속에서 미군정은 남한사회에 필요한 개혁의 과제를 외면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처했고,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이나 제도를 그대로 이용했다.미국의 지역통합전략은 아시아 국가의 원료, 시장과 일본의 공업력을 결합한다는 것으로 식민주의적 경제관계를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경제는 유효수요 부족에서 비롯된 불황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택한 방법은 대외원조였다. 그리고 미국의 무역과 투자를 위한 시장 확대에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수원국의 경제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47년에 들어 냉전의 시작과 함께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1948년에는 유럽부흥계획으로 마샬플랜이 제시되었다. 마샬플랜은 공황극복을 위한 미국상품 수출의 유지 및 확대와 냉전체제하에서 세계 경제에 대한 지배력 확보라는 원조의 본질적 측면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마샬 원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과잉생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불황이 계속되었다. 또한 미국은 1949년 「북대서양조약(NATO)」체결을 계기로 군사원조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49년 10월 미국은 「상호방위원조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6?25 발발 이후 군사원조 중심으로 전환된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은 1951년 「상호안전보장법」제정으로 확고해졌다. 결국 6?25는 일본을 포함한 서구 경제의 생산을 자극하고 호황을 찾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8?15 직후 미국의 원조는 원조에 의존하여 종속적일 수 밖에 없었던 이승만정권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은 미국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결국 미국측의 ‘3개년 계획안’을 입안하여 1차 산업주도형 성장전략을 세웠으나 6?25의 발발로 중단되었다.2. 경제환경의 악화와 경제건설정책의 부재.1) 중소공장의 활성화와 경제건설의 한계.해방 이후 11월 이후에는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적산기업에 대한 미군정의 부실한 관리가 전반적인 생산력 감퇴와 생활필수품 부족현상을 가중시키는 큰 원인이었다. 1942년 이래 특히 강조되었던 일제의 물자동원계획은 수송로가 두절됨으로써 축소재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또한 생활필수품의 경우 일제말기의 생산억제 여파가 여전히 지속된 데다가 투기상인들이 물자부족과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채질했다.전반적인 생산위축 상황에서도 군소공장에서는 1946년 중반부터 빠르게 생산회복 경향을 보였다. 8?15 직후에는 귀속공장보다 민영공장에서, 도시 근처의 공장보다 외곽의 소공장에서 생산 재개가 더 활발했다. 도시에서는 은닉물자의 처분, 원조 및 밀무역 또는 생계를 위한 재산처분에 따른 상인자본으로 인해 생산재건에 부정적 요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지역에서도 규모가 큰 공업회사가 신설되어 생산재건을 이끌어갈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8?15 이후 미군정은 기본적으로 생산의 재건이나 증대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퇴각하는 일본인들이 기계시설이나 재고원료를 방매하는 불법행위에 대해 적극 대처하지 않았고, 일본인 기술자를 공장 가동에 활용하는 정책도 취하지 않았다. 귀속공장 운영에서도 관리인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노동쟁의를 불러일으켰고 원조물자도 소비물자에 치우친데다 시중환율보다 크게 낮아 결과적으로 민족경제의 건설을 위해서는 악재로 작용했다. 미국은 ECA원조에 기초하여 통화량 환수에 초점을 둔 안정화정책을 강조한 ‘3개년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6?25 발발로 실행되지 못했고, 산업자금과 물자조달이 억제된 가운데 강조된 안정화정책은 실질적인 방안과 큰했다. 그러나 2월부터 배급대책이 없이 쌀의 도시반입을 전면 금지시킴으로써 쌀값 폭등을 초래했다.미군정이 일제말기 이래의 공출제를 더욱 강화한 결과 가축을 방매하거나 비싼 암시장 가격으로 곡물을 사서 공출에 충당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공출제는 농민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활성화되는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6년 5월 9일 중앙식량행정처를 신설하여 하곡 공출까지 단행했고, 1946년 7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하곡수집 반대운동을 주도하자 대탄압을 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저항은 1946년 10월항쟁에서 극에 달했다. 지주층도 공출제로 인한 타격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한국민주당이나 상공회의소에서는 크게 약화된 지주층의 이익을 일정하게 보전할 수 있는 수단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소작료공출 규정」에 따라 지주의 직접적인 소작료 수취가 금지되고 금융기관을 통해 간접 수취하는 방식으로 고정됨으로써 지주의 실질적인 지배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소작료의 상품화 여지도 부정되었다.8?15 이후 공출제가 지속되고 토지개혁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농업경영은 일제말기보다 악화되어 대부분의 농가가 적자를 면치 못했으며, 농업위기는 만성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요인으로는 제헌국회 속기록에서도 거론되듯이 대일 밀반출이 방치된 것도 고려될 수 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정권 초기의 양곡정책은 자유시장을 허용하는 부분통제 방침으로 전환되었다. 「양곡관리법」은 정부가 잉여양곡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하고 양곡수급의 필요에 따라 양곡을 수출?수입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곡을 기아판매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생활의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3) 식민지적 금융제도의 존속과 통화남발.8?15 직후부터 제기되어오던 화폐개혁론은 발행담보나 외환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미루어졌고 정부수립 후에도 인플레이션 수습 차원에서만 고려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화폐개혁은 유용한 금융개혁 방안이었다. 각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자산이 이월되는 것까지 방관함으로써 조선의 자산이 계속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었다.결과적으로 8?15 이후 금융혼란의 가장 큰 원인으로 미군정의 정책부재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정부수립 후「한미경제원조협정」을 통해 한국정부에게 균형예산의 편성을 강조하는 무책임함을 드러냈다.3. 식민지 유제 처리의 한계.1) 귀속농지 불하 및 농지개혁법 제정.8?15 이후에는 토지를 경작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토지개혁의 분위기가 확대되었다. 한국민주당의 경우 사유재산을 옹호하여 대지주의 토지를 국가가 유상매입하여 국유화한 후 3?1제에 의해 농민을 국가소작농화하자는 주장이었다. 이후 한국민주당의 공식 입장은 유상매수론으로 정립되었다.이와 달리 조선공산당의 토지개혁론은 일제와 민족반역자, 조선인 대지주와 고리대금업자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농민에게 경작권을 무상분급하자는 것이었다. 단, 중소지주의 토지는 자경지 이외의 토지만 몰수대상에 포함했다. 조선공산당의 토지개혁론은 조선인 지주의 토지소유를 인정하고 몰수토지의 국유화 규정도 삭제되었다. 조선공산당의 토지개혁론이 완화된 것은 미군정과의 맞대결을 피하면서 농민의 이해를 반영한 현실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토지개혁론은 북한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1946.3.5)이 단행되면서 급진노선으로 선회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일제, 친일파, 민족반역자, 대지주 뿐 아니라 자경하지 않는 모든 토지는 규모에 관계없이 무조건 무상몰수 대상에 포함시켰다.반면 한국민주당 등 범우파 세력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조선인민당은 일제와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아닌 조선인 지주에 대해서는 국가가 근로의 기회와 생계대책을 마련해주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들 토지에 대한 조건부 매상 및 체감 매상 등 사안별로 차별적인 안을 제시했다. 결국 이 합작원칙은 한국민주당 등 우파와 조선공산당 등 좌파에게 모두 거부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민주당에서는 지도부가 이
    독후감/창작| 2009.05.24| 7페이지| 1,000원| 조회(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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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자본주의의 역사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과 국민경제 형성의 좌절1. 개항과 유통구조의 변용.1) 불평등 조약체계의 성립과 무역구조.2) 유통구조의 변화와 상업의 발전.2. 경제정책의 한계와 식산흥업의 실패.1) 정부의 경제정책과 그 한계.2) 생산구조의 변화.3. 농민층 분해와 임금노동자층의 생성.1) 지주제 강화와 농민층 분해.2) 임금노동자의 생성과 존재.1. 개항과 유통구조의 변용.1) 불평등 조약체계의 성립과 무역구조.서구열강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하여 해외 수출과 원료를 공급받을 시장이 절실했다. 따라서 동아시아로 눈을 돌렸고,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굴복시킨 데 이어 조선에도 통상요구와 무력침략을 가해왔다. 이에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실시했으나 반사적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와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를 유발시켰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민비의 세력과 유생세력으로부터의 반발로 인해 무너졌으며, 결국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의 체결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1882년에는「조미수호조약」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3년 영국과 「조일통상장정」을 맺는 등 정치적?군사적 압력에 의한 불평등조약이 잇따라 체결되었다. 이로써 청?일을 비롯한 서구열강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점차 강화해갔다.조선의 무역구조는 곡물 수출과 면포 수입으로 대표된다. 1890년대 조선의 대일무역 수지는 곡물 수출이 급격히 증대하면서 흑자를 보이기도 했으나 청국과의 교역에서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는 청국에서의 면포 수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면포 이외에 금 무역에서도 청이 일본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조선무역은 점차 일본에 집중되어갔고, 총수출액에서 곡물 수출량이 80% 이상을 차지했다. 곡물의 대량수출은 조선의 농업경영을 곡물제배로 협소화시키는 한편, 지주제가 강화되고 농민층 분해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일본 목면과 면사 수입이 급증하면서 값싼 일본산 목면이 소비시장을 출량을 역전한다. 인천항은 입지 조건상 한성 유통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한성과 인천항 간에 곡물유통권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졌다. 1893년 1월 한성의 쌀값이 등귀하자 조선정부는 「만석동회선령」을 내려 인천항으로의 곡물유출을 막고자 했다.1885년에서 1894년 사이 외국과의 교역상품 외에 국내 소비를 위한 상품도 부산, 원산, 인천을 통해 유통되어 조선 포구와 일본 등지로 수출입된 무역액이 4배에서 10배까지 증가했다. 이와 같은 유통량의 증대는 기선의 발달과 더불어 곡물과 금 등의 대량수출로 인해 조선의 상품생산과 상품구매력이 증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상인은 근거리 수송에서 수출입상품을 수송하고 있었으나, 원격지 유통은 일본상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상인은 그에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났다.한편 청일전쟁 이후 진남포, 목포, 평양, 군산 등이 개항되면서 포구 중심의 전통적인 유통 중심지는 점차 위축되고, 개항장 중심의 새로운 유통 중심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개항 이후 청상인 및 일본상인의 활동은 조선상인들의 상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출입 무역과 외국상인의 활동으로 인해 조선의 상품유통이 확대 되면서 개성상인은 한성 이북지방에서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해주?재령상인과 평양상인들 또한 상권을 확대하며 성장할 수 있었고, 개항장에는 객주가 등장했다. 또한 정기시를 무대로 활동하던 보부상은 상리국으로 조직화되어 독점영업권을 획득했고 관권을 빙자하여 소상인들을 침탈하기도 했다.조선정부는 물종별?지역별로 상업 수세를 담당시켰고, 수세를 대행하기 위해 동업조직들이 결성되었다. 1894년 이후 인천과 한성 등지에 일본은행이 생겨나 일본상인의 활동을 지원했고, 자본력에서 일본상인에 미치지 못하는 조선상인들은 동업조직을 기반으로 자본을 합자하여 영업을 지속하려했다. 대한제국기에는 객주조직의 확대와 자본 합자 경향으로 유통업의 자본규모가 커졌으나 생산자본으로는 전환되지 못했다. 또한 관료자본이 새롭게 창출된 유통이윤을 장악해가면서 유통업으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개화정책이 청의 외압과 재정고갈, 민씨척족의 부패로 진행되지 않자 김옥균?박영효를 중심으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이들의 경제개혁 구상은 혜상공국 폐지와 재정 단일화, 지세 개정에 있었다. 이에 청은 갑신정변을 진압한 후 원세개를 파견하여 군사적?정치적 간섭을 강화했다. 고종은 청에 의해 왕권을 제약받게 되자 반청정책을 추진했으나 러시아와의 밀약설과 고종 폐위설이 나오며 청의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정부의 개화정책은 반청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내무부에 의해 계승되었다. 내무부는 개화정책을 위한 구체적 실무기구가 설치되었고 양상공사의 설치, 남로전선과 광산개발 등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양상공사 설립은 실패했고, 1895년에는 미국에 채굴권이 넘어가고 만다.개항을 통해 유통경제가 확대되자 조선정부는 포구세 등을 중앙세화하여 수취하려 했으나 두모포사건(1878)을 계기로 벽에 부딪쳤다. 그 후 조?일간 통상조약이 개정되면서 개항장 밖에서 행해지던 포구세, 장시세 등에 대해서 외국의 항의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정부는 영업행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형태로 수세정책을 전환코자 했다. 정부의 수세정책은 각사와 각 아문의 상업세 수취를 중앙재정으로 환원하는 것이었으며, 상인들은 영업세 납부를 매개로 독점적인 영업행위를 강화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업세 수세에서 균역청이 장악하고 있던 어염선세와 분세(分稅)를 폐지하지 않는 한 상인들의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증수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재정타개책으로 김옥균은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을, 묄렌도르프는 화폐주조를 주장했다. 그러나 화폐개혁 문제는 차관도입의 성사 여부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고, 차관도입도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내무부의 개화정책은 청의 차관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고종의 반청정책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차관의 도입과 변제라는 악순환 속에서 물적 기반이 취약해졌고, 민씨척족은 봉건제 유지에만 급급할 뿐이었다.농민전쟁으로 체제위기가 드러나면서 개혁의 필요했다. 그러나 삼국간섭과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고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다.이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칭제를 단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에 독립협회는 갑오개혁의 내용을 폐기하여 징세권을 관찰사와 지방관에게 넘기고 황실재산을 황실이 다시 장악하는 등 구제도를 부활시키자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 개최를 통해 자주국의 면모를 유지하며 재정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헌의6조」를 결의했으나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한편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크게 흔들린 봉건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정을 확보하고 부세체제의 모순을 시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898년 양지아문 설립이 결정되었고, 1901년 지계아문이 설립되어 양지아문과 합쳐지면서 지계발급과 양전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전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고, 지계발급은 소유권자에 대한 파악이 부정확하고 등기제도가 부재하여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하지 못했다.대한제국정부는 궁내부와 내장원을 통해 황제의 권력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내장원은 각종 사업에 손을 대면서 황실 재정규모를 확대시키는 한편, 산업시설에 대한 투자와 무기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내장원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황실 측근세력과 러?일의 대립 격화로 일관성 있게 진행되지 못했으며 별 실효가 없었다.황실 주도의 국정 운영은 만성적 적자구조를 해결하기보다 황실이 확실한 재원만을 장악하는 데 치중하여 과세 및 징세체계가 극도로 문란해져 갔다. 재정 확보를 위한 중앙은행의 설립과 「화폐조례」의 실시는 정부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관료 및 상인들의 이윤기반을 황실재정의 재원으로 삼는 한편 근대 사업의 물적 기반을 차관에서 조달하려 했던 대한제국의 식산흥업정책은 황제권의 포기와 차관도입의 실패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2) 생산구조의 변화.1880년대에 들어 일본은 한국산 금을 적극적으로 매입했고 조선정부도 왕실 재정 확보를 위해 광산개발에 적극적이었으므로 광산개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광업은 다른장치를 근대적 기계로 연결시켜 유기를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 이후 점차 개성, 구례, 전주, 재령 등 다른 지역에서도 유기제조공장이 세워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경쟁도 심화되어 기술적 개선이 이루어지는 등 생산력 향상을 가져왔다. 19세기 중엽에는 철가공업이 발전하여 각지에서 규모가 큰 공장제 수공업장들이 나타났다. 이외에 1887년 농기구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김철공장이 세워졌고, 이를 전후로 각종 제지공장과 도자기 공장이 세워졌다. 이렇듯 토착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조선 관습에 의해 결정되는 생활용품이라는 점과 수입상품과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공업부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으므로 이 시기 조선의 토착산업은 외국산 자본제 상품과 대립하지 않는 경우에만 발전했고 자주적 민족산업의 토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개항 초기의 면포생산은 광범한 농민소비층을 대상으로 점차 분업이 발전하여 생산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면포생산의 기본 형태는 농가부업적 가내 수공업이었다. 그런데 1895년 조선 내륙지방을 여행했던 한 일본인의 조사에 따르면, 농가부업을 훨씬 넘어서는 경영형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포의 상업적 생산은 양반이나 상인자본에 의한 선대제적 방식과 부농이 고용노동을 이용하여 상품생산을 하는 부농경영방식의 형태로 이루어졌다.1894년 이전에는 면작과 면포생산을 통해 부농이나 소상품생산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품화된 일본목면(광목)과 막베(씨이팅) 등 값싼 면포와 기계제 방적사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조선면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면포의 주 소비지였던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지역은 일본 목면의 소비시장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함경도 지역에는 광범한 면작-면직호가 존재했기 때문에 지역 내 시장이 협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규모 소비지인 함경도 시장을 상실하게 되면서 면작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부농경영의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자급자족적 생산으로 후퇴했다
    독후감/창작| 2009.05.24| 6페이지| 1,000원| 조회(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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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준의 ‘해방전후’를 읽고
    『해방전후』에 나타난 이태준의 의식변화-이태준의 『해방전후』를 읽고Ⅰ. 서론Ⅱ. 본론1. 해방 전 현의 도피적 태도.2. 해방 후 현의 의식변화.Ⅲ. 결론Ⅰ. 서론『해방전후』는 광복전후의 문단상황과 이태준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작품에서 이태준은 ‘현’이라는 자전적인 인물을 통해 해방 전의 현실적 처세에 대한 반성과 변명을 하는 동시에, 해방 후 좌익계열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지도자로 변모하게 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품은 크게 광복 전과 후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에 따른 ‘현’의 의식 변화를 담고 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주인공의 의식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다.Ⅱ. 본론1. 해방 전 현의 도피적 태도.작품의 전반부에서 현은 ‘살아 견디고 싶다.’라는 욕망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동아전기 번역 등의 친일 행위를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현의 변명은 김직원의 “현공 같은 젊은이는 어떻게든 부지했다가...’ 라는 말로 한층 합리화된다. 이렇듯 김직원을 앞세워 광복 전 자신의 소극적인 처세와 문학 활동에 대해 변명하는 한편, 시대착오적인 김직원을 통하여 자신의 자연주의와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단순히 시대적인 타협이었음을 반성하면서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김직원과 대립관계로 나아가게 된다.2. 해방 후 현의 의식변화.광복 전 좌익단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현이 광복 이후 자신의 할 일을 찾아 스스로 좌익계열의 ‘문협’을 찾아가게 된 변화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것은 광복 전의 소극적인 현실적 처세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급작스러운 의식전환을 하게 된 데에는 현이 계급보다는 민족의 문제를 중요시 여기고 있었고, 좌익단체의 논리 또한 ‘민족을 위함’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현의 변화는 해방 전 동류의식을 나누던 김직원과의 의견대립을 가져오게 되며, 결국 김직원은 돌과 같은 완강한 머리의 시대착오적 인물로 인식되고 만다.
    독후감/창작| 2009.05.24| 2페이지| 1,000원| 조회(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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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맺힌 그들의 이야기.이 책은 작가 자신과 그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을 주인공으로 독특한 편집과 이중화법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강렬한 붉은색으로 쓰여진 ‘쥐’라는 제목과 표지디자인, 그리고 본문의 거친 펜터치의 흑백 그림들은 이 책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럼 계속해서 이 책을 읽고 느낀 나의 생각을 위주로 적어보도록 하겠다.쥐란 어떠한 동물인가. 아무리 잡아 죽여도 끈질기게 살아남고, 순식간에 불어나서 전염병을 옮기고 곡식을 훔쳐먹는 동물이다. 이런 부정적인 면과 엄청난 생명력과 결속력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공존한다. 이에 빗대어 유태인들은 그들의 나라도 없이 학대받으며 오랜 세월을 떠돌았지만, 그들의 언어와 문화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의미가 ‘쥐’에 깃들어있는 것이다.이 책은 작가의 아버지가 겪은 유태인 대학살의 이야기를 직접 전해주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인 블라덱 슈피겔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었으나 타고난 수완과 적응력으로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를 보면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빠른 두뇌회전이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수용소 시절의 후유증으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믿을 것은 물질의 축적뿐이라 생각하며, 지독한 구두쇠로 아내와 아들에게까지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아이러니 하게도 ‘인종차별’이라는 극단의 상황을 겪었던 그가 흑인을 ‘인종차별’하는 태도는 바로 유태인 대학살의 출발이 아니던가. 작가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눈으로 보고있다.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수용소에서의 블라덱의 모습이다. 가족과 동료들이 죽고 매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텐데도 비교적 담담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시체더미를 밟고 가면서 느낀것이 단지 살의 미끄러움뿐이었다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시체더미에 무뎌질 정도로 그가 처했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와 그의 다소 비굴하다고 느껴지는 행동도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로 살아남기 힘들었다는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독후감/창작| 2007.12.17| 1페이지| 1,000원| 조회(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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