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姉妹三人業以成在之?者零妙寺言寂法師在?姉者 照文皇太后君?在?妹者 敬信太王?在也이 석탑기는 경북 금릉군(金陵郡:현 김천시) 남면(南面) 오봉리(梧鳳里) 소재의 쌍탑을 1916년에 경복궁으로 이건할 때 알려진 것이다. 이 석탑의 기록에는 758년(경덕왕(景德王) 17) 건립이라는 자료가 있으나 실제 새긴 것은 원성왕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갈항사(葛項寺)는 승전(勝詮)이 상주(尙州) 영내 개녕군(開寧郡)에 정사를 짓고 돌 무리를 거느리고 화엄을 개강하였다는 절로서 그 뒤로도 이 돌들이 전해왔다고 한다(『삼국유사』권4 승전촉루(勝詮??)). 승전은 당(唐)의 법장(法藏)에게서 화엄을 배우고, 법장이 의상(義相)에게 보내는 탐현기(探玄記), 교분기(敎分記) 등 법장 자신의 저술과 그 내용을 적은 서신(書信)을 가져와 전한 승려이다.쌍탑 중 동탑 상층 기단의 면석에 본 자료가 새겨져 있는데, 탑의 높이는 448cm이고 글씨는 약 6cm 크기의 행서체이다. 동서 양탑 기단 밑의 가공석 사리공에서는 사리구가 출토되었다. 현재 탑은 경복궁에 있고, 사리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의 찬자와 서자는 미상이다.본 자료는 남녀 삼형제가 탑을 세우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에는 기록된 연대인 경덕왕대(景德王代)보다 30년쯤 뒤에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고 나서 추봉(追封)한 원성왕 모친의 추봉 칭호가 기록되어 있고 원성왕의 시호가 아닌 휘(諱)가 쓰여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모두 신뢰할 경우 탑의 조성보다 약 30여 년 후인 원성왕 재위중에 새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에 세우시니라. 남자형제와 두 여자형제 모두 셋이 업으로 이루시니라. 남자형제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법사이며, 큰누이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님이시며, 작은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이시니라.실상사편운화상부도(實相寺片雲和尙浮圖)創祖洪陟弟子安峯創祖片雲和尙浮圖正開十年庚午歲建본 명문은 전북 남원군(南原郡) 산내면(山內面) 입석리(立石里) 실상사(實相寺) 남쪽에 있는 조계암(曹溪庵) 유지(遺址)의 석조 부도(浮圖)에 해서로 쓰인 자료이다. 부도는 삼단으로 구성되어, 하단부는 촉대형(燭臺形) 대석이고 중단부는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발우형이며 상단부는 옥개형 상륜(相輪)이다(金包光). 본 자료의 주인인 편운(片雲)은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창조(開創祖)인 홍척(洪陟)의 제자임을 명기하고 있어 수철(秀澈)과 법형제(法兄弟)간이 된다. 현재 실상사에는 홍척과 그의 제자 수철의 탑과 부도가 각각 세워져 있는데, 본 편운의 부도는 조계암에 있다. 이로써 볼 때 편운은 본사와 달리 따로 절을 개창하여 지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편운이 창건했다는 안봉사(安峯寺)는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에 안봉사라는 이름의 절이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8).창건조사 홍척(洪陟)의 제자이며 안봉사(安峯寺)의 개창자인 편운(片雲)의 부도이다. 정개(正開) 10년 경오년에 세운다.흥법사염거화상탑지(興法寺廉巨和尙塔誌) 會昌四?歲在甲子季秋之月兩旬九日遷化廉居和尙塔去釋迦牟尼佛入涅槃般一千八百四?矣當此國慶膺大王之時이 탑지(塔誌)는 844년(문성왕文聖王 6)에 조성되었다. 이 탑지가 발견된 탑은 본래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지정면(地正面) 안창리(安昌里) 흥법사지(興法寺址)에 있던 것으로서 일제시대에 서울 탑골공원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흥법사지에서는 진공대사탑(眞空大師塔) 이외에 이안(移安)한 유물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원소재지는 현재 확인할 수 없다.본 자료는 염거(廉居)화상의 탑에 돌아간 연시(年時)를 기록한 것이다. 염거화상은 도의(道義)의 제자로 설산(雪山) 억성사(億聖寺)에서 지내다가 제자인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에게 법을 전해 주어 체징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이루게 함으로써 도의에 이어 가지산문의 제2조로 꼽히는 선사이다.
?향가鄕歌의 명칭과 개념1. 鄕歌: 삼국~통일신라 사이의 기록문학, 그시대에 향가이외의 다른 문학이 있었으나 모두 구비문학이었다. 남은 자료는 삼국유사에 이야기들에 섞여 쓰인 14수 와 균여전의 보현십원가 11수가 있다.a. 自國之歌 -삼국사기의 열전과 삼국유사 균여전등에서 일컬음b. 國風- 최남선은 화랑집단이 특별히 부른 노래라 함c. 신라시대 조선 고유의 歌 라고 이야기 함- 小倉進平(향가의 첫 연구자)d. 6세기 이후의 이두문자에 의한 定型詩歌 라고 정의 내림 - 우리어문학회2. 詞腦歌 (寺內 詩腦, 詞腦): 고려 조선 민요들도 향가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음. 따라서 아래의 노래들(삼국유사 또는 균여전의 노래)는 사뇌가라고 해야 한다.a. 향가와 같은 개념으로 삼국유사와 균여전의 기록.b. ?ㅣ?ㅣㅅ놀애 : 신라중심지 詞腦野 지방의 노래 - 양주동c. 향가의 대표적 장르 (사뇌가적 장르) - 정병욱d. 향가와 동의어이나 이두식으로 쓴 표기 (詞 음차로 ?ㅣ 腦 훈차로 골 따라서 시골노래) - 최철향가 14수 배경설화와 해독1. 薯童謠백제의 제30대 무왕은 그 모친이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항상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계를 꾸려 갔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 불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기 그지 없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신라의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그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자 자신이 지은 동요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인 것이다. 이 동요로 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고 그 길에 서동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서동이 많이 쌓인 금을 가지고 있어 이것을 신라 궁중에 갖다 두니 진평왕에게 이로부터 신임을 얻어 훗날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善化公主 主 隱/ 他 密只 嫁良 置古/ 薯童房乙/ 夜矣 卵乙 抱遺去如선화공주 니림 은/ ? 그슥 ㄱ얼랑 두고/서동방을/ 바매 알? 안고가다선화 공주 님 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방을/밤에 알을 안고 간다* 卯乙 , 卵乙, 乙에 따라 전체 문맥이 달라짐2. 彗星歌신라 진평왕 때 시세(時勢)가 몹시 어지러워 신라와 일본 사이의 관계가 자못 악화되었다. 세 명의 화랑이 풍악(금강산)으로 놀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心大星)의 중심을 범하는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천체의 괴변은 종종 국통(國統)에 불길한 변란을 가져온다고 생각한 세 화랑은 놀러가는 것을 중지하고 산을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왜병이 온다는 것이다. 이에, 융천사가 단을 쌓고 목욕한 후 이 노래를 지어 부르니, 혜성이 사라지고 국토를 침범한 왜병도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화랑들에게 금강산에 놀러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舊理 東尸 汀叱/乾達婆矣 遊烏隱 城叱兮良 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邊也藪耶/옛날 동쪽 물가/건달파의 논 성을랑 바라고 / 왜군도 왔다 / 횃불 올린 어여 수플이여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세 화랑의 산 보신다는 말씀 듣고/ 달도 갈라 그어 잦아들려 하는데/ 길 쓸 별 바라고/혜성是有姪多/이여하고 사뢴 사람이 있다.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北所音叱慧叱只有叱故아아. 달은 떠가 버렸더라/ 이에 어울릴 무슨 혜성을 함께 하였습니까옛날, 동해 물가에 건달바(신기루)가 / 어리던 성(城)을 바라보고 / 왜군이 왔다고 / 봉화를 올린 일이 있었다. / 삼화(세 화랑)이 산 구경 간다는 소식을 듣고 / 달도 부지런히 밝히려는 가운데 / 길을 쓸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 혜성이여, 하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 아아, 달 아래로 떠나갔더라 / 어이유, 무슨 혜성이 있을까?3.風謠석양지(선덕여왕 때의 사람)가 영묘사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 입정(入定. 선정에 들어감)에서 정수(正受. 삼매의 경지)의 태도로 주무르고 문지르는 방법을 삼았으므로, 성중의 사녀(寺女)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한다. 이 노래는 흙을 나르면서 부른 노래라고 한다.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온다온다온다/온다 서러운 이 많아라 /서러운 중생의 무리여 / 공덕 닦으러 온다4. 願往生歌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란 두 사람이 있어 그들은 평소에 먼저 극락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는 서로 알리자고 약속하였다. 먼저 광덕이 극락으로 가게 되고 엄장이 같이 살자고 하자 함께 살았으나 정을 통하자고 하니까 광덕도 정을 통하지 않았는데 그대가 어찌 하리오 하며, 광덕은 매일 밤마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닦고 진리에 달관해서 극락으로 갔다고 했다. 엄장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와 원효 대사에게 가니 대사의 지도를 받아 몸을 깨끗이하고 뉘우쳐 또한 극락세계로 가게 되었다.月下伊低赤/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多可支白遣賜立/달이어째서/ 서방까지 가시겠습니까/ 무량수불전에/ 보고의 말씀빠짐없이 사뢰소서/誓音深史隱 尊衣 希仰?/ 願往生願往生/兩手集刀花乎白良/慕人有如白遣賜立맹세의 원이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바라보며/원왕생원왕생/두손 곧추모아 /그리는이 있다사뢰소서//阿耶此身遣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아아.이몸남겨두고 / 사십팔큰원 이루실까/이 노래에서 달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달은 광덕이 발 딛고 서 있는 此岸과 아미타불이 계신 彼岸의 서방정토를 오고 갈 수 있는 불법전달자인 것이다."원왕생(願往生)"이란, 왕생극락을 원한다는 말로서, 곧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극락은 천당과 같으며, 서방정토를 말한다. 이 노래는 소위 아미타불의 48대원을 중심으로 노래한 것인데, 그것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에 만일 자기가 부처가 된다면 48가지 일을 완전히 성취하겠다고 한데서 유래된 말이다5. 慕 竹旨郞 歌배경설화의 전반부는 '죽지랑이 낭도를 이끌고 모량부 부산성으로 가서 익선에게 매여 있던 여인 득오를 갖은 어려움 끝에 데려온다는 이야기'로 득오와 죽지랑의 관계를 시사해주는 것이다. 득오가 를 짓게 된 동기와 관련이 있다.지나간봄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殿閣을 밝히오신/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 눈의 돌음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낭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길 /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6. 獻花歌신라 성덕왕 때 왕이 부임하러가는 도중, 절벽 꼭대기 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그것보고 꽃을 꺽어달라고 하였으나 위험해서 다들 거절했다.그 때 곁으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고 또한 노래를 지어서 바치었다.자주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꺾어 바치오리다.7. 怨歌신라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어느 날, 어진 선비 信忠과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다가 신충에게 "뒷날에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로 남으리라. 했다. 효성왕이 즉위하여 신충은 등용시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며 노래를 지어서 그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잣나무가 시들자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살펴보았는데 신하가 잣나무에 붙어 있는 그 노래를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그제야 잣나무도 되살아났다.질 좋은 잣이 / 가을에 말라 떨어지지 아니하매, / 너를 중히 여겨 가겠다 하신 것과는 달리/ 낯이 변해 버리신 겨울에여/ 달이 그림자 내린 연못갓 /지나가는 물결에 대한 모래로다 (물결이 일면 모래는 사라짐)/모습이야 바라보지만/ 세상 모든 것 어희여 버린 처지여/8. 兜(두)率歌신라 경덕왕에 해가 둘이 나타나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중을 청하면 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그 때 월명사가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월명사는 국선(國仙)에 속한 한몸으로 향가는 잘 알지만, 불교와 노래는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다."고 하였다. 월명사는 왕명에 따라 다음과 같은 를 지어 바쳤다.오늘 이에 散花 불러 /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곹은 마음의 명에 부리워져 /미륵좌주 뫼셔 羅立하라.오늘 여기 산화가를 불러 / 뿌리는 꽃이여, 너는 / 곧은 마음의 명(命)을 받들어 심부름하는 까닭에 / 멀리 도솔처의 미륵님을 모시는구나9. 祭 亡妹 歌신라에 피리를 잘 부는 한 스님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월명이었는데, 그는 향가도 잘 지어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한편, 피리의 명수인 월명이 일찍이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멈추었다. 그래서, 그 동리 이름을 '월명리'라 하고, 그의 이름인 '월명'또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생사 길은/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몯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10. 安民歌신라 경덕왕 때 왕이 훌륭한 중하나를 데려 오라고 하자 높은 지위에 있는 중을 데려 오자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옷을 기워입고 벚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오는 중을 기쁘게 맞았다. 차를 다리는 제구를 가진 그는 충담인데 부처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오는길이라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대사의 기파랑을 찬양한 사뇌가는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그러면 나를 위해서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으라." 중이 그 당장 임금의 명령에 의해서 노래를 지어 바치었더니 왕이 잘 지었다고 벼슬 주었으나 그 벼슬을 굳이 사양해서 받지 않았다군은 아비요/민은 사랑하시는 어미요/민은 어리석은 아이라고/하실진댄 민이 사랑을 알리라/ 대중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이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할 진댄 나라 보전할 것을 알리라/ 아아, 군답게 신답게 민답게/한다면 나라가 태평을 지속하느니라/
(고등학교)Ⅰ.1. 목표.ㄱ. 학생은 유사하게 생긴 한자어 3개로 구성된 문제 5문제가 주어졌을 때ㄴ. 15분안에 3개이상을 정확히ㄷ. 주어진 훈음의 한자로 골라낼 수 있다.2. 자극.ㄱ. 문항중 답은 전시간에 배운 단어중 유사단어가 많아서 혼동하기 쉬운 단어 를 준다.ㄴ. 문항은 3지선다형이다.3. 반응.ㄱ. 오답지는 부수가 같으나 그 외의 한자 모양이 다른 단어를 제시한다.ㄴ. 오답지는 부수가 같지는 않으나 언뜻보기에 비슷한 한자를 제시한다.ㄷ. 오답지는 뜻이 같은 한자를 제시한다.4. 예문.기후 후 한가할 가 잃다 실候 侯 喉 閑 暇 假 失 矢 朱Ⅱ.1. 목표.ㄱ. 뜻이 비슷한 고사성어 3개로 구성된 문제 5개가 주어졌을 때ㄴ. 20분안에 3개이상을 정확히ㄷ. 주어진 상황에 맞는 고사성어를 찾아낼 수 있다.2. 자극.ㄱ. 제시문으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그림으로 주어준다.ㄴ. 3개의 문항은 모두 전 시간에 배운 고사성어로 주어준다.3. 반응.ㄱ. 학생들은 그림을 해독하여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다.ㄴ. 주어진 고사성어들이 쓰이는 환경을 각각 생각한다.ㄷ. 주어진 그림에 맞는 고사성어를 고른다.ㄹ. 오답지는 비슷한상황에 쓰이나 동일한 상황에는 쓰일 수 없는것을 제시한다.4. 예문다음 그림에서 아들의 행동을 잘 나타낸 고사성어를 골라라.1. 見物生心2. 附和雷同3. 感之德之다음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을 골라라.1. 家和萬事成2. 雪上加霜3. 內憂外患Ⅲ.1. 목표ㄱ. 학생은 4개의 한문이 주어졌을 때ㄴ. 20분안에 3개의 문장을 문장구조에 맞게ㄷ. 해석할 수 있다.2. 자극ㄱ. 전시간에 배운 문장을 제시한다.ㄴ. 문장은 보편적인 문장구조와 특수적인 구조를 각각 제시한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사행(使行)”이라는 말은 “사신행차의 준말이다. 사신이라는 말은 오늘날 국제간의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하여 외국에 나가 이러한 기간 머물러 있거나 잠시 다니어 오는 대사 또는 공사 및 영사들 같은 사절들로, 임금님의 명령을 받들고 다른 나라에 심부름을 가는 신하를 이른다. 또 행차라는 말은 ”여러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길을 간다.”는 뜻과 그 사실을 공경하여서 “웃어른이 길을 감”이라는 뜻으로 이르기도 한다. 최강현은 이 말이 우리 문헌에서 가장 일찍 사용된 용례로 조선 숙종 46(1720)년에 간행된『통문관지』의「사행록」인 것으로 보고 있다조선 시대 외교는 우리나라와 가장 인접한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외교의 목적은 사신행차의 일원으로 뽑혀서 중국 천하와 일본을 구경해서 해외 견문을 직접 접하는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렇게도 가기 어려운 중국이나 일본행을 한 뒤 넓은 천하와 기이한 경치들을 구경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사람들은 이를 국문 또는 한문으로 견문을 남겼다. 따라서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행가사에는 중국행 사행가사와 일본행사행가사가 있다. 그중에서 조선 시대 사행가사는 겨우 7편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을 다녀와 지은 작품 5편이고 일본을 다녀와 지은 작품은 겨우 2편뿐이다. 이 중 일본행 사행가사인 「일동장유가」를 살펴보겠는데, 조선통신사의 일본행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9년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에 걸쳐 이뤄졌다.1. 작 자김인겸 (金仁謙) : 1707(숙종33) ~ 1772(영조48)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14세때 아버지를 사별하고 가난에 시달려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47세 때인 1753년(영조29년)에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57세때인 1763년에는 통신사행의 종사관인 김상익의 서기로 뽑혀 통신사 조엄과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으로 를 지었다. 그 뒤 지형현감(砥平縣監)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저술로는 역시 일본기행을 한문으로 지은 이 있다.2. 의 구성.○ 제 1권은 여행동기와 행장을 나타내는 212구로 구성되어있고 그 내용은 일본에서 친선 사절을 청하여, 여러 수속 끝에 8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이르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제 2권은 동경까지의 노정과 견문 소감으로 5845구로 되어있고 그 내용은 10월 6일, 부산에서 승선하여 발선(發船)하는 장면에서부터 대마도, 일기도(壹岐島), 축전주(築前州), 남도(藍島)를 거쳐 적간관(赤間關)에 도착하여 머무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제 3권은 동경에서의 관경 소감으로 368구로 되어있고 정월 초하루 적간관의 명절 이야기로부터 오사카, 교토, 와다오라, 시나키와를 거쳐 에도(江戶)에 들어가 사행(使行)의 임무를 마칠때 까지가 기록되어 있다.○ 제 4 권은 돌아오는 노정과 창작 동기 1818구로 되어있고 3월 11일 귀로(歸路)에 올라, 6월 20일 부산에 귀환, 7월 8일 서울에 와서 영조께 복명(復命)할 때 까지 기록되어 있다.3. 의 노정(路程)영조 39년(1763) 계미(癸未)에 일본측에서 수교를 청하여 왔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다. 이를 속칭 계미 통신사라고 한다. 영조 39년 8월 3일 서울을 출발, 8월 20일 부산 도착, 10월 6일 부산항 출발,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를 가로질러 이듬해 1월 20일 오사카(大阪) 도착, 목적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동경)에는 2월16일에 도착하였으니 얼마나 긴 여행이었는지 알 수 있다. 돌아오는 길도 이와 같다. 에도를 떠난 것이 3월 11일, 부산에 도착한 것이 6월 22일, 서울에 돌아와 경희궁에 복명(復命)한 것이 7월 8일이었으니 11개월의 기간에 걸친 장거리 여행이다.4. 일동장유가의 내용과 의의이 작품은 총 4책 800여구(8243구)로 기행가사 중 최 장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해외 국문기행가사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일동장유가?는 당시 외국의 정보에 어두웠던 많은 사람들, 특히 한문을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 일본의 독특한 풍속과 자연과 새로운 문물 등을 소개하고 알렸을 뿐만 아니라 통신사의 모습과 일본의 접대 모습 등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소위 ‘해외정보가이드북’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미흡하나마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는데도 일조했다는 점에서, 또 교술성의 가사라는 관점에서도 그 가치는 크게 평가받고 있다.청나라의 연경을 다녀와 쓴 홍순학의 '연행가(燕行歌)'와 쌍벽을 이루며, 순 국문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장편 기행 가사로서 국문학상 가사 문학으로 처리되어 왔지만, 일반적인 문학 양식의 개념으로 보면 기행문의 성격을 지닌 광의의 수필 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지은이의 공정한 비판, 기발한 위트, 흐뭇한 해학 등을 맛 볼수 있다는 점과 정확한 노정과 일시의 기록, 상세한 기상 보고와 자연 환경의 묘사 등은 물론, 여행 중의 생활, 일본과의 외교편모, 문물제도, 인물, 풍속 등을 개인적인 판단을 삽입하면서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행문으로서 요건을 훌륭히 갖추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이 작품은 200년 전 우리 외교 사절단의 규모와 한일양국의 외교 방법, 그리고 당시 일본의 풍속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예리한 관찰과 비판을 통하여 임진왜란 이후 아직도 가시지 않은 대왜(對倭)감정 등을 읽을 수 있어 외교사적인 면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또한 약 1년간 일본을 돌아보면서 작가가 본 일본의 인물?풍속의 특징, 자연, 발전된 도시모습, 농토와 무, 고구마 같은 농작물 소개, 수차와 물레방아 같은 발달된 농업용 기계, 발달된 교량 등 일본의 많은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일본의식과, 상공업이나 기술도입에 관심을 가지는 실학의 이용후생적인 면을 볼 수 있다.5.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일본의 주거생활.집 형상이 궁슝하야 노적덤이 같고내야궁슝하야는 매우 높다는 뜻으로 ‘집 모습이 몹시 높아서 노적더미 같다.’라는 뜻이다.한국은 겨울에 한랭한 서북풍을 많이 받기 때문에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것이 집의 중요한 역할이된다 . 그래서 발달하게 된 것이 온돌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습기가 많아 땅바닥에 방을 내는 것보다 땅과 방 사이를 떼어 통풍이 잘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본 집은 방바닥 자체가 땅에서 멀도록 높게 짓고, 다다미를 까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 온돌방은 밑에서 열을 발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의 높이가 높은 것보다 낮은 것이 유리하고, 온돌방은 문이 작고 실내가 어두운 편이다. 이와는 달리 일본 방은 온돌방보다 높이가 높고 대체로 밝으며 넓이가 넓다.여기에서 조금 나아가 보면 다다미방에는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안전하고, 두터운 방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온돌방에서는 넓게 다리를 펴고 앉는 것이 유리하며, 방석이 얇은 것이 유리하다. 이러한 앉는 자세는 의상에도 영향을 주어 무릎을 꿇는 일본식에는 타이트한 일본 옷이 좋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 한국식에는 한복이 더없이 편하다. 또한 한 다리를 세우고 앉는 한국 여인에게 우리의 전통 한복이 안성맞춤이라 하겠다.6.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일본의식김인겸의 대일감정은 매우 강경하고 부정적이다. 그는 일본인을 ‘금수만도 못한 족속’, ‘왜(倭)놈’, ‘예(穢)놈’, ‘도이’ 등으로 얕잡아 보았으며, 노정시에도 임진란과 관련된 전적이 있는 곳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명에 대해서는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사대주의적 사고방식 속에 빠져 있었다.우리의 옛 문헌에서는 일본을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왜’라고 일컬어 왔다. ‘일본’이라고 쓴 예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삼국유사 에도 ‘일본’으로 나오는 것은 극히 희소하고 ‘왜’가 절대다수로 많이 나타나 있다. ‘왜’라는 표현은 고의적인 일본의 멸시관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오직 가장 관습화된 호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원래 ‘왜’라는 호칭은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해 온 표현방식이었다.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는 철저한 적개심에서 ‘왜놈’이 의식적으로 입에서 터져 나왔고 그렇기 때문에 임란이후의 문학작품에서는 ‘일본’이라는 기록은 거의 볼 수 없고 반드시 ‘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김인겸에게는 ‘일본시’는 ‘왜시’이고, ‘일본유학자’는 ‘왜유’, ‘왜선비’였다. 그가 자주 쓴 ‘왜’라는 말에 ‘놈’이라는 말을 덧붙인 ‘왜놈’이라든지 ‘예놈’과 같은 말은 일본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표현임에 분명하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대장편인 ?일동장유가?의 시작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몇 차례 ‘일본’이라는 말을 썼을 뿐,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머지는 ‘일본인’이라고 해도 좋은 곳에서
생후 말하기와 발성기관의 발달.1. 유아기의 말하기는 언제부터 가능한가?사람은 태어나서는 숨을 내쉬는 것(크게 응애~하고 우는 것)으로 첫 소리를 내게 되고 죽을 때는 숨을 들이 쉬면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럼 인간이 처음 낸 소리가 자신의 싫어함을 내비친 것을 추측할 수 는 있지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우리가 언어라고 하는 것은 동영상 강의에서 배운 것에서 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분절성, 자의성, 사회성, 창조성을 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응애” 라는 소리는 분절성을 띠지 않고 또한 그 의미를 정확히 판단해 낼 수 가 없다. 이 소리는 사회적 약속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로써 쉽게라도 이 소리는 말하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그 다음 사람은 옹알이) 라는 소리를 내게 된다. 이 소리는 성대로 공기를 내보내는 조절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지신의 의도대로 "바바" "다다"등의 음절로 구성하여 옹알거리게 된다. 따라서 옹아리를 일종의 음성적 연습으로 볼 수 있는데 생후 6-8개월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보통의 경우1년이 지나면 점차 감소하게 된다.) 그럼 옹알이를 말하기로 볼 수 있을까? 말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사람이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데 쓰는 음성, 또는 그것을 문자로 나타낸 것. 언어.” 라고 나와 있다. 이와같이 말을 하는 것과 옹알이는 다르다. 인간은 생후 몇 개월 이내에 그들이 첫마디를 내뱉기 오래 전부터 이미 언어를 배운다. 부모나 주위의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고 어떻게 하는 것 인지 관찰하는 것이다. 아기는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배우려고 하며 옹알이로 발성 연습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옹알이하기 전에 아기는 말하는 법을 알고 있으므로 어른들이 말하고 난 후 자기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어 차례를 맞춘다고 한다.) 이처럼 옹알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언어능력을 입을 통해 소리로 내기 위한 연습과정이고 시행착오이지 말하는 것은 아니다.앞에서 이야기 한 것을 종합해 보면,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말하기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또한 말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기는 그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연습을 하면서 점차 의사소통이 가능한 말을 하게 되는데 그때까지의 과정이 언어 발달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기의 발달은 인지발달과 영향력이 있다는 피아제의 의견도 있지만 그에 대한 반례(인지발달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언어발달에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례)가 나타나면서 언어발달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기는 생득적으로 타고나는 것을 연습에 의해 완성하게 되고 그러한 연습의 과정이 옹알이까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그럼 말하기의 처음 시작은 언제로 해야 하는가? 앞의 논리에 비추어 보면 옹알이를 끝내고 단어를 말 할 수 있는 시작점이 말하기의 시작점으로 잡을 수 있다. 아기는 1년후가 되면 놀이 중에 환경 소리 -자동차(빵빵), 호랑이(어흥)-를 모방하기도 하고 30개 이상의 단어를 말할 줄도 안다. 2개 이상의 단어를 결합해서, ‘아빠 빠이빠이’ ‘엄마 안아’ 같은 문장을 만든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점차 단어 수도 늘어나고 점점 긴 문장을 만들어서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 사회적 약속인 단어의 뜻을 배워 사용하기도 하며 의사소통을 하는 단계가 이 순간이다.2. 옹알이와 말하기의 차이점을 발성기관의 차이점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