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장유가
- 최초 등록일
- 2009.04.04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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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동장유가의 경로와 그당시의 작가의 상황을 설명
목차
1. 작 자
2. <일동장유가>의 구성.
3. <일동장유가>의 노정(路程)
4. 일동장유가의 내용과 의의
5.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일본의 주거생활.
6. 일동장유가에 나타난 일본의식
7. 일동장유가의 한계
본문내용
“사행(使行)”이라는 말은 “사신행차의 준말이다. 사신이라는 말은 오늘날 국제간의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하여 외국에 나가 이러한 기간 머물러 있거나 잠시 다니어 오는 대사 또는 공사 및 영사들 같은 사절들로, 임금님의 명령을 받들고 다른 나라에 심부름을 가는 신하를 이른다. 또 행차라는 말은 ”여러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길을 간다.”는 뜻과 그 사실을 공경하여서 “웃어른이 길을 감”이라는 뜻으로 이르기도 한다. 최강현은 이 말이 우리 문헌에서 가장 일찍 사용된 용례로 조선 숙종 46(1720)년에 간행된『통문관지』의「사행록」인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시대 외교는 우리나라와 가장 인접한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외교의 목적은 사신행차의 일원으로 뽑혀서 중국 천하와 일본을 구경해서 해외 견문을 직접 접하는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렇게도 가기 어려운 중국이나 일본행을 한 뒤 넓은 천하와 기이한 경치들을 구경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사람들은 이를 국문 또는 한문으로 견문을 남겼다. 따라서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행가사에는 중국행 사행가사와 일본행사행가사가 있다. 그중에서 조선 시대 사행가사는 겨우 7편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을 다녀와 지은 작품 5편이고 일본을 다녀와 지은 작품은 겨우 2편뿐이다. 이 중 일본행 사행가사인 「일동장유가」를 살펴보겠는데, 조선통신사의 일본행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9년 뒤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에 걸쳐 이뤄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