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
검색어 입력폼
  • 뇌-마음 관계와 성경적 인간관 비교 분석 연구
    뇌-마음 관계와 성경적 인간관 비교 분석 연구◈ 목차 ◈1. 문제제기2. 심신문제3. 리벳실험과 신비로운 불꽃4. 성경 속 ‘영혼’에 대한 고찰과 성경적 인간론5. 이중양상일원론을 통한 뇌과학과 성경적 인간관의 양립 가능성6. 종교적 경험에 대한 고찰7. 결론1. 문제제기신경과학은 뇌졸중이나 치매 같은 뇌와 신경계의 질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지각, 판단, 기억, 언어, 감정 등 매우 다양한 증상 역시 다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마음과 의식, 정신, 더 나아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추상적 질문에 까지 다다르게 된다. 즉 다윈의 진화론이 생물학을 넘어 인간학과 신학의 영역에 질문을 제기한 것처럼 뇌과학 역시 인간학, 철학, 신학의 영역에 까지 도달하며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각종 실험과 임상을 바탕으로 축적되어 온 신경과학의 발전은 마음을 뇌라고 하는 생체조직에서 비롯되는 생물학적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결국, 나 자신이라는 ‘자아’는 우리의 머리 속 뇌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뇌 작용의 산물이다. 이러한 신경과학의 발전은 분명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다준 충격 만큼이나 철학과 신학이 견지해온 인간론에 큰 충격을 가할 수 밖에 없다. 특별히 오늘날은 그야말로 뇌과학의 시대 혹은 뇌혁명의 시대이다. 그래서 신경윤리학, 신경심리학, 신경철학, 신경생물학 등 기존의 학문 영역에 뇌과학이 접목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뇌과학의 광범위한 발전은 그 동안 철학과 신학이 제기하며 대답을 해 온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나름의 답변을 내놓으면서 철학과 신학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뇌과학은 우리의 종교적 경험 역시 뇌 작용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종교적 경험은 물론 신에 대한 존재까지도 회의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뇌과학에 대하여 신학은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시급한 문제라 할 수 있다.본고는 특별히 이러한 신경과학 특별히 뇌과학이 기독교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부수현상일 뿐이다. 부수현상이기 때문에, 의식은 두뇌과정이나 다른 의식을 발생시킬 수 없고, 행동의 원인도 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두뇌과정일 뿐이다.“창발론”을 주장한 알렉산더(S. Alexander)에 따르면, 생물학적인 과정들이 복잡한 수준으로 도달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 새로운 속성을 가진 심적 현상이 창발(emergence)된다. 창발된 심적 현상들은 그것의 하위질서인 두뇌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고, 하위질서의 두뇌과정에 의해 예측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 심적 현상이 창발되는가를 우리는 더 이상 알 수 없고, 다만 창발 현상을 부정할 수 없는 사태로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또 다른 창발론자는 플라나간이다. 플라나간은 우리의 사유를 뉴런들의 연결들을 통하여 창발하는 어떤 것을 본다. 플라나간이 ‘자아’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아’는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창발적인 자연적 속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아’들은 다양다변한 사회적 환경들 속에서 살아가는 몸을 지닌 유기체들 속에서 창발한다고 주장한다. 즉 몸과 두뇌를 가가지고 있는 동물들에게는 “자기-창발”(seif0emergence)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발론은 전체적으로는 의식의 유물론의 틀 안에서 물질과 의식에 대한 속성이원론을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심신동일론”(identity theory)을 제시한 플레이스(U. Place)와 스마트(J. Smart)에 따르면 심적인 것은 곧 신경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심신동일론에 따르면 의식이 두뇌과정과 독립적으로 하나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식에 대한 유물론을 전개하고 있다 할 수 있다.“수반론”을 주장한 에덜먼은 의식은 두뇌과정에 의해 인과적으로 산출된다기 보다는, 두뇌과정과 동시에 두뇌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entail)된 것으로 본다. 의식은 두뇌과정의 한 속성이다. 그러나 의식은 두뇌과정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몸의 움직임이나 다른 어떤 두뇌과정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의식이 리벳의 실험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에 관한 실험이지 도덕적으로 차이가 있는 두 행동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실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주목할 것은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리벳은 이 실험을 통해 의식과 자유의지를 거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벳 스스로도 이 실험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벳은 이 실험에서 실험대상자들이 W와 운동 시점 사이의 200밀리초 동안 여전히 운동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벳은, 운동의 개시는 의식적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리벳과 그의 팀은 1983년에 발표한 최초의 논문에서 자신들이 결론이 즉흥적이고 신속하게 수행된 결정에만 적용한다는 점을 기술했다. 이 주장은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한 근본적인 직관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리벳에게 중요했다. 자유의지 철학자인 로버트 케인(Robert Kane) 역시 리벳의 이러한 견해를 파악하고 지지했으나 이후에도 이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리벳 실험은 심신문제에 있어서 결정적 답변을 내놓지는 못하였으며 그 실험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종교적 경험을 설명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성급한 판단이다. 리벳 실험에 자극을 받은 후속 실험들 역시 뇌와 마음 혹은 종교적 경험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줄 것으로 보였으나 그 어떤 것도 만족할만한 명백한 답변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경과학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은 신경과학이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산출되는지에 대한, 즉 심신문제에 대해 유물론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답변을 완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철학과 마찬가지로, 뇌과학도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양한 가설들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그리하여 물리주의(physicalism)에 있어서도 그 견해가 다음과 같이 나뉘어지는 실정이다. 모든 의식과 감정을 생리화학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환원적 이 “생기”에 의해 영혼 또는 영적 본성을 지닌 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이 동물과 달리 인간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근거가 된다.그러나 오늘날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이 “생기”가 아담과 동물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한데 묶어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근거로 동물들의 창조를 가리킬 때 쓴 것과 동일한 단어들이 인류 창조를 가리키는 이 구절에 쓰인다고 지적한다. 이 단어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인간의 본성 안에 두신 불멸의 실체를 의미하며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 준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는 것이다.“생령”역시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생령”은 KJV에 “a living soul”로 번역되어 있다.여기서 “soul”은 히브리어로 “nephesh”로 번역되며 구약성경에만 755회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 로슨 스톤(Lawson Stone)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첫째, “nephesh”는 아담이 가진 그 무엇도 아니고, 아담의 본성을 이루는 구성 요소나 그 일부도 아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으시자 흙더미가 실제로 변하여 살아 있는 “nephesh”가 된 것이다. “살아있는 네피쉬”라는 용어는 아담이라는 존재의 총체성을 나타낸다. 둘째, 그럼 “살아있는 네피쉬”는 무엇인가? 2:7앞뒤에 등장하는 구절들에 “살아있는 네피쉬”가 네 번 정도 등장하는데(창1:21, 34, 30) 이 용어는 보통의 동물들을 가리킨다. 즉 “살아있는 네피쉬”는 무형의 영적 실체를 보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물”로 번역할 수 있다. 셋째, “nephesh”를 초월성이나 인간의 불멸하는 내적 본질이 아닌 물리적 존재와 연결시키는 것은 내새에 전반적으로 무심한 구약성경의 흐름과 잘 들어맞는다. 결국 “생령”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창조된 동물처럼 생물로서의 아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아담과 동물이 차별성이 아니라 둘의 연결성을 보여준다.H.D. 맥도널드 역시 “nephesh”가 시편에 나올 때는 대부분 “삶의 원리”라는 뜻을 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지만 오랫동안 이원론적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기독교 인간론에 힘입어 쿠퍼의 견해 역시 전반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이상의 내용을 통해 성경에 나타난 몸과 영혼의 일원론적 이해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원론적 인간이해는 최근 신경과학이 견지하고 있는 물리주의적인 입장과 대화가 가능한 지점일 수 있다. 물론 앞서 살펴본 대로 쿠퍼의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서 일원론과 이원론 중 하나만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정답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이는 신경과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종교적 경험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하여 기독교신앙과 신경과학은 앞으로도 서로 대화하며 토론해야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5. 이중양상일원론을 통한 뇌과학과 성경적 인간관의 양립 가능성그렇다면 최근 신경과학이 펼친 운동장에서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표적인 모형이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첫째, 이른바 풀러그룹(N. Murphy, W. Brown, H. Melony)이 주도한 비환원적 물리주의이다. 비환원적 물리주의에 따르면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인간 존재의 물리적 성격에 관한 진술은 종교 전통의 영적 성격에 관한 진술과 절대 동일한 실체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물리적인 존재이지만 심적 기능의 높은 수준은 물리적으로 작동하는 낮은 수준에서는 전적으로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머피는 마음은 이원론처럼 어떤 형태로든지 인체에 거주하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복잡한 물리적 유기체의 기능적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종교경험과 연계하여 설명하면 종교경험은 일상 경험의 조합에 수반한다. 즉, 종교 경험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달리 종교적 실재를 경험하는데 필요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그 입장이다. 게다가 종교경험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사건과 관계를 맺는게 분명한 특정상황에서 발생하는 일상경험의실이다.
    인문/어학| 2018.05.22| 14페이지| 3,500원| 조회(179)
    미리보기
  • 끊임없는 질문으로 신을 사랑하기-종교에 대하여를 읽고
    종교철학(박일준 교수) 독서보고서『끊임없는 질문으로 신을 사랑하기』를 읽고제출자: 최인기(m.div 3/6)제출일: 2017. 6. 7(수)Ⅰ.들어가는 말‘하나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라는 당위적인 구호에 익숙한 교회 현실을 살아가는 나에게 본서가 처음부터 제시하던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머리를 한 대 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순한 한 문장의 질문이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을 그 동안 놓치고 있었음을 단번에 깨닫게 한 질문이었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자 할 때 하나님의 무엇을 사랑하고자 했던 것인가? 예배하자 할 때 하나님의 무엇을 예배하고자 했던 것인가? 하나님을 섬기자 할 때 하나님의 무엇을 섬기고자 했던 것인가? 아니 하니님을 사랑할 때 과연 나는 무엇을 사랑했던 것인가? 정말 하나님인가? 나인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존 카푸토가 본서에서 지속적으로 붙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질문은 책을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신앙과 내가 속한 교회 현실을 반성하고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었다.본 독서보고서는 바로 이 질문과 그것에 논증을 펼쳐가는 존 카푸토의 주장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종교의 본질을 탐구하며 오늘날의 신앙을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자 한다.Ⅱ. 몸말1. 대문자화된 종교존 카푸토의 반성은 대문자화되고 절대화된 지식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반성이 근저에 깔려 있다. 그는 도그마적으로 진술되고 명제화되어 당위성으로 점철된 종교적 구호들과 교리들이 진정 종교적 영성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절대화되고 대문자화된 지식으로서의 종교는 르네상스 이후 17, 18세기 유럽근대사회의 산물이다. 카푸토는 이 시대를 일컬어 세속화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세속화 시대에서 주목할 사람이 바로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는 애매한 경계나 혼합된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고 각 영역을 정확히 구분하는데,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윤리적 영역으로 축소시켜놓게 된다. 이런 세속화 시대에서 신은 이성이라는 법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피고인과 같은 모습이다. 이제 신은 기도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피고인이 되었다. 그런 세속화의 결국은 무엇인가? 인간 이성이 약속한 유토피아 대신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량학살이다. 카푸토의 눈에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충격선언은 종교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 이러한 세속화 시대가 빚은 종교의 기형화에 대한 냉철한 예언자적 비판이다.문제는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이후 세상은 포스트세속화 혹은 포스트모던화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세속화의 망령이 종교의 현장과 신학의 현장과 신앙의 현실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카푸토는 그것을 근본주의에서 발견하며 그런 근본주의 종교를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근본주의는 심연을 안에서 억압하려는 시도이고, 그것에 수반되는 경향이 있는 과격주의와 폭력성은 이러한 억압의 징후적인 표현이다.” 근본주의가 그러한 경향을 띄게 된 이유는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고정된 해답이나 절대화된 지식 내지 닫힌 결론을 일찌감치 세워두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근본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질문을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정해진 답이 있고 그 답에 ‘예’라고 대답하면 그만이다. ‘아니오’는 용납할 수 없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태도는 이 레포트를 작성하는 중에 발생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런던테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기독교에도 분명 존재한다. 단적으로 미국을 비롯하여 한국기독교의 주류는 이러한 근본주의적 경향에 휩쓸려 있다. 질문의 가능성은 배제하고 하나님에 대한 규정된 진술의 범위를 넘어서면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거침없이 붙여댄다. 신학에 있어 피아(彼我)를 정확히 구분하여 상대를 정죄시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착각한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3포’(이슬람 포비아, 동성애 포비아, 종북포비아)가 아닐까?문제는 오늘날의 시대는 포스트세속화의 시대이다.2. 끊임없는 질문존 카푸토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 얻는 위해한 교훈 중의 하나는, 앎의 욕구를 촉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 안에 붙들려 그것이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하려는 충동에 휩싸인다”라고 말한다. 이 말인 즉슨,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 그 대상을 알고 이해하려는 욕구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럼 그러한 욕구는 무엇으로 표현되는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존 카푸토는 “사랑은 질문을 충동질하며, 적어도 그것이 이해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해답을 발견할거라는 기대가 담겨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해답을 가진 대상이 아니다. 예를들어, 배우자나 애인을 사랑한다 할 때 그 상대를 알고 싶고 이해하려는 열망이 사로잡힌다. 만약 그 상대방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긴다면 이미 그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더 알고 싶고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향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다가서며 그 질문으로 이해의 과정에 들어선다. 사실 어떤 인격적 대상도 다 알 수가 없다. 다 안다고 확신하여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 사람이다. 유한한 사람이 이러한데, 신은 과연 어떠하겠는가?이처럼 신에 대한 사랑은 근본주의 신앙처럼 절대화되고 최종적인 해답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과 성 안셀무스의 질문 등은 단순히 신에 대한 이성적 탐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그 신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열망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존 카푸토에게 있어서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에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질문을 시도하고 추구하는 행위 자체에 있다. 이것이 세속화가 잃어버린 종교적 영성이다.또한 이것은 신에 대한 질문에만 국한되지 않다. 신을 사랑하는 ‘나’에 대한 질문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신을 사랑하는 나는 과연 무엇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인가? 나는 신을 사랑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신이라 여기는 것인가? 신을 사랑한다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결국 존 카푸토의 말대로 참된 신앙은 “안전하지 않다” 정답이 없는 사랑이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질문에 대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계속 열린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안정감을 주지 않는다. 항시 불안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불안정하다.” 이해를 위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고 이해했다 여겨지는 그 지식도 변경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을 이해하고 동시에 신을 이해하려는 나 자신은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야 말로 신에 대한 사랑의 증거이다.소위 ‘답정너’라는 말이 최근 유행이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의 권위적 태도를 비꼬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답정너’가 보편화된 곳은 교회이다. 오히려 강대상과 교권에 의존하여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설교가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잘 대변해준다. 실상 성경적 근거 조차 없는 도그마적 외침이 예배당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을 더 이해하려는 사랑,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는 부재해 있다. 질문으로 불안한 광야에 들어서기 보다 얄팍한 지식에 갖혀서 안정을 유지하려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이다. 결국 오늘날의 교회의 비극은 질문하지 않음에 있다.3. 사랑 행하기와 상상력결국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신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래서 존 카푸토는 만약 자신이 10세기의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을 필사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가?”로 수정했을 것이라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 아닌 어떻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장 신을 무엇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보다 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질문하는 시도로 전환해야 한다. 신이 무엇인지 개념화하고 교리적 규범화를 하기보다 ‘신은 사랑’이라고 하면 우리의 자매와 형제들 사이에서 그 진리가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한다. 신이 종교보다 중요한 것처럼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 카푸토는 결국 독단적 진리체계로서의 종교를 해체하고 실천적 차원의 종교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특별히 카푸토는 신을 사랑함에 있어서의 출발점을 ‘불가능한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합리적 기대나 예측이 가능한 미래의 현재화가 아닌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이르는 것과 같은 절대적 미래와 관련된다. 즉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서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영역, 신만이 알고 계시는 영역이다. 그래서 절대적 미래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바로 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종교로 들어서는 길이며 삶에 소금을 제공해 주는 조건이다. 즉 절대적 미래를 상상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실천적 종교의 차원으로 들어가 소금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18.05.22| 4페이지| 1,000원| 조회(120)
    미리보기
  • 플랫랜드
    『플랫랜드』차원적 사고를 통하여 차원의 감옥에서 해방되기1. 내용요약3차원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우리의 세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과연 우리의 세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또한 그 언어는 더 높은 차원의 세상을 상상하는데 과연 효율적일까? 본서 『플랫랜드』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플랫랜드』는 에드윈 A. 에보트가 1884년 출간한 소설로 차원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설은 2차원의 평면세상을 무대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이 평면세상을 살아가는 정사각형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정사각형이 살아가는 플랫랜드의 묘사와 그 나라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부는 정사각형이 1차원의 세상인 라인랜드, 3차원의 세상인 스페이스랜드, 무차원의 세상인 포인트랜드를 순차적으로 여행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주인공인 정사각형의 1인칭 시점에서 기술하고 있다.앞에서 말했다시피 소설의 내용은 먼저, 정사각형이 살고 있는 플랫랜드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플랫랜드는 평면의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인공처럼 정사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플랫랜드의 사회계급에 따라서 삼각형, 오각형, 다각형 등의 기하하적 도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회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각을 가지는 다각형의 형태냐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장 낮은 계급인 여자는 선으로, 최고 계급인 성직자는 원의 모양을 띠고 있다. 문제는 플랫랜드가 평면의 세상인 이유로 이런 다양한 기하학적 모양을 지닌 서로를 그저 직선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의 모양을 추론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소리를 통한 방식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하층민은 느낌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상층계급일 경우에는 시각인식법을 통해 상대의 모양을 추론한다.책의 전반부는 이러한 소리, 느낌, 시각인식법으로 상대를 추론하는 세상에서 색채인식법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즉 직선에게 호응 얻은 반면 상층계급인 동그라미에게는 위협요소가 되었다. 서로가 직선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색채는 자신의 형태를 속일 수 있는 유용한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색채인식법을 자신의 특권계급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던 동그라미는 대학살을 통하여 혁명을 진압하였고, 결국 색채인식법을 폐기하기에 이르른다.이러한 색채인식법 혁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플랫랜드에서는 다각형에서 간능한한 원에 가까운 형태가 되는 것이 계급 상승의 비결이다. 그래서 가급적 다각형 자손을 낳는 것이 플랫랜드의 최고의 가치이다. 성직자 계급인 동그라미는 ‘네 형태에 관심을 가져라!’는 교리를 통해 이러한 플랫랜드의 사회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특권계급을 유지하는 세상임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플랫랜드의 이야기에 이어서 책의 후반부는 주인공인 정사각형이 1999년의 마지막날에 1차원의 세상인 라인랜드에 이어서 3차원의 세상인 스페이스랜드를 여행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정사각형이 여행한 라인랜드는 플랫랜드와는 달리 기하학적 도형의 형태가 아니라 점과 선으로만 이루어진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플랫랜드와는 달리 사방(四方)이 없고 오직 직선이 세상의 전부인 관계로 시각은 상대를 인식하기에 유용하지 않은 방법이다. 느낌 역시 유용하지 않다. 라인랜드는 이동 자체가 불가능하며 그러한 개념 조차 없다. 오직 소리를 통해 서로를 인식할 수 있으며 소리를 통해 서로가 만나는 세상이다. 점이냐 선이냐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 지지만 그러한 서로의 형태를 인식하는 것도 시각이 아니라 소리이다. 가장 하층계급인 여성은 점인 관계로 하나의 소리만을, 직선의 모양을 띠고 있는 남성은 두 가지의 소리를 낸다. 이러한 라인랜드에서 정사각형은 올바로 인식될 수 없다. 플랫랜드의 느낌, 시각인식법이 존재하지 않는 리인랜드에서 하나의 소리만을 가진 정사각형은 그저 여자와 유사한 이방인일 뿐이다. 이러한 라인랜드를 통치하는 왕에게 정사각형은 플랫랜드의 2차원적 본질을 설명페이스랜드로부터 온 이방인인 구(球)를 만나게 된다. 라인랜드의 왕이 주인공인 정사각형의 형태를 인식하는 것도 실패하고 플랫랜드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도 실패한 것처럼, 정사각형도 이 낯선 이방인인 구(球)를 이해하는 것에 실패한다. 2차원의 평면 세상을 살아가는 정사각형이 느낌, 시각인식법을 최대한 동원하여도 구(球)는 동그라미로 이해될 뿐이다. 더욱이 구(球)가 설명해주는 3차원 세상의 ‘입체’라는 개념, 북쪽이 아니라 ‘위쪽’이라는 개념은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일 뿐이다. 결국 구(球)의 도움으로 정사각형은 플랫랜드에서 들여올려져 3차원의 스페이스랜드의 세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비로소 그곳에서야 정사각형은 느낌, 시각인식법으로 부분적 추론만 할 수 있었던 플랫랜드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3차원의 세상에서 플랫랜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2차원의 세상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스페이스랜드의 본질을 경험한 정사각형은 3차원 이상의 세상을 추론하기에 이르르지만 라인랜드의 왕이 그랬던 것처럼, 한때 정사각형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구(球) 역시 그러한 다차원의 세상을 상상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3차원의 비밀과 지혜를 알게 된 정사각형은 플랫랜드에서 그 3차원의 복음을 전파하려 조심스러운 노력을 기울이지만 2차원의 개념과 언어가 전부인 세상에서 정사각형의 노력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결국 정사각형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의 형벌을 받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2. 차원의 감옥과 차원적 사고이상의 소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먼저, 우리의 인식은 과연 우리의 세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유용한가이다. 플랫랜드에서 시각인식법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 방법 조차 2차원의 세상을 완벽히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주인공인 정사각형은 스페이스랜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플랜랜드에서의 감각도, 관념도, 언어도 모두 2차원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추론에 의해 세상의 진우리의 감각도, 관념도, 언어도 모두 3차원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플랫랜드의 시각인식법처럼 수많은 과학적 이론과 설명은 물론이요, 세상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철학적인 시도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언어도 차원의 한계에 갇혀있다.본 소설은 19세기 후반인 서구 사회 모더니즘의 한 복판에서 탄생하였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결국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 확신한 당시 사회에 소설 플랫랜드는 그야말로 서구 모더니즘의 고발처럼 여겨진다. 인식의 주체들이라 여겨지는 인간은 모든 것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3차원에 갇혀있는 제한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런 인간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와 질서, 이상이라는 것들은 플랫랜드 사람들이 다각형과 원을 추구하는 것을 제일 가치로 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스페이스랜드를 경험한 정사각형에게 플랫랜드의 그러한 모습은 진실과 동떨어진 무의미하고 허무한 일들일 뿐이다.비단 이러한 비판은 19세기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정보, 쉼 없이 발전하는 과학과 여러 학문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추구하는 더 나은 가치라던지 이상은 다 착각일 뿐이지 않을까? 이 흥미로운 소설을 읽으며 한편에서는 회의감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어찌 생각해보면 나 자신이 3차원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3차원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세상을 분투하며 열심히 살아가며 무언가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은 3차원의 감옥에 갇힌 죄수요,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하여도 3차원의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소꿉놀이에 다름은 아니지 않을까?그러고 보니 실제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들은 2차원의 평면에서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축구나 농구 경기 역시 2차원의 평면에서의 활동이요 여행을 하고 직장과 학교를 다니고, 산책을 하는 등 우리의 삶은 지표면이라는 평면, 즉 2차원에서 일어난다. 주변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약도나, 지도 들도 3차원의 지구를 2차원에 그려내고, 우리는 그 2차원을 보며 3차원의 지구를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 우리의 인식은 3차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2차원의 평면을 보며 3차원을 추론할 뿐이다. 3차원적 존재인 듯 하지만 2차원에 갇힌 존재. 그 절망이 우리의 실존임을 생각해 본다.두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차원적 사고의 필요이다. 정사각형이 플랫랜드의 허구성을 파악하고 그 세상의 진실을 목격하는 것은 스페이스랜드라는 3차원의 경험으로 부터이다. 스페이스랜드를 경험하고 스페이스랜드의 개념을 배우고 스페이스랜드의 언어를 배우면서 정사각형은 2차원의 플랫랜드를 설명하고 해석할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러한 차원을 뛰어넘는 경험과 배움은 정사각형으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인식은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역시 근본적으로 뒤짚어 버렸다. 더 나아가 같은 플랫랜드를 살아도 그 삶의 목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2차원을 살아도 2차원이 아닌 삶이 펼쳐진 것이다.앞서 3차원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존재가 우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우리의 세상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차원을 뛰어넘고 상승하는 경험 내지 사고이다. 이렇게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혹은 그 역방향으로 사고를 이동하는 것을 가리켜서 차원적 사고(dimensional thinking)라고 한다. 3차원의 무언가를 2차원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4차원을 3차원 혹은 2차원으로 개념화 해보는 작업이다. 그럼 우선 3차원을 뛰어넘는 4차원을 어떻게 경험할까? 문제는 라인랜드 왕이 2차원을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구(球)가 4차원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듯이 우리는 4차원이 어떠한 세상인지 3차원적 사고방식과 언어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도 설명해 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3D프린트나 3D영화 같은 3D기술은 기존에 2차원 평면으로 표현하고 인식하였던 대상을 3차원으로 구현하는 차원적 사고의 한다.
    독후감/창작| 2018.05.22| 5페이지| 1,000원| 조회(314)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3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08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