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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교육사철학 개화기 교육 근대교육에 미친영향 기독교교육
    개화기 교육개념한국사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전통적인 유교사회를 근대적 사회체제로 혁신하여 근대국가로의 발전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변혁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개화기 개향기 애국계몽기 라고 지칭하고 있다.이런점에서 한국 개화기는 유교사회의 전통체제에서 탈피하여 서구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개화의 열망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열강이 한국을 대상으로 이권쟁탈을 가속화 시킨 한민족의 시련기이며,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시장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 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근대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불만과 유교적 전통사회에 대한 비판의식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개화기 근대교육 역시 전통적인 유교교육 체제에서 벗어나 서양의 신문화,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화기의 근대교육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도모하기 위한 근대화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다.교육이란 한 사회의 공동목적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일련의 실제적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은 그 형태가 다양하게 분화된다 하여도 일정한 사회적 기반위에서 수행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교육은 인간의 활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개혁의 원천적인 힘은 민중의 교육내지는 민중의 교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때문에 진정한 사회개혁은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의 기존 의식을 바꾸게 할 때 에만 이룩할수 있다.이런 점에서 개화기 민족선각자들의 개화사상은 곧 넒은 의미의 교육사상을 내포하였을 뿐만아니라 민중교육이나 개화를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 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개화사상은 근대화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된 근대사상으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개혁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던 교육근대화 운동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특히 한국에서의 개화사상은 근대화로의 발전과정에서 보다 더 진보적인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개화사상은 일반적으로 “지혜가 열리고, 사상과 민속이 진보한다”는 의미와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개화운동은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은 물론 서양문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적극 수용하여야 한다는 근대화운동으로 간주 되어 왔다.개화사상은 근대지향적인 의식이 강한 민족지도자들이 민중을 계도하면서 문화와 문명을 한 단계 높여 보다 나은 서계로 끌어올리려는 진보적인 교육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것을 미루어보아 한국의 개화사상은 서양의 개몽주의 내지는 계몽사상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몽은 곧 물질적인 근대화의 개명이 아니라 정신적인 근대화로서의 교육이라는 뜻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교육의 기능은 사회적 문화현상에 대한 적응 능력을 길러 주는 문화전달의 기능과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능력을 배양해 주는 문화개조의 기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화사상이나 계몽사상은 모두 전근대적인 사회현상을 보다 근대적인 사회현상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려는 교육사상과도 일치한다.기독교의 교육기독교게의 교육은 조선 중기 실학자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서학을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본격적인 근대교육은 개항이후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들 선교사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민중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서양의 교육이념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중계몽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착시켜 나갔다. 따라서 교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기독교계의 근대교육운동과 서로 보완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다.즉 선교사들은 기독교 발전이 곧 교육의 발전이며, 동시에 국가의 흥왕을 좌우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대전제 하에 민중교육에 기초를 둔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완벽하고 보다 개명된 한국인을 양성한다는 교육이념을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천주교계는 성서보급운동을 통하여 문맹퇴치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배론신학교,용산신품학교,조선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을 위한 본래의 기능도 수행하였다.한편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입국한 선교사들은 알렌이 광혜원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을 설립.운영함 으로써 근대교육의 초석을 다져 놓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튼 여사는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뿌리 깊이 남아 있던 조선 유교사회에서 모든 난관을 극복하면서 여성교육을 위한 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크다.기독계의 선교활동은 복음전파에 우선하여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의료 부문에서부터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선교사들도 복음전파에 우선한 교육을 실시하여 한국인의 무지를 일깨우고, 의료활동을 통하여 육신의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곧 기독교의 구원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였다.그것은 선교사들이 정부의 포교음압정책을 둔하시키기에 보다 효과적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료활동을 통하여 민중계몽의 구체적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서구의 근대문화 특히 교육이념과 평등사상을 이 땅에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정신에 따라 선교사들은 전국각지에서 각종의 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사랑으로 복음을 전파하면서 정신적 구제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기독교 정신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관심을 불어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박영효는 종교는 개화기의 근본이라는 상소를 올려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고 권장하면서 종교 개화정책을 제창하였다.또 이능화는 선교사들의 학교설립운동에 대하여 근대교육이 전무한 한국에서 미국 교회가 근대학문을 가르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교육이 구국의 첩경이라는 점을 강조 하였었다. 기독교계의 근대교육운동은 한국의 전통적인 제도와 문화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선교저액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의 자주권이 상실되면서 민족적 위기를 맞을때 “우리의 살길은 오직 교육뿐” 이라는 의식의 확산과 함께 고조되기 시작한 교육열에 편승하여 더 많은 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은 일제가 식민지 교육정책을 수행하면서 입각한 민족동화주의를 추진하려 할 때에는 강력한 제동을 가하는 등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한 교육구국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즉 선교사들의 근대교육은 종교교육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이 처한 난국을 타개하려는 방향에서 실시되었다.
    교육학| 2007.03.12| 4페이지| 1,000원| 조회(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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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사교육 문제와 해결책.사교육 문제.해결책
    사교육 문제와 해결책우리의 지금 현재 사교육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사교육비 지출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우리가 지금 지출하는 사교육비는 일년에 20조원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 한편에, 학원과 과외비가 10조원을 넘고 있다.따지고 보면 이 금액은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학교나 공공기관과 비교해볼 때 엄청난 금액이라는 것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가 사교육문제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지금의 서울 강남지역만 해도 학교 250여 개에 학원 5천여 개가 있다. 거대한 사교육의 바다에 공교육이 섬처럼 고립되어있는 양상이다.요즘 학원의 광고만 보더라도 너무나 사교육이 당연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학부모들을 유혹하고 있기도 하다. “엄마, ㅇㅇ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전교1등 했어요!” 라든지.학원의 플랜카드나 자동차 , 광고 , 유인물을 보다보면 어디서나 쉽게 어디어디 중학교, 고등학교 전교 1등 배출학원!! 이라는 문구나 우리의 눈에 너무나 쉽게 띈다.마치 자기 학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전교 1등을 했다는 형식의 광고는 너무나 우리에게 식상해 버린 반면에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사교육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인식을 해 버렸는 지도 모른다.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 부 유 한집 아들은 개인지도에 한달에 200만원이 넘는 과외로 만원정도를 과외 비로 지출하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봐왔다.과외비만 전부가 아니라 이 지역의 가장 잘 나가는 학원과 그리고 주말에는 논술학원까지 정말로 돈도 돈이지만 학생이 라 기 보다는 아주 직장인에 가까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고한 남자아이는 부모님이 이 지역에서 두 부부가 약사 이시고 아들이 고입성적은 좋게 나왔지만 평준화이어서 좋은 고등학교에 배치 받지 못하여 일부로 서울에 1년간 전학 갔다가 다시 다른 좋은 학교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아주 놀랬다.돈으로도 학교배치도 가능하고, 그리고 사교육비 등이 지출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남긴글 중 하나인데..“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 유학을 가서도 과외를 할것이다!달나라 가도 과외 하러 강남에 갈 것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교육의 심각성은 너무나 더해져만 가는 것 같다.어쩌다가 이렇게 사교육에 얽매이는 사회가 되어버렸을까?가장 크게 생각이 되는 것은 공교육의 붕괴이다.대부분의 성적중간쯤 되는 아이들이 하는 사교육의 문제는 적은 학교 수와 그리고 반에 기본적으로 35명이 넘는 아이들을 한 반에서 같이 가르치는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아이들이 많을수록 경쟁심리가 심각해져서 욕심이 생기고 경쟁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반에서 6등정도 하는 아이가 좋은 학원과 그리고 능력 있는 과외선생님에게 족집게 식 문제를 위주로 가르키는 것 과 4등정도 하는 아이가 혼자서 독학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공부를 4등 하는 아이가 많이 하고 노력도 열심히 했을지라도 혼자만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6등 하는 아이보다 분명 성적이 내려갈 것 이라고 생각이 든다.누구든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허황 된 꿈 일뿐 결국에는 제 자리 걸음에 불과 하다.빈곤층이나 서민들은 부자아이들과는 달리 우선 교육부터가 너무나 차별적이고, 같은 노력을 해도 부자 집 아이가 너무나도 이롭 다는게 확실히 다르다.부자부모들이 그렇게 돈을 써가면서 아이의 교육에 관심을 쏟아 부으니 중산층이나 평민들의 미래는 아이이니 집안이 조금 더 어려워 지더라도 아이의 교육에 매달리는 실정이다.아이가 과외지도를 받으면서 점차 성적도 오르고 , 좋은 대학에 들어 간 뒤에 좋은 직장을 갖는 다는게 즉 자기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지금 당장 부모들이 길거리에서 장사까지 한다고 해도 아이들의 사교육비 지출은 늘어만 갈 것 이다.요즘 2008학년도 내신등급제가 실시 되면서 사교육에 대한 우리나라의 열정은 더욱더 해간다.대부분의 학부모는 아이의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우리나라 사교육비로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면서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교육학| 2007.03.12| 2페이지| 1,000원| 조회(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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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팽에 대해서
    쇼팽에 대하여폴란드 사람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20세에 파리로 가서 그로부터 고국을 영원히 떠나 살며 음악 활동을 한 프레드리크 프랑수아 쇼팽은 바르샤바 근교에서 태어났다.어려부터 피아노의 연주와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낸 쇼팽은 1931년 파리에 간 후 다소 여행을 한 것 외에는 일생 동안 파리를 사랑하며 파리에 살다가 39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쇼팽은 아주 연약한 체질이었으며, 오랫동안 폐질환을 앓았는데, 이 병이 그를 단명하게 했다. 쇼팽만큼 조국을 사랑한 예술가는 드물다. 가족의 음악을 상품으로 한 음악가는 많지만 쇼팽만큼 고국을 염려한 사람은 많지 않으며, 그만큼 정열을 쏟아 고국의 음악을 계속 작곡한 사람도 없다. 그의 강한 애국심은 어느 정도는 당시 폴란드의 젊은 세대의 풍조에서 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가 고국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전날, 친구들은 이별의 표지로서 커다란 술잔을 주었는데, 그 속에는 흙이 들어 있었다. 고국 폴란드를 잊지 말아 달라는 그야말로 시적인 선물이었다. 쇼팽은 이것을 일생동안 곁에 놓아 두고 살았는데, 그가 죽은 뒤에 친구들이 묘 속에 뿌려주었다. 쇼팽의 묘는 지금 파리에 있지만 폴란드의 흙 속에 잠들어 있다고 하는 말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유언에 의하여 심장은 고국으로 옮겨져서 바르샤바의 교회에 바쳤다. 쇼팽의 만년은 고독하기는 했으나, 친척과 고국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포트카 백작부인은 쇼팽의 소망에 따라 폴란드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쇼팽이 들은 최후의 음악이었다.그는 심장을 고국폴란드에 바쳐달라고 유언했고, 희미한 목소리로 “가엾은 어머니!”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쇼팽의 사랑에 있어서는 쇼팽은 고국 폴란드를 떠나기 반년 전부터 매일 밤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이상의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쇼팽은 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쇼팽은 빈으로 가서도 이 여인을 잊을 수 없어 안부를 묻는 편지를 했으나, 그것도 친구를 통해서 간접으로 보내었다. 그것은, 만일에 그 편지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 여인에게 폐를 끼치게 될 까봐 염려해서였다. 이것으로 보아도 쇼팽의 세심한 성격을 알 수 있었다.두 번째로 쇼팽의 마음을 끌어당긴 여인은 마리아 보진스카이다. 쇼팽은 마리아를 바르샤바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으나, 사랑을 느낀 것은 1835년 드레스덴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였다. 이듬해의 여름에는 온천장 마리엔 바트에서 부모와 함께 마리아를 만났으며, 두 사람은 약혼을 할 만큼 관계가 깊어졌다. 그러나 이 사랑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리아의 아버지가 두 사람 사이를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었는데 다가, 쇼팽은 파리에서 작곡과 제자를 가르치는 일로 가지 혼자만의 생활은 충분했으나, 유복하게 자란 아가씨를 책임 질만한 능력은 없었기 때문 인듯 하다.그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아름답기는 했으나 냉정한 여성 이었다. 쇼팽이 그녀를 사랑한 만큼 그녀의 쇼팽에 대한 마음은 뜨겁지 않았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를 모아 한 다발로 묶고 그 위에 “나의 비애”라고 썼다. 이것은 쇼팽이 죽은 후에 유품속 에서 발견되었다. 마리아는 1837년에 어떤 귀족과 결혼했으나, 원만치 못해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파리생활을 할 때의 쇼팽에게 잊을 수 없는 애인은 조르주 상드이다. 상드는 원래 어느 남작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있었다. 그리고 작가인 그녀는 조르주 라는 남자이름을 쓰며 120편이나 되는 문학작품을 남긴, 파리 문단과 사교체의 이채로운 존재였다. 쇼팽이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마리아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를 싫어했으나, 그녀의 정열에 이끌려 점점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1833년과 이듬해에 걸친 겨울을 마조르카 섬에서 함께 지냈으며, 나중에는 파리의 누앙에 있는 조르주 상드의 별장에서 동거생활을 계속했다. 그 후에도 1846년까지는 거의 매년 함께 누앙을 찾곤 했으나 결국은 틈이 벌어져 1847년 무렵부터는 서로 증오하게까지 되었다. 개성이 강한 두 예술가가 완전히 융합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쇼팽이 누앙에서 작곡한 많은 걸 작품은 조르주 상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쇼팽의 음악은 피아노를 위한 작품1은 쇼팽이 15세때인1825년에 작곡했고,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이때부터 23년 남짓한 생애 동안에 작곡한 곡은 거의가 피아노 작품에 한정되어 있다. 일생 동안 피아노 작품 작곡에만 열중한 작곡가는 역사상 쇼팽밖에 없다. 그 이유는, 피아노가 쇼팽의 영혼을 말해 주는 데 가장 알맞은 악기였을 뿐 아니라, 쇼팽은 자기 능력을 속속들이 잘 알아 절대적으로 자신 있는 피아노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르샤바 시절의 2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파리 시절의 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고전 형식에 의한 오소독스한 대표작이지만, 쇼팽의 진가는 오히려 독창적인 그 밖의 소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폴란드의 향토색을 강하게 반영하고, 게다가 그것을 고도로 예술화한 춤곡 등에서 그것이 인정된다. 예컨대 폴로네즈.마주르카는 춤곡인데, 이 춤곡을 춤으로부터 분리시켜 연주회용으로 끌어낸 것이 쇼팽이다.50곡이 넘는 마주르카에서 보는 k와 같이 정서적이며 미묘한 감정을 가진 이 작품들은 진정 폴란드의 방언으로 엮은 주옥편이 아닐 수 없다. 쇼팽의 작품이 영혼이 깃든 예술이 되느냐, 아니면 단순히 연습곡에 그치느냐의 관건이 되는 것은 템포루바토의 사용여부이다. 다시 말하면, 템포루바토가 능숙하고 능숙하지 않고에 따라 쇼팽의 곡을 잘 연주하는가 못하는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마주르카의 연주에서는 투바토가 생명이다. 평소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 1번을 치면서 음이 참 좋다고 생각해 왔었고 쇼팽만의 피아노 독주곡의 희소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곡이 20세때의 작품이라고 하니 청년기의 순수함과 정열이 느껴지고 있는 작품 중 몇 안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다. 나머지의 대부분의 작품은 정신성이나 기법적 으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쇼팽의 음악이 아닌 쇼팽의 일생과 사랑에 대해 알게 되니 앞으로 쇼팽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가 생전에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살았고 그 감정을 얼마만큼 살렸는지
    예체능| 2007.03.12| 2페이지| 1,500원| 조회(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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