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를 읽고 나서영원히 시들지 않는 푸른 잎사귀 하나. 오 헨리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이다.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으로 교과서에도 실려 낯익은 외국작가. 잔잔함과 아련한 감정의 파도를 이끌어 내는 그의 이야기들을 나는 좋아한다. 꺼져가던 소녀의 생명에 온기를 불어넣었던 푸른 잎사귀, 그리고 소녀를 위한 마음을 남기고 사라져간 고귀한 인간사랑 정신의 화가 노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결코 슬퍼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소녀가 생명의 의지를 회복하고, 노인은 무시를 받았던 그림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 헨리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20년 후라는 이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감출 수가 없었다.‘20년 후’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편소설이니만큼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처음에는 황당함을 느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정말 단순한 이야기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순찰 경관친구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는게 더 옳을 것 같다.종종 음식점에 가면 벽에 낙서를 하도록 허용되는 음식점이 있다. 그리고 산이나 공원의 나무나 돌에도 낙서들이 즐비하다. 심지어는 해외에 가서도 낙서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씩은 꼭 들어가는 것이 ‘누구, 누구 여기에 오다. 몇 년 후에 꼭 여기서 다시 만나자’ 라는 형식의 낙서이다. 종종 흘려 보면서도 드는 생각은 ‘과연 저 약속은 지켜졌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이 ‘20년 후’라는 소설도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무척 친했던 두 남자아이가 20년 전 약속을 하나 한다는 이야기. ‘20년 후에 여기에서 만나자’라는 약속. 그리고 그 날 만나는 두 사람은 지명수배자와 경찰이라는 줄거리이다. 약속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약속을 20년이나 기억하며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게 누군가 내 주위사람의 생일이거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니고, 당시 핸드폰이나 전화도 잘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면 말이다. 그리고 보브는 약속을 지켰다.보브는 지명수배자가 되어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친구를 만나러 20년을 기다려 그의 친구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꼭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그런데 보브가 기다렸던 그의 친구 지미는 보브가 지명수배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자신이 지미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순찰을 갔다. 그리고 그 뒤에 짧은 편지와 함께 지미의 위치를 다른 경찰에게 알려 잡도록 하였다.경찰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며, 치안유지라는 본분의 역할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객관적으로 지미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미를 이해하기 싫었다. 보브는 도둑으로서 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20년 전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미는 그 시간에 순찰을 돌면서 약속 장소를 향했던 것일까. 투철한 직업정신이 그의 우정에 앞섰던 것일까. 이런면에서 서양의 개인주의 정신이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우리 나라의 이야기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다. 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 중에 돈을 흥청망청 쓰는 아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는지 실험해 보는 이야기로 ‘실수로 살인범이 됐으니 날 숨겨달라’고 했을때 아들의 친구는 모두 그 아들을 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실수로 살인범이 됐으니 날 숨겨달라’고 친구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버지의 친구는 그를 기꺼이 숨겨주었다는 이야기다. 진정한 우정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리나라는 가르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상국이 쓴 현대 소설 중 ‘동행’이란 이야기도 ‘20년 후’라는 소설과 유사한 테마를 가지고 있다. 살인범과 경찰이 우연히 동행이 되어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결국 경찰은 살인범을 잡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담배 한 개피를 줄 뿐이다. 살인범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가 자신이 잡으려는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가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었으며, 그리고 그 살인범이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엄연히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여기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낀다. 경제가 힘들어지고 산업사회와 정보화사회가 급속하게 진행되며, 외국 문물이 자꾸 유입되어 혼란을 일으킨다 하여도 우리나라는 아직 ‘정의 문화’이기 때문이다.누가 옳고 나쁘다는 말은 상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의 정서에서 20년 후라는 소설 이야기가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오지 않는 건 문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20년동안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친구라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어야 했다고 본다. 그가 살아온 여정을 듣고 이해하려고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의 친구가 선택하여 걸어온 삶이 그렇다면, 그의 죄목을 가볍게 하기위해 자수라도 권하는 것이 친구의 도리가 아니었을까.우정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주제만큼이나 무거운 이야기다. 그리고 사람의 수만큼 우정이라는 정의도 다를 것이라고 본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다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정이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다.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며, 누군가 죽어 있다 해도 발견되는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이다. 무관심으로 점철되어 나눔의 미학을 잃어가고 있으며, 가지고 있던 온정이 소외와 배제로 물들어 가고 있다.
목 차1. 생태계란?2. 물질의 순환3. 에너지의 흐름생물의 형태와 그들 서식처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태계와 그것들의 구성요소는 상호작용에 적용되는 다수의 본질적 개념과 과정이 있다. 어떤 생태계는 정의된 자신의 경계를 가지고 있는 상호 의존하는 구성요소들의 집합체이다. 각각의 생태계의 성공적인 기능 수행을 위해서 두 가지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 있다. 에너지의 흐름 및 물질의 순환이 바로 그것이다.에너지는 각 영양단계를 통해서 변환되는 동안에 열로써 점점 분산되므로 생태계를 통하는 에너지흐름은 본질적으로 일방적 과정이다. 그러나 생명에 필요한 물질은 다양한 환경적 속박과 시간의 경과를 겪으면서 재순환되어 새로운 영양단계로 편입됨으로써 소실되지 않는다.1. 생태계란?생물이 살고 있는 모든 공간을 `생물권`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 생물권에는 알려지지 않은 종(種)까지 포함하면 약 300만 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많은 종의 생물들이 기후나 토양, 태양에너지 등의 주위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역동성을 가지고 진화해 가는 것을 `생태계`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생태계의 파괴'라고 말하는 것은 외부원인에 의해 기존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간에 형성하고 있던 조절기증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생태계는 어느 한 지역(강, 산, 바다 등)의 작은 생태계부터 지구 전체의 생태계까지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 생태계 내에서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물의 종류가 달라 지기도 하고 또 그 양(量)이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생태계는 물?공기?에너지 등이 서로 관련된 물질과 순환하는 것처럼 생물군 내에서도 서로 먹고 먹히는 순환이 일어난다. 생물 중에서 식물은 동물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를 만들어주고 동물들이 호흡할 때 내뿜는 탄산가스를 흡수한다. 녹색식물은 태양으로부터 빛 에너지를 이용하고, 공기로부터는 탄산가스를 그리고 토양으로부터는 물을 흡수하여 동물들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물질을 만들어 낸다. 이 녹색식물을 초식동물들이 먹고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게 먹혀 영양물질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동물의 배설물이나 사체는 부패균이나 미생물(곰팡이)에 의해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물질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벼를 해치는 메뚜기는 개구리의 먹이가 되지만 개구리는 다시 뱀에게 잡아먹힌다. 그리고 뱀은 다시 독수리나 매에게 먹힌다. 이렇듯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를 `먹이사슬` 이라고 한다. 이러한 먹이사슬은 녹색식물에서 출발하여 커다란 육식동물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구분이 되어 있으며 여러 종류의 생물이 다른 여러 종류의 생물에게 먹히면서 그 양(量)에 있어서는 먹는 쪽이 먹히는 쪽보다 줄어들어 피라미드형 구조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생태계에서 주변환경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열대림은 적도지방의 따뜻하고 습한 기후에서만 잘 자라며 툰드라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은 극지방의 추운 기후에서만 잘 자란다. 선인장도 사막에서 더 잘 자란다. 이와 같이 주변환경에 따라 수많은 종의 생물은 특징적으로 분포하며 적정한 수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을 생태계의 질서, 즉 자연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2. 물질의 순환① 물의 순환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의 상태를 크게 셋으로 나누면 대기 중의 물로서 수증기와 이것이 응축한 구름?안개?비?눈, 지표수 로서 하천?호소?해수?지하수로서 흡착수?모관수?지하수로 나눌 수 있으나 이들 상태는 모두 안정된 것이 못되며, 대기 중의 수증기는 냉각되면 과포화상태로 되어 구름이 되고, 비?눈?싸락눈?우박?진눈깨비 등이 되어 지표에 내린다. 비? 눈 등 지표에 내리는 물을 총칭하여 강수(precipitation)라 하며 이 중에서 비?눈을 각각 강우?강설이라 한다.강수와 강우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일이 많은 이유는 강수의 대부분이 강우의 형태로 지상에 내리기 때문이다. 강수의 일부는 지표수가 되어 하천을 통하여, 호소, 바다에 흘러 들어 간다. 다른 일부의 강수는 지중에 침투하여 포기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토립자의 흡착수로 되고 또 더 깊은 대수층까지 내려가서 지하수로 된다.지표수의 표면으로부터는 끊임 없이 물이 증발하고 있으며, 또 지중에 침투한 물도 식물을 통하여 혹은 흙의 모세관작용에 의하여 지표에 올라와 증발하 여 다시 대기중의 수증기로 환원한다.② 탄소순환탄소는 홑원소물질[單體]로서, 또는 탄산염 ?이산화탄소, 그리고 단백질 ?탄수화물 ?지질 등의 유기물, 그 밖의 여러 화합물로서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이러한 탄소화합물은 공업이나 생물의 작용 등으로 그 형태가 변화되어 순환하고 있다. 이것을 탄소순환이라고 한다. 공기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약 0.03%(부피)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값은 증가와 감소가 평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독립영양(獨立營養) 생물인 녹색식물이나 일부 세균 등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탄소동화작용에 의해서 유기물을 합성한다. 합성된 각종 유기물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외에 생물체의 활동에너지원이 되거나, 대사의 중간체가 된다.종속영양 생물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동화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유기물을 독립영양 생물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합성된 유기물 가운데 에너지원으로 쓰인 것은 생물체 내에서 대사되어 TCA회로를 거쳐 산화된 후 다시 이산화탄소가 되어 몸 밖으로 방출된다. 또 생물체를 구성하는 유기물은 생물이 죽은 후, 세균 등의 양분이 되어 호흡에 의해서 다시 이산화탄소로 방출된다. 생물에 의한 이산화탄소의 동화량과 동식물의 호흡에 의해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연료 등의 연소에 의해서 발생 ?방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합한 값은 거의 일치한다. 이것을 탄소평형이라고 한다.③ 질소의 순환생태계에서 질소는 대기 중의 유리질소를 비롯하여, 질산이나 암모니아 등의 구조가 간단한 화합물로부터 요소 ?단백질 ?핵산 등 구조가 복잡한 것까지 수많은 물질에 함유되어 있으나, 이들 물질이 서로 관련을 가지고 변천하여 결과적으로는 질소 자체가 순환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생태계의 질소는 우선 생물체가 행하는 물질대사, 즉 질소대사에 의해서 생물계와 비생물계와의 사이를 순환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질소고정이다. 대기 중의 유리질소는 질소고정에 의해서 토양에 들어가 생물체에 이용되고, 여러 가지 모양을 취하면서 순환한다.이 질소고정에는 생물적 질소고정과 비생물적질소고정이 있어, 후자에는 번개의 공중방전이나 공중 질소고정 등이 있다. 생물적 질소고정은 질소고정 세균을 비롯하여 일부의 조류, 뿌리혹박테리아 등에 의해서 행하여져 대기 중의 유리질소를 환원시켜 암모니아를 만들고, 글루탐산 수소이탈효소의 작용으로 이것을 α-케토글루타르산과 반응시켜 글루탐산을 만든다. 아미노기 전이반응에 의해서 다른 아미노산을 합성하고, 최종적으로는 단백질을 합성한다. 또, 생물이 죽으면 부패세균에 의해서 시체가 분해되어, 아미노산은 탈아미노반응을 받아 암모니아가 된다. 이런 암모니아가 풍부한 토양일수록 비옥하다.또한, 질소고정세균인 니트로소모나스는 암모니아를 아질산으로 산화시키고, 다시 니트로박터는 이 아질산을 질산으로 산화시킨다. 또, 고등식물은 대기 중의 질소를 고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생체성분의 질소원을 토양 중의 질산이온에 의존하고 있다. 뿌리로부터 질산이온을 흡수하여, 식물체 내의 효소군에 의해서 질산동화가 행하여지고, 만들어진 암모니아를 출발점으로 하여, 앞에서 말한 질소고정세균 등과 같은 과정을 거쳐 단백질을 합성한다. 이것에 반하여 동물에서는 무기질소 화합물을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식물이 합성한 유기질소화합물을 이용하여 고유의 단백질을 합성한다. 대장균이나 고초균(枯草菌)은 호흡의 전자(電子) 받개로서 산소 대신에 질산을 사용하여 암모니아까지 환원한다. 이것을 질산호흡이라고 한다. 탈질소균도 질산호흡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아질산을 유리질소까지 환원하여 대기중에 방출한다.④ 인의 순환인은 동물이 태양에너지를 식물로부터 조금씩 흡수하여 생명현상을 이루는데 필요한ATP라는 물질의 주요 성분이며, 핵산 및 세포막 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든생물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성분이다. 사람은 인을 음식물에 섭취하지만, 식물은 이를 물이나 흙에서 섭취한다. 인은 순환 속도도 빠르고 또 토양이나 암석중에 비교적 많은데도 불구하고 인산은 많은 생물의 성장에서 제한인자로 중요하다. 지각에서 대부분의 인산원은 불용성 칼슘염, 철염 또는 알루미늄으로 존재한다. 인은 비료로 이용되는 외에도 합성세제에 보조제로 첨가되어 많은양이 사용되고 있다. 근래에는 세계 중의 인이 배수되어 플랑크톤의 급증으로 수중의 산소가 결핍되는 부영양화 현상을 초래하여 문제가 되고 있으며, 90년부터 인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⑤ 황의 순환질소와 인과는 달리 황은 비록 많은 양이 암석과 광물속에 들어있더라도 생물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제한요소이다. 혐기성 미생물분해자에 의한 유기물의 분해는 썩은 달걀 냄새가 나는 유독한 가스인 황화수소를 방출한다. 화산활동은 황화수소의 중요한 자연원천이며 이산화황을 생산한다. 그러나 많은 양의 황 방출은 화석연료의 연소와 황화물금속의 제련 등과 같은 인간활동으로부터 나온다.
청산리 방법과 대안의 사업체계1.청산리 방법1)배경북한은 1954년 4월부터 시작한 농업과 개인상공업의 협동화를 58년 8월 마무리함으로써 모든 경제를 국가의 통일적인 지도아래 계획적으로 관리운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기초건설을 목표로 출발한 5개년계획(57∼60)이 원만히 수행됨으로써 생산규모가 커지고 생산력발전에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반면 일선 기관·기업소의 간부들은 사무실에 안주하며 관료주의화하고 있었으며, 협동조합을 비롯한 생산단위는 방만한 관리와 계획성 없는 운영으로 비능률을 초래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청산리정신·청산리방법을 주창하게 된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2)유래청산리 방법은 북한에서 실시되고 있는 농업관리방법에서 시작된 것으로, 1960년 2월 김일성이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면 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고, 경제활동에서 종래 실시되어 오던 당 및 국가 기타 경제 각 기관들의 지도체계와 활동방법을 개선하여 새로운 사회주의적 경제관리제도를 창조하고 이를 청산리 방법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3)내용청산리 방법은 대중을 지도하는 방법의 기본으로 다음의 여섯가지 사항을 들고 있다.첫째, 상부기관이 하부기관을 도와주고 상급자가 하급자를 도와서 서로 합심하여 조선로동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해 나간다.둘째, 간부는 늘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깊이 알아보고 문제해결의 옳은 방도를 세워야한다.셋째,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우고 대중의 자각적 열성과 창발성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도록 한다.넷째, 지도의 통일성과 구체성을 제대로 보장하여 사업을 추동·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일반적 지도와 개별적 지도를 옳게 결합한다.다섯째,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가려서 하고, 중심고리에 역량을 집중하여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간다.여섯째, 모든 사업을 계획화하여 힘있게 밀고 나간다.4)개요??천리마운동은 대중의 자발성과 열의를 이끌어냈고, 그에 힘입어 제1차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지만, 대중의 열의와 창발성을 더 대화하고 당 간부들의 사업을 검토해 당 사업에 나타나고 있는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방안을 제시했다.??이런 현지 지도 과정에서 윗사람이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 아랫사람을 도와주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청산리 정신, 청산리 방법이 출현했다. 김일성은 청산리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청산리 방법의 기본은 윗기관이 아래기관을 도와주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도와주며 늘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깊이 알아보고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도를 세우며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우고 대중의 자각적인 열성과 창발성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방법은 목전의 혁명과업을 성과적으로, 깊이 있게 수행할 수 있는 힘있는 사업방법일 뿐 아니라 일꾼들의 사상정치수준과 실무수준을 높이며 군중을 혁명화하는 힘있는 교양방법입니다.”????김일성은 청산리 협동농장과 강서군 당을 지도하면서 먼저 당 사업, 협동농장관리운영사업, 농민들의 생활형편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현지에서 당원들과 농민들, 그리고 군의 간부들과 여러 차례 대담했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자 세포총회, 군당 일꾼들의 협의회, 군당 위원회 초급 당총회, 군당 위원회 전원회의 등에 대해 준비에서부터 진행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하나하나 지도했다.?????이렇게 해서 김일성의 현지 지도를 통한 모범, 즉 "지도간부가 아래에 깊숙이 들어가 모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지도를 행하는" 청산리 정신, 청산리 방법이 탄생했던 것이다.??이후 청산리 방법과 청산리 정신은 북한의 모든 분야에서 당과 국가가 구현해야 할 사업 방법으로 자리잡았다.5)참고자료○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첫째날 주석은 예고 없이 조합원들의 집을 일일이 가정방문하여 집안 형편과 애로사항을 살폈다. 그것은 리당위원회와 조합관리위원회의 전반사업이 구체적으로는 조합원들의 생활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성과와 결함이며 문제점들을 사업 범위도 넓어지고 복잡해진 농촌의 새로운 조건에 리 일꾼들의 수준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서 한 급 높은 기관인 군의 일꾼들이 리를 책임지고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체계가 서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도와줄 때에도 우선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직접 현지에 내려가서 실정을 알아보고 계획도 세워주며 걸린 문제들을 풀어주어야 하는데도 군 일꾼들은 개인농경리를 지도하던 낡은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현실에 맞지 않는 명령과 지시가 당 정책의 관철을 저해하고 있었다.??따라서 주석은 리의 초급간부들과 함께 리당총회의 준비방향을 세웠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나서 총회를 소집할 것과 경제, 위생, 문화, 교육, 사상 교양 등 모든 분야의 사업에 관한 안건들이 제기되어야 하며 리당위원회가 어떻게 '투쟁'하며 군당위원회와 군인민위원회가 어떻게 지도했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도방법은 종전의 군당 간부들의 방법과는 달리 밑에서부터 시작하는 식이었다.??1) 조합원들의 가정방문을 통하여 가장 절실한 문제와 세세한 결함들을 파악한다.??2) 리의 초급간부와 핵심당원들과의 개인적인 담화와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동네의 실 정과 리당위원회 사업의 잘못된 점을 포착하고 대책을 세운다.3) 리당총회에 내놓을 안건들을 당원들에게 정확히 '침투'시켜, 모든 당원들이 당위원회 사업에서의 결함은 무엇이고 그를 시정하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가를 잘 알도록 사상동 원을 충분히 해놓은 조건에서 리당총회를 소집하도록 한다. ……??이러한 방법은 이른바 관료주의, 주관주의, 형식주의 등의 낡은 사상, 방법, 체계를 종식시키고 참신한 혁명적 사업체계, 생기발랄한 혁명적 사업방법, 사업기풍을 가져오게 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것은 대중의 창발성과 열성을 통하여 대중 자신이 사업을 끌고가도록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며 이는 일반적 지도와 구체적인 지도를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당의 사업은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사업'이란 점겠습니다. 모든 일군들이 높은 혁명성을 가지고 전투적으로 일하며 온 사회에 영웅적으로 살며 투쟁하는 혁명적기풍이 차넘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후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제 1 장 정 치제13조 국가는 군중로선을 구현하며 모든 사업에서 위가 아래를 도와주고 대중속에 들어가 문제해결의 방도를 찾으며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워 대중의 자각적열성을 불러일으키는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을 관철한다.2.대안의 사업체계1)유래북한은 공업관리에 있어서 처음에는 「지배인 유일관리제」를 채택하여 지배인이 관리, 운용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처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일관리제는 관료주의와 기관본위주의와 같은 개인의 독단과 주관이 개입될 수 있으며 기업관리에 하부직원의 참여가 곤란하다는 결함이 지적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961년 김일성은 생산실적이 부진한 대안전기공장을 직접 방문하고, 생산계획이 부진한 원인은 당의 지도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공장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공장 당위원회의 집단적 지도체계 확립 및 계획·생산·기술을 통일적 종합적으로 지도하는 생산지도체계 및 기타 후방공급체계의 개선을 지시하였는데 이를 대안의 사업체계라 하였다.2)내용첫째, 사업장 안에 조직되어 있는 조선로동당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를 보장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지배인 유일관리제 하에서는 생산에 대한 행정기술적 지도만 있고, 당적·정치적 지도체계가 없었다고 자기비판을 하면서, 최상위에 공장당위원회가 있고. 그 밑에 공장당 집행위원회가 있으며, 그 아래 지배인과 공장당위원장이 위치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경제관리 운용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강화하고 생산력 증대를 위해 물질적 자극보다 정치도덕적 자극을 앞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둘째, 생산을 지도하는 사람이 계획을 생산자들과 토론하여 직접 세우며 작성된 계획은 생산자 대중 자신의 것으로 되게 한다.셋째, 기사장을 참모장으로 하는 공장 참모부를 조직하여 계획화사업, 기술준비사업을 비롯하군중의 의사를 중요시하는 혁명적 군중노선과, 경제관리에서 당의 집체적 지도를 중요시하는 당의 영도를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북한의 공장관리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대안의 사업체계'를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김일성은 1961년 12월 6∼12월 16일까지 열흘간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대안전기공장(후에 대안중기공장으로 개칭)을 방문하고 현지 지도를 통해 기업소의 관리체계를 구체화시켰는데, 이것이 '대안의 사업체계'이다.??김일성이 대안전기공장을 현지 방문한 후 북한의 공장관리체계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김일성의 현지 지도 이전까지 대안전기공장은 공장지배인을 중심으로 한 단독책임관리제였다. 이 체제 아래서 공장지배인은 생산을 포함한 기업관리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 그리고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었다.??그런데 김일성은 현지 지도를 통해 지배인 단독책임제가 안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고 공장관리운영에 관한 최종 권한과 책임을 공장 당위원회로 넘겼다.??지배인 단독관리제에 기초한 공업관리체계는 기업을 관리운영하는 권한이 지배인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근로자들을 기업관리에 참여시키는 형태나 내용면에서 많은 제약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산과 관리의 주인인 근로대중의 집체적 지혜와 창발성에 근거해서 경제를 관리운영한다는 사회주의 경제관리의 본질에서도 어긋나는 점이 있었다.??그래서 김일성은 지배인 단독관리제에 기초한 공업관리체계를 "사회주의적인 것이긴 하였으나 자본주의 잔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방식으로서 "거기에는 관료주의적이며 기관본위주의적이며 이기주의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대안의 사업체계'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첫째, 대안체계는 공장기업을 관리운영하는 데서 해당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체계가 세워졌다. 공장 당위원회가 최고 지도기관으로서 그 기업을 집체적으로 관리운영하고 기업활동의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계급의었다.
18년간 장기 집권한 박정희는 10?26사건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0.26사건으로 국민들은 독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만 1979년 12월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또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2.12의 전개과정과 발생요인을 알아보고 12.12의 성격을 규정해 보도록 하자.1. 12.12 전개 과정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의 만찬회에서 박정희를 사살한 것은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수도권 일부 부대에 이동 명령을 내린 후 11시 40분경 보안사령관과 헌병감에게 김재규를 체포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27일 새벽에 열린 국무회의는 박정희의 시신을 확인하고서 4시부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비상사태 하에서 보안사령관은 자연스럽게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정승화와 전두환은 10.26부터 많은 의견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정치적 약점을 포착하고 있었다. 정총장은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고 박정희가 살해당한 시간에 현장 부근에 있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김재규에게서 돈 300만원을 받은 사실이 있었다. 이것을 빌미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1979년 12월 12일 저녁 합수부 소속의 허삼수, 우경윤 대령에게 정총장의 강제연행을 지시했다. 12.12일을 거사 날짜로 택한 것은 11일이 바로 장군진급심사 발표일이므로 12일 저녁에는 곳곳에서 축하회식이 있으므로 적기일 거라고 생각했고, 최규하 정부가 12월 13일에 새 내각을 발표하고 나면 상황을 역전시키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정총장 연행조와 후보계획조는 이날 저녁 6시 50분경 총장공관에 도착했다. 허삼수 대령은 보안사 정보처장을 사칭하고(권정달의 행세를 한 것은 인사처장보다 정보처장이 보고를 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했다.부관실에서는 총장 공관의 장교들과 보안사 수사관들이 함께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부관실에 있던 총장 공관 소속의 장교들이 뛰쳐나가려 했다. 순간 수사관들이 문을 막아섰고 격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총장 부관 이재천 소령이 수화기로 다가갔고, 겁을 먹은 보안사 수사관들이 권총을 뽑아 총격을 가해 장교들을 쓰러뜨렸다.허삼수 대령은 정총장을 강제로 차에 실어 총장공관을 빠져나와 곧장 서빙고 보안사 분실에 감금시켜버렸다.총소리에 놀란 총장 부인 신유경 여사는 전화를 쓰려했으나 이미 집안의 전화선이 모두 절단된 뒤였고, 비상전화 한 대만이 남아있었다. 신 여사는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인 유병헌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이 납치되었다고 했고, 유 대장은 놀라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뒤이어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에게도 알렸으며,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총장공관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용산의 미군 벙커로 피신했다.같은 시간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저녁 9시 30분경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등과 함께 집단적으로 대통령을 찾아가 재차 정승화 총장의 체포 및 연행에 대한 재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정 총장 연행 보고를 접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은 즉시 자신의 정통 지휘계통이 살아있으며, 자신의 재가 없이는 그 어떠한 병력 출동도 허가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정 총장을 연행한 것이 우경윤 대령과 권정달(실제로는 허삼수) 두 대령이라는 첩보를 입수했고 이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한편 정 총장 연행소식을 접한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이 세 사람은 황급히 부대로 복귀했으며, 전두환이 박희도의 제 1공수여단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자 육군본부에 모여 있던 장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 당시 육군본부 측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장태완의 어 버렸다.12.12 당시 보안사에서는 주요 지휘관들의 전화 통화를 도청하며 육본측에서 조치를 취하면 바로 이를 마비시켜 버리곤 했다. 육본측 지휘관들은 이를 의식했던 듯 비화기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도리어 자신들의 통화 감도가 떨어지거나 잡음만 늘어날 뿐, 보안사의 감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육본측은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군 참모차장, 각 군 사령관 등 정식 지휘계통을 통하여 모든 부대는 국방장관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는 절대 병력을 동원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특히 김종환 합참의장의 경우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전화통화를 하여 30사단, 33사단에 사단장이 제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이 출동 준비되어있는가를 확인하고, 만일 사단장이 부재중일 경우(이 말은 곧 그 사단이 합수부측에 넘어갔다는 이야기일수 있다.) 참모장과 연대장과 직접 전화통화하여 통제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시는 이미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전두환의 명령을 따르는 하나회 소속 지휘관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한편 전두환은 제1공수여단에게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진압을 명함과 동시에 제3공수여단에게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제거를 명령했다. 정병주는 제9공수여단에게 제3군지원사령부로부터 차량을 지원받아 지금 당장 서울로 출동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제3군지원사령부에서 차량이 도착하지 않자 초조해진 윤흥기 제9공수여단장은 자체 차량으로 1개 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제 전두환의 제1공수여단과 정병주의 제9공수여단 중 어느 쪽이 먼저 서울에 도착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9공수여단에게 출동명령을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정병주는 전두환이 보낸 제 3공수여단에게 피습을 받았고, 사령관과 연락이 끊겨버린 제 9공수여단장은 영문을 모른 체 합수부측의 공작에 의해 중도 회군을 하고 만다. 한편 9사단장 노태우 소장 역시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에게 1개연대 병력을 즉시 중앙청으로 출동시키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서부전선의 9사단 29연대위해 “국방부에 충성을 하는 부대를 새벽까지는 이동을 중지”시키도록 종용했다. 동시에 한국 부대 간의 충돌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하여 전두환 소장에게 경고하는 전갈을 보냈다. 신군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우호적이지 않았으나 이미 반란군이 병력을 움직여서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고 총격전을 벌인 상황에서 이와 같은 미국 관리들의 행동은 반란을 이미 승인하고 묵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고 , 이는 반란군의 손을 들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육군본부는 쿠데타 계획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고 미국 관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미국 관리들은 12. 12 쿠데타의 성공을 보증해준 셈이다.12. 12 당시 신군부세력은 정승화 총장 연행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최규하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최대통령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였다. 최대통령은 전두환의 요구에 굴복했고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의 지위와 향후의 정치일정에 하등의 장애도 없을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최대통령을 신군부의 강력한 옹호자로 만들어놓았다.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2월 13일 0시부터 새벽 6시 20분 사이에 육군본부, 국방부, 중앙청, 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 하에 두었다. 12.12 다음날 아침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김재규가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출동했던 바, 정총장의 신변에는 아무 이상없이 현재 연행, 조사중에 있다” 발표했지만 그 역시 신군부에 의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최대통령은 이후 1월 18일에 연두기자회견에서 “박대통령 시해사건은 국가 중대사건이며 계엄군 수사당국이 진상규명을 위해 의혹이 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승화 총장이 혐의가 있다고 구별되는 독자적인 권한과 활동영역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정승화 총장으로서는 가능한 그를 자기의 지도력 아래 복속시키든가, 아니면 최소한 육본의 공식지휘 체계에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약화시키지 않는 한 비상한 정치상황에서 긴급히 요구되는 군의 통일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정총장과 전소장 사이의 화합할 수 없는 이견은 10.26 직후부터 드러났다. 정총장은 박정희의 사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유신체제가 어떤 형태로든 변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전두환은 김재규를 ‘아비를 죽인 패륜아’로 규정하면서 크게 분개했다. 또한 정총장은 유신체제를 지탱해온 재벌, 관료집단은 물론 군부의 일반적 분위기도, 유신체제의 폐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대세로 받아들였으나 전두환 등 강경한 소장파 장성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전두환 등 소장파 장성들은 군부가 전면에 나서는 방식의 비상시국 확대를 주장했다. 비상시국을 확대시켜야만 합수부의 권한과 활동영역을 강화, 확대시킬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정총장은 이러한 제의를 거부하고 합수부의 활동영역을 가능한 한 단순한 치안유지에 국한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대결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로 다가왔다. 전소장은 정보와 수사의 전권을 한손에 장악하고 있으면서 도청과 감시를 통해 군 내부의 동향을 누구보다 신속히 탐지할 수 있었고, 이미 이런 강점을 토대로 박정권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월권행위로 다른 지휘관들이나 참모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소장이 정총장을 김재규 사건과 얽어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시켜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좌천시키려는 결심을 굳혔다. 정총장은 노재현 국방장관을 만나 “전두환 합수부장이 너무 월권을 많이 해서...몇 번 주의를 해도 안되겠으니 바꾸어야겠다”는 의사를 비추었고 전소장은 자기의 정보망을 통해 정총장이 자신을 좌천시킬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② 기득권 상실의 위협출세가도를 달리던 전두환 등 소장파 정치장교들은 박정희의하였다.
4·19의 성과와 한계: 성공한 점과 실패한 점을 비교*수정부분은 각주 달아 표시, 파란색 부분에 해당합니다.Ⅰ. 서론4.19혁명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 속에서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혁명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4?19는 단순한 사태 내지 의거로서 저평가 되어왔다. 심지어 그 이전의 정권들은 4?19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은 민주적 정통성이 미약한 정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정권은 한국 변혁의 원류라 할 수 있는 4?19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다. 4.19가 민중들의 정치의식을 고취시켜 반정부운동을 촉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이를 터부시한 것이다.그러나 문민시대가 개막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4월혁명은 우리의 역사 속에 부활하여 민주혁명으로 복원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일어나는 모든 민주주의적 민중봉기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사회변혁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4.19 혁명은 ‘미완(未完)의 혁명’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이후에 나타나는 각종 반혁명적 사건과 5.16 쿠데타의 발발이 4.19혁명에 ‘미완(未完)’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게 만든다.그러기에 본 발표문에서는 본격적으로 4?19혁명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4.19 혁명이 발생하게 된 배경과 그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으로, 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뒤, 4.19 혁명이 가지고 있는 성과와 한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이번 발표를 진행하고자 한다.Ⅱ. 본 론1. 4?19혁명이란?1960년 4월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정부수립 이후,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이룬 민주화운동이다. 이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꾀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의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었다.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지지 성황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도미를 하게 된 것을 기회로, 5월중에 실시해야 할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15일에 실시한다.내무부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동원한 부정선거의 내용은 ①사전 투표율 40%완료 ②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③자유당의 완장 부대 동원으로 유권자위협 ④야당참관인 축출 ⑤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⑥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⑦투표함 바꿔치기 ⑧개표 때의 환표 ⑨득표수의 조작 발표 등이었다.4. 4·19혁명의 진행과정① 대구 2.28 학생의거자유당의 장기 집권을 위한 부정 음모가 진행되면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60년 2.28일 대구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선거연설회가 계획되었다. 일요일인 그날의 유세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고 이에 자유당은 장면의 선거유세에 학생들의 참가를 막기 위해 '일요등교'를 지시하였다. 이 지시가 내려진 25일 밤부터 대구지역의 학생들이 일요일 등교 후에 항의시위를 하기로 약속했다. 2월28일 낮 12시 50분,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운동장에 모인 800여 명과 뒤늦게 합류한 학생들이 시위에 들어갔다.② 3.15 부정선거60년 3월15일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 체제를 연장하고,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하였다.③ 제1차 마산의거(3월15일)3월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 시위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④ 제2차 마산의거(4월11일)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학생의 눈에 이러한 원동력을 바탕으로 불과 4월 혁명이 일어난 지 7일 만에 철옹성 같았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4월 혁명은 정부 수립 이후 가장 광범위한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임과 동시에 민생운동이며 민족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① 민주주의 운동해방 이후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정치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확실한 저항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4.3항쟁 등 부분적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한 시도는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압(暴壓)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4.19 혁명은 일제시대와 전쟁 그리고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를 거치면서 엄청난 타격을 받은 이 땅의 민족 민주의 역량이 부정한 정치권력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50년대를 통해 부활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 민중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민주성을 자각시키고, 우리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죽음까지도 초월한 높은 민주적 역량을 전 세계에 보여준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한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다.ex) 프랑스의 드 프레 파리 시의회 의장은 5월 10일 “나는 최근 한국 학생들의 행동이 보여준 바와 같은 그 고귀한 정신과 그들의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크나큰 존경심을 품고 있다. 이에 나는 프랑스 국민의 축의를 한국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라는 성명 발표② 민생운동4월 혁명은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 이외에도 민생운동(혁명)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1950년대 한국의 국민경제는 해방 이후부터 축적된 구조적인 모순, 한국전쟁으로 인한 각종 경제?산업시설의 파괴,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정부패의 만연 등으로 파탄지경에 내몰려 있는 상태였다. 특히 일반민중들은 경제위기의 부담을 고스란히 전가 받으면서 대대적인 수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이라는 삼중고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승만 정권은 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오로지 자신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4.19혁명 1주기를 전후로 서울대 민통련이 학생회담과 학생기자교류, 학술토론회, 모든 예술?학문?창작의 교류, 학생친선체육대회를 추진하고 뒤이어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남북학생회담을 북한에 제안한 것 등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통일운동으로 남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는 물론, 제한적이나마 북한의 동의도 이끌어내는 성과도 보인다. 이러한 구체적인 통일운동은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인해 무산되고 말지만, 이후 전개된 통일운동의 나침반 역할을 하며,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 발생적 대중성의 함유4월 혁명은 어느 특정한 집단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혁명이 아니다. 4월 혁명은 오히려 기성인이나 기성조직과 일정부분 단절되어 있는 학생층이 주도하고, 도시빈민이나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선배나 기성인들의 가르침이나 사주에 의하여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은 4월 혁명이 지니는 가장 대표적인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4월 혁명은 혁명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혁명적인 조직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혁명을 지휘하는 총사령탑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을 위한 치밀한 작전계획 또한 없었다.이는 혁명의 발전과정에서 결정적인 한계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민중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준거 틀로써의 의미4월 혁명이 한국 현대 정치사의 전개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형언하기 어렵다. 4월 혁명은 이승만의 12년 독재통치를 무너뜨린 그 자체만으로도 우선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4월 혁명의 위대한 혁명성은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것에만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거쳐 해방, 미군정기 그리고 정부수립이후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던 특권계층의 상당수가 몰락하였다는 사실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4월 혁명의 결과가 독재체제의 붕괴로만 그쳤다 한국사회의 성격과 조응하는 민주화의 내용에 관한 문제나 민중들의 생존권 문제, 조국통일의 문제 등 기존 보수정치세력들이 경시했던 중요 문제들을 사회적 의제로 제시하였다.물론, 혁신세력이 당시 소생하고 있던 민중운동보다는 정치투쟁에 매진했다는 것과 5.16 쿠데타로 인해 짧은 시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이들의 등장으로 소외되어왔던 중요한 의제들이 민중과 더불어 논의되고, 보수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보수?혁신의 균형추에 대한 개선효과가 있었다는 점은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서 당시의 혁신운동이 지금의 민중운동이나 사회운동 등에 영향을 끼치는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할 수 있다.이 밖에도, 교육과 언론? 문화에도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문학은 시대상황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며, 그 정신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하였다.2) 한계- 혁명 주도세력의 문제점4.19 혁명은 광범위한 민중 각 계층의 이해관계가 집약된 조직의 총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돌발적 사태에 의해 구성된 군중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 기존 사회조직으로서의 학생조직이 계획적 운동조직으로 전화된 것도 아니고, 도시빈민이나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닌 즉흥적으로 구성된 조직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민중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보여주며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이승만 정권의 붕괴되고 난 후에는 투쟁의 목표를 상실한 채, 후속 활동의 힘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특히, 혁명을 주도한 학생층이 조직과 이론의 빈약함으로 말미암아 이승만 하야 이후의 사후처리를 보수정당인 민주당에게 맡기고 학교로 돌아간 것은 4.19 봉기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층의 선택 오류는 이후 민주당이 보여주는 반(反)혁명적인 행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민주당은 그저 반(反) 자유당의 기치아래, 4.19혁명에 참가하였을 뿐, 혁명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전혀 무관한 정당이었던 것이다.따라서 4.19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