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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소리 수궁가 (박동진 명창의 ‘수궁가’와 김수연 창가의 대본을 바탕으로)
    2009학년도 한국연극 report‘수궁가’32060432 이사랑1. ‘수궁가’의 줄거리 (박동진 명창의 ‘수궁가’와 김수연 창가의 대본을 바탕으로)전반부- 용왕이 병을 얻게 되어 도사가 토끼의 간을 처방하게 된다. 대신들이 들어와 용왕 어떤 대신에게 갈 것인지 물으나 아무도 가려하지 않자, 별주부가 자진하고 용왕이 화공을 불러 토끼의 화상을 그리게 한다. 별주부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세상으로 떠난다. 별주부는 세상으로 올라와 산천을 보고 아름다움에 놀라 감탄을 금치 못 한다. 별주부는 날짐승들이 상좌 다툼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들짐승들이 상좌다툼을 하는 모습을 역시 보게 된다.중반부- 들짐승들 사이에서 토끼를 찾던 별주부는 ‘토선생’을 ‘호선생’으로 잘 못 호명해 호랑이가 등장하게 되고 호랑이는 별주부를 위협하니 별주부는 목을 길게 꺼내며 목 내력을 읊으면서 오히려 호랑이를 위협하여 쫓아낸다. 호랑이가 도망치고 곧 토끼와 자라가 만나 통성명을 나누고 자라는 토끼를 꾀어내기 위해 토끼를 한껏 치켜세운다. 토끼는 자라에게 세상사를 이야기하며 별 탈 없이 살고 있다 말하지만 별주부는 토끼가 세상에 살며 여덟 번의 죽음의 위기가 있을 거라며 잔뜩 겁을 주고 토끼는 수궁의 세계에 흥미를 둔다. 별주부는 수궁의 세계의 황홀경을 풀어 놓으며 훈련대장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말로 토끼를 꾀어낸다. 결국 토끼는 자라를 따라 수궁으로 가게 된다.후반부- 토끼와 자라가 수궁에 도착하고 용왕은 토끼를 잡아들이라 한다. 놀란 토끼는 자신이 토끼가 아닌 ‘개’,‘송아지’,‘말’이라 둘러 대지만 결국 끌려 들어가 용왕 앞에 나서게 된다. 자조치정을 듣게 된 토끼는 자신의 간을 탐내는 자가 많아 간을 두고 다닌다는 말로 용왕을 속여 결국 용왕은 토끼의 꾀에 넘어가 되레 토끼에게 연희를 베푼다. 용왕은 별주부에게 다시 토끼와 돌아가 토끼에게서 간을 받아 오라는 명을 내리고 못 미덥지만 어명을 받고 별주부와 토끼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목숨을 건진 토끼는 산천을 둘러보며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한 감상에 빠지고 별주부에게 용왕과 별주부의 한심함을 놀리며 청산으로 돌아가고 자라 역시 수궁으로 돌아간다. 살아 돌아온 것이 기뻐 방정 떨던 토끼는 그만 덫에 걸리고 만다. 파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오히려 파리는 사람 손을 탈까 겁내며 사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한 번 꾀를 내어 사람 손에서 도망 나온 토끼지만 이내 독수리에게 잡히고 만다. 하지만 독수리에게도 꾀를 내어 토끼 굴까지 유인한 후 토끼 굴로 무사히 도망을 간다.2. 박동진 명창의 ‘수궁가’ 감상기이번 리포트는 판소리 작품을 선택하여 작품 자체적 측면에서 접근을 하는 리포트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간접적으로 나마 소리를 접하게 되어 그 감상문을 조금 적어 보려고 한다.박동진 명창에 대해선 선생이 돌아가셨던 해에 접했던 기사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당시 기사에서는 선생의 부음과 함께 그의 짧고도 긴 인생에 대해 몇 자 적혀 있었다. 명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당대의 전국 유명 명창들에게 소리를 전수 받은 소리꾼”, “적벽가 예능보유자로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소리인” 정도의 지식만이 내가 명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전부였다. 사실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박동진 명창의 ‘수궁가’ 완창 앨범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만큼 아직 나에게 있어서 판소리는 그다지 친근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알게 모르게 여러 번의 새로운 것을 접할 기회가 매 순간 소리 없이 왔다 소리 없이 떠나겠지만 이번 ‘박동진 명창’을 알 수 있게 된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에 대해 영광으로 생각한다.이번에 듣게 된 “수궁가”는 명창이 거의 구순에 가까운 나이에 부른 소리이지만 소리로만은 전혀 나이가 믿기 힘들 정도로 힘의 농염함이 묻어 있었으며 20대의 젊은 내가 들어도 즐겁게 웃을 수 있는 해학과 소리에 대한 정열이 느껴졌다. 명창의 과거 기사를 되짚어 보니 이렇게 천재 명창이라 칭송받는 선생에게도 소리를 잃게 되는 고비의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마치 어느 영화에서나 볼 법 한 이야기로 다시 소리를 찾아 수련을 떠난 선생의 득음기는 ‘과연!’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했다. 그 후에도 선생의 끊임없는 도전과 수련의 결과는 ‘충무공 이순신전’의 9시간 40분 완창 공연에서도 그 진면목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명창의 목소리를 사실은 수년간 알게 모르게 듣고 자라 왔다는 것이었다. 92년 어느 약 광고에 출연하면서 부른 「제비 몰러 나간다」와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광고의 대목이 바로 명창의 소리 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선생의 목소리가 아직 귓전을 울리는 듯하였다. 일평생을 소리에 묻은 명창들이 있기에 후손들이 ‘우리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재산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 번 마음을 울렸다.‘수궁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수궁가’는 그 무대가 별주부와 토끼의 이동에 따라 ‘수궁’과 ‘육지’로 나뉜다. ‘수궁가의’ 소리눈 즉, 하이라이트는 두 번째로 수궁이 무대가 된 부분인 토끼가 용왕을 속이고 육지로 유유히 탈출하는 대목이다. 즉, 토끼가 "배 갈라라" 하고 호령하는 대목부터 육지에 나와 자라에게 욕하는 대목까지를 꼽을 수 있는데 특히 토끼가 자라에게 욕하는 대목은 경드름이라고 말하는 독특한 음악 어법으로 짜여 있다. 경드름이란 대개 중모리 장단으로 짜여 있고 "즐겁고 경쾌하게"라는 악성 기호의 의미가 있는 부분인데 실제 듣다 보니 그 소리가 소리 내서 웃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로 흥이 나는 부분이다. 특히 명창이 토끼의 입장에서 별주부와 용왕에게 상욕을 퍼붓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3. ‘수궁가’의 주제 및 내재된 의식‘수궁가’는 여러 가지 동물들이 갖가지 인간성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하며 인간들의 세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우화적 요소를 담고 있다. 이야기를 판소리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설정된 여러 인간성의 적나라한 표현은 바로 작가의 의식세계 또 넘어서 동시대의 청자들의 의식이 함께 반영되어있다고 본다. 흔히 수궁가의 주제를 논할 때에는 자라의 충성심과 토끼의 꾀. 두 가지로 보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주제는 함께 공존하기는 조금 아이러니한 성격이다. 자라의 입장에서 작품을 ‘별주부전’으로 봤을 땐 임금에 대한 충성이 주제지만 토끼의 입장에서 작품을 ‘토끼전’으로 봤을 땐 오히려 그 기지가 불충으로 반영되니 서로 공존할 수는 없는 주제가 아닐까? 하지만 대게의 청자, 독자, 관객이 작품을 접하게 될 때는 대게 토끼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극의 클라이맥스가 토끼의 시점에 서게 되므로 자연스레 감정을 동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애초에 작곡가가 토끼의 입장에서 곡을 구성하였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 ‘수궁가’는 표면의 주제인 충성보다는 이면의 기지를 더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좀 더 넓게 확장해보자면 이는 왕(더 나아가서는 모든 체제에 대해)에 대한 무비판적 순응 보다는 인간 개인의 삶과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4. ‘수궁가’의 등장인물과 오늘날의 인간상앞서 ‘수궁가’는 여러 등장 동물들이 갖가지 인간성을 풍자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 점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크게 ‘토끼vs자라’, ‘토끼vs용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별주부가 용왕을 위해 토끼를 꾀어내는 장면을 보며 우리는 표면적인 ‘충심’이라는 주제를 찾았지만 사실 이 인물 하나하나를 살펴보자면 ‘충심’이라는 주제는 미약할 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예체능| 2011.03.20| 4페이지| 1,000원| 조회(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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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서울연극제 개막작 수잔 손탁 각색의 바다의 여인 감상문
    2000년 서울연극제 개막작 ‘바다의 여인’ 감상문?과 목?학 과?학 번?이 름?제 출 일?담당교수< 2000년 서울연극제 개막작 ‘바다의 여인’ 감상문 >>원작을 읽은 후 각색본을 읽고, 각색본을 가지고 한 공연을 시청하면서 총 세 차례 ‘바다의 여인’을 접했다. 원작을 읽고 각색본을 읽었을 때 그 느낌이 같은 듯 다른 작품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렇다면 각색본과 공연은 같은 텍스트를 가지고 공연했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느낌을 가져야 할 텐데 그게 또 그렇지 않아서 적잖게 당황했다. 이게 바로 ‘연출’ 이라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각색본을 접한 후 본 공연은 연출의 힘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장면과 공연에서 연출이 그려놓은 그림 사이의 갭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람을 금치 못했다.우선, 작품 내부적으로 원작과 각색본 그리고 공연에 있어서 차이점이나 느꼈던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작품 전반적으로 사실주의 극작가인 ‘입센’의 작품에서는 잘 찾아 볼 수 없는 독백이나 방백의 사용이 ‘수잔 손탁’의 각색본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게다가 ‘로버트 윌슨’은 여기에 ‘오디오’라는 장치를 추가했다. 첫 부분의 ‘봔겔’의 독백 부분이라던 지, 종종 ‘엘리다’의 독백(혹은 방백)부분이 녹음된 소리로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던 부분들이 인상 깊었다. 마치 TV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장치인 이 부분들은 (어떻게 보면 기술적인 면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원작을 읽었을 때 느꼈던 ‘봔겔’과 ‘엘리다’ 사이의 거리감이라던 지 소통의 단절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같은 맥락에서 ‘봔겔’과 ‘엘리다’의 대사의 중복이나 중철이 이러한 효과를 더욱 극대화 하였다. 또, ‘힐데’와 ‘볼레테’자매가 중심인 장면들에서 각색본을 읽으면서 쉽게 그림그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꽤 많았는데 공연을 보면서 ‘아- 이래서 그렇게 쓰여 있었던 거구나’란 생각이 들게 했다. 마치 두 자매의 장면들은 인형극과도 같이 보이는데 특히, 두 자매가 상을 차리고 그 사이에 ‘엘리다’가 끼고 싶어 하는 장면에서 이 두 인형들이 물을 쏟고 치우고를 반복하는 장면으로 그려지는데 그 부조리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각색본이나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섬뜩함이라든지, 괴리감 같은 것들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두 자매가 ‘엘리다’를 거부 하는 방법을 ‘말’로서가 아닌 ‘소리’로서 표현하는데 이 신경질적인 효과음이 마치 ‘엘리다’의 괴로움과 두 자매의 괴로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듯하다. 다음으로 바로 이 부분이 각색본과 공연을 본 후 차이를 크게 느꼈던 부분인데, 바로 ‘낯선 남자’의 방문에 ‘봔겔’이 ‘엘리다’에게 ‘가시오’라고 말하는 그 대목부터였다. 원작과 각색본을 읽었을 땐 두 작품의 결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지만 공연을 관람한 후 ‘봔겔’이 ‘엘리다’를 놓아준 이후부터 원작과 이 작품이 전혀 반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그제야 느끼게 되었다. 왜 난 각색본을 읽으면서도 ‘엘리다’가 원작에서처럼 자신의 의지로 ‘봔겔’을 선택했다고만 느꼈는지- 공연을 본 후에는 ‘입센’의 여성해방 3부작이라고 말하는 ‘바다의 여인’이 ‘입센’이 마치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에게도 자유의지가 필요하며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 냥 말하지만 사실, ‘입센’은 그런 ‘자유의지’를 가장하여 여성이 결국은 그 의지대로 남성에게 종속당하고 말았구나― 란 생각을 하게했다. 이러한 논점은 ‘엘리다’의 ‘난 내가 원하던 것을 기억할 수 없어’란 대사에서 정확히 보이는데 결국 ‘엘리다’는 ‘봔겔’과 그의 ‘가정’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바다’를 포기 했다는 쪽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결국 ‘엘리다’는 ‘낯선 사람’이 떠나고, ‘봔겔’과 그의 가정에 남지만 이전처럼 ‘바다’에 가지 않는 다는 점에서 또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가정문제와 여성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단 점에서 ‘인형의 집’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이는데 ‘인형의 집’에서 미지수로 보류해 두었던 가정문제와 자유에 대한 해답을 결론적으론 다시 여성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런 논점은 현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전적으로 ‘입센’의 편에 서서 작품을 읽다가 단번에 등을 지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로서 왜 ‘수잔 손탁’이 개작의 목적이 ‘원작에 어떤 심오한 흠이 있다고 보여서 최대한 입센의 희곡을 변화시키고자 했다’라고 말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다음으로, 작품 외부적인 요인들이 작품에 끼친 영향들이 굉장히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는데 그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역시 스텝을 전공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런 장치들이 주는 효과들이 더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원작을 읽을 때 혼자 ‘봔겔’의 집을 상상하면서 이러 저러한 그림들을 그렸었는데 이 공연에서의 무대는 휑한 바닥뿐이었다. 하지만 이 바닥이 장치적인 재치들을 숨기고 있었을 뿐더러(바닥이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나 분위기에 따라 튀어 올라온다던지) 곧게 뻗어 나가는 나무 바닥의 무늬는 그 황량 감을 더욱 증대시켰다. 또 무대 중앙에 솟대처럼 세워져 있던 얇은 기둥은 마치 배의 돛대처럼 보였고 거기에 조명으로 음영을 더해 주니 마치 그 속에서 독백을 하고 있는 ‘뷔겔’은 그물에 걸린 듯 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또 그 동안은 각색본을 읽으면서 거의 대부분 ‘엘리다’의 성격이 이상한 듯 보였으나 이 장면에서 ‘뷔겔’의 히스테릭적인 모습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원작에서는 ‘사랑하는 그녀 엘리다는 심신에 이상이 있어 자신이 꼭 치료해 주어야 할 상대’로 ‘뷔겔’을 이 생각했다고 느꼈다면 공연에서의 ‘뷔겔’은 그저 사이비 과학자나 의사로 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듯 공연 전반에 걸쳐 조명의 효과가 엄청났다고 생각된다. 과장되어 괴기스럽기 까지 한 그림자의 효과는 단지 ‘엘리다’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외로움과 괴로움을 모두 느끼게 했으며, 공연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던 호리존 라이트는 인물의 심리를 극단적으로 표현 할 뿐만 아니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빛을 통해 인물의 심리에 동화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고 본다. 아무것도 없다면 없다고 할 수 있는 빈 무대에 빛과 어둠만으로도 무대와 공연을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공연 전반에 걸쳐 음산한 음향 효과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고요하고 쓸쓸한 정서를 가진 국악기의 사용이라든지 바람소리, 바다소리, 천둥소리로 분위기를 조성할뿐더러 거기에 알 수 없는 동물 소리 등이 사용되어져 한 층 더 관객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가지게 했다.
    독후감/창작| 2008.06.19| 4페이지| 1,000원| 조회(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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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센의 바다의 여인과 수잔 손탁의 바다의 여인
    『바다의 여인』입센의 『바다의 여인』과수잔손탁의 각색본 『바다의 여인』을 읽고과 목 :담당 교수 :제 출 일 :학 과 :학 번 :이 름 :-『바다의 여인』원본과 각색본의 비교분석 -우선, 두 작품을 읽은 후 수잔 손탁은 입센의 ‘바다의 여인’을 각색했다기 보다는 모티베이션으로 삼았다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스토리의 큰 줄기 외에 등장인물이라든가, 말하는 방식, 효과, 대사, 장면 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캐릭터에서도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입센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엘리다’는 강한 자유를 찾아 갈망하지만 나약하고, 그녀의 그런 저항 같은 이상한 행동들이 관객에게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듯 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반면에 수잔 손탁의 ‘바다의 여인’에서의 ‘엘리다’는 좀 더 강하고 히스테리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혼자만의 세계가 더욱 짙게 그려졌다고 할까- 또, ‘봔겔’역시 입센의 작품에서는 부인 ‘엘리다’의 자아를 만족시켜주지는 못하지만 나름 자상한 남편으로 비춰지지만 각색본에서는 직접적으로 ‘엘리다’가 정상이 아님을 피력하며 약을 처방하고 약물을 투여하는 듯 마치 환자 다루듯 그녀를 ‘치료’하는 모습이 짙게 그려진다. 또 극의 초반에 ‘볼레타’와 ‘힐데’의 대화에서 그녀들이 ‘엘리다’에게 부정적인 시선임을 알 수 있는데 두 작품 모두에서 ‘볼레타’보다는 ‘힐데’가 더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려진다. 원작에서는 ‘힐데’가 그녀에게 부정적이었던 모습은 작품 후반에서 알 수 있듯 어린 아이가 새로운 어머니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부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또,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호전적임을 나타낸다. 또한 오히려 더 어른인 듯 보이던 ‘볼레타’가 ‘엘리다’와의 관계가 나아가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각색본에서는 그녀들의 관계는 문제점만 제시한 체 그 어떤 방향으로 흐르지 못하고 ‘볼레타’와 ‘힐데’모두 그 집에서 떠나게 된다. 또한 ‘낯선 이방인’의 존재도 큰 변화를 겪은 인물 중 하나다. 원작에서는 ‘낯선 이방인’의 존재가 직접 등장하여 ‘엘리다’에게 말을 걸고 위협적인 설득을 하며 직접 영향을 가하는 인물로 나왔지만 각색본에서는 그의 말을 ‘엘리다’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함으로서 각색본에서는 ‘낯선 이방인’의 말이 ‘엘리다’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관객으로 하여금 받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모습이 원작보다 수잔 손탁의 작품에 와서 더 극단적으로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또한, 원작과 크게 달라진 부분 중 하나인 ‘표현’ 법에 대해 말해보자면 먼저 ‘말하는 방법’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원작에서는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정보들이 각색에서는 초반에 ‘봔겔’과 ‘엘리다’의 입을 통해서 직접 전해들을 수 있었다. 방백을 통해 ‘봔겔’은 ‘엘리다’를 관객에게 소개했으며 그녀의 이름의 어원이라든가, 부모, 자라온 배경을 설명했으며 직접적으로 그녀가 정상적인 배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미친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태어났음을 말한다. 또 그를 통해 두 사람의 사이가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원작과 극명하게 다른 표현인 ‘독백’을 들 수 있는데 각색본에 나타난 독백은 모두 ‘노래’로 보인다. 원작에서는 이방인이 선장을 찌르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각색본에선 나오지 않는)‘랑스트란트’와, ‘엘리다’와 ‘안홀름’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각색본에서는 ‘엘리다’의 독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 직접적으로 ‘노래’란 표현을 사용하진 않지만 그녀의 독백 대사들이 ‘노래’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각색본 장면 10에서 보면 ‘엘리다’가 자신의 처지를 ‘협만의 고인 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부분의 독백역시 ‘노래’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엘리다’와 ‘낯선 이방인’ 사이의 일들을 표현한 장면 12에서는 직접적으로 ‘발라드’라는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로서 각색본에서는 원작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리듬’감이나 ‘운율’을 느끼게 한다. 더 서정적으로 와 닿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각색본에서는 약간 ‘부조리극’적인 표현들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큰 예로, ‘볼레타’와 ‘안홀름’의 대화를 통해 찾아 볼 수 있는데 원작에선 ‘볼레타’가 자신의 ‘배우고 싶은 열망’에 대한 이야기를 ‘안홀름’과 나눌 때 ‘안홀름’이 그 이야기를 ‘봔겔’에게 전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그 장면은 끝이 나지만 각색본에서는 ‘안홀름’과 ‘볼레타’사이에 전혀 통하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서로 자시의 이야기만을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부조리’극 적 표현은 이 장면뿐만 아니라 후에 ‘볼레타’와 ‘힐데’가 상차림을 하는 장면에서 다시 나타난다. ‘엘리다’가 서로간의 공통점을 피력하며 그 둘 사이에 끼고 싶어 하지만 ‘볼레타’아 ‘힐데’는 ‘상 차려’, ‘상 엎어’란 대사를 반복하기만 할 뿐이고 그 사이에서 ‘엘리다’는 그 사이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봔겔’에게 피력하며 자신이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말한다.전체적으로 각색본에서는 원작의 많은 장면들이 사라지거나 합쳐졌고, 새로 생기기도 했으며, 같은 이야기를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듣게 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가장 큰 예로 ‘랑스트란트’는 각색본에선 찾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원작에선 나오지 않았던 물개의 전설이 각색본에선 추가 되었다. 또, 원작에선 ‘안홀름’과 ‘엘리다’가 나눴던
    예체능| 2008.06.19| 3페이지| 1,000원| 조회(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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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이웃집 발명가 관극 레포트
    『 이웃집 발명가 』- 연극 ‘이웃집 발명가’ 비평문대학로 연극 중 창작극이자 초연인 작품에 대해서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게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본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큰 기대를 않는다는 것은 재미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정교한 짜임새나 구성적인 면에서 라이센스 작품이나 오랜 기간 연장과 재공연으로 다져진 작품에 비해 좀 더 너그럽게 본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나는 원채 공연을 보기 전에 작품 정보를 접하고 보는 편이 아니라 대게 공연의 포스터 이미지가 그 작품의 첫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웃집 발명가’와 나의 첫 대면에서 난 사실 좀 별로였다. 별로라기 보단 작품에 대한 기대를 이끌지 못했다고나 할까? 작품의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건 극장에 도착해서였다. 자질구레한 폐품들로 극장의 입구부터 디스플레이를 해 놓은 것을 보고 ‘아, 되게 재미있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이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부터 발명가네 집- 이란 일종의 표식 같았다. 일평생 한번 만나보기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발명가가 우리 옆집에 살고 있고 오늘 내가 그의 발명품을 보러 그의 집 대문을 연 것 같은 기분을 관객에게 전달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참 맘에 드는 맞이인사였다.천재 발명가이지만 동네에선 괴짜로 통하는 발명가가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자랑 쪽에 더 가까운)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그의 초대에 응한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고 그 사람이 바로 ‘로즈밀러’였다. 그녀는 그가 천재지만 그의 발명품들은 단 하나도 가치가 없을뿐더러 그의 재능을 썩히고 있음을 개탄하며 그를 개조하고자 노력한다. 이게 바로 이 연극의 큰 줄기이다. 작품의 전반적인 칠을 하던 코믹적인 요소도 좋았고, 연극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시·공간의 이동이라든지, 어둠을 발명한 과학자, ‘블랙’이라는 말하는 개 같은 설정·연출들이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게다가 ‘로즈밀러’역의 배우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좋았기 때문에 기대 이상으로 작품이 흥미롭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 작품도 초연된 창작극 딜레마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분명 구성 자체로는 재미있고 작품·무대·캐릭터 모든 면에서 재치가 번뜩이지만 작품 사이사이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고 기발한 발상의 포인트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우선, 단 세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소극장 연극에서 한명의 주인공의 정체성이 관객에 의해 의심당한 점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박사의 애완견으로 나오는 ‘블랙’은 처음 봤을 땐 분명 한 사람의 등장인물 이었다. 박사의 조수쯤 되는 사람이 ‘로즈밀러’가 처음 방문했을 때 그녀와 ‘블랙’의 첫 만남에서 박사는 ‘로즈밀러’에게 그가 자신의 ‘애완견’이라고 소개한다. 분명 이 부분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예상하여 노리고 작품을 썼을 테고, 연출 한 것 일 텐데 (나는 좀 빨리 받아들였지만) 공연을 보고 나온 관객들의 반응을 보니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관객도 있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석연치 않아하는 관객도 있었다. 발명가의 친구이자 조수이자 동료인 ‘블랙’이 그의 발명 중 하나였다는 건 분명 재치 있는 발상이었다. 이 작품이 연극이 아니라 영화였다면 발발이같은 종류의 ‘진짜 개’가 ‘블랙’의 역할을 했을 테고 목소리 연기를 구성지게 잘하는 성우의 목소리가 더빙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장면들이 보지 않아도 눈앞에 생생히 그려질 만큼. 연극무대에선 참 하기 쉽지 않은 요소나 효과들을 가지고 들어온 것도 재미있다. 하지만 ‘블랙’이란 캐릭터에 대해 관객이 혼란스러워 함이 상당 시간 지속된다면 어느 정도는 연출이든, 구성이든, 연기든- 어느 부분에선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또, 공연이 중반이후로 진행되어가고 갈등이 점점 고조되어 갈 즈음해서 ‘아, 이러다 끝나겠다.’ 란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대 다수의 관객은 선하고 똑똑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 두어 시간 동안 계속 윽박지름을 당하고, 그 사람 나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언젠가 그 모든 걸 다 이겨내고 한 인생으로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주인공의 성취를 통해 관객이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갈등-갈등-갈등-갈등으로 이어지다가 단 한순간에 관객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결말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다고 내 뜻대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안 좋은 작품이란 얘기는 아니다. 한 사람의 세계가 좌절과 안주로 전향되는 데에 분명하고 타당한 이유와 매끄러운 설득이 있다면 관객도 ‘안타깝게도 결국 저렇게 되는구나…’ 라고 이해하며 그렇게 된 주인공에 대해 더 진한 연민을 가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뭐지?’란 생각을 더 강하게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름 자유를 찾아 떠난 ‘블랙’역시도 ‘아- 그래도 너만은 너의 세계를 찾았구나!’란 설득보다는, 속된 말로 ‘생뚱맞은 결말·급작스런 정리’란 느낌을 받게 했다.
    예체능| 2008.06.19| 4페이지| 1,0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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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서울연극제 참가작, 김명화作 ‘오이디푸스’ 시청 감상문
    『 오이디푸스 』- 2000년 서울연극제 참가작, 김명화作 ‘오이디푸스’ 시청 감상문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이겨내려 하지만 결국 모든 순리에 무릎 꿇고 만다는 소포클레스의 ’는 연극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고전 희곡쯤으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2,4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신탁(운명)과 영웅’이 현대인들의 가슴을 움직일까? 21C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김명화 작가는 소포클레스의 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파헤친다. 과연 오이디푸스는 신탁대로 제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한 운명의 희생자인가. 김명화 작가는 종래 우리가 알고 있던 작품과는 처음부터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서사의 근본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인간 대 인간의 권력 투쟁에서 희생된 한 개인의 비극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거역하지 못하는 운명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크레온이란 콤플렉스덩어리인 한 인간의 욕망에서 빚어진 모함에 의한 희생자로서, 영웅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를 바라볼 뿐이다. 이렇게 시작부터 다른 모습을 보이는 두 작품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할까?우선 구성적인 면에서 두 작품의 차이를 살펴보자. 작품을 얼핏 보면 이 큰 줄기는 기존 소포클레스의 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도 연출가도 소포클레스의 를 정면에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를 보면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은 아폴론 신전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간통하게 될 사람’ 이라는 말을 듣고 이를 극복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신탁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신들이 그에게 쥐어준 운명에 굴복하고 마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소포클레스는 이 이야기를 크레온이 신탁으로 받아온 가뭄의 원인이 누구인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현재에서 과거, 과거에서 더 먼 대과거로 이어지는 구성으로 풀어냈다. 이는 2,400년 전 그리스인 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신화를 새롭고 흥미롭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생각해보면 그 신화의 가장 극적인 부분은 오이디푸스 역시 크레온이 받아온 신탁에 의거하여 가뭄의 원흉을 찾아내다가 결국 자신이 범인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 운명의 힘에 못 이겨 무릎 꿇게 되는 순간 일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극을 흥미롭게 구성하는 방법으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반면 김명화 작가의 에서 사건은 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맹인 사회자가 피리를 불면서 공연을 소개하고 중간에 과거의 자신의 젊은 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끌어 내면 과거의 사건들이 발생순서에 따라 재현되고 결말 부분에서는 오이디푸스와 크레온의 정치적인 대립에 초점이 모여지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그렇다면 내용적인 측면에서 소포클레스의 와는 어떤 차이점을 보일까?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의 적을 운명으로 봤다면 김명화는 크레온을 오이디푸스의 적으로 보고 있는 듯 보인다. 원작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모르고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큰 파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오이디푸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적(태생적)한계를 다루고 있다면, 김명화는 그러한 운명을 부정하고 권력을 쟁취한 이방인과 그러한 운명을 역이용하여 빼앗긴 권력을 되찾으려는 크레온과의 갈등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신 중심의 그리스시대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어진 이 시대에 초점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운명과 그 운명 앞의 영웅의 투쟁과 좌절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고 있다.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김명화의 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제시한다. 사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아들이 아니나 크레온이 오이디푸스의 신탁이 라이오스의 아들과 똑같았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이 죽인 왕의 아들이 살아 있다고 조작한다. 재판을 위해 거짓 증언자들을 매수하고 마을에 서사시를 퍼트리는 등 갖은 노력을 펼친다. 또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악의 타이밍에 테베에는 비가 내린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추방당하고 오이디푸스는 인간에 대한 환멸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원작을 ‘꼬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작가와 연출가의 ‘꼬인 시선’은 우리에게 신화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계기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게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한번 해석되고 읽혀진 신화를 접하기 마련인데 이런 뒤틀린 시선이 이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나.다음,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김명화의 에는 ‘그것은 인간’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영웅적 오이디푸스에서 한 인간으로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고 있음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운명 앞에 무릎 꿇어야만 하는 인간이 아닌 권력투쟁에서 희생된 한 개인의 비극인 것이다. 극의 초반에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와의 대결에서 영원한 생명과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주겠다는 스핑크스의 제안을 받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운명을 뛰어 넘고자 하는 담대한 모습과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따르던 국민들에게 등 돌려지고 권력의 힘에 조장당한 여론 앞에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를 측은하게 여길 수밖에 없어지지 않는가.또 이 공연에선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의 대결 장면이 굉장히 강한 인상을 주도록 연출되어 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이 극의 전체를 시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스핑크스는 대 놓고 오이디푸스에게 “넌 인간주제에 인간을 잘 알고 있구나” 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둔한 존재로, 끝없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 어리석음이 결국 자신까지도 파멸로 몰아가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또 결국 극은 그러한 인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모두다 파멸의 길을 걷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간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비극의 굴레에서 오이디푸스는 더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란 생각을 해본다.작품을 살펴보면 초반에는 오이디푸스와 백성들 - 크레온을 비롯한 궁중의 신하들로 대치되어져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이분법적 구조는 선과 악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후에 결국은 혼자 남게 되는 오이디푸스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개혁적이며 테베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오이디푸스는 보수적인 관료들에 의해 한순간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 폐륜아로 몰리는데 오이디푸스를 이렇게 매도되도록 도와준 것이 그를 사랑하고 따랐던 백성들이란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결국 백성들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혼자 테베의 이방인으로 남겨진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이분법적 구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나타냈다고 생각된다.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사실적인 연기가 아니라 상징적이며 표현적인 연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점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한가지라고 생각된다. 거의 모든 배역들이 관객을 향해 연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일방적이고 비소통적인 그들의 관계를 보여주고 또 한편으론 관객에게 압도감을 주기도 한다. 또, 대부분의 표현적인 연기를 도맡아 하고 있는 코러스들의 연기와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능을 한다기 보다는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된다. 젊은 당찬 오이디푸스의 곁에선 그를 더 빛나보이도록 하며 크레온의 책략에 의해 그를 비난할 땐 그의 비극성을 부각시켰다. 고대 희극에서의 코러스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다. 2,400년 전의 코러스는 분위기를 형성했을 뿐 아니라 한 무리의 관객으로서 극에 반응하였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을 이입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코러스의 역할은 거기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희곡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극작가와 연출가 배우 그리고 관객이 끊임없이 빈 공백을 채우는 것이므로 꼭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후감/창작| 2008.06.19| 5페이지| 1,000원| 조회(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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