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시대의 사회와 문화》비평- 앨버트 벨의 방법이 신약성경 읽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0. 들어가기 전에현대의 기독교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권성수 교수에 따르면 ‘감성과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21세기에는 다양한 종교들과 사상들의 마켓에서 자신이 원하는 종교와 사상을 선택하는 종교상대주의가 교회에 위협을 가할 것이다. 상대주의적인 종교관이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와 유일 구원사상을 하물고자 할 것이고, 일체의 절대를 무시하고 상대주의를 절대시하는 후현대적 성경해석이 신학과 목회를 사상들의 치열한 전쟁터로 만들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슬람교를 비롯한 힌두교, 불교, 유대교, 몰몬교 등의 확산이 기독교에 심각한 도전을 가할 것이다.’권 교수의 예언이 실감이 나는 시대다. 실제로 이슬람교의 교세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심지어는 옥스포드 대학의 연구에서 2025년에는 전 세계 이슬람교의 교세가 기독교를 뛰어넘어 기독교가 25% 이슬람교도가 30%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게다가 모든 종교는 그 방법이 다를 뿐 구원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고, 그와 달리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종교적 이기주의다 꽉 막혀있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배척당하고 있다. 종교적 다원주의·상대주의는 절대적인 무엇인가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집단, 특히 교회는 사회에 반목과 불화만을 가져오는 악한 성질을 가지는 광적인 종류라고 치부해버린다. 종교적 다원주의·상대주의는 사회 평화를 내세워 진정한 종교적 진리에는 무관심한 듯 하고 오히려 종교의 역할이란 개인적 심리의 평안만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듯 하다.이 때문에 요가나 명상과 같은 수련법이 유행하고 있고 진리나 지혜보다 신비체험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 애국적인 종교가 다시 교세를 넓혀 우리나라가 주인공이 되고 또한 모든 성인들 즉 공자, 석가, 예수님 보다 상위에 있다는 상제를 내세우는 증산도가 점점 교세를 넓혀가고 있다.더군다나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에서 잠깐 언급된 통계이긴 하지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1. 서론 - 언어와 문화의 다름과 성경의 이해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콰인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 온전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플라톤식의 이데아론을 펼치던 형이상학적 절대론자들에게 이러한 입장은 유쾌하지 않았겠지만, 콰인식의 상대주의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콰인의 예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영어권의 언어학자가 전혀 그에 대한 정보를 갖지 않고 원주민의 언어를 접했다. 원주민이 토끼가 뛰쳐나오자 ‘gavagai’라고 외친 것이다. 언어학자는 ‘gavagai’를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rabbit’?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gavagai'가 토끼의 일부분을 말한다거나, 토끼가 뛰쳐나오는 상황 그 자체를 말한다거나 말한다거나 할 수 있다. 아니면 한 시점에서 포착되는 토끼의 단면을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토끼가 등장할 때마다(콰인식으로는 토끼라는 자극이 있을 때마다) 원주민은 'gavagai'라는 똑같은 말로 자극에 대해 긍정한다. 이에 대해 언어학자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목록 가운에 한 가지를 골라서 'gavagai'의 뜻을 풀어내야 할 테지만, 정확한 번역을 해내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gavagai'의 예는 상대가 되는 언어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의 예긴 하지만, 수많은 경험과 착오 끝에 수집한 정보들로 인하여 그 언어에 대해 번역에 도움이 될만한 목록이 만들어져 있다고 해봐도 문제는 있다. 목록은 넓은 의미에서 각 언어의 어떤 동등성에 입각해 작성된다(예를 들자면 사전류의 목록). 그렇지만 그 넓은 의미들은 완전히 동일한 것들은 아니다. 우리나라말과 영어를 상호 번역할 때의 어려움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콰인은 이렇게 말한다.한 언어를 다른 언어에로 번역하는 편람들은 그 모두가 언어 성향의 총체와 양립하면서도 서로 간에 양립될 수 없는 상이한 방식들로 수립될 수 있다. 사소한 종류의 동등성조차도 서로 가리지 않는 다른 쪽 언어의 문장들을 한쪽 언어의 한 문장에 대한 각각의 것으로 번역한다 한 가지 견해는 하나님의 영이 번역자들에게 임하셔서 문화적 배경까지도 감안한 번역을 내놓게 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읽는 독자의 문화권에 따라 그것이 어떤 문화권이든 간에 성경 본문의 의미를 놓치지 않게 하나님께서 다 도와주셨다고 말하는 것이다.어떤 사실을 알고자하거나 특정한 대상을 특히 사회적 맥락에서 나올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데 있어 항상 그 언어의 차이를 감안하고 배경이 되는 지식들, 사회적 맥락들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합리적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자세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적 능력은 이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공통의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에 앞서 문화적인 인식의 틀을 사용하여 정보들을 수집·분류하기 때문에 같은 사실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지식을 얻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선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그러나 위에서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경 번역에 있어 우리에게 충분히 자비로우신 은총을 베푸셨다면, 성경에 있어서도 위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성경을 세상의 모든 지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해하라고 배워왔지 않은가? 성경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가 문화적 언어적 맥락들을 감안하고 걷어내야 드러난다거나 혹은 그러한 맥락들과 함께 읽혀져야 올바르다는 주장은 실은 꽤나 당혹스러운 것이다. 성경에 적힌 말씀의 일점일획도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보고 배웠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앨버트 벨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의 기독교인이라면 꺼림칙하게 생각할만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한 영역에 계신 분이신데 그분의 진리를 담은 성경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고 믿는 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기도와 간구, 그리고 신비로운 체험, 삶의 체험 등을 통해서라야 진정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 그리고 성경에 대해서 믿는 것이 가능한 것 아닌가.벨은 다시 말한이 참으로는 가택연금의 상태에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을 옥중이라 하여 아주 악조건만을 생각한다면 바울이 한 얘기들 대신에 바울이 처한 상황에 대한 동정이나 그 노력에 대한 존경심 등이 성경 이해의 거추장스러운 포커스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성만찬의 장면에서처럼 그 당시 그곳의 식사습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십자가의 오해에서 말한 바처럼, 십자가 형벌에서 못을 박는 곳이 참으로는 손목 쪽이었는데 손바닥이라고 잘못 생각했을 경우, 손바닥의 상처를 그리스도의 성흔이라고 생각해 미신 같은 상징을 만든다거나 하는 일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영의 개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엉뚱한 주장을 할 수도 있다.이러한 오해들을 시정하기 위해 저자는 유대교에 대한 얘기부터 로마의 통치자·법, 그리스-로마의 종교·철학·사회구조·도덕과 로마 세계에 대한 지리적 정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내용을 내놓는다. 물론 이 정보들은 개론적 성격을 띠는 것이지만, 깊은 이해를 위해 성실하게 참고 문헌들을 적어놓았다.유대교를 기독교와 전연 다른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챕터는 유용한 정보를 준다. 예수님의 시대는 유대교적 배경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구약성경이 유대민족과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유대민족과 떨어뜨릴 수 없다. 벨은 흩어진 유대인인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지역적으로 더욱 유대적인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문화적 관점에서 이야기 한다. 디아스포라는 그 지역적 개방성 때문에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기에 이교도라고까지 보일만큼의 종교 활동을 보였고,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역시 어느 정도 헬라적인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이 챕터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는 문화나 사상들, 그리고 예수님이 왜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셨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유대교가 어떻게 마찰을 일으켰는지 하는 설명이 그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아니다. 국가의식으로서의 종교는 단순했지만 민간의 종교는 복잡한 색을 보였다. 이 때의 종교는 매우 다양했다. 저자의 말로 표현하자면 “종교성이 많은” 시대였다. 이런 가운데 신비주의로 총칭되는 종교들이 기독교의 의식과 유사성이 많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며, 영을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식하게 될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렇다.이 때의 철학적 생각들은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기에, 즉 기독교적인 생각의 불완전한 체계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절대적인 본질로서의 하나님을 비유한 이론이라고 여겨 질수도 있었다. 또한 아퀴나스의 교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현대에 까지 이르는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에 있어 이 때의 철학적 결과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그런데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아마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챕터가 아닐까 싶다. 당시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 즉 동일한 문화적 토양이나 인식·승인들은 기자가 적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적힌 내용들도 그런 내용들은 빠졌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현대의 독자들이 성경을 읽는 데 오해할 여지를 많이 남긴다.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두 챕터를 마련한 것이다. 일곱 번째 챕터에서는 사회의 계급, 하루의 생활, 주거와 도시생활, 의복 등 좀 더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 다음 챕터에서는 도덕관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충격적이다. 당시의 도덕적 기반은 매우 부실했고, 종교는 성공과 실리를 위해 존재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았지만, 당시 로마 사람들은 종교는 도덕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인식했다. 살인은 스포츠 경기로 즐기게 되었고, 성적으로도 문란했다. 이는 도덕이 절대적인 권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와 자신의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