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비평의 이해-1. 비평의 개념은 무엇인가?비평은 판단하다, 식별하다, 고른다, 선택하다 등의 본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판단과 선택의 기로에 서 있고 그 행위를 끊임없이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비평은 우리의 삶과 절대 멀지 않은, 가까이에서 항상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사전에서 비평을 찾아보면 ①사물의 선악, 시비, 미추 등을 분석 논란함. ②이러쿵저러쿵 좋지 못한 소문을 퍼뜨림이라고 되어있다.비평의 한문 뜻을 풀이해 보면 批(비) 서로 다른 사물을 두고 비교하다 라는 뜻과 評(평) 언어를 사용해서 평등하고 고르게 하다라는 뜻이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즉 批評(비평)이란 언어를 사용해서 서로 다른 사물을 평등하게 비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비평이라는 말은 판단과 식별에 의한 주관적인 평가작용을 의미하며, 이 판단이나 평가작용이 문예작품이나 문학의 이론이나 기타 학문에 관한 여러 문제에 관여할 때에 문학비평이 된다. -구인환, 구창환의 [文學槪論],삼지원,p.533에서 인용2. 비평의 어원은 현재의 비평장르와 어떤 관련을 지니는가?criticism은 라틴어 criticus와 희랍어 krinein에서 기원을 둔 말로 critic에 ism을 더한 말이다. 라틴어 criticus는 ‘재판관’, ‘ 감정가’, ‘심사원’의 뜻이고, krinein은 ‘분할’, ‘구분’, ‘식별’, ‘결정’의 뜻으로 쓰인다. criticus는 비평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krinein는 비평의 속뜻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criticism은 판단과 식별에 의한 평가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런데 criticism이 위기의 뜻인 crisis와도 연결되어있다. crisis는 원래 병원 응급실에서 쓰인 말로 환자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의사는 그 중요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결정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결정적 순간은 또 전화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순간에 따라 이 환자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비평은 이 같은로 상술을 써 작품을 돈벌이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독자도 작가의 상술에 넘어가지 말고 올바른 판단력으로 냉철하게 작품에 대해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비평을 통해서만이 작품이 권위를 수립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작품에 대한 반응은 다시 작가에게 전해져 작가는 독자의 반응을 바탕으로 자기 작품의 잘못 된 점은 고치고, 좋은 점을 부각시키게 된다.즉, 창작과 비평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항시 공존적이고 상보적이고 병행 되어야만 한다. 창작은 많은 작품을 제공해주고 비평은 창작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비평은 작품을 격려, 위로하고 때론 질책도 하면서 서로 발전 할 수 있는 것이다.4. 비평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비평가는 criticism의 어원 criticus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심판관이며, 그는 어떤 문학작품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말해준다. 그러기 위해선 비평가는 작품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그리고 비평가는 문학행위에 있어서 상상력의 개발의 필요성이 있다. 다양한 상직적 비유의 형태와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문학 작품에서는 무한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비평가는 전문가로서의 를 가진 사람이다. ‘뛰어난 귀’라는 것은 ‘입’과는 다른 기능이다. 여기서 ‘입’이란 화자로서 작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와 반대인 ‘귀’는 듣는 사람, 즉 청자라고 할 수 있다. 비평가는 남들 보다 ‘뛰어난 귀’를 갖고 작가가 하는 말을 잘 귀담아 듣고 그 말 속에서 뛰어난 관찰력으로 장, 단점 등을 발견해 내야한다. 그리고 무한한 작품 속에서 뛰어난 작품을 발견 할 줄 아는 ‘눈’도 가져야한다.비평가는 작가를 대신하여 작품에 대해 분석, 설명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작품에 대한 독자의 편견을 수정해준다. 많은 독자들은 어떤 작품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 수 있는데 올바른 비평가가 독자들의 편견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다.요컨대 비평가는 작품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독자들에게 알일이 평가에 해당한다.나머지 2가지는 감상과 창작에 이바지 한다는 것이다. 비평은 문학작품을 올바르게 지각해야지만 예술작품에 올바르게 반응 할 수 있다. 이러한 올바른 감상을 통한 비평은 작품에 대한 지도적인 역할과 여러 작품을 해설 하거나 여러 가지 작품들을 유형화 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작품의 창작의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1. 해설과 비평은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해설과 비평은 서로 상통하기도 하고 구별되기도 한다.해설은 자연현상과의 인과간계를 해석하고 분석한다. 이 자연현상들은 큰 의미와 핵심 되는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 사물과 사물, 현상과 현상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나 하는 인과관계를 따지고 분석한다. 자연현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유지되고 또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변화되어 가는가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해설은 인간의 삶에 지식을 부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일깨움을 주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치판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선과 악, 대와 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진실과 거짓 등을 구분하고 판단을 할 수 있다.비평은 해설이 좀 더 발전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고급화되고 세련된 해설은 그 자체가 비평이지만 대부분의 해설은 지식을 기본적으로 설명하는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그러나 비평은 작품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의미, 감수성에 대한 탐구, 질서의식의 평가 등 비평가의 견해가 부과되어 있어 비평가 나름대로의 인식을 보여 준다.그러므로 해설과 비평은 비슷하지만 해설이 조금 더 발전된 것이 비평이라 할 수 있다.2. 살롱비평이라는 말의 뜻과 역사성우선 살롱의 뜻을 살펴보면 살롱(SALON)이란 17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사교적 회합장소이다. 우리나라의 사랑방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사랑방은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함께 이야기도 했던 곳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살롱은 양적인생각한다.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혼신의 노력과 고뇌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하나의 작품에는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작가의 정신과 혼이 깃들어 있다. 작품은 작가의 자식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하나하나의 작품에 그 작가의 혼과 더불어 지식과 느낌 온갖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있다. 또 작가가 다르듯이 작품도 그 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각각 다른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사랑에 대해 노래하기도 하고 정치적이고 계몽적인 것도 있고, 현실의 아픔을 여실이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러므로 이 다양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기 때문에 작품은 ‘하나의 소우주’ 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4. 비평가를 구도자에 비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사전적 의미로 구도자(求道者)는 도를 구하는 사람과, 불교에서 부처가 될 도를 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비평가는 선택의 이유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문학에 대하여 그것의 가치, 진실성, 정당성, 미적 가치, 기교 등에 대하여 합리적 의견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 선택의 이유를 이론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는 구도자가 도를 구하는 것과 같이 비평가는 문학의 도를 구한다. 비평가는 작품의 올바른 평가를 통해서 문학의 발전을 이룩하는데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한다.따라서 비평가는 비평함에 있어서 자기 확신, 창조적 의지, 구체적 발언, 작가가 잘못 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는 방향의 조정, 올바른 당파성 등 목적의식을 가져야겠다. 비평가는 ‘비평’이라는 것을 통해서 한 사람의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사로운 것에 흔들리거나 자신의 너무 주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겠다.그 예로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지은 라는 책을 보면 그림을 잘 그리는 젊은 여류 화가가 한 비평가에게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 합니다”라고 말하자 화가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의 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참 안타깝다.이러한 현실일수록 비평가의 역할은 더 중요시 되어야 한다고 본다. 비평가들이 작품을 비평함으로써 작가의 잘못된 곳을 바로 잡아주고 작품의 질을 향상시켜 문학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겠다.얼마 전 이러한 현실을 바로 잡고자 이 모처럼 문학 특집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라는 제목을 내 걸고 여러 작가와 비평가들이 모여 책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과는 반대로 책의 결론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작가들과 비평가 모두 앞으로의 문단 현실을 암울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미약하지만 계속 현 문단에 대해 질책한다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작품의 질도 높아질 것이고 비평가의 위상도 다시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 비평과 역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비평과 역사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를 모르고 비평을 할 수 없고, 비평 의식이 있어야 제대로 된 역사를 이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와 비평은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우선 역사와 비평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다. 니체는 역사는 ‘사물의 처음을 찾는 것으로 사람은 그 다음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사물의 처음이란 과거를 뜻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현재와 미래를 의미한다.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지만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우울한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라고 괴테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역사공부를 통해서 일제 식민지와 같은 우울한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또한 어려운 일에 처하더라도 과거에 이와 유사한 상황을 보고 연구하면서 좀 더 쉽게 위기를 벗어 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대단히 지탄 받을 일이다. 과거 사람들은 역사를 거울이라고 했다.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서 오늘날을 읽어냈기 때
남자들과 손잡고 함께 걸어가는 그날을 위해...이 책을 읽기 전에 제목의 뜻이 궁금해서 알아보았더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말은 불교 최초의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 뜻은 무소의 뿔이 서로 교차되지 못하듯이 모든 애욕과 욕망을 끊어 버리고 홀로 진리를 추구하라는 거다. 작가 공지영은 ‘왜 이러한 제목을 썼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서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은 ‘우울함’이었다. 그냥 세 여자의 삶이 기구하게만 느껴지고 이 사회에서 여자가 살아가기에 얼마나 힘이 드는가라고 느꼈다. 그리고 나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체제’와 사람들의 ‘잘못된 의식’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이 사회 속에 그냥 순응하며 살아가는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 중의 한명인 나도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좌절하면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 해 보았다.소설의 첫 장면은 전화벨이 어둠 속에서 울리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 전화의 내용은 친구 영선이 자살을 시도 했다는 끔찍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 혜완과 이해 타산적이고 진취적인 여자 경혜, 그리고 늘 침착하고 여자다운 성격의 영선 이렇게 각기 다른 성격의 세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소설 곳곳에서 전통적 굴레와 남성들의 이기심, 사회적 억압을 보았고, 여자들 스스로 이런 사회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과 그 사회에 동화되고 싶어 하는 묘한 감정이 교차되는 보습을 보았다.세 여자는 스무살 시절 학교 숲 뒤에서 시집을 끼고 앉아서 “제발 우리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하소서.”라고 빈다. 하지만 십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 제발 무슨 일이든 아주 작은 거라도 일어나지 말아주소서.”라고 빌고 있다. 무엇이 그녀들을 이렇게 바뀌게 했을까? 여러 가지 이먼저 남성의 이기심을 들 수 있다. 혜완은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남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바깥 생활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혜완을 여자라는 이유로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하고 혜완은 끝까지 직장을 다니겠다는 싸움 속에서 결국 혜완의 아이가 죽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였다. 꼭 혜완이 그때 손을 놓지 않았더라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사고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탓을 하며, 그녀 또한 자신을 비난한다. 이 얼마나 불공평 한 일인가! 같은 대학을 다니고, 같이 공부하고 토론해 온 남, 녀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여자보고 너는 여자이니까 집에서 애나 돌보라고 한다. 그리고 정 직장을 다니고 싶다면 아이를 다 키운 후에 직장에 다니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여자는 애나 돌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공부 해온 것은 아니다. 여자도 자신의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 하지만 그 꿈과 목표가 남자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은 화가 나지 않는 일일 수 없다. 그리고 애는 왜 꼭 여자만 키워야 된단 말인가? 물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여자의 역할임을 부정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아이를 만든 것도 남자와 여자였고, 그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해야만 한다. 혜완은 이혼을 하고 나서 택시를 타면 언제나 자신 있게 행선지를 말하고, 남편이 싫어해서 잘 먹지 않았던 육개장을 질리도록 먹는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 까지 되도 않는 남자들의 이기심과 우월감으로 인해 여성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영선의 경우를 보더라도 남편을 위해 자신의 학업까지 포기하고 열심히 학비를 대주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아니, 영선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고 남편의 학비를 대준 것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학업을 쉬는 한이 있더라도 같이 돈을 벌어서 같이 학업을 계속 했어야만 했었다. 그게 올바른 길이었 하지만 영선은 그렇지 않았다. 애를 낳고 키우고 그리고 점점 빠른 세상에 발 맞추지 못하고 뒤떨어져만 갔다. 그리고 남편은 그런 그녀에게 “책도 좀 읽고 그래. 난 여편네들 집에서 늘어져서 긴장 풀어진 눈으로 앉아 있는거 제일 혐오스러워.”라고 하며 다른 똑똑하고 꿋꿋하게 자기의 일을 하는 여성과 비교면서 그녀를 혐오한다. 남편이 성공하기까지의 그녀의 노고는 남편의 무관심과 성공의 뒷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남자들의 이기심은 영선을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몰아간 것이다. 나는 영선이 자살을 시도할 만큼의 용기가 있었다면, 남편과 과감히 헤어지고 자아를 찾았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전에 영선이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것만큼 박감독도 영선을 사랑으로 바로 이끌어 주었어야 했다. 박감독은 자신의 성공에만 전념한 나머지 영선의 희생을 방관했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집착하는 그녀를 부끄러워 했다. 이러한 모습은,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으리라 던 영선에게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혐오감을 준 것에 대해 참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영선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탈출구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남자들의 이기심에 있었다고 봐야된다. 또, 경혜의 남편이 그러했고, 영선의 남편이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은 끊임없이 여자들을 기만하며 이기적으로 여성들의 순종만은 강요하고 있다. 그 예로 혜완의 동료인 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는 부인이 있으면서도 자기 사무실에 있는 젊은 여자와 사귄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부일처제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젊은 여자 친구에게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서 부인도 아닌, 쉽게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첩과 같은 존재로, 아니 그 보다 더 못한 남에게는 알려져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신의 곁에 남아주길 바란다. 이것이 얼마나 이 여자에게는 불행한 일인가!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자신만을 충족하기 위해 여자의 희생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딸들에게 자신과 다른 삶을 살라고 가르쳤고, 아들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굴레를 들 수 있다. 솔직히 위의 말대로 가르치고 그 말대로 된다면 그것은 모순일 것이다. 위의 말이 동시에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다른 모습을 살려고 노력하고, 남자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남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여성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며, 사회적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결과 혜완과 같이 이혼을 하는 부부들이 늘어 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혜완의 어머니 역시 딸만 셋을 낳고 혹시나 시어머니에게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시어머니는 당당히 아들이 밖에 나가 손자라도 낳아 데려오기를 바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런 혜완의 어머니 역시 큰 딸이 딸만 둘을 낳자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 임신중절 수술을 강요한다. 같은 여자로서 여성의 권리를 회복시키기 보려는 생각보다 남성의 권력을 더욱 부추기기만 하는 이런 일이 단지 무지한 어머니들의 탓은 아닐 것이다. 이런 남성주위에서 배운, 잘못된 전통적 굴레가 만들어 낸 모순적인 사고인 것이다. 도대체 아들이 뭐길래,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 길래 여자가 자기와 성이같은 딸을 낳고서 그렇게 죄스러워 해야된단 말인가. 여성의 자궁이 없었다면 그 잘난 아들은 어디에서 얻는 단 말인가. 남자 혼자서는 그 잘난 아들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봐도 자식의 성을 결정짓는 것은 남성의 정자이지 여성의 난자가 아니다. 남성의 성염색체의해서 자식이 아들일지 딸일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들이 태어나지 못한 것은 남자의 잘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만이 구박을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아왔다.세 번째로는 잘못된 사회 체제와 여성에 대한 사회 억압을 볼 수 있다. 혜완이 영선에게 “영선아, 애들 키우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가진 아줌마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미혼여성이 결혼을 한다는 말만 나오면 회사를 관두라고 강요하는 판에, 아이를 가진 기혼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적은 것이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아이들 낳는 다고 해서 여성의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전 보다 해야 할 역할이 많아서 약간은 힘이 들 수도 있다. 아니, 전보다 해야 할 역할이 많아 진 것은 비단, 여자 뿐 만이 아닐 것이다. 남자도 그냥 회사원의 역할만 하다가 결혼을 하면 한 여자의 남편, 한 아이의 아빠, 회사의 일원으로 역할이 많아진다. 하지만, 역할에 따른 일은 그 만큼 많아지지 않는다. 여자만이 역할도 많아지고, 그에 따른 일도 많아 지는 것이다. 이런 불공정함 속에서 또 여성들은 직장에서 쫒겨나는 불공정함까지 받아야 한다. 빨리 이런 잘못된 사회 체제는 없어져야 겠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사회 체제는 경혜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때 면접에서 떨어진 그녀는, 영어학원이 아닌 헬스클럽에 다닌다. 그녀는 이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능력만이 아니라 부와 명예와 조건이 필요 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돈많은 의사남편과 결혼해서 불행한 삶을 산다. 경혜는 모순된 사회 풍조 속에서 희생당한 불쌍한 여자인 것이다. 한때는 세 여자 중에서 가장 이쁘고 성공한 여자였지만 남편의 외도로 인해 행복하기를 포기한 채 그리고 자신을 포기한 태 살아가는 불쌍한 여자가 되어버린다. 또, 이런 잘못된 사회 체제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남성마저도 변화 시키고 만다. 그 예로 황선배를 들 수 있다. 혜완이 학교를 다닐 때 그토록 존경을 했던 황선배는 사회의 부조리함과 모순된 사회 풍조 속에서 옛날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그 모순된 사회풍조에 부응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개인이 아무리 바른 길을 가려고 해도 그 사회가 그를 따라 주지 않는 다면 힘없는 개인은 그 사회에 동화되어버다.
‘우리들의 천국’이 되는 날까지쾨쾨한 종이 냄새, 누런 종이, 작고 빽빽한 글씨와 두꺼운 책 분량이 나를 짓눌러 왔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독후감을 써나가야 할 압박이 나를 더욱 뭉그러지게 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다음은 배 한 척 떠다니지 않는 망망대해에 빠져 갑판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떠 있는 심정이었고 복잡하게 엉키고 꼬인 커다란 실뭉치를 풀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책을 읽기 전에 느낀 막막함과는 필경 다른 것이었다. 이 책은 분명 나에게 뭔가 감동을 안겨 주었는데, 지금 나 자신은 그 가슴속에 젖어든 무언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인물들에 의해 다각적으로 관찰, 분석하여 종합적인 주제로 요약되어 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조백헌이라는 인물이 소록도의 병원장으로 취임하여 그곳의 나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켜 그들의 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궁금증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해 작가는 모든 것을 너무나 세심하게, 그리고 열심히 설명해준다. 때로는 몇 장씩 이어지기도 하는 등장인물의 설교조의 이야기가 지루할 때도 있다. 담고 있는 주제도 다소 무겁다. 하지만 글은 잘 읽힌다. 그건 소록도라는 한 작은 섬의 이야기가 우리가 사는 모습을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서로 불신하고 믿지 못하는 모습이.......이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우선 중심적인 인물들에 대해서 말해야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이문들에 의해 다각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우선, 이 글의 표면적 주인공 격인 조백헌 이라는 인물은 살펴보면 기본적으로는 우직한 성격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책장이 넘어 갈 때 마다 조금씩 변하고 있다. 나쁘게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한다고 하는 게 맞는 것이겠다. (사실 인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했든 안 했든 간에 그는 딱딱하고 거부감을 느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바뀌어 5년이 지난 후 그는 제복을 벗고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닌 평민으로서 섬에 돌아온 것이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신문기자 이정태가 오랜만에 그를 보고 ‘정태는 한 가지 새삼스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백헌 원장은 원래 성격이 그리 유쾌한 위인은 아니었다. 유쾌하다긴 보다는 무뚝뚝한 편이었고, 호탕하기 보다는 우직스러운 쪽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이정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유쾌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호탕해 지고 있었다.’ 이러한 말은 그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황 장로와 이상욱에 의해서 다듬어 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황 장로는 원장을 격려하면서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고, 이상욱은 처음부터 원장을 불신하며 감시와 비판을 의미를 각각 조백헌에게 알려준다. 조백헌이라는 사람 옆에 이렇게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조백헌은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고 끝까지 그의 신념을 지켜 왔을 지도 모르겠다.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조백헌의 포부는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된다. 원생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듣는 건의함 설치, 섬 운영의 결정권을 행사할 환자들의 장로회 조직, 병에 감염되지 않은 환자의 자식들과 병원 직원 아이들의 공학 단행, 환자들만의 축구팀 구성과 각종 대회 출전,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간척공사…. 비록 처음에는 건의함도 텅 비고 원장이 자신의 포부를 한껏 연설 할 때에도 원생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직한 성격의 원장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인내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결국 사람들에게 희망을 싹트게 했다. 이건 이 글과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조백헌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 떠올랐다. 대통령이 탄핵이 되고 얼마전 국회의원이 새로 선출되고 국회의원들이 서로 뜯고 싸우는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우린 지금 말로만 국민들을 위하네 마네 하는 리더를 원하는 이다. 그는 마을에 대표격으로 온갖 경험을 겪고 소록도에 들어온 사람이다. 나는 이 인물에 대해 별로 큰 비중을 두진 않는다. 물론 조백헌이 힘들어 하거나 흔들릴 때 마다 옆에서 격려하고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인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의 뜸들이고 빙 둘러서 말하는 방식 하며 왠지 사람들을 선동하여 자기 마음대로 부린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노인이 조백헌과 이야기를 나누면 우는 장면은 가슴이 찡해 왔지만 아무튼 썩 마음에 들지않는 인물이다.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조 원장의 포부와 실천을 처음부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마지막으로 이상욱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야 되는데 사실 나는 조백헌보다 이 사랑의 행동에 처음부터 더욱 관심을 두고 있었다. 처음 조백헌이 부임해 오던 날 원생 2명이 탈출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원장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 했으나 이상욱만은 ‘하지만 보건과장 반대했다. 탈출사고는 원장이 새로 부임해 올 때마다 환자들 가운데서 잊지 않도록 꼭꼭 마련해 바치는 첫 부임 선물이었다. 흐지부지 뭉개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첫 번 부임선물을 대하는 원장의 반응이 보고 싶었다.’ 라는 대목에서 그는 약간은 심술궂고 장난끼 있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그는 나의 첫인상과는 달리 아주 과묵하고 장난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원장을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조 원장의 포부와 실천을 처음부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조 원장이 행동의 인간이라면 이상욱은 관념의 인간이다. 조 원장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현실적 능력과 기반을 지니고 있다면 이상욱이 자신을 구현하는 방법은 부단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서다. 그는 대체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작품 초기에 그에 대한 과거의 궁금증은 글의 중간쯤 되면서 알게 된다.(작가는 궁금증을 남겨두지 않고 소상히 설명해준다.) 그런 그의 출생은 그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내가 생각 하기로사람(조백헌)만은 동상을 만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원장이 섬 사람들의 위해 구체적 의견의 제시하자 조백헌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극단적으로 돌뿌리 해변가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그는 환자도 아니고 섬 밖을 나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떳떳하게 나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솔직히 지금도 이해가 확실이 되진 않는다. 이 섬의 사람들의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이 소설 처음에도 나오지만 섬 사람들은 배를 타고 떳떳이 섬 밖을 나가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감행하고 이 돌뿌리 해변가를 통해서 나가야만 그들은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된다는 말인가? 나로서는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욱이라는 사람은 조백헌을 믿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책 곳곳에 ‘저는 원장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과 소록도를 떠난 5년 뒤 조백헌 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다시 섬에 돌아 오게 한 것. 그리고 마지막에 조백헌이 결혼식 주례 연습을 할 때 몰래 숨어서 엿들을 때 ‘긴장을 하고 있던 상욱이 얼굴 위에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한 가닥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태는 아직도 상욱의 웃음의 뜻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조 원장의 그 너무도 직선적이고 순정적인 생각에 다소의 감동을 받고 있는 듯싶기도 했고, 어찌 보면 그 조원장에게 오히려 어떤 연민어린 그의 비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라는 구절을 볼 때 나는 이상욱의 웃음의 의미는 후자가 아닌 전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마음 깊은 속에서 그 옛날의 동상의 악몽을 깨어버릴 누군가를 믿고 싶었던 것이다.이러한 글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글에서 이상욱이 그토록 말하는 동상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황노인이 말했듯 우리는 누구나 각자 나름의 동상을 갖고 살아간다. 나도 물론 나 나름의 동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 동상이 바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맘 깊은 곳에 각자 자기거든. ...임자의 방법이라는 게 어떤 것이었는지 아나? ...... 임자만이 유독 그 동상이란 걸 남의 손으로 지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남들이 스스로 임자의 동상을 지니게 된 게란 말야. ....’ 여기서 작가는 동상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방법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방법이 잘못된 동상은 결국 주정수의 동상처럼 사람들에게 아픈 배반의 상처만 남겨주게 될 것이다. 명분의 허위 뒤에 숨어 있는 동상,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이러한 동상을 조심하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그리고 내가 책을 읽기 전에 의문을 가진 것이 ‘당신들의 천국’ 이라는 책 제목 이었다. 왜 ‘우리들이’ 아닌 ‘당신들’ 일까? 대게 제목은 작가의 중심생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책은 제목만 봐도 글의 반은 이해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럼 이런 제목을 통해서 작가는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것도 글의 결론 부분에 제시되는 다소 장황한 글을 꼼꼼히 읽어보면 복잡한 듯 하면서도 수긍이 간다. 여기서 '당신들'에 대치되는 1인칭 주체는 '나환자들'이며 나환자들의 입장에서 '당신들의 천국'이란 원장들의 천국 즉, 지배자들의 천국을 가리킨다. 환자를 환자답게 만들어 그 천국의 울타리 안에 안주시키는 것은 원장들의 관점에서의 천국이지 환자 들 자신이 선택한, 그들의 천국은 아닌 것이다. ‘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 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은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원장님 께서는 저들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학 할 수 있는 문둔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약간은 섬찟한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불쌍한 사람이나 장애인을 인식해 오면서 정작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서 그들을 가엾게 여긴 것은 아닌가? 나도 그들의 천국이 아닌 나만의 천국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