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저자 ‘한스 큉’의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띄었다. 그는 가톨릭교의 신자이자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비평가이다. 이 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가톨릭교내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놀라움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처음은 조금 어려운 감이 있었다. 종교인이 아닌 내가 읽기에는 처음 듣는 단어들이 굉장히 많았고 그 때문에 나는 모르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읽어야 했다. 특히 베드로와 시몬(Simon)이 동일 인물임을 모르고 읽었다가 다시 읽었던 적도 있었다. 그 점에서 책이 조금만 더 비종교인들을 위해 설명을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그 어려움은 해결이 되었고 점점 내가 몰랐던 ‘가톨릭’이라는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또한 읽는 동안 ‘기독교의 이해’ 시간에 들었던 내용들이 나와서 책을 읽는 흥미를 더해 주기도 했다. Chapter 1 에 나오는 내용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예수는 가톨릭 신자였을가?’ 라는 내용은 정말 평소 갖고 있던 나의 의문과 호기심들을 채워주었다. 또한 이 책은 ‘박해받는 기독교’에서 ‘박해하는 기독교’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가톨릭교 신자로써 이런 점을 밝히고 반성을 촉구하는 태도는 정말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보통 어두운 면은 감추기 마련인데 이런 것들을 밖으로 끌어내서 말하고 반성할 수 있는 용기에 저자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기독교의 이해’ 시간에 들었던 여성신자들에 대한 내용 역시 나왔다. 여성들은 초기 가톨릭교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부제와 같은 직책에 임명되는 일도 흔한 일이였지만 점차 배제되었다. 저자 ‘한스 큉’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여성들이 배제되는 것을 ‘여성들에 대한 비성경적 적대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잘못된 것임을 나타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 ‘한스 큉’이 가장 비판한 내용은 교황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황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위조문서’를 만드는 등 여러 비도덕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한스 큉’은 이러한 면을 숨기지 않고 문제점을 제기한다. 교황들이 절대적 권력을 얻기 위해 한 행동들은 나에게 ‘종교계에서도 이러한 어두운 면이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책을 읽다보니 저자 ‘한스 큉’이 이러한 면들을 책에서 제시하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이런 ‘어두운 면’을 숨기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 물론 청렴한 종교인으로써 이러한 면들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스 큉’은 이러한 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가톨릭 내의 성찰과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 역시 가톨릭의 사제로써 가톨릭의 발전을 위해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스 큉’은 여러 분파로 분열된 가톨릭이 하나됨을 소망했다. ‘정교회’, ‘가톨릭’, ‘복음주의’의 근본 태도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하며 교회일치가 미래에 실현되기를 바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톨릭’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내가 조금은 ‘가톨릭’이 무언인지를 알게 된 것 같다. 이 책 ‘가톨릭 교회’는 나와 같이 종교에 지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성찰과 미래를 위한 준비를 촉구하는 정말 여러 역할을 하는 책인 것 같다. 이렇게 얇은 책에 이런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저자 ‘한스 큉’의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었고 정말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한번 읽으라고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과 질병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점을 증명하듯 수많은 매체에서 질병에 관한 이야기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현대인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질병은 흔한 대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질병 그 자체는 ‘걸리면 안 되는 것’, ‘무서운 것’ 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흔히 ‘웰빙시대’ 라고 부르는 건강에 관심을 갖고 몸에 좋은 것만 먹는 그리고 건강을 위해 생활 속에서 운동을 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이 두 왕국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왕국 중 한 곳에서만 머물 수 없다. 즉, 누구든 한번쯤은 질병의 왕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질병들 그 중 특히 ‘결핵과 암, 그리고 에이즈’에 관한 은유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수잔 손택’은 1933년 1월 28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평론모음집「해석에 반대한다」를 통해 저자는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그녀는 60년대 미국에 상륙한 실존주의 철학을 이끌었던 철학자이자 소설가, 사진을 포함한 예술 평론 활동을 한 문화 평론가, 그리고 무엇보다 21세기에 일어난 무수한 전쟁의 "축"이었던 미국 땅에서 진보적 비평자의 역할을 해왔다. 이런 저자가 이 책 ‘은유로서의 질병’을 쓰게 된 계기는 자신의 경험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본인의 암 투병, 친구들의 에이즈로 인한 죽음 등이 그녀가 이 책을 집필하게 만든 것이다. 그 중 저자의 아버지는 ‘결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사실을 어머니는 계속해서 숨겼다. 그 이유는 바로 ‘결핵’에 관한 은유, 즉 결핵이 ‘수치스럽다’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과 어머니의 암 투병, 그리고 본인 역시 암으로에 대한 은유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무의식 속에 박혀있는 질병에 대한 은유 그리고 상징적 이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이때까지 얼마나 많은 은유들을 일상 속에서 써왔는지 그리고 간과해왔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질병을 치료해야 할 그 무엇 즉 ‘질병 자체’로만 보지 않고 여러 은유와 이미지들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런 은유와 이미지를 그 질병을 가진 환자들에게 적용시켜 그 환자 역시 그 은유와 이미지로 평가되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그녀는 책 속에서 ‘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240p) 라고 말하면서 은유와 이미지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주기도 한다.1부에서는 많은 질병들 중 ‘결핵과 암’에 관한 과거 사람들이 가졌던 은유에 대해 말한다. 1부의 앞부분에서 그녀는 ‘결핵과 암에 관한 은유’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말하는데, “악성 질병에 (그토록 빨리)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환자들이라도 ‘암’ 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곧 죽을지 모른다.” 라는 말을 인용하여 은유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전에는 ‘결핵’이 그리고 현재는 ‘암’이 사람들에게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죽음의 연상은 환자들의 재활의지를 꺾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은유의 영향력을 보여준 뒤 그녀는 역사에 걸친 ‘결핵과 암’에 관한 은유와 이미지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한다. 1932년 경,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폐결핵’은 한때 ‘소모’와 동의어로 쓰였고 근대 이전에는 ‘암’이 ‘천천히 몰래 잠식하고, 좀먹으며, 부패시키거나 소모시키는 모든 것’ 으로 나와 있어 ‘소모’라는 단어가 ‘암’과 비유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결핵’이 시간의 질병이라고 여겨지며 ‘질주’를 뜻한 것과는 달리 ‘암’은 단계적으로 진행 되며 ‘종말’을 뜻했다. 또한 결핵은 빈곤이나 결핍는 흔히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신체 부위(결장, 방광, 직장 등)였다. 이 외에도 18세기 중반부터 결핵에 걸린다는 것이 낭만적이라는 관념이 퍼지기도 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결핵환자와 같은 외모를 동경하였고 결핵환자와 같은 외모는 귀족적인 용모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그러자 결핵 환자의 얼굴은 고귀한 혈통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점점 결핵이 ‘낭만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며 사람들은 실제의 고통은 은폐한 체 서로 결핵에 걸리려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물론 환자 본인이 이 병에 걸린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과거에 결핵은 죽음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핵 환자와 같은 외모가 유행하면서부터 현재와 같이 마른 체형이 여성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용모가 되어갔다. 이런 결핵의 영향이 오늘날의 ‘다이어트’ 열풍에 한 몫을 한 것이다. 또한 결핵은 ‘감수성이 예민한’, ‘창조적인’ 이라는 상투어들과 결합하기도 했다. 그래서 보통 결핵은 ‘시인’과 같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질병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 ‘질병’은 보통 ‘아픔’과 연관되어서 어떻게 ‘낭만적’이라는 그리고 긍정적인 느낌을 갖는 은유와 결합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허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런 질병의 ‘낭만화’는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을동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의 외치다’ 와 같이 여주인공들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의 불치병으로 인한 죽음은 사랑을 더 낭만적이고 애틋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사용된다. 또한 불치병에 걸린 ‘연약한’ 여주인공들은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여주인공들이 ‘매력적’이라고 느끼게끔 한다. 이렇듯 과거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생활 속에서 질병에 관한 은유를 무의식적으로 생활 속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현재 사람들이 무심코 쓰는 말들에도 ‘질병에 관한 은유’ 들이 묻어나오는 경우가 많다했다. 이렇듯 질병과 잘못에 대한 인과 관계가 자리 잡은 후 19세기에는 환자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는 질병에 걸린다는 관념이 들어서게 된다. ‘칸트’는 지나친 흥분 상태를 비유적으로 지칭할 때 ‘암’을 사용했으며 또한 암환자들이 과도한 활동과 긴장 때문에 암에 걸렸다고 생각되어 이런 성격들을 고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한 때 도시는 그 자체가 암으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이는 도시의 비정상적, 부자연스러움, 사치스러움 그리고 파멸 등의 은유가 암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암은 우리 몸속에서 소리 없이 자리를 잡고 점점 세력을 키워가서 결국은 숙주를 장악하는 그런 병이었고 그런 암은 야비하며 고칠 수 없는 ‘불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질병에 관한 은유는 정치와 관련해서 쓰이기도 하였다. 질병의 은유는 합리적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요구를 강화하는데 사용된다고 나오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예로는 우리가 잘 아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들 수 있다. 나치는 여러 피가 섞인 ‘인종적’ 혈통을 지닌 사람은 매독 환자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유럽의 유태인들은 제거 되어야 하는 매독이나 암에 비유되었다. 또한 히틀러는 그의 팜플렛에 유대인들이 “국민들 사이에 인종적 폐결핵을 낳는다” 고 비난했다. 여기서 결핵의 이미지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암의 이미지와 연결 된다. 이렇듯 질병에 관한 은유는 부당한 일에 정당한 이유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적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경우에도 ‘은유’를 사용했는데, 그 예로는 아랍 분쟁에서 사용되는 ‘아랍 세계의 한가운데에 있는 암’ 또는 ‘중동의 암’ 등이 있다. ‘암’이 질병 그 자체가 아닌 적이자 악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앞에서 나온 ‘질병에 관한 은유’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문학 작품들을 들었는데, 그러한 부분들은 그녀의 풍부한 배경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질병에 관한 다양한 은유’ 들에 맞는 문학작품을 하나하나 찾았을 그녀의 노력이 이 을 썼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풍부한 문학 작품과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은 우리의 지식을 쌓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이점 역시 가지고 있다.이 책의 2부에서는 주로 ‘에이즈에 관한 은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2부는 1부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1부는 질병 전체 중 특히 ‘결핵과 암’에 대해서 2부는 ‘에이즈’에 대해서 라는 차이만 있을 뿐 1,2부의 본질적인 내용은 같다. 암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왜 하필 나야?” 라는 질문을 하지만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에이즈에 걸렸는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에이즈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병이 아니며, 환자들의 정체성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즈에 걸렸다고 하면 과다한 성교, 그리고 변태적인 성 관계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부도덕적인 행위로 인해 걸린 에이즈는 그런 생활에 대한 당연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이즈의 원인은 난잡한 성 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염된 주사 바늘, 수혈 혹은 유전으로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 역시 상당수 이지만 사람들은 ‘에이즈에 관한 은유’ 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에이즈를 비도덕적인 사람들에 대한 처벌로써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낙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 즉 특정 집단(동성애 집단과 같은) 에 속하지 않은 에이즈 환자들을 오히려 잠재적으로 더 큰 위험 요소를 지닌 바이러스 보균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미국에서 에이즈가 등장했던 초기에는 ‘동성애자’들에게 병에 대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차별적인 학대를 가했다. 지금도 다수의 사람들이 에이즈의 원인이 동성 간의 성 접촉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국내의 경우 에이즈 감염자의 36.4% 만이 동성 간 성 접촉으로 인한 감염자라고 한다.(대한에이즈협회 참고) 즉, 이런 생각 역시 ‘에이즈에 관한 은유’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또한 글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