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권 선의 이데아와 이상국가플라톤 7권에서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선의 이데아론을 바탕으로 한 소크라테스의 세계관이 나타났고, 이상국가의 통치자를 길러내기 위해 교육시켜야 할 과목 및 행동지침을 제시하였다. 먼저 동굴의 비유에서는 커다란 동굴 속에 죄수들이 오직 동굴의 안쪽 벽만을 볼 수 있도록 묶여있고 동굴 밖에는 태양이 비치는 등 참된 실재를 나타내는 것들이 있다고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족쇄를 풀고 밖으로 나와서 참된 세계의 실재, 즉 이데아를 보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온 것이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동굴 밖에서 본 참된 실재가 과연 절대적인 진리, 이데아가 될 수 있냐는 점이다. 참된 실재라고 믿었던 진리도 알고보면 동굴 안 사물의 그림자(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다. 천동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천동설 또한 오랜 시간동안 이데아처럼 절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과학이 발달하면서 천동설은 거짓이란 게 밝혀지고 정반대 학설인 지동설이 옳은 것으로 규정되었다. 물론 주변에서 보면 이렇게 뒤집어진 사례는 오래전부터해서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을 수도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주로 자연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윤리적인 쪽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으려 했다고 하면서 천동설과 지동설의 예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신분제도에 대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노예제도와 같은 것은 당연하다고 믿어졌고 거기에 대한 윤리적 가책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나라가 노예제도를 비롯 신분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법적으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볼 때 섣불리 절대 진리, 즉 선의 이데아를 판정 지으려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그렇지만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속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점도 여러 있다. 먼저 그가 찾으려는 진리가 무조건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 근접한 진리를 추구하고 거기에 대해 탐구하려는 태도이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에는 소피스트들의 궤변 등 여러 부도덕적인 정치가들의 선동으로 인해 나라가 매우 불안정했었다. 이렇게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 조차 불확실하고 혼란만 난무한 상황에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정의를 추구하려 했다는 점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리고 동굴의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깥세상에 나가서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계속 그곳에 머무르면서 혼자 고결한 명상만을 추구할게 아니라 다시 동굴로 들어와서 동료들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 점 또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좀전에 언급한 구절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교육관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생각의 연장이 철인 통치자의 역할로 이어진 것이다. 즉 진리를 깨달은 상태에서 자기만 만족할게 아니라 아직 그렇지 못한 자에게도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제6권 철학자와 통치자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당시 시대배경을 알아야 한다. 당시 시기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매우 불안정한 때였다. 선동정치가들과 소피스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지, 정의로운지가 불확실한 시대, 즉 어느 하나 가치 확립이 뚜렷하지 않은 시대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치중하였고, 플라톤이 이 관점을 이어받아 절대적인 기준의 제시와 증명을 시도하려했던 것이었다.[국가]6권에서도 앞에서 말한 내용을 중심으로 주장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언급된 것이 통치자의 자질과 선의 이데아였다. 먼저 통치자의 자질로 여러 요건이 요구되어 있는데 먼저 미와 정의와 선에 대한 이 세상의 법을 제정하고 기존의 법을 보존할 능력, 사물의 실재를 인식할 줄 알고 경험이 있는 자, 그리고 기억력과 이해력이 좋고 진실을 사랑하는 등 철학자적 천성을 가질 수 있는 자를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는 소피스트들의 진실을 왜곡하는 궤변으로 가치관의 혼란만 가중시켰었다. 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그들을 힘센 짐승을 기를 때와 비교할 수 있는데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제대로 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짐승이 좋아하면 선이고 싫어하면 악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어느 것이 선인지 악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기호를 선으로 가르친 것이었다. 당연히 대중들은 일단 솔깃한 기호에 이끌려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주체적이지 못한 행동에 대해서 경계를 하였고 그리하여 선주와 선원 그리고 조타술의 이야기를 들며 철학자적 천성을 가진 통치자에 의한 통치를 내새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철학자들이란 진리를 계속 추구하려 하고 사물의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본질을 통해서 사물을 파악하므로 소피스트, 대중들이 하는 말에 쉽게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줏대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통치를 해야 나라의 통치가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요구하는 통치자의 자질은 옳다.그리고 선의 이데아에 대한 [국가]에서의 주장은 일부는 맞지만 어느 정도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선 이데아에는 논리적인 면, 인식론적인 면, 존재론적인 면, 목적론적인 면 이렇게 크게 4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여러 이데아중의 가장 최고가 선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하는데 태양이 그 자체 생성이 아니면서도 모든 사물을 보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의 이데아도 그 자체 본질은 아니면서 모든 존재의 근거 또는 가치의 궁극적 표준이 된다 하였다. 이런 선의 이데아는 앞에서 말했던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흔들리지 않도록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선의 이데아에는 ‘이성중심’의 철학에만 치중하려 했다는 한계점이 있다. 모든 것을 ‘합리’에 넣으려 하다보니 인간의 감성적, 생물학적 측면이라는 부분과 ‘비합리적인 인간’이 무시되기 쉽다. 이러한 철학적 특성은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이성의 절대성만 주장할 게 아니라 이성 이외의 타자들도 부각 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런 주장이 상대주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질 때 코를 만질 때와 다리를 만진다고 할 때, 분명 장님들이 어디를 만지느냐에 따라 기분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주장은 엇갈릴 것이다. 여기서 인간인식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같은 진리도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거지, 상대주의처럼 어디서는 코이고 어디서는 다리이기 때문에 코끼리라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진리의 일성에서 벗어나서 각각의 차이를 이해할 줄 아는 유연성을 한계에 대한 보완으로 내새운 것이다. 실제로 하이데거를 시작하여 니체 등 포스트모더니스트들로부터 이성주의 철학에 대한 반성으로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제5권 공산사회와 남녀평등이번에 읽은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녀 평등의 보장과 처자를 포함한 가족들과 재산 공유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사회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철학자에 의한 통치 또는 군주라 불리는 이들이 철학적인 통치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리해서 말하면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즉 철인통치를 내새운 것이다.이런 [국가]의 대부분의 주장들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잘못된 점이 많다. 먼저 처자를 포함한 가족들과 재산 공유의 필요성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국가에 헌신하기 위한 방도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처자의 공유를 주장하는 것도 가족도 소유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수한 인재가 있어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할 때, 우생학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가 여자의 생산하는 일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얼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이상에 그칠 뿐이다. 일부일처제가 대부분인 현대사회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처자를 포함한 가족들의 공유가 이루어질 경우 성적으로 문란해질 우려가 있고 자기 자식이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자식양육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없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책의 글에 언급된 ‘한 사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는 나라’를 옳게 보는 시각이나 여러 사유재산을 공유화시키려는 태도는 전체주의에 가깝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전체주의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인권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부정적으로 평가받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든다 하면, 예전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도 조금씩 성격은 다르지만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었었다.그리고 철학자들 또는 철학에 대해 잘 아는 군주에 의한 철인통치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다. [국가]에서 철인 통치를 주장한 배경은 당시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대한 비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라톤은 민주정치란 게 정치를 할 능력이나 기본 소양이 갖춰 지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참정권을 주기 때문에 그로인한 비효율성 등이 발생하고 이를 두고 중우정치라며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국가]의 철인 통치를 옳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게 역사적으로 볼 때만 해도 과연 철인이라 불릴 만큼 훌륭한 사람에 의해서 나라가 다스려졌는지가 몇 번 이냐는 것이다. 철인이란 의미가 객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봐도 철인에 의한 통치는 별로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에 의한 통치, 또는 오히려 폭군에 의한 통치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희생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하나를 얻게 되면 그보다 더한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때로는 그 과정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비극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욕망은 권력으로도 연결되기 쉽다. 아무리 철인이라 불린다 하는 사람 및 집단이라 하더라도 권력의 장점을 느끼게 되면 권력에만 집착하게 되는 등 본래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인의 통치를 기대하면서 어느 한쪽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장수왕'''(長壽王, [[394년]]~[[491년]])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재위: [[412년]] 음력 10월~[[491년]] 음력 12월)이다. [[휘]]는 거련(巨連, 巨璉)이며,〈위서(魏書)〉에는 이름이 연(璉)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따라서 [[광개토대왕]]에게 다른 아들의 존재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건립하였으며, 거의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다른 호칭으로는 장수왕은 1명의 왕후에게서 아들 조다([[고구려 문자명왕|문자명왕]]의 아버지)와 이름 미상의 아들, 공주 1명을 얻었다.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으며, [[436년]]에는 [[북연]]의 수도 화룡을 급습하고 북연 왕 풍홍을 데려왔다. 또한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개로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아산만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일부를 차지하였다. 별칭은 홍제왕(弘濟王)이고, 연호로는 건흥(建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개관==장수왕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재위 412-491)이다. [[광개토태왕]]의 아들이며, [[408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412년]] 즉위하여 [[중국]]의 진·송·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고, [[427년]]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 남하정책에 착수하였다. [[435년]] 위가 연을 멸망시키자 고구려에 피해 온 북연의 왕 풍홍을 위의 요청으로 죽였다. 이설에 의하면 장수왕은 처음에 북연의 왕 풍홍의 일족을 받아들였으나 풍홍이 도리어 외부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처형하였다고도 한다. 475년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내어 국고와 백성의 힘을 소모시킨 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빼앗았으며 [[개로왕]]을 사로잡은 뒤 종묘에 고하고 처형하여 선대의 원한을 풀었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제도를 지방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재위 79년, 나이 99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 중의 한 사람이다.== 생애 =====즉위===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394년]]에 태어났으며, 모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409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412년]] 음력 10월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연호는 건흥(建興)일 가능성이 높으나, 고구려의 독자 연호인지에 대한 여부가 확실치 않다.===천도===[[427년]],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여서 국내성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장수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 대륙의 북방에서는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가 세력을 팽창하며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북연]]을 압박하고 있었다. 북연은 이때 초대 왕인 [[고운 (북연)|고운]]이 부하에게 살해되고, [[풍발]]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스스로를 대왕으로 높이고 세력을 확대했다. 이 바람에 북위와 잦은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북방이 이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남방에서는 동진이 남연을 병합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던 농민 봉기를 종결시켰으며, 서방에서는 서진이 남량을 압박하여 정복을 눈앞에 두었다.이처럼 국제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우선 강남의 맹주인 동진과 화친을 맺고 북연을 견제하였다.===북위와 북연의 싸움===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중국 대륙은 여전히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싸움은 북연왕 [[풍발]]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대등한 양상을 보였으나, [[430년]]에 풍발이 죽자 상황은 북위에게 유리해졌다. 결국 풍홍이 조카인 풍익과 그 형제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으며, 풍홍은 [[435년]]에 고구려에 밀사 [[양이]]를 보내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북위의 기세로 봐서 도저히 더이상 버텨낼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고 잠시 고구려에 의탁한 뒤에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의 밀사에게 긍정적인 회신을 주었다. 그리고 풍홍의 예측처럼 북위는 [[436년]] 음력 4월에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의 [[백남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 양이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풍홍는 고구려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였으므로 장수왕이 분노하였다.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분개하여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 (송)|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장수왕은 풍홍의 가족을 죽이라고 명했다. 손수와 고구는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을 참살했다. 하지만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호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사신 편에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나제동맹과의 전쟁===한편, 이 무렵 북위는 북량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남쪽엔 한족의 송 왕조가, 북쪽엔 선비족의 위 왕조가 성립되어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장수왕은 남북조 모두와 친선 관계를 맺고 북방의 유연과도 교류하여 동아시아의 4강 혹은 5강체제를 성립하였다.중국 대륙이 안정되자 장수왕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백제에 대한 복수전을 다시 전개한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백제는 이미 [[427년]]에 신라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50년]]에 신라의 [[강릉|하슬라]]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는 군사적 대응을 검토했고,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사죄하였다. 그러자 고구려는 일단 신라의 사죄를 받아들여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하지만 시간이 더해갈수록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가 강화되자 장수왕은 [[454년]] 음력 7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 음력 10월에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하지만 468년 지두우의 분할 문제가 일단 해결되자 다시 남진을 개시하였다. 이후 [[479년]] 북위와 다시 지두후의 분할 점령을 꾀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익은 얼마 없었다.)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306~308쪽. [[468년]] 음력 2월에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에는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북위가 이를 거절함으로써 백제의 의도는 관철되지 않았다.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는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도림으로 하여금 개로왕을 충동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이 때문에 백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자 고구려는 [[475년]]에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도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사로잡았으며, 곧 [[아차산성|아차성]] 밑으로 끌고 가 참수하였다.이로써 고구려는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한성이 완전히 붕괴되어 도읍을 [[공주시|웅진]]으로 옮겼다.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309쪽. === 만년 ===[[481년]]에는 신라의 호명성 등 7성을 함락시켜,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이로써 고구려는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요하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장수왕은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연맹제도의 5부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서해와 남해를 호령하던 바다의 제왕이며 신라의 대상인(?~846. 본명은 궁복,궁파)장보고는 어릴 때 아주 활을 잘 쏘았다. 그래서‘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궁복’또는‘궁파’라고 불렸다. 보잘것 없는 평민 출신으로 바닷가에서 자란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났고 헤엄을 잘 쳤다. 그 당시 장보고는 해적들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해치는 것을 보면서 반드시 힘을 길러 해적을 무찌르리라 다짐하였다.장보고는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열심히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하여 무령군 소장에 올랐다. 그러나 신라 사람들이 강제로 당나라에 붙잡혀 와 노비가 되어 불쌍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신라로 돌아왔다.장보고는 먼저 해적들이 사람을 잡아다 사고 파는 것을 없애기 위해 828년(흥덕왕 3) 해상의 요충지인 청해(전라남도 완도)에 진을 세울 것을 흥덕왕에게 건의하였다.장보고는 출생부터가 베일에 싸인 인물로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말해주는 뚜렷한 자료도 없으나 천박한 출생으로 예상되며 젊을 때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출세를 하고 고국으로 귀환해 청해진을 설치하여 동아지중해 해상세력의 정점위에 선 인물이었다.그의 조력자가 되었던, 신라방을 주축으로 한 재당 신라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보통을 넘어서는 탁월한 생존력을 지녔고, 현실에서 만나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즉 장보고는 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이 있었기에 재당 신라인들의 대표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청해진은 군사와 무역이 동일한 조직체로서 운영되고 있었다. 장보고의 청해진 조직은 병부, 민부, 재당·재일의 신라인 집단거주지의 자치체제 등 세 개의 조직체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군상복합체 종합상사’의 성격이 강하다. 청해진은 단순한 군사조직을 넘어 상인조직, 행정조직을 겸한 복합적인 체제였다. 신라방은 중행인 청해진을 보위하고 청해진을 있게 하는 부중핵의 역할을 하였다.장보고의 성공요인을 기술하자면, 그는 청해진에 일종의 경제특구와 유사한 개념의 역할을 부여하고, 신라방 등 거점도시들을 일종의 자유무역지대, 자유무역항으로 삼아 유기적으로 연결하였다. 장보고는 이러한 체제를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교통로를 장악하였으며, 조선술의 발달을 이용하여 해양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까지의 발달을 도모한 것처럼 기존의 전통적인 체제를 넘어 무역형태를 다양하게 창조하였다.장보고는 요즘의 개념으로 평가하면 경제특구 전략을 채택하여 성공시킨 사람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경제특구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등소평이다. 경제특구란 일종의 중국식 자유무역지대인데, 일반적으로는 자유무역지대보다 더 집중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시스템으로 이해된다. 그는 ‘점선면 발전전략’을 채택하였는데, 이때 점에 해당하는 지역이 이미 성공을 거둔 경제특구였으며 20년동안 연평균 성장속도가 30%를 넘어서게 하였다. 이러한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방식은 장보고가 신라방을 활용한 전략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