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어와 파생어직접구성요소, 즉 IC 분석을 하려면 우선 그 단어의 구조를 바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분석은 하나의 구성에서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데나 그 단어의 구조를 바로 일깨워 주는 유익한 정보를 준다.IC분석이 더 결정적으로 필요한 경우는 접사가 끼어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파생어로 볼 수도 있고 복합어로 볼 수도 있는 경우다. 구성 요소 중 접사가 있어도 그 접사가 IC의 일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관건이며 그런 만큼 IC의 분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두 형태소만으로 이루어진 복합어는 IC분석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셋 또는 그 이상의 형태소들이 모여 단어를 이룰 때에 IC의 경계를 어디로 정해야 하느냐에 문제가 제기된다.IC가 두개로 쪼개지지 않고 형태소 수대로 분석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복합어의 정의에서도 조정해야 될 것이 또 있다. 어기에 어미나 조사가 결합된, 다시 말하면 어기보다 큰 요소도 있음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이런 것을 다 고려하여 정의를 조정하면 복합어란 그 단어의 직접구성요소가 모두 어기이거나 그보다 큰 언어 단위인 단어를 말하며, 파생어는 그 직접 구성요소 중 하나가 파생접사인 단어를 말한다.복합어를 구성하는 두 어기가 결합하는 방식이 구를 이룰 때의 방식과 같은가 다른가에 따라 통사적 복합어와 비통사적 복합어로 구별하는 일이 있다. 통사적 복합어와 비통사적 복합어 대신 구형복합어와 폐 복합어로 구별하기도 한다.‘어깨동무, 고무신’처럼 두 명사가 결합된 복합어는 ‘서울 친구, 고무 제품’과 같은 구가 가능하다. 이렇게 구를 이룰 수 있는 방식이 통사적 복합어이다. 반면 ‘콧물, 접칼, 굶주리다’등은 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복합어를 형성할 때만 나타나는 특이한 결합 방식이므로 비통사적 복합어라 할 수 있다.비통사적 복합어는 복합어를 형성할 때에만 나타나는 방식이므로 그것이 복합어인지 구인지가 구별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다. 거기에 비해 통사적 복합어는 구와 그 구성방식이진 복합명사, 한쪽 구성요소인 명사를 제외한 다른 구성요소가 명사형이긴 하나 그 자립성이 약하여 채 독립된 명사까지는 되지 못한 채 복합어 구성에 참여한 복합명사, 동사의 부사형이 명사와 결합된 복합명사,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가 한자어 어근인 복합명사, 한자어와 고유어가 동의중복 된 복합어, 하나의 명사가 반복된 복합명사 등등이 구성 방식이다.‘명사+명사’의 복합에는 사이시옷이 개재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현대국어에서 사이시옷은 방언과 세대에 따라 같은 단어에서도 그 개입 여부가 달라지며, 따라 그 조건도 분명하지 않다. 사이시옷의 출현 조건은 규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경향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주로 두 구성요소 간의 의미 관계로 설명되어 오고 있다.속격이 아닌 병렬구성으로 이루어진 복합명사에는 사이시옷이 개입되지 않는다. 이는 사이시옷의 속격적인 성격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속격 구성이 아닌 때에도 사이시옷이 출현하는 예들이 있다. 단어에 따라서는 복합명사를 형성할 때 ‘ㅅ’을 마치 달고 나온 혹처럼 떼어내지 못하고 전치시키거나 후치시키는 것들이 있다. 이들은 해당 어휘의 형태론적 자질로 볼 수밖에 없다.복합동사와 복합형용사 이들 용언의 경우는 복합명사와 비교하면 그 수가 훨씬 적다. 그 구성 방식도 복합명사에 비하면 훨씬 단조로운 편이다.‘명사+용언 어간’, ‘용언 어간+용언 어간’, ‘용언 어간+-어+용언 어간’, ‘용언 어간+-고+용언 어간’, ‘부사+용언 어간’, 동일한 형용사 어간 사이에 ‘디’를 개입시켜 만든 일종의 반복복합어 등등이 그 구성 방식이다.복합부사도 구성 방식이 꽤 다양한 편이며 그 양도 의성의태어를 포함하면 꽤 많은 편이다. ‘명사+명사’, ‘관형사+의존명사’, ‘관형사형+의존명사’, ‘부사+부사’, 부사 또는 부사성 어른의 반복, 명사 또는 의존명사의 반복, 또는 거기에 접미사류가 덧붙어 구성되는 복합부사 등등이 있으며 복합부사는 마지막의 두 가지 반복복합어, 그중에서 의성의태어는 그것을 받아들인 언어의 체계에 동화하도록 되어 있다. 한자어에도 애초 중국어에서 무엇이었든 국어의 일원이 된 이상 국어에 없는 음운을 국어의 어떤 음운으로 바꾸는 등 국어화 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되는 일이다.그 한 예로 본래 한문이나 중국어의구조로 보아 단어이던 것이 국어에서 그러한 자격을 읽고 어근의 자격밖에 가지지 못하게 된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한자는 단어문자로서 하나하나가 원칙적으로 단어를 대표하던 것들인데, 그들 대부분이 국어에서는 반드시 다른 글자와 결합하여야 한 단어가 되므로, 한자 하나로는 자립형식도 아니고 조사나 어미가 직접 결합될 수도 없는 어근일 뿐이다.중국어에서 단어이던 것이 국어에서 아예 형태소의 자격까지 읽는 경우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자어의 어떤 요소가 형태소의 구실을 유지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판정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한자어 중에는 중국어 본래의 요소가 아닌 외래어가 한자로 표기된 상태로 국어에 차용된 예들도 꽤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한 글자가 하나의 형태소로 분석되지 못하고 그 전체가 한 형태소 노릇을 한다.요약하자면 한자어의 한 자 한 자는 애초의 단어 자격을 그대로 유지 하는 일이 드물고 많은 경우 어근의 자격으로 국어에 참여한다. 그러나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적어도 한 형태소의 자격을 가진다.한자어는 국어화 한다고 하여도 한편으로는 중국어 고유의 성질을 간직하기도 한다. ‘父母, 男女’의 ‘父, 母, 男, 女’각각은 분명히 어근임에도 서류 등에서는 가족관계란이나 성별 란에 단독으로 쓰는 일이 많다. 국어화 하였으면서도 본래의 특성도 얼마나간 유지되고 있는 현상의 일단일 것이다.한자어에서 중국어의 특성이 가장 적극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는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때일 것이다. 구성요소의 어순이 국어의 ‘목적어-동사’ 어순이 아니라 중국어의 ‘동사-목적어’ 어순인데, 우리가 새 한 자어를 만들 때 거의 이 규칙을 따른다. 이 점에서 한자어는 차용어로서는 매우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면이 있다.한자어는 1음절어가사람을 가리키는 명사나 동식물 이름 앞에 붙어 의미를 더해 주는 것들이 많다. [+사람]명사에 붙는 접두사, 동식물이름에 붙는 접두사, 기타명사, 용언, 명사와 용언에 다 붙는 접두사들을 정리해보면 이렇다.[+사람]명사에 주로 붙는 접두사에는 ‘골-, 넛-, 맏-, 민¹, 밭-, 불-, 숫-, 핫-, 홀-, 시(媤)-, 외(外)¹-’등이 있다. 동식물 이름에 주로 붙는 접두사에는 ‘갈-, 둘-, 쇠-, 수-, 암-, 올-, 찰-, 메-, 풋-, 해-’등이 있다. 기타명사에 붙는 접두사에는 ‘강-, 군-, 땅-, 말-, 맨-, 민²-, 알-, 외²-, 한-, 홑-, 양-’등이 있다. 용언에 붙는 접두사에는 ‘되-, 뒤-, 들-, 새-, 시-, 휘-’등이 있다. 명사와 용언에 둘 다 붙는 접두사에는 ‘덧-, 얼-, 엇-, 짓-, 치-, 헛-’등이 있다.접두사 중 명사 앞에 놓이는 것은 관형사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며, 용언 앞에 놓이는 것은 부사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접두사는 관형사와는 달리 자립성이 없어서, 독자적으로 문장 성분이 될 수 없다. 또한 그 분포에 있어서도 관형사나 부사는 그 뒤에 놓이는 단어에 큰 제약을 받지 않음에 반해 접두사는 큰 제약을 받는다.접두사와 관형사는 후속하는 명사와의 사이에 다른 단어를 개입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즉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는 제3의 단어가 들어갈 수 있지만 접두사와 명사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국어의 파생접미사는 그 수가 수백 개에 이를 만큼 대단히 많고, 하는 일도 어기의 의미뿐만 아니라 품사 등의 문법적 성질도 바꾸는 등 접두사보다 훨씬 그 폭이 크다. 그 대표적인 예들을 접미사들이 만들어 내는 품사별로 보이면 명사 형성 접미사, 동사 형성 접미사, 형용사 형성 접미사, 피동사 형성 접미사, 사동사 형성 접미사, 부사 파생 접미사 등으로 나눌 수 있다.명사 형성 접미사에는 ‘-개/게, -기, -꾸러기, -ㅁ/음, -매, -보, -새, -아치, -암/엄, -애/에, -이, 한다. 접사가 없는 파생이라는 것이다. 이때 영형태소의 개념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형태소를 아예 /?/와 같은 기호를 정해 쓰기도 한다.단어 중에는 ‘잘못, 오늘, 서로’처럼 명사이면서 부사이기도 한 것이 있는가 하면, ‘크다, 길다’처럼 형용사와 동사를 겸하는 것들도 있다. 이들도 일종의 영변화에 의한 파생으로 볼 수 있으나 파생 관계를 설정할 근거가 약하다는 점에서 전환이라고 하여 영변화와 구분하기도 한다.파생어 중에는 접사가 결합하는 대신 어기의 일부 형태를 바꿈으로써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어떤 대립어에서 모음교체 및 자음교체에 의해 새 단어가 만들어 질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에게서 발전 되어 새 짝들로 만들어 쓰기도 한다. 이들은 흔히 내적 변화에 의한 파생이라고 부른다.파생 접두가가 관형사와 혼동되기 쉬운 유사성을 가지듯이 파생접미사는 어미와 유사한 일면이 있다. 그러나 국어에서 파생접미사와 어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몇 가지 특수한 예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어미와 접사의 구별이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그 대표적인 차이점을 들어 보면 첫째로 파생접미사와 어미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파생접미사는 새 단어를 만드는데 비해 어미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어휘소와 어형의 개념으로 보면, 파생접사인 접미사는 새 어휘소를 만들지만 굴절접사인 어미는 어떤 어휘소의 한 어형을 만드는 일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둘째로는 파생접미사는 어기의 통사범주를 바꿀 수 있지만 어미는 그럴 수 없다. 셋째, 어미는 거의 모든 어간과 자유롭게 결합될 수 있음에 반해 파생접미사는 그 결합이 매우 제약되어 있다. 넷째, 어미들은 그 의미가 일정하지만 파생접미사들은 결합되는 어기에 따라 그 의미가 일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밖에, 파생접미사는 항상 어미에 비해 어기에 가까이 위치한다든지, 파생어에서는 어기의 의미가 극히 제약되지만 활용형에서는 어간의 의미가 제약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차이가 있다.어기와 파생어의 관계는 음운론적, 형태론적, 않는다.
동명왕 신화1. 머리말신화는 구비 문학 가운데 전설, 민담과 함께 서사 문학에 속한다. 전승자들이 신성시하는 이야기로서, 국가적 차원의 제의 형식에 따른 서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동명왕 신화는 주몽신화라고도 하는데 고주몽이라는 영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었는가를 다룬 건국 신화이다.동명왕 신화는 1세기경 중국의 에 그 첫 기록이 보인다. 그 후 12세기의 이규보의 을 일단 그 전승의 대단원으로 칠 때 실로 천백여년 간의 유구한 살아 있는 신화로서의 전승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시대는 바로 한국의 신화시대와 영웅서사시의 시대로서, 동명왕 신화는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일대 영웅서사시로 한국 문학사상에도 군림을 해왔던 신화이다.총 다섯 가지로 동명왕 신화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첫째로는 에 실려 있는 본문의 내용과 그 내용을 해석해 볼 것이다. 둘째로는 조사해본 동명왕 신화의 본문을 보고 동명왕 신화 대해 자세히 이해해보도록 할 것이다. 셋째로는 동명왕 신화에 3가지 설이 있는데 그것을 정리 해보도록 할 것이다. 넷째로는 삼국유사 말고도 동명왕 신화를 다루고 있는 에서는 어떤 내용과 어떤 의미로 주몽설화를 담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다섯째로는 동명왕 신화 말고도 이와 더불어 여럿 있는 건국신화의 유형구조가 어떠한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2. 동명왕 신화삼국유사 제1권 ‘고구려’에 실려 있는 ‘동명왕 신화’ 본문과 그 밑은 해석이다.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今和州 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고구려 즉졸본부여야 혹운금화주 우성주등 개오의 졸본주재요동계 국사고려본기운 시조동명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 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성제 성고씨 휘주몽 선시 배부여왕해부루 기피지우동부여 급부루훙 금와사위 우시득일녀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어태백산남우발수 문지 운아시하백지녀 명유화 여제제출유 시유일남자 자언천제자해모수 유我於熊神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모책아무매이종인 수적거우차 금와이지 유폐어실중 위일광소조 인신피지 일영우축이조지 인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이유잉 생일란 대오승허 왕기지여견저 개불식 우기지노 우마피지 기지야 조수복지 왕욕부지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裏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異常 自作이불능파 내환기모 모이물리지 치어난처 유일아파각이출 골표영기 년보칠세 기억이상 자작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궁시 백발백중 국속위선사위주몽 고이명언 김와유칠자 상여주몽유희 기능막급 장자대소언어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왕왈 주몽비인소생 야불조도 공유후환 왕불청 사지양마 주몽지기준자 감식영수 노자선양영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將謀害之 蒙母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何往不可비 왕자승비 수자급몽 왕지제자여제신장모해지 몽모지지 고왈 국인장해여 이영재약하왕불가宜速圖之 於時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의속도지 어시몽여오이등삼인위벗 항지엄수 고수왈 아시천제자하백손 금일도둔 추者垂及 奈何 於是 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 遂都焉 未遑作宮자수급 나하 어시 어별성교 득도이교해 추기불득도 지졸본주 수도언 미황작궁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時年十二歲 漢孝元帝 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二十一萬五百八戶 자이고위씨> 시년십이세 한효원제 건소이년갑신세 즉위칭왕 고려전성지일이십일만오백팔호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稟離王 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주임전재이십일권재 석영품이왕 시비유신 상지점지왈 귀이당왕 왕왈 비아지윤야 당살지 비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왈 기종천래 고아유신 급자지산 위위불상 연권칙저허 기난칙마유 이득불사 졸위부여지왕3.동명왕 신는 성주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다. 『국사』고구려본기에는 「시조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땅을 옮기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그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본래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입니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았는데, 그때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며 저를 웅신 산 아래 압록 강가 집 안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제가 중매도 없이 사람을 따른 것을 꾸짖어, 마침내 저는 여기 귀양 와서 있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숙이 가두었더니 햇빛이 그를 비췄다. 몸을 끌어 피하니, 햇빛이 또 쫓아와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잉태하여 한 개의 알을 낳으니 크기는 닷 되 쯤 되었다. 왕이 그것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이를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이를 덮어주었다. 왕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했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다. 이에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7살에 매우 숙성하여 보통아이들과 달라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면 백 번 다 적중하였다.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고 하므로 그렇게 이름 하였다. 금와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주몽에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인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준마를 알아서 먹이를 적게 주어 야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이 자기는 살찐 말을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신하들은 장을 알고 고하기를, “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하려하니. 너의 재력으로 어디 간들 무엇을 못하겠느냐? 빨리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등 세삼과 벗을 삼아 엄수에 이르러,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하는데 쫓는 자에게 거의 잡히게 되었으니 어찌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너자 다리가 없어지니 뒤쫓던 말 탄 자는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에 이르러 드디어 도읍하였다.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 위에 풀집을 엮어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로 인해 고씨로 성을 삼았다.이때 나이 12살로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 갑신에 즉위하여 왕이라 일컬었다. 고구려가 전성한 때에는 21만5백8호였다.」라고 하였다. 『주림전 제21권 에는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하자 점장이가 점쳐 말하기를, “귀하여 왕이 된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의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하리라.”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어떤 기운이 하늘로부터 와서 그 때문에 제가 임신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아이를 출산함에 미쳐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리면 말이 젖을 주어 죽음을 면하더니, 끝내는 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4. 동명왕 신화 이해하기이 신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로 라고도 한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수신인 하백의 딸 유화의 결합은 결국 천신과 수신의 결합으로서 서로 이질적인 두 집단간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비정상적이다. 기본 질서에 대한 반항이 내재된 새로운 세계의 실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 집단은 서로 갈등과 대결을 거쳐 새로운 조화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터인데, 주몽의 출생이야말로 그러한 조화의 상징이 되며, 주몽은 천신으로서의 권위와 수신의 능력을 동시에 계승받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탄생된 셈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탄생 과정에서 그 시련과 이적을 보여준다. 유화가 햇빛을 받고 임신했다는 것은 결과 알에서 주몽이 태어난 것은 새로운 세계를 통치할 신성한 인물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신화는 천손강림, 난생, 동물양육, 기아 등 고대 서사 문학의 여러 요소가 얽혀 복합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즉 여러 신화의 화소가 모여 완성된 신화라는 증거가 된다.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그들의 신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라는 하나의 신화로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탄생에서부터 이미 장애와 난관을 겪은 한 인물이 박해를 이기고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 짓는 과정 끝에 한 왕조를 창건해 가는 과정은 영웅 이야기로 일컬어질 만하다.5. 동명왕 신화에 관한 3가지 설동명왕 신화에는 3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화 광개토왕 비문과《위서》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의 딸이었다. 방안에서 이상한 햇빛을 받은 후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주몽이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룻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두 번째 설화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 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뒤에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설화이다.세 번째 설화는 중점을 두고 해석 해 보았던《삼국사기》의와,《동국이상국집》등에 실린 설화이다. 이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첫 번째의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 금와 왕 이라는 점, 그리고 주몽이 자란다르다.
현대문학이론 입문(1장, 2장 요약)1‘이론’ 이전의 이론자유 인본주의 비평자유 인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문학이 어떻게 학문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문학 연구의 탄생이전 1825년까지 영국의 고등교육은 영국 국교회가 독점하고 있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이 두 개의 대학이 전부였다. 그 대학들은 몇 개의 작은 단과대학으로 나뉘어 수도원 기구처럼 운영되었고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으며 학생들도 국교회 신도이고 교내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교수들은 성직자로 교내에서 거주할 수 있는 독신이어야 했다. 학생들은 고전, 신학, 수학을 배웠고 가톨릭교도, 유대인, 감리교도, 무신론자는 들어올 수 없었으며 그들은 전문직이나 공무원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고등교육은 중세 이래 1820년대까지 그 틀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1826년, 종교와 성별에 관계없이 남녀 모두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유니버시티 컬리지가 런던에 설립되고 1828년부터 영문학이 학과목으로 채택되었다. 1829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영문학 교수가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영어에 관한 공부였고 그 용례로 참고하기 위해 문학이 쓰였을 뿐이었다.1831년부터 런던의 킹스컬리지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영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40년에 F. D. 모리스가 이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처음으로 필독서 방식을 채택했다. 모리스는 문학을 중산계급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산이자 그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그는 중산계급이야말로 영국다움의 가장 이상적인 본보기라고 믿었다. 따라서 중산층 교육은 특히나 영국적이어야 하며,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들은 영문학을 배움으로써 부의 재분배 없이도 자신의 정치적 현실을 감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영문학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1830년대 차티스트 운동은 하층계급의 반란의 신호탄으로 여겨지고 첫 영문학 강의가 바로 이때에 개설되었다.1850년대 매튜 아널드를 필두로 1921년 가 출간이름이기도 한 ‘실제비평’기법의 창시자이다. 이 방법은 텍스트를 역사와 맥락으로부터 분리해냄으로써, 문학 자체에 초점을 맞춰 정밀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실제비평 기법으로 오로지 ‘책에 씌어 있는 단어들’만을 분석하는 것이다.그 뒤를 이은 케임브리지 개척자는 리처즈의 제자 윌리엄 엠프슨으로 그는 1930년에 《모호성의 일곱 가지 유형》이라는 책에서 시적언어의 어려움의 일곱 가지 유형을 밝히고, 그 실례를 자세한 분석과 함께 실었다.케임브리지 개척자들 가운데 마지막 주자는 리비스로 그는 20세기 영국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일 것이다. 1929년 그는 Q. D. 로스를 만나 결혼했고 그들은 1932년 《검토》라는 중요한 잡지를 창간했으며 21년 동안 함께 만들었다. 이 잡지는 ‘꼼꼼히 읽기’의 지평을 시 뿐만 아니라 소설과 다른 텍스트들에게까지 확대했다. 그는 텍스트를 분석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은 그저 텍스트를 쉽게 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문학에 접근하는 그의 태도는 지나치게 도덕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비평을 통해 우리에게 삶을 가르치고 인간적 가치를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문학연구는 언어연구와 역사적 고찰 그리고 철학적 물음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해왔지만 1960년대 이후 세 학문 분야와 다시 손을 잡게 된다.영문학의 ‘진정한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 되는 요소들은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의 전제들과 같은 생각들과 그에 따른 문학적 실천을 통틀어 현재 ‘자유 인본주의’라 일컫고 있다.‘자유 인본주의’ 십계명1. 문학자체에 대한 관점.2. 문학 자체에 대한 관점의 논리적인 귀결.3. 고립된 상태에서의 연구.4. 문학의 연속성.5. 개성.6.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목적.7.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유기적 융합.8. 유기적 형식에 관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진정성’.9. 손에 잡힐 듯이 사실적인 형상화, 감각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 사고를 구체적인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제시하는 경향.10. 비평의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아 문학과 비문학적 글쓰기를 구분하고자 했다.시드니 이후 문학이론은 18세기 세뮤얼 존슨에 이르러 중대한 진전을 맞게 되는데 존슨의 《시인의 생애》와 《셰익스피어 서문》은 비평이론을 한 차원 끌어올린 중요한 업적일 뿐 아니라 이들을 통해 실제비평의 영국적 전통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자세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존슨이기 때문이다.존슨 이후 비평이론은 워즈워드, 콜리지, 키츠, 셸리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저작을 통해 또 한번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워즈워드의 《서정민요 시집》은 고급문학과 대중문학을 뒤섞은 것으로 평범함 시골사람들이 즐기던 대중적 구전민요를 모델로 하여 쓴 문학적 민요들이 실려 있다. ‘주제와 문체의 일치’라는 전통 때문에 시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고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일상 언어와는 가능한 한 다르게 연출되어야 했던 당시의 독자들은 이 시집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시적언어와 일상 언어의 관계, 문학과 다른 종류의 글쓰기의 관계 등과 같은 현대 비평이론의 핵심문제들을 예고하고 있었다.그 다음으로 중요한 낭만주의 시대 저작은 콜리지의 《문학 전기》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워즈워드의 서문에 표현된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데 바쳐지고 있다. 그는 워즈워드의 시를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워드워드가 시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에 관한 자신의 이론에 가장 집착하지 않았을 때야말로 가장 뛰어난 시를 썼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는 언어는 ‘허구적’ 특성들로 우리를 즐겁게 하고 바로 여기서 미적효과도 생겨난다고 생각했는데 이와 비슷한 생각이 셸리의 《시의 옹호》에도 암시되어있다. 셸리는 시의 임무란 나중에 20세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라고 부른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셸리야말로 이 용어의 탄생을 앞서 내다본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이 훌륭한 비평서는 또한 T. S. 엘리엇의 ‘몰개성’이라는 개념을 예 줄기로 볼 수 있다. 이 경향은 특정 작가의 작품을 꼼꼼히 분석하는데 중점을 둔다. 다른 줄기는 시드니, 워즈워드, 콜리지,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텍스트보다는 개념이 우선하는 비평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문학을 둘러싼 좀더 크고 일반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는 경향을 보인다.아널드는 문학의 ‘공평무사함’을 강조했는데, 이는 문학이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하며 특정한 행동강령을 내세워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널드가 창안한 문학비평 방법 가운데 핵심이 ‘시금석’이라는 개념인데 이는 바람직한 문학에 대한 어떤 정의도 접어둔 채 과거의 문학을 그저 오늘날의 문학을 감정하고 평가하는 도구로만 바라보자는 것이다.20세기 전반에 영국 비평계를 이끌던 인물들로는 F. R. 리비스, T. S. 엘리엇, 윌리엄 엠프슨, I. A. 리처즈 등이 있었다.엘리엇은 몇가지 주요 비평개념들을 내놓았는데 첫째는 허버트 그리어슨이 편집한《형이상학파 시인들》에 관한 서평에서 전개한 ‘감수성의 분열’이라는 개념과 둘째는〈전통과 개인의 재능 〉에서 제시한 시적 ‘몰개성’, 셋째는 《햄릿》에 대한 논문에서 새롭게 내놓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개념 등이다.사고와 감정을 극단적으로 분리시키는 ‘감수성의 분열’ 개념에 대한 가장 뛰어난 비평으로는 프랭크 커모드의 《낭만적 이미지》가 있다. 몰개성이라는 개념은 시에 대한 당시의 통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엘리엇식 방법이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창성과 개성표현이라는 개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엘리엇 자신의 성격과 하버드 대학에서 받았던 교육탓에 그는 개성을 강조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한시인의 작품 속에서도 최고의 백미는 독창적인 구절이 아니라 그의 시를 통해 속삭이는 선배 시인들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대목이고 개인의 마음과 시에서 말하는 목소리 사이에는 뚜렷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셸리 역시 《시의 옹호》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고 이를 모든 시적 미학의 초석으로 삼은 최초의 인물이 엘및 반이론적 비평작업을 엮어 다시 내놓은 비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윌리엄 엠프슨과 I. A. 리처즈는 리처즈가 1920년대 말 엠프슨의 스승이었으나 한 쌍으로 묶어 볼 수 있는 비평가들이다. 엠스픈의 《모호성의 일곱 가지 유형》의 그 극단적인 꼼꼼히 읽기는 ‘텍스트를 앞세우는 비평’이 극단에 이르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이는 영국 비평 전통의 ‘첫번째 줄기’가 도달하게 되는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I. A. 리처즈는 문학을 그 맥락으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접근하는 방법을 창안해낸 주인공이다. 이 방법은 영국에서는 ‘실제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기 동안 ‘신비평’이라는 이름으로 규범의 자리를 지켰다.자유 인본주의와 ‘이론’ 사이의 갈등은 불 보듯 뻔한 것인데 1930년대에 영국 자유 인본주의자의 원형인 F. R. 리비스와 비평이론가 르네 웰렉 사이에서 토론과 논쟁이 벌어졌다. 이론가 측에서는 자유 인본주의자들에게 문학을 읽고 비평할 때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고 왜 하는지를 분명히 밝혀서 당신의 방법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 · 평가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이 분명해지면 자유 인본주의의 전제와 방법이 지닌 약점이 드러나게 되고 그에 따라 다른 접근법이 그 자리를 대신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속셈이 깔려있는 것이다.작품 해석에 있어 자유 인본주의 방식으로 접근하면 결국 문학에 대한 체계적 접근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 도덕적 확신에 뿌리는 둔 것임을 알 수 있고 형식, 구조, 장르 등의 문제들을 외면한 채 곧바로 내용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평이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10년 주기로 새로운 비평 물결이 차례로 이어져온 느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에 확립된 자유 인본주의적 합의를 거부했다는 점이다.1960년대에 새롭게 탄생한 마르크스주의 비평, 같은 시기에 생겨나 마찬가지로 1960년대에 새롭게 변신한 신분석 비평은 자유 인본주의의
1. 고향2. 강3. 꺼삐딴 리4. 낙동강5.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6. 논 이야기7. 도요새에 관한 명상8. 메밀 꽃 필 무렵9. 무진기행10. 병신과 머저리11. 복덕방12. 삼포 가는 길13. 암사지도(1)14. 암사지도(2)1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6. 광장고향이 작품은 1인칭관찰자 시점이다. 그리고 액자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 ‘나’는 나와 마주앉은 그를 매우 흥미 있게 바라본다. 우리가 자리 잡은 찻칸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여 있다. 그는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과 중국말 모두 곧잘 철철 대었다. 하지만 같이 자리 잡은 일본인과 중국인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윽고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그가 성가셨으나 후에 그의 찡그린 얼굴에 얼마 쯤 감동하여 그에 대한 반감이 풀려졌다. 그와의 얼마간 이야기를 한 후 그의 신세타령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 따른 동리였다. 그곳에서 넉넉지는 못하였지만 평화롭게 살았었다. 하지만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 동양 척식 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살기 힘들어지자 동네 사람들은 다 떠나갔고 동리는 쇠진했다. 그네 집안 역시 서간도로 이사를 갔지만 황무지만 남아 사는 게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그간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살던 곳이 싫어 신의주, 안동 현으로 품을 팔다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고향은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고향에서 자기와 혼인 말이 있던 고향사람을 만났지만 그 여인 역시 많은 고생을 했던 터라 몸이 많이 상해있었다. 그 여인과 헤어진 후 서울에 일자리를 잡으러 차편에 오른 것이었다. ‘나’는 그의 참혹한 사람살이에 쓴물이 났다. 그는 취흥에 겨워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는 노래를 읊조렸다.여러 대목들을 통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한눈에 이 작품이이 어쩐지 잊혀지지가 않는다.본래의 춘향전은 춘향과 몽룡의 애절한 사랑에 초점을 두기위해 변 부사는 탐관오리로만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변 부사는 단지 이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만 묘사 되고 있다.두 번째 이야기 끝부분에서 군뢰사령이 자신의 이야기를 타령으로 만든 광대에게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정말 군뢰사령 말대로 변 부사는 춘향에겐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어린 기생 따위가 양반 자제에게 불망기를 받았다고 대비정속을 외치며 대드니 변 부사 입장에서는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론 오기도 생겼으리라. 그런 변 부사의 오기가 일반 평민들에게는 춘향이 더없이 가엽게 느껴지도록 하였을 터. 그리하여 평민들 사이에서 춘향의 이야기가 와전 되어 지금의 러브스토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그렇게 생각한다면 춘향은 그 뒤로 어찌되었단 말인가. 옥에 갇혀 그저 하염없이 숨을 거두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몽룡은…. 기생의 신분으로 태어나 제대로 기도 펴지 못하고 정조를 지키려다 세상에서 사라진 불쌍한 춘향. 정의를 지키기 위해 한명의 기생을 죽여야 했던 변 부사. 또한 존재감 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뻔한 몽룡. 만약 정말 이것이 사실이라면 새로운 시각으로 춘향전을 볼 수 있다는 묘미 이전에 어쩐지 슬픔이 밀려온다.그토록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는, 사실이던 아니던 이러한 사랑을 꿈꾸는 한 여자로서 한 가닥의 기대감과 그러한 기대감으로부터 오는 행복한 상상이 깨져 버린 듯한 느낌이랄까.논 이야기 - 두 가지의 풍자 대상채만식의 ‘논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며 8.15 조선이 독립했을 당시 한 농촌에 살고 있는 한 생원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상당히 냉소적으로 묘사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한 생원에게서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는 국가에 지극히 냉소적이며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나라도 필요 없다 생각 하는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과 메마른 애국심, 국가의 허술하고 잇속만 챙기려는 토지정책을 풍정리해볼까 한다. 소설은 대충 정리해보면 이렇다. 봉 평장의 파장 무렵,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서 속이 상한다. 조 선달에 이끌려 충주 집을 찾는다. 거기서 나이가 어린 장돌뱅이 ‘동이’를 만난다. 허 생원은 대낮부터 충주 집과 짓거리를 벌이는 ‘동이’가 몹시 밉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계집하고 농탕질이냐고 따귀를 올린다. ‘동이’는 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난다. 허 생원은 마음이 좀 개운치 않다. 조 선달과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데 ‘동이’가 황급히 달려온다. 나귀가 밧줄을 끊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동이가 자리를 물러난 후 허 생원은 자기를 외면할 줄로 알았던 ‘동이’가 그런 기별까지 하자 여간 기특하지가 않다. 나귀에 짐을 싣고 다음 장터로 떠나는데, 마침 그들이 가는 길가에는 달빛에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메밀꽃의 정경에 감정이 동했음인지 허 생원은 조 선달에게 몇 번이나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한때 경기가 좋아 한밑천 두둑이 잡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노름판에서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평생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메밀꽃이 핀 여름 밤, 그날 그는 토방이 무더워 목욕을 하러 개울가로 갔다.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났다. 성 서방네는 파산(破産)을 한 터여서 처녀는 신세 한탄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허 생원은 처녀와 관계를 맺었고, 그 다음날 처녀는 빚쟁이를 피해서 줄행랑을 놓는 가족과 함께 떠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 끝에 허 생원은 ‘동이’가 편모(偏母)만 모시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발을 빗디딘 허 생원은 나귀 등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고 그걸 ‘동이’가 부축해서 업어 준다. 허 생원은 마음에 짐작되는 데가 있어 ‘동이’에게 물어 보니 그 어머니의 고향 역시 봉 평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동이’가 자기처럼 ‘왼손잡이’임을 눈여겨본다.영상에서는 소설과 속물이 되지 못한 그녀는 무진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하인숙과 조와 박은 ‘나’의 내면세계의 어떤 부분을 상징한다. 조는 ‘나’의 서울에서의 자아의 모습이다. 편안과 안락과 출세를 생각하는 속물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닮은꼴이다.박은 ‘나’의 순수했던 학창시절 또는 현재의 속물적인 모습에 대해서 반성하는 양심이다. ‘나’는 무진에 와서 자신의 내면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이다.박을 통해 순수했던 청년시절을, 조를 통해 현재의 추잡한 속물로서의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갈등한다. 그 갈등의 국면에 하인숙이 있다. 하인숙 이야 말로 마음으로는 박에게 가깝지만 현실적으로는 조에게 기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순수를 버리지 않았으면서도 결코 그렇게 만은 살 수 없는데서 오는 방황과 갈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하인숙은 무진에서 내면적 방황과 고민에 빠져있는 현재 ‘나’를 상징한다.바다로 뻗은 방죽의 어느 집에서 ‘나’와 하인숙의 정사는 동질적 존재의 자기 확인이라는상징성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의 의미는 성악가 출신인 데다가, 청승, 광기마저 포함되어 있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이로 말미암아 ‘나’와하인숙에 대해 상동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와 라는 구절로 미루어 보아, 고향 '무진'은 '나'의 의식 속에 엉뚱한 공상과 악몽으로 내 의식을 피폐하게 하는 공간으로 각인되어 있다.급히 상경을 바란다는 아내의 전보로 그는 내면적 침잠에서 깨어난다. 하인숙은 그녀를 서울로 데려가기를 원했다. 그는 갈등 끝에 다음의 편지를 쓴다.그러나 결국 그는 편지를 찢고 만다.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그는 선명한 팻말을 보게 된다.그는 이 표지판을 보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진정한 내면적 자아인 하인숙을 현실(서울)로 데리고 갈 생각을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안락한 현실적 처세를 하게 된 자신에게서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일 것이다.“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것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근대적 직업인에 의해 가족 공동체가 파탄되고 유교 윤리가 상실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용발표회에서 세 노인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좀 더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태준의 작품세계는 과거 농촌을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공동체로 그리면서 도시를 자본주의에 의해 오염된 공간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세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신시대 인물이자 도시인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무용수 안경화의 부도덕한 성품에 대해 작가자신의 옛것에 대한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복덕방의 스토리 전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이지만, 1950년 한국 전쟁이후에 반공 사상이 높아지면서, 월북 작가나 시인의 작품은 모두 묻혔다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정지용, 백석, 이태준 같은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도 1980년대 중반 이전에는 배울 수 없었고 출판되지도 않았다한다. 정지용의[향수], 백석[사슴], 내가 이번에 다시 접하게 된 이태준의[복덕방], 임화[우리오빠와 화로], 오장환[고향 앞에서] 등등 월북 작가 시인들의 작품은 1980년대 후반으로 가서야 해금되게 되었다한다. 복덕방에 관한 여러 해설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작품의 내용과 상관없이 단지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작품출판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을 접했는데 그것은 내게 엄청난 충격이었다.복덕방은 투기를 부추기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당시에도 투기 세력이 몰리는 곳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참의는 복덕방에서 돈을 벌어 그나마 생활안정을 가지게 되었고, 안초시는 복덕방을 통한 거짓정보로 인해 패가망신을 하여 자살에 이르게 된다. 그다음으로 박희완 영감에게는 이 곳이 하루를 소일하는 장소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복덕방이 갖는 의미는 '소외된 세 노인의 꿈과 좌절의 공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다시 정리해보자면 생활의 기반을 상실한 세 노인이 복덕방에서 소일을 한다. 뚜렷한 미래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이들의 꿈과 좌절을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