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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BO.BBC 합작 드라마 Rome(롬)의 감상문
    도시, 인간 그리고 죄HBO∙BBC 합작 TV시리즈 롬(ROME) 감상문기원전 52년, 갈리아 정복을 마친 씨저가 돌아온다. 로마 공화정의 수장으로 군림하던 원로원의 의장 폼페이우스는 오랜 벗의 귀환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의 군주적 권력 다툼과 초대 황제의 성장은 TV시리즈 롬(ROME)에서만큼은 주인공이 아닌 캔버스로 존재한다. 롬은 씨저, 폼페이우스, 역사 속에 짤막하게 기록된 두 로마 병사 보레누스와 풀로를 내세워 영웅이 아닌 시민을, 정치가 아닌 삶을, 로마 제국이 아닌 로마를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 꺼리는 무척 다양하고 섬세하다. 보레누스와 풀로라는 두 병사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최하층 노예부터 시민, 군인, 귀족, 영웅들의 삶을 그려낸다.선정적 도시 로마는 씨저와 폼페이우스, 부르투스와 옥타이비아누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갈리아로부터 돌아온 병사들은 승전병으로서의 영광스러운 귀환보다는 전리품인 게르만 노예 장사와 여색으로 재미를 본다. 고대 서양에서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던 로마였지만, 로마의 소시민들은 그저 제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과 아내로서, 친구나 동료로서, 주인과 노예로서의 삶을 말이다. 이전까지는 화려한 역사의 그림자로서 주목받지 못했던, 어쩌면 애써 외면되고 있던 불편한 사실에 대한 섬세한 표현이 바로 롬을 매력적인 역사드라마로 만들어 준다. 이처럼 롬은 고대 로마를 철저한 포스트모던적 시각에서 관망한다. 우리네 삶처럼 아름답고, 치열하고, 이따금 추하고 아프게 되는 그네들의 삶이 고대 로마 제국의 저잣거리 풍경 속에 녹아 있다.극의 시대를 막론하고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대부분의 TV시리즈나 영화에는 드라마의 스펙타클을 더하기 위해 주인공의 원수, 또는 악당과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들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혹은 있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서면서는 이러한 구조적 전형이 많이 깨어졌는데, 롬은 이러한 선구자적 발걸음을 잘 따라 주고 있다. 주인공인 보레누스와 갈등을 빚는 것은 말썽 많은 부하 풀로도, 원한을 사게 된 살인청부업자도, 뒤틀린 정치판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조력자 역할을 해 주어야 할 풀로는 자신을 불가능한 임무에 몰아 넣고, 말도 안 되는 누명을 함께 뒤집어 쓰게 되고, 심지어는 보레누스의 여종과 연인 관계인 남종을 살해하는 등 도움이 되기는커녕 가만히 있어 주면 다행일 지경이다. 그리고 소시민으로서 불만을 가질 법도 한 부패하고 타락한 정계에서는 보레누스를 환대하고, 수장인 씨저가 친히 원로원에 초청하기에 이르니 말이다.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을 가진 13사단의 병사 보레누스의 갈등은 군대에도, 원로원에도, 거리에도 없다. 그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군에 다녀온 사이 자신의 딸들과 자신 사이에 생겨난 소격감, 그리고 다른 남자와 부정하게 정을 통한 아내였다. 그의 집 안에 있었던 것이다.성실하고 반듯한 평민 장교 보레누스의 지극히 소시민적 희로애락이라는 그림 뒤로 희미하지만 빼곡히 들어선 로마도시를 놓칠 수는 없다.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지루할 정도로 반듯한 이 주인공은 어두운 베일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어두운 캔버스 로마 도시의 본질을 드러내 줌으로써 주인공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인간을 닮은 신들의 세계가 신들을 닮은 인간의 세계와 겹쳐진 그곳은 비윤리적이며 추한 믿음으로 가득 찬 곳이다. 광장에는 황금 소와 독수리가 신전을 닮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고, 씨저의 질녀는 짐승의 피를 뒤집어 쓰며 스스로 굿을 한다. 뿐만 아니라 이혼이나 재혼, 근친혼이 성행하고, 동성애는 예사에 상점보다 더 많은 매춘굴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메뉴로 등장하고, 식당에 누운 귀족들은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고는 깃털로 목구멍을 간지럽혀 개워내고고 다시 새로운 음식을 먹었다. 죄악으로 가득한 그곳 로마에는 신이 허락하지 않은 풍요와 쾌락으로 병들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와 관계를 맺고 묻는다.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형제와 몸을섞게 되었느냐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울음을 터뜨리는 옥타비아는 자신의 잘못에 놀라 흐느끼지만, 누이와의 관계를 마치고 그런 누이를 빈정거리는 옥타비아누스의 죄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 아닌가? 롬은 부부간의 정사 장면은 스치듯 짧고 간략하게, 불륜이나 동성애, 매춘 행각은 더 화려하고 길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 제국하면 떠올리는 전투 씬보다는 저잣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청부살인 따위에 더 많은 앵글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전부 썩어진 로마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롬은 현실에 배신당하게 되는 정직하고 성실한 주인공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더러운 도시를 함께 보여 주며 인간의 죄성에 대하야 시사한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한 예수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까닭일까? 롬은 완전한 부정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쭉정이들은 거리에서 죽게 된다. 불륜을 저질러도 당당하게, 배신을 당한다면 두 배 세 배로 갚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풀로는 나이오베와 부정을 저지른 매제를 인간의 이름으로 처단하지만, 그 스스로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호색한이었다. 씨저를 암살하고 원로원을 바로잡은 세르비아도 사실은 그저 자신의 해소되지 못한 애증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어쩌면 단 한 명도, 단 한 순간도 정결할 수가 없는지.인간의 죄성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자위하게 마련이지만 죄성이란 본래 절대적인 것으로 더러움과 깨끗함,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부정. 사실은 이렇게 이원론적인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어떠한 은유도 융통성 있는 경계선 따위도 없다. 단지 선택해야만 한다. 어느 쪽에라도 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까닭에 인간이란, 나약한 인간이란 전부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롬의 죄성을 관음적으로 지켜보는 시청자들 역시 죄에 사로잡힌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이다.“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기기 위해, 사실은 보기 위해, 그저 갈리아로 갔던 씨저는 살육과강탈이 일어나기 전, 그곳을 보고, 사실은 그저 그 땅을 밟은 순간 죄인이 되었다.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이 지중해의 바람과 올리브 향기 대신 피비린내와 땀 냄새를 타고 온다. 사실은 나로부터 나는 고약한 냄새일 지도.
    독후감/창작| 2010.06.25| 3페이지| 1,000원| 조회(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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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에밀 졸라 _ 작품
    작품작품, 그 성스러운 제사에 제물이 되어 바쳐진 한 예술가의 이야기소설의 「작품」은 단지 소재의 특수성-예술가와 예술-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천재 화가를 죽음으로 내몰고도 관조적인 얼굴을 할 수밖에 없는 당대의 참담한 예술 현실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상파적 묘사, 그리고 세느 강을 따라 흐르는 소설의 리듬감이 「작품」을 에밀 졸라의 소설이 아닌 작품으로 만들어 준다. 인상회화를 꼭 닮은 이 빛의 소설 「작품」을 읽다 보면 독자는 저절로 19세기 파리에, 클로드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아틀리에 안에 옮겨지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파리의 풍경과 클로드의 표정을 좇아 그와 그의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는다.1. 영혼과 맞바꾼 작품, 제물로 바쳐진 예술가「쉽게 씌어진 시」. 슬픈 천명에 홀로 침전하면서도 눈물 젖은 시작을 멈출 수 없었던 시인 윤동주. 시인, 화가, 음악가 어느 예술가가 제 전부를 바치지 않은 작품을 뻔뻔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영혼을 완전히 소진하고 나서야 하나의 가난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예술가들의 번민은 고단함도 외로움도 아닐 것이다. 이상에 다가가지 못하는 제 소박함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테지. 한 화가를 잃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비장한 그림 한 점, 「작품」이 되었다.「작품」은 좌절을 겪고 끝내 생을 자살로 마감하게 되는 한 젊은 화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클로드는 주야로 자신을 쏟아내 그려가던 작품 앞에 목을 메달아 죽는다. 아들 쟈크는 크레틴 병에 걸려 죽고, 아내 크리스틴은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고 정신병을 얻고 만다. 클로드를 자신의 타고난 재능 때문에 결국 상처 받고야 만 “시대의 희생자”라 부른 상도즈의 말처럼 그는 시대의 희생자였고, 그의 가족들 역시 시대의 2차 피해자였던 것일까?클로드의 모델이 졸라의 죽마고우였던 세잔이다, 혹자는 마네다 말이 많다. 하지만, 클로드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이 그림 같은 소설을 감상하는 데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구조적으로는 예술의 본질을 향한, 이를 넘어 절대 이상에 대한 치열한 갈급함을 가진 한 인간을 관찰하는 것으로 족하다. 부족한 인간이 추구하기에는 너무 고귀한 이상으로서의 예술은 예술가의 영혼을, 육체를, 전부를 좀먹음으로써 탄생한다. 클로드는 분골쇄신하며 순수와 보편성을 가진 절대적 아름다움으로서의 여성을 그려 내고자 한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작품, 그것의 존재가 갖는 예술의 실존에 압도되어 자살하고 마는 그는 한 장의 그림 앞에 제물처럼 바쳐진다. 이상의 본질적 정수와 천박한 인간을 연결해주는 화목제이다.진실한 예술가라면 본질적인 고뇌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실존적 이상, 그 앞에 자신을 태우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예술가는 외로운 산고를 겪는다. 작가는 이 치열한 현장을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져야만 하는 것처럼 당연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2. 예술가, 동료와 아내 그리고 군중예술가의 아내 작가는 여성에 대해 굉장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내 크리스틴 클로드가 놓았던 붓을 다시 쥐게 하고, 그림의 주인공이 되어주는 등 화가로서의 남편이 제 역할을 해내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야기가 깊숙이 침전하고 다시 올라서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힘으로 그의 불안정한 정신을 지배하고 종용하는 거룩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우연한 만남과 필연적인 끌림으로 클로드의 모델이 되고, 결국은 클로드의 그림에 지독한 질투를 품게 되는 크리스틴. 그림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아이 앞에서, 번번이 버림을 받는다. 끝내 작품 앞에 목숨을 끊은 클로드에게 영원히 버림받는 크리스틴은 클로드의 작품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한다. 어쩌면 클로드 자신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지만, 크리스틴은 전부를 버려야만 했다. 자신의 사랑과 여자로서 가져도 될만한 욕심, 순결한 몸과 여린 영혼, 그리고 아들까지도. 이상을 좇아 제물로 바쳐질 예술가에게만 허락된 불안함과 비겁한 변명은 여성을 황홀과 비참을 동시에 겪게 함으로써 누구보다 강하게, 동시에 나약하게 만든다. 악처가 될 수 없다면, 미쳐지게 될 뿐.예술가, 그리고 동료 인간과 자연의 희미하고도 분명한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드는 예술가들은 이 외에도 인간적 번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데, 경제적인 유혹이나 어려움 그리고 대중들의 속악한 욕구와 평가 등이 그 까닭이다. 클로드 주변의 다른 예술가 친구들은 이러한 번민 앞에 타협을 하고 나름의 변명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야외파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던 많은 동료들은 모두 클로드의 천재성을 인정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클로드가 막연한 이상을 좇아 방황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아가 제 예술적 실패를 클로드 탓으로 돌리고, 그를 외면하기까지 한다.예술가에게 동료는 영혼의 공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반자이다. 서로에게 영감이 되고 – 에밀 졸라가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동기나 자극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속도와 방향성의 작은 차이에 다시는 만나지지 않는 길을 걷게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파리를 모두 담아 기억하려고 했던 클로드. 그에게 빛보다 얇게 부서져 흩어진 값없는 찬양과 의식도, 값싼 동정이나 조롱도 결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있는 것은 단지 작품과 그 자신 밖에는 없는 것이다.군중과 환경 「작품」을 읽으며 19세기 파리의 밀도 높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주요사건과 주인공의 심리 외에도 주변 인물들과 군중, 배경이 되는 파리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있기 때문이다. 전람회를 가득 메운 사람들, 도시를 채우고 있는 건물들과 햇살의 밀도는 클로드를 더욱 이름없는 만드는 역설로 작용한다. 화폭에 담고자 했던 파리의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오브제들은 사실 그의 피부와 맞닿아 있지만 그의 영혼, 이상을 꿈꾸는 그의 영혼은 그것들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어쩌면 그러한 까닭에 빛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에 더욱 주목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건조한 군중, 사물, 풍경. 그 한가운데에서 예술가는 결국 혼자 오롯이 남게 된다. 세상에 섞이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의식되지 못한 외로운 예술가는 조용한 제단 아래에서 가쁜 호흡을 멈추어야만 한다.3. 빛의 소설, 서늘한 빛의 소설.빛을 닮은 소설 「작품」 저변에 짙게 깔린 냉소는 바닥까지 소진될 예술가의 소명, 끝내 버려지고 마는 여인의 사랑, 변하지 않는 예술계의 반목 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감동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멋을 내거나 치부를 숨기는 일 따위는 없다. 이런 까닭에 사실주의 문학과, 그가 찬양해 마지 않았던 플로베르와 유사하는 평가를 받았을 테지. 자신의 전부를 태워 작품을 생산해 내면서도 강박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예술가들의 비장하면서도 초라한 목소리, 그리고 사랑에 목말라 나날이 메말라 가면서도 남편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던 크리스틴과 세상 앞에 죽은 아들의 모습을 팔았지만 조롱을 받아야 했던 클로드은 사실 무척이나 닮아 있다. 승자의 얼굴로 클로드를 조롱하면서도 그 안에 타협한 예술가라는 상처를 숨기고 있는 파주롤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에 목말라 있던 ****************** 또한 억지스러운 표정이 참 닮아 있다.그리고 마치 미술가의 투쟁에 가까운 창작의 고통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사실 글을 써야 했던 자신의 고통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에 예술가도, 예술가의 아내도, 그저 천박한 범인도 녹록하지 않은 삶 만큼은 겹쳐져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아닌 척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이 상처들을 드러내고 피를 흘리게 하는 에밀 졸라의 페시미즘은 클로드를 끝내 무덤으로 보냄으로써 마침표를 찍는다.클로드를 장례 치름으로써 이 치열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소설 「작품」 의 부제는 「예술가의 초상」이라지만, 책을 덮는 독자 손에 쥐어진 것은 예술가의 초상이 아니었다. 캔버스라는 제단 위의 뜨거운 영정사진이다. 끝내 클로드를 구원해주지 않은 가혹한 작가 에밀 졸라는 상도즈의 입을 빌어 “자, 일하러 가시죠.”라는 강박적인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피할 수 없는 예술가의 천명,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때로는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그것임에도 예술가들에게는 유일한 구원인 것을 알기 때문일까? 마치 제 초상을 치르는 것처럼 비장하고 뜨거운 한숨을 토해낸다. “자, 일하러 가시죠.”서평 02 작품 PAGE 1 / NUMPAGES 3
    독후감/창작| 2007.06.21| 3페이지| 1,000원| 조회(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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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프란츠 카프카 _ 성
    성눈에 띄지 않는 작은 촛불의 치열한 생카프카는 세련된 어휘나 문장으로 멋을 부리지 않는다. 몹시 사실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로 형이상학적인 현실 세계를 역설적으로 그려내는 카프카는 분명한, 동시에 희미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밀도 있게 표현하면서 막 시작된 현대 사회의 실존적 위기 상황을 투영하고, 그 속에서의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대신 거대한 도시에서 소멸되어가는 영혼의 불안과 조용한 시위를 성과 주인공 K를 통해 보여준다.1. 굳게 닫힌 성 문,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가능성소설 『성』에서 성은 K가 측량기사로서 인정을 받고 약속된 일이 주어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K가 성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 일을 의뢰했던 클람은 집사 역시 절대 만나지지 않는다. 그리고 성과 마을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집사와 비서들은 전부 잠만 자는 멍청이들이어서 클람을 만나거나 성에 진입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을 결코 환대하지 않고, 마을의 면장에게선 토지 측량은 전혀 필요 없는 일이며 따라서 봉급도 줄 수 없다는 말을 듣자 K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성의 많은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며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K는 측량기사라는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잃고 자신 마저 잃어버리기에 이른다.K는 메시지에 의해 느닷없이 성으로 끌려왔다. 그러나 제 삶은 제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성의 집사와 비서들, 마을 사람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구원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 K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졌던 자신의 역할과 삶이었는데, 그것마저 위태로워지자 K는 점점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다. 소설 속의 그에게 주어진 일은 불투명한 메시지였을 뿐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희미한 목표,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을 위해서 그가 고군분투해야 하는 까닭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이다. 부당한 일이라 해도 그것을 잃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까닭이다.현대 사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모든 사람,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은 가능성을 가진다. 기술과 이성의 발달은 물리적인 진보로 인간을 육체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였고, 봉건 계급과 고루한 사상의 붕괴는 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적용되던 사회적 제한을 해제시켰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그 가능성이 언제나 100%는 아니다. 대부분 가능성은 있지만, 그 가능성은 몹시 불확실하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 게다가 그러한 가능성에 이끌려 살면서 인간들은 더 높은 가능성, 더 높은 성을 위해 살아가게 되고 성 문 앞에 도달했을 때, 우리에게 여전히 가능성은 닫혀 있고, 높은 성벽 앞에서 몸을 부딪혀 피를 흘릴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성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분명한 것은 단지 그 문이 종종 열린다는 것, 들어갈 ‘수 도’ 있다는 것. 그것뿐이다.2. 끝없는 자기 소외, 자기 격리, 낯섦내팽개쳐진 K는 자신의 권리와 지위 따위를 되찾기 위해 - 이전에도 없었던 것 같지만, - 마을 사람들과 성의 직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가상의 권력 아래에서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차례로 만나지만 그들에게 K는 불청객에 불과하다. 낯선 이방인을 박대하고, 멀리한다. 성에 진입하거나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맺어졌다가 이내 풀어지는 관계는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클람의 애인이라는 프리다는 짧은 인사 한 마디 없이 섹스로 관계를 시작하고, 또 다른 처녀는 제 가정의 불행한 가정사를 바닥까지 드러내 보여준다. 그렇지만 K는 그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내 낯섦과 서먹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나는 오히려 혼자 있어야 한다. 내가 이룩해놓은 것이라곤 고독해진 것뿐이다."라고 말했던 카프카는 작가와 보험국 직원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훌륭한 사회인의 아들이자 아름다운 여인의 약혼자여야 했고, 독일인이 지배하고 있는 프라하의 시민이자 시오니즘이 당연했던 유태인이어야 했다. 그는 어떠한 역할을 하면서도 그 스스로가 될 수 없었다. 하나의 이름을 선택하면 다른 이름이 그의 목을 졸라왔고, 그를 프라하 성벽으로 몰아 세웠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친밀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몹시 피상적인 관계들을 통해서는 어떠한 인격적 깊이도 형성되지 않는다.왕과 신의 위엄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혈연 관계, 성적 관계는 영혼과 영혼이 맺을 수 있는 최후의 진실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마저 단절되고, 왜곡되고, 희미해진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끝없이 이방인으로서 떠돌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영혼을 잃어버린 시대에서는 이력서 한 장, 짧은 프로필, 흔해 빠진 이름 석자로 누구나 나를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누구라도 작은 노력으로 상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내 영혼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나를 모른다. 심지어 나도 나를 알 수 없으니까.영혼의 소멸을 자각하면,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대개는 영혼의 소멸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시들한 영혼을 부지하며 살다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운 좋게 자신의 잃어버린 영혼을, 본질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쉽게 자신을 무지하고, 의미 없는 사회로부터 격리하기에 이른다. 오롯한 단독자로 제 영혼이라도 찾으려 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과도 가련한 내 스스로와도 등을 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강박적으로 과거와 미래로부터, 사회와 타인으로부터, 관습과 법률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격리시켰던 카프카는 세상의 불청객으로서의 자아, 폐쇄적이고 내성적인 자신을 사회에서 소외함으로써 영혼의 안정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3. 포기K는 측량기사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클람을 만나기 위해, 프리다와의 관계를 위해 뭔가를 계속하고 억지스러운 일들을 계속하지만, 이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지만 K 역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다지 필사적이지는 않다. 한 두 사람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애원을 한다거나, 자신의 임무 자체에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는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며, 갑자기 성관계를 맺은 프리다와 살림을 차리질 않나, 마을 학교의 소사로 고용되어 엉뚱한 일을 도맡아 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것들을 잃은 후에도 흔히 문학 작품에서 보여지는 과장된 절망이나 치열한 싸움은 보여지지 않는다.사실 K에게 측량기사로서의 업무나 프리다와의 사랑 따위는 애당초에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의미 따위는 잠시 잊혀진다. 그것을 잃기 전까지. 그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그 상실감에 불안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본질적인 의미도, 억지스러웠던 의미도 모두 사라지고 난 후이기 때문에.멍청한 두 조수가 실은 성의 명령으로 그런 척 했을 뿐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중 한 명은 K 의 약혼녀이자 동거녀인 프리다를 빼앗아 가기에 이른다. 성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마침내 성의 비서관 뷔르겔을 만나지만 K는 프리다와의 이별의 충격에서 온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다.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변증법적으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지만, 결국은 떨어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나 오열하거나 실성하는 대신, 그렇게 내버려진 자신을 내버려진 채로 두는 것, 그것이 카프카가 깨달은 현대 사회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 아니었을까?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면, 적어도 불편하다. 현대 사회는 빠른 속도와 거대한 기술로 우리의 삶을 제 마음대로 종용하고 있다. 사회에 내던져지기 전에도 썩 완벽히 완성되지 않았던 영혼은 사회라는 거대한 희석액 안에서 하나의 모듈, 세포, 부품 같은 역할을 하며 희석되고 만다. 제 영혼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이리저리 몸을 부대껴 보지만, 방법은 없다. 화학 작용처럼 반사적으로 계속되는 또 다른 하루를 살아야만 하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제거되고 만다. 그 틈에서 자신을 격리시키지 않고도 영혼을 지켜내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마지막, 그리고 유일한 희망으로 종교를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의 거대한 종교 집단은 사회보다 무겁고 뻔뻔한 얼굴로 영혼의 잠식을 강요하는 것이 사실이다. 역시 카프카가 100년 전에 제시해준 것처럼 모든 치열함을 포기하고, 받아들이고, 조금씩 소멸해 가는 수 밖에는 없는가 보다. 불꽃이 하나 꺼져 간다고 해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어두워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갑자기 꺼져버린다 해도. 그러니 그저 제 몸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래서 불꽃이 사라질 때까지 어떻게든 그저 버텨보자, 희미한 빛이라도 내며 견디어 봐야 하겠다.서평 05 성 PAGE 1 / NUMPAGES 3
    독후감/창작| 2007.06.21| 3페이지| 1,000원| 조회(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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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도스토예프스키 _ 죄와 벌
    죄와 벌“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저지른 이후에 자신이 겪게 될 정신적 고통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악마적 힘에 이끌려 ‘그 일’을 계획하게 되고 드라마틱한 우연이 겹쳐지며 얼떨결에 ‘그 일’을 실행하기에 이른다.한 조각도 미학적으로 낭비되지 않은 이 장편의 소설은 모든 사람, 모든 사건, 모든 의식이 철저하고, 실재적으로 짜여 있다. 죄를 저지르고, 그것으로 인해 번민하고, 그저 죄를 뉘우치리라고 여겨지는 예언적 기대까지를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불안정한 본성과 선과 악의 애매모호한 기준, 그리고 사회적 문제 등이 담겨 있다.1. 죄전당포 주인과 여동생을 죽인 범죄자는 환상과 열병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는 죄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되려 비범인으로서 벌레 같은 인간을 제거하고도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했던 까닭이다. 자신의 논문에서 비범인의 우월성에 대해 논한 바 있듯이, 비범인은 살인을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스로 자신의 신념에 철저하지 못하고 있다. 애써 정당화하는 것조차 서툴다, 이 견습 범죄자는.러시아 정교 역시 오랜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한 것이다. 「구약 성서」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아벨을 죽인 카인, 바벨탑을 세운 노아의 후손들이 사랑이 넘치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하고 벌을 받아야 했던 까닭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뛰어넘고자 했던 교만함 때문이다. 경외의 대상인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가장 큰 죄이다.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미 논문과 스스로의 가치관을 통해 심판이라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고, 살인 행위를 통해 자신이 비범인임을 증명해 보이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사실 그의 죄는 살인 행위가 아닌 악인에 대한 가치 판단과 심판 그 자체에 있다.예수 그리스도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던 무리에게 이르러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군상들이란 교만하고, 판단하고, 시험하고, 감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죄로 차곡차곡 하루를 채우며 살아간다. 관습과 규범에 의해 죄의 경중이 징역이나 벌금 따위에 따라 달라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성경적으로 죄는 있으되, 죄의 무게는 동일하다. 라주미힌의 주제넘은 오지랖, 라스콜리니코프를 향한 동생과 어머니의 고행주의,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는 듯 보이는 소냐의 필연적인 창녀 근성과 그 아비의 피해의식은 라스콜리니코프의 교만함과 살인행위에 비해 가벼워 보일 수는 있지만, 전부 각자의 삶에 있어서는 가장 무거운 죄인 것이다.사실 우리 모두는 죄인인데, 이 사실은 깨닫지 않으면 결국 모두가 알게 모르게 죄를 지으며 회개하지 못한 채 죄를 죄인 채로 남겨두고 살아갈 수 밖에는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국 8년간의 옥살이로 죄값을 치렀고,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죄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라주미힌은 여전히 오만하게 굴며 그의 여동생의 삶을 구원했다고 착각하며 살게 되고, 소냐 역시 그를 기다렸다는 구실 아래에서 그의 남은 삶을 저당 잡는다. 그들의 죄값은 언제, 어떻게 치러질 것인가?우리 모두에게는 치러지지 않은 죄값이 있다. 사람을 죽였든, 죽이지 않았든.2. 벌 - 비겁한 죄로서의 벌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자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죄의식이나 사적인 회개에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차피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자수를 해야 만이 가장 적은 형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와 수감 생활을 통해 자신이 비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되는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있어 자수를 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자수를 결심하던 밤은 범행을 저지르던 밤보다 길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끝내 노골적인 회개를 하지는 않는다. 그가 결국은 회개하지 않겠는가, 하는 바람이 섞인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고 독자들의 기대만이 남겨졌다.죄를 짓고 나면 즉시 죄의식이라는 벌을 스스로에게 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는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사회가 결정한 만큼의 벌을 받음으로써 죄값을 치르게 된다. 그런데, 본래 죄의 존재론적 의미란 죄가 저질러진 이후에는 그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죽음, 상처, 부패, 상실, 어떠한 형태든지 그것이 죄로서 성립이 된 이후에는 사실 벌금도 징역살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죄는 지어졌지만, 죄값을 치러질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의 죄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양심의 가책이라는 일종의 정서적 박탈감을 줌으로써 제 자신도 가련한 피해자라는 비겁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죄인을 심판하고, 형벌을 주는 사람들 역시 그를 정죄함으로써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뿐이다. 누가 그들에게 심판할 권리를, 죄인을 죄인이라 부르고 잡아가둘 권리를 주었는가? 죄에 주어지는 벌은 죄인은 죄인 나름으로, 그를 벌하는 이들은 그들 나름으로 끝없이 반복될 죄에 대한 경고와 자신들의 도덕적 허영심, 교만함의 대가로서 치러진다.3. 우연, 운명, 구원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욕심낸 이스마엘의 아들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 벌은 제게 너무 가혹합니다, 탄식했던 우리의 조상들을 기억한다. 이러실 바에는 차라리 이 자유의지를 박탈해 버리심이 어떨른지요?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완벽하게 정당화되지 않는 그의 가치관과 죄, 그리고 그로 인한 얄팍한 죄의식으로 번민한다. 사실은 모든 것이 그의 철저한 의지 때문이어야 하는데, 사실은 번번이 우발적으로 끼어드는 상황이나 사람들 때문이었다. 길가의 흘러가는 대화와 버려진 도끼, 객사하는 노인과 소냐의 사랑은 전부 라스콜리니코프의 자발적 선택이 아닌 우발적 간섭이요, 참여에 불과하다. 끝내 자수를 하는 라스콜리니코프지만, 이 역시 소냐의 권유와 빼뜨로비치의 치밀한 압박 수사가 그의 자수를 종용했다. 심지의 그의 남은 인생 마저도 불확실한 우연성으로 점철되어 아무것도 예견될 수가 없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신은 인간의 몸으로 보내신 아들의 피로, 사랑과 긍휼로 모든 죄인의 죄값을 치렀다. 신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자들은 이미 치러진 죄값으로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순결하게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소냐의 사랑과 빼트로비치의 유난한 직업의식 역시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구원의 통로로 주어지 신의 은총이다.신이 창조한 이 세계는 어떻게라도 측량할 수가 없는 까닭에 전부 희미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우발적 세계로 의식된다. 죄, 그리고 죄에 대한 벌, 그리고 구원마저도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 신의 무한한 섭리 안에 있다. 때로는 죄를 짓고 때로는 용서를 받겠지만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신의 섭리이다. 신에 대한 사탄의 도전과 신의 보호하심이 한 인간의 믿음과 용기, 연약함과 게으름의 정도에 따라 때로는 죄가 되어, 때로는 순종으로 보여질 뿐이다. 악마의 마리오네트가 되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춤을 추는 대신 신의 무한성을 소망하는 수 밖에는.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는 없다. 완벽하게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없다. 단지 구원만이 있을 뿐이다. 망각으로서의 용서가 이루어진 후에 삶의 영원성 아래에서 신 앞에서는 한없이 비참하고 더러운 몸뚱이에 불과한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구원을 통해 완정한 영혼으로서의 자신을 불완전한 육체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소명인 것이다.서평 04 죄와 벌
    독후감/창작| 2007.06.21| 3페이지| 1,000원| 조회(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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