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의 마음(心, こころ)이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가 대학교 3학년에 올라갔을 때 였다. 일본 문학 이라는 것 을 내가 접해본 것 은 아마 현대의 문학이 대부분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 라든지 에쿠니 가오리 같은 작가의 필체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책이 나오면 사서 읽거나 영화가 나오면 관심 있게 지켜봤었다. 하지만 내가 일본 고전문학이나 일본의 근대소설 등의 배울 기회가 있었다는것은 아마도 일본어과에 입학했던 나로서는 굉장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일본의 고대소설이나 중세, 근대의 소설등을 통해서 현대작가들이 작품에 영향을 받고 글을 쓰는 방향의 나침반으로 사용되지않았을까 하는점이 문득 궁금해지기도한다.내가 지금 쓰려고하는 이 작품을 택한 이유로 말하자면 솔직히 그 당시에 수업시간에 배웠을때 다소 충격적이었던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소설선택의 기준은 딱히 없다. 좋아하는 편이라던가 싫어하는 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의 그런 구분을 애매모호 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지금도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고 해도 충격은 가시지 않을것 같다. 이보다 더 극단적이고 이보다 더 냉철한 묘사를 나타낸 책들도 수없이 봐왔지만 이 책에 느껴지는 풍체랄까 이 소설속 느낌의 와닿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쩜 그 수업시간에 열정을 가지고 하나라도 더 알려 주시고자했던 교수님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런것들은 중요하지 않은것 같지만,,이 작품의 작가는 나츠메 소세키라는 작가이다. 이 작가를 모르지는 않았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라는 작품을 통해 익히 들어알고 있었다. 그의 데뷔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은 최근까지 개정되어 신판으로 나올만큼 인기를 얻고 있었다. 고양이라는 존재를 풍자해 인간 본연의 본편적인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역시나 데뷔작이라 그런지 그의 서술체나 문체는 조금은 어색해보였다. 솔직히 나도 이 소설을 읽을때 조금은 지루하다고 생각은 들었다. 물론 주관적인 평가에서말이다. 내가 쓰려고하는 이 작품인 마음(こころ)는 아마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중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가 1916년 12월 9일 향년 49세 “명암”(明暗) 집필중 사망했으므로 그의 가장 마지막 완작은 마음(こころ)이되는것이다. 그는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 발표를 시작으로 1906년에 도련님 (坊っちゃん) 1907년에 우미인초(虞美人草) 1908년 에 삼사랑 1909년 그리고(それから) 1910년 문(門) 1912년에 행일(行人) 그리고 1914년에 마음(心) 마지막으로 1916년에 명암 (明暗)등의 작품을 대표작으로 손 꼽을수있다. 그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 이었다고 한다. 부인의 자살기도나 형제나 자식들의 병약한 것도 그중하나의 이유라고 할수 있겠다. 실제 그도 몸이 아파서 굉장히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의 글에서도 조금은 느껴질 만한 법이었다. 마음(이하 코코로) 에서의 주인공들의 내면 심리적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보였다. 가슴 아픈 절절한 대사와 강하고 획일적인 그의 필체가 놀라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든다고 해야 할까 흥미진진해지면서도 어느샌가 숙연해 져있고 즐겁게 보다가도 어느샌가 주인공이 감정의 변화가 풍부한 작품이었다. 내가 처음접한건 수업시간에 만화로그려진 코코로였다. 이해하기쉽도록 만화로 되어있어서 어쩜 더 흥미로웠을지모른다. 그리고나서 일본어로 집필된 코코로 단행본으로 수업을했다. 온통 죄다 일본어천지였고 만화로 그 내용을 미리 배우지않았다면 힘들었을법한 책의 수업이었다. 수업시간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도서관에서 번역본을 찾아서 읽고 이해하고 공부하였다. 더 읽으면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할것같아 그날 배운 부분들까지만 읽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내용을 알아가고 작가의 의도나 글의 내용등을 배워가자 묘한 흥미같은것이 생겼다. 이책의 주인공은 크게 네사람으로 구분될수있다. 글을 쓰고있는 나자신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의 부인(아가씨),그리고 K라는 사람, K라고 칭송하는 별 다른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남자와 선생님 본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글쓴이는 묘한 끌림을 받게된다. 어떠한 의도도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점점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딱히 이렇다할 계기가 있는것도아니었기 때문에 글쓴이의 끌림은 더욱더 미묘했다. 이책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 감싸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결말을 알고있기 때문에 느낄수없을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면 무언가 계속 돌고 돌고 또 포장되어진듯하 느낌이 온다. 인물들간의 단순하지만 복잡한관계, 그리고 얽히고 섥혀진 이야기전개, 그리고 밝혀질듯 말듯한 스토리의 특성이 매우 조화를 이루고있다. 먼저 코코로는 상중하의 3단계로 이야기가 나눠져서 전개된다. 상(上)편에서는 선생과 나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글쓴이와 선생님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내용은 어쩌면 이야기의 돋움부분이아닐까한다. 그리고 중(中)편에서는 부모님과 나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이되는 부분이라 할수있는 하(下)편에서는 선생님과 유서 라는 이야기로 전개되어진다. 내가 제일 흥미롭고 재밌게 보았던 부분도 이부분이다. 가장많은 내용들이 담겨져있고 가장 많은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되는곳이다. 궁금했던 궁금증도 풀리는 부분이다.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대충정리해보자면, 이야기의 중심부는 선생님과 아가씨(지금의 선생님 부인) 그리고 K라는 사람이다. K와 선생님은 친구관계이고, 세사람은 한집에서 하숙인과 주인아주머니의 딸의 위치에서 동무처럼 지낸다. 그리고 결정적이게도 K와 선생님은 아가씨를 사랑한다. 동시에 한사람을 사랑하는것이다. 그리고 결국 선생님은 아가씨와 결혼게되고, K는 그 결혼때문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게 자살하고 만다. 선생님은 아가씨와 결혼후에도 지금까지 죄책감에못이겨서 평생 죄의식에 사로잡혀 지내게 된다. 결국에 선생님은 글쓴이 (나)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자살하고만다. 대충의 이야기이다. 대충줄거리만 봐도알수있는것은 흔한 삼류 멜로가 아니라는점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수있는것이 여기서 나오는 K라는 사람이나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그 시대 그리고 자신들의 상황에 놓여진 운명을 비관하기도하고 위로하기도한다. 선생님이라는사람의 운명도 기구하다. 자신의 유복한집안형편이 하루아침에 숙부에 의해 몰살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 어린나이에 재물에 대한 어떠한 욕심은 없었지만 그들을 응징하고 복수하려는 뜻을 품기도한다. 하지만 그에대한 어떠한 대처도 어떠한 극단적인 방법을 행하지도않았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네. 아지, 생각해 보면 나는 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을 지금 하고 있지. 나는 그들을 증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로 대변되는 인간 존재 자체를 증오하는 법을 익혔네. 이게 내 식대로의 복수라고 생각하네...” 다만 책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모순되는 상황도 보여주고있다. 뭐 사람이란 본래 굉장히 모순덩어리 이지만 분명 각자 어느 한가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굉장히 다변적이고 거짓된 점도 많이 볼수있다. 이때문에 인간다운 것 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글쓴이인 ‘나’는 선생님의 그런 본연의 모습에 끌려서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더욱더 선생님에게 애착을 가졌을지도모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상처라는 단어에 대해 민감히 생각해 볼 필요가있다. 선생님과 K의자살 어쩌면 이 모든게 서로의 상처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있고 상처를 받을수도있다. 그리고 그 방법도 다양하다.어떻게 표출하느냐가 관건인것이다. 선생님은 선생님대로의 죄의식에 대한 상처 K는 K대로의 배신감에 대한 상처가 있을수있다. 물론 K가 자살하기 직전 선생님에게 남긴 유서에서는 선생님과 아가씨에 대한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람의 직감이라거나 선생님이 그당시 느끼기에 가장 충분한 이유는 아마 선생님과 아가씨의 결혼 즉 K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생각한다. 나같아도 그랬을것같다. 나에게 먼저 상대방이 마음을 터놓고 상의한이야기에 조급해져서 나도모르게 일을 실행시켜버렸던 선생님의 비겁함이라고도할수있는 상황이 선생님의 입장에선 충분히 죄스럽고 한평생 시련을 겪으며 살아가야한다는것이. 애초부터 원인을 만들지않으면 되지않았냐라는 비판도있을수있다. 하지만 선생님의 결혼에 대한 허락은 아프다는 핑계까지 대가면서 골똘히 생각한것이므로 작정하고 내뱉었다는 결론이된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충분이 친구로써의 우정을 져버리는일이었다. 하지만 K도대단한것이 자신이 자살하기전의 선생님에게 남기는 유서에다가 그 일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않았다는것이 놀라울따름이었다. 책에서보면 선생님이 K가 향한 아가씨에 대한 사랑을 질투하며 거리를 두는 장면이 글쓴이에게 남신 유서내용속에서 나온다.“K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며 휘청거리고 있는 것을 본 나는 단칼에 그를 넘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점만 노렸습니다. 그리고 금방 그의 허점을 찌르려 달려 든 것입니다. 나는 그를 향해 돌연 엄숙한 태도를 취하고 정색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계략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태도에 버금가는 긴장감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우스꽝스럽다거나,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나는 우선 “정신적인 향상심이 없는 사람은 바보다.” 라고 호언했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보슈 지방을 여행했을 때, K가 나를 향해 한 말입니다. 나는 그가 말한 것을, 그와 똑같은 어조로 그대로 그를 향해 되던진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복수는 아닙니다. 나는 복수 이상으로 잔혹한 의미를 포함해 말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 한마디로, K앞에 펼쳐진 사랑으로 치닫는 길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몽상가들( The Dreamers 2003)-프랑스이영화를 접했을때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몽롱했다고나할까, 솔직히 지금 이것을 쓰는 시점까지도 아직까지 잘 이해되지않는 부분도있다. 한마디로 나에겐 어려운영화였다. 하지만 아름다웠고 예쁜 영화였다. 레포트를 쓰기전 프랑스 영화의 어떤것을 보고감상평을 쓸까하다가 찾아낸 영화이다. 제목그대로 이 영화를 보고난후 난 꿈을 꾸고있는것같았다. 영화에대한 식견이 조금 있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감독이 영화속에 내재한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이 레포트를 마무리 지을때 결론이 날것같은 예감이 든다. 우선 이영화의 배경은 프랑스 68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기성세대의 모든 것에 대한 젊은이들의 도전으로서 1968년에 학생들이 일으킨 반체제운동을 말한다..프랑스 68혁명, 영화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장이던 "시네마테끄"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시작하게된다. 또한 영화 중간 중간의 실제 필름과 재연 장면을 교차하면서 배경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도입부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68혁명은 주인공 셋 즉 매튜와 이자벨 그리고 테오에게는 청춘의 혼란을 느끼기에 너무나 완벽한 설정인것같았다. 영화속 배경이 혼란스러운 시대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음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지사인것이다. 이들 세사람은 그런 혼란스런 시대의 혼란스러운 젊은이들인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이 온전할리가 없다.그들은 영화속의 장면을 흉내내고 영화속의 인물이 되는것에 희열을 느낀다. 영화에 사로잡혀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도 영락없는 어린 모습에 불과하다. 위험한 장난을 하기도 하고 유치한 게임을 하기도한다. 기성세대에게 경제적으로 전부 의존하면서 기성세대의 사고를 열렬히 비난만 하는 것 또한 매우 유아적이다.물론 그들의 잘못뿐만이 아니다. 방관한채 보고있는 부모에서부터 시대의 흐름과 그 시대에 동요하게 만든 상황들이 모두 비판받아 마땅한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철없는 유아적이라는것은 아니다. 서로같은 책을 보거나 영화를 봐도 매튜와 테오는 항상 대립한다. 서로 열띤 토론을 빚어내기도하고, 울컥화가치밀정도로 큰소리를 내기도한다.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가고있는것이다. 기성세대가 생각지도 못할 만큼 엉뚱하고 독특한 생각을 하고있다는것도 그 중하나의 이유이다. 기성세대에게 반발하면서도 의존적인 면도있지만, 그것을 통해 성장해 가고 나아가고있음을 그들은 알고있었을까,,사랑하고 다투고 이해하고 화해하는것도 성장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였다. 그들은 차츰 알게모르게 서로 성장해가고있었다. 샴쌍둥이인 자신의 친오빠를 사랑하는 이자벨의 심경도 어쩌면 하나의 커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랑에만 심취하고 영화에만 심취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시위하는 거리에 휩쓸려가도 감독은 그들이 성장해가는 시점에서 애정을 가지고바라보는입장임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감독이 주고자 했던 모티브는 중간자적인 입장이 아닐까한다. 시위의 주체인 젊은이들의 편을 든것도 아니고 그 혁명의 원인인 기성세대의 편도 들지않았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그렇게 아무결론없이 올라간다. 이영화를 보고나서 나 또한 젊음과 열정 그리고 청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세상사람들 흔히 젊음을 믿어라 젊으면 가능하다라는말을한다. 나또한 지금의 젊음과청춘에 반할만한 생각을 가지고있지는 않다. 지금나 자신의 젊음과 열정 그리고 청춘을 표출할수있다는 점이 굉장히 좋다. 기성세대에게 내보인다는 뜻이 아닌 단지 그 시기라는게있으니까 그걸 지금 즐길수있는것이 좋은것이다. 하지만 젊다는것만 믿고 흔히 젊은 세대들은 표출적이고, 꿈꾸는것을 즐긴다. 모든 세상의 일이 내가 꿈꾸고 바라는대로 이뤄질꺼라 믿는다. 물론 나쁜것은 아니다. 즐길수 있고 느낄수있는꿈이 있다는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한 일이니까,하지만 그 꿈이 터무니없고 세상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못하는 자신만의 공허한 꿈이라는걸 망각할때도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고생각하고 자신의 뜻에 반합되면 무조건적으로비판하는경우도있다. 그로인해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바꿔야한다고 목소리 높여말한다. 바꿔야할것은 바꿔야겠지만 광대한 꿈만 가지고 목소리 크게 동요시키는 우리들을 보는 기성세대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런걸 보고 기성세대들은 우리들을 몽상가라 부를수도있다. 많은 꿈을 꾸고 그에대해 많은 생각과 행동을 보이고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면 크게 비판하고 결국 그 꿈 하나만 믿고 행동해 버리는 우리들의 행태를 일컬으며 하는 말일것이다.허나 그러한 행동들이 밉진않다. 기성세대들도 젊음이란걸 믿고 열정을 가지고 청춘의시기에 우리들과 똑같은 모습이었었기 때문에 이해하고 존중할줄안다.이러한 혼란과 갈등의 시기를 지내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거쳐서 점차 완성되어가는것이 아닐까 한다. 모처럼 뜻깊고 의미있는 영화였다.
영국민은 전통을 존중하고, 변혁을 싫어하는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영국민의 국민성을 한국민과 비교하여 논하시오-이러한 과제가 주어졌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고나 할까, 대학 4년 내내 일본어에 대한 일본에 대한 것만 배우다가 막상 다른 나라의 문화나 성향을 배우려하니 여간 힘든 일 이 아니었다. 전공이 전공인 만큼 일본에 대해서는 자신 있었지만 그 외의나라들에 대한 것 은 무지했던 나였다. 어쩌면 그로인한 계기들로 인해 내가 이 수업을 선택했던 것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국민과 한국민의 비교성을 논하시오,, 참 어찌 보면 지극히 주관적일지도모르고,편파적인 내용이 될지도 모른다. 한나라의 국민으로써의 자긍심 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건 나의 주장과 함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필요성이 있는 과제인 것 같다.영국사람 하면 흔히 신사라고 불린다. 나 역시도 대중매체나 책을 통해 신사적이고 매너 있는 영국사람 이라는 말을 많이 듣기도하고 보기도 했다. 또한 영국생활과 문화라는 이 수업 에서도 매너 있는 영국인 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신호등을 건널 때의 예시가 그 중 하나 일 것 이다. 우리나라의 운전자들은 솔직히 주관적인 나의느낌 으로 봤을 땐 너무나 격하다. 대중교통인 버스만 타도 느낄 것 이고 한밤중 신호를 무시하고 쌩쌩 달리는 과속운전의 택시 또한 그럴 것 이다. 무섭기도 하고 화가나기도하는 운전자들의 행동인 것 이다.영국에 가보진 않았지만 이러한 대중교통의 문제점은 어딜 봐도 없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책을 찾아봐도 영국에서 오래 유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도 교통에 대한 불편함이나 불만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이 그렇다기보다 일부 운전자들의 매너 없는 행동이 비교대상에 오른 것 이다. (물론 나의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외향적으로 따지자면 영국인들은 겉으로는 매우 차갑고 꼼꼼한 인상을 주지만 대체로 공손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매우 유머러스하다 고 한다. 영국인은 보통 성격이 차가우면서도 친해지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많은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친구로서 곁에서 두고 본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따뜻하고 정감 있는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점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점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척 까다롭고 매너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온화한 느낌이라고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외국 사람들의 눈에 비춰진 한국민의 인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땐 우리나라사람들의 성격은 굉장히 급하고 까다롭다고 들었다. 물론 이것도 일부의 사람들의 관점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그들도 우리처럼 지역주의가 있다고 한다. 아직도 스코틀랜드사람들과 아일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 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의 지역이기주의와 비교해보면 좋은 예 인 것 같다. 그리고 해결해 나가야할 방책도 연구해야하는 관건이다. 이처럼 영국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라고들 한다. 과제의 주제처럼 변혁을 싫어하고 고리타분하더라도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전통을 따르는 보수성을 지닌 민족이라고들 한다.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인 런던시내 한복판이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인 것만 봐도 알 수 있겠다. 절대로 역사적인 건물을 교통이 불편하다고 밀어버리진 않는다. 차라리 교통량을 줄인다고 한다.통행이 불편하다고 생각되어질 만큼의 문화재라도 역사적인 것이기에 전통적으로 중시해왔던것이기에 그들은 존중하고 소중히 여긴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오래된 옛 건물이나 도로에 손을 대지 않는 전통을 고집하는 보수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솔직히 이런 행동이나 개념이 좋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아무도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들의 생각자체를 뒤바꾸려 할 수 도 없고 잘못 되었다 고 비판할 수 도 없다. 불편함을 참으면서까지 고집하는 데는 분명 타당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또한 영국인들의 보수적인 성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국에 대해 조금만 자세히 공부하고 배운다면 충분히 알만한 것들이 수두룩하다.왕실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은 식지 않는다. 여전히 왕실을 존경하고 따른다. 여왕을 존경하고 우러른다.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귀족 제도가 아직도 존속하고, 우측통행으로 바꾸는 나라가 많아도 여전히 좌측통행을 고집하며, 같은 술집이라도 중류 계급과 노동자들이 들어가는 입구가 다를 정도로 고전적인 계급의식이 여전하다 .70~80년대에나 흔히 볼수있을 것 같은 찰리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의 검은색 양복에 중절모자를 쓴 사람들이 시내 오피스가 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늘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판사는 지금도 가발을 쓰고, 극장은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곳이 많다. 우리나라라면 흔한 말로 대목인 일요일에 극장이 문을 열지 않는다는 건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극히 일부인 생활일지도 모른다. 영국 젊은이들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구식정보라고 손사래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인 것을,하지만 영국민들은 보수적인 성향만 가지고 있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보수파 진보파가 있듯이 그들도 무조건적인 보수라는 개념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산업 혁명의 선두 주자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미련 없이 처칠의 보수당 정부를 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제트기를 날리고, 어느 나라보다 앞서 원자력의 평화 이용을 달성하였으며, 자본주의의 모국이면서도 다른 자본주의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 보장 체계를 확립하는 등 보수와 진보의 미묘한 혼합이 영국인들의 생활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보수와 함께 진보해나가는 그들의 성향이 비로소 영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이다. 막연한 보수적인 편견보다는 보수+진보적이 되어가는 그들의 본질적인 성향이 제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영국은 섬나라이다. 많은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산다. 과거의 그들은 수없이 많은 전쟁을 하고 지배당하고 지배해가며 영국이라는 나라를 완성해왔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한 모태일 것이다. 그들은 옛날부터 유럽대륙과는 긴밀한 교섭관계를 유지, 순수와 고립보다는 타협과 개발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국어(영어)를 사용하기 전 에 프랑스어가 영국 왕실의 공식 용어가 되면서 프랑스적 문물이 곧 문화적이라는 사회통념이 생겨났다. 14세기 후반, 영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초서가 프랑스어 대신 중동부 지방의 영국어를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면서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보편화되고 그가 사용한 말이 근대 표준 영국어의 모태를 이루게 되었으며, 셰익스피어 등 영국 르네상스 작가들의 노력에 의해 영어의 표현력은 더욱 풍부해졌다. 그러나 희랍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여러 나라 언어들의 유입이 영어 자체의 표현력 증대와 문법 간소화 현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영향 관계를 영국인들은 문화적인 향상과 발전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데에서 영국적인 타협주의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처음엔 중국의 한자를 빌려 쓰다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후에도 한자의영향이 한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인들의 타협주의는 그들의 정치제도와 종교제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 는 영국식 입헌 군주 제도는 군주의 존재가 국민 여론을 무시하기 쉬운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예에 속한다. 또한 양당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절충과 고도의 정치 감각이 요구되는 영국의 내각책임제 정치제도에서도 역시 영국민의 타협주의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이기 때문에 어쩌면 관점부터 다를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부러운 부분 중 하나이다. 타협하고 이해하고 절충의요소를 찾는다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실황을 보면 뻔히 드러나는 수면에서 왜곡하고 비판하고 헐뜯는 부분에 대한 것 에 이제는 지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