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 Fille Mal Gardee >-고집쟁이 딸● ‘도베르발’ 원작의 동기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항구도시인 보르도에서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던장 도베르발은 어느 날 마을을 거닐다가 갑작스러운 생리현상을 느꼈다.급히 근처 화장실을 찾아 용무를 해결하던 그는 한 유리가게 창문에 걸린 판화에 시선이 모아졌다. 그 판화는 시골 농가의 창고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딸로 보이는 처녀가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딸을 야단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그리고 그들 뒤로 뒷걸음질치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녀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그 판화를 보면서 용무를 보던 도베르발은 화장실 문을 나서면서 이미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영감을 얻은 작품이 바로 ‘행운,불행은 종이 한 장의 무게’ 라는 2막3장의 발레로 1989년 장 도베르발의 안무로 보르도에서 초연되었다.● 작품의 배경설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막 발레로 기록되는 작품으로 이 작품이 초연된 1789년 이전의 발레의 주인공들은 모두 귀족이거나 요정, 여신 등 높고 초현실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고집쟁이 딸은 그런 유형을 깨고 평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발레이다.음악은 지방의 민요와 당시 유행했던 속요의 멜로디를 편곡한 혼성곡을사용했다고 한다. 안무가인 도베르발은 원래 파리 오페라극장의 캐릭터무용수 출신으로 인물의 성격묘사와 유머를 다루는 감각에 있어서남다른 재질을 가졌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이 작품은 곧 커다란 성공을거두게 된다. 또한 이 작품은 발레작품이 당시의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한것들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적 상황에 반하여 일반서민, 그것도 지방농가의 생활을 그린 최초의 발레작품이라는 의도도 지니고 있다.또 이 작품은 1791년 런던 판테온극장에서 공연되면서 비로소이라는 제목이 붙여진다.이 작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막 발레 (1789년 초연) 로 그 당시 발레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귀족, 요정, 여신 등 높고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아닌 평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전체적인 줄거리는 딸을 부자에게 시집 보내려는 어머니와 애인과 결혼하고싶어하는 고집쟁이 딸의 해프닝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어머니 역을 덩치 큰 남자 무용수가 맡아 풍자성을 강조하고, 발랄한 군무 장면들이 펼쳐져,클래식 발레가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발레도 재미있고 유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상문무용공연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는 보는 내내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매우 유쾌한 작품이었다. 딸을 부자에게 시집 보내려는 어머니와 연인이 있는 고집쟁이 딸의 해프닝이 보는 내내 즐거움을 준다. 멍청한 부자 알랭, 억척 어멈 시몬 같은 조역들의 재밌는 춤은 주역보다 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강한 어머니 시몬 역을 여장한 남성 무용수가 맡아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시몬느의 무용이 제일 눈에 들어 왔다. 시몬느역이 여자역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발레리노가 역할을 맡아 탭댄스도 보여주고 표정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하는 것 이 매우 코믹스러웠다. 그 코믹스러움에 보는 내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무용공연, 특히 발레는 지루하고 따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의 공연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뒤집어지게 하는 공연이었다. 무용공연을 보면서 항상 신기한 점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잘 전달된다는 점인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그런 것 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소품이나 의상, 배경, 무용수들의 역동적이고 화려한 춤 솜씨가 어우러져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고전 발레에서는 동화 같은 순수함과 아름다움서정성을, 현대 발레에서는 고전 발레에서는 볼 수 없는 실험 정신과 파격적인 창조성을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역동적인 힘과 다양한 표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유명한 작품을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유쾌한 무용공연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회배경, 특징, 비교뉴욕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미국 미술의 발흥은 거의 전적으로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에 의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50년대에 본격화된 이 추상표현주의로 인해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현대 미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좋든 싫든 추상표현주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수 없다. 또한, 새천년에 걸 맞는 새로운 예술적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 한 시대를 풍미한 변혁의 풍경을 살펴보는 것도 적잖은 의의를 가질 것이다. 이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미술이 어떻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자취를 탐색해 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르네상스 이후의 화가들은 고대의 대가들에 필적하는 기술적 능력과 표현력을 쌓는 데에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좀 더 사실적인 인간을 그리고자 하였고,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실제 인간의 눈으로 보는 듯한 그림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된 인간의 모습은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 완벽에 가까운 구도 등으로 극한의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이른바 ‘신 앞의 인간’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평가절하 했던 중세의 가치관을 극복하려는 인문주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있은 후 현대미술은 그 중심지를 유럽에서 ‘신대륙’, 즉 미국으로 옮기게 된다. 도시로 말하자면 파리에서 뉴욕으로의 이동인 셈 이다. 20세기 전반 미국에서 성행 하였던 사실주의를 거쳐, 1950년대에는 추상 표현주의 미술이 등장 하게 되었다. 추상 표현주의는 큐비즘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만들어 졌다. 하지만, 추상 표현주의는 유럽의 추상미술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미국만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주자는 잭슨 폴록 이라는 작가이다. 그는 47년경부터 뿌리기 작업을 시작하였다. 무언가를 스그의 그림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의 실체라고도 볼 수 있다.잭슨 폴록과 드 쿠닝 이외에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는 다른 성격의 작가들이 또 있다. “액션 패인팅” 작가들이 있었는가 하면, 커다란 색면을 주고 그렸던 색면 추상화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을 강렬한 색채로 채우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화가 마크 로스코 는 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제목들을 가진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물감이 캔버스에 스며드는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붓 대신에 스펀지를 사용하였다. 그 결과 윤곽선이 분명하지 않은 사각형들은 미묘한 색채들과 함께 신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로스코 외에 바넷 뉴먼 이라는 작가도 있다. 그는 커다란 색 면과 그 속을 통화하는 단선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신비적이고 숭고한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뉴먼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액션페인팅의 작가들이 즉흥적인 표현에 의존하고 있었다면, 색면 추상 화가들은 신비주의고 숭고한 느낌에 가까운 정신성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외부세계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작가의 내면에 중점을 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이다.팝아트는 추상표현주의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흘러 관객들과 소통을 못하고 있다는 점에 반기를 들고 당시 대중들에게 깊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매스미디어와 광고 등의 시각적 이미지를 구현하여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하려 한 미술표현 방식이다. 미국의 팝아트는 1950년대 이런 추상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영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이다. 관객의 마음의 문을 열고, 나아가 관객 스스로 그의 주변 환경을 더 깊이 의식하게 하는 것)의 지극히 평범한 것조차도 미적,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사상에 고무. 미국의 팝아트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의 팝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흘러넘치는 영상 또는 물체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는 반미를 보여줌으로써 예술의 일상화를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팝아트가 나오기까지의 미국의 사회배경을 살펴보면, 1950년대 초 영국에서 그 전조를 보였으나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매스 미디어와 광고 등 대중문화 적 시각이미지를 미술의 영역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구상미술의 한 경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미술평론가 L.앨러웨이가 1954년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팝 아트가 비평용어로 채택되기 이전에 팝아트 적 징후를 상기시키는 작품이 영국에서 나타났다. 즉 1949년부터 F.베이컨이 작품에 사진을 활용함으로써 팝 아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나 베이컨은 팝 아트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으며, 1954~1955년 겨울에 영국의 젊은 작가들의 공동작품 및 그것과 관련된 토론 가운데 팝 아트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대중소비문화에 대한 관심 아래 조직된 전시가 1956년에 열린 ‘이것이 내 일이다’이며, 이 전시에 R.해밀턴이 출품한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팝 아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팝 아트는 사회비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기존의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다다이즘과의 친근성을 보여준다. 영국 작가로 해밀턴을 비롯해서 P.블레이크, D.호크니, R.B.키타이, E.파올로치 등이 있으며, 특히 해밀턴이 바람직한 예술의 성질로 열거하고 있는 것들, 예컨대 순간적, 대중적, 대량 생산적, 청년 문화적, 성적(性的), 매혹적, 거대기업적인 것 등은 현대 대중문화의 속성을 그대로 압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팝 아트의 성격은 미국적 사회 환경 속에서 형성된 미술에서 더 구체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세대인 R.라우션버그와 J.존스는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각종 대중문화 적 이미지를 활용하였는데, 이들의 작업이 다다이즘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서 네오 다다(Neo dada 한편으로는 다다이즘에서 발원하는 반(反)예술의 정신을 미학 화 시키고 상품미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적 대안의 제시보다 소비문화에 굴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즉, 미국은 정책적으로 미국인만이 할 수 있는,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 사조를 창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팝아트이다. 대중 예술 미국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소비자본주의를 반영한 사조가 팝아트이다.현대에도 갤러리나 인터넷에서 팝아트를 많이 보고 접할 수 있다. 1956년부터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팝아트(pop art)'가 성행하였는데 팝아트의 작가들은 지각이 가능한 세계, 즉 일상적인 사물이나 인물, 사건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추상미술에 대해서는 대응으로 간주되어 왔다. 본격적인 팝아트가 시작되기 전 선례를 보여준 미술가들로 라우젠 버그가 있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회화를 다수 제작하게 된다. 그는 신문이나 영화 등의 이미지를 꼴라주하여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다음 그 위에 표현적인 붓질을 하였다. 라우젠 버그는 추상미술과 팝아트를 연결해주는 다리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존스라는 작가도 있는데 그들의 작품들은 팝아트라는 범주보다 광범위한 의미영역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들로 보인다. 그들에게선 표현주의 적인 측면도 보이고 다다적인 측면도 보이기 때문이다. 팝아트란 명칭아래 분류되고 있고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로 앤디 워홀이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소재(마릴린 먼노, 엘비스 프레슬리, 코카콜라 등)등을 사용하고 있어 왠지 친숙하고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는 우리에게 지겨울 만큼 익숙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방법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원래 광고 제작 같은 일을 하던 상업미술가였다. 그의 판화들은 모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이 되었는데 실크스크린은 통상 광고전단 틀을 제작하는 인쇄기법으로 상업미술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기계적인 반복 또한 순수미술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광고물 비사유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 모든 작업은 주로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릭텐시타인은 이미지의 선택과 표현에 있어 대량전달매체, 즉 만화를 매개체로 이용하여 개성적 표현을 극도로 기계화하고 형식화하며 보편화된 대중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팝 아트 작가들은 손으로 하는 작업을 기피하여, 소재를 선택하고 실크스크린 판을 만든 뒤 적당한 색깔로 찍어 내는 작업 을 반복한다. 이러한 제작 과정을 통한 작품은 누구의 작품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개성적이다. 두 번째로, 에로티시즘의 표현에서는 대량소비사회에서의 현실을 반영한 팝 아트는 매스미디어의 통속적인 주제, 사랑과 성(性)을 통하여 진실된 인간존재의 참 모습을 찾고자 하였다. 도구화된 성과 상업화된 성 표현으로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환기시켜준다. 팝 아트가 에로티시즘과 관련이 있는 것은 대량 소비, 즉 상업적 전달메세지로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성(性)이기 때문 이러한 경향은 섹스와 매력을 강조하여 인체와 젊음을 개방하고, 노축된 윤곽선으로 에로티시즘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새로운 에로티시즘으로 탄생시켰다. 다음으로 레터링과 그라피토 기법이 있는데, 이것은 민속적 의미인 성조기나 표적 등을 사용하여 자극적이며, 선명한 효과로 디자인 요소인 대칭과 균형을 강조한다. 화면에 문자와 숫자등의 기호를 사용한 팝 아트는 날카롭고 선명한 효과로 비개성적이고 반감정적인 차디찬 기계적 감성을 추구한다. 그라피토(Graffito)란 고대의 건축물에 당시의 사람들이 남긴 낙서, 그림, 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팝 아트 작가들에 의해 하나의 기법으로써 작품에 활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앗상블라쥬(Assenblage)와 전위예술로서의 표현이 있다.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이전에는 작품의 소재로 사용치 않던 일상생활 주변의 기성 이미지의 비예술적 오브제를 선택 하는 새롭고 전위적인 시도와 재래의 조각이나 회화 기법에 반대하는 앗상블라쥬의 표현은 팝 아트 적 요소이다. 앗상블라쥬(Assenblage이다.
바슬라프 니진스키 (Vaclav Nijinsky)니진스키라는 이름은 무용의 신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계 발레사에 있어 지금은 하나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러시아의 황실 무용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성 페테르스부르 그의 말에 마린스키 극장과 뒤에는 세르게의 디아글레프의 위대한 사설 발레단 “발레 륏스”의 주도 무용수로서 바슬라프 니진스키는 무용사에 하나의 신기원을 창조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거의 전설적인 명성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남성 무용수의 상징으로서 우상시되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엔 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안무가로서의 그의 재능도 오늘날은 재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가 안무한 “목신의 오후”화 “봄의 제전” 그리고 “틸 오일렌슈피겔”은 안무의 예술을 혁신한 20세기의 새로운 스타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진스키는 평생을 가난과 온갖 시련에 직면하면서도 자신의 예술과 그것을 통해 인류에게 미와 환희를 선사하겠다는 단 하나의 열망에 전 생애를 송두리째 바쳤으나 철두철미 아웃사이드적인 내적 고뇌와 주위의 몰이해로 인해 점차 정신의 균형을 잃고 마침내 파멸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천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도주의자였으며 진리의 구도자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 즉 무용이란 자신의 고유한 매개를 통해서 인류에게 성스러운 메세지를 전달하겠다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점에 단순히 무용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니진스키의 위대성, 생애의 특이성이 있다 하겠다. 29세란 젊은 나이에 정신 이상이 되어 요양원으로 가기 직전 그의, 발광에 가까이 가면서 기록한 고백이라 할 “일기”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나는 인류를 사랑하는 광인이다. 나는 발광은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니진스키의 생애를 훑어보노라면 흡사 저 북구의 신화에 나오는 “우수 부인”의 저주라도 받은 양 그의 주변엔 태어날 때부터 비극의 그림자가 따라다닌 듯 하며 그리하여 그는 한평생 마치 노예의 발목에 족쇄로 채워진 이후로 니진스키의 어머니는 혼자서 세 아이를 양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기니젤리스 서커스 가기도 했다. 그의 가족은 여러 번 아사 직전에 처해졌으며 그리하여 그는 인생의 비참과 불행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실감했던 것이다. “일기”속에 나타난 그 자신의 생생한 고백을 읽어 보라.“나는 어린아이일 때 이미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내 영혼 울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역시 울고 있었다.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급우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어머니가 돈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그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였는데 내게 황실 극장의 재배인 에게 가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어머니가 돈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그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였는데 내게 황실 극장의 지배인에게 가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나는 겨우14살 아니면 15살이었다. 지배인은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크루펜스키였다. 나는 극장을 사랑했다. 나는 사무실로 갔다. 내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당황했던지. 크루펜스키가 앉아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웃고 있는 메마른 얼굴들을 보았다.크루펜스키는 새까만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무서웠고 그의 수염에 공포를 느꼈다. 나는 잎사귀처럼 떨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크루펜스키와 다른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더 떨 뿐이었다. 나는 떨었고 모든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크루펜스키는 내게 무얼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어머니의 부채를 갚기 위해 5백 루우블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 금액을 엉겁결에 말했던 것이다. 내가 도대체 무얼 지껄이고 있는가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일어섰다. 나는 따분한 얼굴들을 보았다 나는 나왔다. 그리고 헐 떡 이며 빨리 달렸다. 크루펜스키의 검은 수염이 나를 추격해 오는 것 같아 나는 힘껏 달렸다.이 여학생은 니진스키를 “신동”이라 부른 많은 기사를 스크랩한 앨범을 그에게 선사하는 것이었다. 니진스키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으나 그걸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정신적으로 사랑했으며 그래서 항상 그녀에게 미소했다. 나는 언제나 미소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미소하기를 좋아했다. 내가 그들 모두에게서 사랑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했다.”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항상 천재에게 따르기 마련인 시샘과 오해가 그에게도 덮쳤던 것이다. 마린스키에서도 대중들이 그렇게도 그의 춤을 보고 싶어 했지만 연 8회의 시즌에서 그는 4번밖에 춤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댄서들의 질투와 음모의 결과였음을 그는 후에 알게 되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이해 받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정신의 파국을 향해 침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니진스키의 비극은 이미 이때에 그 뿌리를 내렸음을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나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나는 죽음을 느꼈고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리하여 나는 자신의 방이다 나를 가두었다. 나는 높은 천정을 가진 좁다란 방에 있었다. 나는 벽과 천정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내게 죽음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1905년 황실 무용 학교 재학 당시 성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일어난 혁명을 니진스키는 직접 목격했는데 그때 군대는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들을 칼로 마구 찌르고 도기로 머리를 때려 부수는 등 끔찍한 참살 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당시 16살이었던 니진스키는 이 공포의 유혈이 지나간 뒤 학우들과 더불어 피투성이가 되어 뒹구는 시체들 사이를 헤치면서 바빗치의 누이를 찾아 여자 시체를 더듬어 다녔다. 이 바빗치의 누이란 모든 학생들이 몰래 애모 하고 있던 17세의 미소녀로소 그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1917년의 혁명 때는 과격파가 뇌병원을 폭력으로 개방한 결과 이곳에 입원하고 있던 그의 형 스타니슬라브가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니진스키의까지 니진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모든 주도 역을 맡아 춤추었으며 모스크바이 볼쇼이 극장에도 객원으로 출연해서 공전의 성공을 기록했다. 모름지기 그의 춤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는 자신이 많은 역의 사람이 돼 버리는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임을 하나같이 인정하고 있다.의 흑인 노예나 의 인형이나의 공작 또는 의 판시이 되든 수련을 통해 자유자재로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습득한 것이었다. 그의 관중들이 흡사 최면술에라도 결린 양 그의 춤에 현혹돼 버리는 것도 바로 이 능력, 일종의 예술적 마력 때문이었다. 니진스키의 명성이 상승일 로에 있을 즈음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의 생애의 전기를 맞게 된다. 이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실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희구한 천분을 지닌 예술 애호가요 감식가며 천재적 흥행사였는데 그는 유럽 예술의 특수한 시기를 창조한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만하다. 블라디밀대공의 위촉에 의해 디아길레프는 주로 마린스키와 볼쇼이의 단원으로 구성 되 새 발레단을 이끌고 1909년 5월 17일 파리의 샤뜰레 극장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는데 이때 니진스키는 주도 댄서로 출연했던 것이다. 러시아 발레의 바리 초연은 실로 발레 사상 신기원을 열어준 역사적 저녁이었으니 현대 발레라고 일컬을 때 그것은 곧 디아길레프를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후의 발레를 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니진스키는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를 온통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의 육체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표정, 그의 흡사 깃털과도 같은 가벼운 움직임과 강철 같은 강인함, 엄청난 도약과 날아오름(즉, 니진스키는 높이 날아올라 흡사 공중에 한참 떠 있는 것같이 보였으므로 이걸 “니진스키의 엘르바시옹”이라 하여 발레 사상 자주 인용되고 있다.)그의 비상한 묘기와 극적 행위 등은 발레의 천재로 길이 남게 했으며 마침내 니진스키는 “무용의 신”이라고 불리워 지게까지 되었다. 이 러시아 발레단은 최초의 공연에서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후 유럽의 모든 수도스키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그는 좋은 의미 건 나쁜 의미 건 간에 니진스키의 예술이나 생애에 특히나 그의 발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임엔 틀림없다. 니진스키에 대한 그의 흥미도 애초엔 성적인 요소가 강력히 작용했을 것 같다. 니진스키가 최초에 그를 만났을 때(19세)의 일기를 읽어보면 두 사람의 관계에 내포된 특징적인 요인을 파악할 수 있다. 니진스키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이고르는 디아길레프를 내게 소개했고 디아길레프는 나보고 그가 묵고 있는 호텔 유럽에 와 달라고 청했다. 나는 그의 지나치게 자기만족에 찬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행운을 찾아 그에게로 갔다. 나는 나의 행운을 발견했다. 대번에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 허용했다. 나는 마치 잎사귀처럼 떨었었다. 나는 그를 증오했지만 그걸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와 내가 굶어 죽게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디아길레프를 만난 첫 순간부터 그라는 위인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리고 즉시로 그에게 동의하는 척했다. 우선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치러야 할 희생이 어떤 형태이든 어차피 그건 마친 가지였다. 그는 소년들을 사랑하는 남색가였다.”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는 5년 동안 함께 살았다. “나는 진지하게 디아길레프를 찬미했다. 그리고 그가 여성에 대한 사랑은 끔찍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를 믿었다.”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도소로 자라나 니진스키는 뿌리 깊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예술가 겸 애인”이란 자기의 위치에 극도의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디아길레프와 자주 다투었으며 그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래서 마침내 1913년 그가 24살 되던 해 남미 순회공연 길 에 올랐을 때 디아길레프는 파리에 남아 있었으므로 이걸 계기로 그는 부엔스 아이레스에서 헝가리의 발레 댄서 로몰라와 결혼해 버렸다. 이것이 니진스키의 생애에 두 번째의 전기가 된 셈이다. 이 로몰라는 헝가리었다.
? 배드민턴의 개요1. 배드민턴의 역사배드민턴과 비슷한 게임은 꽤 오래 전부터 세계의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것 같으나 배드민턴이 탄생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인도에서 행해지고 있던 '푸나 게임'이라고 전해진다. 푸나게임은 1820년대 인도 봄베이 주에 있는 푸나라고 하는 마을에서 처음 행해지면서부터 서서히 인도 전역으로 보급된 것으로, 게임의 명칭도 처음 행해진 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또 이 게임을 별칭으로 인디안 게임이라고도 불렀다. 이 푸나 게임이 영국에 전해지면서 배드민턴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근대 스포츠로써 훌륭히 성장한 것이다.이러한 게임은 차츰 영국 전역에 보급되어 1893년 영국배드민턴협회의 창립과 동시에 규칙이 제정되었다. 그 후 1934년에는 국제 배드민턴 연맹이 결성되어 현재 50여 개국이 가맹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1966년 방콕 아시아대회에서 여자 단체가 동메달을 획득하면서비약적인 발달을 하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중국, 인도네시아와 함께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Court, Net, Racket, shuttle cock2. 경기의 개요(1) 경기의 종류배드민턴 경기는 2명의 선수가 코트를 기준으로 양분되어 실시하는 단식 경기, 2명의 선수가 한 조가 되어 상대편과 경기하는 복식 경기, 남녀선수가 한 조가 되어 상대편과 경기하는 혼합 복식 경기가 있고, 단체전 경기로는 2복식과 3단식으로 구성된다. 단체전은 단식 두 경기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복식 두 경기를 하며 마지막에 단식 한 경기를 하게 된다.(2) 경기방법1) 승부 결정방법배드민턴에서는 배구나 테니스에서 말하는 세트(set)를 "게임(game)"이라고 한다. 1게임은 15포인트를 먼저 득점한 쪽이 이기게 되고, 시합(match)은 2게임을 먼저 이긴 쪽이 승리하게 된다. 즉 보통 한 시합은 3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간략하게 말하면 15포인트 3게임 매치. 단, 여자 단식의 경우에는 11포인트 3게임 매치가 된다. (복식은 남자와 동일)2) 체인지 엔드(Change End)네트를 사이에 둔 코트의 좌우를 엔드(end)라고 하며 1게임이 끝날 때마다 코트를 바꾸는 것은 체인지 엔드(change end)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3게임에는 어느 한 팀이 8포인트를 선취하였을 경우(단, 여자 단식의 경우에는 6포인트) 체인지 엔드(change end)를 실시.3) 세팅(Setting)배드민턴에는 배구의 듀스와는 다른 독특한 룰(rule)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세팅(Setting)이라고 한다. 세팅은 남자 단식과 복식의 경우 13대 13의 경우에는 5포인트, 14대 14의 경우에는 3포인트의 연장게임이 인정된다. (여자 단식의 경우에는 9대 9에서 3포인트, 10대 10에서 2포인트) 이러한 권한은 먼저 13점이나 14점에 도달한 팀이 가지는 것으로 하고 안 하고는 자유이다. 만약 세팅에 들어갔을 경우에는 심판이 "러브 올(Love All)"을 선언하고 스코어는 0대 0이 된다.4) 서브(Serve)시합은 토스(toss)로 시작된다.(동전이나 가위 바위 보로 정하기도 한다.) 이 때 셔틀콕이 가리키는 쪽이 서브권이나 원하는 코트를 선택하게 되고, 배구와 마찬가지로 서브권이 있을 경우에만 득점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토스에서 이기면 대부분 서브권을 선택한다.(3) 경기의 규칙1) 단식경기단식경기는 자기 득점이 0점이거나 짝수의 점수일 때 오른쪽 서비스 코트에서 서브를 넣으며, 자기 득점이 홀수일 때에는 왼쪽 서비스 코트에서 서브를 넣는다. 리시버는 상대편 서버의 점수가 짝수일 경우에는 오른쪽에서 리시브를 하며 점수가 홀수일 경우에는 왼쪽에서 리시브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브를 넣는 위치는 상대편 점수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자신의 점수가 짝수인가 홀수인가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1포인트를 얻게 되면 서버는 왼쪽에서 서브를 넣게 되고 리시버도 왼쪽에서 리시브를 한다. 경기가 개시되면 서버는 처음에 오른쪽 코트에서 상대편 오른쪽 코트로 서브를 넣어야 한다. 경기 중 서브는 주심이 스코어 콜을 한 다음에 넣어야 하며 서비스 콜(Service Call)을 하기 전에 서브를 넣으면 무효가 된다.2) 복식경기복식 경기는 최초 서브를 넣는 편의 경우 한 사람만이 서브를 할 수 있으며 서브권이 상대편으로 넘어간 경우부터는 두 사람 모두 서브를 넣을 수 있다. 복식 경기에서는 두 번의 서브권이 주어지는데 처음에 서브하는 선수를 퍼스트 서버(first server)라고 하고 두 번째 서브하는 선수를 세컨드 서버(second server)라고 한다. 퍼스트 서버는 오른쪽에 위치하고 단식 경기와 같이 0점이나 득점한 점수가 짝수일 경우에는 오른쪽에 위치하고 홀수일 경우에는 왼쪽에 위치한다. 세컨드 서버는 오른쪽 서버가 서브할 때 왼쪽에 위치하고 0점이나 득점한 점수가 짝수일 경우에는 왼쪽에 위치하고 홀수일 경우에는 오른쪽에 위치한다.서버가 오른쪽에서 서브를 하여 득점을 하는 경우에는 왼쪽으로 넘어가 다시 서브를 하지만 리시버들은 리시버의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 또한 리시버 쪽이 서브권을 넘겨받아 서브를 할 경우 퍼스트 서버가 오른쪽에서 서브를 넣어 점수를 얻었을 경우에는 왼쪽에서 다시 서브를 하며 점수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세컨트 서버에게 서브권이 넘어가고 왼쪽에 위치하고 있던 세컨드 서버는 위치를 변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브를 넣게 된다. 이때 서버에서 리시버가 된 상대편은 리시버의 위치를 바꾸지 않는다.3) 득점과 반칙1) 서브(Serve)할 때의 반칙사항배트민턴만큼 서브에 있어서 엄격한 룰이 많은 종목도 없을 것이다. 라켓의 각도는 그립보다 라켓의 면이 아래로 오지 않으면 안되고, 셔틀을 치는 위치는 서버의 허리부분보다 아래이어야 한다. 또한 다리를 질질 끌거나 바닥에서 떼면 안된다. 이렇듯 까다로운 사항들이 많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Over Waist서비스가 타구되는 순간 셔틀콕의 일부가 서버의 허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Over Hand서비스가 맞는 순간에 라켓 헤드 전체가 라켓을 쥐고 있는 손보다도 분명하게 아래 방향이 아닌 것Foot Fault서비스 할 때 서버 및 리시버의 양발의 일부가 코트 면에 정지하고 있지 않은 것Line Cross서비스 할 때에 서버나 리시버의 발이 라인을 밟거나 넘어가는 것Out서브한 셔틀콕이 바르게 리시브 코트에 들어가지 않는 것. 그러나 셔틀콕이 리시브 코트 라인 위에 떨어지거나 네트에 닿아서 리시브 코트에 떨어진 경우는 '인(In)'이다Balk서비스할 때에 서버 또는 리시버가 의식적으로 상대를 현혹시키는 듯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비스 하려고 앞으로 내민 라켓을 도중에서 멈추는 행위등이다2) 경기 중의 반칙사항Out셔틀콕이 상대 코트 안으로 바르게 되받아 쳐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즉 셔틀콕이 상대 코트의 바깥에 떨어지거나 네트의 밑을 통과한 경우 등이다Over the net라켓이나 신체의 일부, 또는 전부가 네트를 넘어서 상대의 코트로 나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