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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스탄티누스 대제[1] 평가C아쉬워요
    콘스탄티누스 대제(Roman emperor constantine the Great)는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이며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의 황제로서, 3세기에 걸쳐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받던 초기 기독교 교회를 공인하고,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그의 제위 시 기독교는 로마의 주요 종교로 부상했고, 동방 그리스 정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성인으로 받들고 있었다. 교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4세기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서로 다른 평가를 받았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이다. 그는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313년)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장려함으로써 박해받던 교회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였다. 반면에 그는 많은 비판의 실마리도 제공한다. 곧 콘스탄티누스의 전환과 더불어 교회는 신약성서의 규범들을 상실하고 교회 본질의 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285년 나이수스(오늘날: 불가리아의 니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이고 어머니는 하층민 출신인 헬레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어렸을 때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실에서 자랐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4분령으로 나누었을 때,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서방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그가 죽자마자 군인들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요크에서 부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서방에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막센티우스와 벌인 권력투쟁에서 자신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믿음의 대상을 바꾼다. 그러나 이때도 그는 과거의 제신을 숭배하였으며, 하나의 제국, 한 명의 황제, 한 분의 하느님, 일치된 국가의 제신, 곧 일치라는 제국의 근본이념은 버리지 않았다. 다만 과거의 제신이 있던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신이 들어섰을 뿐이었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어진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주일미사를 국법으로 정하였다(321년). 또한 바티칸 언덕 위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베들레헴의 성탄성당,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등에 여러 교회를 짓거나 기초공사를 하였다. 324년 리키니우스와 싸워 이긴 뒤 일인통치자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한 분의 하느님과 교회의 은혜로 제국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일치된 제국으로 번영을 이루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이전의 황제들이 제신의 대리인이었듯이,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그리스도교 신의 대리인으로서 정치적?종교적 일치의 지도자였다. 따라서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공동의 주교’라고 불렀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교회 밖의 직무, 곧 ‘외적 영역에 관한 주교’라고 불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대사제장’이라고도 불렸다. 이 칭호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우호적인 황제들이 지니던 옛 칭호와 같다. 황제가 국민의 정치적?종교적 안녕을 배려하는 것은 통치자의 권리이자 의무였으며, 그의 종교 이념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우스 논쟁은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정치적/종교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신성 제국의 일치를 위태롭게 하는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에 이 논쟁을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서로 다른 신학을 주장하는 종파의 철학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논쟁이 확산되면서 국가의 분열에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하여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첫 번째 전 세계 교회회의인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소집하고 주재하였으며,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동일본질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신학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공의회는 주교들의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을 얻어 공의회 신경을 결정하였고, 황제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세 명의 주교를 추방하였다. 논쟁은 이 결정으로 그치지 않았으며 콘스탄티누스의 뜻대로 끝나지도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논쟁이 수그어맞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337년 5월 22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임종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니코메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비판은 전환 자체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이미 도나투스 운동의 지도자인 도나투스는 이 전환이 일어난 몇 년 뒤 황제의 사절을 만나 “황제가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말하였으며,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는(439년 이후 사망) 콘스탄티누스 이후 참된 그리스도교가 비대하게 발전하였다고 한탄하였다. 이밖에 도 히에로니무스, 단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와 인문주의에서 계몽주의 시대까지의 많은 역사가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은 이들이 이를 비판하였다. 그는 종교적 확신에 따라 교회의 위대한 구원자가 되었고, 이로써 동방에서 성인처럼 그리고 열세 번째 사도로서 존경을 받지만, 네로나 회교국 군주와 같은 잔인한 인물이었다. 곧 그는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폭력자였다. 또한 그는 맨 먼저 십자가가 아니라, 아폴로와 동일시되는 태양신을 믿었다. 그의 개종은 객관적으로 고찰하면,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회개를 통한 개종이 아니라 단순히 국가의 정책에 따라 제신숭배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으로 믿음의 대상을 바꾼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임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리우스파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회의 정통신앙이 아니라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명백히 단죄된,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설을 고백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그의 신앙, 개인적?도덕적 태도는, 그가 곧바로 그리고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황제의 이상형이 되었기 때문에 위험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교회에 관한 콘스탄티누스 전환은 인물평보다 더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대사제장(Pontifex M『ximus)의 기능은 예로부터 로마 황제에게 중요한 정치적 과제였으며, 이제 콘스탄티누스가 넘겨받았다. 그는 교회에 특권을 부여하였고, 이에 대해 교회는 열광적으로 감사하면서 완전한 ‘샤를 대제’를 뜻하는 이 이름은 독일에서는 ‘카를 대제(Karl Magnus)’로 불리고, 그의 생전에는 라틴어로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로 표기되었다. 영어에서는 보통 프랑스를 따라 샤를마뉴라고 부르지만, 영어식으로 풀어서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라고도 한다. 그만큼 그의 명성과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전 유럽에 두루 걸쳐 있다. 샤를마뉴의 증조할아버지인 피핀(헤르스탈의 피핀)은 메로빙거 프랑크 왕국의 동부에 해당하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가 되었다. 그는 같은 프랑크 왕국 소속이면서도 아우스트라시아와 경쟁하던 서쪽의 네우스트리아를 격파하고 그 땅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으며, 부르군트마저 그렇게 함으로써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로 권력을 잡았다. 그의 아들 샤를 마르텔은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침으로써 “유럽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메로빙 왕국에서 카롤링거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그리고 샤를 마르텔의 아들이자 샤를마뉴의 아버지인 피핀은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프랑크 왕이 됨으로써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샤를마뉴는 피핀과 베르트라 왕비 사이의 장남으로 742년에 태어났다. 그는 예리하고 큰 눈에 짧고 굵은 목을 가졌고, 성인이 되었을 때 키는 190센티미터를 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전사의 위풍을 가졌다는 말인데, 다만 목소리만은 어울리지 않게 높고 가늘었다고 한다. 성격은 쾌활하고 낙천적이었으며,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그린 아인하르트에 따르면 “당대의 그 어떤 지배자보다도 유능하고 출중했다. 무엇이든 한번 손댄 일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보았으며, 궁지에 처해서도 절망하지 않고, 행운 앞에서도 교만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왕족들의 생활방식이 그랬던지, 고귀한 신분으로 자랐음에도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고 한다.피핀이 새로운 프랑크 왕이 되고 17년 만에 아키텐과 전쟁을 벌이다 죽자, 샤를마뉴는 그를 계승한다(768년). 그런데 몇 안 되는 경우로서 불의의 습격에 롤랑을 비롯한 명장들을 잃기도 했다(778년). 이 이야기는 후일 ‘롤랑이 이슬람군과 벌인 영웅적인 전투’로 각색되어, 라는 중세 기사도 문학의 걸작을 낳았다.한편 샤를마뉴의 전쟁에는 768년의 롬바르드 전쟁과 787년의 베네벤토 공략, 그리고 800년의 로마 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모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벌인 경우였고, 샤를마뉴는 그 때마다 로마를 방문해 교황에게 예우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의 손으로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서로마 황제’의 황제관이 샤를마뉴의 머리에 씌워졌다. 이는 프랑크와 로마 교회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으로써 성사된 일이었다. 샤를마뉴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반란을 억누르기에 무력만으로는 한계를 느꼈으며, 따라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한편 로마 교회는 726년에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내리고 로마교황에게도 교회 안팎의 모든 성화상을 없애라고 지시하자 이를 거부함으로써 비잔틴제국과 등진 처지였다. 샤를마뉴처럼 한 국가의 정점에 있는 사람도 글을 모를 정도였던 당시의 서유럽 사정상, 예수나 성인들의 그림이 없이는 교회가 유지되기 힘들었으므로 이를 우상숭배라며 무조건 파괴하라는 비잔틴 황제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정치적 고립을 가져왔다. 비잔틴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를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으며, 로마 교회 내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비잔틴 계열의 성직자들에게도 음모를 꾸미게 했다. 그리하여 역대 교황은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국의 힘을 빌리려 해왔으며,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그 결정판이었다. 옛 로마의 전통과는 전혀 무관한 “프랑크 야만족”이 서로마 황제로 나선 것에 비잔틴 황제 니케포루스는 격분했는데, 샤를마뉴는 되도록 비잔틴과 충돌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무마하는 방침을 취했다. 그래서 비잔틴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항상 스맞는다.
    인문/어학| 2012.09.22| 6페이지| 1,000원| 조회(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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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무운동1
    ◎ 목 차 ◎1...............[머리말]2...............[양무운동의 배경,전개 및 추진]3...............[양무운동의 실패]4...............[양무운동의 평가와 영향]5...............[맺음말]6...............[참고문헌]머리말한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양무운동을 바라보는 시각도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서양식 무기의 우수성을 실감한 증국번, 리홍장, 좌종당 등의 양무파의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청조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서양의 물질문명을 도입하려고 했다는 시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열강의 중국침략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열강과의 타협을 통해 국내의 반란진압을 우선시한 행위였다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시각은 양무운동이 청조의 전통과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에 기여했다는 시각이다. 이는 양무운동의 보수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양무운동이 여전히 전통적인 체제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시각이다. 이것은 서구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각이며, 양무운동이 중국 전통의 유교주의적인 틀에서 실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양무운동이 변법운동과 그 이후의 혁명운동과 연관지어,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보는 입장이다. 양무운동이 근대화를 추구했던 움직임으로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무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외국세력과의 결탁으로 태평천국의 진압에 앞장선 이홍장을 간신으로 폄하하는 분위기도 누그러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양무운동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하여 레포트를 시작한다.Ⅰ. 양무운동의 배경중국은 아편전쟁과 같은 서양 열강과의 전투를 치러왔지만 아직 서양에 대한 이해가 미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특히 제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 시기에 받은 서양에 대한 충격은 정말 컸다. 제2차 아편 경제적 발전을 위한 기간 산업 분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국방에 관련된 사업으로 전선과 철도의 건설이 있었고, 방직업과 광업에 주의하였다. 석탄 채굴을 위하여 개평광무국이, 금을 채굴하기 위하여 막하금광이 세워지고, 채굴된 광물을 운반하기 위하여 당산-서각장 사이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그리고 근대적인 방직 공장으로 상해기기직포국이 설립되고, 근대 기업으로 윤선초상국이 상해에 설립되었으며, 천진에 전보총국이 세워졌다. 제 3기(1885-1894)에는 구부의 단계로 부국을 중시하여 민영 공장이 여러 곳에 설립되어 경공업이 크게 발전되고, 서양 열강에게 넘겨 주었던 이권을 회수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Ⅲ. 양무운동의 추진1. 군수공업 육성양무운동에서 자강정책의 일환으로써 가장 먼저 추진된 개혁정책은 바로 ‘군대의 현대화’였다. 로이드 E. 이스트만은 중국이 최초로 받아들인 근대 산업이 군수공업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중국인은 서구의 산업모델을 모방하는 데 느렸다.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조차 그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굳게 믿었고 외국의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비난했다. 그들은 쭈그리고 앉아 외국과의 구역질나는 거래가 빨리 없어지길 희망했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1860년 유럽인은 근대적 무기를 사용해 북경을 점령하고, 圓明園을 불태웠으며, 황제는 남만주에 있는 熱河로 피난해야 했다. 또 태평천국의 난 때 우드(Frederick Townsend Word)나 고든(Charles Gordon)이 이끄는 常勝軍은 서구인이 지닌 군사기술의 우위를 더욱 보여주었다. 그것은 중국 정부군이 서구의 총으로 무장한다면 국내 반란자를 더 잘 상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인이 서구의 산업혁명에 최초로 흥미를 가진 것은 군사적인 효과 때문이었다.”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조의 관료들에게 가장 인상을 깊게 주었던 것은 서양식 총포류의 강력한 성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양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전선에서 필요한 각종 화약과 총탄, 총포류 시도로 영국의 군함을 구입하지만 영국과의 갈등으로 빚어진 레이-오스본함대사건과 이홍장, 증국번, 증국전 등의 강력한 반대로 취소되었다. 이후 청조는 직접 군함을 건조하는 정책을 취했다. 1866년 좌종당의 건의로 복주선정국을 통해 군함 건조를 시작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군함은 당장 연안 경비에 투입하였다. 복주선정국 외에도 강남제조총국도 군함을 건조하여 경비에 투입했지만, 조선 경비의 과다한 지출과 비효율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1874년 전강소순무 정일창이 북양, 남양, 동양의 해군 창설을 제안했다. 하지만 일부 관료들의 반발로 1875년 총리기무아문은 관세와 이금에서 400만 냥을 조달하여, 북양해군을 먼저 건설하고 3개 함대로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이홍장은 이러한 결정을 바탕으로 북양함대의 창설에 착수했다. 또 해군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1876년 복주선정국의 학생들을 유학을 보냈고, 1880년 천진에 수사학당을 설립했다. 그리하여 1884년에는 군함 17척의 남양함대, 15척의 북양함대, 11척의 복건함대를 주력으로 하는 해군 체제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청조의 근대적 해군은 그 규모와 달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해군 건설 자금의 대부분이 서태후의 이화원 건축 자금으로 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해군의 규모 확장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장비 외에도 지휘계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3개의 함대는 각각 독자적 지휘계통의 지휘를 받고 있어 통일된 지휘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 즉 남양함대는 상군계에 의해, 북양함대는 회군계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던 것이다. 청?불전쟁 때 복건함대를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지원하지 않은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게다가 훈련도 충실하지 못했고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으며 함대의 장비다 각각 다른 나라로부터 구입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규격마저도 달랐다. 그러므로 해군이 보유한 군함들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겉과 속이 다른 상태였다.3. 관독상판 정책의 추진과 성과양무파가 군수공업을 일으키면서 가장 먼저 직면한 어려움은 자금과 원료해 개평탄광이 정식으로 생산을 개시했다. 개평 탄광의 석탄은 질이 좋으면서도 값이 싸서 외국산에 비해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고, 개평광무국의 경영 상태도 다른 관독상판 기업에 비해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업들은 경영 부진과 근대적인 공업의 체계적 발전 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체계적인 광공업의 육성은 18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장지동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한양제철소에서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4. 철도 부설청조에서 철도를 받아들인 것은 쉽지 않았다. 1865년 영국인이 최초로 북경 근교에 500m정도의 레일을 깔고 기차를 시운전한 것이 최초로 건설된 철도이지만 바로 철거당했다. 그리고 1875년 영국이 건설한 오송철도는 개통 5개월 만에 철거당했다. 철도 부설에 대한 당시 청조 내 분위기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 배경에는 군사적, 경제적, 사상적 인 고려가 있었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1880년, 이홍장은 당시 탄광이 개발 중이던 당산에서 천진까지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이 철도는 개평광무국이 채굴한 석탄을 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철도 부설에 대한 청조 관료들의 생각은 온통 풍수에 쏠려 있었다. 그래서 철도 부설이 풍수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 때문에 극력 반대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서서히 철도의 건설은 이루어졌고 철도의 뛰어난 실용성은 보수파의 비판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5.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과 교육의 보급1861년 총리기무아문의 설립을 계기로 서양과의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열림에 따라 이에 필요한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1862년 총리기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동문관이 북경에 설립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만주 귀족의 어린 자제들을 선발하여 교육시켰다. 북경의 동문관 외에도 1863년 상해에 광방언관이, 1864년에 광주에 광주동문관이 각각 설립되었다. 1866년에는 공친왕이 서양인들은 기계, 군수품의 제조에서부터 선박 운행, 군대 수송에 이르기까지 천문산학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야*************88918821000(1881)3000(1889)600(1887)2000(1891)1000(1890)관판관독상판관독상판관독상판관판심보탁이홍장이종대이홍장장지동제철한양제철한양18903000(1891)관판장지동면방직상해기기직포국호북직포관국상해무창189018924000(1893)3000(1893)관독상판관판정관응장지동해운윤선초상국상해1872-관독상판이홍장 성선회Ⅳ. 양무운동의 실패1880년 프랑스가 하노이를 점령하여 베트남에 새로운 조계를 설치하기 위해 중국에 압력을 넣기 시작하면서 양무운동에 어두운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홍장은 새로 발족한 중국 해군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굴욕적일지라도 프랑스와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고 프랑스 함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이홍장의 주장은 현실이 되었다. 전투가 개시 된지 얼마 못 지나 중국 함대의 모든 배가 침몰하고 프랑스에 패배한 것이다. 1894년에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중국과 일본은 조선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곧이어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그 해 10월 일본은 압록강을 건넜고 11월에는 여순항을 점령했다. 9월에 한 전투로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해 있던 북양함대는 1895년 1월 일본군에 의해 또다시 참패를 당했다. 그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에게는 재앙에 가까웠다. 청은 일본에 2억 냥의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고 4개 항구의 개항을 약속했고 일본에 대만, 만주 남부의 요동을 영구히 할양했다. 비록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반대로 요동에 대한 권리를 일본이 포기하기는 했지만 다른 조항들은 인준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는 자강기간의 밝은 미래와는 반대되는 결말이었다.Ⅴ. 양무운동의 평가와 영향머리말에서 양무운동에 대한 시각을 세 가지 정도 들었다. 그 세 가지 시각에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고 긍정적인 시각도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더 우세했다. 대부다.
    인문/어학| 2012.09.22| 10페이지| 1,000원| 조회(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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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개론이라는 강의를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배우면서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영상물을 이용한 역사공부 보다 좋은것은 없다고.' 하시면서 강의시간에 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셨다. 영화를 보기 보단 역사적인 전개과정 사건이 일어나는 발단과정만 공부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처음에 발리안 이라는 주인공의 아내가 자살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발리안과 발리안의 아내 사이의 아들이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가 자살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살을 하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머무른다는 원칙이 있다. 그래서 아내가 죽고 묻는 과정에서 목을 쳐 몸과 머리를 따로 묻었다. 아내가 죽고 며칠이지나자 발리안의 아버지라는 고프리가 찾아온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 부상당한 채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온 고프리는 신분의 격차로 거두지 못했던 유일한 아들인 발리안이 함께 십자군 기사가 되어 싸우길 바라고, 대장장이였던 발리안은 아내의 죄를 없애고 천국에 보내기 위해 십자군 기사이며 영주였던 아버지인 고프리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많은 검술과 훈련들을 아버지에게 배우면서 발리안은 점점 기사가 되어간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발리안은 자신이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발리안에게 지금 이 시대에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며 위로하는 장면이 정말 인상 깊었으며 200여년간 전쟁의 참혹성을 설명해주는 듯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고프리는 죽음을 맞이하고 발리안은 고프리를 대신해 영주의 후계자로 이어받는다. 왕과 백성을 지켜달라던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과 함께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예루살렘으로 온 발리안은 국왕 볼드윈 4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옛날 아버지가 다스리던 척박한 땅을 기적의 땅으로 바꾸어 놓는다. 땅을 파서 물을 샘솟게 함으로써 발리안의 땅은 곧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 또한 뛰어난 검술과 용맹함으로 국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고프리를 포함한 소수의 기사들의 도움으로 이슬람의 살라딘과 휴전협정을 맺으며 평화로웠던 예루살렘은 볼드윈 왕의 수명이 다해가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하여 왔을때에 발리안이 백성들을 도망 갈 시간을 벌기 위해 성 밖 수비를 했었다. 그때 국왕의 신임을 얻게 된다. 문둥병이 있었던 볼드윈은 발리안에게 신은 너의 편이라고 말하고 발리안은 신은 나를 버렸다고 국왕에게 말했지만 볼드윈은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 장면만 보더라도 발리안이 국왕에게 얼마나 신임을 얻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국왕 볼드윈4세가 죽고 나자 국왕의 여동생이었던 실비아의 남편인 교회 기사단의 가이 드 루시안 이 왕위를 올랐다. 기독교인이었던 가이 드 루시안은 선대의 협정을 깨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슬람인 들을 학살하면서 불안했던 휴전협정은 한 순간에 전쟁으로 벌어졌다. 살라딘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다시 쳐들어 왔고 한순간에 예루살렘은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 해야 했다. 발리안은 남은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단단히 하고 기사가 아닌 미천한 신분도 기사로 받아들이며 살라딘의 모든 공격을 다 막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영화가 지루하기도 했는데 살라딘과 발리안의 전투에서는 긴장감있는 전개가 펼쳐졌다. 발리안이 백성을 위한 마음 하나로 살라딘의 20만 군대를 막아내는 영웅적인 모습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특히 방어하고 기사들의 사기를 충전하는 장면은 훌륭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적은 숫자로도 방어하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고 발리안의 군대는 순식간에 단합하여 자신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잔인한 몸부림을 쳤고 결국 양쪽 다 많은 피해를 남긴 채 살라딘은 협상을 요구했고 기독교인들을 무사히 살려서 보내주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넘기고 이 전투는 끝이 난다. 마지막 협상에서 발리안이 살리딘에게 예루살렘이 뭐냐고 물었는데 살라딘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는 내 모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종교로 인한 이 지독한 전쟁은 허무함만 남긴 채 200년간의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발리안은 볼드윈의 여동생인 실비아와 함께 다시 대장장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행복한 생활을 하다 영화는 끝이 난다. 200년간의 십자군 전쟁은 정말 역사적으로 가장 혹독한 전투처럼 보인다. 제 1차 십자군 원정으로 기독교도들에게 탈환된 예루살렘은 반세기 넘게 기독교 왕자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었다. 수업시간에 공부하기를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인 1184년에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종교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1096년에 시작되었으며 유럽의 암흑기 시대였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족의 대 이동, 가톨릭교회의 분열, 이슬람 문명의 서유럽 진출 등 많은 사건으로 서유럽 세계가 위축되어 갈 때쯤 당시의 왕은 자신의 직할 영지를 다스릴 뿐 그 영주들에게 직접적인 힘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이 로마의 교황청이고 교황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황제 위에 군림한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시대가 수업시간에 배운 교황황제주의이다. 교황은 카노사에서 황제를 굴복시킨 뒤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교황권이 황제권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 이것은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하에 더욱더 강력해진 교권의 힘을 전 유럽에 자랑해 보이려 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열망과 함께 유럽세계전역에서 십자군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지원자들이 몰려왔다. 영화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의 뜻이라고 이 전쟁을 일으키며 전 유럽의 하나된 마음을 가져왔다. 하나된 유럽이라는 부분과 십자군 전쟁 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한 상업 및 교역은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200년간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역사에 수많은 상처를 남겼으며 교황권이 쇠퇴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영화 명대사 중 'nothing or everything' 아무것도 아니지 아니 모든것이기도 하지.. 이말도 마음에 좋았지만 영화를 볼 때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대사는 고프리가 죽기 직전에 아들 바리안에게 기사 작위를 줄 때, “Safeguard the helpless, and do no wrong. That is your oath. (약자를 보호하고, 옳은 일을 행하라. 이것이 그대의 서약이노라.)“ 라는 대사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러한 멋진 대사를 보면서 생각한 부분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소통인거 같다. 수업시간에 배운 부분을 생각하며 영화를 시청하니 한결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었다. 앞으로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영화라는 새로운 부분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영화를 통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독후감/창작| 2012.06.04| 2페이지| 1,000원| 조회(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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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크로드문명기행
    책을 처음 펴본 결과 컬러풀한 사진들로 읽는데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크로드 전문가가 책으로 소개하는 실크로드를 읽고 나니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수일 선생이 ‘실크로드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신문에 1년 동안 연재한 글을 묶은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내용은 2005년 7월, 서울을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 중국 북부의 톈산산맥 밑으로 난 오아시스로를 지나고,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갔다가 돌아온 여정이다.실크로드 여행기는 이미 여러 권 나와 있지만,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실크로드의 세계적 권위자가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오간 문물의 교류 상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느낌은 책과 함께 오아시스로를 따라가면서 역사의 흔적들을 짚어보니 저자의 여행은 상당히 고된 여정이었을거라 짐작이 되었다. 그냥 가도 힘든 사막을 가장 더운 7~8월에 횡단하다니.. 저자는 이렇게 힘든 길을 택한 이유가 이번 여정을 통해 오아시스로의 참 뜻을 찾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책을 읽은 후 과연 이 참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아시스로에 담긴 참뜻에 대해 저자는 책 속에서 오아시스로 위에서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우리의 위상을 확인하려 했고, 동서 간에 오간 숱한 문물의 교류 흔적을 더듬으려 했으며, 또한 인류가 창출한 위대한 문명들의 슬기를 체험하려 했다고 한다. 오아시스로에 담긴 한국의 위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고대시절에도 작은 우리영토에만 국한되었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혜초 스님이나 여러 고승들이 남긴 자취들을 중국의 영토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유명한 탈라스 전투를 이끌었던 당나라의 장군이었던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중국의 베이징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안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지나 사막을 거쳐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이스탄불에 이르기까지 각 장소에서 한국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였고 실제로도 오아시스로의 각 지. 이곳에서부터 진정한 오아시스로의 답사가 시작되어 이스탄불까지의 답사가 시작된다. 책에는 많은 지역들과 유적지가 소개되었지만 기억에 남는 몇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언급되기도 하였고 관심이 갔던 것으로 혜초의 서역기행이었다. 어찌면 답사역시 혜초의 흔적을 따라가기도 하였는데 막고굴에서 발견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프랑스의 학자에게 발견되어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유폐되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혜초 스님에 대한 연구가 다른 나라보다도 뒤쳐져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책에서 살펴본 신라 고승 혜초의 서역기행을 살펴보면 장장 4년 동안 천축에 다다른 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토화라를 거쳐 현재의 이란지역인 파사국, 그리고 지금의 아랍지역인 대식까지도 역방했다고 하고 있다. 저자는 혜초 스님을 한국의 첫 세계인이며 문명교류의 거룩한 선구자라고 칭송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위대한 기록이 담긴 왕오천축국전을 돌려달라고 하지조차 못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새삼 우리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수탈당한 많은 우리의 고서들과 유물들과 함께 앞으로 미래의 우리나라가 되찾아 와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우리나라에 있지 않은 것들이라 해도 우리나라의 역사에 중요한 흔적들을 우리가 아끼고 보전해야하지 않을까? 실례로 우리역사의 가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했던 광개토대왕비가 중국 영토 내에서 허술한 관리 하에 방치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민족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라던지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일들도 다 우리의 안일한 대처와 잘못된 외교정책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미래의 한국이 세계속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올바르게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책 속에서도 투루판의 베제클리트 석굴에서 나타난 문명파괴행위들은 다시는 자행되서는 안될 일들이다. 이 본연의 유대와 이음길이 무시당해 왔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다음은 비단길의 동단은 중국일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실크로드를 유럽으로부터 중국까지의 길로 한정시켜 왔다. 즉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인 초원로와 오아시스 육로 및 해로는 각기 유럽에서 시발해 중국의 화북(초원로)과 장안(현 시안, 육로), 동남해안(해로)에서 멎었다는 것이다. 이 서구문명 중심주의적 발상대로라면 우리는 실크로드와 무관하며, 따라서 문명교류에서 버림받은 ‘기아’가 되고 만다. 한때나마 우리가 ‘주변문명’의 찬밥신세를 강요당하던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대목이다. 그 울분을 삭이는 길은 한반도까지 뻗은 실크로드를 원상 복원하는 것이다. 문제의 요체는 중국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이 원래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밝혀 자고로 한반도가 실크로드의 동단이라는 위상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오아시스 육로의 한반도 연장을 고증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와 중국간의 육로 연결이다. 고조선시대 한·중간의 육로 교통에 관한 문헌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출토유물의 분포대를 잇는 방법으로 당시의 육로를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중국 전국시대의 연(燕)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다. 그간 명도전은 연나라의 강역이던 중국 하북성은 물론, 고조선 영역이던 랴오닝성과 한반도의 북부지대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화폐로서의 명도전은 틀림없이 교역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그 출토지는 교역 장소였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교역 장소들은 교통로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명도전의 출토지들을 연결해 보면, 연나라의 도읍 계(현 북경 서남쪽 대흥현)ㅡ승덕(허베이성)ㅡ요동반도 연안ㅡ통구(압록강 중류)ㅡ동황성(현 강계)ㅡ영변(청천강 상류)ㅡ영원(대동강 상류)ㅡ평양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일단 ‘명도전로’로 불러 본다. 이러한 생각다음 한반도 연장로를 복원해야 한다. 고조선시대를 이어 3국 시대에는 한반도 북반부와, 실크로드 오아시스 육로의 동단 금성에서 그 서단 로마까지의 거리는 약 3만6840리(약 14,750km)로 추산된다. 하루 100리를 걷는다면, 꼭 1년이 걸려야 이 긴 여정을 주파할 수가 있다.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선상에서 다음으로 제기되는 것은 중국 동남해안과의 해로 이음이다. 고대 한·중 해로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 그리고 양국의 변화무쌍한 정세와 상호관계의 변화에 따라 물길과 기능을 달리하면서 실크로드 해로의 동단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고로 두 나라의 해안을 이어주는 해로는 크게 연해로(우회로)와 횡단로(직항로)의 두 갈래가 있었다. 연해로에는 한반도 서남해 연안에서 출항해 중국 요동반도 남안을 따라 서진하다가 노철산에서 발해만을 지나 산동반도에 이르는 북방 연해로와, 거기서 계속 남하해 양자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남해안으로 이어지는 남방 연해로가 있었다. 일찍이 은나라 때부터 이 연해로를 이용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제나라의 공자는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현자들이 사는 동이(고조선)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 때 불로초를 구하려 떠난 도사 서복(徐福) 선단도 이 연해로를 따라 제주도까지 왔으며, 한무제는 7천명 수군을 이 해로에 투입시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한 바 있다. 수·당대 몇 차례의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수군의 도항로도 바로 이 연해로였다. 3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풍랑과 장기 항해를 감당할 수 있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 동남해안을 직접 연결하는 횡단로가 개척되었다. 이 뱃길도 두 갈래인데, 하나는 경기도 덕물도를 비롯한 한반도 서해안에서 산동반도 해안으로 직항하는 북방 횡단로다. 이 길은 고구려에 의해 북방을 통하는 연해로가 막혀버리자 백제가 북위를 비롯한 중국 북방 제국과 통교하기 위해 처음 개척했으며, 뒤를 이어 신라도 이 길을 이용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방해로 이용이 여의치는 않았다.횡단로의 다른 한 갈래는 북방 해역보다 더 넓고 풍랑도 더 사나운 남방 해역을 넘신과 승려들이 오가고, 물품이 교역되었으며, 문화 교류가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서역과 남방의 문물이 이 두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며, 이웃인 일본은 이 길을 거쳐서야 중국과 통교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제반 사실은 이 바닷길이야말로 한·중 두 나라간의 교류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명실상부한 실크로드 해로 동단으로서의 기능과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실증해준다.마지막으로 세계로 가는 이음길을 밝히는 데서 남은 과제는 북방의 초원로를 원상대로 한반도에 이어주는 일이다. 스키타이와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의 영향이 역력하며, 초원지대로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내왕도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한반도가 일찍부터 그들과 교류하였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교류의 통로가 바로 초원로다. 그러나 관련 기록이나 유물이 별로 없는 데다 연구마저 일천해 우리는 아직 이 길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스로 중국쪽 사서에서 그 해결의 단서를 찾아보게 된다. 고구려와 그 뒤를 이은 발해의 서변 출구인 영주는 서역행 육로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여기로부터 화북과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로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관련 기록을 참조하면, 초원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갈래의 길로 한반도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 한 길은 영주ㅡ평성로다. 에는 북위의 도무제로부터 태무제에 이르는 45년간 수도 평성(平城:현 산시성 대동)에서 화룡(和龍:영주)까지 7차례에 걸친 왕의 순유나 동정에 관한 기록과 더불어 그 노정이 제시되어 있다. 이 길은 평성에서 유주와 몽골의 오르혼강을 남북으로 잇는 실크로드 5대 지선의 하나인 마역로(馬易路)와 합쳐 북방 몽골초원을 관통하는 초원로로 이어진다. 다른 한 길은 영주ㅡ실위로다. 에 따르면, 영주에서 서북행으로 실위(室韋)국의 구륜박(현 호륜지)에 이르는 이 초원로는 몽골의 동부 초원로에 연결된다. 이렇게 영주로부터 이어져 간 두 초원로는 실크로드 초원로의 동단으로서 고대 한반도와 북방 유목 기마민족간의다.
    인문/어학| 2012.06.04| 7페이지| 1,000원| 조회(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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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내가 알고 있던 안철수라는 강호동과 쇼프로에서 토크쇼를 한 사람으로 바이러스 백신 업계에서 1인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근 서울시장재보궐선거 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으로 엄청난 이슈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러한 최근 바람이 일었던 안철수 신드롬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대중의 소망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또한 이러한 신드롬으로 인해 다시금 베스트셀러 순위 10위안에 올라올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예전에 무릎팍도사 라는 tv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난다. 안철수교수님은 이 프로그램에서 그동안의 개인사와 회사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는데 그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나를 반성하게하고 마음에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또 한번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준 사건이 최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한 부분이다. 대권을 향한 정치적 목적이든 순수한 목적에서의 환원이든 간에 1500억이라는 거액을 환원 한다는 자체는 사람으로서 상당히 어려운 결정일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마땅히 존경받고 환영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한국재벌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외국의 부호들처럼 기부문화가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 볼 수 있었던 이슈였다. 이제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야기 해보자. 이 책의 내용은 예전 무릎팍도사에서 본 게스트 안철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책을 읽고 나면 그가 어떤 원칙과 소신을 지니고 살고 있으며 어떠한 삶을 추구하는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독서의 중요성은 우리 사범대학생들에게는 더욱더 중요하다. 임용고시 2차에서 논술시험을 치기에 평소 독서의 습관을 가져 이 부분에 대해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책을 읽으면서 도움이 되는 유익한 내용이 많았지만 세 가지 정도만 마음에 담았다.그 첫 번째가 자신만의 원칙과 소신을 갖는 것. 이를 위해선 다방면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는 깊은 사고를 통해 나온 것으로 쉽게 흔들려선 안된다. 그러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건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다. 무엇을 하든 초심을 버리지 말고 원칙과 소신으로 밀고 나가자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변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가장 반성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두 번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현대사회에선 특히 협동을 통한 성취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선 타인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변화의 속도라든지 질적, 양적인 변동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터넷의 보급, 확산에 기인하는 것 같다. 보편적인 상식에 의해 생각해 봐도 개인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넓히거나 타인에게 또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과 경험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특히 기업을 이끌어 가는 경영자에게는 사람을 보는 통찰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대학생이 내가 이 부분에서 배우고 키워나가야 할 부분은 말을 잘하는 부분도 있지만, 우선 말을 잘하기보다는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 들을 수 있는 자세를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남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보면 신뢰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부터 가지게 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말을 잘하기보다는 경청하는 자세부터 배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셋째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는 것. 모든 생명체와 이 세상을 포함한 우리의 삶은 불안정성을 근간으로 한다. 지금 당장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하여도 , 사람일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현실에 안주 하지 말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배움을 통해서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내가 추구하는 생활방향이기도하다.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선별하여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후감/창작| 2012.06.04| 2페이지| 1,000원| 조회(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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